<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육군 소장 카를 하우스호퍼 Karl Haushofer | |
이름 | Karl Ernst Haushofer 카를 에른스트 하우스호퍼 |
출생 | 1869년 8월 27일 바이에른 왕국 뮌헨 |
사망 | 1946년 3월 10일(향년 76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
복무 | 독일 제국군(1887년 ~ 1919년) |
최종 계급 | 소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
주요 서훈 | 푸르 르 메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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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지정학자.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 중 한 사람으로, 나치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인 레벤스라움의 주창자 중 하나이자 나치 정권 시절 외교, 군사 고문과 독일 국방군 참모를 역임하였다.2. 생애
1869년 바이에른 왕국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1887년 독일 제국의 제1야포연대에 입대하여 군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차례로 졸업하고, 1903년부터 같은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부임하였다.이후 1908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주재무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13년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서의 지위, 장래에 대한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듬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 참전하여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차 대전이 끝난 뒤 그는 뮌헨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지정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919년 하우스호퍼는 루돌프 헤스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를 통해 히틀러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히틀러는 '생존권을 잃은 독일인은 살아남기 위해 군사적으로 확장 정책을 진행해야 한다'라는 하우스호퍼의 사상에 흥미를 가지고 나치당의 정책에 이를 도입하였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자 하우스호퍼는 뮌헨 대학교의 정교수, 외교, 군사 고문, 그리고 독일군 군사참모를 역임하여 괴벨스와 더불어 나치의 실질적인 2인자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4년부터는 독일 학사원 총장을 맡는 동안 독일 주재 일본대사관의 주재무관이었던 오시마 히로시와 접촉하여 독일과 일본의 정치적 연합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1939년 폴란드 침공이 일어나고 1941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하우스호퍼는 '지정학적으로 독일은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결국 히틀러와 서서히 멀어지게 되었다. 이에 더해 아들 알브레히트가 히틀러에 저항하는 지하 운동을 펼치던 중 게슈타포에게 붙잡혀 처형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시간이 흘러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하우스호퍼는 다른 나치 간부들과 함께 1946년 연합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 선고가 유력해 보이자 옥중에서 아내와 함께 비소로 자살을 시도하였고, 비소를 먹었음에도 본인은 죽지 않았기에 다시 단검으로 할복을 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실제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치와 개전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긴 했지만 이것 자체만으로는 범죄라 하기 애매하며, 그 외에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도,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우스호퍼는 아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유죄 판결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