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FD9B2><colcolor=#000> 바이에른의 왕자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Prinz Leopold von Bayern | |||
이름 | 레오폴트 막시밀리안 요제프 마리아 아르눌프 폰 바이에른 (Leopold Maximilian Joseph Maria Arnulf von Bayern) | ||
출생 | 1846년 2월 9일 | ||
독일 연방 바이에른 왕국 뮌헨 | |||
사망 | 1930년 9월 28일 (향년 84세) | ||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뮌헨 | |||
배우자 |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 (1873년 결혼) | ||
자녀 | 엘리자베트 마리,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콘라트 | ||
아버지 | 바이에른의 섭정 루이트폴트 |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아우구스타 페르디난다 여대공 | ||
형제 | 루트비히 3세, 테레제, 아르눌프 | ||
종교 | 가톨릭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군사 경력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EFD9B2><colcolor=#000> 복무 | 바이에른 왕국군 (1861 ~ 1918년) 독일 제국군 (1871 ~ 1913년, 1915 ~ 1918년) |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
주요 참전 | 보오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대십자 철십자장 푸르 르 메리트 검붉은 독수리 훈장 대십자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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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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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오폴트는 바이에른의 왕자이자, 독일 제국의 군인이다. 최종 계급은 원수.2. 생애
2.1. 초기
바이에른 공작 레오폴트는 1846년 2월 9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이에른 왕국의 실권자가 될 루이트폴트였다.[1]2.2. 군생활
15세의 나이에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1861년 12월 28일에 소위로 임관되었다. 레오폴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는 키신겐과 로스브룬에서 포병을 지휘하였다. 이후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는 레오폴트는 제3 포병연대의 일원으로 싸웠다. 1870년 12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보불전쟁에서의 전과로 그는 철십자훈장 1급과 2급을 수훈받았으며, 다른 훈장들도 받았다. 이후 레오폴트는 자신의 아버지와 함께 빌헬름 1세의 즉위식에 참여하였다. 레오폴트는 영국과 아이슬란드를 여행하고 그 후에는 이집트, 콘스탄티노플, 시나이 반 도를 여행하면서 지식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1873년 4월 20일 비엔나에서 6촌이기도 한[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딸 오스트리아의 기젤라 여대공과 결혼했다. 이후 1905년 1월 1일에는 원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13년 약 50년의 군생활을 마쳤다.1907년의 레오폴트 |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그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다. 레오폴트는 1915년 4월 17일,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을 대신해 제 9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금세 바르샤바를 점령하였다. 그는 다시 훈장세례를 받았다. 이후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에서 해임당하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이 되자 그는 힌덴부르크의 후임으로 동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916년, 레오폴트는 프로이센의 원수로 진급하였다. 레오폴트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발트해까지 내려갔다. 이후 제9군의 사령관은 에리히 폰 팔켄하인으로 교체되었다.
▲1916년 폴란드에서 부대를 시찰하는 레오폴트. 뒤에는 막스 폰 파베크가 있다.
1917년 레오폴트는 케렌스키 공세에 참여하였다. 이후 레오폴트는 동부전선의 끝을 알리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를 서명하고 1일 뒤에는 대철십자훈장을 수훈받았다. 그는 폴란드 섭정왕국의 국왕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패전후 폴란드 섭정왕국은 멸망하였다.
2.3. 전후
이후 다시 은퇴하였으며 뮌헨에 살다가 혁명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였다. 도피한지 4개월 후에야 다시 뮌헨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사후 뮌헨의 미하엘 교회에 있는 콜롬바리움에 묻혔다.3. 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레오폴트 폰 바이에른 (Leopold von Bayern) | <colbgcolor=#fff3e4,#331c00> 루이트폴트 섭정왕자 (Luitpold von Bayern) | <colbgcolor=#ffffe4,#323300> 루트비히 1세 (Ludwig I) | |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 (Maximilian I Joseph)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아우구스타 빌헬미네 (Augusta Wilhelmine von Hessen-Darmstadt) | |||
작센알텐부르크의 테레제 (Therese von Saxe-Altenburg) | |||
작센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Friedrich von Saxe-Altenburg)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게오르기네[3] (Charlotte Georgine von Mecklenburg-Strelitz) | |||
아우구스타 페르디난다 (Augusta Ferdinanda von Österreich) | |||
레오폴도 2세 (Leopoldo II) | |||
페르디난도 3세 (Ferdinando III) |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루이사 (Luisa di Napoli e di Sicilia) | |||
작센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von Sachsen) | |||
작센의 막시밀리안 왕자[4] (prinz Maximilian von Sachsen) | |||
파르마의 카롤리나 공녀 (Carlolina di Parm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제프리트와 부텐하임 백작부인 엘리자베트 마리 (Elisabeth Marie, Countess of Seefried and Buttenheim) | 1874년 1월 8일 | 1957년 3월 4일 | 제프리트와 부텐하임 백작 오토 슬하 1남 4녀 |
2녀 | 오스트리아의 대공비 아우구스테 (Archduchess Auguste of Austria) | 1875년 4월 28일 | 1964년 6월 25일 | 오스트리아 대공 요제프 아우구스트 슬하 3남 3녀 |
1남 | 게오르크 왕자 (Prince Georg) | 1880년 4월 2일 | 1943년 5월 31일 | |
2남 | 콘라트 왕자 (Prince Konrad) | 1883년 11월 22일 | 1969년 9월 6일 | 사보이아제노바의 마리아 보나 공녀[6] 슬하 1남 1녀 |
[1] 당시 국왕이었던 오토를 대신하여 루이트폴트가 실권자가 되었다.[2] 아버지 루이트폴트의 고종사촌 엘리자베트 황후의 딸.[3]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카를 2세의 딸.[4]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의 5남이자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와 안톤 1세의 동생,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버지이다. 안톤 1세 사후에도 살아있었으나 아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위해 계승권을 포기했다.[5] 1913년 무효화[6] 카를로 알베르토의 차남 페르디난도 왕자의 손녀, 움베르토 1세의 왕비 마르게리타의 조카이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외사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