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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박중양 윤치호 이범익 이진호 한상룡 칙임 참의 고원훈 김관현 김명준 김사연 김연수 김영배 김영진 김우영 김윤정 김태석 김화준 박두영 박상준 서상훈 신석린 안종철 원덕상 유만겸 유진순 이겸제 이경식 이계한 이병길 이원보 장직상 장헌식 정교원 정란교† 정연기 진학문 최린 한규복 주임 참의 강이황 권중식 김경진 김동준 김병욱 김부원 김사연 김신석 김원근 김재환 김태집 노준영 민재기 박지근 박창하 박필병 방의석 서병조 손창식 송문화 신현구 양재창 원병희 위정학 이경식 이기찬 이승우 이신용 이영찬 이익화 이종덕 임창수 장용관 장윤식 장준영 장직상 전덕룡 조병상 조상옥 차남진 최윤 최승렬 최정묵 최준집 한익교 한정석 현준호 황종국 참의 김하섭 문명기 이승구
†- 재직 중 사망. |
조선총독부 중추원 주임 참의 선우순 鮮于筍 | |
<colbgcolor=#062861><colcolor=#fff> 본명 | 선우금순(鮮于金筍) |
출생 | 1891년 3월 24일 |
평안도 평양부 융덕면 육로동 (現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 |
사망 | 1933년 8월 8일 (향년 42세) |
본관 | 태원 선우씨 |
직업 | 언론인, 종교인, 공작원, 중추원 참의, 관료 |
가족 | 동생 선우갑[1] |
학력 |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법률과 / 졸업) 도시샤대학 (신학과 / 졸업) |
경력 | 평양신문 주필 기성교회 전도사 대동동지회 회장 조선총독부 중추원 주임 참의 |
비고 |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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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의 언론인,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2. 생애
1891년 3월 평안도 평양부 융덕면 육로동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서북학회 기관지 <서북학회월보>에 <국가의 개요>라는 글을 발표한 기록이 있는데 박은식, 이동휘 등과 함께 민족계몽운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31년에 나온 <조선신사록> 기록에 의하면 그는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하였다가 1910년 3월에 퇴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1910년 일본인이 창간한 평양신문의 주필 겸 편집부장을 지냈다고 한다. 그 해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고 1914년에는 일본의 도시샤대학에 나와 신학을 전공하여 전도사 수업을 받았다. 도시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한 선우순은 1915년 12월에 기성교회의 전도사가 되었고, 조선총독부 보호 아래 포교 활동을 하면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사업가로 활동하였다.
2.1. 친일 행적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조합교회 측에서는 대시국특별운동(對時局特別運動)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이때 선우순은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열린 강연회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서선(西鮮) 방면 책임자로서 ‘배역유세단(排逆遊說團)’을 만들어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지 말도록 종용하였고, 중추원의 지방유력자 모임에서 ‘조선독립불능론’을 강연하는 활동까지 행하였다. 조선총독부에 민심의 현황을 보고하고 향후 총독부의 수습책을 건의하는 밀정으로서의 활동도 병행했다.1920년에는 좀 더 선전적인 활동을 통해 독립사상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나일봉, 김흥건 등과 같은 평안도 지방의 친일파들과 함께 '대동동지회(大東同志會)'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평양에 본부를 설치하고, 서울(경성)에 지부를 설치하였으며 ‘내선융화’와 ‘공존공영’을 위한 사상 선전 활동에 앞장섰다. 여기서 선우순은 '내선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도 알려지는데 전국을 순회하면서 "내선인은 마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혹은 웨일스와 같이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서 대륙방면으로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는 방법은 조선을 독립시켜 소위 3천리 강산과 2천만 인구로써 나가기보다는 일본과 하나가 되어 넓은 면적과 7천만 인구로 나가는 방법이 확실히 유리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으며 대동동지회의 기관지 《대동신보》와 월간지 《공영(共榮)》을 발행하여 이러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데 활용했다. 1921년 8월 9일 선우순과 대동동지회는 평양공회당에서 청중 70명을 강제 동원하여 이들을 상대로 '태평양회의에 대하여'라는 의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였고 이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9일까지 평안남도 21개소에서 친일 강연회를 개최했다고 알려진다. 이로 인해 민원식과 더불어 당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기도 했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가장 많이 면회한 인물로 악명이 높았던 자가 바로 선우순이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조선인 면회 횟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그는 1919년부터 1926년 말까지 사이토와 119회나 밀담을 나누어 22일에 1회꼴로 사실상 1위였다. 이렇게 일제에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1921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 자의 악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2월 15일에 독립신문을 통해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이라는 뜻의 '칠가살(七可殺)'[2]을 공표하였는데 이때 선우순, 선우갑 형제가 예시로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독립단 안주 지단장 홍이도 등 몇 사람의 가출옥을 미끼로 금품을 사휘하고 사기죄로 피소되었다. 총독부는 담당검사를 일본인으로 교체하면서까지 불기소 처분을 했다.
그 뒤로도 일선융화·공존공영 및 독립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살다가 1933년 8월 8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