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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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남작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이풍한 李豊漢 | |
출생 | 1885년 5월 23일 |
사망 | 1950년 9월 10일 (향년 65세) |
본적 | 경기도 용인군 (現 경기도 용인시) |
본관 | 전주 이씨[1] |
가족 | 아버지 이종건 |
학력 | 보성전문학교 (법과 / 졸업) |
경력 | 조선귀족 남작 동요회 회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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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귀족 남작을 지낸 이종건의 아들이다.2. 생애
1885년 5월 23일 태어났다. 1901년 5월 2일 현릉 참봉에 올랐으며, 1904년 5월 11일 정3품에 서위되었다. 1905년 4월 27일에는 비서감승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1월부터 6월까지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서 영어를 배웠고, 1912년 2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제5회로 졸업했다.2.1. 친일 행적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남작 작위를 받은 이종건의 양자로, 1914년 6월 사자로 선정되어 종5위에 서위되면서 사령서를 받았다. 1915년 7월 조선총독부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유공회원으로 기부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0일 다이쇼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28년 11월 16일 쇼와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1919년 3.1 운동 이후 그의 부친 이종건은 남작 작위와 은사금을 반납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로 사망했다. 1931년 6월 이풍한 부친이 반납하려고 했던 남작 작위를 습작했고, 조선총독부가 은행에 예치해둔 은사공채의 연이자 1250원을 해방 때까지 매년 받았다고 하며, 습작 이후 정5위로 승서되었다.
그는 1930년대 초반 30만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대지주였고, 1940년대에는 연소득이 수만원에 달했다고 한다.[2] 1937년 8월 중일전쟁 이후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2000원을 헌납했고, 같은 달 20일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1937년 9월 초 동요회에서 헌납한 육해군 국방비 1만원 중 1000원을 부담하고, 9월 17일에는 애국 군용 비행기 경기도호 건조비로 300원을 헌납했다.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40년 11월 열린 기원2600년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회에 초대를 받고 참석하여 종4위로 기원2600년축전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12월 홍콩의 함락 이후 육해군에 2000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2.2. 해방 이후
8.15 광복 후, 1945년 9월 30여만평의 땅을 대한성서공회에 기증했고, 같은 해 12월 대한성서공회 성서위원에 선임되었다.재판정으로 끌려가는 이풍한.[3] |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며, 2월 검찰청에 송치되었다. 같은 해 1950년 3월 기소되면서 제1회 공판을 받았으나, 다음 날 특별재판부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0년 9월 10일 향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