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귀족 朝鮮貴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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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조선귀족 남작[수작] 이항구 李恒九 | |
<colbgcolor=#b0313f><colcolor=#c0c0c0> 이름 | <colbgcolor=#fff,#1f2023>이항구(李恒九) |
호 | 우당(又堂) |
본관 | 우봉 이씨[2] |
출생 | 1881년 (고종 18) 8월 21일 |
한성부 (현 서울특별시) | |
사망 | 1945년 3월 6일 (향년 63세) |
직업 | 관료, 정치가 |
종교 | 유교 (성리학) |
작위 | 조선귀족 남작[수작] |
약력 | 이왕직 장관 조선귀족 남작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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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왕직 장관과 조선귀족 남작을 역임한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본관은 우봉(牛峰)이며 호는 우당(又堂)이고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된 친일파 이완용의 차남이다.
2. 생애
1881년 (고종 18) 8월 21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이완용과 어머니 양주 조씨(1857 ~ ?) 조병익(趙秉翼)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근대식 교육을 받았고 1899년 4월 14일 관직에 올라 사직참봉 판임관 팔등에 임명되었지만 다음날 면직되었다.1905년 6월 15일, 일본 공사관 3등 참서관이 되었고 1906년 1월 23일 정3품으로 승진했다. 1907년 3월 20일 봉상사부제조 주임관 3등 4월 20일에 종2품으로 승진해 태조고황제수식비를 고칠 때 참여하였다. 같은 해 7월 23일 다시 비서감승이 되었고 9월 16일 겸임 장례원 장예에 임명되었으며, 가의대부로 승진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1918년 이왕직 의식과장 등을 지냈고, 1932년 이왕직 차관으로 승격되었다가 장관까지 역임했다. 고종실록을 편찬할 때는 일본인 편찬위원장 밑에서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아버지 이완용과 함께 수록되었다.
1945년 3월 6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작위는 그의 차남인 이병주(李丙周)가 습작했지만 불과 5개월 만에 광복되어 작위를 잃었다.
3. 여담
- 알렌은 그를 똑똑하지만 교활하다고(clever but foxy) 평가하였다. 아버지 이완용에 대해서는 기계 같다고 평가했다.
- 둘째아들이지만 친형이 20대에 일찍 죽어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친형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매국한 기록이 없다.[4]
- 1912년에 술에 취한 채로 사위 홍운표(洪運杓)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던 어린아이의 다리를 부러지게 해 놓고는 배상은커녕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이것이 백성들에게 알려지면서 큰 공분을 산 일이 있었다.[5] 관련 기사 이것이 한국 최초의 음주운전 기록이다.
- 젊었을 때부터 놀기 좋아하고 술 잘 먹는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매국수작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선정되었다.
[수작] 1924년 2월 11일, 이왕직 차관으로서의 공로와 이완용의 공로가 고려되어 일본 기원절을 맞아 남작 작위를 받았다.[2] 감찰공파(監察公派) 24세 구(九) 항렬.[수작] [4] 반대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다.[5] 출처: <임금님의 첫 자동차>, 전영선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