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17:39:41

태종(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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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기2. 고려 관리 시절
2.1. 과거 급제2.2. 위화도 회군 시기2.3. 위화도 회군 이후2.4. 이성계 낙마 사고2.5. 정몽주 제거
3. 왕자 시절4. 국왕 재위
4.1. 불교 탄압4.2. 관제 정비4.3. 전국 행정 정비4.4. 경제 정책4.5. 외척 말살
4.5.1. 신덕왕후 강씨 격하4.5.2. 여흥 민씨 숙청4.5.3. 광산 김씨 숙청4.5.4. 청송 심씨 숙청
4.6. 공신 숙청4.7. 인재 등용4.8. 대명 외교4.9. 여진 정벌
5. 상왕
5.1. 양위5.2. 최후

1. 성장기

이방원1367년 6월 13일 고려국 금오위상장군 겸 동북면상만호 이성계의 향처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실질적으로 가문의 막내였다.[1]

형들이 아버지를 따라 줄줄이 무인이 되었던 것과 달리 이방원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고, 글 공부를 하며 문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0대 시절부터 동북면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개경의 계모 강씨 집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공부에 매진했다. 이방원은 개경에서 학문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며 수재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균관에 차석으로 합격하면서 개경 귀족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16살이던 1382년, 고려 후기 최고의 명문 권문세족 가문 하나인 여흥 민씨 민제차녀와 혼인하게 되었다.

2. 고려 관리 시절

2.1. 과거 급제

17세의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 7등[2]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이냐면 전국의 과거 응시자들 중 전국 10위의 성적이다, 그것도 불과 17세의 나이로. 지금으로 치면 고1이 행정고시나 사법시험을 전국 석차 10등이라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격.
과거에서 김한로(金漢老) 등을 급제시켰는데 우리 태종(太宗)께서 병과(丙科)에서 7등으로 뽑히셨다.[3]
고려사』 권135, 열전48 우왕9(1383년) 4월
조선 건국 이후의 행적들을 보면 과감하고 패기가 넘치기에 흔히 야성적, 무인적인 인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려 시대에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엘리트 문신이었다.[4] 훗날 이방원이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러 갈 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걱정하며 한 말도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한데 만 리[5]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6] 한창 젊을 나이인 20대 때 이야기가 이 정도라는걸 근거로 이방원이 허약한 체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연산군이 왕좌에 올랐을 때 <조선왕조실록>에 '태조 이후로 역대 왕들은 다들 태조처럼 덩치가 우람했는데 연산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빈약한 체형의 왕이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기에 이방원도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엘리트 문신으로 진로를 잡았을 뿐, 타고난 체격 자체는 아버지와 형제들처럼 우람했을 듯하다. 그런 연산군도 성격은 무인 기질이 있고, 말을 잘타서 무려 말 위에서 '처용무'를 출 정도였다고 하니 어찌보면 집안내력. 태종이 사냥과 군사 훈련을 즐기는 기록이 조선 왕들 중에 굉장히 많기에 인간흉기이자 한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아버지 이성계 기준에서 허약해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건장한 체격에 가까웠을 것이다.

또한 위의 이성계의 발언은 당시 조선명나라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방원도 반쯤은 목숨을 걸고[7] 그것도 자원해서 명나라에 갔기에[8] 아버지로서 걱정하는 마음이 섞여 나온 말에 가깝다. 정몽주 암살로 인해 아무리 미운 털이 박혔다고 한들 자식이니 애틋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강씨의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막내였던 데다가 과거 급제를 통해 가문을 드높인 자식이니 원래는 상당히 총애받는 아들이기도 했다. 태조가 한 네가 몸이 허약한데 먼 길을 떠나니 걱정된다는 투의 말도 정말로 몸이 허약해서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당시 상황과 태조의 온갖 감정이 다 섞여서 나온 말일 가능성이 높다.

태종은 조선 국왕 중 유일무이하게 '친정(親政)'을 한 왕이며 중증 사냥 덕후라서 기분 전환을 위해 잔머리를 굴려 사냥을 나가려다 신하들이 말린 기록이 여럿 있다. 만약 태종 본인이 정말 파리한 체격에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학문 연구를 일삼는 것만 좋아하는 성향이었다면 사냥을 그처럼 자주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9]
태종은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왕이다. 한국사를 통틀어 국왕이 등장한 이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왕은 태종이 유일무이하다. 사실 한국사에 등장했던 국왕들 중에는 1차 과거시험에도 떨어질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왕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통해 또는 세습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볼 기회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만약 과거시험을 보았더라도 합격할 만한 왕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태종은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합격한 유일무이한 왕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한 것은 주자학이었다. 태종은 주자학으로 과거에 합격했기에 주자학에 일가견이 있었고, 나아가 정신적으로 도참과 불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왕을 위한 변명』 | (공)저: 신명호
이방원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과거(오늘날 행정고시) 급제와 관직 근무 경력 둘 다 가진 임금이다.[10] 이방원의 과거 급제를 알리는 관교를 받았을 때 아버지 이성계는 너무 기뻐서 사람을 시켜 관교를 몇번씩 읽게 했고 궁궐을 향해 절을 했다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로 귀부한 이래 최초이자 기록상 역대 최연소 합격자였다. '변방의 신흥 무인 가문'에서[11] 나온 최연소 과거 합격자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상당한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집안에 무신정권 초기 당시 문신들의 대표격 인물이던 문극겸[12] 피가 섞였으니 기본적으로 머리는 있는 집안일테지만 이방원은 이자춘 대에 고려로 귀부한 이후 최초로 배출한 과거 합격자인데다 고려시대의 과거는 그 악명높은 조선 후기의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아서 준비 단계부터 수도 개경의 중앙 귀족의 자제들이나 볼만한 수준이었던걸 감안하면[13] 이성계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14] 이방원의 형들인 이방우나 이방과 등도 관직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음서를 통해 진출한 것이기에 이방원의 과거 합격 그것도 최연소 과거 합격과 비교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과거 합격 후 이방원은 개경에서 지낼 때 문신으로서 주로 인사 교류를 통해 이성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15]

2.2. 위화도 회군 시기

1388년, 22세의 젊디 젊은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당시 전리정랑(典理正郞)[16] 직위를 맡아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아버지를 지원하러 간 형님들 대신 아직 개경에 있는 어머와 동생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들을 무사히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사태가 수습되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이 이 임무에 실패했다면 정변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경처 강씨는 물론 방번, 방석까지 분노한 최영에게 발견되어 잡혀서 죽었을 것이다.[17]

2.3. 위화도 회군 이후

이후 창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색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한 제안을 이성계가 받아들임으로써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과 이숭인을 따라 명나라로 가거나, 공양왕 2년에는 우부대언이 되었는데 다음 해인 공양왕 3년에 대간이 우현보의 유배를 요청한 것에 반발한 공양왕과 이런 그의 태도에 사직을 청한 이성계 사이에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한다든지, 이성계가 강씨와 더불어 공양왕을 위해 연 연회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채고 두 사람을 피신시키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친어머니의 삼년상(1391년 사망)을 치르고 있었다.[18]

2.4. 이성계 낙마 사고

1392년 3월 아버지 이성계는 공양왕의 세자인 왕석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 뒤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머무는 일이 발생했다. 하필 그 때가 이방원의 친모인 향처 한씨의 3년상 중인 관계로 이방원을 포함한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도 죄다 발이 묶여 있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반(反) 이성계 세력(온건파 신진사대부)은 이성계가 낙마로 중상을 입어 잠시 무력화된 틈을 타 고려 왕실의 위협이던 이성계 일파들을 한명씩 잡아들이고 종국에는 이성계도 최종적으로 암살하려 하였다. 이 때 정몽주는 공양왕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조준, 남은, 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귀양 보냈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가 잠시 어느정도 위협을 받고 있을때,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이제를 통해서 이 위기 소식을 듣고는, 곧장 삼년상을 접고 벽란도로 달려가 이방원은 큰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에 직접 데려오고 군사를 일으켜 전세를 다시 이성계 쪽으로 역전시킴으로써 이성계파를 몰락 위기에서 구했다고 태조실록에서는 전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형제들 중 홀로 나서서 아버지를 지켜낸 셈이다. 그런데 사실 정몽주는 애초부터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여 군부와 정계를 움켜쥐고 있었던 막강한 권신 이성계와 비교하면 힘과 세력에서 크게 밀리고 불리했기 때문에, 그가 이성계를 제거하고자 한 계획이 성공했을 가능성은 애초에 지극히 떨어졌다.

2.5. 정몽주 제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Goryeo-Portrait_of_Jeong_Mongju-02.jpg
정적 포은 정몽주
이성계의 개경 귀환으로 정몽주의 이성계 일파 숙청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었다. 크게 불리해진 정몽주 일파는 성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조준, 정도전의 사형을 주청했지만, 공양왕은 이성계가 두려워 대놓고 승인을 하지 못하고 질질 끌고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직접 제거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돌아가서 어머니 3년상이나 마치라고 강하게 핀잔을 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을 모아서 정몽주 제거를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성계의 반대 때문에 이지란처럼 정몽주 제거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정몽주 살해 계획을 단독으로 강행하였고, 직후 조영규, 고여, 이부,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리고 도평의사사를 살해 장소로 계획하는 등 살해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

한편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서 자신의 살해 계획을 듣게 되는데 이에 정몽주는 1392년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게되고 이성계에게 환대를 받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화가 이성계의 환대에 정몽주 살해를 주저하자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살해를 강행했고, 처음에는 정몽주가 사는 동리 입구에서 살해할 계획을 잡고 근처의 이방과의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정몽주가 유원(柳源)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선죽교에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겨우 만 25세였다.

다음은 실록에 기록된 당시 내용이다.
정몽주가 성헌을 사주하여 번갈아 글을 올려 조준, 정도전 등을 목 베기를 청하니, 태조가 아들 이방과와 아우 , 사위인 이제와 휘하의 황희석, 조규 등을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서 아뢰기를,
"지금 대간은 조준이 전하를 왕으로 세울 때에 다른 사람을 세울 의논이 있었는데, 신(臣)이 이 일을 저지시켰다고 논핵하니, 조준이 의논한 사람이 어느 사람이며, 신이 이를 저지시킨 말을 들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청하옵건대, 조준 등을 불러 와서 대간과 더불어 조정에서 변론하게 하소서."
하여, 이 말을 주고받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공양왕이 듣지 않으니, 여러 소인들의 참소와 모함이 더욱 급하므로, 화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 전하께서 몽주를 죽이기를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상왕과 이화, 이제와 더불어 의논하고는, 또 들어와서 태조에게 아뢰기를,
"지금 몽주 등이 사람을 보내어 도전 등을 국문하면서 그 공사(供辭)를 우리 집안에 관련시키고자 하니, 사세(事勢)가 이미 급하온데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하면서, 우리 전하에게
"속히 여막으로 돌아가서 너의 대사(大事)를 마치게 하라."
고 명하였다. 전하가 남아서 병환을 시중들기를 두세 번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전하가 하는 수 없이 나와서 숭교리(崇敎里)의 옛 저택에 이르러 사랑에 앉아 있으면서 근심하고 조심하여 결정하지 못하였다. 조금 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므로 급히 나가서 보니, 광흥창사 정탁이었다. 정탁이 극언하기를,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도, 여러 소인들의 반란을 일으킴이 저와 같은데 공은 어디로 가십니까? 왕후와 장상이 어찌 혈통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간절히 말하였다. 전하가 즉시 태조의 사제로 돌아와서 상왕과 이화, 이제와 의논하여 이두란으로 하여금 몽주를 치려고 하니, 두란은 말하기를,
"우리 공께서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습니까?"
하매, 전하는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지만, 그러나, 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으니,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중략) 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에 들어가서 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이 그 계획을 몽주에게 누설하니, 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우리 전하에게 아뢰기를,
"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
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공이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공이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
하고는, 이에 노상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전하가 다시 영규에게 명하여 상왕의 저택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와서 바로 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두려워 하여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인사의 말이 안장을 얹은 채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이를 타고 달려 상왕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가, 아니 갔는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므로, 전하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 유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 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영무가 돌아와서 전하에게 이 사실을 아뢰니, 전하가 들어가서 태조에게 알렸다. 태조는 크게 노하여 병을 참고 일어나서 전하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매, 전하가 대답하기를,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을 모함하려고 하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합하겠습니까? <몽주를 살해한> 이것이 곧 효도가 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태조가 성난 기색이 한창 성한데, 강비가 곁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지라, 전하가 말하기를,
"어머니께서는 어찌 변명해 주지 않습니까?"
하니, 강비가 노기(怒氣)를 띠고 고하기를,
"공(公)은 항상 대장군으로서 자처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
하였다.[19] 전하는,
"마땅히 휘하의 인사를 모아서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되겠다."
하면서, 즉시 장사길 등을 불러 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빙 둘러싸고 지키게 하였다.
태조실록 1권, 총서 131번째기사,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 일설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둘이 만나 술자리를 가졌고, 이 자리에서 이방원이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대에 기록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에는 둘이 따로 만났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애초에 정몽주는 살해당하던 날 이방원이 아닌 이성계를 만나러 온 것이었으며, 살해 당일이 아니라 해도 당시 이방원은 고작 25세로 정계 거물인 정몽주와는 정치 연배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즉, 새파랗게 젊은 이방원과 정몽주가 독대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20] 일설[21]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따라서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후대 창작이라는 가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학설도 있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 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발언권이 약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애초에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 척살을 건의했다거나 척살 모의를 주도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방원이 책임을 스스로 안고가기 위한 윤색일 가능성이 있다.
  • 그리고 이방원이 실권과 발언권이 적었을 거라고 하는데 이방원은 과거에 급제했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고 인맥도 많았다.[22] 더구나 이성계가 낙마로 부상을 입어 잠시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방원이 해결사로 나선 적이 있던 점만 봐도 단순히 막내라고 해서 실권이 적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애시당초 모임에 나간 인물들 몇몇만 봐도 당시 이성계 가문에서도 최중요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방원은 가장 적극적으로 정몽주의 주살을 주장했으니 발언권이 낮다고 보기도 어렵다.[23]
  • 즉, 이는 어디까지나 썰일 뿐이다. 왕자의 난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충분히 정몽주를 암살할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24] 그리고 이방원이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가장 실권 및 발언권과 멀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몽주 한 사람을 살해하는 데 고작 장사 몇 명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군권을 꽉 쥐고 있어서 정몽주 및 공양왕과는 세력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정몽주를 암살하지 못했던 건 결국 정몽주가 아니라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였다. 그렇다보니 결국은 이방원이 나설 때가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이방원은 실행조에 불과하고 이방과나 다른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성계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 또한 이성계가 이를 알고 나서 이방원을 질책했을 때, 이방원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님들의 말이라 따랐다고 변명하기는 커녕 같이 논의했다는 이야기조차 일절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누가 결정하고 실행했는지와 별개로 이성계의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기로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이성계의 분노는 내내 이방원에게만 집중되었다.[25]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죽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크게 대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들끼리 혼인시킬 만큼 친분이 돈독했으며 공양왕 즉위 때까지 정치적으로도 동지 관계였다. 더구나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이성계가 정몽주를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대립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정몽주는 단순한 이성계의 정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대의 대학자요 군자이며 백성들의 지지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를 떠받친 마지막 충신이었다. 이런 인물을 은밀한 암살도 아니고 자기 자식이 대놓고 살해했다는 것은 이성계의 위신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성계로선 이방원은 참으로 '고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이후 수십 년간 두고두고 지속된 이성계와 이방원 간 갈등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자 조선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공양왕이 이성계와의 동맹을 추진하고 이방원과 사예이자 사관이었던 조용을 불러 맹서의 초안을 짓게 했으나#, 역성혁명파는 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 나서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복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치루어 왕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한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불과 석 달 만의 일이었다.#

3. 왕자 시절

3.1. 정안군 시절

그가 정몽주를 척살한 지 불과 두 달 만인 1392년 7월 아버지 이성계는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창하였다. 이방원도 왕자로서 군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하지만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몽주 척살로 인해 이성계에게 미움을 산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시각이 있다.

정몽주 척살 모의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참가했으나 아무도 실행에 옮기려 하지 않았고 결국 척살을 실제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이방원이었다.[26] 당시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이방원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관련 드라마 등에서 극적 흐름을 위해 과장해서 묘사된 것처럼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사건으로 이방원에게 진심으로 격하게 분노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는 경우도 상당하다. 이성계와 정몽주가 돈독한 사이였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막판에 정몽주파가 이성계파를 대거 숙청하여 둘 사이에는 상당한 앙금이 생겼던 상황이었다. 이성계 낙마 사고 때 이성계는 실제로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었지만 이성계는 결국 이방원 등의 고언에 따라 개경 입성을 강행했다. 그만큼 이성계 본인도 정몽주에 대한 불신이 컸던 것이다. 드라마 등에도 묘사되듯 이성계 측은 앉아서 (정몽주파에게) 죽임을 당하느니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개경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정몽주는 당시 고려 말 백성들의 엄청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기에, 그를 제거하는 것은 애초에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정몽주 척살을 실행에 옮긴 이는 이방원이었지만 이성계 또한 도매급으로 함께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많은 백성들이 이성계의 의중에 따라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여론의 역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정몽주 살해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며, 이방원에 의한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야만 했다. 때문에 이성계는 무척 과장해서 정몽주의 죽음을 슬퍼하고 이방원을 질책하는 제스처를 취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여론을 얻은 잔여 정몽주파가 세력을 결집하여 재반격에 나설 경우 이성계파는 무너져내려 재기불능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성계는 실제로는 죽은 정몽주를 기리기 위한 어떤 행사나 기념물을 만드는 행위도 하지도 않았고, 정몽주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몽주가 그동안 목숨 걸고 추진했던 모든 것을 곧바로 되돌려 놓았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죽자마자 정몽주가 유배보낸 이들을 모두 즉각 사면하였고, 조선 건국을 숨쉴 틈도 없이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이성계가 왕으로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한 것은 정몽주가 죽은 지 불과 두 달 후였다. 이처럼 이성계는 겉으로 정몽주의 죽음을 누구보다 슬퍼하는 척했지만 동시에 정몽주가 이루고자 했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정작 정몽주 사후 그를 추앙한 것은 그를 죽인 태종 이방원이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도였지만.

이성계는 겉으로 이방원에 극대노하고 그를 내쳤으며, 궁에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지만, 한편으로 이방원에게는 은근히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왕자들이 권력에서 배제된 것은 고금의 일반적인 예이기도 했다. 한편 이방과와 이방번은 벼슬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각각 한씨, 강씨 소생의 왕자들 중 맏이에 대한 예우라 해석하기도 한다.

이성계는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한 후에 아들들에게 권력의 기반인 가별초를 분배했는데, 이방원에게는 한씨 소생 중 막내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500호에 이르는 상당히 많은 인원의 가별초를 배분해 주었다.

태조는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국하자마자 정안군으로 봉해진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파견하여 고향에 있는 사대 선조의 능실에 제사를 지내고 능호를 올리게 했다. # 이에 대해 이방원을 변방으로 내쳤다는 시각도 있지만, 반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원래 집안의 종손이 하는 것이므로, 그만큼 가문에서 이방원의 입지를 확인시켜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태조 2년에는 전라도로 파견되어 왜구를 방비하는 임무를 맡기까지 한다. # 이 와중에 태종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에 그의 입을 통해 언급된 정도인데다 정확한 시기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태조 즉위 초 궁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겨우 들어갔고, 이에 태조에게 이를 밝혔으나 질책만 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1394년(태조 3년) 6월 명나라 홍무제이성계의 장남 혹은 차남을 명으로 보내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사신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조선 외교문서의 용어를 문제 삼아 이를 해명하거나 사죄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왕의 장남 혹은 차남을 직접 보내라고 했다. 태조는 자식들 가운데서 가장 특출나게 명석했던 이방원을 불러 “네가 아니면 황제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할 사람이 없구나.”라고 하며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도록 했다. 당시 명나라 측에서는 조선에 대해 거듭 사소한 트집을 잡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장차남을 보내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을 보낸 것은 태조가 이방원을 장차남과 크게 달리 보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은 태조의 걱정 속에 남재, 조반과 함께 명나라에 입조하는 사신으로 가기에 이르게 된다. 태조의 우려와는 달리 정안군 이방원은 명에 도착하여 홍무제의 환심을 샀으며, 이에 홍무제는 정안군을 우대하는 예를 갖추도록 명하였다. 게다가 명나라 선비들은 태종을 보고 모두 조선의 세자라 부르면서 존경하였다고 하며, 홍무제를 만난 후에도는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 주체와 만나기도 하는 등 그로서는 적지않은 이득이었을 경험을 하고 11월에 무사히 귀국하게 된다.[27] 그런데 태조 5년에는 명국 사신인 우우가 사저를 찾아와 이마를 바닥에 대는 큰절을 올려 친세자파로부터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결국 세자 책봉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성계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신덕왕후 소생의 막내 이방석의 세자 책봉을 밀어붙였다.[28] 이방원 등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입장에서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토사구팽이었다. 아들들과 고려의 기득권층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한 후, 조선 개국 후 인척 관계를 들어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몬 것이다.[29] 또한, 장자세습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왕위에 오른 경우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있기에[30],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곧잘 숙청이 벌어지곤 한다.

당시 방우는 정계에서 배제된 상태였고 방과와 방의와 방간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31] 거기다가 방과와 방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방간은 힘만 좀 셌을 뿐 능력은 없는 데다가 방원의 도발에 정치적으로 자멸당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32] 동생들 중 다음 왕을 고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능력도 뛰어나고 추종자도 많은 방원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33]

3.2. 제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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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난으로 살해당한 삼봉 정도전

한양 천도 직후인 1356년 7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이로인해 세자 이방석의 지지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태조 이성계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을 도성 내에 조성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사수하려 했다. 그러나 신의왕후와 마찬가지로 망자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다.[34]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전주 이씨 문중의 종친, 고려의 구 세력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35]

그리하여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종친, 사병 혁파 등 정도전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36] 이들이 모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목숨을 빼앗고 세자 이방석도 죽여버렸다. 귀양을 보냈는데 이거이가 손을 써서 죽였다는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사실은 쿠데타 당일에 자비없이 그냥 죽여버렸다.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대의 중진이었던 이제도 이날 살해당했다. 물론 실록에는 "나는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것이다!"라고 기록됐지만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37]

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된 기록은 전반적으로 곡필이 심하다. 예를 들면 방원 측의 병력은 무기 수도 모자라서 부러뜨려 둘로 나눈 몽둥이와 창자루 든 군사 몇십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냥 발라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방석)가 친위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 하나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즉,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고 동원된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방원의 직속 사병은 수십명 정도고 이후 친이방원계 관군 부대들이 합류해 대규모 군세를 형성한것으로 해석하면 그닥 이상할 것은 없다. 이 때는 사병이 혁파되어 관군으로 편입된지 십수일이 지난 시점이니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원 휘하에 수백 수천의 사병이 우글우글 모여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38]

또한,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이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이 실행되던 당일에 판만 짜 놓고 태평하게 남은의 첩실의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말이 안 되는 부분 투성이니 이때의 실록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오늘날에 알려진 것만큼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극이나 영상물을 보면 조선 건국 후 대놓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대립하고 부딪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태조 초기부터 실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며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방과가 아직 살아있던 방우를 제치고 방번, 이제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39] 대신 방원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는데, 태조 3년 2월에 당시 판의흥삼군부사였던 정도전이 군제 개편을 청하면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로 하여금 이를 맡게 할 것[40]을 제안한 것으로 봐선 아마도 그때쯤으로 보인다.[41] 그런데 실록의 무인정사 기록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이방원이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된 동시에 동북면 가별초를 받게되는데, 이방원이 이를 사양하며 가별초를 동북면을 맡은 방번에게 넘겨주었고 방번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별초를 소유하게 된다. 겉보기엔 훈훈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경계했다면 방우가 배제된 이후 장남의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계가 일개 무신일 때부터 보좌하여 공도 크며 중앙 군권을 쥔 실력자인 방과를 더 위협적으로 여겼으면 여겼지 방원을 집중 경계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권신이 아니라 국왕 태조의 비호 아래 일을 추진한 조준, 남은 같은 총신 중 한명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느정도 일치해서 정도전이 힘을 얻은거 뿐이지 정도전이 주도해서 국가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경우 태조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했다. 세자 책봉, 공신 책봉, 천도, 불교 정책을 전부 자기 뜻대로 한 임금이 왕권이 약할 리가 없으며 오히려 왕권이 강력했다. 따라서 정도전 일파는 사극에 나오는 것마냥 종실 인사들과 대놓고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쿠데타 발생 석 달 전까지 저서(이때 완성한 것이 불씨잡변.)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반론하자면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은 좀 낮다. 이방과는 비록 전쟁 경험이 많은 장수긴 하지만 정치적 야심은 없었으며 아버지의 말에는 절대 복종했던 사람이었다. 조선 건국에 생각보다 공이 컸던 것도 아니고[42] 그렇다고 주변에 당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 비해 이방원은 과거 급제자 출신으로[43] 아버지 이성계가 개성의 주류층에 편입되는 것을 도왔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44] 공양왕을 견제하고 정몽주를 척살하는 등 조선 건국에 공이 크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어느정도 공은 있었으며 정치적 야심도 컸고 세자 자리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더구나 능력도 있었고 거기다 인맥은 왕자들 중에서도 가장 빵빵했다.[45] 또한 주위에는 측근으로 하륜,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영규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46] 이방원이 조선 건국 후 명나라에 갔을 때도 이방원 본인이 갈 생각이 있었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의 의도도 어느정도 담겨 있었다.[47] 정도전이 방심한 건 주군이자 강력한 뒷배인 태조가 자신을 뒤에서 밀어주었기 때문에 이방원을 누를 수 있을 거라고 보았고, 무엇보다 당시 사병 혁파가 어느 정도 진행되어서 안심했기 때문이지 정말로 이방원을 경시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48]

태조가 1차 왕자의 난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주장 역시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걸핏하면 골골대며 드러눕는 말년의 태조라면 모를까 당시 태조의 행보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죽기 직전에 딸까지 얻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태종의 반란군들이 제일 처음으로 들이친 곳은 정도전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술집이 아닌 태조가 있던 경복궁이었고 태조는 태종의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 구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이를 두고 와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중병은 아니어도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경복궁으로 쳐들어온다? 그러면 직접 반란 진압을 시도했을 수 있어 명분에서 한참 밀리고 방원의 군사들은 태조를 마주치는 즉시 살아있는 과녁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태조는 양력 9월 중순 쯤 되는 음력 7월 27일 우박이 내리는 날 흥천사 거둥을 강행했고, 그것도 실내 법회가 아니라 야외에서 부도탑을 참관하는 일정이었다. 이로부터 며칠 뒤 태조의 지리한 와병 기사 릴레이가 시작된다. 환갑 먹은 노인이 이런 악천후에 외출을 하면 감기몸살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고, 항생제가 없던 시절 감기를 치료하는 방법은 영양을 섭취하며 푹 쉬는 것 뿐인데 설상가상으로 이 시기 태조는 요동정벌, 사병혁파 등 골치아픈 국정현안들이 겹겹이 쌓인 상황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3년상 마무리까지 직접 챙기면서 제대로 휴식을 취할 상황이 아니었다. 실록에 나타나는 당시 태조의 행보를 보면 조금 나으면 정무를 보고 3~4일 쯤 있다가 또 병이 도져서 드러눕는, 전형적인 회사에 자기 몸 갈아넣는 직장인의 패턴 그 자체다.

태조 같은 무인이 무슨 병이냐 하는 주장들이 제법 보이는데, 현대 사회에서 건강으로는 탑티어일 20~30대 프로운동선수들도 까딱 잘못하면 감기몸살로 며칠 결장하는 경우는 부지기수니 전장을 떠나 중앙 정치인으로 변신한지 이미 10년이 된 환갑의 이성계라고 여기서 자유로울 리는 없다. 아니 애초에 전장에서 평생을 산 무장들이 자리보전을 하거나 심지어 병사하는 경우는 부지기수이니[49] 그저 선입견에 근거한 아무 의미 없는 문제제기라 할 수 있다. 그나마도 단순히 면역력 문제인 감기가 아니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즉 독감이면 예방주사도 없는 당시로써는 무인이고 자시고가 없고 그 고통도 무시할 게 못된다. 심지어는 병환 기사만 3번이나 나고도 또 흥천사 법회 참여를 강행하기까지 했는데, 이후 터진 병환이 그대로 약 보름 뒤 무인정사 때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3.3.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계승자 자리를 넷째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탐내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노리자 이방원은 이를 손쉽게 진압하였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 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 쪽은 거의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이방원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는 예견된 결과였다. 이성계나 정종 이방과의 반응에서도 나오지만 애초에 가진 병력 차가 너무나 현저했기에 이방원이 압승하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실제로도 이방원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싸우는 시늉만 하고도 승리할 수 있었다.

다만 역시 방번/방석과는 달리 동복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악당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선에서 끝냈다. 사실 동복형제라는 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적인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들과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여기서 동복형제인 방간까지 죽였다간 이방원의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의 이미지로 끝나지 않고 건국 초기인 조선 왕실 자체의 이미지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될 수 있었다. 이방원으로선 숙청은 하더라도 형님의 목숨만은 살려야 자신과 왕실에게도 정치적, 대외적 이득이었던 것이다.[50]

어쨌든 동복형제라는 덕을 봐서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다. 그러나, 방간의 아들 맹종은 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방원과 이방원의 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혐의가 혐의였던지라 태종과 이방간이 모두 사망한 후 세종이 빗발치는 상소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자살하라고 어명을 내려 죽는다. 이방간의 자손들은 숙종 때에 복권되기 전까진 대대로 역적의 후손에 폐서인으로 취급돼서 평민과 똑같이 군역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한편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당시 방간이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다시피 했다. 개국에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치력이 뛰어나거나 곁에 유능한 무리들이 많다거나 혹은 군사적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넷째라 다섯째인 방원보다 서열에서 앞서는 게 좀 유리한 편이었지만, 이미 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으므로 이 점 역시 방원이 방간보다 못 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형을 죽이겠다고 난을 유도할 이유도 없고 이미 동생들을 죽인 이상 굳이 형을 건드려봤자 본인만 손해다. 오히려 방간이 방원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 유일한 잇점이 사라지는 것이므로 열받아서, 혹은 몸이 달아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높다.

3.4. 세자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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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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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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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 존령 · 선원선계 · 국왕 · 대군주 · 왕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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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정안공(靖安公) / 왕세자(王世子)
방원(芳遠)
유덕(遺德)
세자 책봉 1400년 2월 4일
국왕 즉위 1400년 11월 13일

태조 이성계의 세자였던 형 이방과가 조선의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이방원 본인은 형인 정종의 세자가 되었다. 이 당시에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그냥 무시한다.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라며 화통하게 반박을 물리치고 동생인 이방원을 곧바로 세자로 책봉해준다. 사실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건 대놓고 "우리 왕 심영이예요."라고 광고하는 꼴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긴 하지만 정종은 정치에 별 관심은 없었는지 크게 개의치 않고 동생을 세자로 책봉해준 것이다.[51]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세자 책봉 당시의 상황과 발언들은 아래와 같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저이(儲貳)[52]를 세우는 것은 국본(國本)을 정하는 것이요, 위호(位號)를 높이는 것은 인심을 정하는 것이다. 이에 전장(典章)에 따라서 책례(冊禮)를 거행한다. 너 정안공 【휘(諱).】 은 자질이 문무(文武)를 겸하고, 덕이 영명(英明)한 것을 갖추었다. 태상(太上)께서 개국(開國)하던 처음을 당하여 능히 대의(大義)를 주장하였고, 과형(寡兄)이 정사(定社)하던 날에 미치어 특히 큰 공을 세웠다. 하물며, 구가(謳歌)의 돌아가는 것이 있으니, 마땅히 감무(監撫)를 맡겨야 하겠다. 이로써 너에게 명하여 왕세자로 삼는다. 아아! 사람 알아보기가 쉽지 않고, 자식노릇하기도 또한 어렵다. 지친(至親)으로 택현(擇賢)으로 이미 대통(大統)을 잇는 자리에 처하였으니, 오직 충성하고 오직 효도하여 이로써 정사하는 방도를 도우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바이니, 마땅히 다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중략……)

이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1400년) 정안공을 왕세자로 책립하여 군국의 일을 맡기다.
사실 정종과 태종의 나이는 겨우 10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다이묘들이 자식이 없어서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사례는 꽤 흔했고, 심지어 덴노 중에서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 그렇게 이방원은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형의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되게 된다. 아마도 형인 정종은 어차피 자신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니, 위안으로 삼으려고 동생 방원을 자신의 아들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53]

더불어 정종 스스로도 자식들에 대한 보신책을 겸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과거 후궁인 가의옹주 유씨의 아들을 원자라 하였다가 # 다시 이방원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상황이니 이후 서자들이 상왕의 아들 운운하며 반란 같은 골치아픈 문제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아예 이방원을 확고부동한 계승서열 1위의 적장자로 못박아버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얼마 있지 않아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문제의 원자 이불노는 이후 줄기차게 정종의 친자가 아니라고 부인당했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마도 임금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자기 야심을 부리려고 했다면 이방간과 같은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정치적 판단력이 먼치킨인 이방원답게 정종이 정치에는 관심이 크지 않다는걸 이미 알아채고 형인 이방과를 내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정종은 정치 업무는 거의 보지 않고 열심히 놀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애초에 이방원 쪽에서도 세자 타이틀을 원하고 있었다. 2차 왕자의 난이 끝나자마자 이방원의 책봉을 밀어붙인 남재, 하륜 등이 모두 하나같이 '세자' 책봉을 요청했지 '세제'는 거론도 하지 않았다. 태종 본인의 입장에서는 세자 타이틀에 대한 욕심이나 위의 두 형들과의 순위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자' 책봉을 택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형들의 순위 문제는 이미 이방의와 이방간 모두 알아서 자진사의나 반란실패 등으로 해결을 해 준 상태라 큰 의미가 없고, 보다 실리적인 측면을 찾아보자면 태상왕인 아버지 이성계의 개입 가능성을 최소화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제'라면 태종 본인도 태상왕의 아들 자격이니 이성계가 책봉부터 즉위 이후의 정무까지 대놓고 아버지 지위를 들먹이며 개입하려 든다면 어쩔 도리가 없지만, '세자'라면 태상왕이 뭔 얘기를 하건 '아버지' 자격인 상왕 정종을 우선 방패막이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인세이에서 이와 반대의 사례를 찾을 수 있는데, 스토쿠 덴노는 이복동생 나리히토 친왕을 양자로 들여 양위, 고노에 덴노로 즉위시키고도 양위문에서 '황태제'로 명시하는 바람에 '아버지'로서 법황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도바 덴노가 실권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54]

더해서 형들이야 이미 나가떨어졌으니 그렇다손 쳐도 형 정종의 서자들과도 서열을 정리할 필요는 있었고 이런 점에서는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정종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또, 당시 지식인층인 사대부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려면 세제보다는 세자 쪽이 정통성 면에서 더 좋았다. 일단 '종법'을 들고 무인정사를 일으킨 이방원으로써는 어떻게든 형제승계가 아닌 부자승계의 틀을 갖춰서 대종의 적장자 세습을 강조하는 종법을 존중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게다가 과거급제 출신의 유학자 이방원의 입장에서 종법제의 확립은 신생국가 조선이 - 개차반 고려와 확연히 차별화되는 - 중화 유교천하의 확고부동한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이기도 했다. 실제로 종법제 자체가 한대 이후 약화되었다가 송대 들어 재발굴되면서 성리학의 근간을 이룬 제도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든 현실적 필요로든 간에 이방원은 무조건 종법제에 맞춘 승계가 필요했다.[55] 특히 고려왕조에서 적장자 세습을 무시하고 형제승계를 시도하면서 벌어진 수많은 개판을 익히 아는 이방원과 신진사대부들로써는 종법의 확립을 곧 국가의 존속요건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56]

그래도 태종은 동생으로서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자신이 즉위한 뒤에도 정종을 형이자 상왕으로서 톡톡히 대접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같이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있을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종과 태종이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있다.[57]

3.5. 사병 혁파

사병(私兵)을 혁파하였다.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함이 있어야 하고,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주장하고 통속함이 없으면, 이것은 태아(太阿)040)(註 040)(태아(太阿) : 옛날 중국의 보검(寶劍)의 하나.) 를 거꾸로 쥐고 남에게 자루를 주는 것과 같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각각 도당을 심어서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나뉘어져서, 서로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이루게 됩니다. 동기(同氣) 간에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이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비롯되니, 이것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집에 병기(兵器)를 감추지 않았다.’ 하였으니,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이것이 인군을 협박하는 것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사병(私兵)이 있으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僭濫)하여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남기어 후환(後患)을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던 처음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능히 공신의 병권을 해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였으니, 후세의 규범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041)[58] 와 진(晉)나라의 육경(六卿)042)[59] 과 한(漢)나라 말년에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난 것과 당(唐)나라 말년에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것이 모두 사병을 길러서 난을 꾸민 때문이었으니, 또한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043)[60] 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혁명(革命)하는 초기에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해야 합니다. 훈신(勳臣)·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맡게 하여 창졸(倉卒)의 일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을 다 없애지 못하였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난(亂)을 선동하기를 꾀하여 화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인도하고 도와주어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병을 두는 것을 오히려 전과 같이 하고 인순(因循)하여 해제하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이미 일찍이 글장을 올려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다시 군사를 맡기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소장(蕭墻)의 화가 지친(至親)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亂)만 일으키고 그 이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이제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의 군사를 지금도 역시 파하지 않으니, 장래의 화를 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외방 각도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혹은 시위(侍衛)라 칭하고, 혹은 별패(別牌), 사사 반당(伴儻)이라 칭하여, 번거롭게 번상(番上)하고 소란하게 징발(徵發)해서 그 폐단이 심히 많으며, 배종(陪從)이 많고 전렵(田獵)이 잦아서 그 수고로움이 또한 지극합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비와 눈을 마구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숙직하므로, 군중의 마음이 원망하고 탄식하니, 심히 민망한 일입니다. 지금의 큰 폐단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모조리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공가(公家)의 군사를 삼아서,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을 무겁게 하고, 인심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문(私門)의 숙직은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고, 조회하는 길에도 사사 반당(伴儻)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근수(根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예전의 집에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고, 후일에 서로 의심하여 난을 꾸미는 폐단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저(李佇)가 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4월 6일 신축 9번째기사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해체해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하여 각각 위화도 회군무인정사에서 승리해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다른 후계권을 가진 자가 사병을 모아 제2의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병만큼은 아주 얄짤없이 철저하게 분쇄하고 사병의 인원을 흡수하여 모조리 중앙정부 소속 군대인 국군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61]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62][63]

문제는 정종 대에 실시된 사병혁파가 남김 없이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조사의가 태조의 사병인 가별치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1.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 등처에 ‘가별치(加別赤)’라고 이름하는 것이 모여서 일당(一黨)이 되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지 않고, 따로 가병(家兵)을 만들어서 사사로이 서로 결탁하여 방자하게 호기(豪氣)를 믿고 날뛰어, 주현(州縣)에서 금제(禁制)하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적신(賊臣) 조사의(趙思義) 등이 변란(變亂)을 꾀하던 처음에 오로지 이들 무리에게 힘을 입어서 당원(黨援)을 삼고 임의로 병혁(兵革)을 일으켜, 거의 사직(社稷)을 위태하게 하였으니, 만일 혁파하여 없애지 않으면 다시 이런 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일체 모두 혁파하여 없애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2월 2일 신해 3번째기사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계본(啓本)을 갖추어 아뢰었다.
"한(漢)나라의 군정(軍政)은 처음에 우격(羽檄)을 써서 천하의 군사를 불렀으나, 뒤에는 호부(虎符)를 써서 군국(郡國)의 신(信)을 합하여, 교서(膠西)에서 임의로 군사를 징발하려 하매, 궁고(弓高)가 이를 힐난하였고, 엄조(嚴助)가 절(節)을 가지고 군사를 발하매, 군수가 거절하였으니, 군사를 부르는 것은 주밀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간사한 마음이 없어서 한대(漢代)가 끝날 때까지 안연하여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 여씨(呂氏)와 칠국(七國)의 변이 창졸간에 생기었으나, 방비하고 막는 것이 본래 갖추어 있었고,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군사를 연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으나, 나라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대개 고조(高祖)가 군사 사이에 출입하여 이되고 병되는 것을 익히 강구하여 4백 년의 규모가 광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제도에 의하여 유사로 하여금 호부(虎符)를 만들어서 무릇 안팎의 동병(動兵)하는 일은 공경하여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호부로 징발하고, 호부가 없이 군사를 부르는 자는 천단히 징발하는 것으로 죄를 의논하도록 항식을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0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또한 정종 대에 사병혁파의 주요 타겟이 됐다고 알려진 시위패(侍衛牌) 해체는 정도전이 이미 절제사들과의 연결을 상당부분 차단시킨 후에 숟가락만 얹은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할 여지도 있다.
한편 태조 3년 2월, 判三軍府事 鄭道傳은 軍制 全般에 관련한 上書를 올리는데, 그 주요 요지가 절제사의 직접적인 군사동원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었다.56)[64] 즉 시위패들에 대한 제반 규정에 삼군부의 영향력 행사를 강화시키고 나아가 各衛.各司.各領의 명칭 개정과 조직 및 지휘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整備案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군사체제의 정비는 각 측면에서 절제사의 위상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삼군부에서는 병법 훈련에 시위패를 동원하기 시작하였고57)[65] 태조 말엽에 가서 이를 더욱 강행하였다.58)[66]

결국 병권 집중을 위한 이같은 노력 결과 절제사들의 군사 징발 및 동원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하여,59)[67] 태조 말엽에 이르면서 제절제사의 시위패에 대한 예속력은 지극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태조대 非무장 계열인 정도전 일파는 典兵者들의 무장해제를 위해 병권 정비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사들의 시위패 보유 역시 중앙 숙위에 근거해서만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60)[68] 이에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시도된 군제정비로 절제사들의 시위패는 사병으로 이용되기에 상당한 제약을 안고 있었다.
<高麗末 朝鮮初 私兵 硏究>, 199

4. 국왕 재위

4.1. 불교 탄압

태조와 정종은 불교를 믿었으나, 성리학을 공부했던 태종은 불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태종은 즉위 후 불교 탄압의 강도를 높여 절에 머문 승려들을 환속시켰다. 그러나 왕실과 관련된 불교 행사는 참가했다. 대표적인 행사가 바로 흥천사 건립 돕기, 낙산사 참배, 회암사 승려들을 불러 태조의 병환을 낫게 한 것이다.

태종 2년(1402)에 왕의 명으로 승려들을 천민으로 취급하게 했고 특별지정한 70사(寺)를 제외한 전국 모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모조리 압수했다. 1405년 11월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주군, 개성, 한성부에 사원 하나씩, 그리고 각 군현에 1사(寺)씩을 남겨두고 나머지 모든 사찰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이 작업으로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져오던 한국의 사찰 수천여곳이 불타 사라지고 전국의 사찰은 오직 242곳만이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406년에 또다시 대규모 사찰 혁파를 단행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절마저 불태워 무너뜨렸고 이에 석성민(釋省敏) 등 수백 명의 승려들이 신문고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이들 집단을 파하게 했다. 1417년에는 조선 팔도에서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오던 수많은 불경들과 무속 관련 서적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강제 압수하여 눈앞에서 소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당시까지 11개였던 종단을 7종으로 축소했으며, 왕사와 국사 제도를 폐지했다. 또한 도첩제를 강화해 출가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각종 부역에 승려를 무상으로 강제동원했다.

4.2. 관제 정비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되는 간관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69]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 했고 틈만 나면 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좀 자제시켜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다. 이는 간관을 통한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간관들이 왕에게 간언을 하기도 하나, 관리들의 비리 등에 대해 간함으로써 대신들을 제어를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관리 감찰 관원들을 즉 간관들을 사간원으로 모아서 의정부에서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인데[70] 대간을 재상에서 분리시킨 후에 태종은 의정부에 자문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6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의 힘을 더 약화시켰다.

4.3. 전국 행정 정비

호구를 파악하여 고려의 구제(舊制)처럼[71]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게 하였다.[72] 또한 16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오늘날의 신분증이라 볼 수 있는 호패를 소지하게 하여 유민 방지와 인적 자원 확보를 도모하였다. 다만 그 집계치가 참으로 낮은데 15만호 32만구(태종 4년)[73] 18만호 37만구(태종 6년)[74] 이 정도여서 왕조 초기의 행정력 미비를 드러낸다 할 것이다. 덧붙여 한반도가 8도로 구획된 때가 바로 태종 때다. 아울러 유향소를 통제하는 경재소도 설치했다.

4.4. 경제 정책

명군으로 신성화된 이미지와는 달리 별다른 창조적 혜안도 없었고 법제[75] 의례[76] 기록관리[77] 등 여러가지 면에서 굉장히 미숙하거나[78] 특히 경제 분야에서 실책을 계속 드러냈다.

명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당시 조선은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다.[79]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이 화폐 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문제는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도 저화유통을 강행했던 이 과정이 상식밖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거의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조부터 징수되던 호포를 그것도 고작 18만호한테서[80] 밖에는 못걷는 호포를 없에줄 것처럼 선심을 쓰는척 하더니[81] 결국 저화를 유통시키겠다고 한답시고 저화로 대신 징수하고 있었고[82] 저화유통이 좀처럼 되지 않자[83] 다시 포백세(布帛稅)라는 이름으로 포(布)라는 납부형태는 일치시키고 시장상인이라는 전가대상만 전환시켜서 호포를 사실상 부활시키려 했다.[84] 두달이 지나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과세를 유예할 것처럼 하다가[85] 이후에 더이상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는데 이같은 것들은 태종 대에 어수선한 정책결정 정책집행 상황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사례들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화/실패 원인 문서를 참고하라.

양전 또한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태종 대에 이전인 태조 대에 시작해서[86] 정종 대에 이루어진 양전(量田)에서 집계된 것으로 보이는 6도 92만결[87]에서 태종 대에 이루어진 을유양전(乙酉量田)에서 집계된 6도 96만결[88]로 고작 4만결이 느는 것에 불과했다.[89] 이전 양전(量田)에서 집계된 6도 92만결[90] 기준 4만결 증가... 이전 양전(量田) 이전 기사양전(己巳量田)에서 집계된 6도 66만결(간전(실전)49만결[91]+황원전17만결[92]) 기준 30만결 증가... 말장난 하는 것이 어째 요즘 지자체장들 비스무리 해 뵌다... 그래 놓고는 다시 양전을 한다고 부산을 떨어 댔는데[93] 애초에 문제가 많은 고려의 삼등전품제[94]를 답습한 것도 그렇고[95] 전품을 높여서 결수 쪼개기[96]를 한 주제에[97] 세종 대에 전품을 낮추고도[98] 6도 119만결[99]을 집계한 것에 비해서도[100] 23만결을 날려먹는 등 집계 자체도 철저하지 못했으니까 집계된 땅에만 조세가 집중되어 조세의 형평도 그르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공물의 대납가를 고려해도 많이 잡아야 후대에 25% 정도로[101] 조세가 낮아진 것에 비하면 경기 과전민에게는 무슨 일본 다이묘들이 농노들을 벗겨먹는 것마냥[102] 평균 40%씩[103] 조세를 때려 댔으니까[104] 조선 역사상 가장 백성들을 악귀같이 가혹하게 착취한 시기중 하나였다.[105] 그 와중에 공신전을 일만결대[106] 뿌린 자기손자 이상으로 자기는 공신전을 수만결대[107] 뿌려 댔으니까 경제 정책을 평가하자면 빈말로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4.5. 외척 말살

태종이 공신들을 숙청할 때에는 죽이기보다 적당한 곳으로 귀양을 보내놓고 방치하거나 직위를 강등시키는 등, 간접적인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다 죽여버렸고, 나중엔 사돈 가문(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박살을 내버렸다.

죽인 사람 자체는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대숙청을 벌인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가 바로 외척 말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숙청은 대체로, '평소 절친한 인척들을 갑자기 불문곡직하고 잡아들인다 → 뜬금없이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 혹독하게 고문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낸다 → 일사천리로 죽인다'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정작 유배형에 그쳐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실제로 잘못한게 있는 이거이와 김한로 정도였고, 자기가 보기에 나중에 왕실을 위협할 권세를 가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이라면 아무 잘못이나 욕심이 없어도 가차없이 박살을 내놓았다.

능력있는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던 태조와 달리 직접 나서길 좋아하던 태종이니 확실히 발 밑에 둘 수 있는 신하가 아닌 장차 후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외척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륜 등 부패한 신하도 능력 좋고 권력에 방해되지 않으면 놔뒀는데, 나름 죄목이 있는 민씨 형제들과 달리 심온은 죄도 짓지 않았고 납작 엎드렸음에도 죽였다.

원래 좋은 가문과 혼인하는 것은 인맥도 넓히고 동맹을 맺는 가장 흔한 방법이고, 왕의 세력이 빈약할 때는 왕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되기도 한다. 실제 이방원도 왕위에 오를 때 민씨 가문의 사병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점차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에 대한 별도의 위협이 없는 상황이 된 이후로는 무엇보다 왕위계승률을 어지럽힐 수 있는 외척의 존재를 밟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의 이런 우려는 얼마 못 가 다시 현실이 되어 외척의 권위로 계승자를 선택하거나 외척이 나라를 말아먹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4.5.1. 신덕왕후 강씨 격하

아무래도 외척의 발호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108] 실제로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강씨를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109]

태종은 정릉 근처의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최측근이었던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110] 신덕왕후의 능 근처에 공신들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파하지도 않다가,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신덕왕후를 대하는 예우를 왕비에서 후궁의 격으로 완전히 격하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있었지만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한 술 더 떠서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 그리고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할 때 쓰이는 광교의 재료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히 정식 부인이었고, 이 때문에 신덕왕후는 왕비에 책봉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개인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111] 신덕왕후는 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무덤 또한 능으로 복구되었다.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록에 따르면 정릉이 태종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당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이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근거렸는데 훗날 250여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다고 한다. 이때도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 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태조와 신덕왕후가 막내 아들 의안대군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 이방과가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왔고, 태종 본인은 위화도 회군 당시 신덕왕후 강씨와 그의 소생 아들들을 대피시켰고,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112]의 공로를 세운 공신이다. 태조가 세자로 장남 이방우나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권좌에 대한 야심이 강한 태종이라 해도 자기가 왕위에 오를 명분을 찾는 데 엄청 애를 먹었거나, 아니면 끝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장남 이방우는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장자 승계 원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적장자였다.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113]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태종을 능가했다. 하지만 그런 형들도, 자신도 아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이복 막내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통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세력을 빼앗게 된다. 몹시 적개심이 일었을 것이다.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은 내게 조금의 은의(恩義)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114]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건너 뛰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115]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정통성도 없이 세자위를 차지한 것이 된다. 이렇듯 개인적 원한으로만 보이는 일이지만 깊게 보면 정통성의 문제와도 밀접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4.5.2. 여흥 민씨 숙청

여흥 민씨 일가, 특히 조강지처인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은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태종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인척들이자 동시에 태종의 즉위에 제일공신들이며 또한 심복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공이 있고 힘이 있었기에, 결국 이들에 대한 태종의 숙청은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권을 최우선시한 야심가이자 숙달된 정치가인 태종이 외척을 크게 경계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찌기 양녕대군의 혼인과 관련해서 민씨 일족이 본의 아니게 태종에게 위기감을 느끼도록 한 사례가 있었다. 양녕대군이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기 전, 명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의 사신과의 논의가 영 진전이 되지 않자 흐지부지되는 듯 했고 태종도 이를 포기한 채 위에 언급한 김한로의 딸과의 혼인을 진행했다. 그런데 공부, 이현 등이 민제를 찾아가서 세자와 명 공주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민제는 태종의 압력에 못 이겨 사직한 상태라서 자신은 감히 주상에게 아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민제의 아들들인 민무구, 민무질도 "말할 자신이 없다." 하며 논의 자체에서 빠지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116] 태종은 사사롭게 국가의 큰 일에 관여하려 했다며 공부와 이현을 처벌하였다.[117]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태종에게는 민씨 가문의 위세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 민제와 아들들은 논의 자체를 버거워하며 신중하게 처신한다. 하지만 왕세자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정 문제를 국왕이나 현직 대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씨 가문에서 논의하려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위상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민무구와 민무질이 너무 젊고 야심이 컸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즈음하여 늙어 자연사한 장인 민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처남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은 매형의 동생들을 죽이는 일에까지 기꺼이 가담한 사람들이다. 공신에 책봉되어 큰 권세를 누리던 4처남 중 맏이인 민무구가 태종 앞에서 '세자 이외의 영특한 왕자는 없는 게 낫다' 운운하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숙청한다는 식으로 어그로를 끈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태종으로서는 '내 동생들을 죽이는데도 가담해 놓고도 태연하게 권세부리는 자들인데, 이권을 위해서 내 아들들을 죽이는데 가담 안 하리란 법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물론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당장에 정도전이 종친모해죄로 살해당했는데 저런 것과 딱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종 앞에서 말했다면 제발 숙청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바보다. 기록에 의하면 민무구와 민무질은 "우리를 이거이처럼 여기는 것 같다.", "우리를 살려두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이숙번이 불충한 자들을 제거해야 한다 했는데 나를 겨냥하고 한 말 같다.", "나를 꺼릴까 두려웠는데 병권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편하다." 등 충분히 태종이 자신들을 숙청하지 않을까 버로우타고 있던 마당인데 저런 폭탄발언을 태종 앞에서 직접 할 리가 없다.

덤으로 왕위계승권자 또는 그에 근접한 3형제인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모두 어린 시절을 사가, 외할아버지 민제와 외삼촌 민무구, 민무질의 집, 즉 외갓집에서 보낸 시간이 무척 많았다. 이는 여흥 민씨 집안이 당대의 명문가이며, 동시에 민제가 당대의 대학자이였기 때문이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자신을 얼러주고 업어주고 과외도 수시로 해 주었을 친숙하고 친밀하기 짝이 없는 외삼촌들인데, 양녕이든 충녕이든 그들을 배척하고 숙청한다는 게 그들에게 과연 쉬운 일일까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토록 가까운 왕자의 외숙이라 할지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일국의 왕자를 없애니 마니하는 말은 그 누구라도 입초에도 절대로 올려서는 안 되는 반역성 발언이다. 차라리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나중의 수양대군처럼 정변을 일으켜 양녕대군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정황과 증거라도 있었다면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었겠지만, 단지 세자가 아닌데 영특하다는 이유로 제거해야 한다는 참람한 발언을 한 것이다. 더구나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에 비해서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어도 아버지나 할아버지와 달리 기질적으로 평생동안 무력행사나 혈겁과는 담쌓고 산 사람들이었으니 더더욱 무리한 주장이었다. 특히 효령대군은 뼛속까지 불교에 매료된 사람이라 야심도 없고 성격도 둥글었다.[118]

그러니까 총명한 두 왕자를 죽여서라도 확실하게 멍청한 세자를 왕위에 앉혀서 꼭두각시로 부리며 권세를 누리겠다는 저의의 표현밖에 안 되는 것이다. 원경왕후는 본인의 남동생들을 죽인 남편을 원망했지만, 인간성으로 따지면 오히려 그 형제들이 태종보다 못한 자들일 수도 있다. 용의 눈물 등 사극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실록에서 보이는 민무구, 민무질의 행보가 그렇게까지 오만하지는 않았다는 평도 있지만, 이 한 번의 언행으로도 그러한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끝도 없이 야심만만한 생각이 아니고서야 입초에 올리기는 커녕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왕권국가에서는 정말로 위험한 큰일날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민씨 형제에 대한 변호도 없지는 않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등장한 해석으로, 당시 시대인 여말선초에는 당장 민씨 형제가 매형 태종과 함께 주도한 왕자의 난처럼 옥좌를 노리고 왕족들간의 유혈 충돌이 비일비재했다. 옆나라인 명에선 아예 대규모 내전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 외에 유능한 왕자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향후 왕위 계승에 위협이 되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민무구를 비롯한 민씨 형제의 의도는 '똑똑한 왕자들은 당장 죽여도 된다'가 아니라 '원칙상으론 처음부터 없는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일반론적인 우려 수준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 역시 민씨 형제가 다른 방향으로 경솔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의도 자체야 어쨌든, 당장 왕권 강화와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태종 입장에선 현실적인 권세를 가진 민씨 형제들이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태종의 입장과 의도를 너무 몰랐던 것.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가 왕위를 차지할 수 있게 이바지 할 정도로 도움을 주었던 계모 신덕왕후와 이로 인한 아버지의 실수를, 즉 신덕왕후의 치맛바람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극혐했으며, 이로 인해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아내 원경왕후 또한 당대의 여걸이자 치맛바람을 천성으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태종이 보위에 오르게 된 데에 바로 이 치맛바람이 크게 도움이 되었으나, 그대로 방치하면 정국에 영향이 미칠 것이며 외척이 날뛰게 될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여흥 민씨를 이중 삼중으로 박살내고 말았다. 조선이 전주 이씨의 나라에서 여흥 민씨의 나라로 변해버릴 가능성[119]을 모조리 잘라낸 것이다.[120]

굳이 민씨 형제가 잘못 얻어걸린 부분이 있다면 하필 세자(나중에 양녕대군이 되는)의 자질이 개판이어도 너무나 개판이었다는데 있었을 것이다. 효령과 충녕이 당대의 가장 이상적인 군자와 사대부의 모델이었던 반면에 세자는 자기 가족들은 안중에도 없이 술과 놀이와 음욕만 탐했다. 이런 상황에선 효령과 충녕에게 야심이 없어도 세자가 폐해진 후 결국 살해될 것은 거진 뻔한 순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세자를 살려서 보위에 앉히려면 효령과 충녕을 미리 죽여서 택현론을 원천 봉쇄할 수밖에 없고, 유교윤리 때문에 장자의 상징성이 굉장히 강력했던데다 아들을 여럿 잃고 처음으로 겨우 살려서 키운 귀하디 귀한 장자인 세자를 어떻게든 살리고자 하는 고민은 원경왕후도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121] 그런데 차남과 삼남보다는 장남을 살리는 일에 원경왕후가 직접 나서면 모양새가 안 좋으니까 민씨 형제가 끼어들기는 했는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양녕에게 믿음과 기회를 줄 정도로 아들바보였던 태종이었지만, 공과 사의 구분은 철저했다.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보다 조선의 국왕으로서의 책임감을 더 중시한 결과, 결국 폐세자를 택하였다. 즉, 민씨 숙청은 이러한 세자의 막장 행보의 막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그 문제의 세자 양녕대군은 외삼촌 네 명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데 크게 일조하였으면서도 끝내 모른 체 하였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로도 도통 망나니짓을 끊지 못했으며, 그토록 세간의 욕을 먹고 대신들에게 탄핵까지 당하면서도 잘나고 착한 동생이 끝까지 지켜준 덕분에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그 착한 동생의 손자, 즉 자신의 조카손자를 폐하고 죽음까지 이르는 데에 크게 일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민무구와 민무질은 그렇다고 쳐도 민무휼과 민무회는 조금 억울한 감도 있다. 태종도 그들을 숙청하면서 이숙번과 나눈 대화에서는 이숙번이 그들이 형들이 당하자 이에 복수심을 품은 것이냐고 묻자 그렇진 않다며 다만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까봐 두려웠던 모양이라고 답했다. 즉 민무구와 민무질이 제거당한 상황에서 이들은 그냥 버로우타고 쥐죽은듯이 지내는 것이 최선이었고 그만큼 이들이 딱히 힘을 쓸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결국 숙청을 피할 순 없었다. 물론 양녕대군이 말한 것에 따르면 민무회도 딱히 억울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들도 본래는 "형님들이 억울하게 죽은거 같긴 했지만 다행히도 전하께서 우린 살려주셨는데 우리가 앞으로도 잘 섬기려 하니 세자저하께서 좀 우릴 봐주십시오" 라는 자기들 말마따마 형 둘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반항은 커녕 '말 잘 들을테니 우리 좀 살려줍쇼 헤헤' 라는 비굴해보이기까지 한 언사를 전달하고자 하다가 저리 된 것이다.

4.5.3. 광산 김씨 숙청

양녕대군이 혼인을 할 때, 즉 첫 번째 세자빈을 고를 때도 태종은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인 김한로였다. 장원 급제를 한 수재이긴 했지만 조선 건국에 딱히 세운 공도 없고, 확고한 신념이나 정치적 야심도 없을 뿐더러 처세술에도 잼병인 책상물림형 관료였다. 남의 말을 빼앗아 타거나, 남이 사냥에서 잡은 사슴을 자기 집 개가 물어 죽인 것이라며 빼앗으려 드는 등 추태를 부렸으나 일처리를 잘한 흔적은 딱히 없다. 옹졸하지만 큰 사고를 치진 않는 소인배라 할 만한 사람.

태종이 이런 인물을 굳이 임용한 이유는, 그가 훗날 국구(임금의 장인) 자리에 오른다 해도 딱히 권세를 휘두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또 오늘날 고시 합격생들끼리 동기로 묶여 교류하곤 하는 것처럼, 이때에도 같은 기수 과거 합격생들끼리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김한로뿐 아니라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 가운데 많은 수가 고관에 임용되었고 인간적으로도 태종과 젊을 때부터 가까웠다. 이 점에서도 김한로는 태종의 친위 세력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 능력이나 성품과는 별개로 세자의 장인씩이나 될 수 있었다. 태종의 과거 동기들은 주로 간관으로 임명되거나, 군사와 관련된 사무를 맡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는 방책이다. 김한로가 이런 케이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122], 그는 딸을 세자빈으로 들인 지 단 이틀 뒤에 좌군동지총제에 임명되고 5년 뒤인 태종 12년에는 아예 중군도총제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3군사령부 참모장과 1군사령관에 해당하는 최고위 군직이다.

이렇듯 김한로는 국왕이 병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에 유용하게 쓰인 인사였지만, 김한로 역시 외척 숙청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쫓겨났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난행을 견디다 못해 폐세자하는 과정에서 김한로가 자기 사위인 양녕대군에게 불륜을 주선하는 등 난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혐의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의 분노를 사서 자손들까지 전부 영구 공직추방 및 등용금지 크리를 먹고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태종과 과거 동기이며 역시 상류층 수재 출신이라 친분관계가 돈독했고 사돈까지 맺었던 김한로가 양녕대군의 타락을 부추긴 정황에 태종은 막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김한로는 나와 급제(及第)의 동년(同年)이요, 서로 안 지도 가장 오래된다.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는 침체(沈滯)되었다가, 내가 즉위하자 이에 승선(承宣)을 제수(除授)하여서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또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금일에 이에 이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5일 갑자 1번째 기사
그래도 직첩만 거두고 유배로 그쳤으니 숙청당한 외척들 중에서는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 억울하게 정치공학에 입각해 숙청을 당했다기보다는, 양녕대군을 아꼈던 태종의 배신감이 강하게 작용한데다 김한로 자신이 행동을 잘못했기에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인상을 준다. 다만 태종이 숙청을 해도 생명을 거두는 것은 최대한 자제한걸 생각해보면 야심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국구가 될 뻔했는데 국구가 될 일조차 없어진 옛 친구를 처형해봐야 정치적 이득도 없기에 천수를 누리게 해 준 것은 이상한 게 아니다. 물론 아들사랑이 지극한 태종이 양녕대군의 세자위를 최대한 지켜주려 했던 노력들을 생각해보면 '본인의 의중을 무시하고 세자에게 휘둘려 세자의 탈선을 부추긴데 대한 아버지로서의 서운함'이 반영되어 귀양을 보냈을 가능성은 있지만 태종은 이미지와 달리 향후 왕권에 상관관계가 있을 때를 제외하면 생명 박탈은 거의 하지 않았기에 김한로가 오랜 벗이 아니어도 처형이 되었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123]

4.5.4. 청송 심씨 숙청

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이자 태종 본인의 또다른 사돈인 심온의 집안까지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군권을 가지고 있던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강등됐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 사후에야 복권되었다. 이들을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들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했다. 즉, 정리하자면 딸이 조선의 정실 왕비이고, 사위는 왕인데 정작 그 장모와 처남들은 변방에서 노비로 굴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만든 사돈이 죽고도 친정을 시작한 사위가 자기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선뜻 고치질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

외척인 민씨 형제나 이숙번과 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이들은 왕권에 대해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 숙청만큼은 조금 도가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다. 심온도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와 같이 집안 배경이 좀 좋은 것 외에는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행정 관료였지 주변 세력을 결집시켜 파벌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124] 되려 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125]

그나마 이 시기의 세종은 그냥 똑똑한 왕자였을 뿐 권좌 코스가 예정된 세자가 아니었으니 별일 있겠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세종의 큰형 양녕대군이 온갖 비행을 저지른 끝에 세자 자리에서 폐출되면서 사태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심온의 숙청 직후 박은을 비롯한 몇몇 신하들이 소헌왕후 또한 역적의 딸이니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적들에게 온갖 이유를 다 엮어대며 숙청하던 태종도 며느리의 폐출만큼은 대놓고 거부했다. 역적이면 삼족을 멸하는 게 원칙인데도 딸은 출가외인이라 연좌할 수 없다느니, 옛 경전에도 자식은 죄를 안 받는다고 나온다느니, 예전에 민씨 일가가 역적죄로 죽어나갈 때는 폐비 소리는 꺼내지도 않더니 왜 이제 와서 난리냐고 온갖 억지를 써가면서 말이다. 소헌왕후와 금슬이 좋던 세종 또한 결사반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 이때 당시 소헌왕후는 세종의 아들을 셋이나 낳으며 내명부의 수장으로 입지를 공고히 했고, 이미 심온의 숙청으로 인해 친가가 박살나면서 왕후로서 국정에 간섭할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태종 입장에서도 소헌왕후는 나름 신경써서 택한 좋은 며느리였으니[126], 자신의 외척 숙청 때문에 소헌왕후까지 폐출시키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 오히려 소헌왕후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의 친정을 박살냈다고 보는게 맞다. 자기 아들이 외척때문에 고생하지 않으라고 사돈가를 박살낸건데 소헌왕후를 폐출시키면 그 모든 살육이 무의미해진다.

게다가 어차피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세종이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새 왕비의 가문도 또 어느 정도 박살내야 하는데다가[127]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소헌왕후의 자식들 때문에 정통성이 문제가 된다. 당장 자신과 자신의 동복 형, 그리고 자신이 죽인 의안대군이 겪었던 복잡한 상황을 본인 손으로 자식에게 대를 이어 물려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으로선 소헌왕후의 폐출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다만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금슬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128], 행여나 태종 사후에 세종이 소헌왕후의 한을 풀어주려고 하다 정국이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하긴 해서 가례색을 설치하고 세종에게 억지로 후궁들을 뽑아 들여보냈다.

고로 소헌왕후의 입장에서는 친정이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남편은 다른 여자들하고 밤을 보내고 있으니 오히려 차라리 자진해서 폐출당하고 싶었을 심정인데도 막혀버렸으니 시아버지 태종이 배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129] 소헌왕후가 불굴의 의지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기에 망정이지, 보통 여인이라면 홧병으로 병사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소헌왕후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서 왕위 계승과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왕자결혼했는데 갑자기 세자가 되고 그 3개월만에 왕이 되어 자신의 신분이 불과 1년도 안 되어 일개 왕자의 부인에서 왕비로 올라갔는데, 그 다음 1년 사이에 시아버지가 아버지를 사사시키고 자신의 가족들을 관노로 보냈다고 쳐 보자. 그리고 소헌왕후가 알았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안다면? 딱 사람 미치기 좋은 환경이다.

물론 정말로 소헌왕후가 죽게 되면 태종 입장에서는 빅엿을 먹은 기분이겠지만...조선시대의 왕에게 왕비는 단순히 왕손을 낳아주는 기계가 아니라 내명부의 수장이기도 했기에, 왕은 아무리 싫다 해도 왕비를 얻을 것이 거의 의무이다시피 했다. 훗날 영조환갑을 넘긴 이후에 정순왕후를 맞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종을 제외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왕비가 일찍 죽으면 전원 예외없이 재혼하여 계비(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였다. 단, 예외적으로 고종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에도 새 왕비를 맞지 않았다.

각설하고, 다시 태종 쪽으로 돌아와 보면 소헌왕후가 만약 갑자기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기껏 소헌왕후의 친정을 개작살냈더니만 덜컥 왕비가 죽어서 다시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 새 왕비의 친정도 또 개작살내야 한다는 심히 뒷골이 당기는 상황이 온다. 더욱이 이 시점에 이르면 "전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전 왕비가 죽게 했는데 이젠 새 왕비 친정을 박살 내서 새 왕비를 죽게 할 셈입니까?"라는 반대론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게다가 인륜상으로도 결국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네 집안을 박살 내 며느리도 죽게 만든 것이니(그것도 며느리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결코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따라서 위에 언급했듯이 태종 입장에선 소헌왕후 본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결국 태종의 사돈들 중에서 숙청을 피한 쪽들은 불교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계승에서 배제된 효령대군어른도 못 되고 요절해버린 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였다.[130]

단 심온의 가문이 마냥 억울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심온 문서에도 잘 나와있다. 심온 본인은 청렴한 사람이었고, 심온 개인 한정으로만 보자면 태종에게 잘못한것도 없고 정사를 처리한 면에서 잘못한 것도 없다. 단 심온의 가장 큰 죄는 집안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이었고 외척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는 태종의 심리를 이전에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제처럼 자신의 집안을 다그치고 태종에게 자신의 집안을 쳐내달라고 간청했으면 태종이 심온 자신만은 민제처럼 어떻게든 구명해줄 수까지야 있었을것이나 심온 자신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에 심온에게도 결국 화가 끼치게 된 것이다.[131]

4.6. 공신 숙청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손자 세조와 가장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을 싹 숙청했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숙청했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에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132] 이숙번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복권이 안 되었고, 세종대왕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기록 보완이 완성되고 나서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33]

그래도 태종이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손에 피를 많이 묻혔을지언정, 공신 숙청에 한해서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치세에는 사화나 환국 같은 대형 사건들은 없었고,[134] 태종은 피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숙청의 방식도 대체로 살생보다는 유배를 보내거나 실권을 빼앗는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주로 썼다. 여타 다른 공신들도 직접 숙청하기보다는 나이 등의 이유로 품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식으로 그만두게 하였다.[135]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하륜조영무 정도였다. 이 중 조영무는 처신을 철저히 잘해서 피했고,[136] 특히 하륜은 20세 연상의 고령이라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했는데, 여러 삽질을 일으켜도 태종이 억지까지 부리며 보호했다. 하륜은 태종 16년, 조영무는 태종 14년에 태종보다 일찍 사망하였다.[137]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와 주요 관련자들 위주로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그 흔한 학살이나 피의 대숙청과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 왕이 친정한 유일한 난인 조사의의 난에도 주모자급 십수 명 정도만 처형하는 자비로움을 보여 주었다. 이 정도의 난이면 관련자의 구족을 멸하는 게 일반적인데다가, 조선 역사의 후대에는 창칼이 부딪힌 진짜 반란에는 한참 미달되는 단순 썰, 소문, 모의, 참소 등으로도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을 생각하면 자비로운 것이 맞다.[138] 물론 관련자 중 선대 왕이자 자기 아버지인 이성계가 있는지라 막 처형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139]

이후에 세조, 연산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 숙종, 경종, 영조를 비롯해서 심지어는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정순왕후조차 태종 때보다 훨씬 많은 숙청을 했다. 이들은 더 많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음에도 태종보다 안정적인 왕권과 정치 안정을 얻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조선에 악영향과 정치혼란만 가중시켰다.[140]

조선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훈구파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파들을 불러들였다가 역으로 사림파들에게 쥐락펴락 당하며 좋아하는 한 마리 마음대로 날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과 비교해보면,[141] 결과적으로 태종의 숙청은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실제로 학계에선 “태종은 오명(汚名)은 자신이 받고 영광은 모두 세종에게 물려줌으로써 세종이 아무런 짐 없이 홀가분하게 국가 경영을 시작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줬다”고 평가한다. #

4.7. 인재 등용

개국공신, 처가식구도 쳐내… ‘태종 리더십’에 국가경영 답있다

태종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해 여러 업무에 써먹었다. 정적의 혈친이라도 필요하면 중용했다. 정몽주의 두 아들에게 벼슬길을 열어줬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판서까지 올렸다. 태종실록에 나주목 판사 임명을 앞두고 두 사람을 고민하다가 좌의정 성석린에게 의견을 구하는 대목이 나온다. 성석린이 ‘일을 처리하는 재주는 정진이 낫다’고 하자 태종은 곧바로 그를 임명했다. ‘정도전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선 개국을 반대한 목은 이색의 자식과 문인들도 품어 안았다.

태종이 인재를 쓰는 안목은 세종·세조 시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세종 시대 주역인 황희, 맹사성, 조말생, 허조, 장영실은 모두 태종이 채용해 써먹은 사람이고, 세조 때 정승이 된 정인지는 태종이 장원급제자로 직접 뽑았다. 태종실록엔 “내가 전라도 절제사를 했다고 해서 전라도 사람만 등용해야 되는가”고 신하들에게 따져 묻는 태종의 육성이 나온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람을 보는 눈. 태종은 사람을 판별할 때 ‘곧음[直]’ 여부를 잣대로 삼았다. 곧음이란 스스로의 원칙에 입각해 덕(德)을 기르고 의(義)에 따라 행동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에 따르면 “태종이 ‘직’을 말한 사례를 전부 검색했더니 강직(剛直), 공직(公直), 충직(忠直), 눌직(訥直·말은 어눌하지만 마음속은 곧음) 등 열세 유형이 나왔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최고의 ‘직’은 순직(純直)으로 이는 마음속에 간사함이 조금도 섞이지 않고 곧다는 뜻으로, 아들 세종의 품성을 이렇게 평했다. 태종 18년(1418) 세자 충녕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밝히며 “세자는 순직하니 임금을 맡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측근인 하륜조영무를 중용한 것도 ‘질직(質直·바탕이 곧음)’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신하들이 하륜에 대해 불평하자 태종은 “하륜이 다질소문(多質少文)하다”고 달랜다. 바탕은 곧은데, 그걸 부드럽게 잘 표현해내지 못하는 성미이니 이해하라고 편을 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한품서용제를 실시하여 서얼에게 문과 응시의 기회를 어느 정도 제공하였다. 간혹 태종이 서얼금고법적서제도를 도입한 것 때문에 태종이 원래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서얼 차별을 만들어 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는 조선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생겼던 오해에 불과하며 사실 한국 사회에 서얼 차별은 조선 이전 시대부터 존재하던 것이었고 태종이 도입한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는 조선 이전 시대부터 존재해서 조선시대에 이어진 서얼 차별을 명시만 하는 법에 불과하였다. 오히려 태종은 조선 이전 시대보다 더 개방적인 신분제를 백성들에게 제공하여서 많은 백성들에게 신분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렇듯 태종은 사람보는 눈이 뛰어났고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군주였다.

4.8. 대명 외교

애초에 제2차 요동정벌[142]에 참여하여 명나라를 침략할 뻔 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 전부터 태종 본인이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143] 홍무제영락제도 모두 접견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와는 서로 보위 계승자의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아래와 같이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144]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 기간이 겹친 시기였던 만큼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영락제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어느 정도 작용하여 조공 무역을 1년에 3회[145]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146]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안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하지만 태종이 영락제와 사이가 마냥 좋았던 것도 아니어서 여진족 관련 문제로 명과 충돌한 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이미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상국인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하여 명나라 황제를 상대로 속이기로 하며 무려 정보공작(...)을 시전하기로 했다. 그래서 황제에게 고한 즉 '명나라 영토를 침공한게 아니라 치안대가 우리 백성 죽이고 도망간 살인강도놈들 쫓아가다가 거기 추장이 도적놈들 협공하자고 해서 걔네 땅에 들어간건데, 추장놈이 막판에 쌩까고 안나와서 우리만 덜렁 남아서 도적놈들 잡은거임. 아? 죽은 도적 두령들이 명나라 관직을 받았었음? 우린 전혀 몰랐음요. 유감임.'[147]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다행히 계책이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조선을 배반하고 명나라에 붙은 여진족들을 명나라를 속이면서까지 곧바로 토벌할 정도로 태종은 명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태종의 사대외교는 냉철한 현실적 국익판단에 따른 실리외교였다.

그 외에 정도전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하던 시기는 명나라도 내부 사정으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정도전의 발안대로 했다면 요동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여서 좌절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긴 하다. 그렇지만 영락제가 명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걸 생각해보면... 어차피 정벌해봤자 다시 빼앗겼거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요동 정벌을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가 여러 한계로 인해 다시 포기하고 철수했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역시도 요동 정벌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4.9. 여진 정벌

조선 최초의 여진 정벌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의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의 추장들을 위소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조선의 영향력 내에 있던 여진족들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명의 건주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조선이 보복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출처.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출처.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의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조선의 정벌에 대한 복수로 수 차례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출처.

그러나 이후 1410년 다른 여진족들한테 4차례나 피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전선을 경원부에서 경성으로 물리고 나중에는 경원진을 혁파하였고 1417년 경원부를 재설치하였다.

5. 상왕

5.1. 양위

十八年騎虎 亦已足矣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8월 8일 을유 2번째기사, 세자에게 국보를 주며
1418년에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스스로 양위한 사람은 태종이 유일하다.[148] 하지만 군권은 여전히 자신이 쥐고 있었고 세종이 30세에 넘길 예정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30세가 되기 전에 태종이 승하하면서 세종은 더 이른 시기에 군권을 쥐게 되었다. 일부 분야에 대해 대리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세종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박은 등을 시켜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을 박살냈다. 이 때문에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에서는 박은과 그의 가문 반남 박씨를 열렬히 비판하였다. 태종을 대놓고 비판할 순 없으므로 대신 심온 숙청을 주도한 박은을 비판한 것.[149] 또한 세종 즉위 초기에 이루어진 이종무대마도 정벌(기해동정)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150]그렇게 상왕이 되어서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놀러 다니려고 각지에 정자를 짓고, 좋아하는 사냥을 다니는 등 신나게 살았지만[151], 해야 할 일만큼은 꾸준히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명의 사신들이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도 했다.
"주상이 효양하는 가운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니, 무엇을 근심하며 무엇을 구하겠느냐."

"내가 진실로 본디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노성(老成)[152]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하였구나."

"주상은 참으로 문왕(文王) 같은 임금이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닐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이 천하에 오직 나 하나 사람 뿐이다.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진실로 나의 오늘과 같지 못하였고, 고려 때의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또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니, 내 어찌 이 천하에서 뿐이랴. 고금에도 역시 나 한사람 뿐일 것이다."
-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5월 16일 계미 1번째기사
정리하면 역대 중국 황제들도 후계자와의 사이가 좋지 못해 고생했고, 한반도에서도 충숙왕과 충혜왕 등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못해 고생한 군주들이 많았는데, 자신은 매우 뛰어난 후계자를 얻은 덕분에 아무 고생도 안한다며 자신만큼 후계자 덕을 잘 본 군주는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세종의 뛰어남을 극찬하는 발언이다. 이렇듯 태종은 세종을 후하게 평가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다.

5.2. 최후

태상왕이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에서 훙(薨)하니, 춘추가 56세이었다. 태상왕은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직하고 너그러우며, 경전과 사기를 박람(博覽)하여 고금의 일을 밝게 알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 사물의 진위(眞僞)를 밝게 알며,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선행(善行)이 있는 자도 등용하지 아니한 일이 없고, 선대의 제사에는 반드시 친히 참사하고, 중국과의 교제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고, 재상에게 〈국사를〉 위임하고 환관을 억제하며, 상줄 데 상주고, 벌줄 데 벌주되, 친소(親疎)로 차등을 두지 아니하고, 관직을 임명하되, 연조로 계급을 올려 주지 아니하고,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며, 검박한 덕을 행하고 사치와 화려한 것을 없애어, 20년 동안에 백성이 편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차 있고, 해적들이 와서 굴복하고, 예의가 바르고 음악이 고르며, 〈모든 법의〉 강령이 서고 조목이 제정되었다. 성품이 신선과 부처의 도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사사(寺社)를 개혁하여 노비를 거두고 전답을 감하였으며, 원경 왕태후의 초상에 유학의 예법을 준행하고 불사(佛事)는 하지 아니하였다.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 1번째기사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세종과 매사냥을 돌아온 직후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원경왕후가 태종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며, 태종보다 2년 일찍 사망했다). 아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종에게 자신이 과거 유배를 보냈던 황희[153] 다시 불러 중히 쓰라고 충고하였고, 태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황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왕릉 중 헌릉만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과 모후가 저세상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태종도 생전에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거긴 장차 내가 들어갈 곳이고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절은 왜 짓냐?"며 반발했던 것으로 보아 본인도 죽으면 원경왕후의 곁에 묻히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종은 이후 자신이 죽으면 아버지 무덤 옆에 묻히겠다고 생각을 하고 헌릉 주변인 현재의 국가정보원 일대에 미리 무덤 자리를 보았는데, 여기와 관련해서는 영릉 문서 참조.


[1] 밑으로 동생 이방연이 있었으나 태조 2년(1393년) 환조의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조몰(早歿)”하여 원윤(元尹)으로 증직(贈職)하였다는 내용이 보여 개국 이전에 일찍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2] 당시 과거 시험의 최종 등급은 1~3등은 을과, 4~10등은 병과, 11~33등은 동진사로 구분되었다.[3] 이 대목에 숨은 함의 중 하나는, 고려사는 엄연히 조선에서 편찬된 관찬사서인 만큼 당연히 조정의 공식적인 역사관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는데, 고려시대 과거 합격의 효력이 조선으로 그대로 승계되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4] 오히려 조용하고 유약한 이미지가 강한 둘째형 이방과야말로 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고려 말의 숱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 고증을 적절히 살려 이방원은 무장 병사 한명도 제대로 제압하기 힘든 백면서생에 가깝게 묘사되고, 형 이방과는 반대로 칼든 동생도 한번에 제압해버리는 무장으로 묘사된다.[5] 서울부터 부산까지의 거리가 천리가 조금 안된다. 그에 10배 정도 되는 거리인 셈.[6] 태조실록 태조 3년 갑술(1394년) 6월 1일 기사.[7] 물론 명나라에 도착한 후에는 당시 태조 이성계의 측근 중 한명이였던 정도전을 견제하기 위해 주원장으로부터 잘 대접받았고 또, 영락제와 안면을 트는 등 득이 실보다 많았다. 하지만 그거야 결과론이고 당시에는 관계가 상당히 험악했던 만큼 목숨을 장담하기 쉬운 건 아니었다. 또, 그게 아니더라도 한양에서 남경까지 가려면 그 거리만으로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배를 타고 가더라도 풍랑을 만날 위험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 육로는 육로대로 여진족이 있는 곳을 통과해야 해서 오히려 해로보다도 더 위험했다. 태조가 말한 태종의 허약함에 대한 부분은 오히려 이 사신가는 길의 어려움 때문에 한 말일 듯하다.[8] 정도전이 일부러 이방원을 명의 손을 빌어 없애기 위해 보내려고 했으나 이방원 역시 하륜의 충고를 듣고 한번 모험을 걸어볼 겸 자원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당시 갈 만한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아서(정도전이 꾀하던 요동 정벌을 변명하기 위한 사신이었기 때문이다.) 고위급 인물들 중에서도 조준, 정도전급 인사를(이 둘은 당시 조선 조정의 투탑이었다.) 보냈어야 했는데 정도전은 애시당초 문제의 근원이라 갔다간 바로 사망이라 태조가 보내기 싫어했고 그렇다고 정도전으로 인해 벌어진 문제에 조준을 보낸다는 것도 문제가 있어서(정도전과 조준은 둘 다 태조의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적에 가까웠다. 당장 조준은 왕세자 책봉 당시 태조의 명령에 따라 이방석을 지지해야 했던 정도전과는 달리 이방원을 지지했기도 했고.) 누굴 보내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거기에 장성하고 정치력이 뛰어난 왕자를 보낸다는 건 위험도를 제외하면 매우 적절한 인사라고 할 만했다.[9] 참고로 고려·조선 대 당시 왕실의 사냥은 그냥 말 타고 짐승 활로 쏘는 수준이 아니라, 전문 사냥꾼과 몰이꾼, 경호 병력, 친한 신하들, 식사를 담당할 궁인들과 잡무를 맡는 환관 등이 전부 이동하는, 쉽게 말해 워크샵이다. 신하들이 사냥상관과의 회식을 반대하는 이유가 충분한 것.[10] 수양대군영의정에 오른 적이 있지만 과거는 치르지 않았다. 이후 왕족 종친이 벼슬에 임하는 제도는 성종 대에 구성군(영의정 역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나 훗날 고종 때 중부(仲父), 즉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11] 고려 시대에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차별은 상당해서 무신정변이 일어날 정도였다. 게다가 한글도 없어서 지식의 차원이 아닌 글자(한문)를 아는 자체가 힘인 시대였으며, 무과가 따로 있어서 무신도 유교 소양과 글쓰기 역량은 갖고 있어야 했던 조선과 달리 고려의 무신은 무과가 따로 없어서 일종의 수시채용 형태로 임용되어 글이 짧고 인문 소양이 부족했었다. 무신정권에서 서방이라는 별도의 문신 자문기관을 둔 이유도 이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록에도 (최영 장군에 대한 견제의 의미도 있지만) 최영을 '불학(不學)' 즉, 못배웠다며 디스할 정도였다. 무과가 도입된 조선에서는 그나마 무신들이 먹물을 좀 먹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임진왜란에서도 문신들이 무신들의 공신 책봉 등을 견제하려고 은근히 무신의 공을 깎으려는 등 그 분위기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12] 다만 문극겸은 이방원의 8대조로 너무 먼 조상인데다가 문극겸 또한 과거에 3연속 낙방하여 결국 음서로 관직에 나간 인물이므로 이방원의 뛰어남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13] 최충의 9재 학당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학 12도를 생각해보면 고려시대의 과거는 전문적인 사학에서 배우지 않고서는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학들은 단순히 교육 수준만 문제가 아니라 좌주와 문생 관계로 인맥을 쌓고 족보를 대대로 전해온 사학 출신 지공거(감독관)와의 인맥 문제까지 엮여서 공고한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이런 살벌한 경쟁을 뚫어볼 수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스승은 원천석으로 알려져 있다. 모 드라마를 근거로 정몽주 밑에서 배웠다는 루머도 떠돌지만 관련하여 드라마 이상의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후일 장인이 되는 민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14] 오늘날에도 가문 최초로 고시에 합격하면 충분히 문중의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15] 이성계가 직접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6] 전리정랑은 전리사의 정랑이다. 전리사는 문관의 인사와 학교를 담당하는 기관이고 정랑은 정5품의 관직이다. 지금으로 치면 인사혁신처 서기관 겸 교육부 서기관으로 중앙부처의 과장급 관직이라 할 수 있는데, 비록 아버지인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권신 이인임과 그의 잔당 제거에 동참하여 수문하시중(지금의 부총리급 관직) 되었다는 것을 감안해봐도 어린 나이에도 문관의 인사권을 가진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7] 훗날 이 이복동생들을 본인의 손으로 몸소 죽이고, 계모인 신덕왕후는 그녀의 능에 설치된 석물을 뭉개는 고인능욕을 시전했으니 참으로 얄궂은 우연이라 하겠다. 이방원의 동생 이방연이 이때 우왕의 손에 처형당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이 있다.[18] 여말쯤 가면 국가의 기강 전체가 흔들리는 혼란상 때문에 3년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굳이 말기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숭불 사상 때문에 유교의 영향력이 조선시대만큼 높지 않았다. 성리학 이전의 유학은 대체적으로 성리학처럼 철학적이며, 형이상적인 복잡한 심상세계를 논하지 않고, 국가체제 운용방식에 집중하였다. 그러하였기에 편의에 따라서 도가적인 사상과도 결합되었고, 이후에 불교를 국교로 하면서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시묘살이까지 하면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19] 즉, 이 상황은 방원이 강씨더러 내 편을 들어달라고 징징대자 강씨가 정말로 태조를 타박하고 방원을 편들어준 것이다.[20] 다만 정몽주는 당대 고려 유림의 최고 거두였다. 이방원 역시 유학자인 만큼 아버지 이성계와는 정치 관계에 별개로 절친한 사이이기도 하니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방문한 정몽주에게 인사를 청하고 대화를 나눴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21] 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년 & 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년[22] 애시당초 조선의 명군 중 한 명이니 능력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23] 물론 이 자리에서는 이성계를 두려워해서 결국 아무것도 못하지만... 이 사실을 이방원이 몰랐다고 보기도 힘들고, 설령 몰랐다고 하더라도 결심한 것을 무를 정도로 물러터진 인물도 아니다.[24] 애시당초 이성계가 부상으로 잠시 리타이어한 상태에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당여들을 숙청하려 했을 때 당장 부상을 입은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모셔온 사람이 방원이었다. 이후 태종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방원의 정치력은 아버지 태조보다 위였다. 괜히 국왕으로 등극한 후 막강한 공신들 권력을 죄다 견제하고 세종이 마음껏 치세를 펼치도록 한 사람이 아니다.[25] 결국 범인임이 훤히 드러난 이방원을 죽이지 않았는데 범인을 몰랐다고 자기 당여들을 마구 죽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정작 정몽주가 죽고 나자 공양왕을 협박해서 그대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것만 봐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할 수 있다.[26] 앞서도 나왔듯이 이방과, 이지란, 이제, 이화 등은 정몽주를 척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했지만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 함부로 나서려 하지 않았다.[27] 태조 3년 11월 19일 을묘 2번째기사[28] 문제는 방석은 막내고 그 사실만으로도 절대 적절한 조건을 가졌다고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해 방석이 즉위하는 순간 그 위의 형들은 전부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방석은 형들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왕위에 오른 형이 어지간한 폭군이거나 혹은 방석 본인이 반역을 일으키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목숨을 위협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 특히 원래라면 왕좌와 가장 가까웠던 방과나 방원은 신덕왕후 강씨와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었으므로 더더욱 그렇고 또, 개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왕위다툼이 아닌 이상 그리 쉽게 왕족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29] 세자위의 안정을 위해 여타 왕자가 세자가 되었더라도 나머지 왕자들의 권력에서의 배제는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차기 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세자가 아닌 왕자이기 때문이다. 제 1차, 2차 왕자의 난을 보면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30]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종법제를 따르므로 적장자가 가장 우선권이 있고 이후 적장자의 아들 순으로 계승권을 가지게 되며 그마저 없어야 차남, 삼남에게 순서가 온다. 적자가 없으면 서장자가 우선권을 갖고 다시 서장자의 아들이 권리를 가지며 마찬가지로 서장자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라야 차남, 삼남... 순이 된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차남, 삼남 역시 그들의 자손들이(즉, 차남 다음은 차남의 후손이 삼남보다) 더 우선시된다.[31] 사실 방과는 무장으로서는 뛰어났지만 정치 능력은 그리 높지 않았다. 반면 방원은 과거를 급제한 문관 출신인 만큼 유학자들 중에서는 방원과 관련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당장 장인인 민제가 유학자로 이름 높은 사람이라 그 제자들도 많았는데 그들 전부가 사실상 이방원의 당여라고 할 정도였고 정도전과 사이가 안 좋은 조준도 세자 자리에 방원을 거론할 정도였다.[32] 결국 방간은 승산이 전혀 없음에도 박포의 꼬임에 넘어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정치적으로 자멸당하고 만다.[33] 아니면 1, 2차 왕자의 난 못잖은 내란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방원만 나서지 않고 다른 왕자들까지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34] 태종이 훗날 정릉을 파헤치고 석물을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은 것에 이러한 이유도 있을 수 있다.[35] 본인이 와병 중이라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구 세력의 불만으로부터 왕실을 보위해줘야 할 왕자와 종친들이 그들과 결탁해버려 왕실에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친위세력이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태조가 나서서 명분을 가져오고 반군의 사기를 꺾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다만 와병 중이라 일선에 나서지 못한 게 아니라 와병 중인 상황을 캐치하고 바로 그 시점에 난을 일으켰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설령 와병 중이 아니더라도 불만은 불만이고 이를 풀지 않는 한은 안고 갈 수밖에 없다. 즉, 이런 불만은 언제든지 시한폭탄이 될 수 있었던 것. 마침 그 시점이 무인정사가 되었던 것일 뿐이다.[36] 특히 사병 혁파는 정도전이 사병들을 빼앗고는 왕자들의 살해를 획책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 요동 정벌까지 포함하면 왕자들을 차도살인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지 의문이지만 물론 그렇다고 실제로 정도전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근거는 없다. 아무튼 그렇다보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는 프로파간다가 먹힐 수 있었던 것. 이후 태종 때 다시 한번 사병 혁파에 들어갔지만 이 때는 유의미한 반발이 거의 없었던 것만 봐도 비교가 된다. 즉, 정말로 종친들은 정도전에게 위협을 느꼈던 것.[37]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정변은 죽일 사람과 살려서 끌고 갈 사람까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원칙이다. 게다가 이제를 살려두면 후대에 문종의 사위인 정종이 문종의 하나뿐인 아들 단종의 복위사건을 도모한 것처럼 잡음이 생길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본인의 승인이 없었다고 부인하였으나, 사전합의 하에 실행하였을 것이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 기록을 언급할 때 '퍽이나 그럴 마음이 없으셨겠어.'라는 식으로 디스했다.[38]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반영했는데, 전자의 경우 이숙번이 이끄는 나무 몽둥이를 든 병사 수십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무기고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후자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 이끄는 병력이 이숙번의 원군으로 등장하여 숙위병들을 무찌르고 삼군부를 장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39]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 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40]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2월 29일 5번째 기사[41] 다만 상술된 이방원이 왜구방비를 위해 전라도로 파견된 기록과 후술된 이방원의 전라도 절제사 임명 기록을 보면 좀 전일 수도 있다.[42] 물론 전공은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장수로서 세운 공이지 조선 건국과는 별 상관 없는 것이었다.[43] 장원은 아니었지만 그건 애시당초 주변 경쟁자들이 워낙 빵빵한 능력자라서 그랬을 뿐이고 병7등도 결코 낮은 성적은 아닌 데다가(보통 30명을 뽑는데 장원(갑과) 1명, 방안(을과) 2명을 제외하면 병과 7등이면 전체 10등이다.) 무엇보다 이 때 이방원은 최연소 급제자였다. 거기다 이 당시 전주 이씨 가문은 함경도에서 이제 막 개경에 편입된 초짜 무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과거 급제는 가문으로써도 엄청난 영광이었다. 오죽했으면 이성계 본인이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한 것을 두고 급제장을 이사람 저사람에게 보여주고 기뻐했다는 말이 나왔을까.[44] 사실 위화도 회군 때도 우왕이 이 사실에 분노해 이성계의 처자식들을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이방원은 몸을 피하면서 서모와 이복동생들까지도 빼돌렸다. 심지어 동생 이방연은 이 때 우왕에게 잡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45] 문관 출신이고 뛰어난 학자인 민제의 사위다보니 학맥부터가 엄청났다. 심지어 처형이 둘 처제가 하나 처남이 넷이나 되는 탓에 혼맥 또한 엄청났다.[46] 거기다 이들은 대부분 단독으로 군사를 부리는 것이 가능한 인물들이었는데, 문관 출신이라 군무는 어느정도 알아도 직접 군사를 부린 경험은 전무한 정도전 일파와는 대조적이었다.[47]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상당히 험악했는데 거기에 이방원을 보낸 것인 만큼 의도가 뻔했다. 사실 당시 상황이 꼬이는 바람에 왕자나 정승급이 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는데 그렇다고 정도전을 보내는 건 논외였는데 사실 정도전이 명에 가면 바로 주원장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당시 상황이 꼬인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정도전의 요동 정벌이었기 때문. 그렇다고 조준을 보내면 그것대로 불만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일은 정도전이 벌여놓고 그 뒷수습을 위해 조준더러 가라고 하면 좋아할 리가 없다. 하물며 조준과 정도전은 역성혁명 당시에는 동지였으나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거의 정적에 가까웠다.[48] 애시당초 이방석에게 걸림돌이 될 한씨 소생 왕자가 넷인데(이방우는 진작에 탈락했고 조선이 건국되고 바로 사망했으며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이미 사망했다.) 그 중 둘째와 셋째는 야심이 그리 크지 않았고 넷째는 야심은 많지만 능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지만 다섯째만큼은 능력, 야심, 인맥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당장 직전에 명나라에 보낼 사신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콕 찝어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방원을 경시했다면 위에 있는 형들을 냅두고 굳이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실질적 막내격인 방원을 보내려 했을 리 없다.[49] 기린아라 불리던 곽거병은 20대 초반에 요절해서 썩은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내려오는 판이고, 그 자연재해께서도 지병으로 위장병을 달고 사셨다. 영락제도 원정 중에 병사했다.[50] 그래도 형제간에 우애는 있었기에 목숨만은 건질수 있었던것으로 볼수도 있다.[51] 정종의 경우는 적자가 없어서 그렇지 서자들은 매우 많아서 고자 의혹은 확실하게 피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국모인 정안왕후가 완벽한 석녀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에 곤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이후 조선에서 정식으로 '왕세제'에 책봉된 사람은 경종의 이복동생 영조밖에 없게 된다. 당시 청나라에서도 "왕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이라고 묻기도 했는데 당시 경종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보니 사신으로 간 노론 신하 이건명이 "심약하셔서 자손을 못 보셨음."이라고 실제로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훗날 이런 불경한 언사를 한 업보로 이건명신임옥사 당시 목이 잘리는 비참한 운명을 맞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순종황제의 이복동생 영친왕이 순종황제의 황태제가 아니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즉 왕조의 초창기와 말기가 완전히 데칼코마니인 셈.[52] 저이(儲貳) : 세자.[53] 이게 단순히 호칭에서 끝난 게 아니라 훗날 정종이 붕어하고 국상을 치를 때에도 정종의 서자들이 아니라 태종이 아들 지위로 상주를 맡았다.[54] 물론 실수 같은 게 아니고, 애초에 스토쿠 덴노가 실권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도바 덴노의 강압이었다.[55] 원명교체기 한족 중화국가의 회복에 발맞추어 왕조를 교체한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고려는 형제상속, 근친혼, 외왕내제 등 참담하기 그지없는 개판오분전의 비문명 국가였고, 이걸 유교, 특히 성리학 사상에 맞게 하나하나 뜯어고쳐 명실상부한 기자의 후예, 소중화 선진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라 할 수 있었다. 흔히 단군 숭배를 자주적인 것으로, 기자 숭배를 사대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일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물론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단군 숭배든 기자 숭배든 어느 정도는 자주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단군 숭배가 한민족의 국가의 뿌리라면 기자는 한민족의 문명이 중화 문명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 즉, 기자가 동쪽으로 왔기 때문에 한민족은 문화적인 면에서 중국과 대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소중화 사상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56] 원간섭기 이전 마지막 형제승계였던 의종-명종-신종은 매번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폐위/옹립한 것이고, 공식적으로 마지막 형제승계였던 공민왕-공양왕(16촌 동항렬) 사례는(우왕, 창왕은 애초에 왕으로 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자신들이 옹립한 것이다. 원간섭기야 그냥 흑역사고... 이쯤되면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형제승계에 노이로제가 걸릴만 한 일이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결국 그 고려 최악의 종법 파괴 사례판박이인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으니, 후대인들이 그 망할 손자놈과 자신을 비슷하다 평하는 말을 들으면 이방원은 지하에서 피를 토할지도 모르는 일이다.[57] 정확히는 고려의 옛 풍습에 첫눈을 보내는 심부름꾼을 서로 먼저 잡으면 한턱을 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27일 기사.[58] (註 041) 삼가(三家) :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권신(權臣)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계손씨(季孫氏).[59] (註 042) 육경(六卿) :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권세를 잡았던 6족(族) 출신의 6경(卿). 곧 6족은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知氏)·조씨(趙氏)·위씨(魏氏)·한씨(韓氏)를 말함.[60] (註 043)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 : 조선조 태조(太祖) 원년에 의흥 친군(義興親軍)을 통할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태종(太宗) 3년에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로, 세조(世祖) 12년에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였음.[61] 전주 이씨의 사병은 단순한 병력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족장들이 자제들을 보내 편성된 정예병이자 충성의 상징이었다. 태종이 이를 혁파한 것은 단순히 반란에 대한 예방을 떠나 선친들이 동북면을 다스리면서 유목민족에게 얻어낸 영향력마저 포기했단 것이다.[62] 정도전도 역시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후 조선은 태종 ~ 문종 때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정도전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함을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고 했으나, 조선 건국을 도운 전주 이씨 종친들과 공신들의 반발에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같은 왕실의 일원인 이방원이기 때문에 더욱 사병 혁파의 명분을 세우기 쉬웠던 점도 있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한다고 해놓고 그 병사들로 왕자와 왕족들을 숙청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샀다. 그렇다보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선전이 먹혔던 것이다. 사실 정도전은 사상가와 이념가로서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정치력과 처세술이 무척이나 떨어지고 허술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154][63] 참고로 사병혁파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이후 여생을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64] 56) <태조실록>, 위의 책, 권5, 3년 2월 己亥[65] 57) <태조실록>, 위의 책, 권4, 2년 11월 庚戌; <태조실록>, 같은 책, 권8, 4년 8월 己巳[66] 58) 三軍府 관할 하의 陳法訓練은 태조 6년 判義興三軍府事 鄭道傳이 五陣圖와 蒐狩圖를 撰進한 이후 (<태조실록>, 위의 책, 권11, 6년 6월 甲午) 본격적으로 강화 실시되었으며, 그 回數도 빈번하였다.[67] 59) <태조실록>, 위의 책, 권12, 6년 10월 甲午; <태조실록>, 같은 책, 권14, 7년 8월 庚戌[68] 60) <삼봉집> 권13, <조선경국전> 上 軍官[69] 태조 때, 세자빈이 쫓겨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유가 둘이 정을 통해서란 소문이 있었다. 이에 대간에서 제대로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태조에게 간하자 태조는 대노하여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것이냐?"라고 하면서 공신을 제외한 대간 전체를 죄다 유배 보냈다. 이러니 대간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70] 태조 시대에는 제대로 된 제도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국초의 도평의사사는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정부 구조는 개국공신들의 사적 지배 중심의 느슨한 체제였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이 체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추진했던 개혁은 이 사적 지배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태조가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것은 그저 측근이라서가 아니라, 이 개혁이 결국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 드라이브에서 소외되었던 다른 공신들과 혁파 대상이었던 사병 소유자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두희 '조선 전기 중앙통치체제의 성립', 1994) 정도전 개혁을 신권주의니, 재상중심주의 등의 용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도전의 개혁안은 오히려 국왕권 강화와 더 연관이 크다. 태종은 집권을 위해서 구 보수파 및 사병혁파에 반발한 무장들과 손잡았긴 했지만, 근본적인 지향은 정도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71] 공양왕(恭讓王) 2년(1390) 7월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구제(舊制)에 양반호구(兩班戶口)는 반드시 3년에 한 번씩 호적을 작성하여, 1건은 관에 바치고 1건은 집안에 보관하였습니다. 각 호적 안에는 호주(戶主)의 세계(世系) 및 동거하는 자식·형제·조카·사위의 족파(族派)와 함께 노비에 이르기까지 전해진 종파(宗派), 그 소생의 이름과 나이, 노(奴)의 처와 비(婢)의 남편이 양천(良賤)인지를 모조리 기록을 갖춰놓아 쉽게 고열(考閱)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근년 이래로 호적법(戶籍法)이 폐해져서 양반(兩班) 세계를 알아보기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혹 양인을 억압해 천인으로 삼거나(壓良爲賤) 천인을 양인으로 만드니(以賤從良) 결국 옥송(獄訟)이 뜰에 가득차고 관련 문서(案牘)는 매우 어지러워졌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구제에 따라 시행하되, 그 중 호적이 없는 자는 관직 임명장(告身)을 발급받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을 불허하고 또 호적에 편입되지 않은 노비는 모두 공아(公衙)에 속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왕이 받아들였으나 끝내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도당이 호적 제도 시행을 건의하다>, 일자 1390년 07월 미상 (음))[72] 의정부(議政府)에서, 각도(各道) 감사(監司)로 하여금 수판(受判)하여 행이(行移)한 조령(條令)을 고찰하게 할 것을 아뢰었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빌건대, 수판(受判)하여 행이(行移)한 인보법(隣保法)의 조목 내용을 가지고 자세히 상고하여, 오는 12월 안으로 성적(成籍)하여 의정부에 올리게 하고, 만일 조령(條令)을 늦게 봉행(奉行)하였거나 절목(節目)의 사의(事意)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착오한 수령(守令)은 도관찰사(都觀察使)·도순문사(都巡問使)·도수령관(道首領官) 모두 율(律)에 비추어 논죄하게 하고, 그 호적(戶籍)은 3년에 한 번씩 갈아서 성적(成績)하여 의정부에 올리게 하되, 영구한 법식을 삼도록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 7년 11월 2일)[73] 의정부에서 각도의 전답(田畓)과 호구수(戶口數)를 올리었다. 충청도(忠淸道)는 전지(田地)가 22만 3천 90결(結), 호(戶)가 1만 9천 5백 61호, 인구가 4만 4천 4백 76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지(田地)가 17만 3천 9백 90결(結), 호(戶)가 1만 5천 7백 3호(戶), 인구가 3만 9천 1백 51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전지(田地)가 22만 4천 6백 25결, 호(戶)가 4만 8천 9백 92호, 인구가 9만 8천 9백 15명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지(田地)가 9만 9백 22결, 호(戶)가 1만 4천 1백 70호, 인구가 2만 9천 4백 41명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지(田地)가 5만 9천 9백 89결, 호(戶)가 1만 5천 8백 79호, 인구가 2만 9천 2백 38명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전지(田地)가 3천 2백 71결, 호(戶)가 1만 1천 3백 11호, 인구가 2만 8천 6백 93명이고, 서북면(西北面)은 전지(田地)가 6천 6백 48결, 호(戶)가 2만 7천 7백 88호, 인구가 5만 2천 8백 72명으로, 합계가 전지가 78만 2천 5백 43결, 호(戶)가 15만 3천 4백 4호, 인구가 32만 2천 7백 86명이었다. (태종 4년 4월 25일)[74] 호조에서 금년(今年) 제도(諸道)의 호구수(戶口數)를 올렸는데, 경기좌도는 1만 7백 39호(戶)에, 정(丁)이 1만 9천 3백 19명이고, 경기우도는 9천 9백 90호에, 정(丁)이 1만 8천 8백 19명이며, 충청도는 1만 9천 5백 60호에, 정(丁)이 4만 4천 4백 76명이며, 경상도는 4만 8천 9백 93호에, 정(丁)이 9만 8천 9백 15명이며, 전라도는 1만 5천 7백 14호에, 정(丁)이 3만 9천 1백 67명이며, 풍해도는 1만 4천 1백 70호에, 정(丁)이 2만 9천 4백 41명이며, 강원도는 1만 5천 8백 79호에, 정(丁)이 2만 9천 2백 24명이며, 동북면(東北面)은 1만 1천 3백 11호에, 정(丁)이 2만 8천 6백 83명이며, 서북면(西北面)은 3만 3천 8백 90호에, 정(丁)이 6만 2천 3백 21명이었다. (태종 6년 10월 30일)[75] 속육전은≪경제육전≫반행 후인 태조 7년부터 태종 7년까지(1398∼1407)의 법령으로서 준행해야 할 것을 편집한 것이다. 그것은 관리들의 편견이나 사사로운 견해에 기인한 때문이고 창업초의 입법이라 조급한 제정, 임기응변적인 법령이거나 혹은 새로운 법령에 익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영구히 시행하여도 폐단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 비로소 입법하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각사 관리들은 각자의 소견에 사로잡혀 즐겨 신법을 제정하였기 때문에 해당관리들이 준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원육전에 실린 법령은 그 후의 실정에 맞지 않아서 법운용에 불편을 가져왔고 원육전과 속육전 사이, 혹은 이들과 신법이 어긋나는 사태조차 생기게 되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1)≪경국대전≫이전의 법전편찬) 경제육전에서 경국대전으로 (호전戶典 주요조문 중심으로)[76] 기주관(記注官) 신숙주(申叔舟)가 드러내어 말하기를, "무릇 임금의 하고자 하는 바가 비록 아름다운 일일지라도 진실로 먼저 대신과 의논하지 아니하면 일이 마침내 행해지지 못한다. 이제 《오례》는 세종께서 친히 쓰고 지우며, 취하고 버리고, 덜고 더하는 것을 스스로 단정하여 손때(手澤)가 아직 남았고, 우리들이 오랫동안 외람되이 시종(侍從)하며 평소에 목격(目擊)하였는데, 세종이 정력(精力)을 둔 바가 이보다 더함이 없었다. 이를 버리고 기록하지 아니하면서 도리어 한 예조 낭관(禮曹郞官)이 편찬한 《의주(儀注)》를 기록하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된다. 허사재(許四宰)560)(註 560)(허사재(許四宰) : 허후를 가리킴.) 가 기록하지 못하게 하려고 함은 변효문 등이 허 정승(許政丞)이 정한 《의주》를 많이 고친 것을 미워하여서이고,[155] 의정부에서 〈기록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것은 세종이 먼저 정부와 의논하지 아니한 것을 혐의한 때문이다. 신하는 장(將)561)(註 561)(장(將) : 두 가지 마음을 품고 배반하려는 생각을 말함. 금장(今將).) 이 없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이른바 장(將)이다. 신하가 되어 어찌 이렇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기주관도 또한 모두 비난하였다. (단종 즉위년 9월 13일) <국조오례의> 서문에 의하면 조선 왕조의 五禮儀 편찬 계획은 처음 세종조에 수립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世宗莊憲大王 때에 이르러…(중략)…禮曹判書 臣 許稠에게 명하여 ‘諸祀序例’와 ‘吉禮儀’를 詳定토록 하고, 또 集賢殿 儒臣들에게 명하여 ‘五禮儀’를 상정토록 하였다. (중략) 參酌 損益에 있어서 聖心의 재가를 받았으나 미처 시행하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7)[156]...이에 따르면, 세종조에 있어서 ‘오례의’의 편찬과 관련된 작업은 ‘諸祀序例’와 ‘吉禮儀’의 상정 작업과 ‘五禮儀’의 상정 작업의 두 종류 작업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각각 예조판서 허조와 집현전 유신들이 맡아서 추진하였다는 내용으로 정리된다. ‘길례의’를 상정하는 한편으로 ‘오례의’를 상정토록 하였다는 일견 모순되는 이러한 편찬 계획은 세종조의 오례의 편찬 작업의 시말을 전하고 있는 <세종실록> 부록의 ‘오례’ 서문을 통해서 그 잘못 기술된 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國初에는 초창기라 일이 많아 禮文을 갖추지 못하였다. 太宗께서 許稠에게 명하여 吉禮의 ‘序例’와 ‘儀式’을 찬정하게 하였으나 그 밖의 것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매번 큰 일을 만나면 문득 禮官들이 한때 擬定한 것을 취하여 갖추었다. 이에 임금(世宗)께서 鄭陟과 卞孝文에게 명하여 嘉禮, 賓禮, 軍禮, 凶禮 등의 예를 찬정하게 하였다. (중략) 그 이미 완성된 四禮와 허조가 찬한 吉禮를 아울러 실록의 끝에 붙인다.8)[157]...이에 따르면 ‘五禮儀’ 편찬 계획에 앞서서 태종조에 길례(의식과 서례)의 찬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나머지 4례에 대한 찬정 작업은 세종조에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곧 길례의 찬정은 세종조가 아닌 태종조에 이루어졌던 일이며, 따라서 <국조오례의> 서문의 이 부분 내용과는 차이를 보인다. 요컨대 <세종실록>에 부록된 5례 가운데 길례와 나머지 4례는 각각 편찬 시기와 편찬 책임자를 달리했던 것을 하나로 묶어서 수록한 것임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위 <세종실록> 부록 서문의 내용 가운데 “鄭陟과 卞孝文에게 명하여 가례․ 빈례․ 군례․ 흉례 등의 예를 찬정하게 하였다”는 내용은 앞의 <국조오례의> 서문에 “集賢殿 儒臣들에게 명하여 오례의를 상정토록 하였다”는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정척과 변효문 등이 5례의 찬정과 관련해서 세종의 명을 받기는 세종 26년(1444)으로 나타나는데, 당시 세종의 명을 받아 수행한 작업은 4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5례 전체에 대해서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9)[158] 따라서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세종실록> 오례의 서문 내용이 또한 잘못 기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종조에 집현전에서 찬정한 ‘5례의’는 그 전부가 <世宗實錄>에 부록되지 못하고 이 가운데 4례의만 수록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종 즉위년에 세종조 찬정의 오례의를 실록에 수록하는 문제를 두고 당시 실록 기주관과 일부 대신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이 때 태종조에 길례의 편찬을 주도했던 許調의 아들 許詡는 정척 등이 찬한 오례의는 의정부의 검토와 확정을 거치지 않은 미완성의 글이라는 이유를 들어 실록에 수록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이를 김종서 등이 동조하였다.10)[159] 이러한 논의에 대해 당시 실록에 편입할 것을 주장한 여러 기주관 가운데 申叔舟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주목된다....지금의 ‘五禮’는 세종이 친히 필삭하여 취사손익을 몸소 결단하여 손길의 자취가 오히려 남아 있는 것임은 우리들이 오래동안 시종하면서 목격한 바이다. 세종이 정력을 기울인 것이 이 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를 버려두고 수록하지 않으면서 도리어 일개 예조 낭관이 지은 의주는 수록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이 아니다. 許四宰(許詡)가 수록을 반대함은 효문 등이 許政丞(許稠)이 정한 의주를 많이 고친 것을 미워한 때문이고, 정부가 반대함은 세종이 먼저 정부와 더불어 의논하지 않았던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11)[160]...여기서 보면 세종조의 5례의 편찬 작업은 의정부 대신을 배제하고 세종의 주도하에 집현전 유신들이 편찬 실무를 맡아 추진하였고, 의주의 취사손익을 세종이 직접 재결하였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오례의 편찬 작업에 세종이 주도적으로 관여하였던 것은 선대에 찬정된 예제를 고쳐야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경우 의정부 대신과의 논란을 피할 수 없었던 때문으로 짐작된다.12)[161] 위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실제로 세종조의 오례의 편찬 과정에서는 태종대에 찬정된 길례 의주를 상당 부분 수정하였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46-48) 2) <洪武禮制> <洪武禮制>는 명 洪武 年間(1368~398)에 明 太祖의 명에 따라 撰進된 각종 禮書 가운데 하나로 중국 경내의 지방관이 준수해야 할 예제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것이다. 전부 10개 조로 되어있는 데,41)[162] 이 가운데 조선 왕조의 예제 정비와 관련해서 영향을 끼쳤던 것은 ‘祭祀禮儀’ 조의 내용이었다.42)[163] 제사 의례의 정비와 관련하여 <홍무예제>가 준용된 사례는 주로 태종조에 집중되어 나타난다. 이를 예거하면, 厲祭의 시행 (태종 4년 6월 무인), 전국 주현의 사직단 건립 (태종 6년 6월 계해), 문묘의 配位․ 哲位의 신위판 규식 (태종 9년 7월 정축), 산천신․ 풍운뇌우신․ 성황신의 合祀制(태종 11년 5월 무진), 제사의 폐백 제도 (태종 11년 8월 갑인), 제사의 축문식 (태종 11년 윤12월 정사), 백악․ 목멱 산신의 신주 (태종 12년 2월 신유), 악․ 해․ 독의 神號 (태종 13년 6월 을묘), 雩祀의 신주제 (태종 14년 5월 경인), 축판과 축문 (태종 15년 7월 신유), 역대 제왕의 祭日(태종 16년 6월 정해), 제사의 축문식 (태종 16년 7월 임진), 纛祭 의식(세종 12년 11월 기유) 등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실제 시행되지는 못하였지만 里社制의 시행이 <홍무예제>를 근거로 몇차례 논의되기도 하였고, <홍무예제>, ‘祭祀禮儀’ 조의 특정 의주와 배치되는 행례상의 일부 절차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43)[164] 예제 정비 과정에서 <홍무예제>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기는 제사 의례와 관련되는 사항이 대부분이나, 이 밖에 탄일의 朝賀, 迎詔時의 公服, 출가녀의 喪期, 取才, 文字格式, 백관의 朝服, 冠服, 啓本式, 영조시의 龍亭 설치, 영조시의 배례 문제 등과 관련해서 <홍무예제>의 관련 규정이 운위되었다. 이 중에는 일부 4례의와 관련되는 사항이 보이기도 하나 그것이 <국조오례의> 상에 어떠한 형태로 수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아 좀더 고구를 요한다.44)[165] 조선초기 예제 정비 과정에서 <홍무예제>에 규정된 특정의 예제 관련 내용이 이처럼 많이 논의되었던 것은 <홍무예제>가 명 태조가 반강한 ‘時王之制’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세종조 이후 <홍무예제>는 중국 경내의 지방 단위에서 시행되는 제도로서 조선의 국가 의례로 준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오례의 편찬이 개시되는 세종 26년 이후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홍무예제>가 시왕의 제도로서 중시되는 분위기에 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오례의를 ‘詳定’하는 데 소용되기에는 내용이 소략하였다. 따라서 <홍무예제>가 조선왕조의 오례의 편찬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다고 하겠으나, 다만 조선 초기 祀典 정비 과정에서 일부 <홍무예제>의 규정이 수용됨으로써 그것이 <국조오례의>, 길례의에 일부 반영되었을 따름이다.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59-60) <국조오례의>에 수용된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의 33종 제의는 거개가 <개원례>의 祭儀 가운데 황제국에서만 행할 수 있는 제례를 제외한 나머지 제의를 대체로 수용한 것으로 나타난다.53)[166] 따라서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 의식, 곧 태종조 찬정의 길례 의식은 당의 <개원례>를 모방하였다고 할 수 있다.54)[167] 한편 <국조오례의>와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 의식의 종류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세종조에 이르러 태종조와는 다른 차원의 사전 정비 작업이 이루어진 결과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66) 요컨대 <국조오례의> 길례의 각종 제의는 <세종실록> 오례에 나타나는 태종조 찬정의 길례의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태종조까지만 하더라도 국가 사전의 체제나 이에 따른 제의의 종류를 <개원례>를 준용하여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세종조 이후 '기고', '속제', '주현'이라는 별도의 辨祀 형식이 도입되어 조선왕조 나름의 국가 사전 체제와 제의를 갖추게 되며, 이것이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68) <국조오례의>와 <세종실록>, 오례를 비교해보면, 길례 의식의 경우 <국조오례의>와 <세종실록> 오례 사이에 차이가 현저한 반면에 나머지 4례의는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는 나머지 4례와는 편찬 배경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길례의 경우와는 달리 4례는 ‘이행 전례’와 ‘고제’, ‘시왕지제’ 간의 참작 절충에 이렇다할 마찰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국조오례의> 길례의 각종 의식은 <세종실록> 오례에 나타나는 태종조 찬정의 길례 의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태종조까지만 하더라도 국가 사전의 체제나 이에 따른 제의의 종류를 <개원례>에 준하여 정비하였던데 반해서, 세종조 이후 <개원례>에 없는 새로운 제의가 正祀類에 추가되고 그 밖에 ‘祈告’, ‘俗祭’, ‘州縣’이라는 별도의 辨祀 형식이 도입되었던 때문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나름의 국가 사전 체제와 제의를 갖추게 되며, 이것이 <국조오례의>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국조오례의> 상의 길례의는 나머지 4례의에 비해 조선왕조 특유의 의식과 규례를 비교적 간직하게 된다.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75)[77] 태조는 재위 7년 만에 정종(定宗)에게 양위하고 태종(太宗) 8년(1408) 5월에 승하하였다. 그 이듬해(1409) 8월 28일에 태종은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유관(柳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변계량 (卞季良)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멀지 아니하고 또 당시에 활동하던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으므로, 실록 찬수가 시기상조라 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史草)를 각 사관(史官)에게 제출하도록 명하는 동시에, 하륜 등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하였다. 태종 10년(1410) 정월부터 하륜·유관·정이오·변계량이 주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조말생(趙末生)·권훈(權壎)·윤회(尹淮), 기사관(記事官) 신장(申檣), 외사관(外史官) 우승범(禹承範)·이심(李審)과 함께 《태조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13년(1413) 3월에 15권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새로 편찬된 실록 가운데 번잡하고 중복된 기사가 많다 하여 개수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왕대별 해제 제1대 태조실록[78] 일례로 흔히 업적이라 불리는 신문고 설치 같은 경우는 표면적인 이유는 민원 해결이었지만 사실은 쿠데타 방지가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업적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이면적이든 표면적이든 목적대로라면 치기도 어려운 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전시행정의 훌륭한 사례일 것이다.[79] 이는 당시 조선의 경제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교통로가 황폐화돼서 고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본래 고려에는 원과 만주 그리고 류큐와 일본까지 이어주는 국제 교통로가 활성화 되어 있었으나 흑사병으로 중심 국가인 원나라가 망해버리고 교통로가 비활성화됨과 동시에 홍건적과 왜구가 한반도 전체를 털어버리면서 안 그래도 안 써서 묻혀가던 교통로가 완전히 파괴된다. 때문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시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민간 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금난전권 폐지이다. 사실 이전 왕조인 고려 왕조 시절에도 고려는 화폐를 도입시키려 했으나 민중들이 화폐를 거부했고 바로 쓸 수 있는 물건을 중시했다. 이에 고려 왕가에서는 타협안으로 은병이라는 재화를 만들어 유통시켰고 이 은병은 은이 들어갔기에 어느정도 화폐 취급을 해줬다.[80] 의정부에서 각도의 전답(田畓)과 호구수(戶口數)를 올리었다. 충청도(忠淸道)는 전지(田地)가 22만 3천 90결(結), 호(戶)가 1만 9천 5백 61호, 인구가 4만 4천 4백 76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지(田地)가 17만 3천 9백 90결(結), 호(戶)가 1만 5천 7백 3호(戶), 인구가 3만 9천 1백 51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전지(田地)가 22만 4천 6백 25결, 호(戶)가 4만 8천 9백 92호, 인구가 9만 8천 9백 15명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지(田地)가 9만 9백 22결, 호(戶)가 1만 4천 1백 70호, 인구가 2만 9천 4백 41명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지(田地)가 5만 9천 9백 89결, 호(戶)가 1만 5천 8백 79호, 인구가 2만 9천 2백 38명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전지(田地)가 3천 2백 71결, 호(戶)가 1만 1천 3백 11호, 인구가 2만 8천 6백 93명이고, 서북면(西北面)은 전지(田地)가 6천 6백 48결, 호(戶)가 2만 7천 7백 88호, 인구가 5만 2천 8백 72명으로, 합계가 전지가 78만 2천 5백 43결, 호(戶)가 15만 3천 4백 4호, 인구가 32만 2천 7백 86명이었다. (태종 4년 4월 25일) 호조에서 금년(今年) 제도(諸道)의 호구수(戶口數)를 올렸는데, 경기좌도는 1만 7백 39호(戶)에, 정(丁)이 1만 9천 3백 19명이고, 경기우도는 9천 9백 90호에, 정(丁)이 1만 8천 8백 19명이며, 충청도는 1만 9천 5백 60호에, 정(丁)이 4만 4천 4백 76명이며, 경상도는 4만 8천 9백 93호에, 정(丁)이 9만 8천 9백 15명이며, 전라도는 1만 5천 7백 14호에, 정(丁)이 3만 9천 1백 67명이며, 풍해도는 1만 4천 1백 70호에, 정(丁)이 2만 9천 4백 41명이며, 강원도는 1만 5천 8백 79호에, 정(丁)이 2만 9천 2백 24명이며, 동북면(東北面)은 1만 1천 3백 11호에, 정(丁)이 2만 8천 6백 83명이며, 서북면(西北面)은 3만 3천 8백 90호에, 정(丁)이 6만 2천 3백 21명이었다. (태종 6년 10월 30일)[81] 임금이, "호포(戶布)161)[168] 의 법은 무엇 때문에 만들어 놓은 것인가?" 하니,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응(李膺)이, "군량(軍糧)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였다. "비록 군량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까닭 없이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법이 아니다. 《주례(周禮)》에 ‘집 옆에 뽕나무와 삼을 심지 않는 자(宅不毛者)는 이포(里布)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는 방술이다. 이와 같이 하면 취하는 것이 도(道)가 있어 백성이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태종 10년 11월 21일)[82] 1. 옛날 주(周) 나라 때에, 백성으로서 직업이 없이 노는 자는 힘으로 역사하는 부역에 나오게 되고, 집안 터전에 빈 땅으로 놀리는 자에게는 부리(夫里)의 베(布)로 세금을 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에게 일하도록 권면하고 노는 자를 징계하는 좋은 법입니다. 이 법이 한 번 폐지되고서, 어느 집이나 일체로 같이 받아들이고, 지금은 저화(楮貨)를 가지고 호포(戶布) 세를 대신하여 받게 되니, 민간에서 만드는 것은 그래도 바칠 수가 있지마는, 저화는 백성들이 만들 수가 없는 것이고, 반드시 쌀이나 다른 곡식을 팔아서 바치게 되므로, 백성들이 모두 감당하기가 어렵다 하니, 신의 생각으로는, 이것을 영구히 감면하지 못할 때에는 풍년들기를 한정하여 그 때까지라도 정지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세종 3년 8월 30일)[83] 그러나 저화의 유통은 부진하고 실질적으로는 포화가 일반 유통계를 지배하게 되자, 일시의 방편적 조치로서 화폐물품인 포화를 저화와 병용시키는 일을 되풀이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는 태종 15년(1415)에 이르러 마침내 楮貨全用令을 폐기하고 포화의 통용을 허용함으로써 포화는 더욱 통용이 활발해졌다. 이같이 포화가 공적 지위를 회복해가는 것을 계기로 하여, 정부당국은 태종 15년 4월에 布帛稅, 즉 着稅의 징수를 결정하게 되었다. 착세의 징수는 저화를 유통 보급시키려는 데 동기가 있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포화의 법화로서의 위치를 강화해준 셈이었다.0237)0237)(≪太宗實錄≫권 29, 태종 15년 4월 병자.)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84] 2품 이상에게 명하여 성중(城中)의 집터(家基)와 시중(市中)의 포백(布帛)에 대하여 세(稅)를 거두는 것의 편부(便否)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김승주(金承霔) 등은, "포백세(布帛稅)061)(註 061)(포백세(布帛稅) : 포백(布帛)을 사고 팔 때 거두는 세금.) 는 거둘 수 있으나, 가기세(家基稅)062)(註 062)(가기세(家基稅) : 서울의 집터(家基)에다 해마다 매기는 세금.) 는 면제해야 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박신(朴信)만은 홀로, "두 가지 세를 마땅히 다 거두어야 합니다." 하였다. 의논이 올라가니, 임금이 이를 어렵게 여기어, 우대언(右代言) 한상덕(韓尙德)으로 하여금 3의정(議政)의 집에 가서 묻게 하였다. 남재(南在)와 이직(李稷)은 모두 이르기를, "민호에 세를 거두는 법(稅戶之法)은 옛 제도에도 약간 있으며, 또 시행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저화(楮貨)를 사용하여 세를 받는 것이 마땅하며 해(害)가 없을 것입니다. 포백세 같은 것으로 말하면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며, 또 이미 장사아치(商賈)에게 세를 받으면서 또 다시 세전(稅錢)을 받는다면, 이것은 두 차례나 세를 받는 것입니다. 또 더구나, 원방(遠方)의 군졸(軍卒)들이 포(布)를 사 가지고 쌀을 사기 위하여 날을 보내는 자가 많아져서, 백성들이 반드시 괴롭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하윤이 말하였다. "이제 하나의 법(一法)을 제정하여 마땅히 만세(萬世)에 전하여야 합니다. 집터에 대하여 세를 받는 것은 전(傳)의 기록에 실려 있지 아니하고, 중국에서도 포백에 대하여 세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조정(朝廷)에서 방금 사용하고, 또 저화의 법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취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한상덕이 곧 두 의정의 말을 하윤에게 고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갑사(甲士)에게는 세를 면하게 함이 좋겠다." 하였다. 이튿날 임금이 여러 판서(判書)에게 ‘어제의 하윤의 의논’을 가지고 말하니 모두 함호(含糊)063)(註 063)(함호(含糊) : 말을 입안에 우물거리고 분명치 않게 말함.) 하고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오직 박신만은 마땅히 거두어야 된다고 힘써 말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기어 마침내 포백세와 가기세를 모두 거두도록 명하고, 인하여 외방(外方)에서 번상(番上)한 숙위 별패(宿衛別牌)와 외패(外牌)·갑사(甲士) 등은 쌀을 바꿀 포백을 병조에 고하여 표(標)를 달고 저자(市)로 나아가게 하여, 모두 세를 받지 말도록 명하였다. (태종 15년 4월 9일)[85] 명하여 포백세(布帛稅)를 거두지 말라고 하였으니, 아직 다시 상정(詳定)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종 15년 6월 10일)[86] 호조의 급전사(給田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기강(紀綱)이 문란하여 전제(田制)가 먼저 무너지니, 호강(豪强)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합치고, 부자 형제의 사이가 서로 송사(訟事)하여 국가와 민간이 모두 곤궁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기사년078)(註 078)(기사년 : 1389년.) 무렵에 경기(京畿)와 5도(道)의 전지(田地)를 모두 타산(打算)하여 정(丁)079)(註 079)(정(丁) : 필(筆).) 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계산하는 기술이 익숙하지 못하여 시기를 한정하여 일을 마치게 되매,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하고 혹은 빠뜨린 것도 있게 되며, 바다 가까운 땅은 또한 미처 계량(計量)하지도 못하였으니, 원컨대 조관(朝官)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과 더불어 답험(踏驗)하고, 관찰사로 하여금 고찰(考察)하여 천자문(千字文)의 자호(字號)로써 정(丁)을 만들어 그 세(稅)를 거두게 하고, 동서 양계(兩界)의 전지는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또한 소(牛) 하루갈이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고쳐 계량(計量)하게 하되, 그 수령(守令)과 사무를 맡은 관원이 마음을 써서 답험(踏驗)하기를 즐겨 하지 않는 사람은 호율(戶律)에 의거하여 죄를 결정하고 관직을 파면시켜 서용(敍用)하지 않게 하며, 도관찰사(都觀察使)와 도순문사(都巡問使)로 각찰(覺察)하지 않는 사람은 신문(申聞)하여 논죄(論罪)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조 7년 7월 26일)[87] 공신전(功臣田)과 사사전(寺社田)의 수세법(收稅法)을 세웠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군대가 넉넉하면 백성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나라에 3년간의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 등이 가만히 국가에서 병졸(兵卒)을 훈련하는 것과 기계(器械)를 준비한 것을 볼 때 조치하지 아니함이 없사오니 군대가 넉넉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근년 이래로 사방에 근심이 없어 아직껏 군대에 이바지(供億)한 비용이 없었으니, 중외(中外)의 군자곡(軍資穀)으로 붉게 썩어가는 양곡이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1년의 군수품도 오히려 보급하지 못하오니, 만약 긴급한 사태가 있다면 앞으로 무엇으로써 대비하겠나이까? 이 점을 신 등은 가슴아프게 여기는 것이요, 전하께서도 깊이 염려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신 등은 우리 나라의 전지가 80여만 결에 불과하다고 여기옵니다. 경기(京畿) 이외로 말하면, 창고(倉庫)·아록(衙祿)·공해(公廨)·늠급(廩給)·사사(寺社)의 전지를 제외하고서는 군역(軍役)·외역(外役)·진(津)·역(驛)·원(院)·관(館)·지장(紙匠)의 전지에도 모두 그 세가 있어 녹전(祿轉)에 보충하오며, 군자(軍資)에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개가 모래밭(沙石田)이 많을 뿐이옵니다. 녹전 위전(祿轉位田)이 간혹 진손(陳損)으로 인하여 전액(前額)에 달하지 못하게 되오면 곧 군자전(軍資田)의 전조(田租)로 충당하오니, 군름(軍廩)이 비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입니다. 기내(畿內)로 말하오면 14만 9천 3백여 결로서, 창고(倉庫)·궁사(宮司)·각사(各司)의 각 위전(位田)을 제외한다면 과전(科田)이 8만 4천 1백여 결이요, 공신전(功臣田)이 3만 1천 2백 40여결이고, 사사전(寺社田)이 4천 6백 80여 결이온데, 과전으로 말하면,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을 각각 1결에 2두(斗)를 세(稅)로 하여 국용(國用)에 공급하고, 공신전으로 말하면 납세(納稅)를 불허(不許)하여 훈신(勳臣)을 우대하오니 이것은 진실로 공훈(功勳)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뜻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십분(十分)에 그 일분(一分)을 세(稅)로 받는 것이 천하 고금의 공통된 법칙이옵니다. 더욱이 1결에서 2두(斗)를 세로 받아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함이 무엇이 불가하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각등(各等)의 공신전과 내외(內外)의 사사전, 아울러 3만 7천 3백여 결을 과전(科田)의 예(例)에 의하여 모두 그 세(稅)를 받아들여서 군자(軍資)에 보충하시면, 세입이 3천 7백여 석에 이를 것입니다. 또 번잡한 용관(冗官)을 도태하여 급하지 않은 비축(備蓄)을 덜고, 군자(軍資)의 전조(田租)로써 녹전(祿田)의 진손(陳損)된 수를 충당하지 말게 하신다면, 중외(中外)의 군자는 1, 2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3년의 비축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를 윤허하였다. (태종 2년 2월 5일) 의정부에서 각도의 전답(田畓)과 호구수(戶口數)를 올리었다. 충청도(忠淸道)는 전지(田地)가 22만 3천 90결(結), 호(戶)가 1만 9천 5백 61호, 인구가 4만 4천 4백 76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지(田地)가 17만 3천 9백 90결(結), 호(戶)가 1만 5천 7백 3호(戶), 인구가 3만 9천 1백 51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전지(田地)가 22만 4천 6백 25결, 호(戶)가 4만 8천 9백 92호, 인구가 9만 8천 9백 15명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지(田地)가 9만 9백 22결, 호(戶)가 1만 4천 1백 70호, 인구가 2만 9천 4백 41명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지(田地)가 5만 9천 9백 89결, 호(戶)가 1만 5천 8백 79호, 인구가 2만 9천 2백 38명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전지(田地)가 3천 2백 71결, 호(戶)가 1만 1천 3백 11호, 인구가 2만 8천 6백 93명이고, 서북면(西北面)은 전지(田地)가 6천 6백 48결, 호(戶)가 2만 7천 7백 88호, 인구가 5만 2천 8백 72명으로, 합계가 전지가 78만 2천 5백 43결, 호(戶)가 15만 3천 4백 4호, 인구가 32만 2천 7백 86명이었다. (태종 4년 4월 25일)[88] 의정부에서 여러 도(道)의 양전(量田)063)(註 063)(양전(量田) : 토지를 측량하던 일.) 한 결수(結數)를 올렸다.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에 다시 양전(量田)을 행하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고,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풍해도·강원도의 6도에 원전(原田)이 대개 96만여 결(結)이었는데, 다시 양전(量田)하여 얻은 잉전(剩田)이 30여 만 결이었다. 고려 말기에 전제(田制)가 크게 허물어져서 홍무(洪武) 기사년에 6도(道)를 다시 양전(量田)하여 전적(田籍)에 올렸으나, 그때 왜구가 한창 성하여 바닷가는 모두 진황지(陳荒地)였다. 이때에 이르러 개간한 땅이 날로 불어서 남아 있는 땅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양전(量田)한 것이다. (태종 6년 5월 3일)[89] 조선왕조 건국 후 태종 4년에 의정부가 각 도의 전결과 호구의 수를 중앙에 보고한 통계에 의하면, 8도의 전결이 총계 931,835결에 이르고 있고,0794)0794)(≪太宗實錄≫권 7, 태종 4년 4월 을미조의 各道 田結 통계에 의한 것이나, 경기도의 田結數가 缺하여 있어, 경기도의 전결수는≪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2월 무오조의 통계를 인용·합계하였다.) 태종 5년 하3도 양전을 다시 시행하여 그 이듬해에 보고한 것에 의하면 “6도를 양전하여 무릇 96만 결을 확보하였으니 다시 고쳐 측량해서 얻은 결수가 30만 결에 달한다”고 하였다.0795)0795)(≪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5월 임진.)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90] 공신전(功臣田)과 사사전(寺社田)의 수세법(收稅法)을 세웠다. 사간원에서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먹을 것이 넉넉하고 군대가 넉넉하면 백성들은 이것을 믿습니다. 나라에 3년간의 저축이 없으면 그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신 등이 가만히 국가에서 병졸(兵卒)을 훈련하는 것과 기계(器械)를 준비한 것을 볼 때 조치하지 아니함이 없사오니 군대가 넉넉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오나, 근년 이래로 사방에 근심이 없어 아직껏 군대에 이바지(供億)한 비용이 없었으니, 중외(中外)의 군자곡(軍資穀)으로 붉게 썩어가는 양곡이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1년의 군수품도 오히려 보급하지 못하오니, 만약 긴급한 사태가 있다면 앞으로 무엇으로써 대비하겠나이까? 이 점을 신 등은 가슴아프게 여기는 것이요, 전하께서도 깊이 염려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신 등은 우리 나라의 전지가 80여만 결에 불과하다고 여기옵니다. 경기(京畿) 이외로 말하면, 창고(倉庫)·아록(衙祿)·공해(公廨)·늠급(廩給)·사사(寺社)의 전지를 제외하고서는 군역(軍役)·외역(外役)·진(津)·역(驛)·원(院)·관(館)·지장(紙匠)의 전지에도 모두 그 세가 있어 녹전(祿轉)에 보충하오며, 군자(軍資)에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개가 모래밭(沙石田)이 많을 뿐이옵니다. 녹전 위전(祿轉位田)이 간혹 진손(陳損)으로 인하여 전액(前額)에 달하지 못하게 되오면 곧 군자전(軍資田)의 전조(田租)로 충당하오니, 군름(軍廩)이 비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입니다. 기내(畿內)로 말하오면 14만 9천 3백여 결로서, 창고(倉庫)·궁사(宮司)·각사(各司)의 각 위전(位田)을 제외한다면 과전(科田)이 8만 4천 1백여 결이요, 공신전(功臣田)이 3만 1천 2백 40여결이고, 사사전(寺社田)이 4천 6백 80여 결이온데, 과전으로 말하면, 수전(水田)과 한전(旱田)을 각각 1결에 2두(斗)를 세(稅)로 하여 국용(國用)에 공급하고, 공신전으로 말하면 납세(納稅)를 불허(不許)하여 훈신(勳臣)을 우대하오니 이것은 진실로 공훈(功勳)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뜻이옵니다. 그러하오나, 십분(十分)에 그 일분(一分)을 세(稅)로 받는 것이 천하 고금의 공통된 법칙이옵니다. 더욱이 1결에서 2두(斗)를 세로 받아 군국(軍國)의 수요에 이바지함이 무엇이 불가하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각등(各等)의 공신전과 내외(內外)의 사사전, 아울러 3만 7천 3백여 결을 과전(科田)의 예(例)에 의하여 모두 그 세(稅)를 받아들여서 군자(軍資)에 보충하시면, 세입이 3천 7백여 석에 이를 것입니다. 또 번잡한 용관(冗官)을 도태하여 급하지 않은 비축(備蓄)을 덜고, 군자(軍資)의 전조(田租)로써 녹전(祿田)의 진손(陳損)된 수를 충당하지 말게 하신다면, 중외(中外)의 군자는 1, 2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3년의 비축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를 윤허하였다. (태종 2년 2월 5일) 의정부에서 각도의 전답(田畓)과 호구수(戶口數)를 올리었다. 충청도(忠淸道)는 전지(田地)가 22만 3천 90결(結), 호(戶)가 1만 9천 5백 61호, 인구가 4만 4천 4백 76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전지(田地)가 17만 3천 9백 90결(結), 호(戶)가 1만 5천 7백 3호(戶), 인구가 3만 9천 1백 51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전지(田地)가 22만 4천 6백 25결, 호(戶)가 4만 8천 9백 92호, 인구가 9만 8천 9백 15명이고, 풍해도(豐海道)는 전지(田地)가 9만 9백 22결, 호(戶)가 1만 4천 1백 70호, 인구가 2만 9천 4백 41명이고, 강원도(江原道)는 전지(田地)가 5만 9천 9백 89결, 호(戶)가 1만 5천 8백 79호, 인구가 2만 9천 2백 38명이고, 동북면(東北面)은 전지(田地)가 3천 2백 71결, 호(戶)가 1만 1천 3백 11호, 인구가 2만 8천 6백 93명이고, 서북면(西北面)은 전지(田地)가 6천 6백 48결, 호(戶)가 2만 7천 7백 88호, 인구가 5만 2천 8백 72명으로, 합계가 전지가 78만 2천 5백 43결, 호(戶)가 15만 3천 4백 4호, 인구가 32만 2천 7백 86명이었다. (태종 4년 4월 25일)[91] 지금 6도(道)의 관찰사(觀察使)가 보고한 경작지(墾田)의 액수는 50만 결(結)에도 차지 않았으나, 공상(供上)은 풍족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10만 결을 우창(右倉)에 소속시키고 3만 결은 사고(四庫)에 소속시켰으며, 녹봉을 후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10만 결을 좌창(左倉)에 소속시켰으며, 조정의 선비(朝士)들을 우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경기의 토지 10만 결을 이들에게 나누어 지급하였으니, 나머지는 17만 결에 그칠 뿐입니다. 무릇 6도의 군사, 진(津)·원(院)·역(驛)·절(寺)의 토지, 향리(鄕吏)·사객(使客)·늠급(廩給)·아록(衙祿)의 용도로도 오히려 부족하니, 군수(軍需)가 나올 땅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사전(私田)을 지방에서 지급하려고 하시니, 공상과 녹봉의 경비와 진·원·역·절의 여러 위전(位田)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방진(方鎭)의 병사와 해도(海道)의 군사에게는 어떻게 공급하겠습니까? 만일 3~4년 동안 홍수나 가뭄이라는 재앙이 있다면 무엇으로써 이를 진휼하겠습니까? 수많은 군사들을 먹이는 비용은 어떻게 공급하시겠습니까? (<조준 등이 토지제도에 대해 상소하다>, 일자 1389년 12월 미상 (음))[92] 〈공양왕(恭讓王)〉 3년(1391) 5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서(上書)하여 과전(科田)을 지급하는 법을 정할 것을 청하니, 그 의견을 따랐다. 문종(文宗)이 정한 바에 따라 경기(京畿)의 주군(州郡)을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누고, 1품(品)으로부터 9품의 산직(散職)에 이르기까지 나누어 18과(科)로 하였다. 경기와 6도(道)의 토지(田)를 하나같이 모두 답험(踏驗)하고 양전(打量)하여, 경기에서는 실제 경작하는 토지(實田) 13만 1,755결(結)과 황원전(荒遠田) 8,387결을, 6도에서는 실제 경작하는 토지 49만 1,342결과 황원전 16만 6643결을 얻었다. 액수를 헤아려 정(丁)을 만들었는데, 정에는 각각 자호(字號)가 있어 대장(籍)에 이를 기재하였다. 공사(公私)의 예전의 토지대장(田籍)을 강제로 거두어 모두 조사를 진행하여 그 진위를 판별하고, 옛 것을 기준으로 덜거나 더하여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군자시전(軍資寺田) 및 사원전(寺院田)·외관직전(外官職田)·늠급전(廩給田), 향리전(鄕吏田)·진리전(津吏田)·역리전(驛吏田)·군전(軍田)·장전(匠田)·잡색전(雜色田)을 정하였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므로 마땅히 과전(科田)을 두어 사대부를 우대하고, 무릇 서울에 거주하며 왕실을 시위(侍衛)하는 사람에게는 현직(時職)인지 산직(散職)인지를 묻지 않고 각각 과(科)에 따라 받게 하였다. 제1과 재내대군(在內大君)으로부터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150결(結). 제2과 재내부원군(在內府院君)으로부터 검교시중(檢校侍中)까지 130결. 제3과 찬성사(贊成事) 125결. 제4과 재내제군(在內諸君)으로부터 지문하(知門下)까지 115결. 제5과 판밀직(判密直)으로부터 동지밀직(同知密直)까지 105결. 제6과 밀직부사(密直副使)로부터 제학(提學)까지 97결. 제7과 재내원윤(在內元尹)으로부터 좌상시(左常侍)·우상시(右常侍)까지 89결. 제8과 판통례문(判通禮門)으로부터 제시판사(諸寺判事)까지 81결. 제9과 좌사의(左司議)·우사의(右司議)로부터 전의정(典醫正)까지 73결. 제10과 육조총랑(六曹摠郞)으로부터 제부소윤(諸府少尹)까지 65결. 제11과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부터 제시부정(諸寺副正)까지 57결. 제12과 육조정랑(六曹正郞)으로부터 화령판관(和寧判官)까지 50결. 제13과 전의시승(典醫寺丞)으로부터 중랑장(中郞將)까지 43결. 제14과 육조좌랑(六曹佐郞)으로부터 낭장(郞將)까지 35결. 제15과 동반(東班)·서반(西班) 7품 25결. 제16과 동반(東班)·서반(西班) 8품 20결. 제17과 동반(東班)·서반(西班) 9품 15결. 제18과 권무(權務)와 산직(散職) 10결....기사년(己巳年, 1389)에 양전(量田)하지 못한 바닷가와 바다 섬의 토지, 양전할 때 누락된 토지, 양전이 법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남은 토지, 새로 개간된 토지는 각 도(道)의 도관찰사(都觀察使)가 매년 즉시 관리를 파견하여 답험하고, 정을 만들어 토지대장에 이어서 올린 다음 담당관청에 보고하여 군수(軍需)에 충당하며, 다른 사람이 함부로 차지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위반하는 자는 처벌한다. 신미년(辛未年, 1391)에 토지를 받은 후에 과(科) 이외의 것을 함부로 받거나 공전이나 사전을 침범하여 빼앗은 자는 율(律)에 의하여 죄를 주며, 그가 받은 과전은 다른 사람이 교체하여 받는 것을 허락한다. 만약 다른 사람이 간악한 도둑이라고 증거도 없이 망령되이 고소하는 일이나, 또는 벼락이나 맹수, 수재와 화재, 도적의 피해를 입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며 죄명을 만들어 토지를 빼앗으려고 꾀하는 자는 엄격하게 다스린다. 만약 대군(大軍)을 징발하여 군량이 부족하면 공전과 사전을 묻지 말고, 비용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임시로 액수를 정하여 관청에서 거두어 지출하고 일이 없으면 중지한다. (<도평의사사에서 과전법 제정을 건의하다>, 일자 1391년 05월 미상 (음))[93] 경차관(敬差官) 김구덕(金九德) 등 60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다시 전지(田地)를 측량하게 하였다. 경기(京畿)·풍해(豐海)·강원도(江原道)에 모두 측량을 마치라고 명하니, 의정부에서 그 경계(經界)가 바르지 못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태종 6년 9월 8일)[94] 둘째, 3등전 각각의 실적이 그 생산력에 비례하는 것으로 책정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전품의 分等이 각 도 단위로 난립하여 전국적인 통일성이 없었다. 즉 “본국은 고려의 옛 습속을 따라 3등의 전지에 모두 방면의 수를 쓸 뿐 실적을 헤아리지 아니하였고, 토지의 膏瘠은 남·북이 같지 아니한데도 그 전품은 8도를 통계하여 등급을 나누지 아니하고 단지 1도 단위로 등급을 나누었으므로 3등 전지의 고척이 같지 아니하고 납세의 경중이 크게 다르니 富者는 더욱 부유하고 貧者는 더욱 가난하게 된다”0130)0130)(≪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11월 무자.)는 것이었다. 양전은 실로 토지 한 면의 等差가 아니라 그 한 면을 平方한 토지의 면적을 예상 수확량에 비례하는 것으로 차등을 두어 책정해야만 하는 것이었으며, 더구나 전품의 분등이 전국적으로 통일성을 띠고 있지 않으면 수세의 균평은 기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과전법에 정착된 양전제는 전국적으로 통일된 전품 분등법에 따라 각 등전의 실적을 실제의 생산량 비레로 책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과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95] 이는 세종도 마찬가지였으나 공법(貢法) 제정으로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96] 육품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가령 4등전 1결의 면적이 1등전 2결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니까 4등전으로 잡으면 적당할 땅인 4등전 1결을 그 동일한 땅을 1등전 2결로 만드는 식이다.[97] 대개 고쳐서 측량한 전지(田地)는 전보다 배(倍)나 되게 거두니, 이미 백성의 원망이 되고 있습니다. (태종 7년 6월 28일) 하물며, 지금 여러 도(道)의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測量)하여 집터(家基)의 촌지(寸地)까지도 모두 계산해서 세(稅)를 부과하니, 민생(民生)이 더욱 고통스럽고 원기(怨氣)가 더욱 쌓이니, 이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종 7년 6월 28일) 충청도 도관찰사 김자수(金自粹)가 아뢰기를, "본도(本道)의 백성들이, 경차관(敬差官)이 다시 측량한 전지(田地)가 너무 중(重)하다고 하여, 신에게 나아와 투첩(投牒)315)(註 315)(투첩(投牒) : 첩지(牒紙)를 관가에 내는 것.) 한 자가 모두 23주현(州縣)에 1천 3백 인이나 됩니다." 하였다. (태종 7년 10월 2일)[98] 더구나 이 시기에는 “상등전은 오직 경상·전라도 등의 1,000결에 겨우 1, 2결, 중등전은 100결에 1, 2결이 있을 뿐이요, 그 나머지 각 도는 다만 중등전이 1,000결에 겨우 1, 2결 뿐이니, 이는 대개 지품의 비척을 나누지 아니하고 모두를 하등전으로 양전”0129)0129)(≪世宗實錄≫권 49, 세종 12년 8월 무인.)하고 있는 상태였다. 즉 당시의 농업생산력 수준에 맞는 좀더 세분된 전품제의 도입이 절실한 과제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99] <표 3>태종 4년·≪세종실록지리지≫의 결수(각도(8도);태종 4년 전결수;≪세종실록지리지≫ 각도총론 전결수) 京都한성부;N/A;1,415 개성유후사;N/A;5,357 경기도;*149,300;200,347 충청도;223,090;236,300 경상도;224,625;301,147 전라도;173,990;277,588 황해도;90,922;104,772 강원도;59,989;65,916 평안도;3,271;308,751 함경도;6,648;130,413 합계;931,835;1,632,006 (* 태종 4년 전결수 중, 경기도 결수는≪태종실록≫권 3, 태종 2년 2월 무오조를 인용하였음.)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100] 전품을 낮추면 당연히 결수는 줄어든다. 전품을 낮추고도 결수를 더 많이 집계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은결(隱結)을 파악해 냈다는 것이다.[101] 그 별폭에 이르기를, "민간의 백가지 역(役)이 모두 전결(田結)에서 나오니, 이는 바로 옛날의 경계법(經界法)입니다. 나라에 일이 많다 보니 민역(民役)이 날로 무거워져서 1년에 응당 행하여야 할 역으로 매결당 소용되는 비용이 거의 목면(木綿) 10여 필이나 되고 적어도 7, 8필은 밑돌지 않는데 뜻밖에 마구 나오는 역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면 매 1결마다 【10속(束)이 1부(負)가 되고, 1백 부가 1결(結)이다. 전(田)에서 수확하는 다소에 따라 속이라 하고, 부라 하고, 결이라 한다.】 봄에 목면 1필, 쌀 2두(斗)를 내고, 가을에 쌀 3두를 내면 모두 10두가 되는데, 전세(田稅) 이외의 진상물(進上物)과 본도의 잡역(雜役), 본읍에 납부해야 할 것이 모두 그 가운데 있어 한번 납부한 후에는 1년내내 편안히 지내도 됩니다. 경기에서 선혜청(宣惠廳)에 봄 가을에 8두씩 1년 16두를 바치는 것에 비하면 역시 매우 너그럽습니다. 양호(兩湖) 지방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로 목면이 5천 4백 동(同)이고 쌀이 8만 5천 석이니, 수단이 좋은 사람에게 부쳐 규획하여 조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牟利輩)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됩니다." 하였다. (효종 즉위년 11월 5일) 그전에 호남 사람들이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전후 연달아 청하였으나 조정이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서도 그 상소를 올려보내지 않았는데 신은 참으로 이해가 안 갑니다. 신이 끝까지 이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반드시 비웃을 것입니다만 신이 이 일에 급급해 하는 것은, 대체로 호남은 나라의 근본인데 재해를 매우 많이 입었으므로 민심이 쉽게 떠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가을 안에 이를 시행해야만 혜택을 조금이라도 베풀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누차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 백성들이 소망하는 바는 하늘도 반드시 따라주는데 임금이 하늘의 뜻을 본받는 도리에 있어서 어떻게 백성의 뜻에 순응하는 일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백성들의 마음에 모두가 했으면 하는데 수령들이 안하고자 하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백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수령은 불과 50여 명밖에 안되는데 어떻게 50여 명이 안하고자 한다고 하여 수많은 백성이 크게 바라고 있는 바를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현재 본도에서 1결(結)에 대한 세금으로 거두는 쌀이 거의 60여 말에 이른다 합니다. 열 말을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에게서 적게 거두는 것으로서 다섯 배나 감소됩니다만 그래도 국가의 쓰임에는 부족된 바가 없는데 무엇을 꺼려 이를 시행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지난번 호서의 수령들도 모두 이를 시행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시행한 지 두어해 동안에 시골 백성들이 전리에서 고무하고 개들은 관리를 보고 짖지 않았으므로 인접해 있는 도에게 큰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것은 이미 시행해 본 분명한 효과로서 서울이나 지방 모두가 편리하고 위아래가 서로 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10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백성들 자신이 먹는 식량입니다. 구휼하는 방안이 이보다 좋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창고의 곡식을 풀고 있는 대로 털어내지 않고도 나라 안에 죽거나 야윈 백성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전일 시행하자고 청할 때에 양호(兩湖)를 모두 셈해 결복(結卜)과 미포(米布)의 숫자들을 문서에 올려 본청에 간직해 두었으므로 관료들이 모두 이 대동법에 대해 익숙해져 있으니 단지 약간의 조목들만 미루어 변통해 계품하여 내린다면 시일을 별로 허비하지 않고도 일이 잘 시행될 것입니다. 이 일은 신이 평소에 해오던 말입니다. 지난해에도 말했었고 오늘날에도 또 이를 말하고 있으니 삼월(三刖)의 죄042)[169] 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다시금 은혜를 갚거나 정성을 바칠 길이 없으므로 비록 위로는 임금께 죄를 짓고 아래로는 조정에 조소를 산다 할지라도 신으로서는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효종 8년 7월 11일) 충청도 생원 김민도(金敏道)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지 마소서. 원컨대 호남·경기의 예(例)에 따라 두 말을 더 납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에서 거둔 대동미로는 경상 비용이 부족했으나 조정에서는 더 부과하기가 어려워 바야흐로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 때문에 김민도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는 1년에 1결(結)당 부과되는 것이 무려 8, 9십 말(斗)이 되었으나, 지금 대동법은 1년에 부과되는 것이 다만 1결당 10말입니다. 원컨대 호남·경기의 예에 따라 쌀 두 말을 더 납부하겠으니 그 법을 혁파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의 회계에 의거하여 그 말을 따랐다. (현종 14년 11월 16일) 충청도 생원 김민도(金敏道) 등이 상소하여 본도의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지 말고 호남과 경기의 예에 따라 2두(斗)씩 더 바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의 대동미만으로는 경비를 충당하기에 부족하였는데, 조정에서 더 부과하는 것은 어렵게 여겨 바야흐로 혁파할 것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민도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대동법을 실시하기 이전에는 1년에 1결(結)당 부과하는 양이 혹 80, 90두에 이르렀는데, 대동법이 시행되고 있는 지금은 1년에 부과되는 양이 1결당 10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 호남이나 경기의 예처럼 2두씩 더 납부한다 하더라도 전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우니, 백성들도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를 비국에 내렸는데, 비국이 회계한 대로 따른 것이었다. (현종개수 14년 11월 16일)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물가가 법 실시 이전에 비해 대략 1/4~1/8 정도로 줄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효종 대에 현종 대에 공물의 대납가가 대략 1결당 100두 미만이라면 가처분 소득은 대략 태종 대에 1결당 180두 이상 효종 대에 현종 대에 1결당 300두 이상 각각 이렇게 산출된다.[102] 우선 사전의 경우는 고려시기 이래 항상 자행되어 온 과중한 수탈을 불식할 도리가 없었다. 수조액은 구체적으로 답험손실의 과정에서 산정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수조권자인 전주에게 위임되어 있는 사전의 경우에는 “단지 重斂에 그치지 않고 횡렴까지도 일어나는”0132)0132)(≪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8월 갑술.) 정도로 과중한 수탈이 자행되는 것은 필연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사전이 집중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기 농민들의 불만과 저항은 실로 커지게 되었으며, 그들의 원한으로 인하여 혹 심한 한발과 같은 자연재해가 엄습한다는 물의가 일어나기도 하고, 이로 말미암아 경기 사전의 절반을 외방으로 이전한다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였다.0133)0133)(≪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신해.)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103] 임금이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사전(私田)의 수조하는 때를 당하면 전객(佃客)이 한 섬을 바치고자 하여 반드시 23,4두(斗)를 써야 된다고 한다." 하니, (태종 15년 8월 10일) 태종 때 사전의 전조 납부에는 전객이 미 1석(15두)을 납부하는 데 실제 23∼24두를 바쳤다.0788)0788)(≪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8월 갑술.) 이것을 1결당 납부액으로 환산하면 전객은 전조인 미 30두, 즉 2석을 납부하는 데 46∼48두가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전조 30두를 제하면 16∼18두는 藁草 10두 이외에 5가 등 수납가가 6∼8두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전의 경우, 전주의 수취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그 밖에 쑥(薦)·숯(炭)·섶(薪)·꼴(草) 등의 여러 가지 수렴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 농민이 전답에서 새로 부담하는 양은 소출의 4/10이고, 그 중에서 공물 대납가가 6/10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0789)0789)(≪世祖實錄≫권 33, 세조 10년 5월 경진.) 1결당 소출을 미 300두로 기준을 삼으면, 전세 4/10는 120두가 되고, 그 중에서 공물 대납가가 6/10이라 하니 72두가 된다. 120두에서 72두를 제외한 48두가 전답에 부과되어 징수되는 액수가 되니 私田 전주가 전객으로부터 받아내는 48두와 일치된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104] 세종대 공법 도입 과정에서 도 단위 최대수세액을 총합한 수치는 약 60만 석 정도였다.84)[170] 이 60만석은 전세가 중앙으로 납입되지 않는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것이고, 아울러 경기에 설정된 과전 10여 만결도 제외한 수치였다. 또 도 단위 최대수세액을 기록한 해가 달랐기 때문에 한 해의 전세수입량이 아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성종 15년의 기록에 의하면 그 해 전세수입액은 모두 44만석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다.85)[171] 당시에는 이미 공법 수세가 도입된 이후였기 때문에 단순비교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태종대 미곡 확보량이 비상할 정도로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해 70만석 이상의 미곡 확보가 가능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전세의 수취량이 세종대 이후에 비하여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었다. 앞서 설명한 세종대 최대수취액을 기록한 해에도, 이를 도 단위 전결수를 고려하여 추산해 보면 1결당 수취액은 대략 6두 내외였다. 평균적으로 下中년 정도의 작황에 불과했던 것이다. 성종대의 44만석 역시 평균 6두 정도로 공법 수세에서 下中년 정도의 작황을 상정하여 수세했던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태종대의 답험은 국가의 입장에서 이루어져 훨씬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로 충청도관찰사 안노생의 사건을 들 수 있는데, 태종 9년 당시 충청도관찰사였던 안노생은 흉년이 들었음에도 답험이 매우 높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가 영해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안노생의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충청도의 起田 15만결 중 5만결에 대해서 給損하였다’ 란 내용이 나온다.86)[172] 즉, 충청도에 약 1/3 정도의 작황 손실을 보고한 것이며, 이 정도의 작황이라면 연분 평가로는 中上 내지는 上下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또 기전 10만결에 대해 결당 30두의 수취량을 부과한다면 대략 300만 두, 즉 20만석의 전세가 부과되는 것이었다. 앞서 세종대 충청도 지역의 최대 수세량은 세종 22년의 9만석이었다. 이에 비해 태종 9년에는 심각한 흉년이 들었음에도 전세수세량이 20만석에 육박하였고, 그 조차도 관찰사가 답험을 잘못했다는 죄목으로 유배에 처해진 것이었다. 이를 통해 추론해 보면 태종대에는 사실상 흉년과 풍년 가릴 것 없이 매우 높은 전세 부과가 상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기조에 반하여 백성들의 손실을 크게 평가하는 지방관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이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태종대 전세수세량은 뒤의 세종, 성종대에 비하여 훨씬 많은 양이었다고 볼 수 있다.87)[173] (<조선 태종대 미곡 확보 정책과 戶給屯田制의 시행>, 32-34)[105] 백성을 착취해 태종이 거둔 살인적인 세금수준 태종이 본격적으로 착취를 자행한 것은 짧게는 잉여곡을 123만석[174]까지 비축한 태종 9년 이후부터 잉여곡을 357만석[175]까지 비축한 태종 13년 이전까지 5년 동안이고 길게는 300만석 가까이 순수하게 착취해서 그러니까 최소 300만석 가까이 착취해서 잉여곡을 5도에서만 415만석[176]으로 늘려서 비축해 놓은 태종 17년 이전까지 9년 동안이다. 이는 인구가 3배는 늘어나고 환곡의 대출액이 1000만석을 넘어가는 조선후기에 가서야 보통 유지되는 환곡의 비축액의 7할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이다.[177] 문제는 세종 대와 달리 이 사이에 년단위 안에서 집행된 구휼목적의 재정지출이 10만석대의 규모로는 태종 12년에 평안도에서 한차례[178] 관찰되는 것을 제외하면 아예 관찰되지 않을 뿐더러 태종 16년에 경기도에서 고작해야 10만석에 못미치는 재정지출이 발생한 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이다.[179] 게다가 이렇게 많이 쌓아 놓아 봤자 4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적어도 100만석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탕진해서 버렸는데[180] 그 사이인 세종 초에 특히 세종 5년에 그동안 없었던 구휼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그 액수가 다들 1만석대의 규모에 불과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는 곡식의 보관기간이 10년 미만임을 생각하면 뻔한 일인데 이쯤에 와서는 가령 과거 10년 전쯤에 그러니까 착취가 절정에 달한 태종 12년 이때 수확해 착취한 백만석 가까운 곡식이 썩어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러니까 보관기간 안에 각종 구휼 명목으로 잉여곡을 방출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자연감모(自然減耗) 되었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각 관청별 사업내역 그리고 소요예산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걸신들린 악귀같이 일단 닥치는대로 허겁지겁 착취에만 혈안이었으니까 현물화폐로 유지되기에 자본축적이 어렵고 막대한 자연감모(自然減耗)가 발생하는 당시에 경제상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이 제정신을 가졌다면 세조[181]성종[182]연산(!)[183] 랑 비교되는 것 그 자체가 굴욕이 아니냐? 후대들이 그랬듯이 딱 당시에 환곡의 대출액 만큼인 100만석 미만의 규모만 유지하겠다는 상식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위해 적절한 세수규모를 조정하는 등의 행동이 있었어야 했으나 이쯤 설명했으면 눈치를 챘겠지만 그 정도 수준의 정상적 사고가 돌아간 것은 참으로 애석하게도 세종 말에 와서였다. 세종 대에 역시 재위 거의 내내 태종 대와 다를 것이 없이 이러한 미쳐돌아가는 행태가 지속되다가 재위 거의 끝무렵인 세종 28년에 와서야 요즘의 복지급여 부정수급[184] 사태에 해당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것을 계기로 의창의 환곡이라는 제도가 정상적으로 정비되고 그에 필요한 비축액이 242.2만석으로 설정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185] 물론 242.2만석이라는 비축액 역시 당시에 경제상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세조 이후 민의 부담을 덜기 위한 과감한 감세기조[186] 하에서는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한 액수의 규모였고 성종 대에 《경국대전(經國大典)》[187]에서는 지방의 의창이 별창(別倉)이라는 이름으로 별창 말고 거의 다가 중앙의 군자감으로 통합되어서 사실상 의창이 법으로 폐지된다.[106] 사헌부 시평(司憲府持平) 안윤손(安潤孫)이 와서 아뢰기를, "나라의 경비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공신전(功臣田)과 직전(職田)의 1만여 결(結)의 조세(租稅)를 관(官)에서 징수하면서 사사전(寺社田)의 세는 다만 대자사(大慈寺)·장의사(藏義寺)·각림사(覺林寺)만 3분의 2를 감하고 나머지는 옛날대로 하는데, 대체에 있어서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사사전은 선왕이 모두 중하게 여긴 것이어서 경솔하게 혁파할 수 없다. 그래서 다만 세 사전(寺田)만을 감한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성종 15년 5월 13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노공필(盧公弼) 등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공신전(功臣田)과 직전(職田)은 선왕께서 선비를 권장하고 공로에 보답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오늘 날 이를 감한 것이 어찌 하고 싶어서였겠습니까? 오로지 나라의 경비가 부족하므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경비가 부족하면 마땅히 먼저 경비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현재 드는 비용으로서는 사사전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 수는 무려 1만여 결이나 되니, 그 세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대저 마음을 쓰는 사람은 사람을 다스리고, 힘을 쓰는 사람은 사람에게서 다스림을 받는 것인데, 사람에게서 다스림을 받는 자는 사람을 먹여 살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사람은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먹여줍니다. 그래서 공이 나라에 있으면 먹여지고 공이 백성에게 있으면 먹여지는 것인데, 신(臣) 등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중들은 백성에게 공이 있습니까, 나라에 공이 있습니까? 만약 나라에나 백성에게 공이 없다면 사람들이 먹여 살리는 것은 불가한 것입니다. 백성이나 나라에 공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먹여 살리지 못하는 형편인데, 백성에게나 나라에 공도 없으면서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사사전(寺社田)이 선왕 때에 있었던 일이라 가벼이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면, 공신전이나 직전만은 선왕께서 설치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또 중들이 춥고 배고프기 때문에 가벼이 감(減)하지 못한다면, 세가 없는 모든 절에까지 두루 베풀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부처를 믿는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이같은 행사를 본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어찌 성의(聖意)의 소재를 알 것이며 천 년의 후세에 또한 어찌 이를 거론할 자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과단성 있게 조처하여 사사전을 모두 개혁해서 경비를 보충하고 백성의 의혹을 풀어 후세의 빈축을 막게 하소서."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성종 15년 5월 15일) 세조가 즉위하면서는 정난·좌익공신의 책록에 따라 80∼500결씩 총 10,600여 결의 공신전과 상당한 별사전이 지급되는255) 등 과전의 부족이 더욱 심화되었다. 255) 정난공신에게는 1등 12명에게 500결(수양대군)과 200결(11명)을, 2등 11명에게 150결을, 3등 20명에게 100결을 각각 지급했고, 좌익공신에게는 1등 7명에게 150결을, 2등 12명에게 100결을, 3등 25명에게 80결을 각각 지급했다. 또 한명회·신숙주·정인지가 170결·90결·50여 결의 별사전을 각각 받았다(韓永愚,<王權의 確立과 制度의 完成(世祖-成宗)>,≪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219쪽).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107] 한편 조선 건국 초기에는 많은 공신들이 양산되었다. 中興(1389)·開國 (1392.8)·太祖原從(1392.10)·回軍(1393.7)·定社(1398.10)·佐命(1401.1)·太宗原從(1411.11) 공신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많은 공신전과 별사전이 주어졌다.171)171)(이 중 中興功臣田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없어졌다.) 조선 건국 초기의 10년간에 지급된 공신전의 총액은 약 45,100여 결이나 되었다.172)172)(深谷敏鐵, <科田法から職田法へ(下)>(≪史學雜誌≫51-10, 1940), 1223쪽.) 이는 태종조의 과전 총액인 84,100결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이들 공신 중에는 과전·공신전·별사전을 거듭 받아 1,000결이 넘는 수조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공신전 증대는 이를 충당할 토지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軍資田을 떼어 공신전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군자전의 감축은 군비를 소홀히 할 염려가 있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3) 양반의 특권 > (5) 토지소유의 특전)[108] 게다가 정릉이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109] 신덕왕후가 죽고 뒷배가 사라진 세자 방석에게 권위를 실어주기 위함이기도 했다.[110] 하륜은 자신의 사위들까지 동원하여 노른자 땅을 가장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았다.[111] 태종으로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신덕왕후는 이방석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했으며, 그중 가장 많이 견제당한 사람이 바로 태종이었다. 비록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에는 태조의 의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자신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신덕왕후를 태종으로서는 좋게 볼 수 없었다.[112] 이 일로 인해 이성계의 진노를 샀지만 말이다. 사실 이성계가 깨어난 후로 정몽주가 이성계를 어찌할 방도는 막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였고, 정몽주는 역적으로서 저잣거리에 매달렸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인 이상 그 사정이 어찌되었냐를 떠나 이방원은 정몽주라는 방해물을 제거한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이다.[113] 창왕 폐위와 공양왕 즉위 이후 후계구도에서 배제됐다는 견해도 있다. 이방우가 창왕의 책봉을 위해 명으로 가는 사신단의 수장이었는데, 이 창왕이 폐위되면서 이방우는 버림패가 됐다는 것.[114]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봐서 제사만은 지내주겠다는 말이다.[115] 실록에서도 이방석 책봉 당시의 기사에서는 일관되게 태조가 직접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관철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정도전조차도 원래는 이방석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처음부터 이방석을 세자로 지지한적이 없다.[116] 이 일이 소문이 퍼져 김한로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김한로도 은근히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다니 좋았는지 이걸 듣자 형조판서에게 가서 하소연했고 형조판서는 다시 태종에게 가서 아뢰었다.[117] 다만 곧 공부와 이현은 다시 석방되었다.[118] 장자승계원칙에 따라서 만약 세자가 폐해지면 바로 그 다음 아들인 효령대군이 세자가 되어야 했다. 형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시킨다고 해버렸기 때문에 1차 왕자의 난이 터진 것이기도 하다. 태종이 아들바보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장자계승원칙을 어떻게든 지켜보려고 한 사람이었는데도 태연하게 '효령 걔는 도 못 먹고 뭔 말을 하면 웃기만 하니 왕은 도저히 못 시키겠는데.' 하고 승계 순위가 밀리는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부연하자면 왕자들 사이의 권력 쟁탈전에 아주 통달한 태종 같은 왕이 보기에도 앞으로 태종 사후에 효령대군이 보위에 오른 충녕(=세종대왕)의 권세를 노릴 가능성이나 세종대왕이 효령대군을 제거하려 할 가능성은 제로였다는 뜻이다.[119] 실제로 한고제 유방이 죽은 후에 여후가 한나라를 얼마간 여씨의 천하로 만들어버린 사례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120] 하지만 결국 조선왕조 말기에 여흥 민씨의 나라가 되어 망국을 맞는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121] 임금이 내전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들의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청(請)을 왕비에게 말하니, 왕비가 불가(不可)한 것을 말하기를,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태종 18년 6월 3일 임오 1번째 기사[122] 이런 인물이 이외에도 더 있는데,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박습 역시 태종의 동기였다가 간관직을 거쳐 병조판서를 역임한다. 심온의 옥사에 휘말리면서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도 김한로와 닮았다.[123] 처형당한 대표적인 인물들인 민씨 형제는 양녕과 세종의 외숙부, 심온은 세종의 장인이다. 태종 사후 왕이 인정에 이끌려 복귀시킬 가능성도 높으니 아예 죽여서 여지를 없애버렸지만, 김한로는 세종이 형의 장인에게까지 그런 인정을 베풀 이유는 없으니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 외척이 아닌 공신인 이숙번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유로 정치 생명만 끊는 것으로도 충분했기에 목숨을 거둘 필요는 없었다.[124] 다만 심온의 가문 자체는 상당히 빵빵한 명문가문으로, 그 아버지가 개국공신이었다.[125]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박은은 세종이 충녕대군이던 시절에 심온에게 '사위 관리 좀 잘 하라.'고 말했지만, 심온은 그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박은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에게 자꾸 딴지를 걸었기 때문. 이 말에는 '이대로 세자가 즉위하면 당신이 왕에게 무사할 것 같냐.' 혹은 '충녕대군께서 왕이 되면 태종께서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냐.'는 의미다. 이를 두고 심온이 자기 사위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어했다는 해석도 있다.[126]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세종대왕이 조선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았다면 소헌왕후는 최고의 왕비로 평가받았다. 더 말이 필요한지?[127] 간단히 말해서 폐출 후 새 왕비를 들이면 또 숙청, 그리고 다시 또 폐출하면 또 숙청, 말 그대로 폐출 - 숙청 - 폐출 - 숙청의 무한루프의 시작을 끊을 수 있었다.[128] 이 시점에서도 이미 세종과 소헌왕후는 3남 2녀를 둔 상태인 데다 당시 넷째 임영대군이 복중에 잉태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녀를 여러 명 낳아서 총 8남 2녀를 두었다. 왕비 소생 자녀 중에서는 최다인 셈(요절한 자녀까지 포함하면 시어머니 원경왕후가 최다).[129] 물론 태종이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라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데는 왕비 자리를 지키는 게 유리하긴 하지만, 당장 아버지는 억울하게 역적 누명을 쓰고 심한 고문을 받고 자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고 가문이 날아갔는데 자식 입장에서 계속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유리할 때를 기다릴 생각은 못 하는 게 정상이다. 원경왕후 정도라면 민무구/민무질이 죽은 직후엔 후일을 도모한다는 생각을 해 볼 법도 했겠지만, 소헌왕후는 그만한 결기는 갖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소헌왕후가 원경왕후 같은 성품이었으면 태종이 며느리로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130] 성녕대군의 처가의 경우에는 성녕대군이 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좀 많이 우대 받았다. 세종 때 바뀌긴 하였지만, 태종 때만 해도 사위는 군에 책봉되는 등 나름 우대받았다.[131] 다만 민씨 사형제의 아버지였던 민제와 달리 심온은 집안에서는 심덕부의 후처의 아들이고 굉장히 늦둥이라서(심덕부가 1328년생, 심온이 1375년생으로 부자간 47년의 터울이 나는데 결혼을 빨리 했던 당시로서는 거의 부자간이 아니라 조손간 뻘이다), 터울이 많이 지는 이복형들을 원활하게 단도리하기에는 어려윘을 것이다. 심온도 태종의 외척 경계에 대해서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는지, 사위인 충녕대군이 왕세자에 오른 후 은퇴의 뜻을 밝혔다.[132] 감싸준 것도 대개 전반부 한정이다. 이 거만하다는 죄목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큰 사건이 있는데, 이숙번이 사는 집 앞으로 길이 놓인다는 걸 안 이숙번이 길길이 날뛰며 태종의 형님이자 2대 국왕인 정종이 사는 인덕궁 앞에 길을 내라고 반협박을 가해 결국 정종이 물러서며 인덕궁 앞에 길이 났다. 왕권을 건드리는 짓을 절대 용납 안 하던 태종이 나중에 이숙번을 숙청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133] 그래도 세종대왕은 이숙번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세종대왕은 선왕인 태종이 내렸던 결정들은 웬만해선 존중했다.) 경기도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이숙번에게는 조금은 다행이었는데 원래의 유배지는 경상도였다. 유배지는 죄의 경중과 이전의 공적을 고려해 도읍지인 한양과 얼마나 가까울지, 멀지가 결정된다. 과거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마지막엔 경상도보다도 더 머나멀고 육지와도 동떨어진 그 유배지가 제주도로 옮겨진 것만 보더라도 이숙번의 유배지가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보다 도읍지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 것은 그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4] 오히려 후대의 영조 31년에는 무려 총 200명이 죽는 대형 옥사가 터진다. 물론 이미지가 그렇지 죽인 숫자 자체는 태종이 더 적다. 차라리 태종은 자비로울 지경. 물론 중후반대로 가면 태종과는 사정이 약간 달라지지만...[135] 대표적으로 태종의 공신들이었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실권을 상실하였다.[136] 사관은 대개 무신들을 깔보기 쉬운 문신인데도 조영무의 졸기에는 '소박하고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라고 평가했다.[137]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륜은 어떻게 보면 태종의 예상보다도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하륜은 태종보다 20세 연상이었는데, 그 하륜이 숨졌을 때 나이가 70세로, 당시에는 60세까지 살아도 "죽었다고? 살만큼 살았네!"라고 넘어갈 나이인데, 그 나이에서 10년을 더 산 것이니 상당히 장수한 것이다.[138] 단, 구족은 중국에서 매번 벌어진 일이고, 조선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안 했다.[139] 다만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은 주동자가 자기 가족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들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인 탓에 처형도 참형으로 깔끔하게 끝냈다. 역적은 기본적으로 극형에 처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걸 감안하면 어쩔 수 없이 죽이게 되었으니 죄인들은 죽더라도 깔끔하게 죽게 해준 것.[140] 물론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고 벌인 일이지만, 손에 많은 피를 묻혀 성군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본인도 말년인 상왕 시절 최측근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과인은 덕이 없으므로..."라고 자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141] 물론 성종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추문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성종이 기본적으로 신하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명군이지만 밀어붙일 때는 본인 뜻대로 밀어붙히는 강단있는 군주였다.[142] 고려는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오녀산성을 비롯해 아주 잠깐 요동을 점령하였다. 이 때 큰 활약을 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도 관련이 있다.[143]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144] 심지어 나중에 성조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영락제가 처음 받은 묘호가 태종이었다.[145] 실제로 명나라와의 조공 무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로 손을 뻗기 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강대국이었기에 조공 무역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이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천자국으로서 설마 빈손 대접을 할 거냐고 은근히 압박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줘야 했다. 명나라의 선물 대부분은 조선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귀중품이나 발전한 물건들인지라 조선은 이걸 받아서 자체적으로 발전에 필요한 재료 및 국고로 활용이 가능했다. 쉽게 비유하면 설날에 조카삼촌에게 세배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세뱃돈을 두둑히 주는 것과 같다.[146] 명나라 입장에서는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에는 조선에게 조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했을 리가...[147] 사실은 태종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몰랐던 척하라고 실록에 나와있다...[148] 형식상 스스로 양위한 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중종, 고종 총 7명이 있었다. 그 중 태조와 정종은 태종의 무언의 압박과 권력에 대한 환멸을 이유로 양위하고, 세조와 중종은 죽기 하루 전에 물려줘서 사실상 양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인해 일본이 강제로 쫓아냈다. 단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야사에서는 즉위식 때 세자인 충녕이 아직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세자가 사용하는 양산을 집어들었는데, 태종이 굳이 왕의 양산을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주상, 이 조선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감격하여 엎드려 통곡했지만, 충녕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49] 황희에 대한 비판이 올라오자 "정승이라고 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륜은 욕심많고 박은은 아첨하기 좋아하고 이원은 이(利)만 알고 의(義)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라고 반박했다.[150] 그러나 대마도 정벌은 졸전 끝에 이종무의 탄핵으로 마무리되었다.[151] 여담으로, 상왕이 됐음에도 신하들은 사냥다니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태종은 세종과 함께 운동한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 게다가 100간에 달하는 집을 네 채나 짓고 며칠 이 궁 또 저 궁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몇몇 이들에게는 안 좋게 보였는지 누구는 "저렇게 놀고 사냥하고 자빠졌으니 우왕 꼴이 날 거야!"라고 말했다가 참수되기도 했다.[152] 1. 많은 경험을 쌓아 세상일에 익숙하다. 2. 나이에 비하여 어른티가 나다.[153] 양녕대군 문제로 인해 유배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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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 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했다. 이는 정도전이 3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에 되어서야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30, 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 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도전에 가려졌지만 같은 동료였던 조준이 정치력이나 실무능력면에서는 정도전보다 더욱 뛰어났다. 게다가 외골수였던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관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155] 한마디로 '허사재(許四宰)' 허후의 아버지 '허 정승(許政丞)' 허조가 태종 대에 만든 의주(儀注)를 써먹을 수 없어서 세종 대에 갈아엎었다는 것이다.[156] 7) 國朝五禮儀, 序.[157] 8) <세종실록>, 五禮, 序.[158] 9) <세종실록> 권106, 26년 10월 병진, “命僉知中樞院事卞孝文鄭陟、成均司藝閔暖、集賢殿校理河緯地博士徐居正 校書校勘朴元貞 承文院副正字尹恕 詳定五禮儀注于集賢殿”.[159] 10) <단종실록> 권3, 즉위년 9월 임인.[160] 11) <단종실록> 권3, 즉위년 9월 임인., 윗 글.[161] 12) <국조오례의>가 편찬되기 이전에 각종 의식과 관련해서 소용되는 의주는 예조 낭관이 이를 상정하면 의정부의 考閱을 거쳐 확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정 의주가 의정부의 고열을 거치지 못하여 문제가 된 경우로는 문종 즉위년에 세종에 대한 상례 의주가 당시 문제가 된 경우를 들 수 있다(<文宗實錄> 권1, 즉위년 3월 갑자).[162] 41) 이를 열거하면 <進賀禮儀> <出使禮儀> <祭祀禮儀> <服色> <文武階勳> <給授文職散官定式> <吏員資格> <奏啓本格式> <行移體式> <署押體式> <官吏俸祿>이다.[163] 42) 金海榮, <朝鮮初期 祭祀典禮 硏究>(集文堂, 2003.), 앞의 책, 「祀典의 정비와 <洪武禮制>」를 참조.[164] 43) 「祀典의 정비와 <洪武禮制>」, 위의 책, 59~62쪽.[165] 44) <홍무예제>의 <進賀禮儀>조와 <出使禮儀>조는 天壽聖節 및 正旦冬至日의 賀禮 의식에 관련된 5개항의 준행 세칙과, 迎詔書 의식과 관련된 9개항의 준행 세칙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國朝五禮儀>, 嘉禮의 <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와 <迎詔書儀> <拜表儀> 등과 관련되는 내용이기도 하여 주목을 요한다.[166] 53) <개원례>의 제의는 <통전>, 예전, 개원례찬류 편에 55종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圓丘․ 明堂․ 東郊․ 南郊․ 西郊․ 北郊․ 方丘에서 행하는 각종 제의와 太廟의 禘享, 皇帝의 巡狩, 太山과 社首山에서의 封禪, 齊太公에 대한 釋奠 등이 <世宗實錄> 오례의에 수용되지 않은 것이다.[167] 54)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의는 <상정고금례>의 사전 체제를 기반으로 한 것에다가(<太宗> 25卷, 13年 4月 辛酉), <홍무예제>의 규정에 따른 ‘풍운뇌우․ 산천․ 성황신’의 合祀 의식과 ‘풍운뇌우단기우의’ 정도를 추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상정고금례>에 등재된 것으로 나타나는 제사는 <개원례>의 그것과 유사하다.[168] (註 161) 호포(戶布) : 호(戶)를 단위로 면포(綿布)나 저포(紵布)를 징수하던 세제. 고려 충렬왕 때 홍자번(洪子藩)의 주장에 따라 처음으로 실시하여, 조선조 태조 때 요역(徭役) 대신에 이를 징수하였는데, 대호(大戶)에 2필, 중호(中戶)에 1필, 소호(小戶)에 반 필을 납부하도록 규정하였음.[169] (註 042) 삼월(三刖)의 죄 : 다리를 세 번 잘릴 죄란 말이다.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옥덩이 하나를 얻어 여왕(勵王)과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여 두 다리를 잘렸다.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가 또 옥덩이를 안고 형산의 밑에서 통곡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옥덩이를 쪼개 보라고 하였는데 과연 아름다운 옥이었다. 여기서는 이를 인용하여 지금 자신의 말이 쓰여지지 않고 있으나 화씨의 옥덩이의 일처럼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화씨(和氏).[170] 84) 세종 23년 공법 도입 논의 과정에서 신개는 세종대 답험수세제 하에서 도 단위로 최고수세액을 공법 예상 수세액과 비교한 보고를 올린바 있다(세종실록 권93, 23년 7월 5일 기해). 이에 의하면 경상, 전라, 경기도는 甲寅年(세종 16)이, 충청, 강원, 황해, 함기로, 평안도는 庚申年(세종 22) 수세액이 가장 많은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이들의 최고수세액을 모두 합산하면 대략 60만석을 조금 상회하는 수치이다. 따라서 단일한 연도의 최대수세액은 이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약 60만석 정도가 세종 23년까지의 전세 최대수세액으로 잠정 추정할 수 있다.[171] 85) 성종실록 권169, 15년 8월 3일 丁巳.[172] 86) 태종실록 권17, 9년 6월 3일 甲辰, “上謂亮曰 魯生之罪 乃錯誤也 然其意難知 亮對曰 十五萬結 給損五萬 三分之一也 又何加焉 乃有是命”[173] 87) 태종대 당시 매우 고율의 전세부과가 상시적으로 존재하였던 것에 대해서는 강제훈, 朝鮮初期 田稅制度 硏究-踏驗法에서 貢法 稅制로의 전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앞의 책 ; 소순규, 「朝鮮初期 貢納制 운영과 貢案改定」,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참조.[174] 호조(戶曹)에서 호급 둔전(戶給屯田)020)[188] 의 종자(種子)를 청하였다. 계문(啓聞)은 이러 하였다. "이제 경외(京外)의 잡곡을 총계한 수량을 상고하면, 경중(京中)은 25만 2천 6백 94석이고, 외방(外方)은 1백 22만 9천 1백 63석입니다. 그러나 흉년의 재해(災害)와 군사의 일은 고금(古今)의 염려하는 바이니, 위의 축적한 곡식으로는 진실로 급한 일에 대비하기가 어렵습니다. 빌건대, 외방의 민호(民戶)를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로 나누어 호(戶)마다 둔전 종자(屯田種子)를 주되, 대호(大戶)에는 3두(斗)에 소출(所出) 15두, 중호(中戶)에는 2두에 소출 10두, 소호(小戶)에는 1두에 소출 5두, 잔호(殘戶)에는 2, 3호를 합하여 1두를 지급하여 소출 5두로 하고, 잡곡(雜穀)을 논할 것 없이 가을이 되거든 거두게 하소서. 또 빌건대, 불긴(不緊)한 각사(各司)의 공해전(公廨田)을 혁거(革去)하소서. 또 각사(各司)의 하전(下典)021)(註 021)(하전(下典) : 아전(衙前).) 은 이미 봉족(奉足)이 있는데 다시 삭료(朔料)를 받으니, 청컨대, 그 하나는 감(減)하도록 하소서. "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 9년 1월 18일)[175] 이제 중외에 곡속(穀粟)의 수가 3백 56만 8천 7백 석(石)이니, 저축한 것이 가히 많지 않다고 이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방에 흩어져 있고 도로가 멀고 막혀서 조운(漕運)이 통하지 못하니, 만약 긴급한 일이 있으면 어찌 능히 아침저녁으로 운수하여 비치해서 그 비용에 이바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태종 13년 8월 6일)[176] 우대언(右代言) 하연(河演)이 5도(道) 창고에 저축한 쌀과 곡식의 수를 올리었다. 총합계가 모두 4백 15만 5천 4백 1석 2두(斗)인데, 그 안에서 환상(還上)으로 나누어 준 쌀이 1만 9천 3백 30석 1두이고, 곡식이 80만 8천 1백 48석 10두이었다. (태종 17년 7월 20일)[177] (일반) 환곡관련 예전에 좀 정리해보려 한적이 있습니다[178] 풍해도의 보리 종자를 서북면(西北面)에 옮기라고 명하였다. 의정부에서 상언하였다. "서북면의 창고 곡식이 모두 60만 석인데, 빈궁한 백성에게 진대(賑貸)한 것이 이미 30만 석이고, 지금 또 가무니, 만일 흉년이 들어 또 진대(賑貸)해야 한다면 곡식이 장차 남음이 없을 것입니다. 풍해도에서 상납하는 소맥 6백 70여 석을 서북면에 수송하여 실농한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수령으로 하여금 각호(各戶)의 비옥한 밭을 택하여, 경종(耕種)하는 것을 친히 감독하여 내년을 대비하고, 또 금년의 풍해도 전세(田稅)를 서북면에 수송하여 모두 군량에 충당하여 불우에 대비하소서." 잠정적으로 보리 종자만 옮기라고 명하였다. (태종 11년 7월 19일)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추가하여 나타난 호구(戶口)와 미곡(米穀)의 수를 올리었다. 보고는 이러하였다. "환상(還上)하는 쌀과 콩을 인구로 계산하여 주니 인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원호(元戶) 내에서 인보적(隣保籍)062)[189] 에 올리지 않은 것으로 추가하여 나타난 장정 남녀(壯丁男女)가 모두 1만 1백 50명이고 동자(童子)가 5천 92명입니다. 지금 현재 3천 8백 12호 내에서 장정 남녀(壯丁男女)가 모두 1만 1천 5명이고, 동자(童子)가 4천 3백 90명이며 유리(流離)하여 양식을 구걸하는 장정 남녀(壯丁男女)가 모두 3백 33명이고, 동자(童子)가 1백 33명입니다." 또 보고하였다. "창고(倉庫)에 있는 원수(元數)를 회계하면 쌀·콩·잡곡이 54만 5천 14석인데, 실농(失農)한 각 고을 수령의 늠봉(廩俸)과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한 것과 종자(種子)를 나누어 준 것을 제외하면, 현재의 재고가 41만 4천 3백 80석이고, 풍해도(豐海道)에서 운수하여 온 쌀·콩·잡곡이 2만 7천 1백 18석입니다." (태종 12년 4월 11일)[179] 경기 진제사(京畿賑濟使) 이명덕(李明德)이 복명(復命)하여 아뢰었다. "각 고을의 기민(飢民)은 1만 1천 9백 10호 안에 남녀 노약(男女老弱) 아울러 6만 5천 8백 86구(口)인데, 도내 각 고을의 미곡(米穀)과 유후사(留後司)·충청도·강원도 각 고을에서 소유한 미곡을 수전(輸轉)하고, 혹은 환상(還上)으로, 혹은 진제(賑濟)로 묵은 쌀·콩·잡곡과 새 쌀·콩·잡곡을 나누어 준 것이 아울러 8만 1천 3백 47석입니다." (태종 16년 4월 8일)[180] 호조에서 계하기를, "여러 관청에 전곡(錢穀)이 날로 축나서 없어져 명목은 있어도 실상은 없사오니, 만약 다시 개혁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이 장차 구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그 나누어 맡는 것이나, 교대할 때에 넘겨 주는 것이나, 추징하는 것은 모두 위의 예에 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3년 1월 16일) 호조에서 계하기를, "의창(義倉)은 진제(賑濟)와 환상(還上)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고, 국고(國庫)는 곧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에 대비(對備)한 것입니다. 근년 이후로 여러 번 흉년이 들어, 모둔 백성의 생활이 오로지 진제(賑濟)와 환상(還上)만 바라고 있으니, 이로 인하여 의창(義倉)이 넉넉지 못하므로, 부득이 국고(國庫)로 지급(支給) 구휼(救恤)하게 되매, 군수(軍需)가 점차로 거의 없어지게 되니 진실로 염려할 만한 일입니다. 청컨대, 임인년과 계묘년의 흉년에 각도의 환상(還上)·진제(賑濟)에서 급여한 원수(元數)와 기축년에 장부에 올린 민호(民戶)의 수를 작량(酌量)하여 국고(國庫)에서 덜어내어 의창(義倉)에 보첨(補添)하되, 환상 진제할 때를 당하여는 오로지 의창(義倉) 것만으로 지급(支給)하고, 국고(國庫)의 것은 경솔히 지급하지 못하게 하여 군수(軍需)에 대비(對備)하게 할 것입니다. 그 의창에 보첨(補添)할 정수(定數)는 서울의 민호(民戶) 1만 1천 56호(戶)에 의창(義倉)의 미두(米豆)·잡곡(雜穀)이 모두 7천 1백 98석이고, 유후사(留後司)의 의창(義倉) 곡식이 1만 석이요, 경기의 민호 1만 9천 6백 27호에 의창의 곡식이 13만 43석이요, 경상도의 민호 4만 3천 2백 84호에 의창의 곡식이 20만 7백 43석이요, 충청도의 민호 2만 3천 98호에 의창의 곡식이 17만 9천 5백 56석이요, 전라도의 민호 1만 5천 9백 23호에 의창의 곡식이 8만 7천 1백 25석이요, 황해도의 민호 1만 7천 7백 1호에 의장의 곡식이 10만 6천 4백 77석이요, 강원도의 민호 1만 5천 2백 90호에 의창의 곡식이 8만 8천 11석이요, 평안도의 민호 3만 4천 6백 9호에 의창의 곡식이 20만 6천 4백석이요, 함길도의 민호 1만 6천 7백 87호에 의창의 곡식이 5만 4천 62석입니다. 신축년 이상의 국고(國庫)에서 받아 낸 환상(還上)은 의창(義倉)에 수납(收納)하여 보첨(補添)하고, 만약 신축년 이상의 환상(還上)이 없으면 각 고을에서 임인년의 환상으로 의창(義倉)에 수납하여 숫자를 보첨할 것이며, 또 주문공(朱文公)052)(註 052)(주문공(朱文公) : 주자(朱子).) 의 사창모미(社倉耗米)의 법에 의하여 매 1석마다 각기 3승(升)씩 더 수납하여 후일의 모손(耗損)에 대비(對備)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5년 9월 16일)[181] 세조조(世祖朝)에 군자(軍資)를 1백만 섬으로 채우려고 하였는데, 말년에 겨우 90여만 섬에 그쳤고, 지금은 군자와 풍저(豐儲)의 저축을 아울러 계산해도 겨우 50만 섬이니, 이제 비록 근심이 없다 하더라도 미리 저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종 15년 1월 4일)[182] 구치곤(丘致崐)이 아뢰기를, "상평창법(常平倉法)이 《대전(大典)》에 뚜렷이 있는데도 금년의 쌀값은 폭등하여서 면포(綿布) 한 필에 쌀이 2말 5되나 됩니다. 지금 나라의 저축한 쌀이 1백 만석이 되니 만일 베로 바꾸어 들인다면 곡식 값이 폭등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였다. (성종 12년 8월 26일)[183] 공자는 말하기를 ‘천승(千乘)118)(註 118)(천승(千乘) : 제후의 나라.) 의 나라를 다스리되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된다.’고 하였는데, 근래에는 용도(用度)가 대단히 많아져서 풍저창(豐儲倉)119)(註 119)(풍저창(豐儲倉) : 대궐 안에 쓰는 쌀·콩·자리·종이 등을 맡은 관아.) 이 텅 비어 일체의 국용(國用) 조달과 각 관사(官司)의 무역하는 대가가 모두 군자창(軍資倉)120)(註 120)(군자창(軍資倉) : 군수품 저장 창고.) 에서 나오게 됩니다. 세종(世宗)의 재위한 30년 동안에 군자창 저축이 30만 석이 넘었는데, 근래에는 개국한 지가 거의 백년이나 되었는데도 백만 석도 차지 못하니 생각하건대, 용도를 절약하는 방법이 아직 미진해서 그런 것이옵니다. (연산 8년 1월 24일)[184] 이달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육전(六典)》에 이르기를, ‘의창(義倉)의 설치는 본디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賑恤)하기 위한 것인데, 경외(京外)의 환상(還上) 미두(未豆)를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가난한 평민들에게 먼저 나누어 주고, 대소(大小) 양반(兩班) 중에서 혹은 상장(喪葬)의 일을 만났거나, 혹은 수재(水災)와 화재(火災)를 만난 사람과 한 마을에서 모두 아는 가난한 사람을 대호(大戶)·중호(中戶)·소호(小戶)로 분간하여 나누어 준다. ’고 하였사오니, 이것은 의창의 설치가 오로지 가난한 사람들을 진휼하기 위한 것입니다. 근년 이후로 각 고을의 수령(守令)들이 상항(上項)의 성법(成法)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백성의 가난하고 부유한 것도 조사하지도 아니하고서 한결같이 권농(勸農)·정장(正長)의 도목장(都目狀)의 숫자에 따라 인구를 계산하여 지급하게 되니, 이런 까닭으로, 비록 부자일지라도 또한 환상은 장리(長利)의 이식(利息)을 내는 비교가 아니라 생각하여, 자기 집 곡식은 묻기도 하고 옮기기도 하여, 척간(擲簡)할 때에 양식이 떨어진 사람처럼 하여 속여서 환상을 받게되고, 심한 사람은 장사할 밑천을 만들기고 하고, 또 술과 음식을 만들어 향도(鄕徒)와 음사(淫祀)에 제공할 비용으로도 만듭니다. 부유한 사람은 그 곡식을 함부로 소비하고, 가난한 사람은 지탱할 곡식도 없게 되면 또 타도의 곡식을 옮겨 와서 이를 잇게 하니, 지난 을축년에 경기의 인민 2만 5천여 호(戶)에 의창 곡식 63만 7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경상도의 4만 2천여 호에 37만 2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전라도의 2만 9천여 호에 43만 4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충청도의 2만 5천여 호에 80만 5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황해도의 2만 5천여 호에 21만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강원도의 1만 3천 여 호에 11만 5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함길도의 1만 4천여 호에 4만 4천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며, 평안도의 4만 4천여 호에 12만 5척여 석을 나누어 주었으니, 함께 21만 7천여 호에 나누어 준 수량이 2백 73만 8천여 석이고, 남아 있는 미곡(米穀)이 무려 5백 91만 2천여 석이나 됩니다. 지금 병인년에 각도에 나누어 준 미곡이 많기가 1백 15만 3백여 석에 이르게 되는데도, 의창을 열어 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서로 잇달아 끊이지 않으니, 장래의 일이 염려스럽습니다. 지금부터는 각 고을의 수령들은 그 경내(境內) 민호(民戶)의 빈부(貧富)와 전지(田地)의 다소(多少)의 저축(宿績)의 유무(有無)를 자세히 핵실(覈實)하여 3등으로 나누어 명백히 장부에 기록해 두되, 그 전지도 없고, 재산도 없이 가난한 사람은 별도로 장부에 기재해 두고서, 풍년에는 비록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혹은 자신이 고용(雇傭)살이를 하거나, 혹은 걸식(乞食)하면 생계(生計)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며, 중년(中年)에는 가난한 사람은 우선 그 하등(下等) 각 호의 인구와 실전(實田)의 수를 상고하여, 의창이 미두를 존절(撙節)히 나누어 주고, 흉년에 이르러서는 가난한 사람은 진제(賑濟)하고, 중호와 하호는 환상을 주되, 그 중에서 혹은 재해로 인하던지, 혹은 질병·수재·화재·도적등의 일로 인하여, 여러 사람이 다 함께 아는 굶주리고 피곤한 사람은 수령이 친히 살펴서 핵실하여, 그 호의 등급과 연사의 풍년·흉년을 헤아리지 말고 모두 적당히 나누어 주게 하며, 매 월말(月末)에 가난한 사람이 몇 명에 환상을 나누어 준 쌀·콩이 몇 섬이며, 진제를 나누어 준 것이 몇 섬, 아무 등급의 사람 몇 명에 나누어 준 것이 몇 섬인가를 상세히 감사(監司)에게 보고하면, 감사가 계문(啓聞)하게 하여 이를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28년 2월 29일) 충청도가 참으로 가관인데 저소득층도 아닌 2만 5천호 그러니까 대략 12만 5천명이 40만명분의 전국민 평균 1년 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을 타간 것이다. 요즘의 공기업 성과급 잔치는 애교인 수준이다. 물론 발단은 역시 태종 대에 그랬던 것처럼 1년에 백만석 가까운 곡식의 가혹한 착취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채로 곡식의 보관기간인 10년 동안 년수가 쌓이며 곡식이 쌓이다 보니까 865만석이라는 경악스러운 액수의 규모로 잉여곡이 비축된 것에 기인했다. 부전자전이라고 역시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185] 1. 군자감(軍資監) 의창(義倉)이 본래 7천 8백 12석 9두인데, 지금 2천 1백 87석 6두를 더하여 총계 1만 석인데, 지금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걷고 흩는 것을 관장(管掌)하게 하고, 개성부(開城府)의 의창(義倉)은 본래 1만 2천 1백 34석 5두인데 지금 그대로 하고, 경기(京畿) 의창은 본래 13만 8천 8백 39석 7두인데 지금 21만 1천 1백 60석 8두를 더하여 총계가 35만 석이고, 충청도 의창은 본래 18만 30석 2두인데 지금 16만 9천 9백 69석 13두를 더하여 총계가 35만 석이고, 전라도 의창은 본래 10만 7천 6백 91석 13두인데 지금 24만 2천 3백 8석 2두를 더하여 총계가 35만 석이고, 경상도 의창은 본래 25만 6천 8백 91석 8두인데, 지금 14만 3천 1백 8석 7두를 더하여 총계가 40만 석이고, 강원도 의창은 본래 8만 6천 9백 11석 12두인데 지금 11만 3천 88석 3두를 더하여 총계가 20만 석이고, 황해도 의창은 본래 13만 6천 48석 2두인데 지금 6만 3천 9백 51석 13두를 더하여 총계가 20만 석이고, 평안도 의창은 본래 18만 6천 6석 5두인데 지금 16만 3천 9백 93석 10두를 더하여 총계가 35만 석이고, 함길도 의창은 본래 5만 2천 7백 20석인데 지금 14만 7천 2백 80석을 더하여 총계가 20만 석인데, 상항(上項)의 더 준 수량은 전에 준 군자(軍資) 미곡으로 수납하여 충당하고, 만일 또 부족하면 군자의 미곡을 더 내어서 보충할 것. (세종 30년 4월 22일)[186] 세조는 국용을 줄여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고, 토지사유의 진행과 과전지급 대상자의 증가로 인한 과전부족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획기적인 재정절감책과 과전개혁책을 실시하였다. 세조 10년에는 재정제도를 개혁하여 수입을 고려하여 지출을 책정하는「計入量出制」를, 지출을 고려하여 수입을 책정하는「計出量入制」로 전환하였다. 즉 먼저 經費式例(橫看)를 제정하여 국가경상비를 사정하면서 지출계획표를 작성하고, 이에 의거하여 공부세입장부인 貢案을 작성케 하여 공부를 징수하였다. 이로써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루었고, 종래까지 지출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하게 수입을 책정함으로써 야기된 백성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251)251)(田川孝三,≪李朝貢納制の硏究≫(東洋文庫, 1964), 21∼22쪽.)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 태조 원년에 공안이 제정된 이래 태종 말·세종 초에 공안이 사정되었다. 그리고 세종 8년에 각사 경비는 式例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 식례는 供用造作式例인데 모든 각사에 행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供用하는 물품에 모두 적용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태조 이래 세조 때까지의 공안과 국용경비를 대비해 보면 공안이 적어도 국용경비의 3배 이상으로 제정되어 있었다. 당시 각사에 수납된 물품 중 남아돌아 부패하기 쉽고 오래 저장할 수 없는 많은 물자들이 민간에게 방매되었다. 각사 중에는 원래 그 소관물자를 판매하는 직능까지 합하여 설립된 관서도 있었는데 전의감·혜민서의 약재, 와서의 기와, 귀후서의 관곽, 교서관의 서적, 사온서의 술 같은 것이 그것이다. 태조 이래 방대한 공안에 의해 국가재정이 수납되었으나 경비 지출의 기준은 제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조 10년에 공안에 대한 개정을 단행하여 크게 삭감되었다. 그리고 세조 10년에 세출예산표라 할「橫看」을 제정한 것은 조선시대 재정제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제도 개혁이었다. 세조 10년에 經費式例가 제정되어 각 도 감영에서도 그 식례에 따라 행하게 되었다. 각사의 용도경비는 稅貢의 현물로 수납되어, 각사의 경비 중 현물로 직접 지출되는 것과 그것을 자재로 하여 소속 장인 등이 가공해서 供用하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그러므로 그 식례도 두 가지가 있어, 일반의 經費式例와 供用造作式例가 그것이다. 세종 때 114관서 중 43관서에 供用造作式이 査定된 바 있었으며 공용조작식례는 성종 4년에 이르러 완성되고, 그 횡간이 작성되어 국가경비 전반에 적용하게 되었다.0747)0747)(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東京, 東洋文庫, 1964), 위의 책, 317쪽.) 고려 이래 조선 초에는 공안을 제정하여 그 세입을 거두어 들이는 데 여러 규정이 있었으나 세출에는 일정한 방침이 없었다. 세조 때에 이르러서야 경비식례를 제정하여 경상비를 사정하고, 이것을 토대로 공안을 제정하였다. 세조 때 횡간의 제정으로 종전에 세입을 보아 세출을 정해왔던 것을 지양하여, 이제 세출을 계산하여 세입을 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경국대전≫호전에 “모든 경비는 횡간 및 공안에 따라 支用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세조 10년에 공안을 개정하여 공안이 삭감되었는데 성종 때에 이르러 공안이 다시 개정되어 또 삭감되었다. 세종 때의 공안을 1로 한다면, 세조 때의 공안은 2/3, 성종 때의 공안은 1/3로 줄어든 개혁이었다.0748)0748)(≪燕山君日記≫권 28, 연산군 3년 10월 무자.) 이에 따라 새로 상정된 횡간과 공안은 모두 절약된 예산이어서 그대로 준수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므로 공안에 규정된 세입 이외에 引納, 別貢 등으로 징수되고 횡간에 규정된 이외 別例用으로 지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재정제도에 있어서 세조 때 횡간에 의한 예산제도가 제정된 것은 획기적 제도 개혁이었으며, 횡간·공안의 제도는 구속력이 있는 기준으로서 운영되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2. 중앙재정)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1) 공납제의 문제점과 폐단148)148)(이 부분에 대하여는 高錫珪, <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앞의 글을 주로 참고하였다. 그 밖에 田川孝三,<貢納·徭役制の崩壞と大同法>(≪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과 金玉根,≪朝鮮後期經濟史硏究≫(瑞文堂, 1977) 등이 참고된다.) 조선 건국 이후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재정은 고려의 遺制 위에서 방대한 貢案에149) 의한 수입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재정적인 면에서 수지의 적합성은 고려되지 못하였다. 이에 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경비지출의 규모를 세우는 등 재정제도를 정비하게 되는 것은 세조대를 거쳐 성종연간에 이르러서였다. 세조 10년(1464)에 이르면 이러한 공안에 개정을 가하여 공액을 크게 경감하였고, 성종대에는 이를 다시 줄였다. 한편 수지의 균형을 이루고자 橫看을 제정하여 지출의 규모도 정하였다. 세조대에는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經費式例를 査定하여 횡간을 撰定하였고, 성종 4년(1473)에는 세종 말년에 정해진 各司 일부의 公用造作에 관한 式例(造作式例)를 완성하여 그 횡간을 작성·印行하였다. 이렇게 제정된 공안 및 횡간은≪經國大典≫戶典 經費條에 “모든 경비는 횡간과 공안을 사용한다”라고 법제화되어 국가의 경비 전반에 걸친 기반이 되었다. 이는 이후의 재정운영을 구속하였으며, 아울러 선초 貢納制의 성격도 결정하였다. 149) 貢案은 원래 貢物뿐 아니라 田稅 및 諸稅도 포함하여 이를 세목으로 분류, 그 상납읍·액수 그리고 상납자의 이름 등을 자세히 기록한 장부였다. 그러나 조금 늦은 시기의 기록이긴 하나≪宣祖實錄≫권 42, 선조 34년 10월 을유라든가≪孝宗實錄≫권 21, 효종 10년 2월 무자 등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대개 공안은 양안·호적과 병렬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공안이라 하면 土貢과 田貢에 대한 수입장부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187] ≪경국대전≫에 “軍資倉은 別倉을 설치하 여 잡곡을 많이 비축했다가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그 본 수 만 받아들인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대여 업무의 수수료와 자연 소모량 등의 원곡 손실을 보완하기 위하여 10% 정도의 이식을 징수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의창은 그 범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운영도 활발하였다. 그러나 각 군현에 설치된 의창의 원곡의 확보가 어렵게 되자 문종 2년(1452) 에 별도로 사창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창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점차 만연되어 가는 폐단을 막을 수가 없게 되어 중종 20년(1525)에는 이를 폐지하고 그 사업을 진휼청에 통합하였다.622)622)(≪經國大典≫권 2, 戶典 軍資倉.)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1. 가족제도 > 2) 진휼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