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5:13:09

태종(조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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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업적
2.1. 왕권 강화
2.1.1. 사병 혁파2.1.2. 관제 정비2.1.3. 공신, 외척 숙청 및 견제
2.2. 전국 행정 정비2.3. 서얼 차별 완화2.4. 명과의 우호 관계
3. 과오
3.1. 주먹구구식 제도 및 경제 정책
4. 복합적인 평
4.1. 대간 기능에 대한 지원과 핍박4.2. 숭유억불4.3. 공신전 문제
5. 기타
5.1. 타인과 비교
5.1.1. 정도전 관련
5.1.1.1. 옹호
5.2. 세조와의 비교
5.2.1. 계유정난의 부족한 명분5.2.2. 공신 견제 실패5.2.3. 원상 문제5.2.4. 신권 견제 관련5.2.5. 조선군 문제5.2.6. 토지 개혁
5.2.6.1. 결과
5.2.6.1.1. 창병 육성5.2.6.1.2. 병력 수요 증가
5.2.7. 총론

1. 개요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업적

2.1. 왕권 강화

2.1.1. 사병 혁파

사병(私兵)을 혁파하였다. 사헌부 겸 대사헌(兼大司憲) 권근(權近)과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 김약채(金若采) 등이 교장(交章)하여 상소하였다.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함이 있어야 하고, 흩어서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흩어서 주장하고 통속함이 없으면, 이것은 태아(太阿)를 거꾸로 쥐고 남에게 자루를 주는 것과 같이 제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맡은 자가 많으면, 각각 도당을 심어서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지고, 그 형세가 반드시 나뉘어져서, 서로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화란(禍亂)을 이루게 됩니다. 동기(同氣) 간에 서로 해치고 공신(功臣)이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 항상 여기에서 비롯되니, 이것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집에 병기(兵器)를 감추지 않았다.’ 하였으니, 사병(私兵)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예기(禮記)》에 말하기를,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이것이 인군을 협박하는 것이라 이른다.’ 하였으니, 인신(人臣)이 사병(私兵)이 있으면, 반드시 강포(强暴)하고 참람(僭濫)하여져 임금을 위협하는 데 이르는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법을 세우고 교훈을 남기어 후환(後患)을 막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즉위하던 처음에, 조용히 담소(談笑)하면서 능히 공신의 병권을 해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전(保全)할 수 있게 하였으니, 후세의 규범이 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진(晉)나라의 육경(六卿)과 한(漢)나라 말년에 군웅(群雄)이 함께 일어난 것과 당(唐)나라 말년에 번진(藩鎭)이 발호(跋扈)한 것이 모두 사병을 길러서 난을 꾸민 때문이었으니, 또한 후세의 경계가 될 만합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께서 개국하던 처음에 특별히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오로지 병권을 맡게 하니, 규모가 굉원(宏遠)하였습니다. 그때에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혁명(革命)하는 초기에 인심이 정하여지지 않았으니, 마땅히 불우(不虞)의 변(變)을 방비해야 합니다. 훈신(勳臣)·종친(宗親)으로 하여금 각각 사병(私兵)을 맡게 하여 창졸(倉卒)의 일에 대응하여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병을 다 없애지 못하였는데, 군사를 맡은 자가 도리어 난(亂)을 선동하기를 꾀하여 화가 불측한 지경에 있었으나, 다행히 하늘이 전하를 인도하고 도와주어 난을 평정하고 사직을 안정시켰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병을 두는 것을 오히려 전과 같이 하고 인순(因循)하여 해제하지 않으므로, 대간(臺諫)이 이미 일찍이 글장을 올려 파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친과 훈신은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보증할 수 있다 하여, 다시 군사를 맡기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소장(蕭墻)의 화가 지친(至親)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사병을 두는 것은 한갓 난(亂)만 일으키고 그 이익은 보지 못하는 것이니, 대간(臺諫)의 말이 이제 이미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사문(私門)의 군사를 지금도 역시 파하지 않으니, 장래의 화를 참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더구나 외방 각도의 군마(軍馬)를 여러 절제사(節制使)에게 나누어 소속시켜, 혹은 시위(侍衛)라 칭하고, 혹은 별패(別牌), 사사 반당(伴儻)이라 칭하여, 번거롭게 번상(番上)하고 소란하게 징발(徵發)해서 그 폐단이 심히 많으며, 배종(陪從)이 많고 전렵(田獵)이 잦아서 그 수고로움이 또한 지극합니다. 사람은 굶주리고 말은 지쳤으며, 비와 눈을 마구 맞아가며 사문(私門)에 숙직하므로, 군중의 마음이 원망하고 탄식하니, 심히 민망한 일입니다. 지금의 큰 폐단이 이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이제부터 서울에 머물러 있는 각도의 여러 절제사(節制使)를 모조리 혁파하고, 서울과 외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붙이어 공가(公家)의 군사를 삼아서, 체통(體統)을 세우고 국권을 무겁게 하고, 인심을 편안케 할 것입니다. 양전(兩殿)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는, 사문(私門)의 숙직은 일절 모두 금단(禁斷)하고, 조회하는 길에도 사사 반당(伴儻)으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근수(根隨)하는 일이 없게 하여, 예전의 집에 병기를 감추지 않는다는 뜻에 응하고, 후일에 서로 의심하여 난을 꾸미는 폐단을 막으면, 국가에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소(疏)가 올라가니,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의논하고, 곧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저(李佇)가 평주(平州)에서 사냥하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으니, 삼군부(三軍府)에서 이저에게 사람을 보내어 빨리 돌아오게 하였다. 이거이(李居易) 부자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서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
정종실록 4권, 정종 2년 4월 6일 신축 9번째 기사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해체해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하여 각각 위화도 회군무인정사에서 승리해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다른 후계권을 가진 자가 사병을 모아 제2의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병만큼은 아주 얄짤없이 철저하게 분쇄하고 사병의 인원을 흡수하여 모조리 중앙정부 소속 군대인 국군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1]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도전도 역시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였고 이후 조선은 태종 ~ 문종 때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 정도전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을 혁파함을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고 했으나, 조선 건국을 도운 전주 이씨 종친들과 공신들의 반발에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같은 왕실의 일원인 이방원이기 때문에 더욱 사병 혁파의 명분을 세우기 쉬웠던 점도 있다.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한다고 해놓고 그 병사들로 왕자와 왕족들을 숙청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샀다. 그렇다보니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선전이 먹혔던 것이다. 사실 정도전은 사상가와 이념가로서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정치가로서는 정치력과 처세술이 무척이나 떨어지고 허술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2][3]

문제는 정종 대에 실시된 사병혁파가 남김 없이 실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조사의가 태조의 사병인 가별치를 가지고 조사의의 난을 일으킨 것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1. 동북면(東北面) 함주(咸州) 등처에 ‘가별치(加別赤)’라고 이름하는 것이 모여서 일당(一黨)이 되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지 않고, 따로 가병(家兵)을 만들어서 사사로이 서로 결탁하여 방자하게 호기(豪氣)를 믿고 날뛰어, 주현(州縣)에서 금제(禁制)하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적신(賊臣) 조사의(趙思義) 등이 변란(變亂)을 꾀하던 처음에 오로지 이들 무리에게 힘을 입어서 당원(黨援)을 삼고 임의로 병혁(兵革)을 일으켜, 거의 사직(社稷)을 위태하게 하였으니, 만일 혁파하여 없애지 않으면 다시 이런 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일체 모두 혁파하여 없애어 국가의 역사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2월 2일 신해 3번째 기사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서 계본(啓本)을 갖추어 아뢰었다.
"한(漢)나라의 군정(軍政)은 처음에 우격(羽檄)을 써서 천하의 군사를 불렀으나, 뒤에는 호부(虎符)를 써서 군국(郡國)의 신(信)을 합하여, 교서(膠西)에서 임의로 군사를 징발하려 하매, 궁고(弓高)가 이를 힐난하였고, 엄조(嚴助)가 절(節)을 가지고 군사를 발하매, 군수가 거절하였으니, 군사를 부르는 것은 주밀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간사한 마음이 없어서 한대(漢代)가 끝날 때까지 안연하여 일이 없었습니다. 여러 여씨(呂氏)와 칠국(七國)의 변이 창졸간에 생기었으나, 방비하고 막는 것이 본래 갖추어 있었고, 북호(北胡)와 남월(南越)이 군사를 연하기를 여러 해를 하였으나, 나라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대개 고조(高祖)가 군사 사이에 출입하여 이되고 병되는 것을 익히 강구하여 4백 년의 규모가 광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제도에 의하여 유사로 하여금 호부(虎符)를 만들어서 무릇 안팎의 동병(動兵)하는 일은 공경하여 왕지(王旨)를 받들어서 호부로 징발하고, 호부가 없이 군사를 부르는 자는 천단히 징발하는 것으로 죄를 의논하도록 항식을 삼으소서."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0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또한 정종 대에 사병혁파의 주요 타겟이 됐다고 알려진 시위패(侍衛牌) 해체는 정도전이 이미 절제사들과의 연결을 상당부분 차단시킨 후에 숟가락만 얹은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할 여지도 있다.
한편 태조 3년 2월, 判三軍府事 鄭道傳은 軍制 全般에 관련한 上書를 올리는데, 그 주요 요지가 절제사의 직접적인 군사동원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즉 시위패들에 대한 제반 규정에 삼군부의 영향력 행사를 강화시키고 나아가 各衛.各司.各領의 명칭 개정과 조직 및 지휘체제에 대한 대대적인 整備案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따라서 이같은 군사체제의 정비는 각 측면에서 절제사의 위상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삼군부에서는 병법 훈련에 시위패를 동원하기 시작하였고 태조 말엽에 가서 이를 더욱 강행하였다.

결국 병권 집중을 위한 이같은 노력 결과 절제사들의 군사 징발 및 동원은 정식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하여, 태조 말엽에 이르면서 제절제사의 시위패에 대한 예속력은 지극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태조대 非무장 계열인 정도전 일파는 典兵者들의 무장해제를 위해 병권 정비에 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절제사들의 시위패 보유 역시 중앙 숙위에 근거해서만이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건국 이후 지속적으로 시도된 군제정비로 절제사들의 시위패는 사병으로 이용되기에 상당한 제약을 안고 있었다.
<高麗末 朝鮮初 私兵 硏究>, 199

2.1.2. 관제 정비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되는 간관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4]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 했고 틈만 나면 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좀 자제시켜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다. 이는 간관을 통한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간관들이 왕에게 간언을 하기도 하나, 관리들의 비리 등에 대해 간함으로써 대신들을 제어를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관리 감찰 관원들을 즉 간관들을 사간원으로 모아서 의정부에서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인데[5] 대간을 재상에서 분리시킨 후에 태종은 의정부에 자문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육조를 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의 힘을 더 약화시켰다.

2.1.3. 공신, 외척 숙청 및 견제

처가와 공신을 대상으로 한 숙청이 여러 매체를 통해 잘 알려져 있어 무자비한 숙청의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실 태종이 죽인 신료의 숫자는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다. 총평하자면 신하의 권력이나 목숨을 빼앗는 작업에 있어서조차도 철저하고 정교한 계획 하에, 유려한 정치적 테크닉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정말 숙청을 해야할 만한 대상을 최소화하여 임했던 군주가 바로 태종이다. 태종의 이러한 정치적 능력에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던 군주는 사실상 온건한 숙청을 통해 피를 거의 흘리지 않은 조광윤 정도밖에 없다.

세계사에서 일반적인 숙청의 양상은 비유하자면 융단폭격에 가깝다. 일일이 한 놈씩 골라서 잡기엔 시간도 걸리고 귀찮으니 명분이나 구실이 잡히기만 하면 일가는 물론 친척까지 한꺼번에 싸그리 몰살시키는 것이 훨씬 편하고 빠르며, 공포심을 조장하기도 쉬웠기 때문. 근현대의 스탈린이 자행한 대숙청이나, 태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홍무제, 영락제의 십족절멸로 대표되는 1만명 단위의 숙청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반면 태종의 숙청은 수차례 심사숙고를 거치며 자신과 세자의 권력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핵심 권신 몇몇만을 철저히 물색한 뒤, 숙청의 정치적 명분을 얻기 위해 몇 년 단위로 판을 공들여 짜가면서 마지막 순간에 핵심 인물을 집중적으로 정밀 타격하는 정밀폭격 내지는 저격에 더 가까웠다. 게다가 융단폭격식 몰살에 가까운 숙청은 공포를 심어줄수는 있어도 사돈관계에 있던 권신가문과 척을 지게되는거라 후일 이들이 배신을 때릴수 있는 위협이 있었다는 점에서, 저격 숙청은 정치적 위험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6][7]

괜히 정치 고단수라 평가받는 게 아닌 셈. 또한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정치적인 계산을 통해 숙청 대상을 선정했고 살생부에 올릴 사람들도 굉장히 긴 시간동안 여론 형성 등의 준비를 한 후에 제거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세간의 오해처럼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겉보기 왕권을 강화시키는 군왕이 절대 아니었으며, 태종 본인이 워낙 똑똑한 군주였고[8] 그런 무자비한 숙청을 통한 왕권 강화 따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자신의 영향력과 군왕으로서의 권력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종이 가진 숙청의 군주 이미지는, 정적을 대량으로 쓸어버린 무자비함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탁월한 빌드업과 정확하기 그지없는 타이밍, 왕권에 방해가 된다면 상대가 누가 됐건 일절 가리지 않는 냉철함으로 날려버리는 그 철인과도 같은 철두철미함에서 생겼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태종은 공신들은 주로 죽이기보다 적당히 귀양을 보내놓고 잊어버리거나(…) 강등시키는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외척에 대해선 용서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싸그리 다 죽이고, 나중엔 후계자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도륙을 내버린다. 외척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9]

태종은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이라 할지라도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망설임 없이 숙청했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과 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개박살내버렸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의 1등 공신으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정권의 성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10] 초창기엔 좀 많이 감싸주긴 했지만 결국 이숙번은 마지막까지 복권이 안되었고, 태종도 아들 세종에게 이숙번만은 절대로 조정으로 다시 불러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종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을 보완하기 위해 도우미 역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완성되고 다시 유배지로 원상복귀시켰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1]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자는 하륜조영무 등 운 좋은 극소수의 인물 정도이다. 이중 조영무는 처신을 잘해서 숙청을 피한 것이었고 하륜의 경우엔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한 게 크다.[12] 또한 그밖에 다른 공신들도 나이 등을 이유로 품계는 높아보이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하는 등 요즘으로 따진다면 명예퇴직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13] 반대로 이렇게 실권 없는 명예직을 이용해서 정치적으로 애매한 양반들을 대우하는 모양새를 취하는 식으로 쏠쏠하게 써먹은 경우도 있다.

상술한 것처럼 태종이 많은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다 죽여버린 왕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14] 조선 왕조 동안 각종 사화, 반정 등을 통해 여러 신하들이 죽어나간 일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태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명나라 태조 홍무제나 영락제가 한 번 숙청할 때마다 수 만명의 공신과 그에 엮여있는 사람들이나 가족들을 싸그리 죽인 것에 비하면 태종의 처사는 대단히 온건(?)하다.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만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학살이나 피의 숙청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죽이기로 결정하면 바로, 그것도 실제 죄가 있건 없건 철저히 정치적인 판단으로 죽여버리는 모습 덕분에 킬방원 드립을 듣기는 하지만, 태종의 왕권강화책은 한 사람한테 다 덤터기 씌우고 죽이는 일벌백계를 통해 깝치면 죽는다는 인식을 형성하는 효과적인 방식이었고, 숙청으로 유명한 연산군, 세조는 아예 제쳐두고라도 명군으로 여겨지는 영조, 정조 시기에 죽은 자가 태종기보다 많다. 또한 태종의 아버지인 이성계는 왕씨 몰살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태조, 태종과 동시대를 살았던 명나라 황제들이 공신 숙청 혹은 정변 과정에서 수만명을 처형하는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던 것과 태종의 행적을 비교해 보자면 태종은 가히 휴머니스트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팩트는 태종은 제위에 1~3년 있었던 단명한 국왕들을 제외하면 역대 조선 국왕 중에서 사람을 적게 죽인 국왕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흔히 대량 살육이 일어나는 왕조 창건기 초기 시절의 국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종의 살생은 매우 이례적일 정도로 소소한 편이었다.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방원의 이미지가 강한게 하필 죽이고 숙청한 사람들 중에 이복형제, 매제, 처남들 그리고 사돈 같은 가족들이 끼었기 때문인 것도 크다. 남 때려잡는 거야 남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태종이 잡았던 사람들 중 가장 임팩트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가족들이었으니 "피도 눈물도 없이 가족조차 안 봐주는 권력 대마왕"으로 비춰질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는 것.[15][16][17]

조선의 통치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실상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진 훈구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 불러들였다가 사림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들으며 매 한 마리 마음대로 못 날리는것을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이는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다만 성종의 이런 모습은 권력게임에서 진게 아니라 성종 본인이 '좋은 군주는 대간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고 또 역대 임금 중에서도 손꼽힐만큼 관대한 임금이었기 때문이다.[18]

유가적 법치주의를 표방하며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이 정작 처가와 사돈 집안을 죽일 때에는 혐의 날조와 증거 조작을 통해 거의 죄를 멋대로 지어내서 명백히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 사법 살인을 했다는 점에서는, 수백 년의 시간차를 감안해도 마치 막장 독재국가의 보위부가 하는 인권 탄압과 다를게 무엇이 있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도 있다. 이들에게 확인된 죽을 죄가 없다는 건 실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할 정도이니 당시 대신, 사관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브레인인 하륜도 죽을 죄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자기가 날라갈 뻔했기도 하고.

하지만 이러한 조치에는 전근대 동아시아 군주정 체제의 가장 큰 허점이 바로 외척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죄가 없는데도 외척을 죽였다고 말이 많지만, 원래 외척은 죄가 있어도 제대로 처벌할 수가 없었다. 특히 외가는 죽을 죄가 아니라면 덮어지기 일쑤고 죽을 죄라도 죽일 수가 없어, 그대로 군주에게 통치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모후[19]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엎드려 비는걸 무시하면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에 어긋나기 때문에, 웬만한 횡포로는 건드릴 수가 없었다. 특히나 세종처럼 피를 보기 싫어하는 군주라면 더더욱 그리하였다.[20]

더구나 당시에는 태종도 건드릴 수 없는 초대형 외척이 있었으니 바로 청주 한씨였다. 이는 태종의 어머니이자 창업군주인 태조의 초대 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가문이기 때문이다.[21] 한확이 누나와 여동생을 명나라 황실에 공녀로 바쳐 명나라 황제의 외척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지어도 처벌을 할 수 없다고 대놓고 왕이 한 말까지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한확은 명나라 조정을 상대로 충실히 로비를 해서 공녀 폐지 등 공로라도 세웠고 패악질이 엄청나게 심하진 않았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말이다.

물론 외척 개개인이 심온처럼 선하고 유능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가솔들이 모두 그처럼 선하고 유능할 수는 없고, 외척 쯤 되면 그 집안 노비들까지도 기세가 등등해져서 횡포를 부리는 것이 흔했다. 태종은 그 외척의 본질적 폐단을 꿰뚫어보고 지속가능한 법치를 위해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을 때 과감하게 전성기의 처남들과 사돈을 죽인 것이다. 이는 사후에까지 남기는 "외척은 죽고싶지 않으면 철저히 숙이고 살아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조치로 조선은 다음 왕과 다다음 왕, 다다음왕까지 외척의 횡포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수양대군이 밥버러지 때문에....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훈구 권신을 무럭무럭 양성해 사실상의 왕비족을 만드는 바람에 모조리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도 태종의 바람과 달리 외척은 세조 대를 시작으로 조선 멸망 때까지 유력한 세력으로 잘 살아남았으며 숙청 당한 경우도 인현왕후처럼 운이 나쁘거나 혹은 구심점인 왕비나 대비가 죽어서 자연스레 힘을 잃은 경우 밖에 없었다.[22] 그런 점에서 소헌왕후 생전에 숙청당한 심온의 경우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또한 태종의 외척 숙청으로 인해 훗날 종친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수양대군을 견제하고 단종을 지켜줄 외척이 없어서 계유정난이 일어났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도 어느정도만 맞는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계유정난 자체는 분명 외척이 없는 것도 원인인건 맞았다. 그런데 외척이란것은 결국 왕비이면서 왕의 어머니나 할머니인 (대)왕대비를 핵심 구심점으로 하여 권력을 형성하고 얻는 세력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 왕비가 죽으면 외척도 거의 필연적으로 권력을 잃는다. 실제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친정도 엄연히 외척이면서 남동생인 권자신이 관직에도 있고, 따로 세종이나 문종의 숙청이나 견제가 아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덕왕후가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일찍 사망하면서 외척으로서의 권력을 일찍부터 상실했다. 실제로도 계유정난의 전후 국면에서 현덕왕후의 친정은 거의 힘을 쓸 수 없었으며 오히려 남동생인 권자신이 조카인 단종을 복위하려다 발각되자 부부인인 어머니와 함께 꼼짝없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은 현덕왕후의 이른 사망 하나로 인해 외척의 태생적인 권력 쟁취 구조가 발현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태종과는 거의 관계가 없는 일이며 실제로 계유정난은 이것이 원인이 된게 가장 컸다.

태종과 연관돼있다 볼 수 있는 소헌왕후도 거의 마찬가지인게 소헌왕후는 아들인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의 연이은 사망으로 충격을 받고 쇠약한것도 사망 원인이긴했지만 당시 시대 기준으로 사망 나이가 이미 노년에 속했다. 설사 세종이 심씨 가문의 복권을 일찍 해서 심씨 가문이 다시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소헌왕후가 세종보다 먼저 사망한 이상 외척으로서의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훗날 세도정치로 악명높은 안동 김씨도 본인들의 왕비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순원왕후가 승하하고 풍양 조씨 가문의 왕비인 신정왕후 조씨가 대왕대비가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이 꺾일 조짐이 보이다가 철종까지 자식 없이 사망하고 더 이상 권세를 누리지 못하였고,[23] 안동 김씨를 계승하여 고종 대 외척이 된 여흥 민씨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사망하면서 권세를 잃어야했지만 국왕인 고종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비호로 권세를 유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종은 외척의 중심으로서 왕비가 왕의 발목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지, 왕비 자체의 필요성까지 무시한 쪽은 아니었다. 왕비 자체의 필요성을 무시했다면 소헌왕후든 원경왕후든 폐위까지 하고 새로 왕비를 들이지 않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내명부의 수장이자 국왕의 아내로서의 왕비 지위가 중요하다는 것은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태종의 아들과 손자인 세종과 문종은 내명부와 왕비 자리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소헌왕후의 3년상 이후에도 본인들의 왕비를 들이지 않아서 내명부의 일원들이 통제에서 사실상 벗어나는데 일조를 크게 했으며, 결국 (내명부에 속한) 본인들의 후궁들과 그 자식들인 왕자들과 옹주들, 심지어 대군들까지도 상당수가 변절하여 세종과 문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서 정통성 최강자이자 적장손인 단종을 끌어내는데 적극적으로 협조 및 방관하는 나비효과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의 변절에는 내명부 수장의 자리가 공석이 된 것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24][25]

2.2. 전국 행정 정비

호구를 파악하여 고려의 구제(舊制)[26]처럼 3년마다 호적을 작성하게 하였다.[27] 또한 16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오늘날의 신분증이라 볼 수 있는 호패를 소지하게 하여 유민 방지와 인적 자원 확보를 도모하였다. 다만 그 집계치가 참으로 낮은데 15만 호 32만 구(태종 4년 4월 25일), 18만 호 37만 구(태종 6년 10월 30일) 정도여서 왕조 초기의 행정력 미비를 드러낸다 할 것이다. 그리고 서얼금고법을 두어 서얼 출신에게 문과 응시의 기회를 박탈하였는데 양반의 수적증가를 억제한 효과도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보기에는 신분차별이니 전근대 국가의 한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덧붙여 한반도가 8도로 구획된 때가 바로 태종 때다. 아울러 유향소를 통제하는 경재소도 설치했다.

2.3. 서얼 차별 완화

태종이 서얼금고법적서제도를 규정한 것 때문에 간혹 한국사회에서 서얼 차별은 조선시대 때부터 생겼다는 오해가 있는데 한국 사회의 서얼 차별은 조선시대 때 생긴 것이 아니라 조선 이전 시대부터 원래 있던 것이었다. 이런 오해가 생긴 이유는 과거에 조선 이전 시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었다. 태종이 규정한 서얼금고법과 적서제도는 조선 이전 부터 존재해서 조선시대에 이어진 서얼차별을 명시하기만 하는 법과 제도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태종은 조선 이전 시대보다 더 개방적인 신분사회를 정비하고 한품서용제라는 서얼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제도를 실시하여 서얼 차별을 완화하려고 하였다. 이후 조선은 태종 때를 시작으로 다음 왕들이 계속 서얼 차별을 혁파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서얼 차별을 완화시켜 나갔다.

2.4. 명과의 우호 관계

애초에 고려 시절 제2차 요동정벌에 참여하여 명을 침략할 뻔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태조 시기 3차 요동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전부터 태종 스스로가 왕이 되기 전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28] 홍무제, 영락제도 모두 알현한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랑은 서로 군주가 되기 전 보위 계승자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이같은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로 그 사이가 굉장히 원만했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29]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기간이 겹친 시기였던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사대주의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설왕설래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명의 여진족 직할통치 주장처럼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만한 요소들은 홍무제 대의 증거까지 들이대며 철저히 막았다. 명 주도 질서에 앞서 참여하고 영락제와의 개인적 친분도 작용했는지 조공무역을 1년에 3회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30]

3. 과오

3.1. 주먹구구식 제도 및 경제 정책

명군으로 신성화된 이미지와는 달리 별다른 창조적 혜안도 없었고 법제,[31][32] 의례,[33][34] 기록 관리[35] 등 여러가지 면에서 굉장히 미숙하거나[36] 특히 경제 분야에서 실책을 계속 드러냈다.

명나라화폐 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당시 조선은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다.[37][38]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이 화폐 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문제는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도 저화 유통을 강행했던 이 과정이 상식밖으로 보이는 것을 넘어 거의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조부터 징수되던 호포를 그것도 고작 18만 호[39]한테서 밖에는 못걷는 호포를 없애줄 것처럼 선심을 쓰는척 하더니[40] 결국 저화를 유통시키겠다고 한답시고 저화로 대신 징수하고 있었고[41] 저화유통이 좀처럼 되지 않자[42] 다시 포백세(布帛稅)라는 이름으로 포(布)라는 납부형태는 일치시키고 시장상인이라는 전가대상만 전환시켜서 호포를 사실상 부활시키려 했다.[43] 두달이 지나서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과세를 유예할 것처럼 하다가[44] 이후에 더이상 논의가 진척되지 않았는데 이같은 것들은 태종 대에 어수선한 정책결정 정책집행 상황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사례들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저화/실패 원인 문서를 참고하라.

양전 또한 처참하게 실패했는데 태종 대에 이전인 태조 대에 시작해서[45] 정종 대에 이루어진 양전(量田)에서 집계된 것으로 보이는 6도 92만 결[46]에서 태종 대에 이루어진 을유양전(乙酉量田)에서 집계된 6도 96만 결[47]로 고작 4만 결을 증가시키는 것에 불과했다.[48] 이전 양전(量田)에서 집계된 6도 92만 결 기준 4만 결 증가... 이전 양전(量田) 이전 기사양전(己巳量田)에서 집계된 6도 66만 결(간전(실전) 49만 결[49]+황원전 17만 결[50]) 기준 30만 결 증가... 말장난 하는 것이 어째 요즘 지자체장들 비스무리 해 뵌다... 그래 놓고는 다시 양전을 한다고 부산을 떨어 댔는데[51] 애초에 문제가 많은 고려의 삼등전품제[52]를 답습한 것도 그렇고[53] 전품을 높여서 결수 쪼개기[54]를 한 주제에[55] 세종 대에 전품을 낮추고도[56] 6도 119만 결[57]을 집계한 것에 비해서도[58] 23만 결을 날려먹는 등 집계 자체도 철저하지 못했으니까 집계된 땅에만 조세가 집중되어 조세의 형평도 그르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공물의 대납가를 고려해도 많이 잡아야 후대에 25% 정도로[59] 조세가 낮아진 것에 비하면 경기 과전민에게는 무슨 일본 다이묘들이 농노들을 벗겨먹는 것마냥[60] 평균 40% 씩[61][62] 조세를 때려 댔으니까[63] 조선 역사상 가장 백성들을 악귀같이 가혹하게 착취한 시기중 하나였다.[64] 태종이 본격적으로 착취를 자행한 것은 짧게는 잉여곡을 123만 석까지 비축한 태종 9년[65] 이후부터 잉여곡을 357만 석까지 비축한 태종 13년[66] 이전까지 5년 동안이고 길게는 300만 석 가까이 순수하게 착취해서 그러니까 최소 300만 석 가까이 착취해서 잉여곡을 5도에서만 415만 석으로 늘려서 비축해 놓은 태종 17년[67] 이전까지 9년 동안이다. 이는 인구가 3배는 늘어나고 환곡의 대출액이 1000만 석을 넘어가는 조선후기에 가서야 보통 유지되는 환곡의 비축액의 7할 이상에 해당하는 규모이다.[68] 문제는 세종 대와 달리 이 사이에 년단위 안에서 집행된 구휼목적의 재정지출이 10만 석대의 규모로는 태종 12년에 평안도에서 한 차례[69] 관찰되는 것을 제외하면 아예 관찰되지 않을 뿐더러 태종 16년[70]에 경기도에서 고작해야 10만 석에 못미치는 재정지출이 발생한 것이 매우 중대한 문제인 것처럼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많이 쌓아 놓아 봤자 4년이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적어도 100만 석대의 규모를 순식간에 탕진해서 버렸는데[71] 그 사이인 세종 초에 특히 세종 5년에 그동안 없었던 구휼기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지만 그 액수가 다들 1만 석대의 규모에 불과한 것은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는 곡식의 보관기간이 10년 미만임을 생각하면 뻔한 일인데 이쯤에 와서는 가령 과거 10년 전쯤에 그러니까 착취가 절정에 달한 태종 12년 이때 수확해 착취한 백만 석 가까운 곡식이 썩어나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그러니까 보관기간 안에 각종 구휼 명목으로 잉여곡을 방출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자연감모(自然減耗) 되었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각 관청별 사업내역 그리고 소요예산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걸신들린 악귀같이 일단 닥치는대로 허겁지겁 착취에만 혈안이었으니까 현물화폐로 유지되기에 자본축적이 어렵고 막대한 자연감모(自然減耗)가 발생하는 당시에 경제상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이 제정신을 가졌다면 세조,[72] 성종,[73] 연산[74] 후대들이 그랬듯이 딱 당시에 환곡의 대출액 만큼인 100만 석 미만의 규모만 유지하겠다는 상식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위해 적절한 세수규모를 조정하는 등의 행동이 있었어야 했으나 이쯤 설명했으면 눈치를 챘겠지만 그 정도 수준의 정상적 사고가 돌아간 것은 참으로 애석하게도 세종 말에 와서였다. 세종 대에 역시 재위 거의 내내 태종 대와 다를 것이 없이 이러한 미쳐돌아가는 행태가 지속되다가 재위 거의 끝무렵인 세종 28년에 와서야 요즘의 복지급여 부정수급[75] 사태에 해당하는 것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것을 계기로 의창의 환곡이라는 제도가 정상적으로 정비되고 그에 필요한 비축액이 242.2만 석으로 설정되어 운영되기 시작했다.[76] 물론 242.2만 석이라는 비축액 역시 당시에 경제상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세조 이후 민의 부담을 덜기 위한 과감한 감세 기조[77] 하에서는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한 액수의 규모였고 성종 대에 《경국대전》에서는 지방의 의창이 별창(別倉)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다 중앙의 군자감으로 통합되어서 사실상 의창이 법으로 폐지된다.[78] 그 와중에 공신전을 일만 결대[79][80] 뿌린 자기 손자 이상으로 자기는 공신전을 수만 결대[81] 뿌려댔으니까 경제 정책을 평가하자면 빈말로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4. 복합적인 평

4.1. 대간 기능에 대한 지원과 핍박

태종은 조선시대 대간 활동에 대해 실로 복합적인 면모를 보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책에서는 태종의 업적 중 하나로 대간의 언관 기능을 활성화했다는 점을 꼽는다. 그리고 이러한 평의 근거로 태종 1년(1401)에 사간원이 독립 기구가 되어 비로소 사헌부과 사간원 양사 시스템이 정립되었다는 점을 든다. 실제로 태조실록에서 언관의 활동은 총 123회(사헌부 46회, 문하부낭사 54회, 대간 4회, 대간·형조 19회)인 반면, 태종실록에 나오는 대간의 활동은 총 875회에 이르기 때문에 태종이 즉위 초에 대간의 활동을 지원하여 언론 기능을 활성화한 것은 분명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82]

그러나 교과서의 일반적인 서술과는 달리 실제로는 언간 활동에 대한 지원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고, 전반적으로 태종은 즉위 내내 오히려 철저히 대간의 언론을 통제하고 극렬하게 갈등했다. (남지대, 「태종 초 태종과 대간 언론의 갈등」, 『역사문화연구』제47호, 2013.) (이윤복, 「고려 말 조선 초기 왕권의 문제와 태종의 대간 언론 인식」, 『한국언론정보학보』통권 제99호, 2020.)

오히려 태종은 즉위 내내 대간 언론을 자신이 직접 제어하려 하였고, 언론의 시시비비를 오직 자신만이 분별하고자 했다. 대표적으로 즉위 직후인 1401년 1월의 상소 건에 대하여 태종은 응패(鷹牌, 매를 놓아 사냥할 수 있는 자격증)를 준 응인의 종을 단지 죄를 지었다고 가둔 것은 태종 자신을 능멸한 사안으로 보았고, 간관 활동을 한 대간들은 법적 조치고 뭐고 없이 모조리 왕명으로 외직에 쫓겨났다. 마찬가지로 당년 7월 사간원에서 궁궐 짓기를 중지하라고 청한 건에 대해서는 간관을 순군에 내렸다가 큰 소동을 벌인 뒤에 용서하였는데, 언론에 대한 판단 자체가 순전히 태종의 마음에 달린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1404년 10월에는 아예 대간의 풍문탄핵을 금지하였는데, 이는 소재를 제한하여 언론을 통제하려는 조처였다.

1402년 1월에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대간을 하옥하여 귀양보내는데 이때 태종은 諫官을 말실수로 벌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국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우회적 방법으로 간관들을 파직했다. 일반적으로 태종의 미담으로 얘기되는 '낙마 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기록하지 말 것을 주문했지만 사관들은 빠짐없이 기록했다는 내용인데, 반대로 보자면 결국 실록에 어떠한 검열도 하지 않았던 후대의 다른 왕들과는 달리 태종은 자신의 위신에 조금에라도 먹칠이 되는 기록은 철저히 검열하려 했던 것이다. 역시나 태종의 미담으로 자주 소개되는 사관 민인생과의 일화 또한 비록 민인생이 많이 나댄 부분도 있긴 하지만 결국은 태종이 언관에게 귀양이라는 중징계로 엄히 처벌했다.

태종의 이러한 언론에 대한 다소 모순적인 태도의 근본 이유는 태종이 대간 활동을 지원한 것이 (현 교과서의 평마냥) 순수하게 언론 기능을 활성화해 신권의 확대를 경계하고 고도의 정치 권력 견제 시스템을 짜겠다는 큰 뜻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즉위 초기 자신의 왕권에 방해되는 신권과 외척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적 용도로서 지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태종은 겉으로는 권신과 외척을 견제한다며 대간의 언론 활동을 지원하였지만, 속으로는 동시에 정작 태종 자신이 대간에 의해 왕권까지 쉽게 불안정해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위 후 얼마 되지도 않아(1404년) 간관도 죄가 있으면 죽여도 된다고까지 표현하며 왕권의 우위를 내세웠으며 특히 재위 후기에는 태종 자신의 후계 문제와 관련되면서 전위 소동까지 일으키며 대간들을 추풍낙엽처럼 손봤다. 때문에 실제로는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일반적인 언론 활동은 오히려 세도정치기 수준으로 매우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딱 한 마디로 축약하자면 언론을 키우긴 했는데 무조건 나한테 유리한 방향으로만 언론플레이하는데 썼고 이후 철저히 탄압했다.

4.2. 숭유억불

전대 왕인 태조와 정종은 억불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조선 왕조 500년의 숭유억불 사상을 처음 이끌어낸 인물은 태종이다. 이러한 태종의 숭유억불 정책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모두 혼재하므로 상세한 내용은 숭유억불 항목을 참조.

태종이 취한 주요 숭유억불 행위는 아래와 같다. (출처: 조남욱, 「조선 태종의 탈불교의식과 그 한계」, 『동양철학연구』제63호, 2010.)

  • 즉위 당일 수창궁에서 반포한 즉위교서에서 天道⋅仁敬의 유교적 도덕정치 구현을 천명하고 당일 경연에서 유학자 권근을 높이 평가하며 그 반면으로 불교 교리를 비판하는 논증을 취했다.
  • 즉위식 직후 그동안 왕궁에 보관해 왔던 역대 왕들의 원불인 仁王佛을 거부하며 내원당으로 이첩시켰다. 그리고 그 날 전국의 부처 숭앙의 일을 없애도록 하는 논의를 예조에 지시했다.
부처의 일은 내가 감히 알지 못하지만, 증험이 없다는 것은 심히 명백하니 어떠한 도움이 있겠으랴. 돌아보건대 우리 태상왕과 상왕께서 모두 높여 믿으시니, 비록 모두 다 혁파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없앨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참작하여 아뢰도록 하라.[83]
  • 40일 후 전국의 절에서 거행하는 도량(道場)·법석(法席)·국복(國卜)·기은(祈恩)·연종 환원(年終還願) 등의 행사를 금지시켰다. 국무당(國巫堂)과 감악(紺嶽)·덕적(德積) 등지에 무녀(巫女)와 사약(司鑰)을 보내어 때 아닌 때에 제사하는 것도 모두 금지시키도록 했다. 다만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한 유교 제사만큼은 절에서도 지낼 수 있게 했다.
  • 태종 2년(1402)에 왕의 명으로 승려들을 천민으로 취급하게 했고 특별지정한 70사(寺)를 제외한 전국 모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모조리 압수했다. 1405년 11월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주군, 개성, 한성부에 사원 하나씩, 그리고 각 군현에 1사(寺)씩을 남겨두고 나머지 모든 사찰들을 모조리 불태우게 했다. 이 작업으로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져오던 한국의 사찰 수천여곳이 불타 사라지고 전국의 사찰은 오직 242곳만이 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 태종 3년(1403)에는 고려삼은 중 한명인 목은 이색을 비판하며 유학자들이 앞으로 불교를 믿는 것을 금지토록 하였다.
이색(李穡)은 동방의 큰 유학자지만 대장경 보기를 좋아하여 선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늘날 불사(佛事)를 하지 않는 자는 오직 하륜(河崙) 뿐이다. 그 나머지 유자들은 몰래 불사를 행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불씨의 보응설(報應說)은 모두 어두운 기운으로 명백히 증험되지 못하니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84]
  • 태종 4년(1404)에는 여성의 사찰 왕래를 전국적으로 엄금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부녀들은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불씨(佛氏)의 도(道)는 세속을 떠나는 것을 종지로 삼는 반면, 부녀의 바름은 정숙해야하며 자수(自守)하는 것으로 主를 삼습니다. (중략) 근래 법령이 없어지고 해이해져 길에서 여성의 절 오름이 끊이지 않아 절개를 잃으니 심히 좋은 법전이 되지 못합니다. 원컨대 유사로 하여금 부모 추모의 법회는 물론 부녀가 절에 오르는 것을 모두 금단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소서.[85]
  • 1406년에 또다시 대규모 사찰 혁파를 단행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절마저 불태워 무너뜨렸고 이에 석성민(釋省敏) 등 수백 명의 승려들이 신문고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이들 집단을 파하게 했다. 1417년에는 조선 팔도에서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오던 수많은 불경들과 무속 관련 서적들을 보이는 대로 모조리 강제 압수하여 눈앞에서 소각하게 했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관련 책이나 유물을 불사르게 했다.
讖緯⋅術數의 말은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 심하다.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이었으므로 이미 서운관에 명하여 괴이하고 허탄하여 바르지 못한 책을 골라서 불에 태우게 하였다. 이제부터 서울이나 지방에 그러한 책을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내년 정월까지 자수하여 제출하도록 하고 역시 불살라 없애게 하라. 혹 정한 기한까지 제출하지 않는 자에게는 사람들이 고발하도록 하여 ‘조요서(造妖書)의 율(律)’에 의하여 처벌하고, 범인의 가산은 고발한 자의 상으로 충당하게 하라[86]
  • 태종 17년(1417)에는 승려들이 처신에 정결함을 보이지 않으니 승려들을 완전 도태시켜야 한다는 유학자의 의견에 대해 내가 이제 도첩제를 시행하니 이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겠노라는 의미의 발언을 하였다.
평양부원군 김승주(金承霔)가 임금께 아뢰기를 ‘‘불교는 청심과욕(淸心寡欲)으로 종지를 삼는데, 지금 승도들은 백성들의 살림집 속에 살면서 부녀들과 섞이고 음주 육식하면서 또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서 그 무리를 늘리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다 베어서 그 흐름을 끊어버리려 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웃으며 ‘내가 이미 예조에 명하여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하게 하고, 도첩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백성이 되게 하였으니, 이제 그 흐름이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87]
  • 자식인 세종이 원경왕후의 능에 어머니가 원했던 불사를 지을려고 하자 완강히 반대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내가 주상의 '어머니의 빈 골짜기가 쓸쓸하다는 말’을 들으니 심히 옳게 여긴다. 그러나 산릉은 내가 백세 뒤에 갈 땅이다. 지금 비록 깨끗한 중을 불러 모은다 한들, 반드시 더럽혀질 수 밖에 없으며, 그러한 무리가 내 곁에 있게 되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내가 건원릉과 제릉에 절을 세운 것은 그저 태조의 뜻을 이룬 것이다. 그리하여 근일에 또 종을 만들어 개경사에 달았으나 역시 내 마음에는 맞지 않는다. 이제 산릉은 내 마땅히 법을 세워 후사(後嗣)에 보일 것이다. 만세 후에 자손들이 따르는 여부는 그들에 달렸다. 유정현의 말이 심히 간절하니, 절을 세우지 말라.[88]
  • 그 외에도 당시까지 11개였던 종단을 7종으로 축소했으며, 왕사와 국사 제도를 폐지했다. 또한 도첩제를 강화해 출가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각종 부역에 승려를 무상으로 강제동원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절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경우에는 지원을 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왕비가 아플 때 그녀의 바램대로 불교 의식을 치루게 했고, 이 의식이 효험이 없으면 다 죽여버리겠다라고 협박했지만 실제 효험이 있자 상을 주었다.
본궁에서 약사정근을 베풀었다. 중궁의 병이 위독해서였다. 또 본궁에 經師 21인을 모으고 경회루에 승려 1백인을 모아 불경을 읽고 기도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언사에 이르기를 ‘나는 본래 불교가 허탄한 것임을 알고 있지만, 부인이 이를 믿는 까닭에 이러한 기도가 있는 것이다.’라 하고, 또 그 승려들에게는 ‘지금 이 위급한 때에 神效가 있음을 보게 되면 내 마땅히 높여 믿겠지만, 만약에 보응이 없다면 너희들을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말했다. 임금은 세자에게 향피우게 명하고, 친히 임하여 연비 의식을 올리니 세자와 여러 왕자도 모두 연비하였다. 중들 가운데에 이마를 불사르고 손가락을 태우는 자도 있으므로 보시를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중궁의 병이 조금 나으니, 임금이 기뻐하며 회암사에 밭 1백결과 쌀⋅콩 2백석을 주었다[89]

4.3. 공신전 문제

태종이 몇몇 공신들을 잔혹하게 숙청한 케이스가 눈에 띄게 이슈가 되고 특히 세조 때문에 묻혀서 그렇지 사실 이때도 제1차 왕자의 난제2차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해 생겨낸 수많은 공신들에게 지급된 공신전(功臣田)이 다양한 문제를 일으켰다. (출처: 역사의 화두 ‘공신 척결’ 조선을 망친 것은 공신들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태조 7년(1398)에 정사공신이 책정되며 조준 등이 각각 1,000호의 식읍과 300호의 식실봉(食實封), 220결에 이르는 토지, 그리고 30구의 노비와 7인의 관노비, 10인의 파령(把領) 등을 지급받았다. 이렇게 받은 토지는 과전과 달리 세습이 가능한 것이었다.

태종 2년 사간원에서 "경기도 내의 전결 14만 9000여 결 가운데 과전이 8만 4000여결, 공신전이 과전의 반에 가까운 3만 1000여결에 이른다"면서 "공신전도 1/10세를 받을 것"을 건의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태종 대에도 공신들은 막대한 면세, 세습의 특혜를 누리며 토지를 장악했다.

또한 태종은 2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제에게 과거 없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음서(蔭敍)제도를 운영했는데, 음서제와 공신전은 공신들로 하여금 자자손손 지배층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근간이 됐다. 이들은 음서와 공신전을 통해 특권과 경제적 이득을 독점했다. 제2차 왕자의 난 후에는 좌명공신이 책정되었는데 이들에게도 막대한 공신전이 지급됐다.

이렇다보니 공신들의 위세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인터넷에서는 태종의 숙청이 워낙 유명해서 다들 설설 기었을 거라 착각하는데 사실 이렇게 숙청된 공신들은 어디까지나 왕권에 집착하던 태종의 눈 밖에 난 놈들이었고, 그 외 다른 일반 공신들에 대해서는 태종도 그저 비호만을 일삼았다. 예를 들어 태종대의 공신 장사정(張思靖)은 전 판서 남궁서(南宮恕)의 아내를 붙잡아 귀를 자르고 때려 죽였으며, 그 이웃 마을 남녀 5, 6명을 매질해 임신한 여자를 죽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국법으로는 당연히 사형이었으나 태종은 그를 잠깐 함주로 유배보내는데 그쳤고, 오히려 이후 141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임명하여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오게하고 어의(御衣) 등을 하사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줬다. 태종 2년 10월에는 공신의 아들인 박실(朴實)이 부사직 윤하(尹夏)의 첩을 도둑질했는데 이에 윤하가 박실의 집을 찾아가 첩을 되찾아가자 이징이 윤하의 집으로 쳐들어가 그 아내의 머리채를 끌고 나와 매질해 죽였다. 남의 첩을 빼앗으려다 실패하자 그의 정실부인을 때려 죽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므로 역시 국법으론 사형이었으나 이 역시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태종은 아주 잠깐 귀양보냈다 돌아오게 하는 걸로 끝냈다.

비판의 '주먹구구식 제도 및 경제 정책'에서도 상기했듯, 그렇게 공신 관련해서 욕을 얻어먹는 세조가 10,600결의 공신전을 발행한 걸로 현대에 개같이 까이고 있는데, 태종이 발행한 공신전 결수는 사간원에서 말했듯 경기도에만 30,100결(전국 합산은 45,100결)로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세조의 3배 가량의 공신전을 남발했다.[90] 그나마 직전법으로 세습은 없앤 세조와 달리 태종의 공신전은 짤없이 세습 면세토지였다. 애초에 세조가 직전법을, 성종이 관수관급제를 시행한 이유부터가 그동안 전대에서 발행한 세습 면세토지가 너무 많아서 후손들이 더이상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세습 면세토지가 늘어날 수록 나라 경제는 개판이 될 수 밖에 없다.

정사공신과 좌명공신에 대한 포훈이 완료된 1402년(태종 2년) 사간원에서는 공식적으로 '경기도 전체 과전인 8만 4000여결 중 공신전은 3만 1000여결'인 걸로 확인했다. 즉, 국가의 중심부인 수도 일대의 과전 중 거의 절반 가량이 공신들의 세습 면제토지가 되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태종 당대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겼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간단한 문제다. 태종 대는 개국한지 10~20년 밖에 안되어 아직은 넘겨줄 땅이 넉넉했던 대다 귀족에게 수조권이 세습되는 이러한 면제 토지들은 당장 큰 문제를 일으킨다기 보다는 오랜 세월동안 곪아가며 나라의 재정을 천천히 갉아먹는 존재다. 즉 세습이 가장 큰 문제인데, 역시나 태종과 같이 공신전을 발행했던 세조가[91] 현대에 욕을 얻어먹는 이유도 이러한 공신전 제도가 현대로 굳이 치환하자면 국민연금제처럼 미래세대의 부로 현재를 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태종대 공신들이 본격적으로 자식들에게 토지를 넘겨주기 시작한 세종 재위 후기인 1440년대부터 조선 조정에서 심각하게 공음전(功蔭田)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하는데, 이렇듯 제도의 모든 폐해와 부작용은 깔끔하게 후대로 넘기고 혜택만 쏙 취했으니 태종 당대는 너무나 평온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세조(조선)/생애 항목의 서술처럼 조선의 공신전 체제는 세조의 잘못된 행실과 정통성 파괴로 인해 망했을 뿐, 태종 대에는 문제가 크게 없었다는 주장도 있으므로 복합적인 평으로 두었다.

5. 기타

5.1. 타인과 비교

5.1.1. 정도전 관련

정도전은 이상주의자로서 도덕성과 경제 능력이 합쳐진 완벽한 '유학자 관료'가 정치 권력의 TOP이 되어야 '민본부국'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도전은 왕의 권력을 재상을 임명하는 것으로 축소시키고 기타 모든 권력을 재상에 집중하여 일종의 전문경영인 같은 정치 체계를 갖추어야한다고 보았다. 이것이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중심주의'다.[92]
5.1.1.1. 옹호
신권(臣權) 중심 정치 질서를 세우려던 정도전을 죽이고 전제군주제를 세워 조선의 정치 선진화를 늦췄다는 비판은 무리하다는 의견이 있다. 군사부일체 즉 임금과 신하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와 같다는 유교식 서열론에 비추어볼 때 유교에 역행한다는 주장이다.

권력이 재상에게 집중된다는 것은 재상이 군주의 권력을 대신한다는 의미인데, 능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사람이 재상이 되어 큰 권한을 갖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그러한 사람을 자유롭게 재상으로 임명하고 또 그 재상을 감독할 관리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서민원을 통해 재상을 선출하므로 이는 재상선출을 사간원을 통해 해결하면 된다는 반론도 있지만, 후에 붕당정치 국면에서 각 붕당들이 아예 이 삼사를 장악해 권력을 쥐었다는 점을 보면 그다지 실효성은 없다. 애초에 말 그대로 평민들을 직접적으로 정치에 참여시킨 영국 사례를 조선에 갖다 대는 것은 무리다.

역사적으로도 군약신강(신권이 강한 것)의 시기가 있었으나, 전부 국가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왕권을 약화시키고 나라를 잘 지켜냈지만 그가 죽자 고구려는 1세대도 더 버티지 못하고 찢어져 멸망했다. 백제도 왕권이 약해 지방 호족들에게 병사를 요청하지 못하고 신라[93]나 일본에게 병사를 요청할 정도였으며 그러다가 망했다. 고려도 왕권이 약한 무신정권 시기는 나라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조선 시기에는 청나라 강희제가 17세기에 "조선은 군약신강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라고 평했으며 19세기의 세도정치도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져 나라의 폐단이 심해진 것이다. 강한 왕권을 지닌 왕이 임명한 재상이 아니라면 정도전의 재상총재제는 말 그대로 오너십 따위는 없는 신하가 제 잇속만 차리기 아주 좋은 제도다.

5.2. 세조와의 비교

행적은 비슷해보이지만 세세하게 들춰보면 세조 따위와는 비교할수 없다.

본인보다 정치적인 상관이었던 혈육의 목숨을 빼앗은 점,[94] 왕권 강화 목적으로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태종은 손자 세조와 자주 비교되고는 한다.

하지만 그 내막과 실상, 결과는 완전히 다르다.

태종이 제거한 이방석의 경우 태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가 첫째 부인의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모양새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책봉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더군다나 건국 과정에서의 공과로 따져봐도 형들보다 나을 부분이 전혀 없었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구설수에 오르는데[95] 그런데 한 나라의 왕조는 오죽할까? 하물며 유교적 가치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게다가 당시는 건국 초기라 정통성 면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합당할 시기였다.[96]
단,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단순한 두 번째 부인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당시까지도 살아있던 국모였다. 또한 당시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의 서열적 구분이 곤란하였다. 고려는 일부일처제로서 한 명의 부인만을 두게 되어 있었고 첩은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하지만 고려 말 지방 출신 귀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일이 잦자 지방귀족이 지방에서 한 번 혼인을 하고(향처) 개경 귀족의 여인과 다시 혼인(경처)을 하는 일이 잦았다. 즉,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이라고 해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둘째 부인, 즉 경처가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의 여인이었기에 경처가 첩으로 취급되는 일은 없었다. 이로서 경처와 향처 소생의 자녀 모두 적자로 인정받게 된다.[97]

또한 이방번이 세자가 되지 못한 점은 혼인 관계 탓도 있었다. 이방번은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만약 이방번이 세자가 되면 이성계는 왕씨 가문과 사돈을 맺은 격이 되기 때문에 신료들이 반대를 했다. 즉, 이방석은 이성계가 유별나게 아껴서 세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왕후의 아들 중 가장 결격 사유가 적으면서도 나이로도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의안대군(이방석) 문서 참조.

하지만 이 역시 아무리 좋게 봐줘도 이방석이 '적자'에 포함되는 정도의 변호만 될 뿐이지 이방석의 후계자 지명이 정당했다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정치적 배려라는 부분을 생각해도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 등 한씨 소생의 자식들은 음서나 과거로 관직에 올라 정계에서 이성계를 음으로 양으로 보좌했고, 당대의 명문가들에 장가를 들어 이성계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해 줬는데 오로지 곡산 강씨 가문만 이성계의 정치 커리어에 도움을 준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결국 이 문제는 그저 국왕의 친모라는 자리에 눈이 멀어 수많은 리스크를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고 생떼같은 자식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넣은 신덕왕후와 처가에 대한 부채의식 및 정도전 등 친위세력에 대한 믿음에만 사로잡힌 채 왕위 승계의 엄혹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이성계의 오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실제로 당대의 반응 자체가 그러했다. 오죽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덕왕후의 이종조카들이 대놓고 이방원을 지지했겠는가?[98]

여기에 패륜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물론 태종이나 세조나 둘다 형제들을 죽인 건 사실이지만 태종은 최대한 동복형제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세조는 자신의 친동생들인 안평대군 그리고 금성대군까지 죽였다는 것이 문제. 물론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핑계가 있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자면 태종은 자신을 도모하려고 했던 회안대군을 살려준 적도 있으니 변명의 거리도 못된다. 게다가 서모이긴 하지만 세조는 혜빈 양씨를 사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99]

왕이 된 다음의 행보에서도 차이가 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은 태종이 반대파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태종은 기본적으로 가진 능력과[100] 힘, 공적(새 왕조의 시작에 공을 세웠다.)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왕권강화를 추구했다. 공신들도 너무 크기 전에 적당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였으며, 결국에는 외척들과 공신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세종이 다스릴 기반을 확고히 마련했다.[101]

하지만 세조는 그 자신이 조직의 보스이기보다는 대표였을 뿐이었다. 당장 계유정난을 통해 집권한 후 사방이 적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 자신을 따르는 공신들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당장 옆에 단종을 복위시킨답시고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밖에서는 이징옥의 난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시애의 난은 중앙집권화로 인한 권력 상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토호의 난이지만, 이징옥의 난은 아예 자신을 대금 황제라고 칭하며 독립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했다.[102]

태종이 간관과 사관의 행동에 크게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굳이 크게 손을 안 대어도 왕권이 단단했기 때문이다. 반면 세조는 반대파들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뜯어먹거나 세조 자신이 했던 것처럼 아예 폐위를 시키지 못하도록 억제와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경연을 폐지한 것도 그 중 하나.[103] 사실 경연을 좋아한 왕은 얼마 안 된다. 웬만한 호학의 군주가 아니고서야 경연은 짜증만 나는 자리이기 때문. 조선 역대 왕들 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태조는 경연을 조금 느슨하게 하려고 했다가 역관광을 당했고, 연산군은 좀 하다가 경연 폐지, 광해군은 연산군보다 더 안 했고[104] 현종은 건강 핑계로 경연을 자주 하지 않았다.[105][106] 중종, 효종, 영조, 그리고 세조의 경우 경연은 폐지하고 세자의 교육인 서연만 지속하며 성균관 유생과 무신들에게 끊임없이 배울 것을 권했다. 참고로 정조도 경연을 폐지하긴 했지만 이쪽은 경연을 안 한 다른 왕들과 이유가 좀 다른데, 신하들 실력이 자기를 가르칠 수준이 못 되어서 '차라리 내가 너희를 가르치겠다'면서 경연을 폐지하고 초계문신제를 만들어 직접 인재를 기르기로 한 것.

다시 말해 태종은 이미 반대파들을 쓸어낼 대로 쓸어내버린 다음이라 거기서 더 쓸어낼 필요도 없고 어지간히 공격받아도 그걸 빌미로 자신을 끌어내릴 반란 분자도 없었기에 굳이 쓸어낼 필요도 없어서 (간관은 물론 사관들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간섭을 받고, 본인도 간관과 사관을 혐오하는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들을 인정하고 대신들로부터 보호해 준 것이다.[107]

몇가지 더 비교할점은 태종은 증손자인 단종의 앞길을 막는 행보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단종 이전의 왕들인 세종과 문종의 앞길을 열어주었고 세조는 반대로 증손자인 연산군과 중종의 앞길을 직간접적으로 막은꼴이고 태종과 세조의 증손자는 반란으로 폐위되었으나 태종의 증손자 단종은 동정여론이라도 있었지 세조의 증손자 연산군은 동정여론이 없었다는 차이점도 있고 태종은 조선의 황금기를 열었다면 세조는 1차 혼란기에 중심에 있었던 왕으로도 볼수 있다.

5.2.1. 계유정난의 부족한 명분

단종은 조선 역대 왕들을 통틀어서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군주였고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은 조선 시대의 성공한 정변들 중 명분의 정당성이 가장 빈약한 정변이었다. 그만큼 사육신생육신, 조의제문 그리고 후대의 김종서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평가에서 볼 수 있듯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아예 이징옥의 난을 시작으로 단종복위운동같이 세조의 찬탈에 반기를 시도가 계속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년에는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참고로 세조 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사림의 거두 김종직조의제문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들에게도 세조의 정변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 속에서 지지기반이 빈약한 세조는 공신 집단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이들과 자신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신 집단의 우두머리격인 한명회를 쳐내고 공신들을 태종처럼 모조리 대량숙청한다? 아무리 세조가 술자리에서 터프한 모습을 보이며 공신들을 쥐락펴락 하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건 술자리에서나 끝나는 일이고, 구체적인 상황까지 온다면 당장 세조의 권좌부터 불안해진다. 따라서 세조 치세 때 선을 넘을 정도로 함부로 행동하던 홍윤성양정처럼 대놓고 왕좌를 건드리는 선만 넘지 않으면 넘어가주는 게 공신 집단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유리한 것이다. 솔직히 세조의 성격을 보면 홍윤성을 마음에 들어한 게 더 큰 이유 같긴 하지만... 실제로 세조가 한명회와 신숙주에게 구체적인 압박을 가한 것은 이시애의 난 진행 과정에서 새로운공신 집단을 양성하려 할 때였다. 사실 기록에서 그들과의 계속된 인생관계를 본다면 세조는 딱히 한명회나 홍윤성을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견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나 싶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빈약한 지지 기반 탓에 더 더욱 공신들에게만 의지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자 세조의 권위는 당연히 태종과 비교가 부끄러울 만큼 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공신들의 권력남용을 견제하기는커녕 달래야만 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중 가장 문제가 심각한것이 세조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한 것인데, 이 공신전은 법제상으로는 몇 대 지나고 나면 회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회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5.2.2. 공신 견제 실패

세조의 공신들은 조선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간 동안 권력을 독점했고[108], 견제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처럼 그 부패권력남용이 매우 심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한명회 같이 비리를 저지른 부패 관료나 홍윤성 같은 조선의 희대 사이코패스 인간백정[109][110]을 전혀 처벌하지 않았다.[111] 덕분에 세조 11년(1465년)에는 관찰사 김진지가 좌의정(구치관) 이외의 모든 당상관(3품 이상)들에게 싸그리 뇌물을 돌리고 받았다가 걸리는 초대형 비리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때도 세조는 죄질이 비교적 가벼운 증뢰자인 김진지만 처벌하고 죄질이 매우 나쁘고 1순위 처벌 대상인 수뢰자들은 처벌하지 않는 등 공신을 관리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홍윤성 같은 경우 세조 시절 평안도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서 다 횡령하는 미친 짓을 벌였는데도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는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던 이숙번을 단지 거만하다는 이유로 숙청해버리고[112], 기타 다른 공신들과 외척들까지 모조리 숙청해버린 할아버지 태종과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으로서 결과적으로 세조의 이런 공신 관리는 자신의 공신들을 권신 집단으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물론 시간이 지난 뒤에는 세조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던지 남이구성군 같은 신(新) 공신들로 한명회신숙주, 권람 같은 구(舊)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실패하였고, 그 탓에 입지가 더더욱 강화된 구(舊) 공신들이 권신들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 본인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일이 너무 커져버리고 말았다

5.2.3. 원상 문제

대표적으로 성종 즉위 이후부터 시작된 원상제는 조선시대 국왕이 정상적인 국정 수행이 어려울 때 재상들로 구성된 임시로 국정을 의논하던 관직으로서 국왕이 병이 났거나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 · 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 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부터 1476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왕권을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113] 원상(院相)

5.2.4. 신권 견제 관련

결과적으로 세조와 공신들의 대결은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에도 상당 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공신들의 완승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조의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굉장히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이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남긴 권신 집단들이 자신의 증손자대까지에도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어찌 되었든 세조의 이런 취약한 공신 관리는 핵심 공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외척 세력들과 공신 세력들의 힘을 최대한 억눌러서 모조리 토사구팽시키고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으로서 태종과 세조의 반정에 대한 평가가 서로 엇갈리는 가장 큰 이유들 중 하나가 되게 된다.

5.2.5. 조선군 문제

한편 조선군은 초기부터 문제가 있었다. 태종 15년(1415)에 조정에서 정군에 지급하는 봉족의 수를 경작 면적과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지급하도록 하였는데 봉족은 정군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있었다보니 아예 정군이 봉족에게 자기가 할 일까지 떠넘기는 행태까지 벌어지게 된다. 오죽하면 태종이 1407년에 “정군이 자기가 배를 타지 않고, 능력을 불문하고 봉족을 시켜 대신하게 하니, 적(賊)을 만나면 모두 배 밑바닥에 엎드려서 손도 쓰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군역 운영상의 문제점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정군의 수가 차츰 줄어드는 것이 보이자 세종 23년(1441)에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의 구분 없이 건강한 자를 택하여 정군으로 삼고, 솔정(率丁)의 수에 따라 봉족을 주도록 하여 전력누수를 막으려 했으나 결국 그것이 안 되어서 세조 10년(1464)에 조선초기부터 실시한 봉족제(奉足制)를 보법(保法)으로 바꾸어 시행하면서 종래의 봉족을 보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세조 시절에는 조선의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평안도의 군사력과 창기병들이 쇠퇴하게 되었는데, 일단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전략은 '기병을 동원한 전투'와 이를 보조하는 '화약 병기'였다. 고로 조선 전기의 기본적인 전략은 2가지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창기병이 6, 궁기병이 4에 달할 정도로 창기병의 비중이 더 높았는데, 세조 이후부터 궁기병 위주로 개악이 이루어지게 된다. 태종 때 길주도 찰리사 조연의 북방 원정, 세종 때 파저강 토벌, 또 세종 때 파저강 토벌만 있는 게 아니라 수천 규모로 여진족이 평안도를 자주 침범하는데, 그때마다 조선은 전사자 교환비 1:10 정도를 낼 정도로 여진족의 침입을 잘 격퇴하고 심지어 압록강을 넘어서까지 심심하면 후두려패고 다녔다. 세종 때 올량합이 2,700 기병으로 평안도에 침범할 때도 격퇴하고 곧바로 창기병으로 추격해서 섬멸했을 정도.[114] 당시 조선이 명나라의 정치 변동(정난의 변)이나 여진족의 침입과 맞물려 평안도에 지속적인 군비 확장을 투자하는데, 세종 때에는 60~70만 석의 군량미를 꾸준히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평안도 조선군이 세종 재위 3년에는 기병 2만과 보병 4만, 수군 1만을 포함해서 무려 7만에 달했을 정도였다.[115] 사실상 조선군 전력들은 현대의 대한민국처럼 북쪽 최전방에 상당수가 배치되어 있던 셈이었다. 그리고 함경도 6진에도 조선군 정예 기병이 주둔해 있었는데, 사실 함경도는 땅이 척박하고 기병들을 유지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라서 함경도 기병은 세종 기준으로 9천에서 1만 명 수준에 불과했다. 뭐 어쨌든 평안도와 함경도에 기병 3만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사실 대부분은 창기병으로서 이렇게 태종 때부터 양성된 창기병이 세종 때에도 계속 조련되는데, 태종 때 장창과 중창 연간 생산력이 2만 개에 달할 정도였다. 참고로 태종 때 연간 환도 생산량은 약 9천 개.

하지만 세조 때 평안도로 보내던 군수품을 감축하고, 평안도의 군사력을 2 ~ 3만 수준으로 엄청 감축해버린다. 이때 세조가 핑계를 댄 원인은 "중국 사신 때문에 평안도의 신민이 힘들어한다."는 거였지만, 이거는 사실 세종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이든 간에 어쨌든 군사력은 감축됐는데 문제는 세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기병 전력들의 대부분을 궁기병화시켰고[116], 이후 여진족과의 전투에 있어서 더는 예전과 같은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힘들게 되었다. 결국 세조 이후 이러한 관행들 때문에 조선군이 원래 창기병(충격력) + 백병전(팽배수) + 화약(화기) 위주 부대에서 자꾸 궁수 위주로만 가니깐 조선군의 전력이 굉장히 약화되었다는 비판이 나오게 되었다. 다만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무려 30만이나 되었던데다가 정예는 10만에 용맹한 군사는 3만[117]이라고 양성지가 말하는 기록이 있어서 세조 시절은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 때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선대 왕인 태종 ~ 문종 때 역시 조선의 국력이 가장 강할 때였으며 태종 ~ 문종 때 역시 군사가 30만 이상이었는데다가 또한 세조 때 조선의 국력이 강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 왕들의 군사적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118] 거기다가 양성지가 말했던 저 기록이 사실은 세조의 궁기병 위주의 국방 정책을 비판하기위해 세조를 돌려 까는 것이라는 반론이 있는데다가 세조는 군제를 엄청나게 개악했다. 물론 본격적으로 조선군이 내리막길을 걷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상당수는 연산군의 폭정, 중종의 실정으로 인한 관리, 조세, 군사 제도의 문란이 제공했지만 그렇다고 세조를 지나치게 미화하는 행위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119] 세조 역시도 지금 군적에 올라온 병력은 무려 40만이 넘는데 그 중 쓸만한 병사는 채 10만도 되지 않는다며 본인 스스로도 답답해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세조는 조선군의 약화에도 큰 기여를 하였는데, 가장 최악의 사례로 그동안 비축해 온 화약들을 대량으로 폐기 처분한 사례가 있다. 태종 때 6천 근(약 4000kg)에 달하던 화약 무기 재료인 염초가, 세종과 문종 두 시대를 거치면서 무려 10만 근까지 양성되는데... 세조의 공신들이 염초 2만 근을 마음대로 처분해서 사적으로 이득을 취했고, 세조가 3만 근 정도를 바다에다 그냥 버려서 폐기처분해버렸다. 이렇게 그동안 비축해온 염초를 대량으로 폐기한 이유는 반란군들이 사용할까봐 우려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형 문종이 화차를 개발하는 등의 조선 전기까지의 무기 체계 발전을 약화시킨 것도 바로 세조다.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시켜 창검술의 운용이 거의 잊혀지게 되며 백병전 능력 떨어뜨려 버린 셈이다. 또한 세조 때 조선군의 근접전을 담당하던 팽배수들을 모두 천역화시켜버린 이후 조선군의 백병전 능력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어 임진왜란 시기가 되면 근접전투 기술 자체가 거의 실전되어버리고 명군이 주력이 되어야 했다. 거기다가 세조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급을 날려버리는 실책도 저질렀다. 조선 초기부터 존재하던 갑사가 부사관과 비슷한 군 계급이었는데, 세조가 오위 도총부를 만들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사실상 없게 되었다. 말단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할 부사관이 없으니 전투 시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되는 건 당연하다. 이는 성종대에 조선군의 약체화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만들었다.

특히 군사적인 부분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보법이다. 이전에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런데 세조 때 보법이 시행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다가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 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졌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조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정예병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라져 갔다. 팽배수중기병의 비율이 낮아진 것은 조선중기의 군사력이 약해진 이유였는데,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고려 공양왕 시기 과전법을 실시하여 이전까지 개인에게 분급되었던 수조권을 모두 국가에서 회수하여 관료들에게 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수조권을 분급하여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 주었다. 다만 이러한 조치는 수조권에 한한 것으로 본래부터 개인이 소유한 토지는 재분배 대상이 아니었으며 대상도 전국단위에서 경기로만 한정하였다.

5.2.6. 토지 개혁

토지를 개혁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 경제 체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토지 중심의 경제 체제였고 미래에서 오지 않는 이상 강압적인 힘으로라도 본위나 곡물본위제도를 채택한다거나 세조가 밀어붙인 전폐(...) 같은 걸로 화폐 경제를 돌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므로 힘있고 권력있는 자들은 과전법으로 받은 토지를 국가에게 돌려주지 않고 수신전, 휼양전 같은 예외적으로 일부 토지를 한시적으로 가질 수 있는 제도를 이용, 편법으로 상속을 하였고 이로인해 토지겸병이 점점 심해지게 되었다. 1/10 과세 원칙을 정하여 1결당 최대 2석(石)까지만 수취하도록 했던 것도 지키지 않고, 수조권만 주었는데 아예 토지를 소유해 버리는 건 덤.

문제는 그저 토지 문제로만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태종 시기부터 관료들의 수를 늘리다보니 관료들에게 땅을 지급해 줘야 할 토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여기다 세조가 공신전을 남발함에 따라 이 급격하게 늘어난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점점 그 대상이 큰 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기존 체제로는 정규군의 병력 수요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까닭은 기본적으로 세조 이전의 조선의 군사체계는 양인개병제가 아니라 엄연히 말하면 전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왕실과 국가소속의 세병제에 가깝다. 일부에서는 수나라당나라의 부병제라고 하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부병제는 개병제와 모병제의 절충안으로 전국의 가호에게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거나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대신 평등하게 병력을 차출하는 제도다. 괜히 방효태사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지역 사람들 다 죽였는데 내가 어딜 가냐고 한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수나라] 나라를 이렇게 전국단위로 고구려 원정에 갈아넣다 국가를 망가뜨렸고 뒤이은 당나라 역시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대차게 갈아먹고 토번과의 전쟁에서 고전했으며 고구려와는 전혀 상관없는 당의 서북지역에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와야 했을 정도로 기미체제가 붕괴하고 말았다. 당나라가 요동성 전투나 주필산 전투 등지에서 드러나듯이 자기 역사를 왜곡해서 넣은 덕분에 제대로 알긴 힘들지만 1차 전쟁에서 요동성과 백암성에서의 야전이 있었고, 2차 전쟁 당시엔 김인문 열전에도 "고구려 인들의 저항이 매서웠고 오히려 당군이 보급에 문제가 생겨 위기에 빠졌다."라고 나와있다. 더군다나 662년 시점에서는 누방 도행군 지휘자인 정명진과 부장 양사선, 패강 도행군의 지휘자인 임아상의 사망이 확인된다. 당나라 35군을 편제한 6개 도행군 가운데 2개가 사령관을 잃고 1개는 무력해지며 2개는 전선을 이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사수로 나아가 방효태의 당나라군과 대회전을 펼쳐 전멸시켰다. 일부사람들이 고구려는 야전에서 수와 당의 군대를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반박이 가능하다. 이에 비해 세병제는 죽어도 흔히 고려에서 말하던 군반씨족 위주로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라 전면적인 부병제보다 손실시 발생하는 타격은 적지만 병호로 걸린 사람들은 평생 + 대를 잇는 군복무로 엄청나게 부담을 주는 제도였다.

어쨌든 지정된 군호에서 병사들을 차출해 병력 수요를 채웠는데 군호로 지정된 사람들이 장비와 보수 마련 자금의 재원인 곡식을 재배할 만한 땅을 관료들에게 지급하면서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이러면 자금을 대어줄 봉족들도 같이 사라져버리는 건 덤. 이 문제는 세종 말기와 문종 시기를 지나며 심화되었다. 병력 충원의 큰 축인 양반사족들은 힘들기만 하고 얻어지는 것은 없고 손해만 줄창나는 군역을 하느니 문관으로 진출하는 것이 몸도 덜 상하고 정신건강에도 좋고 주머니 사정에도 이롭기 때문에 세종 말기 쯤에 이르러선 옛저녁에 군기피 현상으로 대다수가 발을 뺀 지 오래였다.
5.2.6.1. 결과
이렇게 되면 왕권은 떨어지고 신하들의 세력이 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세병제의 장점은 팽배수와 중기병 같은 훈련만으로는 기르기 힘든 병종들을 비교적 수월하게 수급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이러면 병력 수급이 점점 힘들어진다. 물론 근접전을 수행할 장검류들을 든 도수가 있지만 이들은 기존 오위체계 내에서도 팽배수를 지원하도록 되어있지 이들이 도펠죌트너처럼 일선에서 싸우는 역할이 아니었다. 창병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근접전 무기가 아니라 조준하고 찌르고 활이나 쇠뇌를 휘두르듯이 휘둘러 근접한 적에 저항하는 비소모성 원거리 무기에 가까워서 이들에게 근접전을 맡길 수도 없었다.
5.2.6.1.1. 창병 육성
창병들의 육성도 쉬운 게 아닌 게 굳이 창병 문서로 갈 필요도 없이 세조 사후 조선 중기인 1625년에 경기도 속오군에 화포수(火砲手) 3000명, 장창수(長槍手) 1000명, 대검수(大劍手) 1000명씩을 조직하기 위해 무기를 조달하려고 했지만 10년 뒤인 1635년에도 창대로 쓸 목재 조달이 되질 않았다. 조총(조선군에서는 조총병이 화포까지 맡은 듯 하다고)들이나 장검들은 어떻게 조달이 되었는지 별 큰 언급이 안되었지만 창은 전혀 그렇지 못했는데, 대놓고 구굉이 장창 1000개를 만들려고 하는데 자루가 없어서 자루로 쓸 만한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 경기도참나무는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어서 가시나무나 종가시나무를 대신 써야 하는데, 그럴만한 나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식물의 특성상, 같은 품종이라 해도 자라는 환경에 영향을 받아서 좋은 목재가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더 문제. 창을 제대로 만들 경우 창대로 쓸 재료의 문제(아무 나무나 쓸 수 없다)와 제작 난이도 문제(가운데에 심에 쓸 목재와 주변부에 결합할 부품 등)로 인해 후대에 등장할 총보다도 비쌌다. 조선기준 조총가격이 3.5석일 때 창대가격만 2석이었다.

그리고 창병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이, 공격력을 가진 질량 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절대 진형을 흐트리면 안 되었다. 즉 피할 수 있는 화살이나 투창, 도끼, 단검들을 맞고 죽을지언정 절대 진형을 흩뜨려서는 안되었다. 타 병종과 달리 창병은 진형을 흩뜨리는 순간 그 존재가치가 거의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 기예로 잔뜩 창술을 익힐 수 있겠지만 전장터에서 창이 요구하는 포지션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고 개인 기예로 익혀봤자 어지간해서는 다른 무기들에게 취약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도 칼이 없으면 봉을 들고 봉이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라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부상 주요 원인, 보병이 기병에 상대 할 때의 팁.

실제로 선조도 피난 중 명군에게서 장창을 받아보고 장창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장창으로 만들 목재 재료가 부족하다(구득할 방법이 없다)는 보고를 받고 대나무의 대를 이용한 창을 쓰라할 정도였고, 인조도 조선에서는 창이 요긴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일이 매우 형편없으니 각별히 정밀하게 만들어 정벌하는 데 쓰는 것으로 삼으라는 말을 할 정도.
이전 정권을 규탄하며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세조도 이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현직 관료에게만 수조지를 분급하도록 하고, 사망한 관리의 아내나 자녀에게 수조지를 상속하던 규정을 폐지하는 직전법을 실시했지만 국가가 지는 부담이 가중되는 속도만 늦춰졌을 뿐이다. 토지 수조권 분급의 원칙에 근거하였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손을 더 대었다가는 가뜩이나 전조 말기부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느라 권력을 빼앗긴 각지의 토호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중앙관료들까지 합세하면 이징옥의 난[120]이나 이시애의 난 같은 것이 어디서 얼마나 다시 발생할지도 몰랐으며, 당장 단종 복위 운동이랍시고 사육신과 생육신이 벌어지는 판에 계유정난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세조 본인의 약한 지지기반 탓에 더 손을 대고 싶어도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5.2.6.1.2. 병력 수요 증가
그리고 그 스스로도 4군 6진같은 새로 영토를 확장한 지역에 전가 사변같은 북방 사민 정책을 시행하고 원주민들의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그 지역의 토호를 토관으로 임명했으므로 이들에게 중앙정부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병력의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진북정, 정해서정 같은 원정을 자주 하다보니 병력의 수요는 점점 늘어났다. 결국 보법을 실행해 이전시기 군호지정 같은 것이 아닌 양인개병제로 바꾸어서 3명 단위로 묶어 1명은 정군, 나머지 2명은 보인으로 돌아가면서 군 복무를 하도록 해 정규군의 수를 13만 5천 정도로 불렸다. 인사고과에서 활을 중요시하기 시작한 것도 덤. 이렇게 하면 숙련도는 개나 주는 꼴이 되어버리지만 당시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소수의 숙련된 무사집단이 아니라 성능은 낮지만 원할 때 원할 만큼 움직여줄 대규모의 전쟁기계들이었다. 그래서 숙련도가 중요한 팽배수와 중기병들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즉 제3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고대 로마나 3세기부터의 로마처럼 재원은 부족해지고 반란 등으로 병력수요는 이전시기보다 더 늘어났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돌려막기를 추구한 것이 세조의 정책이다.

결국엔 성종 대에 이르러선 대간이 화차가 낡았다고 버리자고 해서 버리거나, 병선들이 썩고 있다는 윤필상의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다. 특히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자 정군들이 보인이 지어야 할 부역까지 지게 되면서 군사들은 보인에게 받은 비용으로 사람을 사서 대역시키는 방식이 점차 퍼지게 된다. 더군다나 성종 이후 뒤를 이었던 연산군의 폭정과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의 정치 혼란으로 조선의 관리, 조세, 군사 제도가 문란에 빠지면서 이로 인해 양인이 감소하여 군인층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팽배수들이 각종 역사에 동원되면서 점차 양인들 사이에서 기피되고 천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신량역천으로 변질되어 팽배수들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결국 1541년 중종 36년에 군적수포제가 시행되어 군역 부담자에게 번상가를 포로 일괄 징수해서 그 비용으로 군인을 고용하게 된다. 이후 양인 장정들은 대부분은 1년에 군포를 2번 내는 납포군으로 변환된다. 국가간의 전면전 없이 지속된 오랜 평화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전까지 조선군 중 전력을 유지하던 부대는 중앙군으로는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를 포함한 금군 수백 명과 오위 중 중위에 해당하는 의흥위(義興衛)에 속하는 갑사 수천 명, 지방군으로는 1만 남짓한 하삼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121]과 평안 함경 지역의 북방군 수천 명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세조도 6조 직계제 말고도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다. 식읍을 폐지했다는 것과 향, 소, 부곡민 문제를 다 마무리 지었다는 점,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과전법을[122] 직전법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는 업적이 있다. 그리고 간경도감을 설치해 불경을 간행했으며, 원각사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만들어 수험생들을 열받게 하는 업적을 세웠다. 그리고 원상제라고, 재상들이 승정원에 항상 출근해 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게 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를 실시하기도 했고, 상평창을 부활시켰으며, 팔방통보라는 전폐(화살촉 화폐)를 유통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세조는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마무리 지어서 이시애의 난이라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들어 조선은 전국에 수령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 정치의 근간을 이룰 율령인 경국대전의 편찬을 개시했다. 그리고 규장각이라는 왕을 위한 싱크탱크겸 재교육 기관을 만들기도 했다. 이 규장각의 경우 사림이 얼마나 싫어했는지 세조가 죽자마자 폐지되었으며, 먼 훗날 정조가 다시 만들기 전까지 재건되지 않았다. 그리고 총통위가 사라졌지만 일부에서 말하듯이 화약무기를 억압하는 것이 아닌 각 부대가 알아서 사용하게 하였다.

5.2.7. 총론

세조 시절 집현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집현전의 기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세조의 국정 운영에 핵심이 된 공신들은 세종이나 문종 시절처럼 집현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아닌 계유정난 과정에서 공을 세운 공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집현전이 세종 시절만큼의 위상을 가지거나 집현전 출신 테크노크라트들이 조정의 핵심 인재들로 활약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종대왕과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임금들로서 시스템을 만드는데 크게 집중을 하였지만, 세조는 그런 시스템의 통치를 굉장히 싫어하였고, 결과적으로 그가 본인의 공신들과 함께 마음대로 통치하는 구조를 만들어버림에 따라 세종과 문종 시절 확립된 시스템들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행보들이 결과적으로 후대의 왕권 약화에도 크게 기여함에 따라 세조 본인의 할아버지인 태종이 남겨준 왕권강화의 유산들 또한 세조 이후부터는 대부분 사라지게 되었다.

즉, 태종과 세조를 비교한다면 세조 그 나름대로는 태종처럼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그 자신의 근본적인 한계로 못한 것이다. 왕이 공신을 배척하기 힘들다는 그 근본적 한계가 만들어진 것이 시대적, 외부적 요소라면 옹호의 여지라도 있겠으나, 오히려 없던 문제를 세조 본인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실드 받을 여지조차 없다. 결국 세조는 개인의 능력이나 국가의 백년대계를 바라보는 안목 등에서 여러모로 태종과는 반대되는 경우였던 셈이고, 태종이 강한 왕권을 남겨준 것과는 달리 역으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후대의 평가 또한 세조는 할아버지인 태종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평가를 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태종은 긍정적인 평가도 있을수 있는 결과가 되었다.


[1] 전주 이씨의 사병은 단순한 병력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족장들이 자제들을 보내 편성된 정예병이자 충성의 상징이었다. 태종이 이를 혁파한 것은 단순히 반란에 대한 예방을 떠나 선친들이 동북면을 다스리면서 유목민족에게 얻어낸 영향력마저 포기했단 것이다.[2]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 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했다. 이는 정도전이 3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에 되어서야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30, 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 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정도전에 가려졌지만 같은 동료였던 조준이 정치력이나 실무능력면에서는 정도전보다 더욱 뛰어났다. 게다가 외골수였던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관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3] 참고로 사병혁파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이후 여생을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4] 태조 때, 세자빈이 쫓겨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유가 둘이 정을 통해서란 소문이 있었다. 이에 대간에서 제대로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태조에게 간하자 태조는 대노하여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것이냐?"라고 하면서 공신을 제외한 대간 전체를 죄다 유배 보냈다. 이러니 대간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5] 태조 시대에는 제대로 된 제도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다. 국초의 도평의사사는 고려의 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정부 구조는 개국공신들의 사적 지배 중심의 느슨한 체제였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이 체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이 추진했던 개혁은 이 사적 지배를 혁파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제 국가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태조가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던 것은 그저 측근이라서가 아니라, 이 개혁이 결국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 드라이브에서 소외되었던 다른 공신들과 혁파 대상이었던 사병 소유자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두희 '조선 전기 중앙통치체제의 성립', 1994) 정도전 개혁을 신권주의니, 재상중심주의 등의 용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도전의 개혁안은 오히려 국왕권 강화와 더 연관이 크다. 태종은 집권을 위해서 구 보수파 및 사병혁파에 반발한 무장들과 손잡았긴 했지만, 근본적인 지향은 정도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6] 다른 국가 예시이지만 봉건주의 성향이 강했던 일본 도요토미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막 태어난 히데요리가 뒤를 이을수 있도록 위험분자로 전락한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했고 이 과정에서 히데츠구는 물론 히데츠구의 첩까지 처형했다. 그러면서 정작 히데츠구의 정실은 처형하지 않는 등 기준 자체가 이상했던 건 덤. 특히 이 첩들 중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는 명목상 첩이고 아직 어린 소녀라서 합방도 하지 않았는데도 억지로 처형하고 그 아비인 모가미 요시아키까지 근신 처분을 내리는 바람에 도요토미 가문에 잔뜩 원한을 가지게 되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편에 서게 되었다.[7] 또, 홍무제의 경우 하도 권신들을 많이 숙청하는 바람에 손자 건문제를 후원할 만한 노련한 신하가 부족해져서 넷째 아들 주체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쉽게 막지 못하였고 결국 주체는 영락제가 되었다.[8] 어린 나이에 과거 급제, 관직 생활 경험을 통한 정치 역학 학습, 조선 개국에 나름 공을 세우면서 쌓은 경험으로 인한 냉철하고 신속한 판단 및 실행력 등 조선 역사상 학문적, 정치적 소양이 태종의 경지에 다다른 임금은 몇 되지 않는다. 애초에 여말선초 격동기에서 개국에 공을 세우고 혁명동지들의 목숨을 수차례 구하고, 나라의 창업자이자 자신의 아버지를 상대로 쿠데타를 벌여 승리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9] 게다가 정릉이 아주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10] 단순히 권세 높다고 잘라버린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이숙번의 거만함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어서 상왕이었던 태종의 형 정종을 욕보이는 일까지 저질렀다. 이는 곧 왕실에 대한 도전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11] 정확히는 유배를 풀어주고 경기도에서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물론 유배를 그대로 보내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이숙번이 아프다는 이유로 계속 감싸주었다. 근데 실제로 아파서 2년만에 병사했다[12] 이방원과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난다. 당시 기준으로 치면 부모와 자식뻘 수준으로 차이가 나는 셈. 70세에 졸하했으니 태종 6년부터 16년까지는 60~70세였다는 이야기다. 당시엔 환갑만 되도 엄청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제 갈 지 모르는 노인이라서 굳이 숙청의 칼을 들이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하륜은 탐욕스럽긴 했어도 뒷주머니만 열심히 찼지 이숙번처럼 왕실에 도전하는 일 같은건 하지 않았다는 점도 있다.[13] 대표적으로 태종 때 공신이었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명예직을 받고 물러나 사실상 권력에서 이탈했다.[14] 다만 이런 이미지가 씌인 점은 조선을 세우는 과정은 물론 왕이 되기 위해 그토록 따르는 스승 정몽주와 아버지를 따르는 숙부 정도전을 둘 다 죽인 것도 모자라 1차 왕자의 난에서 동생을 죽이고 2차 왕자의 난에서 형을 내쫓고 조사의의 난에서 아버지와도 전쟁을 벌인데다 처갓집인 여흥 민씨까지 모조리 도륙한 이미지까지 겹친 것으로 보인다. 용상의 자리가 그만큼 권력 쟁탈이 심한 자리임은 분명하나 동복형제 이방간과 아버지 이성계는 죽이진 않았지만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가차없이 쳐내는 모습 때문에 이런 이미지가 더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최근에는 사극으로 많이 등장한데다 이 과정들을 본인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세종 치세가 태평성대일 수 있었다는 점이 재평가되어 폭군의 이미지보다는 나라와 자식을 위해 본인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불사하는 철혈 군주의 느낌으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1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척들로 인해 왕권이 약해지고 나라가 휘청거리는 경우가 많으며 조선 후기에도 세도정치로 망조가 들었던 걸 생각하면 후대에서 태종의 처사는 잔인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평가가 많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태종의 처사와 노력을 상당수 물거품으로 만든건 둘째 손자인 세조이다. 계유정난에 적극 협력한 가문이 바로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를 위시한 파평 윤씨이고 계유정난 자체가 명분이 워낙 없다보니 세조는 정희왕후에 대한 애정을 차치하고서라도 파평 윤씨 가문을 내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혜왕후 사후 성종의 계비는 정희왕후 주도 아래 폐비 윤씨, 정현왕후로 모두 파평 윤씨 가문의 차지가 되었으며 연산군 폐위 및 단경왕후 폐위 이후로는 정현왕후 및 반정 공신 주도아래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계비가 되었다. 결국 문정왕후가 외척세력의 수장이 되어 윤원형 등이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전횡함으로써 태종의 우려는 매우 빨리 나타났다.[17] 사실 태종의 외척 숙청이 좋게만 평가받지 못하는건 죄없는 사람을 단지 전성기의 권력자라는 이유로 사실상 사법살인으로 죽인것도 크지만 근본적으로는 숙청한지 겨우 3대만에 외척이 아닌 둘째 손자에 의해 자신의 적증손이 허망하고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 후손이 단절된 것은 물론 외척 세력이 더 활기차게 부활한것도 있다. 당장 계유정난 하나의 선례로 인해 세조의 직계후손들조차 왕비 자리가 비면 어떻게든 왕비자리를 채워서 훗날의 왕대비를 만드는 한편, 왕족들을 견제하기위해 찬탈의 염려가 없는 외척들을 끌어들이게 된것이기 때문이다.[18] 물론 언제나 관대한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강간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즉,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건 성종 본인의 취향인 게 더 컸고, 취향 문제를 떠나서 어차피 훈구는 견제할 필요가 충분히 있었다. 성종이 기본적으로 명군으로 분류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19] 여기서 모후는 법적 모후인 대비를 뜻한다. 친모가 후궁이거나 혹은 정실부인이라도 혜경궁 홍씨처럼 대비가 아닌 경우는 사전적인 의미의 외척도 아니고 실제로 법적인 어머니도 아니기에 횡포를 부리는 즉시 처벌이 가능했다. 물론 그 친모가 법적 모후인 명성왕후 같은 경우일땐 당연 죽을 죄라도 죽일 수 없다는게 사실이었다.[20] 물론 후대에 숙종이 처가까지는 어느정도 갈아버리긴 했지만 숙종조차 왕비부터 때려잡고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던거고 거기에 기사환국이라는 대대적인 붕당학살이 동반되어, 차라리 태종이 벌였던 일은 양반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심지어 이것도 적증모할머니이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 조씨까지 사망하여 왕실 최고 웃어른인 대비들이 모두 부재한 뒤를 노린데다 정작 왕비 인현왕후 자체는 문제가 없던 왕비인지라 폐위에 있어서 억지를 부려야했고, 이는 숙종의 큰 오점으로 역사에 남아버렸다. 게다가 정작 숙종 대에 외척으로써 죄를 지으며 전횡한건 정비 인경왕후의 가문인 광산 김씨, 첫번째 계비 인현왕후의 가문인 여흥 민씨도 아니고, 모후이자 왕대비인 명성왕후 김씨를 필두로 한 청풍 김씨 가문이었는데 당연 명성왕후 생전에는 절대 건드릴 수 없었고 명성왕후 사후에는 김석주처럼 사직 등의 방식으로 아예 스스로 물러나며 와해를 자청한 식이라서 진짜배기로 외척을 숙청했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적증조모인 장렬왕후의 가문인 양주 조씨조사석이 우의정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렬왕후가 사망하면서 권위를 금방 상실하였는데 정작 장렬왕후 생전에는 외척도 남자 종친도 아닌 숙안공주를 비롯한 숙종의 고모인 공주들의 가문에도 밀리기도 했다. 오히려 인현왕후는 심온과 소헌왕후와는 다른 의미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쪽이고, 실제로도 최소한의 권위도 마음껏 못 누린채 1701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1] 창업군주는 한 나라의 왕조를 시작하는 군주인만큼 사후에도 그 권위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초대 군주와 초대 왕비가 바로 태종의 부모님이다. 그것도 혈연까지 섞인. 유교 국가가 아니더라도 창업 군주인 부모님의 가문을 숙청하는건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인데 유교를 공식 대표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 아무리 외척이고 어머니가 이미 사망했다곤 하나 초대 왕비이자 어머니의 가문을 숙청한다는건 태종 입장에서도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22] 이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심의겸으로 심온의 6대손으로 역시 같은 6대손인 누나 인순왕후가 사망하면서 바로 외척으로써의 힘을 상실하여 붕당정치를 촉발시키게 되었다. 심의겸이 인순왕후가 지병으로 사망하기 얼마전 김효원이 이조전랑직에 오르는걸 반대했는데 김효원은 이조전랑직에 결국 올랐고 이후 인순왕후가 사망하고 직후 후임 이조전랑으로 동생인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오르는걸 김효원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무산이 되며 갈등이 촉발된 것이기 때문이다.[23] 이것도 사실 철인왕후가 살아있고, 일찍부터 권력의 기반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마저도 철종이 자식을 아예 못 낳고 사망하며, 대왕대비인 조씨가 왕실최고어른의 자격으로 고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수렴청정을 하면서 자식이 없는 왕대비에 불과한 철인왕후의 후광만으로 외척의 지위를 유지하는게 불가능해졌기에 흥선대원군과 타협해야했다.[24] 내명부도 내명부지만 원래 왕비의 역할 중 하나가 후궁과 그 자식들을 통제하여 적장자-적장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는 것도 있다. 이 역할은 생각보다 비중이 높으면서 중요한데 이 역할을 할 내명부의 자리가 소헌왕후의 사망인 1446년을 기점으로 하여 계유정난이 일어나며 단종이 정순왕후 송씨를 억지로 맞아들이는 1454년까지 무려 7년이나 비었다. 아무리 권한 대행이 있고 연이은 초상이 일어난 것을 감안해도 8년 동안이나 후궁과 그 자식인 왕족들이 왕비의 통제에서 벗어나있는 것은 큰 문제이며 이 8년이라는 시간이면 왕위에 일찍이 욕심이 있었을 수양대군이 은밀히 사전에 본인의 편으로 후궁들과 왕족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반대로 말해 문종이 최소한 왕비가 있었던 채로 승하했다면 세조는 결코 왕위에 도전할 마음을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세조가 날고 기어도 대비의 명분을 뛰어넘기란 불가능했을 테니 말이다.[25] 다만 하필이면 신덕왕후 강씨 때문에 당시에는 계비의 이미지 자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실제로 훗날에도 문정왕후같은 악독한 계모가 나왔으니... 물론 문정왕후 역시도 원론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으로 인해 등장하게 된 인물인만큼 결과론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이 일어난 1453년 정국에서만큼은 대비의 부재가 뼈아팠던건 사실이다.[26] 공양왕 2년, 1390년 7월 (음)[27] 태종 7년 11월 2일[28]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29] 훗날의 영락제.[30] 명나라 입장에서는 명목상 황제의 신하인 제후가 바치는 조공 품목을 천자로서 단순히 받아먹을 수만은 없었고,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하사품을 내려야 했다.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로도 조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할 리가 없었다.[31]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5.≪경국대전≫의 편찬과 계승 > 1)≪경국대전≫이전의 법전편찬[32] 경제육전에서 경국대전으로 (호전戶典 주요조문 중심으로)[33] 단종 즉위년 9월 13일. 허후의 아버지 허조가 태종 대에 만든 의주(儀注)를 써먹을 수 없어서 세종 대에 갈아엎었다는 것이다.[34] <조선 초기 禮制 연구와 <國朝五禮儀>의 편찬>, 46-48, 59-60, 66, 68, 75[35] 왕대별 해제 제1대 태조실록[36] 일례로 흔히 업적이라 불리는 신문고 설치 같은 경우는 표면적인 이유는 민원 해결이었지만 사실은 쿠데타 방지가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사실 업적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이면적이든 표면적이든 목적대로라면 치기도 어려운 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니까 말이다. 전시행정의 훌륭한 사례일 것이다.[37] 이는 당시 조선의 경제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교통로가 황폐화돼서 고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본래 고려에는 만주 그리고 류큐일본까지 이어주는 국제 교통로가 활성화 되어 있었으나 흑사병으로 중심 국가인 원나라가 망해버리고 교통로가 비활성화됨과 동시에 홍건적왜구한반도 전체를 털어버리면서 안 그래도 안 써서 묻혀가던 교통로가 완전히 파괴된다. 때문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시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민간 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금난전권 폐지이다.[38] 사실 이전 왕조인 고려 왕조 시절에도 고려는 화폐를 도입시키려 했으나 민중들이 화폐를 거부했고 바로 쓸 수 있는 물건을 중시했다. 이에 고려 왕가에서는 타협안으로 은병이라는 재화를 만들어 유통시켰고 이 은병은 이 들어갔기에 어느정도 화폐 취급을 해줬다.[39] 태종 4년 4월 25일, 태종 6년 10월 30일[40] 태종 10년 11월 21일[41] 세종 3년 8월 30일[42]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Ⅱ. 상업 > 3. 화폐의 유통[43] 태종 15년 4월 9일[44] 태종 15년 6월 10일[45] 태조 7년 7월 26일[46] 태종 2년 2월 5일, 태종 4년 4월 25일[47] 태종 6년 5월 3일[48]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49] 공양왕 1년, 1389년 12월 (음)[50] 공양왕 3년, 1391년 5월 (음)[51] 태종 6년 9월 8일[52]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53] 이는 세종도 마찬가지였으나 공법(貢法) 제정으로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다.[54] 육품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가령 4등전 1결의 면적이 1등전 2결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니까 4등전으로 잡으면 적당할 땅인 4등전 1결을 그 동일한 땅을 1등전 2결로 만드는 식이다.[55] 태종 7년 6월 28일 1, 태종 7년 6월 28일 2, 태종 7년 10월 2일[56]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57]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58] 전품을 낮추면 당연히 결수는 줄어든다. 전품을 낮추고도 결수를 더 많이 집계했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은결(隱結)을 파악해 냈다는 것이다.[59] 효종 즉위년 11월 5일, 효종 8년 7월 11일, 현종 14년 11월 16일, 현종개수 14년 11월 16일.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물가가 법 실시 이전에 비해 대략 1/4~1/8 정도로 줄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효종 대에 현종 대에 공물의 대납가가 대략 1결당 100두 미만이라면 가처분 소득은 대략 태종 대에 1결당 180두 이상 효종 대에 현종 대에 1결당 300두 이상 각각 이렇게 산출된다.[60]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1. 토지제도 > 3) 전세제도의 개편[61] 태종 15년 8월 10일[62]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4. 조세[63] <조선 태종대 미곡 확보 정책과 戶給屯田制의 시행>, 32-34[64] 백성을 착취해 태종이 거둔 살인적인 세금수준[65] 태종 9년 1월 18일[66] 태종 13년 8월 6일[67] 태종 17년 7월 20일[68] (일반) 환곡관련 예전에 좀 정리해보려 한적이 있습니다[69] 태종 11년 7월 19일, 태종 12년 4월 11일[70] 태종 16년 4월 8일[71] 세종 3년 1월 16일, 세종 5년 9월 16일[72] 성종 15년 1월 4일[73] 성종 12년 8월 26일[74] 연산 8년 1월 24일[75] 세종 28년 2월 29일. 충청도가 참으로 가관인데 저소득층도 아닌 2만 5천호 그러니까 대략 12만 5천명이 40만명분의 전국민 평균 1년 소득에 해당하는 금액을 타간 것이다. 물론 발단은 역시 태종 대에 그랬던 것처럼 1년에 백만 석 가까운 곡식의 가혹한 착취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채로 곡식의 보관기간인 10년 동안 년수가 쌓이며 곡식이 쌓이다 보니까 865만 석이라는 경악스러운 액수의 규모로 잉여곡이 비축된 것에 기인했다. 부전자전이라고 역시 참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방만했다고 비판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76] 세종 30년 4월 22일[77]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Ⅳ. 국가재정 > 2. 중앙재정,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78]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1. 가족제도 > 2) 진휼기구[79] 성종 15년 5월 13일, 성종 15년 5월 15일[80]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3. 왕권의 재확립과 제도의 완성 > 2) 세조의 왕권강화와 정치[81]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3) 양반의 특권 > (5) 토지소유의 특전[82] 신편한국사 > 조선 시대 >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1. 개국초 왕권의 강화와 국정운영체제 > 4) 태조·태종대의 국정운영체제[83] 정종실록, 2년 11월 13일[84] 태종실록, 3년 3월 27일[85] 태종실록, 4년 12월 8일[86] 태종실록, 17년 11월 5일.[87] 태종실록, 17년 11월 1일[88] 세종실록 2년 7월 11일[89] 태종실록, 13년 5월 6일[90] 한편 조선 건국 초기에는 많은 공신들이 양산되었다. 中興(1389)·開國 (1392.8)·太祖原從(1392.10)·回軍(1393.7)·定社(1398.10)·佐命(1401.1)·太宗原從(1411.11) 공신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많은 공신전과 별사전이 주어졌다.171)171)(이 중 中興功臣田은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없어졌다.) 조선 건국 초기의 10년간에 지급된 공신전의 총액은 약 45,100여 결이나 되었다.172)172)(深谷敏鐵, <科田法から職田法へ(下)>(≪史學雜誌≫51-10, 1940), 1223쪽.) 이는 태종조의 과전 총액인 84,100결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이들 공신 중에는 과전·공신전·별사전을 거듭 받아 1,000결이 넘는 수조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공신전 증대는 이를 충당할 토지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軍資田을 떼어 공신전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군자전의 감축은 군비를 소홀히 할 염려가 있었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3. 양반 > 3) 양반의 특권 > (5) 토지소유의 특전)[91] 다만 세조는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전법만은 끝까지 강행해서 상기한 가장 큰 문제점인 세습만큼은 어떻게든 없애긴 했다.[92] 이런 정치 체계는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흔히 채택하는 입헌군주제(내각제)와 비슷하다. 물론 정도전 본인이 미래인이라서 민주주의까지 간건 아니고, 그가 모티브로 한 것은 주공단, 관중, 제갈량 등 유능한 재상이 국가 운영을 주도하던 시기다. 이것을 아예 조선이란 나라에서 시스템화하고자 한 것.[93] 나제동맹 시기[94] 태종은 동생이나 세자인 이방석을, 세조는 조카이나 왕이자 상왕이던 단종을 죽였다. 흥미롭게도 위계서열상 자기보다 낮은 상대를 죽였다는 것도 같다. 그러나 종법질서로 따지면 태종은 이방석보다 꿇릴건 전혀 없었지만 세조는 자기 조카가 하필 전왕이자 자기 형인 문종의 자식인지라 순위가 낮았다.[95] 가정법도 필요 없이 재계 서열 1위 현대왕국을 졸지에 공중분해시킨 정몽구-정몽헌 형제의 왕자의 난, 롯데그룹신동주-신동빈 형제 간 분쟁, 범 삼성가이맹희-이건희 가계 간 분쟁 등등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심지어 이 경우들은 그룹에 공적이 충분한 차순위 아들들에게 물려준다 만다 하는데도 엄청난 분쟁이 터졌는데 아예 미성년자 막내아들이면 말 할 것도 없다. 1차 왕자의 난 때 쯤 되면 이방석도 17세로 아들까지 본 나이긴 하지만 여전히 공적이고 경력이고 일천한 막내아들이라는 문제는 해소되지는 않는다.[96] 이 때 왕씨 몰살이 일어났는데 이것도 이씨 왕조의 정통성 문제가 걸려있어서였다. 그도 그럴게 제대로 된 선양을 받아 건국한 것도 아니고 정변을 일으켜 찬탈한 것도 아닌 애매한 계승이었기 때문[97] 사실 이런 논리(신덕왕후가 살아있는 국모니 그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가 신덕왕후 관련해서 자주 나오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설령 살아있는 국모이자 유일한 왕비라고 해도 신덕왕후가 제2부인이라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으며 제1부인에게 살아있는 장성한 아들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는다. 즉, 신덕왕후가 할 일은 현재 왕비라는 이유로 자기 아들을 장성한 1부인의 아들들 대신 세자에 올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왕후 칭호를 받지 못한 한씨에게 왕후 직위를 내리도록 하고 가장 적합한 능력을 진 왕자를 세자로 세우도록 태조에게 건의해야 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2부인이 되어서 제1부인을 깔고 뭉개려 든다면 그럼 과연 그 밑의 사람들은 제2부인을 옳게 섬기려 들까? 당연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종법제가 만들어진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 공자가 살아있던 춘추전국시대는 이런 법도 자체가 완전히 무너졌고 그로 인해 아비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왕과 신하가 서로를 죽여대던 시데였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신덕왕후가 법도를 무너뜨린 대가는 바로 알 수 있다. 무인정사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전부 살해당한 것이다. 과연 이걸로 신덕왕후가 방원을 탓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 동생들을 죽이지 않으면 이르든 늦든 죽는 건 방원 본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먼저 법도를 무너뜨린 쪽은 신덕왕후니 마음에 부담도 덜하다. 만약 신덕왕후가 방과나 방원을 왕으로 세웠다면 이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신덕왕후에게 웃어른에게 드리는 인사를 하러 와야 했을 것이다.[98] 이종조카 신극례는 상장군으로 1차 왕자의 난의 핵심 수뇌부였고, 그 누이는 이방석이 세자가 되자 신덕왕후의 면전에서 대놓고 방원이 자리를 뺏어다가 방석이 줬으니 이제 큰일났다고 까지 일갈했을 정도다.[99] 물론 태종은 1차 왕자의 난때 이미 신덕왕후가 사망했기에 패륜을 저지르려해도 그럴 수 없긴 했다. 후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긴 했지만. 근데 그마저도 개인적인 감정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자신의 어머니인 신의왕후가 정실이 되어야 자신의 즉위 명분이 살기에 정치적인 문제 역시 관련되어 있었던 점도 감안해야한다.[100] 문과 급제를 했기에 실력은 보증되어있고 관료생활도 해 보았기에 정치적인 묘리를 잘 알고 있었다.[101] 이 숙청 자체도 외척 주살이 워낙 임팩트 커서 그렇지 무조건 죽이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이를테면 무인정사 때에도 정도전 등 핵심 인사들은 죽였지만 정작 신덕왕후의 친정인 강씨 문중이나 사돈(신덕왕후 여동생의 처가)인 신씨 문중은 대부분 목숨을 건지고 심지어 정계에 복귀까지 했다.[102] 다만 이징옥의 난은 의문이 있는게 정말 조선으로부터 독립한 분리주의적인 반란인지 아니면 죽을 순 없으니 한번 개겨보기나 하자는 반란인지 명확하지 않다. 일단 대체적으로는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편[103] 참고로 태종은 경연을 없애지는 않아도 게을리했다. 그런데 태종이 과거급제까지 할 정도로 학식이 높아서인지 아니면 왕권이 세서인지 몰라도 사냥에는 마구 물어뜯던(그럴 만도 한 게 사냥에 드는 국가적 소모가 어마어마하다.) 간관들도 경연을 게을리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았다.[104] 연산군은 그래도 한 횟수가 세 자리는 되지만 광해군은 10여 회 정도...[105] 반대로 호학군주이거나 정통성 문제가 있던 세종과 성종은 경연을 매우 자주 했는데, 특히 성종은 10대 시절 조강, 주강, 석강을 여름에도 꼬박꼬박 했고 홍귀달이 야대까지 하자고 해서 야대까지 했다![106] 변명하자면 현종은 실제로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 경연을 못 한 게 사실이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연산군이 건강을 핑계로 경연을 피한 것과는 대비되게, 이 양반은 등창, 종기, 위장병 등(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죽을 병)에 시달리며 약을 달고 살면서도 건강이 나아지면 나름대로 경연에 나왔던 편이다.[107] 태종이 공과 사 구분이 철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이상적인 군주상이였기 때문이 아니라 간관 활동을 통한 대신 견제라는 목적이 있었다. 태종은 공신의 부정부패는 상당히 봐줬고[123] 간관과 사관의 경우 자신이 원한 목적이 아닌 방향에서 어긋나면 어느 정도는 제어를 시도했다. 그래서 태종 시기에 곤장을 맞거나 유배되는 간관들도 있었다.[108] 세조 때부터 그 손자인 성종 때까지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홍윤성 같은 세조의 공신들이 여전히도 권력의 핵심으로서 활동했다.[109] 홍윤성은 청탁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투덜댄 삼촌을 때려 죽였다는 야사가 있을 정도라서 같은 훈구파 신하들끼리도 살인마 정승이라고 야사에 기록하였다.[110] 실록에서도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홍윤성의 고향에서 축하 선물로 노비 2명을 보냈는데, 노비가 튼실치 않다며 노비들을 고른 나계문을 때려팼고, 그것도 모자라 나계문이 자기 땅에 심어 가꿔놓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갔는데, 급기야는 홍윤성의 종의 남편인 김돌산이 나계문을 패 죽여버리기까지 했다고 기록돼 있다.[111] 물론 태종과 세종도 일부 측근의 비리를 봐주긴 했지만,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준은 모조리 칼같이 숙청했고, 세종은 일단 전모를 모조리 밝혀서 잡을 놈 잡은 후 유능한 놈만 봐주고 정말 노비처럼 부려먹었다. 그리고 정말로 능력이 있던 이들은 맞았다. 황희는 부패 관료지만 명재상임에는 두말할 것 없었고, 조말생뇌물 받은 걸로 하마터면 사형당할 뻔하기까지 했지만 행정 관료로는 탁월했고, 박연은 여러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당대에 음악에 대해서는 따라올 자가 없었다. 반면에 세조는 비리를 제대로 밝힌 것도 아니고 대국적으로 정치적 관용을 베푼 것도 아니었다.[112] 죄목이 진짜로 거만하다는거였다.[113] 이 시기에 얼마나 왕권이 약화되었냐면 예종 시기에는 사관들이 원상들에게 밉보일까 싶어 대신들에 대해 비판한 기록을 지워버렸고[124], 성종 시기에는 대간 중 하나가 원상제 폐지를 건의 하자 동료 간관들이 몰려가서 그만두라고 겁박했고[125], 그게 드러나는 통에 사헌부가 갈려나갔다.[114] 올량합 여진족 2,700 기병을 평안도 여연성에서 아군이 포위하여 물리치다. 앞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에 기록된 부분이다.[115] 다만 위의 수는 조선 초기 군사체계에 대해 오해를 하고 낸 수이다. 세종 3년의 기록을 보면 평안도 마병의 호수가 11815, 보병의 호수는 11312, 수군의 호수가 4080이였으며 나머지 군정들은 호별이나 동거였다. 일반적으로 정군은 호수만을 말하며 호별과 동거는 보법이 정립된 이후의 보인의 개념에 해당된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평안도의 군정은 시위군, 익군, 수성군을 합해 육군이 17714명, 수군이 3490명이였는데 위의 주장대로라면 세종 재위 초기에 7만이 넘었던 군사가 세종 말년에는 2만명 수준까지 줄어들었다는 얘기인가?[116] 몽골 제국 등 역사 속의 여러 유목제국들도 기병 전력이 궁기병 위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세조 이후의 조선마냥 극단적으로 근접전을 포기하는 정도는 아니었다.[117] "우리 나라의 인민(人民)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118] 문종 때 3군의 12사를 5사로 개편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119] 세조 시절 조선군이 단순히 30만이라 운운을 하면서 그 수가 많음을 그대로 믿으면 조선 말기에도 조선은 110만 대군을 가진 군사 강국이었다고 우길 수 있다.[120] 이건 단종때 벌어졌다.[121] 남도 지방의 수군은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해 비교적 충실한 군비를 갖추고 있었다.[122] 과전법은 자리에서 물러나면 반납해야 하는데 휼양전, 수신전 명목으로 사실상 세습되는 폐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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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이는 아들인 세종과도 유사하지만 세종은 능력있는 자들의 부정부패에만 끝없이 관대했고 관대한 만큼 부려먹었다.[124] 들통이 나서 처음 한 민수는 서연관이었던 것 때문인지 장 100대에 제주도 유배, 민수와 공범인 사람과 민수와 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지운 원숙강은 사형당했다.[125] 대간의 역할이 대신들 견제인데 그 대신들 중 우두머리격인 원상들에 대해 이토록 친화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약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