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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세종의 후궁 민정혜빈 양씨 | 愍貞惠嬪 楊氏 | |||
혜빈양씨단소 위치 | |||
출생 | 미상 | ||
사망 | 1455년 12월 26일[1][2] | ||
조선 충청도 청풍군 (現 충청북도 제천시) | |||
능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2-1[3] | ||
재위기간 | 조선 귀인~혜빈 | ||
1445년 이전 ~ 1455년 12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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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 양경(楊景)[4] 모친 - 이씨 | ||
배우자 | 세종 | ||
자녀 | |||
봉작 | 귀인(貴人) → 혜빈(惠嬪) | ||
시호 | 문혜혜빈(文惠惠嬪)[5][6] → 민정혜빈(愍貞惠嬪)[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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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의 후궁. 아버지는 남평 현감을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양경(楊景)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작은아버지는 중추원 동지사를 지낸 양후(楊厚)이다.슬하에 한남군 이어, 수춘군 이현, 영풍군 이천으로 3남을 두었고, 일찍 어머니 현덕왕후를 여읜 단종을 양육하였다.
비록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의해 교수형에 처했으나 후대에 절의를 인정 받았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후궁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시호를 받았으며, 그녀의 아들들은 《장릉배식록》에 육종영(六宗英)[8]으로 이름을 올렸다.
2. 생애
2.1. 세종의 후궁
일설에는 본래 왕세자 이향의 궁녀였으나 병약한 세자의 간병을 하다가 세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9]1445년(세종 27) 12월 1일 귀인 양씨의 부친을 의정부 좌찬성으로 추증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그 전에 종1품 귀인으로 봉작되었을 것이다.[10] 이에 앞서 1440년(세종 22) 혜빈 양씨의 장남 한남군이 예빈 녹사 권격(權格)의 맏딸과 혼인하였는데, 이듬해 12월에 세종이 권격의 막내딸을 세자의 후궁으로 들이는 일을 논의하였다.[11][12] 1442년(세종 24) 6월에 권격의 막내딸이 승휘(承徽)[13]가 되면서 왕실과 혼맥이 형성되었다.[14]
2.2. 단종의 유모
세자빈 이었던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산욕열로 죽는 일이 생겼다. 이에 세종은 동궁의 유일한 적통 소생인 경혜공주와 단종, 원손 남매를 그녀에게 맡겼고, 그녀는 이 일을 기뻐하며 자청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종은 즉위한 뒤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혜빈 양씨를 위해서 집을 지어 주는 등 각별히 예우하였다. 본래 선왕의 후궁은 모두 자수궁에서 거처하는 법이 관례인데도 "두어 간 집을 짓게 하여 편히 있도록 한 것"이라면서 공사하게 하고, 이 집을 혜빈궁(惠嬪宮)이라고 불렀다.[15][16]혜빈 양씨는 문종이 승하하면서 12세의 어린 단종을 보호하고자 궁궐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혜빈 양씨가 내명부를 다스리고 궁중의 살림살이를 도맡아서 궁중의 일을 주장하게 되었다. 비록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지만, 소헌왕후와 현덕왕후가 일찍 죽어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없었으므로 혜빈 양씨가 실질적인 실세가 된 것이다.[17]
강맹경(姜孟卿)[18]이 세조를 알현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혜빈(惠嬪)이 궁중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데, 만약 홍 귀인(洪貴人)의 작위를 높이지 않는다면 궁중의 일이 질서가 없을 것이다." 하니, 강맹경도 옳게 여겼다.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7월 9일
《단종실록》 단종 즉위년 7월 9일
그러나 혜빈 양씨는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에 거슬리는 존재였으므로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지위를 정1품 빈(嬪)으로 높였다. 그러자 귀인 홍씨가 숙빈(肅嬪)이 되어서 혜빈 양씨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혜빈 양씨는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한 것으로 보인다.[19][20]
2.3. 비극적인 최후
1455년(세조 1) 단종에게 선위 받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등과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하였다며 청풍(淸風)[21]으로 귀양을 갔다.[22] 뿐만 아니라 혜빈 양씨의 가산을 적몰하여 함길도도절제사 양정(楊汀)에게 하사하였다. 참고로 양정과 혜빈양씨는 9촌간의 부계(양씨) 친척으로 혜빈 양씨가 한 항렬 높은 즉 고모뻘이었다.(...)참고로 공교롭게도 후대 서로 죽고 죽였던 외척 대윤-소윤도 마찬가지로 친가로 9촌 관계였으며, 패자 쪽(윤임ㆍ혜빈 양씨)이 승자 쪽(문정왕후ㆍ윤원형ㆍ양정)보다 항렬이 한 칸 더 높았고 역사의 무대에 더 일찍 데뷔했으며 장남ㆍ장손(인종ㆍ단종)의 후견인으로 있었으므로 명분도 더 있는 입장이었다가 일종의 역전패를 당한 것이지만, 승자 쪽이 결국은 배드 엔딩으로 역사에서 퇴장하였거나 역사적으로 악명을 남기게 되어 장기적으로 보면 딱히 승리했다고 하기도 어렵게 된 점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혜빈 양씨 등을 모두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단종이 세조에게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고 했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23] 그러나 계속되는 상소에 세조는 혜빈 양씨를 교수형에 처하면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24] 그런데 혜빈 양씨는 부왕의 후궁이므로 세조에게는 서모(庶母)가 된다. 조선시대의 복상제(服喪制)에 따르면 자신을 젖먹여 길러준 서모는 5개월 동안 상복을 입고, 길러주진 않았으나 자식을 낳은 서모는 3개월 동안 상복을 입게 하였다. 만약 천첩을 포함한 비첩(婢妾: 계집종으로 첩이 된 여성)인 경우라면 서모로 보지 않아 상복을 입지 않지만 혜빈 양씨는 신분상 천첩에 해당하지 않고 또 남편 세종의 자식들을 낳았으니 서모를 죽이고 상복을 입지 않은 세조의 행위는 패륜이라 할 수 있다.
2.4. 추증
1712년(숙종 38) 단종이 복위되면서, 숙종이 혜빈 양씨와 아들 영풍군의 관작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25] 또한 숙종은 그녀에게 시호로 '문혜(文惠)'의 두 글자를 내렸다. 그 덕에 그녀는 조선시대 후궁 중 왕을 낳지 않았는데도 시호를 받은 유일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이때 혜빈 양씨의 묘는 잃어버려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중국 역사 기록에 그와 같은 사례가 많으니, 비빈(妃嬪)은 물론이고 공주에게도 오히려 시호가 있다. 그러니 양빈에게 어찌 시호를 내려 주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신주에 민정빈 양씨(愍貞嬪楊氏)라고 쓰도록 해조로 하여금 주인집에 분부하게 하라."
《정조실록》 정조 15년 5월 27일
《정조실록》 정조 15년 5월 27일
1791년(정조 15)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혜(惠)' 글자가 같다고 하여, 시호를 '민정(愍貞)'으로 고치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
3. 여담
- 《대동기문》에 따르면, 혜빈 양씨가 세조에게 "옥새는 나라의 중요한 보배다. 선왕께서 훈계하시기를 '세자나 세손이 아니면 전할 수 없다.' 하시었으니 내가 비록 죽더라도 옥새는 내줄 수 없다."라고 말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 혜빈 양씨의 시신은 그녀의 종조부 병사공 양치(楊治)가 남몰래 거둬다가 포천 기당리 세장산에 묻고 평토를 하여 극비에 부쳤다고 전해진다.
4. 대중매체에서
태어나자마자 생모를 잃은 단종을 신생아 시절부터 양육한 유모였고 단종의 세력 중 핵심 인물이어서 단종 관련 드라마에서는 꼭 나오지만 비중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서는 배우 박소현[26]이 연기했다.
- 1990년 KBS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배우 반효정이 연기했다.
- 1994년 KBS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배우 박준금이 연기했다. 1화에서 문종이 승하하는데다 수빈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 않은 기간은 중간중간 건너뛰기도 하는 왕과 비와 달리 세종의 승하부터 한명회의 죽음까지 건너뛰는 구간이 없는데도 100부작밖에 안 되다 보니[27] 극의 진행이 빠른지라 비중이 크지는 않으나, 주인공인 한명회와 맞서는 위치인데도 딱히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다만 비중이 크지 않다 보니 인상적인 장면도 없다.
- 1998년 KBS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배우 김혜리[28]가 연기했다. 본격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인 만큼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왕비가 아닌 후궁이면서 궁궐 안에 왕실 어른이 없다 보니 "내가 주상의 할미니라!"라고 외쳐대면서 대왕대비처럼 행세하고 단종한테도 윽박을 질러댄다. 수양대군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어머니 행세를 하기도 한다.[29] 하지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잡고 단종이 왕비를 맞이하자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 이후는 역사대로 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사망한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배우 최지나가 연기했다. 문종의 서모이자 단종의 유모로서 궁의 안주인으로 묘사되는데 문종 서거 즈음에는 병색이 짙어진 문종 곁을 지키고 있으면서 단종과 함께 걱정한다. 단종이 즉위했다가 계유정난이 발발하고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비중이 줄어든다. <왕과 비>에서 역사대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과 달리 세조에 의해 정업원으로 내쳐졌다고 처리된다. 그나마 왕과 비 때와는 달리 악녀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1] 음력 11월 9일[2] 세조에 의해 교수형을 당해 사망했다.[3] 숙종 대에 복위되었지만, 후손들이 위치를 잃어버려서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위치는 '혜빈양씨단소'로 제단이다. 공양왕릉과 불과 210여 미터 떨어져 있다.[4] 황희의 후처 양씨의 큰아버지인 양첨식의 아들이다.[5] 1713년(숙종39) 4월 2일, 숙종이 내린 시호다. 링크[6] 하지만 후대에 정조가 '혜(惠)'자가 혜경궁과 같다고 하여 시호를 고친다.[7] 1791년(정조15) 5월 27일, 정조가 내린 시호다. 링크[8] 단종에 대한 충정으로 절의를 지킨 여섯 명의 종친.[9] 현재 《세종실록》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이야기다.[10]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2월 1일 경자 1번째기사. #[11] 권격의 맏딸은 양원군부인(梁源郡夫人)으로 봉작되었다. 생몰년은 알 수 없으나 1482년(성종 13)에 연좌된 아들 이중생(李衆生)을 풀어달라고 상언하는 것으로 보아 성종이 재위할 때 살아있었다.[12]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12월 7일 기해 1번째기사. #[13] 내명부 종4품 세자 후궁.[14] 왕실의 혼인은 이중 삼중으로 맺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이 경우는 세종의 정치적인 고려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15]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 3월 28일 정묘 2번째기사. #[16] 일찍이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의 거처를 명빈전(明嬪殿)이라고 하고, 세조가 의빈 권씨의 거처를 영수궁으로 예우한 일이 있지만, 이들은 간택 후궁으로 혜빈 양씨와는 격이 다르다.[17] 만약 두 사람이 살아있었다면, 혜빈 양씨가 대신 단종을 양육했어도 후궁의 위치상 대접받긴 어렵다.[18] 심온의 사위이자 세종의 손아래 동서인 강석덕(姜碩德)의 조카이다. 훗날 세조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이 된다.[19]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7일 정묘 2번째기사. #[20] 《세조실록》에 "양씨는 노산군(魯山君)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궁중을 드나들면서 요구가 많았는데, 세조가 이에 약간의 절제를 가한 바 있어 양씨가 이를 원망하였고" 라는 말이 나온다. #[21]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 지역이다.[22]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윤6월 11일 을묘 1번째기사. #[23]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8월 23일 병인 1번째기사. #[24]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1월 9일 경진 1번째기사. #[25] 숙종실록 51권, 숙종 38년 4월 28일 경진 1번째기사. #[26] 성우 출신이며, 박규리의 어머니이다.[27] 왕과 비는 186부작이다.[28] 똑같이 정하연 작가가 맡은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기황후 역을 맡았는데, 이쪽은 혜빈 양씨와 달리 실제로도 악녀였다.[29] 혜빈의 생년이 전해지지 않는 만큼 정확한 나이는 알기 어렵지만 장남인 한남군이 1429년생, 영풍군은 1434년생에 영풍군의 장인 박팽년이 세조와 동갑내기라서 문종과 수양대군보다는 몇 살 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또 나이를 따지기 이전에 아버지의 첩도 어머니로 대접해야 하는 예법상 수양대군은 혜빈 양씨를 어머니로 대접해야 마땅하다. 극중에서는 혜빈의 행동이 도를 넘은 것으로 그려지는데, 양녕대군이 국왕의 할아버지라는 이유로 단종에게 폭언과 망언을 서슴지 않는데도 처벌받지 않거나 수빈이 연산군에게 "천한 피" 운운하는데도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 등 작품 자체가 고증이 이상하게 되어 있으니 역시 오류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