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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후궁 사기 차씨 | 司記 車氏 | ||
출생 | 미상 | |
장소 불명 | ||
사망 | 1444년(세종 26년) 7월 10일 | |
한성부 경복궁 연생전 | ||
부군 | 세종 | |
자녀 | 1녀 (장녀) 옹주 (요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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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의 후궁. 조선 초 내명부 정6품 사기(司記)[1]의 품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본래 궁녀 출신으로 추측된다. 세종의 다른 후궁인 상침 송씨처럼 자식을 낳고도 품계가 크게 오르지 못한 경우에 속한다.2. 상세
왕녀(王女)가 죽었다. 나이가 두 살인데 사기(司記) 차(車)씨의 소생이다.
《세종실록》 세종 13년 7월 6일
《세종실록》 세종 13년 7월 6일
세종의 자녀는 모두 18남 4녀로 적서를 가리지 않고 왕자는 많았으나 왕녀는 많지 않았다. 특히 왕비 소헌왕후가 낳은 적녀는 정소공주와 정의공주 자매 뿐이었으며, 서녀까지 포함한다면 사기 차씨 소생의 두 살난 왕녀는 세종의 일곱째 딸이 된다.[2] 그러나 이 딸은 1431년(세종 13)에 요절하였고, 차씨는 더이상 자식을 낳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비가 오고 우뢰하였다. 벼락이 연생전(延生殿)에 떨어져 사기(司記) 차씨(車氏)가 죽었으며, 연지동(蓮池洞)에서 한 여자가 벼락을 맞았고 창덕궁 옛 중추원(中樞院)에도 벼락이 떨어졌다.
《세종실록》 세종 26년 7월 10일
《세종실록》 세종 26년 7월 10일
1444년(세종 26) 경복궁 연생전에 벼락이 떨어져 차씨가 죽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세종은 이를 재변(災變)으로 여겼으며, "하늘이 내전(內殿)에 벼락을 떨어뜨려 꾸짖는 뜻을 보이니 내가 매우 두렵다"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궁중에서 일하는 궁녀의 숫자를 줄이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벼슬을 제수하는 등 백성들에게 은전을 베풀었다. 또한, 차씨는 죽은 왕녀의 생모임을 감안하여 쌀과 대두(大豆) 10석과 종이 60권 및 관곽(棺槨)을 부조하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