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6 09:40:42

귀인 정씨(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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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후궁
귀인 정씨 | 貴人 鄭氏
출생 미상
사망 1504년 4월 14일(음력 3월 20일)
한성부 창경궁
본관 초계 정씨
금이(金伊)
부모 부친 - 정인석(鄭仁石, 1424 ~ 1504)
배우자 성종
자녀 슬하 2남 1녀
장남 - 안양군(安陽君, 1480 ~ 1505)
차남 - 봉안군(鳳安君, 1482 ~1505)
장녀 - 정혜옹주(靜惠翁主, 1490 ~ 1507)
1. 개요2. 생애
2.1. 성종의 후궁2.2. 폐비 윤씨의 정적?2.3. 비참한 최후2.4. 사후
3.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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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후궁. 아버지는 정인석(鄭仁石)이며,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부는 한성부윤을 지낸 정발(鄭發)이다.

슬하에 안양군 이항, 봉안군 이봉, 정혜옹주를 낳아 2남 1녀를 두었다.[1]

2. 생애

2.1. 성종의 후궁

성종실록에서 정씨는 종3품 숙용, 또는 정3품 소용으로 등장하는데, "정씨의 동생을 영구히 양인으로 삼는다"는 전교가 있었다.[2] 이때문에 그녀의 본래 신분은 미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사극에서 정씨를 왕비 간택에서 폐비 윤씨정현왕후의 라이벌 격으로 격상시켜놓은 것은 극적 재미 때문이지. 실제로는 미천했던 출신 신분 때문에 왕비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3]

2.2. 폐비 윤씨의 정적?

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권 숙의는 덕종(德宗)의 후궁으로, 여러 숙의를 총괄하여 다스렸다.】 집에 던졌는데, 권 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1477년(성종 8) 한 통의 투서가 덕종의 후궁인 권 숙의의 집안에 떨어졌다. 투서의 내용은 "엄 숙의가 정 숙용과 더불어 중궁과 원자를 모해한다"는 것으로 깜짝 놀란 권 숙의가 익명서를 위에 바쳤다. 처음에는 정씨가 의심 받았지만, 당시 대비전성종은 곧 왕비 윤씨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4] 이외에 여러가지 일로 믿음을 잃은 왕비는 폐출되어 사가로 쫓겨나게 된다.[5]

사실 정씨가 귀인 엄씨와 함께 원자의 생모이자 왕비를 직접적으로 해치거나 모함한 일은 없다. 하지만 이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렸기에 연산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6]

2.3. 비참한 최후

연산군은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창경궁 뜰에 묶어놓고, 정씨의 소생인 안양군봉안군을 잡아와, 그녀를 마구 때리게 하였다. 당시 날이 어두워 안양군은 어머니임을 짐작하지 못하고 마구 때렸으나, 봉안군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때리지 않고 흐느꼈다.

이를 지켜 본 연산군은 더욱 화가 나 그녀들을 몽둥이로 마구 때려서 살해하였다.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숨이 끊어지고도 연산군의 매질은 그치지 않았으며, 젓갈로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7]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李㤚)에게 길든 말 한 필을 주라."하였다. 항이 지난밤에 명령대로 그 어머니를 장 때렸기 때문에 상을 준 것이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3월 21일
심지어 연산군은 안양군에게 어머니를 잘 때렸다고 상을 주기까지 하였다.

2.4. 사후

안양군은 충청도 제천에, 봉안군은 경기도 이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모두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녀의 막내딸 정혜옹주마저 15세의 나이로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를 갔는데, 당시 정혜옹주는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해서 "한기의 처"라고 불렸다.[8][9] 연산군은 후궁의 직첩을 빼앗은 후에 서인으로 삼고, 하사받은 노비 및 전지를 빠짐없이 찾아 환수하였다. 또한, 부왕의 후궁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 아들들 역시 종친으로 보지 말 것을 명하였다.[10]

뿐만 아니라 부모와 형제마저 연좌시켰다. 이때문에 그녀의 아버지 정인석과 배다른 형제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데, 정인석은 아예 뼈를 가루로 만들어 강 건너로 날렸다.[11][12]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 오른 중종이 직첩을 회복시켰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례를 치러주었다.

3. 대중 매체

폐비 윤씨를 모함한 후궁으로 유명해서인지, 성종연산군 시기를 다룬 사극마다 귀인 엄씨와는 쌍둥이처럼 함께 등장한다.
[1] 딸이 하나 더 있었으나 요절하였다. 그래서 막내딸 정혜옹주가 사실상 장녀가 된다.[2] 성종실록 220권, 성종 19년 9월 18일 무인 2번째기사. #[3] 조선왕조의 왕비간택은 명문 벌열가문에서 뽑는다는 관행이 있었다. 유일한 예외가 숙종 대의 희빈 장씨.[4] 투서는 폐비 윤씨의 동복오빠 윤구의 아내, 여종 삼월, 사비를 창덕궁 구현전에서 문초한 결과 폐비 윤씨 측의 자작극으로 밝혀진다. #[5] 이미 왕비 윤씨가 쌓아놓은 업보들이 장난 아니게 많이 있었다. 특히 윤씨는 성종 앞에서 자신의 허물을 뉘우치고 연비, 즉 불로 팔을 지져서 맹세하는 의식을 하겠다고 맹세한 적도 있었는데 그 맹세가 다 거짓말이었다는걸 몸소 보여준 격이었다. #[6] 애초에 성종의 후궁이 한두 사람도 아닌데, 폐비 윤씨가 콕 찝어서 '엄 숙의'와 '정 숙용'이라고 투서에 썼다.[7]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8] 정혜옹주가 유배간 지 약 6개월 후, 귀인 정씨의 유일한 사위이자 정혜옹주의 남편인 부마 청평위 한기(韓紀)도 고문을 당하는 등 고생을 겪었다.[9] 왕녀가 직첩을 빼앗기고 '(남편이름)의 처'로 불리는 일은 후대에도 일어난다. 효명옹주가 '김세룡의 처'로 불렸고, 화완옹주가 '정치달의 처'로 불렸다. 연산군의 딸 휘신공주도 직첩을 빼앗겨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10]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6일 정해 1번째기사. #[11] 연산군일기 57권, 연산 11년 1월 26일 임자 4번째기사. #[12] 이때 정인석은 나이 80세로 법에 따른다면 연좌되지 않아야 마땅한데도 연산군은 법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연좌되었다.[13] 왕과 나에서는 실제와 다르게 사약을 마시려고했으나 마시지 못하겠다고 하자 연산군에 의해 강제로 사약을 쏟아부어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