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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단종의 후궁 숙의 권씨 | 淑儀 權氏 | |
출생 | 1439년 |
사망 | 1521년 (향년 82세) |
본관 | 안동 권씨 |
휘 | 중비(仲非) |
부모 | 아버지 - 권완(權完) 어머니 - 윤지정의 딸 |
배우자 | 단종 |
자녀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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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단종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을 지낸 권완(權完)이며, 어머니는 윤지정의 딸이다. 양반의 딸로 태어나 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노비까지 수직 하락하는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2. 생애
1454년(단종 2) 수양대군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비롯하여 좌의정 정인지, 우의정 한확 등과 함께 단종에게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1] 당시 부왕 문종의 국상 중이어서 단종은 "아뢰는 뜻을 내가 모두 알고 있으나, 따를 수는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비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므로 창덕궁에서 여러 처녀를 모아놓고 간택을 하였다.[2]이때 간택에는 수양대군 뿐만 아니라 영응대군, 화의군, 계양군, 한남군 같은 종친들은 물론이고, 혜빈 양씨와 숙빈 홍씨까지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풍저창 부사 송현수의 딸, 예원군사 김사우의 딸, 전 사정 권완의 딸이 물망에 들었다. 여기서 운명이 갈렸는데, 송현수의 딸이 왕비로 낙점되어 정순왕후가 되고, 권완의 딸과 김사우의 딸은 후궁으로 삼기로 하였다.
1454년(단종 2) 1월 24일 정식으로 후궁이 되었는데, 그해 10월 10일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결국 단종은 2년 후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된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권완이 단종의 복위를 꾀한 죄로 능지처참의 형을 받고, 모든 가산이 적몰되었다. 당연히 권완의 딸인 권씨도 노비로 추락, 도승지 조석문의 계집종으로 하사되었다.[3]
권완(權完)의 딸 권중비(權仲非)를 방면(放免)하였다. 대개 노산군(魯山君)의 후궁(後宮)이었기 때문에 일찍이 공신(功臣)에게 내려 주어 계집종[婢]으로 삼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이를 방면하였다.
《단종실록》 세조 10년 4월 18일
《단종실록》 세조 10년 4월 18일
권씨는 이후 충청도 보은, 진천에서 지냈다. 《중종실록》에 단종의 후궁이었던 권씨와 김씨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몸은 노쇠하고, 형편이 매우 어렵다고 하여 당시 충청도관찰사의 청으로 공물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4][5][6]
[1]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 1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2] 1446년(세종 28)에 소헌왕후가 죽은 뒤로 중궁전이 계속 비워져 있었다. 문종은 세자빈이였던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고 산욕열로 죽은 이후로 다시 혼인하지 않았다.[3] 조석문은 훗날 영의정 자리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1477년(성종 8) 죽었는데, 사관의 논평이 "조석문은 천성이 사특하여 아첨을 잘하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고, 집 뒤에 제단을 만들어 절하면서 비는 요사스러운 짓을 했다"고 한다. #[4] 중종실록 35권, 중종 14년 1월 26일 신유 1번째기사. #[5] 특히 권씨는 보은에 있을 때에는 생활이 매우 궁핍하여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6] 무오사화 때 김일손의 공초 내용에 나온다. 권람이 권씨의 일족이었는데, 권람은 권씨의 노비와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는 노비에서 방면되었을 때 조금도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김일손이 권람의 사람됨을 경박히 여기고 사초에 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