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9 12:56:15

귀인 남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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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후궁
귀인 남씨 | 貴人 南氏
출생 미상(1470년 전후로 추정)[1]
사망 1531년 ~ 1536년 사이
부모 부친 - 남흔(南忻)
모친 - 전주 이씨(全州 李氏)
배우자 성종
자녀 없음
봉작 숙의(淑儀)[2]귀인(貴人)[3]
1. 개요2. 생애
2.1. 성종의 후궁2.2. 연산군과의 추문2.3. 중종반정 이후
3. 가족 관계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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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후궁. 아버지는 감찰, 우승지를 지낸 남흔(南忻)[4]이며, 어머니는 춘양군 이내(李徠)의 딸이다. 여기서 춘양군 이내(李徠)는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 보성군 이합(李㝓)의 적3남이므로 귀인 남씨는 왕실과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성종의 사후, 연산군간통을 저질렀다는 추문에 시달렸다.

2. 생애

2.1. 성종의 후궁

1492년(성종 23) 아버지 남흔의 졸기에서 숙의(淑儀)라고 일컫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후궁으로 봉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5]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다른 후궁들과 달리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2.2. 연산군과의 추문

"전일 경연에서 《당고종기(唐高宗紀)》의 선제(先帝) 후궁(後宮)에 대한 일을 강할 때에, 박안성(朴安性)이 아뢰기를 '이것은 옛날 제왕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는데, 신하가 임금 앞에서 군상(君上)의 잘못을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니,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왕이 성종(成宗)의 숙의(淑儀) 남씨(南氏)와 간음하고 추문이 밖에 퍼질듯 하므로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8월 5일

이 날, 경연에서 당 고종의 일을 강론했다는 것은 본래 아버지 당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를 당 고종이 취한 일을 일을 말한다.

비록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사관은 연산군이 자기가 한 짓에 지레 찔려서 '임금 앞에서 임금의 잘못을 의논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또한 성종의 후궁과 간통하였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미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 승평부대부인과도 추문이 있었던만큼 당시 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을 것이다. 연상취향?

2.3. 중종반정 이후

남씨는 중종반정이 일어난 다음에도 자순왕대비의 후원을 받으면서 궁중에 머물러 있었고, 심지어 숙의에서 종1품 귀인(貴人)으로 품계가 올랐는지 '남 귀인'이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한다.[6] 그녀가 연산군을 낳은 어머니는 아니지만, 부왕의 후궁이므로 연산군의 서모(庶母)가 된다. 하지만 남씨에 대해서 처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

1527년(중종 22) 사헌부에서 상소를 올려 행실이 좋지 못한 귀인 남씨를 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왕의 후궁을 융숭하게 대우하고 자전(慈殿)을 받들어 모심은 이것이 진실로 지극한 성효(聖孝)이십니다. 그러나 남귀인(南貴人) 같은 이는 간사스러워 은총이 있는 곳이면 번번이 따라 붙어 은밀히 사주(使嗾)해서 성세(聲勢)를 조장하니, 어찌 궁중에 오래 거처하게 하여 가정(家政)을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중종 22년 5월 18일

이에 중종은 "귀인 남씨가 자순대비를 받듦으로써 궁중에 살고 있는 것인데, 여론이 이런 것을 알면 스스로 처신할 것" 이라고 두둔하고 일을 덮어주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귀인 남씨가 왕실의 비호를 받은 이유는 중종의 적장녀 효혜공주를 키운 공로 덕분으로 보인다. 효혜공주의 생모 장경왕후인종을 낳고 산욕열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장경왕후의 언니인 덕풍군부인 윤씨가 대신 돌보게 되었고, 이 덕풍군부인 윤씨가 귀인 남씨와 친해서 궁중에서는 남씨가 맡아서 기르고 궁 밖에서는 윤씨가 돌보았다고 한다.[8]
일찍이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남빈(南嬪)과 매우 친밀했었는데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출생하자 남빈과 윤씨가 이를 받아 길렀다. 공주는 연성위(延城尉) 김안로의 아들 희(禧)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들을 어머니처럼 대접하였다.
《연려실기술》 명종조 고사본말

이 다음의 기록은 없으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3. 가족 관계

  • 조부 : 남윤(南倫)
  • 조모 : 교하 노씨(交河 盧氏) - 노사신의 누이이며 소헌왕후의 조카
  • 외조부 : 춘양군 이내(春陽君 李徠, 1434 ~ ? ) -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보성군의 3남
  • 외조모 : 안동 권씨(安東 權氏)
    • 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언니 : 윤승세(尹承世)와 혼인
      • 조카 : 영원위 윤내(鈴原尉 尹鼐) - 성종의 9녀 경휘옹주와 혼인
    • 언니 : 김상(金祥)과 혼인
    • 남동생 : 남조원(南調元)
    • 남동생 : 남응원(南應元)
    • 남동생 : 의천위 납섭원(宜川尉 南燮元) - 성종의 10녀 휘정옹주와 혼인

4. 대중 매체


[1] 아버지 남흔이 1451년생, 후술할 남흔의 졸기에서 1492년에 이미 숙의라고 일컬어져 있음, 후궁의 간택은 늦어도 18~19세에 이루어짐을 고려[2] 간택후궁이 처음 받는 작위. 간택후궁은 숙의(종2품), 승은후궁은 숙원(종4품)으로 초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다.[3] 종1품[4] 효령대군의 첩 매화(梅花)와 간통하여 탄핵 받았다. 효령대군은 매화가 자신의 첩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효령대군의 아들이 아버지의 첩이 맞다고 인증한 일이 있다. #[5] 성종실록 268권, 성종 23년 8월 3일 신축 2번째기사. #[6]중종실록》에서 1515년(중종 10)부터 귀인이라고 일컫는다.[7]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의 여자들은 모두 폐출되거나 처형 당하는 등 각자 지은 죄에 맞는 처벌이 있었다.[8] 장경왕후의 언니는 월산대군의 외아들 덕풍군 이이(李恞)의 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