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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 정몽구 鄭夢九|Chung Mong-koo | |||
출생 | 1938년 4월 19일[1] ([age(1938-04-19)]세) | ||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본관 | 하동 정씨 (河東 鄭氏)[2] | ||
직업 | 기업인 | ||
현직 |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 | ||
학력 |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 34회)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경영학 / 학사) | ||
재산 | 70억 달러 (한화 약 7조 원)[3]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c83><colcolor=#ffffff> 부모 | 아버지 정주영, 어머니 변중석 | |
형제자매 | 형 정몽필 남동생 정몽근, 정몽우, 정몽헌, 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여동생 정경희, 정정인, 정정임 | ||
배우자 | 이정화(1939년~2009년)[4] | ||
자녀 | 장녀 정성이(1962년생)[5] 차녀 정명이(1964년생)[6] 삼녀 정윤이(1968년생)[7] 장남 정의선(1970년생) | ||
신체 | 177cm, 75kg[8]. | ||
병역 |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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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 초대 총수 겸 명예 회장.정주영과 정몽헌 사후 명실상부한 범현대가의 수장이자 이건희 삼성 제2대 총수와 함께 대표적인 국내 재벌 총수 2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창업주인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자신들이 이끈 기업이 국내 1위를 넘어 세계 정상권으로 성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9]
2. 생애
1938년 4월 19일 강원도 통천군에서 정주영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0]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으로 인한 유급과 학사 부진 등 시국의 파도를 맞으며 학창 시절을 보내다 1959년에 한양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지막지한 덩치와 인상에서 보이듯 다혈질에 성미가 급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11] 현장에서 몸을 부딪히며 하는 일을 중시하던 마초 타입이었다.
이 때문에 초졸이라는 짧은 학력을 평생의 컴플렉스로 여겼던 정주영은 정몽구를 별로 마땅치않게 생각하였다.[12][13] 이후 육군에 입대해서 병장으로 전역한 후 미국 유학을 거쳐서 32세인 1970년에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입사한다. 정몽구가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자식을 넷이나 두고도 정직원으로 발령받지 못하고 공사장에서 고생하는 걸 안타까워한 변중석 여사가 정주영의 해외 출국을 틈타서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장에게 부탁하여 입사가 성사된 것이었다.[14]
정주영의 각종 일화들을 볼때 아이러니하게도 정몽구는 정주영 본인을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었다.
2.1. 기업인 활동
아들 정의선이 태어난 1970년 처음 현대에 입사한 이후 현대자동차, 현대건설을 거치며 주로 현장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후술하는 특혜 분양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를 대신해 징역을 살기도 했다. 그 이후로 조금씩 정주영에게 인정 받는다. 그리고 1982년 형 정몽필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현대가의 장자가 된다.[15] 아버지에게 사랑받던 동생 정몽헌, 정몽준이 쉽게 높은 직위를 얻어낸 것과 달리[16] 정몽구는 현장에서 직접 실적을 보인 뒤에야 어렵사리 인정 받았고 아버지의 정계 진출 이후 그 공백을 메우던 삼촌 정세영을 보좌하다가 1996년, 마침내 현대가의 장자로서(자격) 현대그룹 회장직에 오른다.1997년 외환 위기 후 셋째 동생 정몽헌이 공동 회장으로 승격되자 정몽헌과 그룹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면서 그와 틀어졌고 각각의 가신들과 황색언론의 이간질까지 겹쳐지며 이는 결국 2000년 대한민국 기업 역사상 최악의 경영권 다툼인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정몽구는 2000년 8월,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경질 당해 그룹의 자동차와 제철 및 철도 등의 부분을 갖고 현대기아자동차그룹으로 독립한다. 이때만 해도 왕자의 난은 동생 정몽헌의 승리로 쉽사리 귀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현대그룹 적통을 정몽헌에게 내준 것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는데 이후 정몽준이 자신의 지분을 정리하여 이듬해 현대중공업과 조선 분야를 가지고 이탈했고 그룹의 상징이자 토대였으나 부실이 감춰진 건설과 전자가 경영난에 빠져 버린 것이다.[17] 결국 정몽헌은 두 회사를 채권단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분쟁을 거쳐 주가가 폭락한 종합상사와 금융 부분 및 상선, 게다가 당시 새 정권 출범 이후 대북송금 사건까지 터지며 정치적으로 엮여 고초를 겪던 대북 사업 부분마저 부진했다. 이 상황에서 정몽헌 회장은 결국 아버지 정주영의 타계 2년 후 특검 수사까지 받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정몽구는 부채도 낮고 미래 가치가 풍부하며 탄탄한 현대자동차, 기아를 받아 키우며 동생 정몽헌이 뱉어낸 그룹의 모태 현대건설까지 2011년에 다시 받아내며 재계 2위까지 그룹을 크게 일궈냈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놓고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다툼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는 같은 해 9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했으며 이후 한보철강 당진제철소 인수, 현대제철 출범, 일관제철소 준공, 현대건설 인수 등을 통해 자동차, 철강, 건설이라는 세 축을 뚜렷이 만들어 현대자동차그룹의 틀을 구축했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정몽구 회장을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에 선정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청문회에 불려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이게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됐다. 이후 2018년에 현대자동차 시찰 및 회의를 끝으로 건강 문제, 고령 등으로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사실 2016년 청문회 때 이미 만 78세의 고령에 건강이 좋지 않은 모습을 자주 보였고 말도 논리적으로 하기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됐다.
2020년 10월 14일부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직을 아들 정의선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명예 회장으로 남게 된다. 어느덧 팔순을 넘어 아버지 정주영의 별세 당시 나이인 85세까지 넘어선 고령이다 보니 대외적으로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18] 이 때문에 한남동 자택에서 칩거하며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3. 사회적 공헌
- 2004년 12월 2일 정몽구 회장 및 임직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70억 원 기탁(2004년 당시 국내 주요 대기업 중 연말 불우 이웃 돕기 성금을 공공 단체에 기부한 것은 현대차그룹이 처음)
- 2009년 12월 7일 6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
- 2011년 9월 5,000억 원 상당의 주식을 기부(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 지원 등을 위한 정몽구재단에 사재 출연)
- 2021년 10월 31일 고려대학교에서 기부금 약정 체결식(코로나19 백신 센터 설립에 사재 100억 원 기부)
4. 학력
- 1959년 경복고등학교 졸업(34회)
- 1967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경영학(現 산업공학과) 학사
- 1989년 센트럴 코네티컷 대학교 인문학 명예 박사
- 2001년 몽골 국립대학교 경영학 명예 박사
- 2003년 고려대학교 경영학 명예 박사
- 2015년 한양대학교 공학 명예 박사
5. 경력
- 1970년 2월 ~ 1970년 9월: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과장
- 1970년 10월 ~ 1970년 12월: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품과 차장
- 1972년 1월 ~ 1973년 2월: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부장
- 1973년 3월 ~ 1973년 5월: 현대건설 자재부 부장
- 1973년 6월 ~ 1974년 2월: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이사
- 1974년 2월 ~ 1987년: 현대자동차써비스 대표이사 사장
- 1977년 7월 ~ 1987년 1월: 현대정공 대표이사 사장
- 1981년 2월 ~ 1987년 1월: 현대강관 대표이사 사장
- 1983년 1월 ~ 1984년 2월: 제4대 한국 컨테이너 공업협회 회장
- 1984년 2월 ~ 199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 1985년 4월 ~ 1997년 1월: 대한양궁협회 회장
- 1986년 11월 ~ 1987년 1월: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 1986년 10월 ~ 1997년 11월: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
- 1987년 1월 ~ 1998년 1월: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 1987년 2월 ~ 1996년 1월: 현대정공 회장
- 1987년 2월 ~ 1996년 1월: 현대자동차써비스 회장
- 1987년 2월 ~ 1996년 1월: 현대강관 회장
- 1987년 2월 ~ 1996년 1월: 현대산업개발 회장
- 1987년 2월 ~ 1996년 1월: 인천제철 회장
- 1993년 5월 ~ 1996년 2월: 대한체육회 회장
- 1993년 9월 ~ 1999년 7월: 세계 양궁 연맹 부회장
- 1994년 3월 ~ 1998년: 현대우주항공 회장
- 1996년 1월 ~ 2000년 3월: 현대그룹 회장
- 1997년 1월 ~ 현재: 대한양궁협회 명예 회장
- 1997년 2월 ~ 2017년 2월: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997년 3월: 한러 경제협회 회장
- 1997년 11월 ~ 현재: 아시아 양궁 연맹 명예 회장
- 1998년 4월 ~ 2000년 3월: 현대경영자협의회 회장
- 1999년 ~ 2001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
- 1999년 1월 ~ 2002년 3월: 한국표준협회 회장
- 1999년 3월 ~ 2020년 10월: 현대자동차 회장[19]
- 1999년 7월 ~ 2009년: 기아 회장[20]
- 1999년 7월 ~ 현재: 세계 양궁 연맹 명예 부회장
- 1999년 11월 ~ 2002년 12월: 2010 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위원장
- 2000년 9월 ~ 2020년 10월: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 2004년 9월: 한보철강 인수
- 2005년 1월 ~ 2010년 8월: 동아시아재단 이사장
- 2007년 2월 ~ 2010년 8월: 2012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고문
- 2007년 8월 ~ 2007년 12월: 2012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 명예 유치위원장
- 2008년 3월: 2012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 명예 위원장
- 2010년 8월: 동아시아재단 명예 이사장
- 2020년 10월 ~ 현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 회장
6. 상훈
- 1979년 11월: 수출산업포장
- 1981년 12월: 새마을지도자상
- 1985년 8월: 철탑산업훈장
- 1986년 12월: 체육훈장 맹호장
- 1989년 4월: 체육훈장 청룡장
- 1989년 11월: 동탑산업훈장
- 1996년 5월: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
- 1997년 5월: 한국경영학회 한국경영자 대상
- 1998년 3월: 제25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
- 2001년 2월: 올해의 자동차산업공헌상, 미국 자동차명예의 전당 미국 자동차산업 공헌상
- 2004년 7월: 몽골정부 북극성 훈장
- 2004년 12월: 2004년 자동차부문 최고의 CEO (미국 비즈니스위크 선정)
- 2005년 7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05년 10월: 인촌기념회 산업기술부문 인촌상
- 2005년 11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42위
- 2009년 6월: 미국 코리아소사이어티 밴플리트상
- 2010년 7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11년 11월: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부문 아시아 최고 CEO
- 2011년 12월: 미국 모터트렌드 세계 자동차업계 파워리스트 2위
- 2012년 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
- 2012년 3월: 이탈리아 인터오토뉴스 글로벌 최고 경영인상
- 2012년 12월: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CEO 6위
- 2020년 2월: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21]
7. 자동차 산업에서의 공로
단순히 국내 시장 1위로 만족해야 했던 현대자동차그룹을 토요타, 폭스바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3대 자동차 기업으로 도약시킨 주역이다. 재벌 2세였지만 창업 경영자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계열 분리 당시만 해도 계열사 10개, 자산 34조 원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2020년에는 계열사 54개, 자산 248조 원을 보유한 그룹으로 성장했다.생산 혁신, R&D 혁신, 공급망(Supply Chain) 혁신 등 공학과 경영을 결합한 과감한 시도와 성취는 전 세계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모델이 되고 있다. 또한 자동차 산업과 소재, 전기, 전자, IT 분야의 창조적 융복합을 선도하고 있으며 R&D를 중심으로 미래 인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품질경영’ ‘현장 경영’으로 대표되는 경영 철학이 대변하듯, 품질을 중시하고 현장에서 답을 찾고 있다. 이는 산업공학 전공자들에게 교과서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22]
자동차 생산 공정 과정에서 최적화된 부품 공급 모듈화 체계를 도입, 효율성을 최대화했으며 전 세계 균일한 고품질의 생산 공장을 적기에 건설할 수 있는 표준 공장 건설 체계를 확립했다. ‘쇳물에서 자동차까지’의 수직 계열화를 완비, 그룹 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세계 최초로 친환경 자원 순환형 사업 구조를 갖춰 경제적 성과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책임과 지속 가능 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연구 역량 집적화와 고도화도 전 세계 산업계가 주시한 혁신이었다. 남양에 세계 최대 규모의 R&D 센터를 설립, 연구 개발 역량을 집중해 미래 성장 기반을 확보했고 이는 독자 엔진 개발과 수소연료전지 파워트레인 체계, 5.0 타우엔진, 1.6 감마엔진이 세계 10대 엔진에 선정되는 쾌거로 이어졌다. 현대기아만의 독자적인 하이브리드 체계를 개발, 글로벌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궁극의 친환경차로 평가 받는 수소연료전지차를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결실을 낳았다.
해외 공장 건설 시 국내 부품 업체들의 대규모 동반 진출은 사실상 현대기아차에서 최초로 시도한 독창적 협력 체계로 산업사적 의미가 지대할 뿐 아니라 동반성장 의지의 일환이었다. 정몽구 회장은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는 통찰력과 전략적 결단으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역발상 경영인으로도 평가 받고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의 ‘10년 10만 마일’ 보증 실시 승부수는 현대·기아차가 세계 자동차 시장의 강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전례가 없는 최단 기간 내에 국제 생산 판매 네트워크를 구축, 현대·기아차를 내수 기업에서 세계 유수의 경쟁 업체들과 겨루는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세계 언론이 관용어로 사용하는 ‘현대 스피드’는 이 같은 정몽구 회장의 추진력에 대한 평가다. 그 결과,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브랜드 40위, 기아는 74위를 기록하는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미국 품질 조사 기관의 신차 품질 조사에서도 현대자동차는 일반 브랜드 부문 1위를 획득했다.
‘국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사회공헌 철학도 실현하고 있다. 사재를 출연해 ‘현대차 정몽구 재단’을 설립하고 저소득층 미래 인재 육성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 업적을 인정받아 1996년 한국의 경영자상, 1998년 금탑산업훈장, 201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해외에서도 2001년 자동차업계의 노벨상인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선정 ‘자동차산업공헌상’ 수상, 2004년 미국 비즈니스 위크 ‘2004 최고경영자’, 2005년 미국 오토모티브 뉴스 ‘2005 자동차부문 아시아 최고 CEO’, 2009년 미국 벤플리트상 수상,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세계 100대 최고 경영자’, 미국 모터트렌드 ‘자동차산업 영향력 있는 인물’ 2위에 선정됐다.
8.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현대가 문서 참고하십시오.9. 두 차례의 구속
9.1. 1978년
1978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건축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 특수부에 의해 구속수감되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 대신 책임을 지고 옥살이[23]를 하기도 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당연히 사법 부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기도 했다.9.2. 2006년
2006년 4월,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61일만에 보석보증금 10억 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3년,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사회봉사명령 300시간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기소 이유는 정 회장이 회삿돈 900억여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100억 원이 넘는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특경법상 횡령 및 배임)구속 직후 '대국민 사과 및 사회공헌 방안'을 발표 했는데 정몽구 정의선 부자의 글로비스 주식 2250만 주(당시 주당 4만 4550원으로 시가 1조 23억 원)를 사회에 기부하겠다는 내용을 넣었다. 하지만 사회환원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현대차 측은 "주식을 내겠다고 했지 1조 원을 못박아 헌납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차 측은 재판을 거치면서 최종 8400억 규모가 확정되었고 2013년 완납했다고 밝혔다.
10. 여담
-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과(現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현대자동차에 입사했다. 이후 현대자동차서비스, 현대정공(現 현대모비스) 등의 계열사에서 근무했다. 현대정공 시절에 컨테이너 사업을 성공시켜 아버지 정주영으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게 됐다.
- 동생인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과는 경영권 분쟁 등으로 인해 겉으로 형제 간 갈등이 부각되지만 사적으로는 형제 간 우애가 깊었으며 이후 어느 정도 진전되기도 했다.[24] 2003년 정몽헌이 불법 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검찰의 수사를 받을 때도 형 정몽구가 직접 검찰 측 인사들을 만나 동생의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으며 결국 정몽헌이 자살하자 당시 고등학생이던 정몽헌의 외아들이자 조카인 상주 정영선 현대투자파트너스 이사를 대신해 동생 정몽준과 함께 정몽헌의 장례식을 주도했다. 실제 정몽구는 동생의 발인 당시 결국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실제 형제 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 사업가로서는 피나는 경영권 분쟁을 했던 사이지만 가족으로서 형제애는 놓지 않았던 것이다. 삼촌 정세영도 열심히 키운 현대자동차를 정주영의 지시로 정몽구에게 넘긴 것에 한을 품은 것과 별개로 경영자로서 형을 존경한 것을 보고 영향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몽헌 사후 현대그룹 회장직에 오른 제수 현정은과는 다른 범현대가 기업가들도 그렇듯 관계가 별로 좋지 않은 걸로 보인다.[25]
- 양궁에도 조예가 있고 관심을 많이 뒀는지 대한양궁협회의 제2-5대 회장을 지냈다. 현재는 대한양궁협회 명예 회장으로 있다. 한국 양궁을 키워 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임 대한양궁협회 회장은 그의 아들 정의선 회장이 물려받아 맡고 있다. 1986년부터 1997년까지 아시아 양궁 연맹 회장을 맡았고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세계 양궁 연맹의 부회장을 맡았으며 현재는 세계 양궁 연맹의 명예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런 영향으로 현대차그룹에서 남녀 양궁단[26]을 운영 중이다.
- 경복고 재학 시절 럭비부 주장 출신으로 또래 중에 가장 힘이 셌다고 한다.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과 경복고 동기로 공부에만 열중하던 갸날픈 체구의 고교생 손병두를 불량서클 학생들로부터 고교생 정몽구가 지켜 주곤 했다. 럭비부 출신이다 보니 젊었을 적부터 거구에 강골을 자랑하며 팔순 고령인 지금도 어깨가 떡 벌어져 덩치가 있는 편이다. 기사에 의하면 키는 칠순 넘겼을 당시 177cm 정도라고 한다. 나이 들어 키가 줄어드는 것을 생각하면 젊었을 때는 더 장신이었을 것이다. 사실 부친 정주영(175cm)이나 형제 정몽헌(175cm), 정몽준(182cm)도 키와 덩치가 크니 집안 내력이다. 키 출처
-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해 군 복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다만 특유의 다혈질적 성격으로 인해 훈련병 시절 조교를 두들겨 패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27] 물론 결과는 자대 배치도 받기 전에 영창행이었다. 형제들 또한 ROTC 장교나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고 하니 최소한 병역 문제에 관해서 범현대가는 떳떳한 셈이다. 아들 정의선 회장은 담낭염 수술로 면제를 받았는데 이는 담낭암으로 타계한 정몽구 명예 회장의 부인이자 정의선 회장의 어머니 이정화 여사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력이 있는 질병인데다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병의 수준이 심각했기에 정의선의 병역 면제를 비난하는 여론은 사실상 없다.
- 모교인 한양대학교에 그의 이름을 딴 '정몽구 미래자동차연구센터' 건물이 2015년 들어섰다. 이름 그대로 정몽구 회장이 건설을 후원했으며 미래자동차공학과 등이 입주했다.
- 현대차의 여러 비판과는 별개로 정몽구 회장의 경영 능력은 부정적 평가보다 긍정적 평가가 훨씬 더 많다. 현대정공을 성공적으로 키워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갈기갈기 분리되어 찢어진 현대그룹을 다시금 한국 재계 서열 2위로까지 끌어올린 공적만 봐도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이 2018년 들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정 회장에 대한 2010년도 기사가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는데 부인과 사별한 이후 자택 가사 도우미까지 모두 남자로 교체했다는 내용이다. 부인과 사별한 상태에서 주변에 여자를 두면 혹시 모를 생길 의혹이나 구설수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차단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 회장이 여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던 것을 보고 반면교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마지막화에서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김두한이 출소 후 이동하던 차 안에서 김두한의 청년 참모였던 이찬오와 대화하던 도중 이찬오가 "저는 현대그룹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럭비하는 친구가 있어서요." 라고 말하는데, 여러 정황상 그 럭비하는 친구가 정몽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둘은 경복고등학교 럭비부를 같이 했으며, 이찬오는 정몽구계 회사인 현대자동차써비스에서 경력을 쌓고 2001년에 부사장 직급까지 지내고 은퇴한다.#
- 축빠가 가득한 범현대가에서 정몽헌, 정몽윤과 함께 몇 안 되는 야구광이다. 왕자의 난 과정에서 현대 유니콘스 인수를 시도해 범현대가 야구단 적통을 이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고[29]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직접 야구단을 경영하게 됐다. 해태 인수 직후에도 일본 주니치에서 방출 당한 이종범에게 최고 대우를 약속해 즉시 재영입을 검토, 타이거즈에 복귀하는 데 기여했던 바 있다. KIA 타이거즈로 간판을 바꿔 단 지 얼마 안 된 시기 직접 무등야구장을 찾아 열악한 시설을 보고 직접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고.# 그 외에도 2006년 WBC 4강 신화 당시 KIA 소속으로 대표팀 엔트리에 들었던 이종범, 김종국, 전병두에게 특별 격려금을 지급한 바 있다.
- 세계 자동차 업계 5위 진입, 현대가 적통 계승, 고로 제철소 준공, 그리고 통합 사옥 건립을 4대 숙원으로 삼고 있다. 이 중 앞의 3개는 달성했고 마지막 숙원으로 통합 사옥 건립이 진행 중이다.
- 경복고의 2021년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 준비 비용으로 5억 원을 기부했는데 이는 행사 필요 비용의 절반에 해당한다. 모교의 행사마다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 왕자의 난 당시 언론에서는 MK(몽구), MH(몽헌)이라는 이니셜로 불렸다.
- 2012 여수 엑스포 유치 위원회 명예 위원장에 위촉돼 전 세계 각국을 돌며 유치 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유치에 성공한 바 있다. 이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11. 참고 문헌
[1] 음력 1938년 3월 19일[2] 지예부사공파(知禮部事公派) 25세손 상(相)○, ○채(采), ○문(文), ○림(林) 항렬이나 이를 따르지 않고 범현대가만의 돌림자를 사용하였다.[3] 2021년 10월 포브스 기준. 대한민국 부자 순위 7위.[4] 2009년 담낭암으로 별세했다.[5] 이노션 고문.[6] 현대카드, 현대캐피탈, 현대커머셜 사장.[7]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사장. 2023년 기준으로 사장 지분율은 16.26%라고 한다. 얼굴 사진 기사[8] 젊은 시절에는 90kg가 넘는 거구였다고 한다[9] 단 정몽구는 차남이었지만 부친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이 젊은 시절 사고로 사망한 후 가문의 실질적 장남이었지만 이건희는 이병철 회장의 막내아들이었다는 차이점도 있다.[10] 어머니 변중석에게는 장남이지만, 이복 형 정몽필이 있고 어머니 변중석의 호적 밑으로 넣었기 때문에 호적상으로도 차남이다.[11] 정몽준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보면 정몽구는 싸움도 굉장히 잘했다. 중학교 3학년 무렵에 불량한 고등학생 무리를 압도하여 동네에 난리가 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12] 한양대를 간 것으로 못마땅한게 의아할 수 있지만, 현대가는 유독 서울대학교와 인연이 없었다. 정몽필과 정몽헌, 정몽일이 연세대, 정몽구, 정몽근이 한양대, 정몽우가 중앙대, 정몽윤은 아예 해외로 유학을 갔다.[13] 정몽구와 대조적으로 6남인 정몽준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정주영의 자랑이었다. 정주영은 만나는 동료 총수마다 "우리 몽준이가 서울대에 갔소이다."라며 자랑하였다.[14] 형 정몽필과 동생 정몽근은 훨씬 먼저 입사하여 정직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고 7살 아랫 동생인 정몽우와 같은 해에 입사했다. 승진도 1987년 이전까지는 동생 정몽근보다 늦었었다. 이런 이유로 모친인 변중석 여사가 안타까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5] 정몽필이 일찍 죽었고 살아생전에도 아들을 두지 못하고 아내 이양자 사이에서 딸만 둘을 얻었기에 그의 사후 현대가의 장자 적통은 정몽구-정의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6] 정몽준은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본인의 초졸 학력에 콤플렉스가 있던 아버지의 평생의 한을 풀어 줬고 정몽헌은 아버지를 가장 닮은 자식이란 평을 들었다.[17] 당시 현대건설은 90년대 초 걸프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정부로부터 공사대금을 지급받지 못해 재무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고 현대전자는 IMF 사태 당시 구조조정을 위해 LG반도체와 합병하여 하이닉스라는 이름으로 계열분리되었다. 특히 90년대 후반에 후계구도를 정리하면서 현대산업개발이 정세영-정몽규 부자에게 떨어져 나간 것이 결정적이였는데 같은 건설사여도 부채에 허덕이던 현대건설과는 다르게 현산 쪽은 1기 신도시 개발 당시에 수도권에 매입했던 막대한 규모의 부동산과 아파트 분양으로 얻은 현금성 자산이 많아 알짜로 통하던 회사였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산업개발이 분리되지 않았거나 시기가 조금만 늦어졌어도 현산 쪽의 현금과 부동산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현대건설의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현대그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18] 범현대가 1세대 경영자들은 대부분 장수했다. 정주영은 8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별세했던 2001년 기준 기대 수명이 75세였던 것을 고려하면 크게 장수한 것이다. 아울러 숙부인 정인영 HL그룹 명예 회장도 86세에 별세했고 막내 숙부이자 정몽구보다 두 살 많은 정상영 KCC그룹 명예 회장도 84세에 별세해 장수 기업인 대열에 들었다.[19] 2020년 3월부터는 등기이사직 사임, 같은 해 10월에 회장직도 사임.[20] 기아 회장직은 2009년에 이미 그만 둔 상태였다.[21]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다. Automotive Hall of Fame(AHF) - Mong-Koo Chung
관련 기사[22]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한양대학교 산업공학(당시 공업경영학) 전공자다.[23]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였으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다.[24] 실제로 정몽구는 사석에서 정몽헌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고 하며, 왕자의 난 이후에도 서로의 집을 찾아가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25] 다만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나 정몽준 HD현대 총수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다. 유일하게 부딪혔던게 2009년 현대건설 인수전인데 이때 당시에도 현대차그룹 쪽에서는 어떠한 메세지도 내보내지 않았고 현대그룹 쪽에서 비방성 광고를 내보낸게 다였다.[26]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27]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물려받은 걸로 보인다. 현대에서 몸 담았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몽구 회장도 성격이 불같지만 형인 정몽필은 더 불같고 다혈질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입 사원 시절때 정몽필한테 많이 혼났다는 찌라시가 있다.[28] 정주영 모티브인 천태산의 차남.[29] 실제 이 당시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유니콘스 구단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인수 대금으로 무려 900억 원을 부르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 대신 싸게 매물로 나온 해태를 인수하게 됐다.
관련 기사[22] 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한양대학교 산업공학(당시 공업경영학) 전공자다.[23] 매우 큰 뇌물 스캔들이였으나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봐주기 수사의 전형이라서, 1심 판결전 75일 구속된 게 전부다. 책임자 정몽구를 포함, 대부분 선고유예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고 관련자 수백 명 중에 중형은 한 명도 없다.[24] 실제로 정몽구는 사석에서 정몽헌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고 하며, 왕자의 난 이후에도 서로의 집을 찾아가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25] 다만 적대적 인수를 시도했던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나 정몽준 HD현대 총수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다. 유일하게 부딪혔던게 2009년 현대건설 인수전인데 이때 당시에도 현대차그룹 쪽에서는 어떠한 메세지도 내보내지 않았고 현대그룹 쪽에서 비방성 광고를 내보낸게 다였다.[26]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27] 아버지의 불같은 성격을 물려받은 걸로 보인다. 현대에서 몸 담았던 이명박 대통령은 정몽구 회장도 성격이 불같지만 형인 정몽필은 더 불같고 다혈질이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신입 사원 시절때 정몽필한테 많이 혼났다는 찌라시가 있다.[28] 정주영 모티브인 천태산의 차남.[29] 실제 이 당시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유니콘스 구단을 인수하려고 했으나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인수 대금으로 무려 900억 원을 부르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 대신 싸게 매물로 나온 해태를 인수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