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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덕

파일:무궁화장 약장.png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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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5074><colcolor=#FFFFFF> 윤한덕
尹翰德 / Yoon Han-deok
파일:00502913_20190207.윤한덕.jpg
본관 해남 윤씨[1]
출생 1968년 8월 8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2]
사망 2019년 2월 4일 (향년 50세)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6가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
사인 과로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의사, 공무원
배우자 민영주[3]
자녀 장남 윤형찬[4], 차남 윤형우[5]
학력 광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전남대학교 대학원 (의학 / 석사[6]·박사[7])
경력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겸임교수
前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종교 미상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응급의학과 전문의. 본관은 해남(海南).

2. 상세

1968년 8월 8일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율동리 용덕마을에서 아버지 윤재태(尹在台, 1932. 6. 1 ~ )[8]와 어머니 경주 최씨 최차남(崔次南, 1938. 10. 4 ~ )[9] 사이의 3남 4녀 중 장남, 늦둥이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만 4명 있었는데, 전남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해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가 태어난 뒤 윤동환(尹瞳煥, 1970. 9. 28 ~ )·윤정환(尹錠煥, 1970. 9. 28 ~ )이라는 쌍둥이 동생들이 뒤따라 태어났다.

1974년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재직하던 해남중앙국민학교[10]에 입학했다가 6학년 되던 1979년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 동구 산수동로 일가족이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광주충장중학교에 입학해 졸업했고, 1983년에는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분해해 조립하는 등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의과대학 점수가 남을 정도로 학업 성적이 좋아 본인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11] 그러나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고, 누나들도 당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므로 '집안에 의사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애초에 의학 공부에 뜻이 없었던 터라 의과대학 특유의 학습량이 버거워 본과에 진학한 뒤 1991년에는 중도 휴학하기도 했다. 또 호방한 성격이라 의과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이 얼차려로 오리걸음을 하랬는데 왜 이걸 해야 하냐며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고. 의예과 2학년 재학 중이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했으며, 1988년에는 의과대학 본과에 진학했다. 1991년 4월 29일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故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중 분신한 식품영양학과 박승희 열사가 5월 19일 세상을 떠나자 이를 추모하는 집회에도 참여했다.

1993년 전남대학교 본과를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94년 응급의학과 인턴 과정을 수료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1998년 복무만료로 군 복무를 마쳤고,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에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들어갔다. 2002년에는 중앙응급의료센터 응급의료기획팀장에 선임되었고, 2003년에는 이란 지진 구호를 위한 응급지원단으로 이란에 지원 파견되었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응급의료 지원 기본정책 수립에 참여했고, 또 2005년부터 2018년까지 주요 응급의료정책 기획에도 참여했다. 이 사이 2006년 스리랑카쓰나미로 피해를 입자 의료지원차 파견되었다.

2008년 보건의 날을 기념해 국무총리 표창을 수여받았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대한응급의학회 선임대의원에 선출되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는 대한응급의학회 이사를 역임했고, 2012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에 취임했다. 그는 중앙응급의료센터장으로 있으면서 이국종 아주대학교의료원 외상연구소장과 함께 닥터헬기를 도입하는 등 응급의료이송정보망 및 중증외상환자 이송망 체계 구축 사업에 착수하고, 전국 76개 중증응급질환 특성화센터를 구축했다. 또한 전국에 17개 권역외상센터를 설치하는 사업에 참여하고 응급의료종사자 전문화 교육에 앞장섰다.

사실 윤한덕이 초창기 의사 수련 할 때까지만 해도 현재 한국의 통념적 '응급실'은 없었다고 보면 된다. 각 과 인턴 레지던트 등이 당직 서면서 돌아가며 내려가보는 의료 사각지대에 가까웠고 KTAS 같은 공식 환자 분류 체계도 없어서 대형 재난이 터지면 병원 복도에 매트리스 깔고 누워 있다 죽기도 하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여러 사람의 노력이 있었지만 2020년 한국 병원 응급실의 틀을 구상한 건 윤한덕 중심의 일련의 그룹의 공헌이 맞다.

2014년 4월 16일 전라남도 진도군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나자 사고 피해자들을 위한 응급의료 지원을 계속 진행했다. 2018년 보건의 날에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같은 해 연말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사퇴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19년 2월 4일 설 연휴 중 사무실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정지로 사망하였다.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경기도 포천시 광릉 추모공원에 안장되었다.

같은 해 4월 7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고, 8월 13일 정부는 응급의료정책 발전에 힘써온 그의 공로를 인정해 그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했다.#

3. 여담

  • 응급의료의 위기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지하철 내 제세동기에 '심쿵이'라는 이름을 붙여 홍보했다고 한다.
  • 이국종의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이국종 교수와 교류가 있었던 모양. 이국종 교수가 그를 찾으러 갔을 때 그는 이국종 교수에게 "당신이 이러는 동안 환자가 갑자기 오면 누가 수술하느냐"라고 말하며 꾸짖었다고 한다.[12]
  • "자신이 응급의료 전반에 대한 정책의 최후 보루라는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일평생을 산" 평범한 영웅 윤한덕에 대한 이국종 교수의 기고다. 기고문
  • 2020년 2월 "의사 윤한덕 I, II"가 출간되었다.#
  • 2021년 2월 초대 "윤한덕 상"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선정되었다. #
  • 2021년 3월 초대 "윤한덕 응급의료발전 공로상"에 허윤정 교수가 선정되었다.#
  • 2023년 2월 제 2회 "윤한덕 상"에 인요한 연세대 의대 교수가 선정되었다. #
  • "윤한덕 응급의료발전 공로상"을 수상한 박윤형 교수가 2023년 10월 별세했다. #


[1] #. 호군공파(護軍公派) 28세 현(鉉)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2] 해남 윤씨 호군공파(護軍公派) 집성촌이다. 윤영일 전 국회의원과 독립유공자 윤옥하·윤창하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본래 율동마을과 한 마을로서 해남 윤씨 호군공 윤종(尹種, ? ~ ?. 1. 26)의 5대손 윤후강(尹厚綱, 1579. 4. 21 ~ ?. 11. 28)이 본래 전라도 해남현 화일면 시목동리(現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송산리 시목마을)에 살다가 율동마을을 개척한 뒤 윤후강의 차남 윤상은(尹相殷, 1607. 10. 14 ~ 1684. 4. 14), 3남 윤광은(尹匡殷, ? ~ ?. 1. 12.), 4남 윤취은(尹就殷, 1616. 3. 15 ~ 1681. 12. 9) 등이 이곳으로 옮겨 와 개척한 것이라고 한다.[3] 閔英珠. 1968년 12월 20일생. 여흥 민씨 민덕기(閔德基)의 딸이다.[4] 尹亨燦. 1996년 12월 18일생.[5] 尹亨尤. 2003년 3월 6일생.[6] 석사 학위 논문 : 생쥐 췌장내 inducible nitric oxide synthase의 발현에 관한 연구(1996).[7] 박사 학위 논문 : 흰쥐에서 DD-PCR 방법을 이용한 Na^(+)/HCO_(3)^(-)-Cotransporter 유전자의 동정(2003. 2).[8] 尹在라고도 한다.[9] 최원묵(崔元默)의 딸이다.[10] 2000년에 해남동초등학교 중앙분교장으로 격하되어 해남동초등학교 소속이 되었다가, 2004년 완전히 통폐합되어 결국 폐교되었다.[11] 지금은 전국에 있는 모든 의과대학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리과학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공학부, 전기정보공학부를 제외한 다른 자연계, 이공계열 학과들보다 입결이 높지만, 당시 이과 입시는 서울대학교 자연계, 이공계열이 지방대 의과대학들보다 높았다고 한다.[12] 이국종 교수의 일생의 좌우명인 "죽는 날 가져갈 것은 일생동안 치료한 환자의 명부다."를 말한 사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