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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리, 창조, 봉사를 교시로 하는 전남대학교의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도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과 덕망을 쌓고, 의학의 기본 진리를 탐구하여 질병을 예방, 치료함으로써 인류 복지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의사와 의학의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의학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교과 과정의 목적은 1차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와 창조적인 의학자를 양성하는데 있다. 설립 목적에 부응하기 위해, 2년의 의예과와 4년의 본과로 구성된 학사 과정 뿐 아니라,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위한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2. 역사
자세한 내용은 광주의학전문학교 문서 참고하십시오.의과대학은 1944년 광주의학전문학교를 전신으로 한 [age(1944-01-01)]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1]
그 배경에는 일본 제국이 일으킨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선에서 부상병의 응급 조치를 담당하는 하급 군의관 부족에 허덕이자 1939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일본, 조선, 만주 등지에 임시로 의학전문학교들을 설립한 것이었으나, 이전부터 의료 인력의 부족이 극심했던데다가 광주제중원[2]의 외국인 의사 인력을 추방하고 병원을 폐쇄해버려 지역 의료 상황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의 유지들이 나서서 도립광주의원을 모체로 한 의사 양성기관인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1936년부터 당시 마츠모토 전남지사가 조선총독부에 2차례 건의한 것을 계기로 지역사회가 꾸준히 광주의학전문학교의 설립을 건의했으며 여러 차례 거부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1940년부터 광주 의학전문학교 신설을 전제로 도립광주의원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로 하면서 현실화되었는데, 당시 상황이 시궁창인지라 말이 공립이지 100만엔[3]에 달하는 의학전문학교 설립 비용을 기부 명목으로 민간에다 떠맡기다시피 해놓고[4] 교사(校舍)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 몰수한 광주 수피아여학교[5]로 정하고 도립광주의원을 부속병원으로 전환해 광주의학전문학교를 공립(전남도립)으로 하는 1944년 3월 31일자 총독부 고시 617호로 설립 인가를 받아 광주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된 것이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시초이다.[6]
1944년 2월 17일 전남도립 광주의원을 광주의전 부속의원으로 개편하고, 조선인 48명, 일본인 54명 등 총 102명의 신입생의 제1회 입학식과 함께 1944년 5월 20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교직원은 교수 5명, 조교수 2명, 서기 2명이었다.
혼란한 시기에 설립된 광주의학전문학교는 운영 예산도, 비품도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전시 총력 체제였기 때문에 수업,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만무했다. 해방 이후에도 어려운 상황은 변하지 않아, 학병 징집, 징병을 피하기 위해 지원한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 및 교수들이 대부분 돌아가버렸고, 타지에서 온 학생들도 떠나면서 소수의 학생만 남은데다 교사(校舍) 마저도 미군정에 몰수되었다. 학교 건물마저 없는 채로 지금의 광주중앙초등학교와 광주여자고등학교를 전전하다 미군정과의 협의를 통해서 現 광주여자고등학교를 임시 교사로 사용하기로 하고 최상채 교장과 이종윤 박사는 교수진 영입에 힘을 쏟으며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망한 교수진을 많이 데려왔다.
연구 활동 역시 최상채 교장의 주도하에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정상화의 궤도에 올라서게 됐으나, 한국 전쟁으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학생들은 피난을 하게 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나마 전쟁의 직접적인 타격을 입어 초토화된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 비해 건물 피해는 크지 않아 수업 여건은 괜찮았지만, 이 기간 중 연구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한다. 가난한 정부는 재정난을 이유로 대구의학전문학교와의 통합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1940~1950년대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1952년에는 피부과 강의원 교수가 미국 타코마 병원으로 해외 연수를 간 것을 시작으로 교수 연수 계획이 시작되어 1회·2회 졸업생들이 1950~1960년대에 해외 연수 후 교수가 되어 연구를 했다.
1953년에는 의과대학 1회 졸업생들이자, 전남대학교의 1회 졸업생들을 배출해냈다. 1961년에는 본교 의대 박사 3명을 배출해냈다[7]. 한편, 5.16 군사쿠데타가 터져 교수들이 군대로 소집되어 다시 연구 활동이 위축되었으나 이내 재개되어 활기를 되찾았다. 1964년에는 교수들의 자비(自費)로 의대 잡지를 발간했다. 활발하던 연구는 1974년 대학원생 수료자만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제도가 변경되면서 연구생이 줄어들어 연구비 조달이 줄어드는 바람에 쇠퇴했다. 그러나 연구 장학금을 모아 해외 연수를 지원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하면서 극복해냈다. 1988년에는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에 이어 3번째로 영문 학술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1970년대~1980년대는 차관으로 기자재들을 도입해 이전보다 연구 수준이 향상되었다. 국립 의대이면서 긴 역사와 좋은 교수진을 보유해 인기가 높았으며, 현재도 거점국립의대로 선호도가 높다.
3. 부속병원
4. 학과
4.1. 의예과
4.2. 의학과
5. 여담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인 이필수 회장이 이곳 출신이다. 광주서석고등학교 졸업 후 이곳에 진학했다.[1] 함흥의학전문학교와 동시에 개교했다.[2] 現 광주기독병원. 서울의 그 제중원과는 다르다. 비슷한 예로 영남에도 제중원이 있었다.[3] 당시 기준으로 쌀 20만석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비용이다.[4] 이 어마어마한 비용은 상하이에서 비행기, 군함의 부속품을 생산하는 사업을 하던 손창식이 100만엔 전부 기부해 해결했으며, 천일고무 사장 김영준, 광주극장을 설립한 대지주 집안 출신 최선진 등 유지들도 총 10만엔 등을 기부해 일조했다.[5] 現 광주수피아여자중학교ㆍ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6] 지방 유지들에게 재원을 마련하게 한 총독부 당국은, 사실상 날로 먹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다만 건립 비용에 대한 부분은 사실 조선, 일본 할 거 없이 비슷했던 것이 일본에서도 각지에 제국대학을 설립할 때마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서 상당 부분은 해당 현 지역 주민이나 유지들의 기부금에 의존했었다. 1944년은 전쟁 말기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7] 당시 의학박사를 배출해낼 수 있는 학교는 서울대학교,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전남대학교, 연세대학교 정도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