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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문화자원스토리텔링 참조
1. 개요
光州醫學專門學校 (광주의학전문학교, 줄여서 광주의전)194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의학전문학교로 개설된 구제전문학교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 단과대학인 광주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전라남도의 국립종합대학인 전남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흡수되었다.
2. 역사
2.1. 태동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인 광주의학전문학교의 설립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에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에 의학전문학교는 관립 경성의학전문학교와 사립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그리고 지방 공립으로 평남도립 평양의학전문학교, 경북도립 대구의학전문학교 등 총 5개 교뿐이었다. 그런데 1936년 마츠모토 전남지사가 조선총독부에 광주에도 의학전문학교를 설치해줄 것을 두 차례에 걸쳐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광주의전 설립 움직임이 꾸준히 이어져 오다가 1944년 1월 10일 최흥종 목사와 현준호 호남은행 두취(은행장), 송화식 변호사, 그리고 아라키 도립 광주의원장 등을 중심으로 하는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위원회(위원장 전남지사)가 결성된다. 이와 아울러 최흥종 목사가 중국 상해에서 정밀기계공업으로 성공한 광주 연고기업인 손창식을 설득하여 1차로 20만 원, 그리고 현준호를 통해 2차로 30만 원, 도합 50만 원의 설립후원금을 찬조받았으며 이 밖에도 여수의 김영준 천일고무 사장과 광주의 최선진이 각각 10만 원 등 도내유지들의 크고 작은 협찬을 받았다. 이렇게 광주의전의 설립을 위한 재원이 마련되었다.2.2. 정립
조선총독부는 1944년 3월 31일자로 총독부고시 617호의 전문학교령에 의거 4년제 의학전문학교인 전남도립 광주공립의학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했다. 교직원 정원은 교수 5명, 조교수 2명, 서기 2명이었다. 조선총독부의 광주의전 인가는 지역 유지들의 힘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전상 환자들에 대한 의료인력 수급의 폭증에 따른 것으로, 당시 함흥의전도 광주의전과 함께 인가되었다.설립인가를 받은 광주의학전문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이후 줄곧 비어 있던 수피아여학교를 교사로 정하고 오하시 도립순천의원 원장을 초대 교장 겸 도립 광주의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광주의원 원장을 겸하게 한 것은 이 병원을 광주의전 부속병원으로 활용할 경우 1백 60만 원이 소요될 광주의전 건립비용을 60만 원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계획에 맞춰 1944년 2월 17일 전라남도립병원은 광주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으로 전환하였다. 설립 절차를 마친 광주의전은 학생을 모집했는데 의전이 인기 학과라는 인식 때문에 조선팔도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지망생이 몰려 치열한 경쟁 끝에 조선인 48명. 일본인 54명 등 102명의 학생을 선발, 1944년 5월 20일 개교식과 아울러 제1회 입학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