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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전
1.1.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조의 손자(차장손)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부친 의경세자가 요절한 뒤 어머니와 함께 궁을 나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했다. 봉호는 잘산군(乽山君)[1]이었다. '잘(乽)'이라는 한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글자로, 한자 그 자체의 뜻은 없고 단지 '잘'이라는 우리말 발음을 표기하는 용도로 쓰인다.[2]
1.2. 즉위
1469년에 삼촌 예종이 20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갑자기 족질(足疾)에 걸려 이른 나이에 승하하자,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자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는 권신 신숙주와 한명회를 불러들여 후계를 논하게 했다. 중요한 문제라 하여 흔히 심부름을 하는 내관들이 아니라 승지(丞旨)[3]들이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 과정이 여러 차례였다. 누굴 후계로 할지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을 했단 의미다.예종이 사망한 시간대가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인데, 자을산군은 당일 입궐해서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하루는 고사하고 반나절도 안 돼서 정희왕후가 통보하여 결정되었다. 경호팀에서 집으로 모시러 갔으나 이미 자을산군은 입궐해 있었다. 성종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좌리공신으로 책봉된 사람들 중 9명이 신숙주, 한명회, 최항, 홍윤성, 조석문, 윤자운, 김국광, 정현조, 권감인데, 위 아홉 명은 예종의 사망 소식을 듣자마자 승정원에 모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그중 정인지의 아들이자 세조의 사위 정현조 혼자 장모 정희왕후에게 명을 받으러 갔고, 정희왕후는 정현조에게 나머지 여덞을 들라고 했으며, 정현조는 이들을 다시 승정원으로 호출하러 왔다. 이들이 정희왕후가 있는 강녕전으로 가서 정희왕후를 뵈자 정희왕후가 이들에게 누가 좋겠냐 물었고, 이들 9명은 정희왕후한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은 어려서 안 되고, 월산군은 병약해서 역시 안 되다며 최종적으로 자을산군으로 결정했다. 자을산군이 왕으로 최종 결정된 것도 물론 고심은 있었겠으나, 시간상으로는 두세 시간도 안 걸려서 오전 중에 후딱 처리됐던 듯하다.
아무튼 결론은 이랬다. 예종의 차남으로서 법도대로라면 가장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제안대군은[4] 아직 4살이라 너무 어리고,[5] 의경세자의 장남 월산군은 맨날 콜록콜록하고 허약하니(실록상의 근거는 빈약함), 딱 하나 남은 차남 자을산군이 가장 능력도 출중하고 건강하다는 이유도 있었으며, 또한 당시 권신이었던 한명회의 딸(공혜왕후)과 결혼했다는 이유만을 근거로 들어 조선의 새 국왕으로 공식 지명되었다. 다만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13세라 아직 친정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탓에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할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성종은 예종이 죽은 당일에 바로 임금으로 즉위했다. 보통은 선왕이 죽어도 빈(殯)을 하면서 나흘에서 엿새 정도는 기다렸다가 새 임금이 즉위하였다.[6] 하지만 성종은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통상적인 관례를 깨고 부랴부랴 즉위한 것이다. 즉위할 때는 숙부 예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후 친부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였다. 이 부분은 본문 참조.
야사에는 인수대비(소혜왕후)가 둘째를 왕으로 삼으려고 술수를 부렸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인수대비가 예종을 죽이고 반란을 도모할 작정이 아니었다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소리이다. 다만 당시에 자을산군의 장인이 그 유명한 권신 한명회로, 예종 사후 왕위 승계에 영향력이 미치던 사람이기에 전혀 관련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또한 정희왕후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음에도 다른 손자, 그것도 장손이던 월산군이 아닌 차적손 자을산군을 즉위시켰음도 사실 매우 비정상적인 결정이다. 그렇다 해도 아직 팔팔한 20대의 예종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적장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수빈이 딱히 아들이 즉위하기를 기대했다기보다는, 살얼음판인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안전장치로 권신 한명회와 손을 잡아둔 것이 예종의 급사라는 급변사태를 맞아 대박을 쳤다고 봄이 자연스럽다.
사실 이 문제는 세조 이후의 왕통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논점도 겹친다. 장자는 양자로 보낼 수 없다는 종법을 생각하면 월산군은 예종의 아들 자격으로 즉위할 수 없으니 왕통은 자연히 세조 - 의경세자 - 월산군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 무소불위의 태종조차도 일단은 바지사장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세자가 되어 즉위했으니 이는 말도 안 되는 짓이었고, 결국 예종의 양자로 들어갈 자격이 있었던 사람은 의경세자의 차남 잘산군 단 한 명뿐이었다. 어찌 보면 예종이 즉위한 그 시점에서 월산군은 군주가 될 가능성이 완전히 제로가 됐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게다가 군주 수업도 전혀 받지 못한 두 형제의 상황을 감안하면 차라리 어린 잘산군 쪽이 대비의 수렴청정으로 시간을 벌면서 군주의 자질을 갖춰나가는 데 좀 더 유리하기도 했다.
2. 즉위 후
2.1. 치세와 치적
<colbgcolor=#bf1400> 성종의 업적을 짧게 압축한 KBS 〈역사저널 그날〉 영상 |
재위 7년(1476), 마침내 성종은 대왕대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직접 친정(親政)을 시작하여 세종대왕의 치적을 계승하여 조선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재위 5년(1474)에는 세종이 편찬을 시작했던 의례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재위 16년(1485)에는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의 헌법에 해당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7][8]을 완성해 반포했고[9] 성종 23년(1492년)에는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처리하지 못한 하위법을 《대전속록(大典續錄)》으로 편찬해 조선전기의 상위법-하위법 체계를 구축했다.[10][11]
법제작업을 넘어 문화사업도 대폭 이루어졌는데 성종 16년(1485년)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 성종 9년(1478년)에는 《동문선(東文選)》, 성종 18년(1487년)에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覧)》, 성종 24년(1493년)에는 《악학궤범(樂學軌範)》 같은 서적을 편찬해 조선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지리와 음악에 대한 자료들을 집대성했다. 이러한 문화융성의 면모는 세종대왕과 비슷한데 성종 14년(1483년)에는 세조에 의해서 사라진 집현전(集賢殿)을 대체할 홍문관(弘文館)을 새로 창설하고[12] 성종 7년(1476년)에는 독서당(讀書堂)제도를 시행해 채수, 성현, 유호인, 양희지, 허침, 권건, 조위, 이종준, 김수령, 김전, 노사신, 정난종, 성간, 신용개, 신종호, 안침, 어세겸, 이경동, 이달선, 이의무, 임원준, 최부, 최숙정, 표연말, 홍귀달 등의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세종의 공법에 기반한 양전도 세조때부터 시작되어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순으로 성종 2년(1471년) 성종 7년(1476년) 성종 17년(1486년) 성종 20년(1489년) 이렇게 각각각각 이루어져 성종때 완료되었고 성종 4년(1473년)에는 세조때 만들어진 경비식례횡간(經費式例橫看)[13]에 더해 공용조작식례횡간(供用造作式例橫看)[14]이 성종때 만들어짐으로써 조선전기의 재정(수입)-예산(지출) 시스템이 완성되었다.[15] 성종 1년(1470년)에는 공안(貢案)을 개정하는 것과 함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제정하고[16] 성종 3년(1472)에는 전세감납법(田稅監納法)을 제정해서 조세징수절차를 정비했는데,[17] 이는 조세징수의 자의성을 줄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성종 8년(1477년)에는 정군 143,400명 봉족 362,100명 총50만[18]에 달하는 군액총수(軍額摠數)가 집계될 정도로[19] 대민통제가 강화된 것과 궤를 같이해 성종 12년(1481년)에는 지방에서는 향·소·부곡(鄕·所·部曲)이 드디어 소멸하였고[20] 성종 19년(1488년)에는 유향소(留鄕所)가 부활되어 사족들이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성종 15년(1484년)에는 중앙의 성균관(成均館)에 성종 11년(1480년)에는 지방의 향교(鄕校)에 학전(學田)이 지급되었고 성종 14년(1483년)에는 관학재단인 양현고(養賢庫)가 독립해 관학을 지원하였으며 성종 10년(1479년)에는 과거제 또한 명경과(明經科)가 정비됨으로써 마감되었다.[21]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 소탕이나 명나라와의 사무역을 대폭 확대하였고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중계 무역을 활발하게 만들어 국력을 크게 진작시켜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왜관을 오가던 일본인들이 성종이 죽자 통곡할 정도로[22] 성종의 인망은 제법 국제적으로 퍼졌다. 이는 중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사신으로 왔던 동월 같은 사람들은 성종을 알현한 후에 깊이 흠모하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와 성종에 대한 미담을 전했고 이렇게 성종의 명성은 퍼져나갔다.[23]
더 나아가 세종대왕 이래로 개척된 4군 6진의 압록강 - 두만강 국경선[24]을 넘어 국경의 경계선을 산악 지형이 둘러싸고 평평하고 드넓은 농경지가 있는 야춘[25]과 훈춘[26]을 위시한 남만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려고 했으나 사림들의 반발과 조선의 국내 사정 때문에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만약 이 야춘과 훈춘을 위시한 '남만주 개척'이 성공하였다면 세종대왕에 이어 제2의 북진과 영토확장을 이룩한 성과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27]
한편으로 세조 시절 친위세력 위주의 정치[28]로 인해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대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재야에 묻혀있던 인재도 적극적으로 등용했는데, 세조에게 “사대부가 잡학(雜學) 따위를 익히면 쓰나요?”라고 했다가[29] 미움 받아서 중앙에서 밀려났던 김종직이 성종 시절에 중용된 대표적 인물이다. 이러한 인재 등용과 문화 발전으로 조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임진왜란 전까지의 체제와 문물이 사실상 성종 대에 정비되었다.
그러나 신하들이나 자신의 여자 관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부인의 질투와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었는데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그 유명한 어우동 사건이다. 성종은 어우동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나 정작 함께 어울렸던 남자들은 대부분 사면했다.
더욱이 대다수의 신료들도 반대한 재가녀자손금고법(재혼한 여성의 자손을 벼슬에 올리지 않는다)을 끝까지 억지로 통과시킨 것을 보면 성종의 여성관은 뚜렷하다.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 한 중국의 성리학자 정이(程頤)의 말을 인용해 과부의 재혼 제재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명시하여 법으로 규정했는데 이 법은 조선 후기까지 작용했다. 다만 일반 평민들은 재가녀자손금고법의 영향을 크게 받지 못했다. 19세기에도 민간에서는 재혼이 성행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일각에선 성종이 양반들의 권력과 머릿수를 통제하기 위하여 실시했다는 주장도 있다.
2.2. 폐비 윤씨 사사 사건
정비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3년상도 다 끝난 뒤 계비(두번째 왕비)를 들일 시기가 되자 성종은 따로 중전 간택령도 내리지 않고 후궁들 중에서 당시 임신 6개월이었던 숙의 윤씨를 왕비로 봉했다. 이후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원자(元子)를 낳는데, 그가 바로 연산군이다.하지만 아이를 낳자 성종의 관심은 다른 후궁에게로 향했다. 중전 윤씨가 질투를 숨기지 않아 성종과의 불화가 매우 커졌다. 윤씨가 후궁의 머리채와 멱살을 잡고 대판 다투던 중 이를 말리는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바람에 시어머니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야사(野史)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는데, 대비들 중에서 폐비 윤씨를 끌어내리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윤씨의 시할머니 자성왕대비였다. 더군다나 정희왕후를 비롯한 대비들은[30] 애당초 윤씨가 중전이 되는데 적극 찬동한 사람들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 항목 참조.
성종은 "당장 윤씨를 내쫓아라!"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임사홍이 눈물을 흘리며 "원자를 생각하소서!"라고 간하여 일단 윤씨는 중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후 임사홍마저 실각하면서 윤씨는 오히려 더 막 나가기 시작했다. 왕궁 내에서 독약을 상비하고 다니는가 하면 "주상의 발자취를 다 깎아버리고 싶구나!" 같은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는 등[31], 거의 반역에 준하는 패악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며느리를 겁낸 인수대비가 수라상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못하게 조치를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계속된 만행 끝에 윤씨는 결국 폐출되어 사가로 내쳐지고 만다.
폐비 윤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시어머니 인수대비가 후궁 귀인 정씨, 귀인 엄씨 등과 공모하여 허위 보고를 올려 성종으로 하여금 윤씨를 죽이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이다. 실록을 보면 저 일화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애당초 성종은 윤씨에 대해 사랑은 커녕 증오와 혐오만 남았기에 폐출된 그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었으며 이후에도 윤씨를 예우하여 달라는 상소가 올라와도 콧방귀나 뀌면서 무시로 일관하기 십상이었다. 윤씨의 집에 도둑이 든 것에 대해서도 '담장을 쌓아주고 이웃들을 조사하여 달라'는 상소가 올라와도 "지가 잘못해서 털린 걸 왜 나보고 난리냐? 그딴 논리면 나라에서 서울의 도둑맞은 집들은 다 고쳐줘야 하냐?"라고 비웃으며 쌩깐 것이 좋은 증거다. 또한 윤씨를 폐위시키기 무섭게 바로 윤호의 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시키는 등 윤씨의 흔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삭제해버렸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사의 정황을 자세히 보면 윤씨의 반성이니 그녀에 대한 참소(讒訴)니 하는 얘기는 설 자리가 더 없어진다. 윤씨의 친자이자 당시 세자였던 연산군의 나이가 어언 7살이 되자 경연(經筵) 중에 권경우 등에 의해 "명색이 한때나마 국모였는데 좀 곱게 대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는 의견들이 나왔다.[32]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죄를 지어 외방에 있었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생각한 것이 있어도 감히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지은 죄악이 매우 크므로 폐비하여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이니, 이제 무람(無濫)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떨어진 장막(帳幕)을 버리지 아니함은 말馬을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감히 무람(無濫)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至尊)을 위해서 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공급(供給)을 하여 줌이 좋을 듯합니다."
성종이 “경들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묻자 대사헌 채수와 영의정(영사(領事) 겸직) 한명회가 "지존(持尊)이 썼던 물건도 함부로 안 하는 법인데 배우자는 두말할 것이나 있습니까?"라며 윤씨에 대한 예우를 청했다. 한명회가 성종의 옛 장인임을 고려하면[33] 원칙론에 입각한 발언임에도 상당히 미묘한 발언이다.채수가 아뢰기를, “윤씨(尹氏)의 죄를 정할 때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이창신(李昌臣)과 더불어 궁내에서 나온 언문(諺文)을 번역하여 그의[34] 죄악상(罪惡狀)을 길이 후세에까지 보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윤씨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지존(至尊)의 배필(配匹)로서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인데, 이제 폐위(廢位)되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람없는 듯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누구라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공급되는 것이 또한 어찌 넉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폐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따로 처소를 정하여 공봉(供奉)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하니, 한명회는 말하기를, "신 등은 전일에는 이러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존께서 쓰시던 것은 아무리 미소(微小)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두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찍이 국모가 되었던 분은 어떻겠습니까?"
성종이 이에 빡쳐서, "네놈들은 윤씨의 신하냐 아니면 나의 신하냐? 윤씨가 나한테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느냐? 백성들이 윤씨를 불쌍하게 여겨? 어떤 새낀지 나오라 그래! 그리 불쌍하면 차라리 너네들 녹봉으로 예우(禮祐)를 하든가!?"라고 일갈(一喝)했다.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윤씨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당초에 그의 시비(侍婢)를 치죄(治罪)하였을 적에, 내 마음에는 폐비를 하고자 하였지마는, 대신(大臣)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참아서 중지하고 그가 허물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오히려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내가 삼전(三殿)에 품지(稟旨)하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폐출(廢黜)시켜 외처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느냐? 옛적에는 참소(譖訴) 때문에 폐비를 한 것이 있으니, 여희(驪姬)가 야반(夜半)에 운 것[35]과 같은 일이 이것이다. 나도 전고(前古)의 일을 약간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만일 국모(國母)로서의 행동이 있었다면 마땅히 국모로서 대우하였을 것이다.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는데,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이 어찌 무람없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元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윤씨가 나에게 곤욕(困辱)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딴 말을 하였겠는가? 또한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砒礵, 독약)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乾柿, 건시)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婢僕)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나는 당중종(唐中宗) 과 같이 됨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36] 지난번 삼대비전(三大妃殿)에 문안하였더니, 대비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윤씨와 비록 거처를 달리하고 있으나 마음은 편하다’라고 하셨다. 부모 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은 마당에 그대들의 마음만 유독 어찌 그러한가? 그대들의 말이 이러하니, 나를 당중종(唐中宗)처럼 만들려는 것이냐?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다.’[37]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내 나이 젊으나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는 알기 어려우니, 만일 일찍이 계책을 도모하지 아니한다면, 한(漢)나라 여후(呂后)나 당(唐)나라 측천 무후(則天武后) 같은 화(禍)가 없겠는가? 그러니 후일의 화를 미리 헤아릴 수는 없다. 공자(孔子)가 아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자 이(鯉)가 통곡하였는데, 공자가 그르게 여겼다. 원자(元子)도 효자(孝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미로 여기겠느냐? 비록 나의 백세(百歲) 뒤에라도 저를 어찌 감히 내가 거처하던 집에 살게 하겠는가?"
그러자 채수는 이에 대해"쫓겨난 어미라면 범인(凡人)들도 오히려 어미로 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다만 신 등은 특별한 처소에다 높이 받들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전 금(金)나라의 임금 양(亮)은 천하의 폭군(暴君)이었습니다. 금나라의 임금 옹(雍)이 즉위하였을 적에 양은 실지로 원수의 사람이었지마는 양의 후비(后妃) 도단씨(徒單氏)에 대하여는 또한 배고프고 헐벗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근자에도 이영(李瓔, 금성대군에 연류(連類)되어 죽은 화의군)과 이준(李浚, 구성군)은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외방(外房)에 추방을 하였지마는, 또한 그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윤씨도 유폐(幽閉)시키되 옷과 음식은 공급함이 좋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라고 하면서 윤씨에 대한 예우를 청했다. 이에 성종은 신하들한테 다음과 같이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윤씨의 죄악(罪惡)에 대하여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단죄(斷罪)해야 하겠지마는, 내가 참고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그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공봉(供奉)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그대들이 만일 그 가난하고 헐벗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녹봉(祿俸)으로써 공급하지 않는가? 윤씨가 궁(宮)에 있을 때에 항상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여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굶주리고 헐벗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그대들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아니면 이씨(李氏)의 신하인가? 나는 도통 알지 못하겠다. 이는 반드시 윤씨의 오라비 등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붕반(朋伴)을 인연하여 서로 퍼뜨려서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성종이 강하게 윤씨에 대한 적의(敵意)를 드러내 보이며 윤씨 때문에 통한하고 있다는 이 나라의 그 자들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신하들을 추궁한다.“그대들이 이르기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한(痛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을 낱낱이 말하겠는가? 내가 장차 의정부(議政府)ㆍ육조(六曹)ㆍ대간(臺諫)들을 불러서 물어보겠다. 그렇게 통한하였다는 자들이 과연 누구누구인가?”
이후 윤씨의 오빠들을 모두 가두라는 명령을 내린 후 즉시 의정부, 육조, 대간을 불러들인다. 뒤이어 이어진 대화에서 성종은 자기가 죽을 뻔 했고 참은지 오래되었다며 마침내 결심을 하고, 모든 대신과 논의 끝에 실행했음에도 불구, 이 신하들은 장차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의 비위를 맞추고자 모든 사람이 자기가 한 짓을 통한(痛恨)해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윤씨(尹氏)는 음흉함이 무쌍(無雙)하여서 화(禍)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간직한지 오래다. 화를 일으키려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독약(毒藥)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하여, 항상 이르기를, ‘내가 장차 볼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대하기를 어찌 노예처럼 할 뿐이겠느냐? 내가 일찍부터 참고 참으면서 결단하지 못하다가 부득이하여 위로 종묘(宗廟)와 삼전(三殿)에 고하고 아래로 대신(大臣)들과 의논한 뒤 폐비(廢妃)하여 외부(外部)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인심(人心)에 통한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니, 내가 참으로 통분하다. 이는 곧 전적으로 자손(子孫)의 즐거움만을 돌아보고 당시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서 간사한 사람들에게 아부하여 장차 큰 화(禍)를 이루려는 것이기에 내가 더욱 통분하게 여기는 것이다. 내가 다행히 종묘와 사직의 음우(陰佑)하여 줌을 입어서, 죄지은 사람이 죄를 받게 되고 내가 다행히 당(唐)나라 중종(中宗)처럼 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니 나의 뜻을 말로 다할 수 없는데도 나라 사람들이 과연 모두 통한하게 여기는가?
그날 이 소식을 들은 대비전(大妃殿, 안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곧장 편지를 조정에 보내왔는데, 여기서 윤씨의 악행이 좀더 구체적으로 열거된다.이제 권경우(權景祐)의 일을 듣고서 매우 놀랐다. 윤씨는 정유년 3월에 죄를 지었었는데, 그 때 재상들이 내보내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윤씨는 자신을 요동(搖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여 더욱 포악(暴惡)하여져서, 우리한테는 그만두고라도 주상(主上)에게까지 불순(不順)한 일이 많이 있었다. 부부(夫婦) 사이의 일은 다 말할 수도 없고, 혹시 다 말하게 되면 이는 사람의 정리가 아니니, 그것을 믿고서 듣겠는가? 부녀자가 불순함은 칠거(七去)에 든다고 한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의 여자인들 어찌 이처럼 하겠는가? 만일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責望)을 하면, 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 눈으로 노려보니, 우리들이 명색은 어버이인데도 이러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주상에게는 패역(悖逆)한 말까지 많이 하였으니, 심지어는 주상(主上)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또 스스로 ‘상복(喪服)을 입는다.’ 하면서 여름철에도 표의(表衣)를 벗고 항상 흰 옷을 입었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내가 오래 살게 되면 후일에 볼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그가 어린 원자(元子)가 있기 때문에 후일의 계획을 한다는 것이니, 우연한 말이 아니다. 우리는 시운(時運)이 불행(不幸)하여 이렇게 좋지 못한 일을 만났으니, 늘 탄식하고 상심하여 세월이 가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런데 저는 스스로 다행하다고 여기면서 무릇 음흉하고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낱낱이 다 들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주상의 몸을 소중하게 여길 뿐이지 어찌 우리들에게 불순한 것을 생각해서이겠는가?
즉, 최초의 폐비 시도가 무마된 후 윤씨는 근신처분을 받고 있을 때에도 반성은 커녕 되레 더 포악해졌다는 것. 대비전에서 보내온 편지에 열거된 윤씨의 악행을 보자면 그녀는 대비들이 꾸중을 하면 무서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손으로 턱을 괸 뒤 성난 눈으로 노려보고, 성종의 발자취를 없애버리겠다는 발언을 하는 걸 넘어서 성종이 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항상 상복처럼 흰 옷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오래 살아서 원자가 크면 어찌되나 나중에 두고보자며 주변 사람들한테 보복을 암시하는 발언까지 하고 다녔다. 이를 보여준 뒤 성종은 변명하는 채수에게 “감히 이와 같이 강경(强勁)할 수 있는가?”, “대사헌(大司憲)은 누구의 신하인가?” 라며 강하게 질책한다.다음날 8월 12일, 성종은 경연(經延)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온다. 비상(독약)을 갖고 상비하고 다닌 일, 자신의 발자취를 없애버린다는 소리를 하고 다닌 일, 그리고 자기가 머문 곳에 펼쳐진 장막을 두고 시체를 싸는 소장(燒帳)이라고 한 일, 그리고 상복(喪服)이라며 흰옷을 입고 다닌 일을 재거론 한 뒤, 윤씨가 가난하다고들 그랬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서 신하들을 질책(叱責)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씨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후일 볼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볼 만한 일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가 없다.
그 뒤 윤씨의 사저에 생활비를 대주자고 최초로 진언(振言)한 대사헌 채수와 권경우를 다시 불러 "윤씨를 특별한 처소에 거처하게 하지 아니하면 나라의 일이 장차 날로 그릇될 것이다."에서 대체 뭐가 그릇되는 것인가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따지고, 감히 자기를 업신여기는가 하면서 강하게 질책(叱責)한다. 그 뒤 이 둘을 그대로 심문장에 내려보내 다섯가지 죄를 캐라고 하였다.1.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죄가 큰데 몰래 훗날의 계획을 품고서 도리어 특별한 처소에 두자고 진언한 사유
2. 종묘(宗廟)에 고한 뒤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서 정한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것을 들어 여러 방면으로 구제하여 살리려 하니, 무슨 일을 하려고 함인지의 사유
3. 윤씨의 죄가 큼에도 몰래 도우려고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搖動)하게 하는 사유
4. 법관(法官)의 장(長)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출입을 하고 족친(族親)들이 출입하는 것도 금지시키지 아니한 사유
5. 임금이 위에 있음은 생각지 않고 먼저 죄인이 누추한데 있는 것만 불쌍히 여김으로써 은덕(恩德)을 저버리고 의리를 잊으면서까지 악을 구제하려는 이유
그러면서 심문장에 끌려온 채수를 보고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통한(痛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는데 대체 그 통한해 하는 신하와 백성이 누구누구냐고 계속 다그쳤다. 이에 채수와 권경우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계속 발뺌한다.
‘〈나라 사람들이〉 통분한다.’는 말은 신이 아뢴 바가 아니며, 다만 조정에서 모두 마음에 미안(未安)하게 여긴다고 말하였습니다. (채수)
‘나라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긴다.’는 말도 신이 아뢴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나라 사람들이 마음에 미안(未安)하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권경우)
이틀 뒤 이어진 국문에서도 이들은 "나라 사람들이 통분(痛憤)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신하들이 미안하게 여긴다고 했을 뿐이라 주장했는데, 성종이 채수에게“그대가 그날 아뢰기를, ‘나라 사람들이 마음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다.’ 하기에, 내가 묻기를, ‘누구누구가 마음 아파하느냐?’ 하니, 그대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마음 아파하는데, 뉘라서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래도 이 말을 그대가 실로 아뢰지 않았다고 하느냐?”
즉, 자기가 뻔히 들었고 반박까지 한 바인데 거짓말을 하느냐며 따지자 채수는다만 그날 천위(天威)가 엄중하시기에 심신(心神)이 착란되었으므로, 계달(係達)할 사연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성종의 위엄(威嚴) 때문에 잠시 정신착란이 일어난 거 같아 기억 안난다고 둘러댄다. 그러자 성종은 들은 체도 안하고 다시 "“그대가 말한 가운데 ‘나라 사람들이 통한한다’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라고 묻는데, 채수는 자기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버틴다. 그래서 성종도 더는 심문을 하지않고 채수를 집으로 돌래보낸다.이틀 뒤 마침내 성종은 윤씨를 사사(賜死)하라는 명령을 내려 윤씨에 대한 사형을 지시했고 놀란 신하들이 와서 반대한다. 하지만 성종은 윤씨의 사형을 강하게 주장하며 굽히지 않았고 이때 대비전에서 편지가 전달되었는데, 여기서 발자취를 없앤다는 발언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윤씨가) 주상(主上)에게 말하기를, ‘그 눈을 빼고,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며, 그 팔을 끊어버리고 싶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말들을 어찌 이루다 말하겠습니까?
한 마디로 성종이 윤씨의 발언을 그대로 공개하면 망신스럽기 때문에 발자취를 없앤다고만 하는 내용으로 순화했지만, 실제로 윤씨가 성종에게 퍼부은 폭언에는 "눈을 빼고 팔을 끊는다."라는 더욱 험악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성종은 사사하면서 이유를 열거하는데, 윤씨가 살아있는 한 이런 얘기가 또 나올 것이며, 윤씨가 살아있고 윤씨의 아들인 세자가 계승하면 자신이 죽은 이후에 조정이 고요할 리가 없다 하자 신하들도 더는 반대할수가 없어 성종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성종은 이세좌를 보내서 윤씨를 사사(賜死)시켜 버렸다. 《성종실록》의 1482년 8월 11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윤씨는 8월 16일에 사약을 받고 처형된다. 성종이 자신의 짧은 수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725)(註 725)(기해년 : 1479 성종 10년.) 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726)(註 726)(발호(跋扈) : 세력이 강해져 제어하기 힘듦.) 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727)[38] 은 죄가 없는데도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임자 1번째기사
그리고 추가로 베푼 예우라 해봐야 군인들을 보내 관 나르는 것이나 돕게 하고, 4년 후 무덤이 무너져 여우와 삵들이 몰려와 뼈를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기에, 무덤 보수와 사당 건립을 허용한 정도이다. 다만 윤씨의 행위를 보면 반역이나 다름없어 연좌제로 가문을 멸족시키고 무덤도 만들지 못하게 할 수 있으며 세자까지 바꿔버릴수 있으며 사형도 사약이 아닌 다른 형벌로 처형할수 있지만 성종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엄청난 자비를 베풀어준 것이다."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725)(註 725)(기해년 : 1479 성종 10년.) 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726)(註 726)(발호(跋扈) : 세력이 강해져 제어하기 힘듦.) 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 부인(鉤弋夫人)727)[38] 은 죄가 없는데도 한 무제(漢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성종실록 144권, 성종 13년 8월 16일 임자 1번째기사
한편 폐비가 사사된 후 채수는 옥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상소를 올렸고, 그 후 채수와 권경우는 '자신들이 만 번 죽어도 부족한 죄를 지었다'며 성종에게 싹싹 빌었다. 이에 성종도 두 사람의 죄는 크지만 늦지 않게 죄를 뉘우쳤고, 지난 공이 크다는 걸 감안하여 두 사람을 사면하는 것으로 채수와 권경우에 대한 처분은 끝냈다.
2.3. 유교 정치의 실현
성종 치세는 총 3개의 기간으로 나뉜다. 1기는 수렴청정과 세조 때 임명된 수많은 공신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원상제(院相制)[39]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시기다. 이때 대신의 세력이 세조 이래로 최고점을 찍으며, 정난(靖難)[40], 좌익(左翼)[41], 익대(翊載)[42], 좌리(佐理)[43] 공신 1등인[44] 한명회를 1등으로 훈구 세력이 등장한다.허나 김범 저(著)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에서 지적하듯이, 사화(士禍)는 좀 더 정확히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 아니라, 대신(大臣)과 대간(臺諫)의 대립이었다. 1970년대 식민사관 탈피를 목적으로 역사연구가 활발해졌을 때, 사학자들이 사화를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라 규정하였으나, 같은 집안에서 배출된 대간과 대신이 서로 대립하였다는 것을 볼 때, 특정 집안이나 학파의 갈등이라기 보단, 해당 직무의 역할과 권한의 대립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하다.
2기는 성종 7년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 시기에는 원상제를 혁파하고, 경연에서 대신의 참여를 줄이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대간(臺諫)을 적극 활용해 대신을 견제하였고, 실제로 큰 소득을 얻었다. 세조 이후 왜곡되었던 조선의 여러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대간의 권세와 영향력이 커지면서 국정에 있어 새로운 폐단이 드러났으니…
3기에는 성종은 이를 인식하고 지나치게 커진 대간의 세를 누르고, 위축된 대신의 입지를 늘리는 데에 집중했다. 이는 대간의 권세가 커지면서 근거 없이 상대의 인격을 문제 삼아 대신을 탄핵하였고, 영의정마저도 대간이 무서워 국정 운영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렸으며 왕에게도 무례한 발언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종은 경연에서의 대신 참여 비중을 높이고 대간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성종 본인이 요절해버리는 바람에 근본적으로 그 폐단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2.4. 문약(文弱)해진 군사력
사실 폐비 윤씨, 사림파 등용[45] 등에 묻히기 쉬운데, 성종 때는 세종 시절부터 시작된 세병제의 붕괴로 인해 초기에 강력했던 조선의 군사력이 무너지고 있었고, 할아버지인 세조 시절의 군재개편으로 양적으로는 종전보다 거대해지긴 했지만, 질적 하락은 피할 수 없었다.일단 성종 시기 기록에는 "병조(兵曹)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는데, 경중(京中)은 정군(正軍)이 2824명, 봉족(奉足)이 2920명이고, 황해도(黃海道)는 정군이 9817명, 봉족이 2만 7471명이고, 평안도(平安道)는 정군이 1만 9336명, 봉족이 5만 2231명이고, 경기(京畿)는 정군이 8956명, 봉족이 2만 1180명이고, 개성부(開城府)는 정군이 696명, 봉족이 1521명이고, 충청도(忠淸道)는 정군이 2만 3780명, 봉족이 5만 1664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정군이 3만 5517명, 봉족이 9만 4810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정군이 3만 4044명, 봉족이 8만 949명으로, 총계하면 정군이 13만 4973명, 봉족이 33만 2746명이었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부상의 숫자로, 전기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정군이 8교대로 번상하는 제도였기 때문에, 정군의 수를 8분의 1로 나눈 수가 실제로 복무하는 병사의 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1만 6871명 정도가 실제로 복무하는 군인 수였다. 이것에 더해 방군수포제가 세종 때부터 나타나서 시간이 지날수록 심각해져서 실제 병사의 수도 줄어갔으며, 질적인 문제 역시 당대에도 자주 문제시 될 정도로 심각했다.
다만 성종 20년(1489) 강무[46]에 대한 기록 중에 "올 가을 강무(講武)하는 군졸 2만 5천에 치중(輜重) 을 아울러 헤아리면 그 수가 6, 7만이나 되니,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진 정벌도 아니고 시베리아호랑이, 아무르표범 같은 짐승들을 잡는 군사훈련 목적 사냥 대회에 동원된 수가 비전투병까지 합쳐서 6, 7만이나 될 정도였으니 만약 성종시기 임진왜란 같은 대규모 외침이 있었다면 실제로 수십만 대군을 동원했을 여력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윤필상[47]도 장수들이 진법을 모르고 있다며 상소를 올려 장교들의 자질이 떨어지기 시작한것이 드러났고, 성종 때 왜구 토벌 성과가 약해지고, 보루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6진이 약해졌고 병선을 조운(漕運)으로 쓰는 등, 군사력이 약해지는 현상들이 계속 나타났다.[48]
성종의 업적으로 꼽히는 1491년(재위 22년) 여진족 토벌(신해북정)은 그 내막을 자세히 보면 심각하게 어이가 없다.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병사 2만을 모았는데, 대간(臺諫)은 군량이 부족한 초겨울이라며 이에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허종에게 토벌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허종이 이끄는 토벌대 2만에 보인 2만은 여진족 토벌을 위해 출정했는데, 정작 만난 여진족들은 200명. 게다가 전과도 형편없어서 조선군은 2만임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8명을 상대해 3명을, 기습한 여진족 200명을 상대해 4명을 죽였다. 불과 수십 년 전 세종 때 1만 5천으로 170여 명을 죽인 전과와 비교하면 너무나 처참하다. 하다 못해 세조 때는 여진족 200여 명과 여진의 수괴 이만주도 죽였는데 말이다.
단, 이때는 여진족이 세종, 세조 때와는 달리 더 조직화되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특히 허종의 조선군 2만이 여진족의 마을에 쳐들어갔지만, 정작 여진족 마을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49] 그래서 조선군은 거기에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진지를 세웠으나, 여기서도 문제가 발생했는데 계획이 틀어진 탓인지 조정에서 군량을 제대로 보급해주지 못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얼어 죽고 군량이 부족해 아사하고 탈영이 일어나는 막장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50]
결국 허종은 철수하더니 문책이 두려워 전과(戰果)를 위조했다. 그래서 대간이 허종의 논공행상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것과 비슷한 제2차 대마도 정벌은, 승리라고 보기엔 애매하긴 해도 왜구를 많이 잡았으며, 왜구들의 침략을 많이 완화시키는 성과라도 있었는데, 성종의 여진족 토벌은 그런 것도 없었다. 결국 이때의 원정 실패 이후 성종의 위신은 타격을 받아 이후로는 조선이 대규모 원정을 쉽게 단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문약해진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성종 시기 조선도 당시 주적이었던 여진족들에게는 여전히 강대국으로 비쳤다. 실제 여진족들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려 이를 입증했다는 기록도 실록에 있다.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평안도 도원수(平安道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을 인견(引見)하였다. 이극균이 아뢰기를,
"들으니, 올적합(兀狄哈)[51]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52]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성종실록 성종 24년(1493) 3월 14일 3번째 기사#
여진족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이후 해당 올적합 토벌에 대해 귀화한 여진족인 동청례(童淸禮)가 강성하던 금나라도 못한 일[53] 이라며 여진족들을 회유했던 근거로 써먹은 기록이 있다."들으니, 올적합(兀狄哈)[51]은 항상, ‘조선(朝鮮)이 아무리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울지현(蔚地峴)을 넘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는데, 이번에 북정(北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 위엄을 보이고, 또 고산리(高山里)에서 참획(斬獲)이 매우 많자 오랑캐들이 서로 말하기를, ‘올적합도 저렇게 제압당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52]하면서, 이에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하기를, ‘다시는 조선과 흔단(釁端)을 만들지 않고 영구히 신복(臣服)하겠다.’고 하고서는 그로부터 감히 강가에서 사냥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니,
성종실록 성종 24년(1493) 3월 14일 3번째 기사#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역시 믿을 수 없으니 내가 한 마디 말을 하고 싶은데 대인이 싫어하지 않겠소? 지금으로부터 화와 복이 전적으로 대인에게 달려 있소. 지금 나를 따라온 군졸(軍卒)이 자못 많아 그 도로의 험하고 평단한 것을 모두 역력히 알았으니, 국가에서 만약 공격을 하려면 그 형세가 매우 용이하오. 대금(大金)은 바로 우리 원조(遠祖)로 그 강성함이 더할나위 없었지만, 올적합(兀狄哈)을 치려 하되 마침내 얻지 못했습니다. 근년에 올적합이 우리 동북 변방을 침범하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께서 대군을 일으켜서 정벌하여 그 가옥을 불태워 탕진시켜서 편안히 살 수 없게 하니, 올적합이 사방으로 흩어져 제종(諸種)의 야인에게 종이 되고 말았소. 대인(大人)도 일찍이 듣지 못했소?’ 하니, 달한이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연산군일기, 연산 3년(1497( 10월 7일 2번째 기사#
연산군일기, 연산 3년(1497( 10월 7일 2번째 기사#
정리하자면 개국 초기의 성세에 집권한 성종시대는 국역체제의 모순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병역을 위한 인적자원의 동원과 유지에는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실제로 성종시대는 조선역사상 최대규모의 군사원정이 이루어진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물질적 뒷받침과 이를 활용할 인적자원의 숙련도와 그에 대한 관리 체계가 낙후되어 가던 시기라 보면 될 것이다. 말하자면 북정은 갔는데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병력은 규모만 많았지 그 역량은 문제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타개할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는 못했고 이후 십수 년간 외침 없는 시대 속에서 군역은 요역화되고 병선은 조운선이 되어갔다. 더 이상 세종시대와 같은 실질적인 인적, 물적 방위력의 증강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2.4.1. 건주위 정벌 파병
성종 당시 명의 최고 권력자였던 왕직(汪直)은 여진족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건주위에 대한 정벌을 직접 주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명은 조선에 원군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1479년(성종 10) 10월, 본격적으로 명이 건주위를 정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오자 조선 조정에서는 파병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대립하였다. 성종은 평안도의 흉년, 건주위의 험한 지형, 여진족들의 조선에 대한 경계 등의 현실적인 조건을 감안하더라도 사대의 명분상 거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중히 여겨 정창손(鄭昌孫), 한명회 등의 의견에 따라 우찬성(右贊成) 어유소를 대장으로 하는 1만 명의 출병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승문원참교 정효종(鄭孝終)이 이번 토벌은 명과 건주위의 싸움이므로 조선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상소를 올리고, 이에 따라 찬성론자들도 동요하는 등, 반대 의견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명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지 않고 출병을 결정했다. 대신 출병 시기를 최대한 늦추면서 명과 건주위의 싸움이 전개되는 형세를 파악하고, 정벌할 때도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지 말고 형세를 파악하여 병력을 보존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을 지시하였다.
정벌군은 10월 말에 출발하려 했으나, 압록강이 얼지 않아 기병을 이끌고 강을 건널 수가 없었으며, 얼음과 눈 때문에 적유령(狄踰嶺)을 넘을 수 없어 원정을 중지하고 파진(罷陣)하였다. 이에 대해 성종은 형세의 불가피함을 인정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정승들이 명에서 의심할 가능성을 제기하여 일부 병력만 동원한 재출병을 주장하였다. 성종은 일단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은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재출병을 결정하였다. 12월 9일 좌의정 윤필상이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서, 13일부터 실전에 돌입하여 950명의 병력으로 여진족 15명을 참수하고 1명을 사살하였으며, 중국인 7명을 구출하고 부녀 및 아이를 15명 생포함과 함께 가옥을 불지르고 가축을 쏘아 죽이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없었다. 비록 명군이 이미 정벌하고 돌아간 뒤이고 전과 자체도 소규모였으나, 큰 손해 없이 명군에 협조했다는 명분은 세울 수 있었다.
2.4.2. 니마차 올적합 원정(신해북정)
건주위 정벌 이후에도 여진족의 조선 변경 침입이 간간이 일어났는데, 특히 거듭된 정벌로 인해 조선에 앙금이 남아 있던 건주위 여진족들이 조선의 변경 침입에 적극적이었다. 1491년(성종 22) 1월에는 올적합 여진족이 1천여 명의 병력으로 영안도(永安道)의 조산보(造山堡)를 포위하고 성까지 넘어 공격해 들어와 경원 부사 나사종을 죽이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상황이 발생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기 2천여 명에 달하는 야인이 평안도의 창주진(昌洲鎭)을 포위하였다가 조선군에 의해 곧바로 격퇴되었다. 동북쪽과 서북쪽에서 대규모의 침입이 동시에 있었던 셈이다.이러한 상황속에서 성종은 영안도 지역에 대한 올적합의 침입을 더욱 중시하여, 이에 대해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특히 동북방의 여진족 중 가장 강력하고 약탈을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니마차(尼麻車) 올적합이 정벌의 대상이 되어 2만 명이라는 조선 전기 사상 최대의 원정군을 동원한 정벌 계획이 성종의 주도로 추진되게 된다.
사실 성종의 대규모 여진정벌군 편성에는 1491년 정체를 알 수 없는 올적합들이 경흥의 조산보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경원부사 나사종을 죽인 사건이 원정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성종은 크게 분노해서 이 올적합들을 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올적합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밝혀내지 못해서 지금까지 조선을 공격하던 니마차 올적합의 소행으로 일단 추정하고 2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니마차 올적합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당시 대간은 너무 많은 병력을 동원한다고 반대했지만 성종은 이를 무시하고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로 임명하여 5월 15일에 2만의 군대를 내려보냄으로써 정벌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허종이 이끄는 2만 명은 10월 15일 두만강을 건넜고, 소규모 교전을 하면서 23일에 여진족의 본거지에 들어갔다. 문제는 2만의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해서 15일치 식량밖에 준비하지 못했다. 이후 2만 명의 조선군은 니마차 올적합의 본거지를 공격하지만 문제는 니마차 올적합이 이미 조선의 대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본거지를 싹 다 비우고 전부 다 도망친 후였다.(...) 결국 조선군은 여진족을 포착하는 데는 실패하여 여진족들의 마을들을 모두 불태우고 귀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때 올적합의 여진족 기병 2백여 기가 철군 중인 조선군을 습격하였지만 조선군은 별 피해없이 올적합을 물리친다. 여진족 병력 대부분이 갑옷을 입지 않았고 그 중 태반이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추격하기 어려운 험지로 도주하여 결국 9개의 수급만 확보한다.
비롯 성과는 적었지만 니마차 올적합에 분명 타격을 준 원정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조산보를 공격했던 올적합들의 정체가 밝혀지는데 바로 도골 올적합이 조산보를 공격한 주체라고 밝혀진 것이다. 원정의 성과가 미미한데다가 오해한 것이 밝혀지자 성종의 위신은 당연히 타격을 받았고 이후로는 그 이전 만큼 원정을 대규모로 추진하지 못했다.
2.4.3. 간도(훈춘시) 개척 시도
고려의 여진 정벌의 실패 이후 함경남도병마절도사인 '여자신'이 조정에 직접 와서 성종에게 야춘(현재 연변 조선족 자치주 훈춘시의 방천지역)과 훈춘(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을 위시로 한 남만주(지금 현재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해당) 지역 일대에 대한 개척을 주장하여[54] 이에 성종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여자신과 성준 등에게 명해 연변 일대에 있는 고구려, 발해 시대의 장성들을 조사하게 하고 동시에 장성 축조 사업 또한 시작하게 했지만 앞서 있었던 여진정벌의 참담한 실패 때문인지 곧바로 삼사를 장악한 사림 세력들이 "공사는 민력을 고갈시킨다"며 조정에서 공론(여론)을 형성해서 거세게 반대하는[55] 바람에 결국 개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만약 이 '간도 개척'이 실제로 성공하였다면 4군 6진을 개척한 세종대왕에 이어 제2의 '북진'이자 '영토 확장'으로 크게 칭송 받았을 것이며 구한말 고종 때의 간도 점유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서서 간도를 점유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척이 중단되면서 성종 이후 고종대까지 조선의 '간도 개척'은 수백년간 미루어지게 된다.
당시 성종이 개척하려 했던 간도는 이미 여진족의 터전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원정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개척'을 하러 온다면 여진족 또한 도망가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뭉쳐서 저항하기 시작했을 것이기 때문에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단, 이런 식의 군사적 충돌은 원정 때마다 조선군을 피해서 재빨리 도망치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던 여진족들을 멀리까지 뒤쫓아야만 했던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은근히 바라던 상황이기도 했다.
비록 개척을 중간에서 중단하고 말았지만, 그 전에는 여진족을 정벌하면 곧바로 회군하는 것이 다였는데, 성종 때의 남만주 개척 주장은 이와 달리 아예 관리를 보내 완전히 개척하여 '정복'할 것을 처음으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사례라고 볼 수 있다.
2.4.4. 삼봉도 개척 시도
그의 치세 기간에 백성들이 동해 바다에 있다는 신비한 섬인 삼봉도(三峯島)로 잇달아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삼봉도에 대해서 간략히 요약하자면, 그 길이가 거의 천 리에 이르고 1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 수 있으며, 농사를 지을만큼 비옥한 땅이 넓은 곳이라고 한다. 성종 임금은 조정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이 삼봉도로 도망친 백성들을 다시 데려오는 송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고, 그 중에는 아예 군대를 보내 삼봉도를 점령하여 정식으로 조선 영토로 편입시키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삼봉도가 너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반론 때문에 포기된 일도 있었다.한편, 삼봉도에 직접 갔다온 사람들이 성종 임금한테 그 섬에 관한 일을 알리는 내용도 실록에 적혀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삼봉도라는 섬 자체는 실제로 있었음이 확실하다. 성종은 삼봉도를 찾기 위해 경차관 박종원을 중심으로한 수색대까지 보냈으나 울릉도를 갔다 왔을 뿐 명확히 삼봉도를 찾지 못했다.#,# 이후 함경도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명확하게 찾지는 못했다.#,# 이후 영흥 사람 김자주가 삼봉도를 갔다와서 지도까지 그려온 것으로 삼봉도의 실체는 확인하게 된다.# 한편 삼봉도에서 온 사람의 계본으로 그들이 관에 저항한다라는 말까지 듣고 함경도(영안도)쪽에서 삼봉도를 토벌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성종은 삼봉도 사람들이 나라를 버리고 도망갔다며 초유해보되 말을 안 들으면 토벌할 생각을 굳게 다지고 전함까지 만들게 했다.# 또한 성종은 삼봉도 사람들을 초유하는 유시까지 발표했으나# 이후에는 삼봉도를 명확히 찾지 못하고 조선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삼봉도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역사학자들 간의 논란이 분분한데, 울릉도라는 주장과 일본 홋카이도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56] 강원도의 해중에 삼봉도라는 섬이 있다는 실록의 기록을 봐서는 가까운 울릉도일 가능성이 높은데# 울릉도는 이미 알고 있는 섬이었고, 이후 함경도 쪽에서 찾으려고 노력한 정황히 많기 때문에 삼봉도의 실체는 여전히 미지수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록에서 지속적으로 함경도쪽 주민들이 간다는 얘기가 나오고 경원에서 배 타고 3일을 가니까 도착했다는 증언들로 볼 때 블라디보스토크 앞에 있는 루스키 섬이 삼봉도가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함경도 북쪽에서 루스키 섬까지는 대충 150km 정도 되는데 당시 연안항해 수준을 볼 때 3일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루스키 섬에서 산 같은 거를 꼽으면 루스키흐, 글라브나야, 첸트랄나야로 3개 정도인데 대충 멀리서 훑어보고 산이 세개니까 삼봉도(三峯島)라고 부른 게 아니냐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추측은 길이가 천리에 이른다고 한 삼봉도와 달리 루스키 섬은 울릉도보다 약간 크다는 점이 걸린다. 하지만 당대에는 넓이나 길이를 정확히 재지 않았던 데다가 크게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추측하기 나름. 링크
이 삼봉도 이야기는 성종 이후로도 계속 조선 사회에 전해내려왔고 링크, 숙종 이후로 조선 사회를 반란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해도진인(海島眞人)[57]설의 기원이 되었다.
2.5. 대간의 득세
성종 하면 단연 사림(士林)을 어엿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시킨 인물이고, 김종직을 비롯한 이들을 중용했으며, 대간(臺諫) 세력을 크게 키워 조선식 비판 정치를 활성화시킨 인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키운 대간 권력에 의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으로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다.[58]조선 초만 해도 대간은 미래의 대신들이고 대신들은 과거의 대간들로, 이해 관계가 상당 부분 일치해 정계와 언론계가 유착해서 초장부터 싹이 노랬다. 세조 때는 정청(政廳)에서 관이 벗겨지고 상투를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대우가 매우 처참해서 거의 구실을 못 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종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간을 채웠고, 유명무실해진 사헌부, 사간원의 권력을 회복시키며, 새로이 홍문관에게도 비판 기능을 부여하여 비판을 활성화시켰다. 초기에는 대간이 대신들을 견제하며 깨끗한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대간들이 하는 발언들이 도가 지나쳐서, 왕이 착한 인물이 아니었으면 거의 살아남기 힘들 수준의 발언들로 가득하였다. 특히 대간들의 자질이 부족하다보니 간언의 내용이 비판이 아니라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인신공격이자 트집으로 변질되어버렸다.
일례로 성종이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취미에 빠져 나랏일 팽개칠 징조라고 태클, 창경궁에 구리로 수로를 만들자 쓸데없이 사치스럽다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구리 수로를 뜯어내고 돌로 만들었더니 이번에는 수로를 만드는데 쓰느라고, 궁궐 돌담을 헐어야 했기에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이때문에 훈구파 신하들도 대간이 현실 경제 관념이 없다며 역비판했다고 한다. 또 성종의 무신(武臣) 등용 정책에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울 생각인가?'라고 태클을 걸어 무신 등용 정책을 대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중종반정의 주도자인 박원종을 마지막으로 무신 출신이 힘을 썼던 사람들은 반정 공신인 신경진까지 합쳐도 없다. 거기에 중종 시기에 박영문와 신윤무 등이 무신의 난을 꾸몄다는 혐의로 죽으면서[59] 무신의 힘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렸다. 역관 및 의관에게 동반, 서반 직을 주려 했더니 또 대간이 끼어들어 '위 아래도 없는 왕이구만' 하고 태클을 걸었다.[60]
심지어 성종 말년에 다리 셋 달린 닭이 태어나자 "요물이 태어나는 것은 왕이 여자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한 탓이라고 옛말에 있으니, 왕이 여자의 말을 들었구나!"라고 몰려와서 왕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에 성종은 어이가 없어서 "그대들은 어찌 미신을 가지고 과인을 핍박하는가? 과인이 허물이 있어야 반성을 하지, 하지도 않은 걸 가지고 반성을 하라니 도대체 어찌하라는 말인가?"라고 질책했다. 하지만 대간들은 오히려 "전하께서는 어찌 반성할 생각은 않으시고 저희에게 반박을 하시옵니까?"라고 대꾸하며 물러서지 않았다.[61] 성종은 대간들의 무례함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렇다, 요즘의 재이(災異)는 다 과인이 불러들인 것이다. 이제 되었는가!"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며 그들을 돌려보내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에 성종이 대간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자꾸 거절하자, 대사헌(大司憲)이 "요즘 우리 말이면 다 물리치네?"라고 불평을 했다.
영조의 경우에는 "아니 되옵니다" 한 마디만 상소에 있어도, "저 자를 당장 섬으로 유배보내라!"이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62], 성종은 짜증은 낼지언정 "알았다, 과인이 잘못한 것이다."면서 끝내 양보해버렸다.
그래도 유학적 수양과 인격을 잘 갖춘 성종이었기에 대간들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 경우는 있었어도,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으면서 대간들은 아무 말이나 막 하면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간의 이런 행동은 분명 정도(程度)를 넘은 것이었고, 이후 연산군의 철퇴를 제대로 맞게 된다. 특히 성종에게 제일 딱딱거렸던 정성근 등은 아예 살해당한다.[63]
나중에 연산군은 봄 추위가 심하자 시종에게 "예전에는 봄에 추위가 오면 임금 탓이라고 하지 않던가?"라고 비꼬듯 말한 적이 있다. 성종 시기 대간의 행태에 대해 담아둔 것이 많았다는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다. 이외에도 연산군 재위초에도 마치 성종시절을 연상케 할 정도로 대간의 태클이 도를 넘는다. 성종이 사망하고 단 며칠만에 대간이 수륙재[64] 문제로 연산군에게 태클을 걸었을 정도.[65]
3. 일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조선의 왕들을 통틀어 가장 유교적인 왕이다.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미행(微行)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야사(野史)에는 성종의 미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럿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어우동과의 이야기.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려고 미행을 했다는 야사와 소문이 전할 정도면 성종이 꽤나 미행을 많이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증거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정사(正史)에서의 성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우동에게 단박에 교살형을 내려 처형했다. 또한 미행 중에 한 군졸이 왕에게 보내는 상소 비슷한 것을 쓰는 걸 보고, 그 군졸에게 큰 상을 내리고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맹꽁이 서당 등에 소개된 야사에 의하면, 지방에서 한 양인이 첨지 벼슬이라도 얻고 싶어서 상경했으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다리 밑에서 지내고 있는 걸 만나, 다음날 궁으로 불러서 소원대로 첨지 벼슬을 준 일도 있다.
또한 한 번은 성균관 유생 세 명이 서로 몸의 이를 잡아주던 중 "임금님도 몸에 이가 있을까?"라는 주제로 토론하던 걸 지나가다 엿듣고, 얼마 안 있어 그들의 방 창문으로 '임금의 이를 싼 것'이라는 글이 적힌 꾸러미를 던져 준 건 물론, 그 주제로 과거 시험을 열어서 그들 셋을 등용해 주었다는 내용이 있다. 야사에 불과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조선 왕의 미행 이야기는 대부분 야사라 신빙성이 많이 부족하다. 애초에 조선에서 왕은 비공식적으로 궁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 워낙 업무가 많아 스케줄도 빡빡하고 평소에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다 위험하기 때문에, 조선 왕이 아니라 어느 나라 왕이라도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비공식적 외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일생을 유교 정치 구현에 힘쓰고, 경국대전을 자신의 당대에 완성한 군주여서인지, 현 시대에서 유교의 큰 문제점으로 꼽는 가부장적 관습을 옹호한 적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재가녀자손금고법이 있는데, 재가녀의 아들과 손자에게 과거 중 문과 응시를 금지하는 정책이었다.[66]
경국대전에 이 사항이 명문화되기 몇 년 전 부녀자의 재가 문제 때문에 노사신과 이극돈 등 당대의 고관들이 성종과 의견을 나눌 당시, 대부분의 중신들은 그때까지의 경국대전에 근거하여[67] 세 번 재가한 부녀자의 자손만을 법전대로 다스릴 것[68]을 간언했지만 유자광은 두 번 재가한 이후부터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다. 당시 유자광의 의견에 찬성한 신하는 단 3명 뿐이었다고 하나, 성종은 유자광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대로 명을 내렸고, 왕명을 바탕으로 하는 경국대전은 당연히 이를 싣게 되어 이것이 명문화된 것.
재가녀자손금고법은 어디까지나 문과 응시 제한이었으므로, 법적으로는 과거 응시가 가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반 농민들에게는 큰 제약이 없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 명문화된 이후 사족들은 재가를 수치스럽게 여기게 되었고, 정절에 대한 강박도 심해졌다고 한다. # 조선 후기로 갈수록 향약[69]을 통해 일반 농민들에게도 가부장적인 생각이 자리잡은 것도 사실이다.
화가 최경이 아버지 덕종의 어진을 그린 공을 치하하기 위해 성종이 그를 당상관에 제수하려 하자, 온 조정이 들고 일어나서 일주일 동안 "최경을 당상관에 제수한 것은 옳지 못하다"며 매일매일 꼬박꼬박 상소를 올린다. 하루에 두 번 상소를 올린 날도 사흘이나 된다. 마지막에는 신하들이 할머니한테 가서 찡찡거리자 결국 명을 거두고 최경에게 말 1필을 하사했다. 이 정도면 불쌍할 지경.
한번은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린 적이 있었는데, 대간들이 잡기에 빠져 나라를 망치게 한다고 하도 상소질을 해대니, 성종이 이에 빡쳐서 본인이 쓴 현판을 뜯어내 망치로 때려 부셔서 불태웠을 정도. 심지어 성종은 매 사냥을 좋아했는데, 대간들 등쌀에 하지도 못 하고 뒷간에서 대간들 몰래 조용히 매 날리기나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술과 여자 말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처지에 몰린 것이다.
성종이 대간들의 심한 비난에도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참고 들어준 이유는 대간 세력을 본인이 크게 키운 것도 있고 왕으로 즉위할 때 제안대군, 월산대군에 이어 3순위 계승권자로 보위를 이었는데 정통성이 좀 떨어지니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신권이 좀 더 강한 데다가 신하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했었으니 그들을 배척하기 보다는 웬만하면 존중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성종이 세종을 롤 모델로 삼았고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유교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본인 성품도 온순하고 어질며 착했으니 대간들을 최대한 품어주고 어찌하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 인수대비에게 내내 눌려 살았다는 설이 있는데, 실제론 전혀 아니다. 애당초 폐비 윤씨 사사만 해도 성종 본인이 손수 주도한 일이었고, 성종은 인수대비가 거의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 금승법(禁僧法)[70]을 통과시킨 왕이었다.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인수대비가 아들을 마구 주무를 수 있는 어머니였다면 성종 대(代)에 조선 시대 사상 가장 혹독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됐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 설령 성종에게 힘이 없었다고 쳐도 인수대비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었는데, 바로 대간. 대간들 입장에서는 대비랍시고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왕에게 감놔라 배놔라 하는 상황을 보면 당연히 왕의 편이 되어주지 대비 편은 안 든다. 그 정도쯤 되려면 문정왕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인수대비는 불교 문제에서 감정으로 호소하기[71], 불교 배척 얘기가 나올 때 반대 성명 내기 뭐 이런 거 뿐이었지 그 이상은 못했다. 즉, 인수대비는 더 이상은 의사 결정권이 없었다는 것.
동물을 유달리 좋아해서 그런지 궁궐에서 동물을 많이 기르기도 했다. 고양이, 개, 사슴, 노루, 매는 물론 심지어 고니나 앵무새, 공작, 원숭이까지 길렀다고 한다. 성종 때가 성리학적 유교 정치의 전성기였던 만큼 이는 당시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사림 간관들에게 크게 비판받았으며, 성종이 간관들과 이 문제로 설전을 벌인 기록도 있다. 대표적으로 낙타를 들여올 때 신하들이 만류하자 성종이 "군사용으로 들여온 건데?" 라는 논리로 맞받아쳤다. 물론 차였다. "낙타는 수송용이 될지는 몰라도 군사용으로 쓰기엔 좀 그런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군사용으로 매우 요긴했다.
물론 당시엔 값도 비싸고[72] 더운 곳에 사는 동물인데, 덥지도 않아서 기후와는 안 맞는 조선에서의 군용으로는 효율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대간들도 생각없이 비판한 것은 아니고 성종의 애완동물 사육 값이 왕의 개인돈이 아닌 국가 재정에서 지출되기 때문에 부담이 되다보니 비판한 것이라서 애완동물 사육이 비판받을 만하긴 했다. 특히 성종의 원숭이는 류큐 왕국(現 오키나와)에서 보내온 원숭이였는데, 이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문제로 좌부승지와 설전을 벌였다. 좌부승지 손비장이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로 하나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라는 논리로 비판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떨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불가능하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그가 키우는 애완동물의 사육비 때문에 신하들과 갈등했으며 신하들의 융단 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놔준 동물들도 많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사슴이나 매를 놔주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동물 문제로 시비를 걸 때마다, "난 원래 동물 안 좋아하니까 괜찮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고…
풍류를 좋아한 사람답게 술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할아버지 세조처럼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그런데 술버릇이 '아랫사람에게 술 먹이기'였다고... 특히 할아버지처럼 신하들에게 벌주(罰酒)를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며, 신임 관료들을 불러 신고식을 하는 것 마냥 술을 먹이고 신임 관리들을 조롱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 죽음
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이나 되는 자식을 얻었다는 건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이 분야의 권위자라 할 수 있다. 성종은 25년의 재위 기간 동안 총 12명의 왕비와 후궁 등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73] 공식적으로 거느린 후궁의 숫자를 보면 성종은 12명, 태종은 12명, 세종은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74]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왕의 호색(好色)은 곧 후사(後嗣)를 많이 볼 수 있는 결과가 되기에 이전부터 왕조 국가라면 대부분 장려되는 덕목이었다. 그러니 대간들 등쌀에 울화통이 치민 성종으로서는 대간들도 장려하면 했지 태클을 걸지는 않던 여색(女色)으로 울화를 풀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해석도 있다. 게다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 것에 대한 영향으로 성병에 시달렸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던 면도 있다. 어의들이 임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렇게나 애를 썼지만, 백약이 무효라 결국 성종이 몸져눕자, 이 때 신하들이 "즉어(붕어)'라는 물고기가 병환에 좋다고 하니 드십시오!"라고 성종에게 권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지금은 장마철이라 어부가 위험하니 폐를 끼칠 수 없소!" 하며 신하들의 간청을 물리쳤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결핵과 천식에 걸려 낫지 않고 두통까지 있어 고생하던 차에,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겼는데 이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주상의 환후(患後)가 깊어지니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고, 대규모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당연히 효과는 없었다. 이후 성종은 약간 상태가 나아지자 신하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며칠 먹지 못 해 좀 야위었소."라고 하자, 신하들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75] 그러나 성종의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하였고, 결국 쇠약해져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중에는 운명을 직감한 성종은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신하들과 연산군을 불러모은 다음 연산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신하들에게 유언을 말해준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런데 장남도 31살이라는 역시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그나마 차남은 나름대로 장수했다.[76] 사실 성종은 학문과 정치에만 지나치게 부지런하여 늘 과로했으며, 더구나 운동 같은 건강 관리도 전혀 하지 않았다.[77]
아들 연산군이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자 암군이 되어버린 까닭에, 아버지인 성종도 본의 아니게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막장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얻기도 한다. 사실 이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부만 맞다. 우선 세자 시절 연산군의 자질은 아버지처럼 열성적인 모범생도, 그렇다고 양녕대군 수준의 망나니도 아닌 평범한 수준이었다. 세자의 학습이 조금 부진하다며 성종이 걱정한 적도 있으나, 그렇다고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성종의 연산군에 대한 교육도 완전히 손을 놓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성종 자신이 겪은 것에 비해 느슨한 정도였다. 성종이 역대 조선 임금 중에서도 유독 혹독하게 교육을 받았다는 걸 고려하면 세자 시절 연산군의 교육은 크게 문제삼을 수준이 아니었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아버지 성종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즉위한 직후에 생전 성종이 아끼던 사슴을 활로 쏴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일 뿐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다.[78][79] 연산군은 세자 시절은 물론이고 한참 폭주하던 시절에도 부친 성종에 대한 반감은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사실 성종 본인이 아들에게 끼친 진짜 악영향은 따로 있다. 성종은 대간들을 컨트롤하는데 실패했고, 대간의 권한이 비정상적으로 커졌다. 또한 훈구파 대신 집단도 사림파 등용과 대간으로 견제하기는 했지만, 조부 세조 때부터 이어져 온 기득권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상태였고, 성종은 이 역시 완전히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이렇게 대간을 비롯한 신하들의 공격에 자기가 꼭 하고 싶어하는 정책들은 대부분 독단으로 밀어붙였지만, 그럼에도 신하들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던 성종과는 달리 적장자라는 엄연한 정통성이 있는데다 상하의 구분을 엄격하게 따지는 게 옳다고 여긴 연산군은 이런 대간들과 대신들을 좋게 볼 수 없었고 그들의 세력을 꺾어버려야 왕권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여겼다. 한 마디로 아버지의 정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보살이었던 아버지와는 다른 철혈군주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80] 결국 이는 연산군이 성종식 유교 정치를 부정하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라는 2차례의 사화를 통해 대간 및 대신 집단들을 모조리 유혈 숙청해 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그나마 현재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고 여겨지는 무오사화와는 달리 갑자사화는 빼박 잘못.
5. 사후
성종이 죽은 후 묘호를 정하는 데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는데 성종의 묘호로 '성종(成宗)'과 '인종(仁宗)'이 경합했다.[81] 이는 굉장히 특이한 사례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보면 알겠지만 이전 국왕의 묘호를 정하는데 이 정도로 시비가 붙은 것은 성종이 유일하다. 보통 왕조 국가에서 묘호라는 것은 어지간하면 적당히 좋은 이름을 정해서 주는 것이 보통이고 조선의 경우 선왕의 정통성이 취약해서 아들이 크게 대접하려는 경우를 제외하면 별 말없이 묘호를 정했으며 새 왕이 죽은 왕의 묘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라도 하루 넘게 논의되는 경우는 없었다. 헌데 성종의 경우 연산군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신하들이 먼저 나서서 어떤 묘호가 옳은지 격쟁을 벌였다. 이를 통해 당시 신하들 사이에서 성종이 얼마나 고평가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 왕들 중에서 후대에 가장 고평가되는 세종대왕과 비교하면 죽은 직후 신하들이 세종의 치적에 대해 논하기는 커녕 불사(佛事) 문제로 시끄러웠을 뿐 묘호는 문종에게 거의 통보에 가까운 형식으로 싱겁게 끝나버린다.[82]홍문관 직제학 표연말(表沿沫) 등이 상차(上箚)하기를,
"엎드려 듣자오니, 지금 묘호를 의논하면서 혹은 인(仁)으로 하자 하고, 혹은 성(成)으로 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성(成)으로 칭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 하셨으니, 이것으로는 대행왕의 거룩한 덕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전(傳)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친다.(爲人君止於仁)’ 하였으므로 자고로 제왕의 아름다운 칭호로 인(仁) 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비록 시호를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거듭 깊이 생각건대, 인(仁)으로 칭하여 올리자는 것이 의논하지 않고도 생각이 같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이며 여러 사람의 마음에 아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중조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심히 미안합니다. 묘호를 한 번 정하면 백세에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재량하소서."
하였다.
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인(仁)'[83]을 지지하는 파에서는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이걸론 대행왕의 성덕을 다 표현 못합니다"라든지, "成은 仁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라는 발언이 속출하였고, 仁이 명나라 홍희제의 묘호를 범한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仁 한 글자가 참람해서 피할거면 애초에 묘호도 안 올리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며 재반박하기도 하였다. '성(成)'을 지지하는 세력도 이에 맞서 판서급 대신들이 "성종(成宗)으로 하되 혹 대성(大成)으로 하는거면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반박하였지만 신하들은 전반적으로 인종으로 하자는 여론이 매우 우세했다. 하지만 정승들의 "중국의 묘호를 범(犯)하는 것[84]은 옳지 않으며[85][86] 성종도 뜻 자체로는 훌륭한 이름입니다"라는 의견과 "내가 통감을 보니 인종이라는 묘호가 처음 쓰였던건 송나라이던데 송나라 인종은 물러터져서 오랑캐의 화를 겪었는데, 그게 울 아빠의 성덕에 견준다고 생각해?"라는 연산군의 의견이 맞아떨어져 결국 성종으로 결정되었다."엎드려 듣자오니, 지금 묘호를 의논하면서 혹은 인(仁)으로 하자 하고, 혹은 성(成)으로 하자고 하다가 마침내 성(成)으로 칭하여 올리기로 하였다 합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시법(諡法)에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사를 세운 것을 성(成)이라 한다.(安民立政曰成)’ 하셨으니, 이것으로는 대행왕의 거룩한 덕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전(傳)에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그친다.(爲人君止於仁)’ 하였으므로 자고로 제왕의 아름다운 칭호로 인(仁) 자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이 비록 시호를 의논하는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거듭 깊이 생각건대, 인(仁)으로 칭하여 올리자는 것이 의논하지 않고도 생각이 같으니, 이것이 실로 공론이며 여러 사람의 마음에 아주 맞는 것입니다. 지금 중조의 묘호(廟號)를 피하여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니, 신자(臣子)의 마음에 심히 미안합니다. 묘호를 한 번 정하면 백세에 고치지 못하는 것이니 위에서 재량하소서."
하였다.
연산군일기 2권, 연산 1년 1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정작 성종 본인은 "나는 묘호를 쓸만큼 공이 없으니 그냥 시호만 붙여라"는 말을 남기기는 했는데 이 말은 연산군이 대비를 통해 전해 들은 것이므로 겸양의 표현 정도로 볼 수 있다. 사실 묘호는 천자에게 올리는 것이라 명목상 제후국인 조선이 원칙적으로 쓸 수 없는 것이기는 했으나 조선은 외왕내제로 모든 임금에게 묘호를 썼고 이미 고려 시대 때부터 원 간섭기를 빼놓고 계속 써왔다. 실제로 조선의 모든 왕은 성종 직전에 1년 조금 넘게 왕노릇한 예종도 묘호를 받고[87] 종묘에 모셔진 왕들 중에 묘호를 안 받은 이는 없다. 묘호를 안 받은 왕은 복권되지 않아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연산군과 광해군 뿐으로 당대 이들에 대한 평가는 폭군으로 멀쩡하게 선정을 펼친 왕을 이들과 같이 묘호가 없이 "~대왕"[88]으로만 불린다는건 유교 정신이 투철한 조선 입장에서는 "저 위대한 임금님을 폭군 취급한다고?"라고 펄쩍 뛸 소리다. 물론 이 때는 연산군/광해군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만 당대에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던 성종의 묘호를 안 올린다는건 유교적으로 상상조차 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즉, 자기도 그렇게 안 할거 알고 극도의 겸손을 떤 것. 만에 하나 신하들이 "그 분 뜻 존중해야죠?"라고 해도 아들된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리가 없고 애초에 가능성이 0이다.[89]
오시(午時)1417)(註 1417)(오시(午時) :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 에 임금이 대조전(大造殿)에서 훙(薨)하였는데, 춘추(春秋)는 38세이다. 임금은 총명 영단(聰明英斷)하시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셨으며,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시었다. 학문을 좋아해서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고, 사예(射藝)와 서화(書畫)에도 지극히 정묘(精妙)하시었다. 대신(大臣)을 존경(尊敬)하고 대간(臺諫)을 예우(禮遇)하셨고, 명기(名器)를 중하게 여겨 아끼셨으며, 형벌을 명확하고 신중하게 하시었다.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이단(異端)을 물리치셨고, 백성을 사랑하여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셨고, 대국을 정성으로 섬기셨으며, 신의로써 교린(交隣)하시었다. 그리고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고 내외(內外)를 함께 다스리니, 남북(南北)이 빈복(賓服)하고, 사경(四境)이 안도(按堵)하여 백성들이 생업(生業)을 편안히 여긴 지 26년이 되었다. 성덕(聖德)과 지치(至治)는 비록 삼대(三代)1418)(註 1418)(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의 성왕(聖王)이라도 더할 수 없었다.
성종실록 297권, 성종 25년 12월 24일 기묘 4번째기사
또한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특이한 기록도 존재하는데 연산군 즉위년 12월 28일자 기사에는 성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5일동안 시장이 열리지 않으며 백성들 중 애통해하지 않는 자가 없어 그중에서는 왜 내가 왕을 대신해 죽지 못하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는데 심지어 백성들 뿐만 아니라 조선에 이제 막 온 일본인[90]들까지도(!) 갑자기 조선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자[91] 이상히 여겨 이유를 물었고 이유를 알게 되자 슬피 울며 "성군이 돌아가신 때에 어찌 우리가 왔는가"(聖主之薨, 胡適我輩之來)" 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왕의 죽음에 백성들이 슬퍼했다는 기록은 드문드문 나타나는 기록이나 자기나라 왕과 관련없는 타국군주의 죽음에 슬퍼했다는 기록은 꽤 특이하긴 하다. 사관 또한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기록이라 특별히 적은 것으로 보인다.성종실록 297권, 성종 25년 12월 24일 기묘 4번째기사
당대는 물론 후세의 선비들에게 군주의 모범으로서 굉장히 높이 평가받았다. 보다시피 성종이 죽던 날의 위 기록에서 성종의 치세를 유교 정치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꼽는 '삼대'[92]에 비견한 것만 봐도 당시 유학자들이 성종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잘 드러난다. 하다 못해 조선 중기 이후 간관(諫官)들의 주 무기들 중 하나가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예를 본받으소서"였을 정도. 오늘날까지 이 평가는 이어져서 그의 치세 기간을 조선의 제도가 완성되었고 국력도 전성기였던 태평성대로 평가되고는 한다. 성종의 인품과 능력을 칭송하는 야사가 여럿 전해지는 것을 보면 백성들이나 재야 선비들의 인식도 좋았던 모양이다. 세종 대에는 천재지변도 있었고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진 것이 아니었기에 자연 토목 공사 등이 많아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태평성대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다만 조선 정치 체제의 문제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성종 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종은 의지와 능력을 고루 갖춘 임금이었기에 그 문제점이 표면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뒤를 이은 연산군의 실정 이후 조선의 문제점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은 신하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강력했던 연산군이 쫓겨나는 꼴을 본지라 왕권 강화에 집착하여 조광조, 남곤, 심정, 이행, 이항, 김안로 등을 번갈아 내세웠다가 이후 차례로 숙청하기를 반복했다. 뒤를 이은 인종은 1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승하했고 명종은 문정왕후가 꽉 잡고 있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다시피 했다.[93] 선조의 즉위 후에야 율곡 이이 등이 주도해서 조선 중기의 여러 문제들을 고쳐 나아가고 있었으나 남쪽에서 왜군이 침략해왔다.
박시백의 성종에 대한 평가를 요약해보면 성종은 비록 사림이나 선비들에게 높이 평가받기는 했지만 선비들의 평가처럼 세종에 비견되는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94] 그러나 본래 수성 군주는 화려하지 않은 법이며 권력화한 대간들의 지나친 잔소리를 대할 때의 스트레스를 삭이면서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고 제도를 범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높이 평가해줘야 할 대목으로 마무리지었다. 후기에서 성종의 입으로 "세종 할아버지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은 임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세종대왕과 1:1로 비교하는 건 과도한 비판이며 성종도 나름대로 장점과 업적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 듯 하다.
정현왕후의 릉 |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宣陵).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선릉역은 이 능에서 역명을 따 왔다. 흔히 옆에 있는 중종의 '정릉'과 묶어서 '선정릉'이라고 부른다. '선정릉'이라는 명칭은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9호선의 환승역인 선정릉역의 유래가 되었다. 이 곳에는 '삼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와 동원이강(同原異岡)[95] 형식으로 묻혀 있다. 할아버지 세조는 검약을 강조해 자신의 능에 병풍석(屛風石)을 설치하지 않도록 했지만 성종의 능은 병풍석이 설치되었다. 선릉은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 임진왜란 때 정릉과 함께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96] 인조 때에는 화재를 2번이나 겪기도 했다. 현재 선릉 능침 안에는 성종의 시신은 없으며 보수할 적에 새로 지어올린 의복을 태운 재만이 재궁에 들어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생전에 왕이었고 마침 왜적들이 한양을 점령했을 때 가장 가까운 왕릉이 선정릉이었기에 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결국 도굴까지 당해서 본인 시신까지 불태워지는 치욕을 겪게 된다.[97] 풍수지리학자들은 선정릉의 자리가 흉당이라고 말한다. 원래 선릉의 자리에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묘가 있었으나 당시 성종의 장지를 정했던 대신들과 윤필상의 강력한 지지로 광평대군 묘를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하고 성종을 이 곳에 안장시켰는데 광평대군 묘를 이장하고 나서부터 후손들이 매우 번창하여 현재 전주 이씨 광평대군파는 대종중이 되었다. 중종의 정릉도 여름철 홍수가 나면 재실과 홍살문이 침수되는 등 변고가 지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선릉 능침에 불이 나거나 정자각이 불타는 등 수난은 끊이지 않았고 현대에 와서는 왕릉 주위 면적들이 잘 보전되어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선정릉은 1970년대 강남 개발의 중심지가 되어서 기존의 규모보다 대폭 줄었으며 사방이 고층빌딩에 둘러쌓여 있으니 사후에 다른 왕들에 비해서 불운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만큼 인지도는 매우 높고 찾는 사람도 왕릉치고 많은 편이기는 하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조선 왕릉 중에서도 성종과 정현왕후와 그들의 유일한 아들인 중종[98]의 능만 도굴당하고 시신마저 모조리 불태워졌다. 또다른 혹자는 성종, 정현왕후, 중종 모두 생전에 왕이나 왕비가 될 사람이 아니었으나, 운이 좋아서 왕과 왕비가 되었기에 사후까지 그 행운이 지속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도 한다.[99] 한편으로는 세조의 측근이나 자손들이 대부분 인생이 잘 안풀리거나 후사를 잘 두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그 세조의 후손들인 성종과 중종은 왕으로 즉위하여 평탄한 인생을 보낸 편이라 사후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단죄를 받은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1] 혹은 파자(破字)하여 자을산군(者乙山君)[2] 乙자는 한국어의 종성(終聲) ~ㄹ을 표현하기 위해 쓰던 대표적인 이두 표기다. 군호가 굳이 이렇게 된 것은 아마 형인 월산대군과 발음을 맞추기 위함으로 생각.[3] 실록이나 승정원 일기를 쓰고 편찬하는 사람들.[4] 형이자 예종의 첫째 아들인 인성대군은 겨우 3세에 죽었다. 그런데 인성대군은 예종이 고작 12세였을 때 당시 16세였던 부인 장순왕후 사이에서 본 아들이다.[5] 그냥 어린 정도가 아니라 원자 책봉도 못 받았다. 즉 공식적으로 후계자 공인이 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원자 책봉이라도 되어 있었다면 사정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6] 이런 관습은 무지나 미신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현대 의학에서도 아직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잘못 판정하는 경우가 있다. 옛날에는 죽었다고 최종 판단하고 관에 넣어 매장하던 중에 살아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한 경우에도 빈(殯)이라 하여 최종매장을 할 때까지 기다리는 절차를 두었다. 3일장 등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친 관습들이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 존재한다. 서구에선 매장된 이후 살아났을 경우 밖의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장치(종, 깃발 등)가 달린 관을 개발하기도 하였다.[7] 악명 높은 재가녀자손금고법(寡婦再嫁禁止法, 재가한 여성의 자손을 벼슬에 올리지 않는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신료들이 삼가(三嫁) 규제, 즉 3번 결혼한 과부의 자손을 제재할 것을 주장했고 재가(再嫁) 자손의 제재는 대부분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성종이 끝까지 밀어붙여서 통과되었다고 한다.[8] 조선의 신분제를 확고하게 만든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 역시 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되었다.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리가 자리잡은 이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과 일천즉천의 원리는 지속적으로 부딪혔다.[9] 성종 즉위 후 1470년에 다시 한 번 교정을 마치고[100][101][102] 이듬해(1471년)부터 시행하기로 했으며[103] 이를 《신묘대전(辛卯大典)》이라 했다. 조문을 좀 더 개수하여 1474년 2월 1일[104]부터 쓸 수 있도록 《갑오대전(甲午大典)》을 완성했고[105] 1485년 1월 1일[106]까지 최종 검토를 거쳐[107][108] 《을사대전(乙巳大典)》이라 했고 이것이 영세 불변의 조종성헌(祖宗成憲)이라 불리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최종 완성본이다.[109][10] 광천군(廣川君) 이극증(李克增)이 와서 아뢰기를,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지금 이미 편찬을 마쳤으니, 청컨대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내가 장차 한 번 보겠지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먼저 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성종 23년 7월 28일)[11]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이제 반포한 《대전속록(大典續錄)》 안에서 예전대로 준행(遵行)하는 조건(條件)외에 새로 세운 조건은 이달 초이렛날부터 비롯하여 행용(行用)하라." 하였다. (성종 24년 5월 8일)[12] 언관화는 성종 19년(1488년) 이후이다.[13] 농산품[14] 공산품[15] 상정청(詳定廳)에서 계달하기를, "‘횡간조작식(橫看造作式)’을 이미 인쇄를 마쳤으니, 이 뒤로 제사(諸司)의 용도(用度)는 별다른 일 이외에는 일체 ‘횡간조작식’에 의하여 시행하며, 만약 미처 상정(詳定)하지 못한 일이 있거든 각기 해사(該司)에서 들어가는 수량을 호조(戶曹)에 보고하여 마감(磨勘)해서 계달하고 치부(置簿)하는 것을 법식(法式)으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 4년 9월 20일)[16] (대왕대비가) 전지하기를, “사람들이 직전(職田)이 폐단이 있다고 많이 말하기에 대신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대부의 봉록(俸祿)이 박하여 직전을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 하므로, 나도 또한 그렇게 여겼는데, 지금 들으니 조정 관원이 그 세(稅)를 지나치게 거두어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긴다 한다. ……(중략)……” 하였다. 한명회 등이 아뢰기를, “직전의 세(稅)는 관에서 거두어 관에서 주면(官收官給) 이런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중략)……” 하였다. 전지하기를, “직전의 세는 소재지의 관리로 하여금 감독하여 거두어 주게 하고, 나쁜 쌀을 금하지 말며, 제향 아문(祭享衙門)의 관리는 금후로는 가려서 정하라” 하였다. (성종 1년 4월 20일)[17] 성종실록 21권, 성종 3년 8월 14일 무인 4번째기사[18] 성종 말년의 실제 인구는 900만 근처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0 Joseon(22) 9,000,000 2.1%[19] 병조(兵曹)에서 군적(軍籍)을 올렸는데, 경중(京中)은 정군(正軍)이 2천 8백 24명, 봉족(奉足)이 2천 9백 20명이고, 황해도(黃海道)는 정군이 9천 8백 17명, 봉족이 2만 7천 4백 71명이고, 평안도(平安道)는 정군이 1만 9천 3백 36명, 봉족이 5만 2천 2백 31명이고, 경기(京畿)는 정군이 8천 9백 56명, 봉족이 2만 1천 1백 80명이고, 개성부(開城府)는 정군이 6백 96명, 봉족이 1천 5백 21명이고, 충청도(忠淸道)는 정군이 2만 3천 7백 80명, 봉족이 5만 1천 6백 64명이고, 경상도(慶尙道)는 정군이 3만 5천 5백 17명, 봉족이 9만 4천 8백 10명이고, 전라도(全羅道)는 정군이 3만 4천 44명, 봉족이 8만 9백 49명으로, 총계하면 정군이 13만 4천 9백 73명, 봉족이 33만 2천 7백 46명이었다. (성종 8년 6월 20일)[20] 고려 후기까지는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분포해 있었던 전대의 향·소·부 곡·처·장이 조선 초기에 걸쳐 거의 임내로서의 자격이 상실되고≪세종실록지리지≫상에는 불과 82개만이 존속하고 있었으나 이것도 계속 소멸의 길을 걸어 성종 12년(1481) 경에 가서는 12개의 부곡·향·소만이≪신증동국여지승람≫의 속현조에 남게 되었고 나머지는 고적조에 수록될 정도로 모두 소멸되었던 것이다.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3. 군현제의 정비 > 2) 임내의 정리)[21] 그 후 성종 9년(1478)에 「明經科試取節目」이, 성종 10년에 「明經科別試條件」이 제정됨에 따라 명경과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것은≪乙巳大典≫551)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551)(성종 16년(1485), 즉 乙巳年에 최종적으로 반포된≪경국대전≫.)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4. 과거의 종류)[22] 5일 동안 철시(輟市)하였다. 여염(閭閻)의 세민(細民)들도 애통해 하지 않는 이가 없고, 눈물을 흘리며, 왜 내 몸으로 임금의 몸을 대신하여 죽지 못하나 하는 이까지 있었다. 동평관(東平館)에 다다른 왜인(倭人)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왜인들이 서로 울며 '성군(聖君)이 돌아가신 때에 어찌하여 마침 우리가 왔는가.' 하고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연산 즉위년 12월 28일)[23] 내가 조정에 있으면서 본디부터 돌아가신 왕의 어진 덕이 있음을 들었고, 동 대인(董大人: 동월董越) 이 일찍이 칭찬하고 사모하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연산 1년 6월 3일)[24]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서 방위는 수월하였으나 땅이 산악지대에 있으며 척박하고 날씨가 추워 자급자족이 힘들었다.[25] 현재 훈춘시의 방천지역[26] 현재 훈춘시의 도심지역[27] 강을 경계로 해서 넘어 오는 자들을 막는 것과 드넓은 평지에 산악지역에서 방어하기에는 차이가 많다. 우선 방어를 위한 인원과 물자 소모가 다르다. 따라서 전근대시기 가장 좋은 국경선은 강이나 바다를 경계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근본적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한 국가로 최대한 소규모로 운영을 하던 국가였다. 당장에 병조는 국방부와 병무청 및 우체국 등을 합친 기구였고, 예하에 중앙군인 5위, 수도의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포도청, 무과를 주관하고 교육을 담당하는 훈련원 등이 있었다. 정2품 판서/종2품 참판/정3품 참의/정3품 참지/정5품 정랑 4인/종5품 좌랑 4인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나마 병조는 다른 부서보다 참지와 정랑/좌랑 한 사람씩 더 두었다.[28] 이는 명분없는 반란으로 집권한 세조 정권 자체의 약점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29]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성(本性)의 회복으로, 그 외에 현상적인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분리하였다. 물론 부차적인 것들로부터 본성을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더하여 오경(五經)보다 사서(四書)를 중요시했고, 조용한 산속에서 본성을 찾는 활동을 중시하였다. 본성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부차적인 것들은 자동으로 해결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0]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성종의 작은어머니 안순왕후, 성종의 모후 인수대비.[31] 야사에서도 윤씨를 옹호하는 말만 많은 것은 아니다. 윤씨는 평소 궁녀들에게 "누구든 상감을 모시는 날에는 나에게 죽을 줄 알아라!" 같은 수위 높은 말을 자주 하곤 했다고 한다.[32] 권경우는 훗날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동생 권경유가 김일손의 일당 중 하나로 몰려 주모자로 처형되었고, 덤으로 자신도 연루되어 일시적으로 강릉부 관노로 배속되었다. 그나마 과거 윤씨의 일을 옹호한 일이 참작되어 바로 연산군이 어명을 내려 직접 신발과 옷을 하사했다. 이때만 해도 연산군은 대신들과 의논해서 일을 처리했기에 당시 정승들이었던 한치형과 성준에게 직첩을 돌려주고 조정에 복귀함이 어떤가 물었지만, 무오사화의 주범인 동생 권경유의 일도 있고 얼마 전까지 죄인의 몸이었는데 바로 용서해주는 것은 모양이 빠진다고 반대해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직후 권경우는 세상을 떠났고, 갑자사화의 광풍에도 꿋꿋이 살아남아오다가 중종반정으로 적몰가산이 환급되고 죄명도 신원되었다. 한편 이때 권경우의 복귀를 반대한 한치형과 성준은 훗날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각기 부관참시와 교살로 참화를 입게 된다.[33]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의 아버지다.[34] 여기서의 "그"는 오타가 아니다. 근현대 이전까지 우리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그"라고 칭했었다. "그녀"라는 표현은 사실 억지로 끼워맞춘 표현으로, 어법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35] 진나라 헌공의 첩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 삼으려고 다른 자식들을 모함을 해, 신생을 죽이고 중이를 내쫓은 것을 말한다.[36]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중종은 아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유는 성종이 윤씨가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37] 장례를 치를 때 관을 덮는 흰 천을 말한다. 죽이고 싶다는 뜻과 같다. 이는 심각한 죄로서, 대역죄로 처벌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다.[38] (註 727) 구익 부인(鉤弋夫人) :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궁녀 조첩여(趙婕妤)로서 소제(昭帝)의 생모임. 무제가 자신은 늙고 소제는 어리므로 후일 자신이 죽은 뒤에 어린 임금을 끼고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죽였음.[39] 원상(院相)이란, 즉위한 국왕이 너무 어리거나, 유고(有故) 등으로 직무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때, 재상들이 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돌본 것에서 유래한 임시관직이다. 성종 초기 실제 국정 운영은 수렴청정을 통해서가 아닌, 원상(院相)을 통해서 운영되었다.[40] 단종1년 계유정난(癸酉靖難) 성공 후 수양대군의 의지로 책봉[41]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이 되자 책봉[42] 세조 붕어 후 병조판서 남이의 역모를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책봉[43] 성종 옹립 후 이에 일조한 이들에게 책봉[44] 조선 역사상 4개의 공신에 모두 1등으로 책봉된 이는 한명회 외에 전무후무하다…[45] 사실 사림파들이 처음으로 등용된 것은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때였다. 당장 사림의 지도자로 평가받는 김종직부터가 세조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인물이었다. 재밌는 것은 김종직은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조의제문을 쓴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성리학적 사고방식으로는 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직접 개기거나 벼슬을 거부하고 초야에 묻혀 살아야 하는데, 세조 아래에서 벼슬은 벼슬대로 하고 조의제문을 지은 것이다. 그래서 후대에 허균이 김종직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했다.[46] 조선시대에 임금이 친림하여 실시하는 군사훈련 목적의 수렵대회.[47] 연산군의 갑자사화에 희생당한 대신들 중 하나[48] 현대로 치면, 군함을 화물선으로 쓴 셈이다. 다만 판옥선이 등장하기 전에 조선의 주력 병선이었던 맹선(猛船)은 원래 조운 겸용 선박이긴 하다.[49] 정보를 입수하고 다들 토꼈다. 다만 이건 특별한 게 아닌 것이, 여진족의 행동양상은 대군이 오면 몸만 빼서 튀는 거다. 이는 여진족뿐만 아니라 유목민들이 정주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할 때 자주 썼던 게릴라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군은 주전술이 여진족의 가옥과 농지를 불태워버려서 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경우엔 여진족을 못 잡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초토화 작전을 펼치지 못해서 다시 쳐들어오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50] 마을을 점령했으니 주민들의 식량도 노획했어야 했겠지만 청야전술을 써서 없애버리고 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51] 만주어로는 우디거(숲사람)라고 하며 조선시대 두만강(豆滿江) 일대에 살던 야인여진의 분파이다. 비록 명나라 아래 있었던 건주여진이나 몽골에 가까웠던 해서여진에 비해 문명 수준은 낙후되었으나 호전성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았다. 명나라 세력권에 속해 있어 조선이 공격할 땐 명나라 눈치를 봐야 했던 건주여진, 너무 멀어서 당시엔 부딪힐 일이 없었던 해서여진과 달리 조선과 직접적인 충돌을 가장 많이 일으켰던 세력이었다. 참고로 야인여진은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이 합쳐져 만주족이 성립된 뒤 만주족에게도 골칫덩이 세력이었다.[52] 올적합은 당시 야인여진 중 가장 강하고 호전적인 세력이었으니 그런 올적합을 털어버린 조선군이 두만강 일대 여진 부락들에게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보임이 당연한 일이었다.[53] 여진족들은 금나라를 세우기전에도 고려가 무려 17만 대군을 동원하였음에도 갈라수 전투에서 패하는 등 상당히 고전시켰고 금나라 시절에는 2차 여요전쟁에서 멸망직전까지 갔던 고려와는 달리 요나라를 상대로 멸망위기까지는 가지 않고 버티던 북송에게 정강의 변이라는 굴욕을 줬는데 그런 금나라도 실패한 군사적 업적을 조선 성종은 달성했다고 금나라 후손이 직접 인정하는것이다.[54] 절도사 여자신은 혼춘 지역을 점령하면 주변의 여진족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여진족의 발흥 자체를 아예 차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혼춘 일대에는 야춘해와 근접해 해산물 또한 풍부했고, 거기다 농경지로 쓸 만한 평평하고 넓고 기름진 토지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적 이점 이 2가지의 측면에서 혼춘 개척을 주장한 것이었다.[55] 여자신과 성준 등 변방 개척을 주장하던 세력들에 대한 집중적인 탄핵도 같이 이어졌다.[56] 독도라는 설도 있으나 # 독도가 1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농사를 지을만큼 비옥한 땅이 넓은 곳은 결코 아닌 만큼, 삼봉도가 독도라는 주장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삼봉도는 함경도 해안가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7일 동안 가야 나온다는 구절을 보면, 차라리 울릉도나 홋카이도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출처: 조선의 예언사상 상/ 김탁 저/ 북코리아/ 354쪽)[57] 바다 건너 섬에 군대를 기르고 있는 진인, 즉 구세주가 있어서 그가 장차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믿음. 다른 말로는 해상진인(海上眞人)이라고도 한다.[58] 단, 사림파들을 처음 등용한 것은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때였다. 하지만 세조때는 사림파들이 등용되기는 했어도 그렇게 힘이 강하지는 않았다. 훈구 공신들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살인이나 월권행위가 심해지자, 집권 중반 이후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왕족과 왕실 외척, 그리고 사림파를 등용했다. 그렇게 왕실 인사로는 구성군 준, 외척으로는 남이, 사림파로는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 그밖에 정몽주의 문하생 등을 새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권한은 세조가 살아 있을 때는 성장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이나 구성군 등 신공신은 훈구 공신들의 견제를 받아 제거된다. 그러나 사림파는 이 당시에는 훈구세력과 크게 부딪히지 않아 화를 모면하였다.[59] 둘 다 정국1등 공신인데도 이 지경이니 나머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60] 물론 문신들이 밥그릇 빼앗기지 않으려 한 것은 어느 시대나 같았다. 이른바 양반이라 불리는 동반과 서반은 남반이라 불리는 실무직보다 높게 쳤는데, 자기네들끼리 경쟁하는 것도 벅찬데 경쟁자가 느는 걸 과연 방관할까.[61] 물론 유교 정치에서는 뭐만 생기면 왕 탓을 하는 풍조니 이쪽도 논리가 부실한건 아니겠다만. 그러나 유학자들이라고 해서 정말 모든 재이가 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어디까지나 왕이 막 나가는 걸 견제하는 장치라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종 이전까지는 적당한 수준에 머물렀다. 그런데 성종 대에 오며 신진 세력들을 중심으로 왕에게 굽히지 않는게 사명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져서, 합리성을 상실한 막무가내식 비판이 급속도로 늘어났다.[62] 그나마 이 정도면 다행으로 저 정도는 자비로운(?) 축이다. 영조는 조선 왕조에서 손꼽히는 욕쟁이 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영조는 변덕이 심해 정승이라 할지라도 화를 낼때는 당장 죽여버릴 듯이 굴면서 좀 지나면 용서하고 복직시켜줬다.[63] 참고로 위에 서술된 구리수통 사건의 주역이 바로 정성근이다. 간언을 불충 수준으로 생각한 연산군이 보기엔 부왕에게 가장 떽떽거려놓고, 성종 사후엔 소식(小食)하고 심상(心喪)한 정성근이 고까워보였던 모양이다. 정성근은 연산군에게도 무례한 발언을 했기에 연산군은 이를 '간사한 거짓 충성'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그를 증오했다.[64] 이때까지 조선에서는 왕이 사망하면 수륙재라는 불사를 지내곤 했는데, 성종 때 숭유억불 기조가 강해지다 보니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란이 있었다. 이에 판단이 안 선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조언을 구했고 인수대비는 예로부터 해온 것이니 굳이 폐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고, 연산군도 조종조들이 다 했고 대행왕(시호, 묘호 받기 전 왕을 이렇게 칭함)께서도 선왕께 했으니 나도 대행왕을 위해 행하겠다고 하여 추진했다.[65] 이후 대간과 연산군은 묘호 문제로도 마찰을 빚는데 이때 연산군은 대간의 무례함에 폭발하였고, "위를 능멸하는 풍조를 가만히 둘 수 없다."라고 하여 훗날에 벌어질 일을 예고한다.[66] 다만 성종의 재가녀자손금고법은 과거 중 '문과' 응시를 금지한 것이지 무과와 잡과 응시는 가능했다. 물론 출세하기 위해서는 문과 급제가 필수적이었기에 큰 제약은 맞지만, 문과는 워낙 경쟁률도 세고 급제한다고 해서 바로 관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16세기 이후에는 임용되지 못한 과거 급제자들이 쌓여서 신규 급제자들은 장원 같은 압도적인 성적이 아니라면 임용 될 기회도 적었다. 그래서 양반 지위를 유지하고 먹고살기 위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무과에 응시하는 양반들도 꽤 있었다. 정조는 미임용된 과거 급제자들을 모아 교육하는 초계문신제라는 제도까지 운영할 정도였으니, 인사적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67] 경국대전은 성종 중기인 1485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고 그 전까진 계속 개수를 거치고 있었다.[68] 심지어 이 경우에도 그 자손이 어떠한 관직에도 오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69] 사족(지방 양반들)들이 농민에게 성리학적 도덕관념을 교육하는 활동을 말한다.[70]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還俗)시킨다는 법률. 거진 불교 말살 정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래 조선이 숭유억불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성종 이전의 왕들[110]은 불교의 세력이 더 커지는 걸 막고 한쪽으로는 왕가의 묘를 살피는 원찰에 내수사를 통해서 적당한 지원을 해주는 편이였다. 그에 비한다면 성종의 금승법은 조선 내 불교의 뿌리를 드러내서 독한 농약까지 발라버리는 법이라 할 수 있겠다. 세조의 경우 아예 불교 경전을 편찬하는 기관인 간경도감을 만든 왕이었다. 조카에 대한 죄책감이라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계유정난 이전의 수양대군 시절 이미 《석보상절》이라는 불교 서적을 집필했을 만큼 세조는 원래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이 간경도감을 손자인 성종이 폐지해 버린 것이다.[71] 불경 편찬을 한 걸 놓고 대간들이 걸고 넘어지자 성종을 불러서 "내가 덕종께서 살아 있을 적에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서 이러는데 대간들이 너무 반대합니다."라고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어머니가 하는 일이라는데 자식 입장에서 특히 유교 국가의 왕의 입장에서는 따를 수 밖에 없다.[72] 당시 물물교환 경제였던 조선에서 낙타 한 마리의 가격이 콩 400석이나 되었다.[73] 물론 자녀 숫자로는 조선 왕들 중 첫째가 아닌데, 그의 고조할아버지 태종이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어 1명이 많다.[74] 고대 중국에서부터 내려온 6가지 덕목(德目),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학(六學).[75] 다른 대신은 자신도 이랬다가 나은 적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76] 중종은 57세에 사망하였는데, 그 당시에 57세면 나름대로 오래 산 셈이다. 더군다나 아버지와 이복형이 모두 30대에 타계한 것은 물론 평균 수명도 짧고 의학도 많이 발달하지 못했던 이 시대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말이다.[77] 그나마 사냥을 즐기기는 했지만, 이조차도 말 타고 활 쏘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매사냥. 게다가 정말로 성종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었다고 해도, 대간에서 왕이라고 반대했을 게 뻔하다. 당장 태종과 연산군도 사냥 문제로 대간과 충돌했던 적이 다반사이니... 그리고 이 점은 비단 성종 말고도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단지 성종이 그들 중에서도 유독 가장 부지런한 축에 속했을 뿐.[78] 특히 연산군도 아버지처럼 개, 고양이, 매, 말을 좋아하고 사육할 정도로 동물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었다.[79] 다만 연산군일기 마지막에 연산군이 성종이 승하하였음에도 전혀 슬퍼하는 기색 없이 후원의 순록을 활로 쏘아 죽여서 그 고기를 먹고 놀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 이야기가 와전된 듯 하다.[80] 솔직히 이건 성종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세조가 싸놓은 무수한 똥들을 본인이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미처 다 치우지 못하고 결국 아들에게까지 물려준 셈이었다.[81] 대신은 성, 대간은 인을 지지했다. 그러나 대신들 중에도 의견이 엇갈렸는데 정승과 원로대신들은 '성종', 판서급 대신들과 참판 및 승지들은 '인종'을 지지했다.[82] 중흥 군주를 뜻하는 세종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문종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기는 했지만 신하들 전반의 분위기라기 보다는 허후와 정인지 두 사람의 의견에 불과했으며 문종이 반려한 후 더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다.[83] '인(仁)'은 당시 유학자들 사이에서 굉장히 고평가받는 묘호였으나 정작 이 묘호를 받아간 임금은 즉위 기간이 1년 밖에 안된 인종과 후대의 평가가 많이 박한 임금인 인조였으니 아이러니. 그래도 인종은 묘호 그대로 인자하기는 했다.[84] 명나라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85] 이건 대간들이 태조도 태조를 섬겼고 태종도 태종을 섬겼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원로대신들이 태조는 건국한 임금, 태종은 계승한 임금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사로운 칭호가 아니라고 반박했다.(실제로 대다수 국가에서 태종이라는 묘호를 볼 수 있으며 특히 태조가 없는 국가는 드물다.)[86] 참고로 명나라 인종의 묘호를 범할 수 없다는 정승들의 논리는 이후 끝까지 지켜지지는 못했는데 나중에 이러한 원칙을 다 무시하고 결국 인종이란 묘호를 올린 사례(조선 인종)가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87] 애초에 당나라 시기부터 묘호가 흔해터지기 시작해서 고려만 해도 원종 이후를 빼면 묘호없는 왕이 없다. 심지어 3개월간 재위한 순종도 묘호가 있다.[88] 물론 겉보기에는 같은 "대왕"이라도 시호를 못 받은 둘과 시호를 받은 성종은 차원이 다르다. 애초에 연산군의 "대왕" 존호는 재위 시절 붙은 것.[89] 애초에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만약 태조나 태종이 이런 선례를 만들었다면 "고려의 잘못된 관습을 고친다"고 해서 (국가의 자주성은 좀 낮아져도) 받아들여질 수 있었으나 이미 조선 중기에 접어들고 그 이전에 8명의 임금으로 인해 확고하게 세워진 전통을 뒤집을리는 없었다.[90] 당시 계해약조에 따라 일본인들은 대마도주의 주도로 조선과 교역할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이유로 조선에 와있는 일본인들이 많았다. 다만 무역용으로 정해진 항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왔다는 것을 보면 정규 무역을 위해 온 것은 아닌듯하다.[91] 이는 당연하겠지만 상중이기 때문이다. 흰 옷이 상복이고 상중에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92] 하, 은, 주[93] 문정왕후가 섭정을 거둔 이후부터는 윤원형을 조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시 왕권 강화와 외척 약화를 빼고는 이렇다 할 치적이 없는 편이다. 명종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도 알기 어려운게 문정왕후 사후 재위 기간이 2년밖에 안 된다.[94] 가령 문(文)과 무(武)가 골고루 발달했던 세종 시절에 비해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던 것 등[95] 홍살문(紅箭門)이나 정자각(丁字閣)을 위시한 부속 시설을 짓지 않고 광중(壙中)의 자리만 둘로 나눠서 만든 능. 왕과 왕비를 합장할 때 쓰이기도 했다. 세조가 석실의 무익함을 강조하며 비용을 줄일 것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96] 심지어 정릉처럼 시신은 행방불명이다.[97] 성종 이전에 조선왕릉은 주로 한양 주변인 경기도에 있었기에 왜적들의 표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선릉 근처에 있던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도 왜적들이 도굴을 시도했으나 회격이 너무 단단해서 다행히 훼손되지 않았다. 왜적들은 선정릉에서 성종능, 정현왕후능, 중종능 등 3개의 왕릉을 단단한 회격을 뚫고 힘들게 파헤쳤으나 가치있는 부장품들이 많이 나오지 않자 화가 나서 이들의 시신을 모조리 불태웠다고 한다. 이후에 왜적들은 조선 왕릉 도굴을 시도하지 않았다.[98] 성종과 정현왕후는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명의 딸은 시집도 가기 전인 10세 전후에 다 요절했고, 나머지 2명의 딸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조졸하였다. 하여 외아들이자 유일하게 생존한 자녀가 바로 중종인 것이다.[99]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차남이라 왕이 될 서열이 아니었는데도 1순위인 예종의 원자이자 사촌동생인 제안대군, 2순위인 세조의 장손이자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장인 한명회의 권력과 할머니 정희왕후의 지명으로 운좋게 왕이 되었다. 정현왕후 역시 평범한 명문가 출신의 간택후궁이었으나 원래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가 일찍 승하하고, 그 다음 계비인 폐비 윤씨가 폐비되는 바람에 운좋게 왕비가 된 인물이였다. 중종 역시 태어날 당시부터 이복형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된 상태여서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연산군의 즉위 후에도 가만히 있다가 중종반정으로 추대되어 운좋게 왕이 된 경우다.
[100] 전지하기를, "새로 정한 《대전(大典)》이 비록 원상(院相)의 수교(讎校)를 거치었으나 오히려 착오가 있을까 두려우니, 이극돈(李克墩)·최호원(崔灝元)·김유(金紐)로 하여금 다시 교정하게 하라." 하였다. (성종 1년 4월 6일)[101] 영성 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교정(校正)하여 올렸다. (성종 1년 10월 27일)[102] 명하여 《대전(大典)》 교정청(校正廳)의 당상 낭청(堂上郞廳)을 불러서 이들을 먹이고, 물품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다. (성종 1년 11월 5일)[103]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새로 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아직 반포하지 못한 조건(條件)을 오는 신묘년(1471) 정월(正月) 초하루부터 준용(遵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년 11월 8일)[104]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오는 갑오년(1474) 2월 초1일부터 행용(行用)하라." 하였다. (성종 4년 11월 14일)[105]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개찬(改撰)하여 중외(中外)에 반포(頒布)하였는데, 《대전》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던 것을 이름하여 속록(續錄)이라 하였다. 모두 72조(條)였는데, 아울러 반포하였다. (성종 5년 1월 2일)[106]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새로 교감(校勘)한 《대전(大典)》은 오는 을사년(1485) 정월(正月) 초 1일부터 시작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5년 12월 4일)[107]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감교(勘校)한 뒤에는 《대명률(大明律)》의 예(例)에 따라 경솔하게 어지러이 고치지 못하게 하고, 고치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법을 세워서 논죄(論罪)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자, 승지(承旨)들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윤당(允當)합니다." 하였다. (성종 15년 4월 8일)[108]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전일 내가 감교청(勘校廳)에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교정(校定)을 마친 뒤에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와 재상(宰相)들이 당부(當否)를 참고하게 하였으나, 이제 다시 생각하건대, 그 첨가하여 기록한 것은 다 《속전(續典)》에서 따온 것이므로 곧 선왕(先王)께서 이미 시행하신 법인데, 재상들이 각각 소견을 고집하여 논의가 어지럽게 된다면, 《경국대전》이 어느 때에 정하여지겠는가? 참고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겸교청에 묻도록 하라." 하였다. (성종 15년 6월 29일)[109] 대전 감교청(大典勘校廳)에서 일을 끝마쳤음을 아뢰니, 당상관(堂上官) 홍응(洪應) 등에게 필단(匹段) 1필(匹), 낭청(郞廳) 등에게 녹비(鹿皮) 1장(張)씩을 하사(下賜)하였다. (성종 15년 12월 21일)[110] 할아버지 세조와 숙부 예종. 내수사가 세조 때 만들어진 관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