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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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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용신
蔡龍臣
파일:1893_채용신_자화상.png
무관 시절의 자화상(1893년 작)
본명 채동근(蔡東根)
출생 1850년 2월 4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진장방계 삼청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사망 (음력) 1941년 6월 4일 (향년 91세)
전라북도 정읍군 신태인읍 육리#
본관 평강 채씨[1]
아명 용덕(龍德)
대유(大有)
석지(石芝), 석강(石江), 정산(定山)
경력 첨절제사 → 중추원의관 → 칠곡군수 → 정산군수
직업 관리, 화가
배우자 이용화(李龍華)

1. 개요2. 생애3. 석지 필법4. 대표 작품
4.1. 고종 어진4.2. 최익현 초상4.3. 황현 초상4.4. 운낭자상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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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한 한국 근대기 초상화가[2]. 사진처럼[3] 정밀하고 섬세한 ‘석지필법’을 창안했고, 고종 어진을 비롯한 200여 점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사진술을 받아들여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채용신은 1850년 2월 4일 한성부 북부 진장방 진장방계 삼청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아버지 채권영(蔡權永)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정겸(朴正謙)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동근(東根)이고, 아명은 용덕(龍德). 채용신의 부친 채권영은 궁중에 참빗을 납품하게 되었는데, 이때 어린 채용신이 빗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맡았다. 그 솜씨가 워낙 탁월하여 그 소문이 궐내에 자자하였고, 이 소문을 들은 대원군의 요청으로 21세인 1871년 무렵에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를 그렸다. 대원군은 그가 그려준 초상화를 보고서 탄복했다고 한다.

채용신은 36세 되던 1886년무과에 급제하였고, 그 전까지 사용하던 '동근'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용신(龍臣)'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관직재임 기간은 이때부터 1906년 정산군수직을 물러날 때까지 약 20년에 이르는데 중간에 두 차례의 공백기를 빼면 16년 간 관직에 있었다.

1899년 49세 때 종3품 첨절제사 직에서 물러나 전주로 내려갔으나 1900년 3월 23일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어진화가로 발탁됐고#, 태조·고종 등 왕의 초상화를 그렸다. 고종이 몹시 만족하여 중추원 의관에 임명됐다. 이 동안 그는 덕망 있는 선비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초상을 많이 그려주었다. 이후 종4품 정산군수(定山郡守)가 되었으나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통감부가 설치됨과 동시에 정산군수를 그만두고, 다시 전라도로 낙향하여 전업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09년 익산군에서 금마산방을 운영하였고, 이후 변산, 고부군, 나주군, 남원군, 칠보 등지를 10여년 동안 전전하다가, 1923년 정읍군 신태인에 채석강도화소를 설립해 아들 채상묵, 손자 채규영과 함께 초상화 공방을 운영하며 정착하였다. 1919년 채상묵이 경성부사진관을 개업하였고 그 아내 이홍경은 한국 최초의 여성사진사가 되었는데, 4년 후 정읍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아 잘 되지 않았던 듯하다.

이후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입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당시 제작된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우국지사의 초상으로, 대개 대가 없이 그려준 것들이다. 둘째는 주문 제작화로써, 합당한 대가를 받고 그려준 것이다. 특히 후자는 광고전단지를 만들고 거기에 작품가격을 적어놓는 등 근대전업화가의 출현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서 사회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말년에 주문을 받아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대부분 사진을 이용해 그렸다. 그는 먼저 사진을 20×25cm 정도로 인화한 후, 그 사진을 보면서 밑그림 없이 얼굴 모습대로 호분에 아교를 섞어서 채색하였다. 얼굴은 먼저 극세필로 그리고 머리와 몸체는 나중에 그렸다고 한다.

1929년(79세)에 그의 부인 전주 이씨 이용화(李龍華, 1863-1929)[4]와 사별하였고, 1941년 6월 4일 채용신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묘소는 익산시 왕궁면 장암리 선산에 있다.

일본인들이 채용신을 높이 평가해, 그의 사후 3년만인 1943년 6월에는 일본인에 의해 유작(遺作)전이 경성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는 서울 화단에서 활약하지도 않았으며 도화서 화원도 아니었지만 왕의 그림을 그린 어진 화가였으며, 이후 양반출신 전업화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화가였다.

3. 석지 필법

채용신은 전통의 초상화법에 새로운 서양화법을 구사하여 이른바 '석지 필법'을 완성했다. 극세필의 붓으로 수많은 점을 찍어누르듯 그려, 인물의 수염 하나, 주름 하나까지 실제적 입체감이 나타나도록 표현하였다. 서양화의 명암법을 수용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살결을 살리면서 붓질을 거듭하여 안면에 음영을 줌으로써 실체감을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초상사진 기법으로부터는 홍채부분에 반사광을 살짝 집어넣는다거나 배경부분을 어둡게 채색함으로써 인물과 구분시키는 등의 일부 아이디어를 따왔지만, 당시 초상사진에서 유행하던 음영법 색채가 배제된 초상기법이나 번쩍거리는 광원의 반사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사진과는 다른 회화로서의 특장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

그의 초상화 대부분은 모두 정면상인데, 이는 화면에서 인간 존재의 강한 부각을 구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된다. 전체적인 인물의 비례와 손의 생김새 마디마디 주름까지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안경, 부채, 서첩 등 사대부들이 즐겨 쓰던 소품을 활용하여 인물의 신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였다.

4. 대표 작품

4.1. 고종 어진

파일:채용신고종어진.jpg

4.2. 최익현 초상

파일:PS01001001_ssu001_2016_1024223719622_ssu001452-00.jpg

4.3. 황현 초상

구한말 애국 선비인 매천 황현의 초상화. 본인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고 황현이 1909년 서울의 천연당(天然堂)사진관[5]에서 찍어 두었던 사진을 보고 황현 사후인 1911년 5월에 그린 것이며, 사진 두 점과 함께 대한민국의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평범한 갓과 도포를 입고 서양식 탁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지만, 채용신은 의상을 선비의 상징인 정자관심의로 바꾸고 돗자리에 정좌한 자세로 바꿔 그림으로써 황현의 애국심과 순국을 추모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4.4. 운낭자상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486호. 1914년에 그린 초상화로, 그림의 주인공은 홍경래의 난 때에 지역 수령들 중 유일하게 홍경래군에게 저항하다가 살해당한 가산군수 정시(鄭蓍)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치른 공으로 면천되고 사후에는 열녀각인 평양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고 전해지는 의기(義妓) 최연홍(崔蓮紅, 1785~1846)이다.
살구색(혹은 옅은 미색)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 남자 아이를 안고 있는 전신입상으로, 외씨 버선의 한쪽 발이 살짝 나온 자태와 가채를 얹지 않고 빗어 넘긴 머리 모양을 하고 있으며, 부드러운 담채와 간략한 필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위에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世像), 왼쪽 중간쯤에 '갑인늑월석지사'라고 적혀있고 그 아래에 '석지'(石芝), '정산군수채용신신장'(定山郡守蔡龍臣信章)이 날인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엄마와 아기>를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서 근대기 회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5. 여담

  • 배우 채시라가 채용신 화백의 현손이다.[6]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종 2품 무관이셨던 석강 채용신 한국 화가를 고조할아버지로 둔 덕에 어려서부터 미술, 특히 세밀화 그리기를 좋아했던 나”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7]
  • 채용신은 물감을 직접 만들어 썼다고 전해진다. 소금물에 놋쇠그릇을 오랫동안 담가 놓았다가 녹을 긁어내 물과 함께 연한 숯불로 약 하루 동안 끓여내면 소량의 액이 남는데 이것은 초상인물의 의복 채색으로, 피부색은 썩은 짚을 끓여서 만든 액을 사용했다고 한다.
  • 살아온 시기(1850~1941)를 보면 사진이 충분히 남아있을 듯한데[8] 사진들이 어째서인지 남겨놓은게 거의 없다. 아마 일제강점기 쯤 국내나 해외등으로 반출되거나 행방불명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


[1] 22세 동(東) 항렬.[2] 조선 시대에서 화가는 양반 신분이며 초상화 1장 가격이 노비 3명 가격이었다.[3] 조선시대 초상화는 감상용 미술품이라기보다 제사 등에 사용하는 의식용이었다. 지금의 제사에 올리는 영정사진과 마찬가지 역할이었다. 당시 초상화는 ‘털끝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는 사실적 묘사를 바탕으로 대상의 외형뿐 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표현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를 추구했다.[4] 이병림(李炳林)의 딸이다.[5] 1907년 서예가인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관.[6] 채용신(蔡龍臣)-채상묵(蔡尙默)-채규대(蔡奎大)-채영석(蔡英錫)-채시라(蔡時那).[7] 나이 차이가 별로 안나는게 이상하다 싶으면 채용신의 별세 연도를 보자...[8] 1941년 일제감정기 독립까지 단 4년 정도 남았을 때 까지 살다 91세에 생을 마감한 장수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