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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於義宮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즉위하기 전에 살던 잠저[1]이며 효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름 '어의(於義)'의 유래와 뜻은 확실히 모르나, 1743년(영조 19년) 4월 13일 자 《승정원일기》 기사에 따르면 '거의궁(擧義宮)'이 '어의궁(於義宮)'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2]
어의궁은 다른 별궁들과 다르게 상어의궁과 하어의궁으로 나뉘었다.
2. 상어의궁(上於義宮)
인조의 잠저이다. 한성부 중부 경행방, 현재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일대에 있었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유지명잠룡지(有池名潛龍池)'라 하여 이 곳에 잠룡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한다. 인조는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으로 태어나 쭉 아버지의 집 송현궁[3]에서 살다가 훗날 인열왕후가 되는 한씨 부인과 혼인 직후 따로 나와 향교동에 정착했고 이 곳에서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을 낳았다.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면서, 능양군이 살던 집은 어의궁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가 폐궁시켰고, 인조의 어휘 등을 봉안하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
영조는 1743년(영조 19년)에 인조반정 120주년을 기념하여 어의궁을 방문한 다음, 직접 쓴 '용비중흥(龍飛中興)'이란 글을 현판에 새겨 걸었다. 그리고 13년 뒤에 영조는 다시 어의궁을 찾아 이 곳 봉안각에 배례하고 현판 '인묘고궁(仁廟古宮)'을 걸게 했으며 이후로도 몇 번 더 거둥해 전배를 행했다.[4]
이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종 연간에 서부 인달방[5] 옛 청평위궁[6]으로 옮겨졌다.[7] 1907년(융희 원년) 궁내부령으로 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폐지하고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가면서 어의궁도 황실 재산에서 국가 재산이 되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법관양성소가 옮겨오려 했으나 궁내부에서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경무과 분실 및 창고를 설치해 활용했다.[8]
경행방 상어의궁 자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짐작하기 어려우며, 옮긴 후의 인달방 상어의궁 자리는 지금의 서울특별시경찰청 언저리이다.
3. 하어의궁(下於義宮)
<colbgcolor=#bf1400> 하어의궁 터 안내판 |
<colbgcolor=#bf1400> 〈인평대군방 전도〉에 나온 하어의궁의 모습 |
고종 즉위 이후 어의궁은 가례 공간의 기능을 잃었다. 그리고 1868년(고종 5년)에는 건물들이 경복궁으로 옮겨져 동궁의 정당인 계조당 권역 공사에 쓰였다.# 고종은 어의궁 자리에 궁 터 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우게 했다.
조양루(朝陽樓)로도 불렸는데 낙산 서쪽에 있어 아침볕을 잘 받아서 붙힌 별칭이다.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집과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인평대군 집은 반대로 저녁볕을 잘 받아서 석양루(夕陽樓)로 불렸다고.
4. 여담
현재는 한국은행의 후문 앞에 위치한 하마비가 유일하게 남아있다.[12]한국은행 후문 앞에 위치한 하마비가 어의궁의 하마비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이는 저경궁의 하마비로, 어의궁과는 연관이 없다.
- 1950년도까지는 어의궁 석어당(조양루)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이후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 공식 후계자가 아닌 왕족이 왕이 되기 전 살았던 집.[2] 조은주 著, 《근대기 한양도성 안 궁묘와 궁실의 변용》, 2012, p.38.[3] 훗날의 저경궁이다.[4] 조은주 著, 《근대기 한양도성 안 궁묘와 궁실의 변용》, 2012, p.38 ~ 39.[5]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6] 숙명공주(효종의 딸) - 청평위 심익현 부부가 거주했던 궁.[7] 조은주 著, 《근대기 한양도성 안 궁묘와 궁실의 변용》, 2012, p.81.[8] 조은주 著, 《근대기 한양도성 안 궁묘와 궁실의 변용》, 2012, p.232 ~ 235.[9] 대학로 쪽이다.[10] 철종의 강화도 잠저와는 이름만 같다.[11]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예식을 올리고 신부를 맞아오는 절차.[12] 서울 중구 남대문로3가 110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