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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93a32><colcolor=#fff> 오노 요코 小野洋子 | Ono Yoko | |
영어명 | Yoko Ono Lennon 요코 오노 레논 |
출생 | 1933년 2월 18일 ([age(1933-02-18)]세) |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現 일본국 도쿄도 치요다구) | |
거주 |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
직업 | 음악가, 행위예술가 |
신체 | 157cm |
학력 | 세이난 소학교 (졸업)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철학 / 중퇴) 사라 로렌스 칼리지 (영문학 / 중퇴) |
배우자 | 이치야나기 토시(1956 결혼~1962 이혼) 앤서니 콕스(1963 결혼~1969 이혼) 존 레논(1969 결혼~1980 사별) |
파트너 | 샘 허배토이(1981~2001) |
자녀 | 딸 쿄코 챈 로즈매리 오노 콕스(1963년생) 아들 션 레논(1975년생) |
링크 | | | 개인 | 공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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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레논과 오노 요코 |
미국에서 활동한 일본의 설치미술가이자 행위예술가. 대중적으로는 존 레논의 아내로 유명하며, 현대 예술에 많은 업적을 남긴 예술가이기도 하지만[1] 후기 비틀즈의 불화에 영향을 끼쳐서 비틀즈의 팬들에게는 '일본에서 온 희대의 마녀'라고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이름 표기
풀네임은 요코 오노 레논(Yoko Ono Lennon). 일본인으로서의 이름 한자 표기는 "小野洋子". 다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オノ・ヨーコ'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洋子'라는 한자 이름은 존 레논이 비틀즈 시절 만든 곡 "Julia" 의 'Ocean Child' 라는 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3. 생애
오노 요코는 오노 에이스케와 야스다 이소코의 장녀로 태어났다. 증조 할아버지는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한 반 도쿠가와 막부 운동에 참여한 자작이었다고 한다.[2] 부친은 전도유망한 은행가, 모친은 야스다 재벌을 일으킨 명문 권세가의 야스다 젠자부로의 딸이었다.[3] 오노 요코는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의 도시와 일본을 오가며 살았지만 유년기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보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도쿄 대공습을 겪었고 이후 피난길에서 기아에 시달리며 어려운 시기를 지냈다. 상황이 진정되자 가쿠슈인 여자 중・고등과를 거쳐[4] 가쿠슈인 대학 철학과에 진학했지만 1년을 보낸 후 다시 부친의 부임지인 뉴욕으로 이주하여 이후 계속 미국에서 거주했다. 그녀 스스로는 이민자로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모양으로, 자신을 '오렌지도 레몬도 아닌 자몽' 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3.1. 비틀즈와의 관계
오노 요코는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두번째 아내이다. 또한 둘이 결혼할 때 즈음 비틀즈의 불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비틀즈 해체의 원인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만남 사이에 화이트 앨범을 녹음했는데 결과물과 이후 내부의 상황을 말하는 인터뷰를 보면 당시 밴드가 화합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비틀즈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던 레논 부부와 다른 멤버 사이의 갈등이 비틀즈 해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당시 비틀즈에는 그녀 이외의 내,외부적인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요코는 비틀즈의 해체는 보다 내부적인 이유에서 기인했다고 말한다. 폴 매카트니도 인터뷰를 통해 그녀는 분명히 비틀즈의 해체에 책임이 없다고 말했고, 마찬가지로 조지 해리슨과[5] 링고 스타 역시 비슷한 어조의 인터뷰를 한 바 있다. 또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가 존 레논을 삶을 다른 방식으로 끌어들여 존이 성공적인 음악 커리어 2막을 시작하게 된 것 같다고 밝혔다.
비틀즈 해체에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제 와서는 꽤나 복잡한 문제였다고 보여진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유로는 상기한 오노 요코를 둘러싼 갈등을 비롯해 매니저인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사망과 그들이 세웠던 회사인 애플의 경영을 두고 벌인 불화, 음악적 견해 차이로 인한 멤버들의 솔로 커리어에 대한 의지 등을 꼽을 수 있다. 비틀즈의 해체를 다룬 롤링스톤의 특집 기사.
이처럼 과거와는 달리 현재는 비틀즈 해체에 대한 오노 요코의 책임론이나 비판은 많이 줄어든 상태다. 겟 백 세션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음악에 개입했다는 소문은 비틀즈: 겟 백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면서[6] 완전히 허위로 드러났고, 음악에 개입했다는 것 역시 쉬는 시간에 재미삼아 하는 밴드 잼에 간간히
2010년대 중후반에 들어선 진보계 성향의 리스너들과 북미의 팬들을 중심으로 오노 요코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은 당시 영국의 인종 차별과 성 차별적 요소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비틀즈의 해체라는 큰 사건에 있어, 아시아인 여성으로서 필요 이상의 비난을 받았던 오노 요코가 일방적으로 타블로이드지의 가십을 위한 타겟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예술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 역시 오노 요코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주장한다. 이외에도 후술되어 있듯 본래 오노 요코와의 만남이 아무리 영국이라 한들 터부시 되는 불륜이었다는 점, <Hey, Jude>에서 알 수 있듯 전처 소생의 아들에게 존 레논이 무심했던 점 등도 오노 요코를 악마화하는 원인이 되었다.[7]
3.2. 존 레논과의 만남 그 후
오노 요코는 존 케이지의 작업 Notations에 참여하면서[8] 존 레논과 엮이기 시작했다. 후에 둘의 만남은 불륜으로 번졌다. 존 레논은 아이가 있는 유부남이었고, 오노 요코 또한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혼하지 않은 기혼자였다.불륜으로 시작한 둘의 결혼에는 계속해서 불륜을 비롯한 문제가 있었고 둘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고 알려졌다. 불륜에 더해 존 레논이 마약 혐의로[9] 미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하자 영주권자였던 오노 요코는 자신의 커리어를 중시해 미국에 남기를 택했고, 둘은 결별했다. 존 레논은 결국 승소해 추방되지 않았지만 둘은 18개월 동안이나 헤어졌었고, 이것이 유명한 잃어버린 휴일 기간이다. 이때 존 레논은 오노 요코의 제안으로 레논 부부의 비서였던 메이 팡과 만남을 가졌다.[10]
존 레논과 자식으로 션 레논을 두고 있다. 일본식 이름은 '오노 타로'. 션도 아버지를 따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본 전범행위와 욱일기를 옹호하는 과격한 발언으로 유명하다.[11]
오노 요코는 존 레논이 사망한 이후 예전부터 불륜 상대였던 유명 디자이너 샘 허배토이와 만남을 이어갔다. 존 레논도 살아 있었을 때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오픈 릴레이션십에 가까운 결혼 생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2]
이후 왕성한 활동을 보였지만, 2021년 이후로는 잠정 은퇴했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레논 가 대변인 역할도 션 레논에게 넘어간 상태.[13]
4. 작품 활동
오노 요코는 플럭서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명이다. 주로 설치미술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 실험적인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고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관념적인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그녀의 행위예술과 설치예술은 여러 가지 작품이 있는데 주로 반전과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그 주제로 하며 아방가르드한 소재로 표현을 하였다.오노 요코의 예술 활동의 시작은 음악이었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오노 에이스케는 원래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사정상 은행원이 되었으며,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딸 요코에게 대신시키고자 했다. 오노 요코는 어린 시절부터 정통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기성 교육을 좋아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대학 시절에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의 현대음악을 접하고 이에 매료되게 된다. 특히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룰루 같은 오페라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그녀의 첫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주로 베르크 풍의 12음 기법에 기반한 음악 작품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요코는 자신의 기법이 아닌 기성 작곡가들의 방법론 아래에서 작업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꼈고, 좀 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자유로운 예술을 추구하게 된다.
오노 요코의 예술관은 1958년 존 케이지의 실험음악 강좌를 청강하며 크게 변하게 된다. 케이지는 현대 음악의 작곡이 단순한 청각에서 벗어나 시각적, 문학적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미리 작곡된 곡이 아닌 우연성, 불확실성을 기초로 한 자연적 작곡을 강조했다. 이는 이후 오노 요코의 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요코는 기존의 쇤베르크식 12음렬 작법에서 벗어나 우연성에 기반한 전위적 음악을 시도했고, 더 나아가 음악을 넘어 설치미술, 영화, 행위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동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 부모로부터 일본의 전통 예술과 문화를 접했고 이를 서양 예술사조와 적극적으로 결합하고자 했다.
1960년대부터 오노 요코는 전위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는 존재가 된다. 그녀는 주로 도쿄와 뉴욕, 런던을 오가며 활동했으며, 뉴욕의 플럭서스 신의 주요 예술가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요코의 파격적인 작품과 젊은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독특한 위치는 그녀에게 큰 유명세를 안겨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계 내부의 인종차별, 성차별과 씨름해야 했고, 과도한 유명세는 요코를 마이너한 전위예술계와 대중예술계 사이에서 동떨어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미묘한 입장으로 만들었다. 오노 요코는 이러한 막막한 상황에서 존 레논과 만났고, 대중음악을 자신의 돌파구로 삼기로 한다.
이후 오노 요코는 1968년부터 존 레논과의 악명높은 합작 '실험 앨범'을 시작으로 대중음악에 손을 뻗치기 시작한다. 초기에는 'Yoko Ono/Plastic Ono Band', 'Fly' 같은 프랭크 자파, 캡틴 비프하트를 연상시키는 아방가르드에 가까운 음악을 했으나[14] 70년대 중반부터는 좀 더 팝적이고 듣기 쉬운 음악으로 변화했다. 1981년작 'Season of Glass'에서는 뉴 웨이브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오노 요코의 음악은 기존의 관습적인 대중음악의 창법과는 거리를 둔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같은 괴성과 비명을 위주로 한 가창, 예측할 수 없는 기괴한 곡 구조 등 상당히 실험적인 성향을 띤다. 재미있는 점은 그녀의 음반에 참여한 인물들이 존 레논을 비롯해 에릭 클랩튼, 링고 스타, 짐 고든 등 대부분 실험 음악과는 거리가 있는 대중적인 뮤지션들이었다는 건데, 이런 연주자들로도 그녀의 의도대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곡들을 녹음할 수 있었을 정도로 음악적 주도권을 확실히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난해한 음악성으로 로버트 크리스트가우, 레스터 뱅스, 피에로 스카루피 등 일부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지지를 얻었지만 일반 대중들에게는 큰 혹평을 받았다. 대중음악가로서 오노 요코의 대표작은 아방가르드 음악으로는 앞서 언급된 'Yoko Ono/Plastic Ono Band', 'Fly'가, 팝 성향의 작품으로는 'Approximately Infinite Universe'와 'Season of Glass' 등이 꼽힌다.
Yoko Ono "Cut Piece" Performance Art |
주요 작품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은 행위예술인 'Cut Piece(조각내기)'. 1964년 도쿄의 소게츠 아트 센터에서 첫 공연된 이 작품은 그녀의 대표적인 행위 예술 중 하나로 기록될 만큼 유명하다. 그 내용은 요코가 무대의 중앙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고 그 공연을 구경하는 참가자들이 한 명씩 와서 가위로 알몸이 될 때까지 옷 조각을 하나하나 잘라 내는 것이다. 요코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연대와 사랑을 주요 주제로 하여 성(性)과 성차별, 그리고 인간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한 거대한 우주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다.
존과 그녀를 처음 이어줬다고 알려진 작품도 유명하다. 존 레논이 1966년 처음으로 요코의 전시회에 왔는데 천장에 하늘이 그려져 있고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사다리를 올라가 천장을 자세히 본 존 레논은 거기서 "yes" 라고 쓰여진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긍정적인 메시지에 처음으로 반했다고.[15] 이것은 '천장의 그림/예스 페인팅(天井の絵/イエス・ペインティング)'이라는 1966년 작품으로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에도 선정된 일본 현대 설치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1964년 출판한 '자몽(Grapefruits)' 작품집 역시 오노 요코의 주요 작품으로 꼽힌다. 서적 형태로 된 이 작품은 총 5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으며 '천장의 그림'처럼 타이포그래피와 언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자몽'은 1960년대 출판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며, 초기 개념 미술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여겨진다.
페미니스트로, '모든 여성은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건 여성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나쁘지 않다.' 등의 발언을 하였고, 존 레논도 그녀의 영향을 받아 페미니스트가 되었다.[16] 페미니즘에 관련된 전시회나 작품도 많이 했다.
2001년부터 'YES YOKO ONO'라는 이름의 회고전을 개최해 전 세계를 순회했으며, 이 과정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3년에 전시회로 내한을 했었다. 전시회 행사장에 참여하여 그곳에서도 소리를 지르거나 도자기를 깨뜨리는 등의 기괴한 퍼포먼스를 행하였다고 한다. 이날 취재진들이 와서 존 레논에 대한 질문을 몇몇 했으나, 주최측에서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을 엄격하게 통제한 탓에 인터뷰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이 'YES YOKO ONO' 전시는 2001년 국제 미술 평론가 협회의 최우수 전시 상을 수상했다.
2009년, 그 동안의 예술적 공적을 인정받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오노 요코가 20세기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거물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세부적인 평가에 있어서는 크게 이견이 갈린다. 작품 성향은 순수예술에 가깝지만 대중음악가 비틀즈의 존 레논의 배우자로서 유명한 셀레브리티의 자리에 올랐고, 또한 본인의 여러 구설수 등으로 인해 지나친 과소평가와 과대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가 그간 예술사에서 전례가 없던 희귀한 케이스임에는 틀림없다.
5. 레논-요코 평화상
2002년 오노 요코는 자금 $50,000을 들여 레논-요코 평화상을 제정하였다. 남편인 존 레논과 자신의 성을 따서 지은 이 상은 세계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한 개인 및 단체에게 수여한다. 수상 자격은 요코 개인이 선정한다고 한다. 매년 2년에 한번씩 수상을 진행했으나, 2020년부터 수상이 중단되었다.레이디 가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앨리스 워커 등이 이 상을 받았으며 국경 없는 의사회와 롤링 스톤의 창업자인 젠 웨너도 수상하였다. 특이하게도 2008년에는 아이슬란드가 국가 차원으로는 처음 수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지난 16년동안 27명의 개인/단체가 수상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레논-요코 평화상 항목 참조.
6. 논란 및 비판
비틀즈의 관계자들은 대체로 비틀즈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조지 마틴, 브라이언 엡스타인, 피트 베스트는 물론이고 비틀즈 멤버들의 아내들도 비틀즈 팬들에게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유독 오노 요코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싸늘한 편이다. 오노 요코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다음과 같다.존 레논의 유산으로 줄리안 레논과 오노 요코는 소송을 벌여야 했다. 존 레논이 유언장에서 줄리안 레논의 몫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은 기나긴 소송 끝에 유산의 일부를 찾았다. 이후 줄리안 레논은 아버지의 유품이 흩어진 상황과 자신이 존 레논과 관련된 모임에서 의도적으로 제외되는 것에 대해서 오노 요코를 비판한 적이 있다. 반면 줄리안 레논은 션 레논과 비교적 가까운 사이라고 알려져 있다.
레논-매카트니의 표기와 관련하여 폴 매카트니와 논쟁이 있었다. 폴 매카트니가 Yesterday를 비롯한 자신이 작곡한 몇 곡에 대하여 작곡자 표기를 반대로 하기를 원하자 오노 요코는 반대했다. 이후 폴 매카트니가 자신은 지금의 표기에도 만족한다고 말하면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또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면서도 유부남인 존 레논과 불륜을 저질러 같은 여성인 신시아 레논에게 큰 고통을 준 일이 비판받는다.
6.1. 끔찍한 가창력
[17]
본업이 가수가 아니라 행위예술가임을 감안해도 가창력은 굉장히 끔찍한 수준이며, 아시아계 특유의 영어 발음까지 겹쳐 자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에서 전설의 더티 맥의 Whole Lotta Yoko에서도 괴성을 마구 질러대서 본 곡의 평가가 매우 나쁜 원인이 되기도 했다.[18] 유튜브 등지에서는 오노 요코의 가창력이 끔찍한 가창력의 기준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더 섀그스를 두고 "제2의 오노 요코"라고 칭하거나, 프레디 머큐리의 전설적인 Immigrant Song 라이브 보컬을 오노 요코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 밖에 합성물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오노 요코가 음악에 완전히 무지한 까막눈은 아니었다. 존 레논은 악보를 읽지 못했지만, 오노 요코는 악보를 읽을 수 있었다. 레논은 리버풀의 스쿨 밴드로 음악을 시작한 데 반해 요코는 어렸을 때부터 클래식 음악에서 현대음악까지 공부했기 때문에 노래를 못했던 것과는 별개로 음악 이론에는 빠삭했다. 차라리 작사/작곡만 했으면 문제가 없었을텐데 노래까지 욕심내서 문제가 된 셈이다.
반대로 행위예술/전위음악 쪽에서는 별로 비판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진지한 분석 대상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현대 예술과 대중 간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심심치 않게 언급된다.
‘전위 음악을 하는 이라면 누구든 애초부터 일정 정도의 적대감과 경멸을 감수할 각오를 하기 마련이다. 그게 다름아닌 오노 요코라면…가시돋친 말이나 야유가 비례해서 늘어나기만을 기대할 수 있을 뿐. 대다수 사람들이 요코의 특기인 막나가는 지저귐 같은 데 취미가 없어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설령 그녀가…아레사 (프랭클린)처럼 노래한다 해도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 레스터 뱅스(Lester Bangs), [Yoko Ono/The Plastic Ono Band](1970) 리뷰, [롤링 스톤] 77호.
그와 같은 음악사적인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 기나긴 더블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쉼없이 감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여분은 예사로 넘기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귀를 괴롭히는 오노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강철같은 신경을 지닐 것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뾰족한 못으로 양철판을 그을 때나 칠판 위에서 백묵이 잘못 미끄러질 때 나는 삑 소리에 소름끼쳐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음반은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런 날카로운 소리들을 견뎌낼 수 있다 해도, 문자 그대로 무의미한 고함과 비명, 괴성, 신음의 연속을 주의깊게 듣고 있기란 여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 Yoko Ono And The Plastic Ono Band, [Fly], weiv 리뷰
6.2.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존 레논과 야스쿠니 신사에 간 모습 |
특히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비틀즈 팬들에게 있어선 1971년 1월 야스쿠니 신사를 남편인 존 레논과 같이 방문해 논란이 되었다. # 다만 이건 재반박 여지가 있는게, 애초에 야스쿠니 신사가 정치적으로 본격 문제가 된건 도조 히데키 등 14명의 A급 전범이 몰래 합사된 1978년부터다. 물론 전에도 전범들이 아예 합사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정치적으로 본격 이슈가 된건 저때부터라 오노 요코 입장에선 야스쿠니 신사가 논란이 되는 장소라는건 당시엔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공부 안하고 뭐했냐고 하면 사실 할 말이 없어진다. 인간은 누구나 무지할 수 있고 이건 죄가 아니다. 다만 인식한 이후에 어떤 행동을 취하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일뿐.[19]
7. 수상
8. 여담
- 다이제 사건이 유명하다. 화이트 앨범 세션 당시 녹음실에 온 오노 요코가 조지 해리슨의 개인 사물함을 뒤져서 찾아낸 다이제를 몰래 먹은 적이 있는데 당연히 조지는 빡칠대로 빡쳐서 요코에게 온갖 쌍욕을 퍼부었고 이것이 존과 조지의 싸움으로 크게 번졌다고 한다.[20] 지금도, 외국의 뉴스사이트에서 요코와 관련 기사가 올라오면 "됐고 조지 다이제나 돌려줘라."같은 댓글이 종종 달린다.
폴 매카트니와 나름 애증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작곡가 표기 문제로 법적 소송도 몇 번 치렀지만 비틀즈 관련 행사 때는 매번 같이 만나 함께 인증샷을 찍어주신다.
- 언젠가부터 요코의 파파라치 사진에 30대의 젊은 남자와 같이 다니는 사진이 자주 포착되어 그 남자가 요코의 새로운 애인이라는 루머가 있었으나, 그 남자는 코너 모나한으로, 그냥 요코의 작업을 도와왔던 조수쯤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 페이스북을 보면 요즘은 환경운동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 존 레논과의 결혼을 비롯한 여러 가십을 통해 이름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중들과 유리된 현대 예술의 특성상 그녀의 작품이나 발자취, 영향력 등은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오죽하면 남편 존 레논이 오노 요코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명 예술가"라 지칭했을 정도.
- 현대 예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예술가인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틀즈의 존 레논과 결혼한 일본인이라서 그런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오노 요코를 매우 좋게 보고있다. 운명적인 환상의 커플로 여기며 대중매체에도 비틀즈나 비슷한 패러디에서 둘을 언급하며 찬양일색일 정도. 대표적으로 크레용신짱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에서 둘을 패러디한 악당(켄&챠코)이 나오는데 다른 빌런들과는 남다른 카리스마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첫 작품 '우람바나의 숲'은 존과 요코가 1979년 일본 방문 중에 존에게 벌어진 사건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다.
- 플럭서스 운동의 주역으로서 동시기에 활동하며 큰 업적을 남긴 아시아인 예술가로서 백남준과 자주 비견되며, 실제로 둘 사이에 사적인 교류도 많았다. 그러나 60년대 이후로는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에 집중하고 오노 요코는 대중음악에 발을 들이며 관계가 약간 뜸해진 적도 있었다. 다만 말년까지 친분은 계속 이어온 듯 하며, 2006년 백남준이 사망하자 직접 추모예술회를 열기도 했었다. #
[1] 플럭서스 계열에 속한 유명한 아방가르드 행위예술가인 오노 요코는 플럭서스의 창시자인 조지 마치우나스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같은 계열의 존 케이지와 백남준과도 친분이 있었다.[2] 요코의 할아버지인 에이지로(小野英二郎)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서 딸은 가세 도시카즈(加瀬俊一)라는 일본 제국시기부터 활동했던 일본 외교관과 결혼했고, 그 자식이 다름아닌 '추한 한국인'의 저자인 일본 극우주의자의 거두 가세 히데아키다.[3] 야스다 젠자부로는 슬하에 오노 요코의 어머니를 포함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이중 3남을 가부키 가문 마츠시마야로 태어나자마자 양자로 입적시켰기에 가부키 명문가와의 인연도 있다. 현 마츠시마야의 당주인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과는 내외종간으로 외사촌 동생에 해당된다.[4] 아키히토, 미시마 유키오와 동창이었다.[5] 한 두명의 여성이 네 남자의 관계를 단번에 깬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비틀즈 해체에 오노 요코의 책임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린다 매카트니 역시도 요코 만큼은 아니지만 비틀즈 해체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비난받던 상황이었다. 둘은 비영국인 (린다는 미국인, 오노 요코는 일본인.)에 이혼 경력, 남편들과 별개로 자기만의 커리어가 있던 여성 예술가였기에 편견의 대상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6] 멤버들이 진지하게 연습할 때는 존 레논 옆에 앉아서 잡지를 보거나 뜨개질을 하는 등 조용히 멤버들을 방해하지 않았고, 린다 매카트니와 함께 웃으며 잡담을 나누는 모습도 포착되었다[7] 물론 존이 내팽겨친 전처의 아들의 경우 설령 오노 요코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한들, 후처로서 연민의 손길을 내미는 것 역시 욕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부양 건에 대한 문제는 불륜을 선택한 존 레논이 근본적인 책임이 있었다.만악의 근원[8] The Word의 원고가 포함되어 있다.[9] 존 레논의 반전 운동이 미국 정부에 거슬렸다는 이야기도 있다.[10] 메이 팡은 요코와 달리 존에게 줄리안 레논과 만나기를 권유했다. 요코 때문에 아버지를 못 만나던 줄리안은 이때 짧지만 아버지와의 시간을 보냈다.[11] 모 한국인 유튜버와 DM으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12] 서양에는 이러한 오픈 릴레이션십 관계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국왕인 찰스 3세의 부인인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경우, 이미 결혼한 남편 앤드루 파커 보울스가 있었지만 결혼 생활 내내 찰스 3세와 애인관계를 이어갔다. 다만 카밀라와 앤드루는 결혼할 당시부터 오픈 릴레이션십 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앤드루 역시 다른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고, 1995년 이혼할 때도 좋게 합의하며 마무리되었다. 두 사람은 현재까지도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2005년 찰스-카밀라의 결혼식과 2023년 대관식에 앤드루가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반대로 찰스 3세의 경우 다이애나 스펜서와 이러한 합의 없이 멋대로 카밀라와 불륜 관계를 이어가 현재까지도 비판을 받고 있다.[13] 아무래도 90세가 넘어가면서 고령으로 활동이 힘들어진 것이 원인인 듯 하다.[14] 프랭크 자파와는 1971년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프리 재즈의 전설 오넷 콜먼이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와 킴 고든 등과도 협연한 적이 있다.[15] 존 레논이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이 많아 둘이 정확히 어떻게 만났는지 명확하지 않다.[16] 대표적으로 Some Time In New York City의 곡인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17] 1972년 척 베리와 존 레논의 협연. 댓글만 보아도 오노 요코의 가창력 관련 지적이 많은 걸 알 수 있다.[18] 물론 이 끔찍한 보컬만 빼면 더티 맥 문서에서 알 수 있듯 세션이 세션인지라 완성도 자체는 어마어마하다.[19] 자신의 아들 션 레논이 욱일기 옹호하는 바람에 당시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재발굴되며 아들 때문에 엄마도 같이 욕먹고 있는 중이다.[20] 고작 다이제 먹었다고 쌍욕을 한것이 아니라 별로 친하다는 생각도 안드는 사람인데 개인적인 공간인 사물함을 멋대로 뒤져서 과자를 훔쳐먹는 행위를 다 큰 성인이 한다는것 자체가 굉장히 싸가지 없다고 생각하여 저렇게 화를냈다.[21] 그 외에도 인생사, 성격, 정치 성향, 죽음 등 존 레논과 커트 코베인은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22] 다만 코트니 본인은 이러한 언론의 수식어를 싫어해서 "우리는 레논-요코 같은 부부가 아니다"라고 인터뷰에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