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오카 가문의 문장 나나츠와리마루니 니인(七つ割丸に二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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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타오카 니자에몬(片岡仁左衛門)은 간사이를 연고지로 둔 가부키 명문가 카타오카 가문의 당주가 잇는 세습명이자 명적이다. 야고는 초대와 2대는 불명, 3대부터 5대가 토사야 (土佐屋), 6대가 토미마스야 (富桝屋), 7대부터 당대가 마츠시마야(松嶋屋)이다.당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15대일 정도로 350년이라는 유래 깊은 역사를 갖고 있으며 이름이 갖고 있는 입지와 명예 또한 가부키계에서 선망이 높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이 세습명을 잇는 배우는 가문에서 특히 장래를 촉망받고 가부키 배우로서의 연기력이 수준급에 달해야만 하는 인식이 있으며 이전의 계보를 보면 실제로 그러하다.
다만 어느 가문이나 비슷하겠지만 사실 가부키에서 세습명을 이은 인물이 많다는 것은 과거에 세습명의 명적 처리를 제대로 못한 것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 카타오카 니자에몬 역시 야고가 세 번에 걸쳐 나눠져 있듯, 선대 배우와의 관계가 조금 복잡한 상태에 놓여있다. 또한 워낙 유명하고 뼈대 있는 명적이다 보니, 니자에몬을 이은 배우가 자신의 아들이나 손자, 아끼는 방자에게 보관 명적으로 이어둔다거나, 먼저 타계한 자신의 형이나 동생에게 사후 세습명으로 추존하는 등의 행동으로 이어진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명적을 추존한다는 것 자체가 해당 배우가 당시 업계에서 뛰어난 배우여야만 가능했기에 역대 니자에몬들이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은 남성 역의 타치야쿠, 여성 역의 온나가타, 여러 일본 무용에서 전부 최고도달점에 섰으며 여러 기네스북 기록과 일본 예술회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이는 당대인 15대도 마찬가지이다.
'간사이 가부키 명문가 마츠시마야'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가문의 배우 대부분이 교토부, 나라현, 오사카부 출신으로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가문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간혹 습명 행사나 다른 가문의 피로 공연을 위해 도쿄를 오가기도 하지만 여러 사연이 있기에 가문의 배우들은 공연 때문에 잠깐 지내다가 공연이 끝나면 급히 간사이로 돌아가는 편이다.
이는 도쿄가 본고장이 아닌 이유도 있지만 도쿄로 거처를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끔찍하게 살해당한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2. 역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초대와 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과 7대부터 당대의 니자에몬이 추존을 포함하여 실제 세습명으로 인정받은 경우이며 3대부터 6대는 100년이라는 세월동안 동시 명적, 보관 명적으로 쓰였기에 기록상으로 표기해둔 것에 가깝다.- 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초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남. 아버지로부터 명적을 습명받았지만 요절하였다. 그리고 이 인물의 요절로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명적 세습이 잠시 중단되었다. 본명은 카타오카 산헤이. 생몰년 미상.
- 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초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여동생 혹은 처제. 추존된 것이며 초대가 타계한 직후 임시로 카타오카 가문의 3대 당주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무용과 샤미센을 통한 나가우타 연주의 특기자였다. 생몰년 미상.
- 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배우이며 사실 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습명 당시 어떠한 경위로 습명받게 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여러 가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아라고에에서 특기를 발휘한 배우였지만 이내 가부키 배우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1758년.
- 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 유명 배우인 3대 후지카와 한자부로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명적을 맡고 있던 것으로서, 이것을 5대로 여기고 있다. 생몰년 미상.
- 6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선대와의 관계는 불명. 위의 동시 명적 사례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명 배우인 3대 미호키 기자에몬이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명적을 맡은 것이며 이를 6대로 여기고 있다. 1731-89년.
- 7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초대 아사오 쿠니고로의 동생이다. 여러 유명 가문의 방자로 지내다가 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요절로 세습이 중단되었던 명적을 100년만에 부활시키며 본인이 7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는다. 1755-1837년.
-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7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 본래 나리타야 7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문하생 출신으로 그 실력이 출중하여 여러 가문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이 닿은 마츠시마야에서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았다. 1810-63년.
- 9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 본래 4대 미마스 다이고로의 문하생 출신으로 지내다가 카타오카 가문의 2대 카타오카 가도의 문하생이 되었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가문의 눈에 들어, 가도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예명은 2대 카타오카 가토우. 이처럼 장래를 촉망받던 배우였으나 30대 중반에 급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후 36년 뒤,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추존에 의해 9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인정되었다. 1839-72년.
-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3남. 완벽한 무대였어야 할 본인의 카타오카 니자에몬 습명 피로 공연을 대사 실수와 여러 동작 실수로 망쳐 버렸고, 그것을 내내 염두에 두며 다른 배우들의 시선에 괴로워하다 과로사하였다. 본래 9대였지만 자신의 남동생이 위의 인물을 9대로 추존하며 사후 12년 뒤에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되었다. 1851-95년.
-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4남. 나리타야에 가부키 18번이 있다면 마츠시마야는 '카타오카 12집'이라는 가예가 있는데, 이 가예의 저자이다. 형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할 때, 안타깝게 급사한 2대 카타오카 가토우를 9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추존하며 자신의 형을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기록한 뒤 본인은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았다. 1858-1934년.
-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외손자이며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이다. 온나가타와 타치야쿠 등, 어느 배역에서나 최고의 연기를 하였으며 신인 육성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쿄 태생이었으나 양자 입적 후로는 간사이에서 생활했으나 그의 실력이 간사이에서만 쓰이는 게 아까웠던 여러 가문의 배우들의 요청에 의해 자신의 후처와 함께 도쿄로 거주지를 옮겼던 몇 안 되는 카타오카 가문의 배우였다. 허나 말년에는 자신의 집에서 동거하던 문하생에게 본인 포함 일가족이 끔찍하게 살해당하였다. 1882-1946년.
-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 친부는 일본의 금융 재벌인 야스다 재벌의 2대 총수 야스다 젠자부로이다. 야스다 젠자부로의 3남으로 태어나자마자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여담으로 13대 니자에몬의 여동생이 오노 요코의 어머니이며, 즉 호적상으로는 다르지만 오노 요코의 셋째 외숙부이다. 1903-94년.
- 14대 가타오카 니자에몬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남. 역대 니자에몬 중에서 유일하게 일평생 온나가타만을 연기해온 배우이다. 자신이 거둔 문하생에게 처참히 살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본인이야말로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되어야 한다며 쇼치쿠에 아득바득 우기다가 실력 차이로 밀려나자 5대 카타오카 가도를 습명받게 된다. 그러나 포기를 안 했는지 카타오카 가도 습명 당시, 본인을 13대 카타오카 가도라고 자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리고 그의 사후,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아버지의 세습명인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14대로서 추존받게 되었다. 여담으로 일평생 온나가타를 연기한 배우였던지라 동시대의 타치야쿠로 유명했던 배우인 코라이야의 9대 이치카와 코마조[1]와 부부로 엮여 여러 무대에 섰었는데, 둘은 실제로 연인관계였으며 이는 1940년 경, 코마조가 나리타야에 양자로 입적되고 더는 서로 왕래가 없게 되자 결별했다고 한다. 결별 직후, 가도는 식음을 전폐하였고 이를 가문에서 뜯어말리자 설탕물만 겨우 마시며 무대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코마조의 결혼 소식과 첫아이 탄생 소식에 힘들어 하며 본인은 일평생 결혼도 안 하고 지냈다. 이후 코마조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자 그의 부고 소식에 넋을 잃고 울었다고.[2][3] 1910-93년.
-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당대)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3남이며 위로 이미 가부키 배우로서 활동하는 두 형이 있었지만 자신만의 특출난 연기와 출중한 외모, 어느 배역이나 소화 가능한 연기력에 의해 아버지와 쇼치쿠의 결정으로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았다.[4]이 때문에 위의 두 형과는 습명 직후 불화가 있었지만 이내 15대 니자에몬의 연기력을 인정했다고. 니자에몬보다는 타카오라는 본명으로 더욱 유명세를 떨쳤다. 1944년–.
[1] 본명은 호리코시 하루오. 훗날 나리타야의 양자로 입적되며 11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지낸 인물이다. 현 나리타야의 당주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친조부.[2]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회고록과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문하생의 회고에 의해 밝혀졌다.[3] 사실 가부키계에서 온나가타만 일평생 연기한 배우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가 꽤나 되며 간혹 남성을 밝히는 경우도 이따금씩 있다. 본인 의지로 결혼을 안 한 배우는 2대 나카무라 코산자와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가 있으며 실제로 남성을 밝혀 자신의 어린 제자를 성추행한 5대 반도 타마사부로가 있다.[4] 특이 케이스에 속하는데 가부키계에서는 장남이 가부키를 그만두거나 요절하는 것이 아닌 이상, 조금이라도 일찍 배웠으며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장남에게 세습명을 물려주는 장자 직계 세습을 암묵적으로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은 자신의 아들들 중 누가 니자에몬의 세습명을 습명받기에 적임자인지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