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라틴어: Quintus Caecilius Metellus Pius Scipio Nasica | |
생몰년도 |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전 98년 사이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히포 레기우스 |
지위 | 파트리키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증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조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아버지) 리키니아(어머니) 메텔루스 피우스(양부) 아이밀리아 레피다(아내) 코르넬리아 메텔라(딸)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52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
동기 | 폼페이우스 |
후임 |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말기의 군인, 정치인. 폼페이우스의 장인이자 확고한 옵티마테스파로,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다. 기원전 46년 탑수스 전투에서 패한 뒤 자결했다.2. 생애
기원전 100년에서 98년 사이에 출생했다. 본래 이름은 퀸투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였다. 부친은 저명한 스키피오 가문의 본가인 스키피오 나시카 가문의 일원으로 기원전 93년 법무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였고, 어머니는 기원전 111년에 집정관을 역임했고 키케로를 가르친 대웅변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딸 리키니아였다. 증조할아버지는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살해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였고, 조부는 기원전 111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세라피오였다. 남자 형제 1명과 여자 형제 2명이 있었는데, 부친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법무관을 역임하던 중 일찍 죽은 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맡겨졌다.그는 부친이 일찍 죽은 뒤 메텔루스 피우스의 양자로 들어가서 '메텔루스'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은 공화정 후기에 최고의 명문으로 대접받은 노빌레스 가문이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라이벌이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가문의 세를 끌어올린 뒤 기원전 123년부터 기원전 109년까지 마케도니쿠스의 네 아들과 두 조카들이 모두 집정관을 맡았고 이들 중 네 명이나 감찰관까지 올랐을 정도로 이례적으로 융성했다. 실질적인 가문의 권력으로만 따지면 세라피오 이후 후손도 줄어들고 정치적 영향력도 잃은 스키피오 가문보다도 훨씬 막강했다.
피우스의 아버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는 기원전 109년 집정관으로, 메텔루스 가문 내 서열은 낮았지만 개인적인 청렴함과 능력으로 가문 내의 주도권을 꿰찼다.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오랜 정적이었으며, 그 영향으로 아들인 메텔루스 피우스는 술라의 내전에서 술라의 편에 서 술라의 승리 이후 술라 정권의 2인자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스키피오 가문의 직계 혈통에 더해 피우스의 후계자가 된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배경은 당시 동년배 정치인들 중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기원전 77년 집정관을 역임하던 마메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리비아누스의 딸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물의를 빛을 일을 저질렀다. 사실 소 카토 역시 그녀를 사랑했는데, 스키피오가 약혼녀였던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모종의 사유로 헤어지자 아이밀리아 레피다와 약혼하려 했다. 그런데 스키피오가 다시 레피다를 자기 아내로 삼아버리자, 카토는 그를 고소하려 했다. 친구들이 스키피오 가문과 척져서는 안 된다며 말리자 어쩔 수 없이 그만뒀지만, 이 일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여 스키피오를 맹렬히 비난했다. 이에 스키피오는 카토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내용의 팜플렛을 출판하는 것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스키피오는 여러 아이들을 두었는데, 그 중 딸 코르넬리아 메텔라는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결혼했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한 후, 다시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다. 폼페이우스는 코르넬리아보다 적어도 30살은 더 많았다. 이 결혼은 폼페이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맹을 끊고 옵티마테스파가 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행위였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59년 호민관에 선출되었다고 한다. 그는 명백한 귀족 신분이었는데 오직 평민만이 선임될 수 있는 호민관에 선출되었다는 것에 후대의 여러 학자들이 의구심을 표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평민 귀족'인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입양되어서 호민관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57년 조영관에 선임되어 로마의 공공 경기와 축하 행사를 감독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때 몇년 전에 사망한 양아버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경기를 개최했다. 당시 로마 정국은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리고 크라수스의 삼두정치에 장악되어 있었다. 옵티마테스파였던 그로서는 분명 못마땅한 일이었을 테지만,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던 듯하다. 기원전 55년 법무관을 맡았으며, 기원전 52년 딸 코르넬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킨 것을 계기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내전기에 따르면, 그는 시리아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노예, 식량, 무기, 군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세금을 부과하여 많은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또한 카이사르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고 있던 유대의 알렉산데르를 처형했다. 카이사르는 스키피오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악행을 어느정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기원전 48년 그리스로 2개 군단을 이끌고 와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대적했다. 이후 폼페이우스와 합류하여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해 중앙 대열을 이끌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자 아프리카로 도주했다.
이후 아프리카 옵티마테스파의 총사령관을 맡아 2년여 간 군비를 증강했고,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연합하여 다가올 카이사르의 일전을 준비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북아프리카로 들어왔을 때,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서 패하지 않는다"라고 선전했다. 카이사르는 이에 맞서 스키피오 가문의 장정 하나를 일부러 동행시킴으로써, "우리에게도 스키피오가 있다"는 걸 만방에 알렸다. 당시 그의 전력이 카이사르를 압도했지만, 폼페이우스를 꺾어버린 카이사르를 상대로 함부로 회전을 벌이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여러 차례 회전을 제의했지만, 그는 끝까지 거부했다. 이에 카이사르는 강제로 싸우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옵티마테스파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도시인 탑수스를 포위했다. 그는 탑수스를 상실하면 옵티마테스파에 대한 지지도가 추락할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탑수스로 진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탑수스 전투에서, 그는 지리멸렬한 지휘력을 보이다 참패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로 탈출하려고 해안가로 달려갔지만, 히포 레기우스에서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함대가 항구를 봉쇄하는 바람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히포 레기우스 해전). 그는 자결을 결심하고, 검으로 자기 몸을 찔렀다. 병사들이 이 광경을 보고 동요하자, 그는 태연한 얼굴로 한 마디 한 뒤 숨을 거뒀다.
"Imperator se bene habet(임페라토르는 괜찮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사망을 끝으로, 스키피오의 이름을 달고 전면에서 활약한 인물은 두 번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