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04 13:24:50

푸블리우스 시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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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블리우스 시티우스
라틴어: Publius Sitti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44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루케니아
사망지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키르타
지위 평민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아버지)
참전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마우레타니아 왕국 용병대장
누미디아 서부 군주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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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틸리나 음모에 연루되어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피신한 뒤 그 나라의 용병대장으로 발탁된 인물. 카이사르의 내전 때 카이사르 편에 서서 혁혁한 공을 세운 뒤 누미디아의 옛 수도 키르타를 영지로 수여받았으나 몇년 후 살해당했다.

2. 생애

캄파니아의 루케니아 시 출신으로, 아버지 푸블리우스 시티우스는 동맹시 전쟁 때 로마를 지원했다. 그는 고리대금업에 종사했으며, 지방 공동체와 동맹 도시의 통치자들에게 돈을 빌려줬다. 기원전 64년 카틸리나의 음모에 가담해, 음모 지도부로부터 먼 히스파니아 속주로 가서 병력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되어 로마에서 카틸리나 지지자들이 대거 숙청당하자,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마우레타니아로 망명했다. 훗날 키케로가 킬리키아 총독으로 재직하는 동안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루푸스로부터 시티우스에게 빚진 돈을 킬리키아 주민들로부터 회수해야 한다고 상기시키는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던 걸 볼 때, 이후에도 고리대금업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으로 망명한 뒤 그곳의 군주 보쿠스 2세의 용병대장으로 고용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누미디아 왕국이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자, 그들과 경쟁 관계였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은 카이사르 편을 섰다. 기원전 4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30척의 배에 자유인과 노예로 구성된 혼성 군대 2,000명을 이끌고 마우레타니아 해안 근처 마을인 아스쿠룸을 공격했다가 패퇴하자, 보쿠스 2세는 그에게 누미디아를 침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즉시 누미디아로 쳐들어가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사로잡은 시민들을 모두 죽였다. 당시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도우러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고 있던 유바 1세는 이 소식을 듣고 30마리의 코끼리만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보낸 후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전력상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바 1세가 돌아간 틈을 타 추가 병력을 규합해 전쟁을 준비할 수 있었다.

기원전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완패한 뒤,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카이사르군의 추격을 피해 해안가로 달아나 배를 타고 히스파니아 속주로 피신하려 했다. 당시 그와 함께 간 인사들은 루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푸블리우스 다마시포스, 플라테리우스 루스티아누스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배는 역풍으로 인해 더 가지 못하고 히포 레기우스에 정박했다. 이때 그가 이끄는 더 큰 함대가 이들을 덮쳤고, 만리우스 토르콰투스, 다마시포스, 루스티아누스 등이 모두 전사했다. 메텔루스 스키피오는 탈출을 시도했으나, 적 함대가 항구를 봉쇄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되자 자결을 결심하고, 검으로 자기 몸을 찔러 자살했다(히포 레기우스 해전).

이후 그는 해안가를 따라 히스파니아로 이동하던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의 1,500 군대를 섬멸하고 두 사람을 붙잡은 후 며칠 뒤 처형했다. 뒤이어 누미디아 전역을 공략했지만 곧 카이사르에게 돌려줬고, 카이사르는 누미디아 서부를 마우레타니아 왕국에게 넘기고 동부는 아프리카 속주로 재편시켰다. 카이사르는 그의 공적을 치하하며, 그에게 누미디아의 옛 수도였던 키르타를 영지로 줬다. 그는 5,0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에 정착했다. 훗날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정착지는 나중에 키르타 시티아노룸(Cirta Sittianorum)으로 일컬어졌고, 이 지역에 주둔한 부대는 시티아니(Sitiani)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44년 봄, 누미디아 전 왕 마시니사 2세의 아들 아라비오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키케로는 오랜 친구인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아라비오를 전혀 비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