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라틴어: Lucius Afrani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6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프리카 속주 |
지위 | 평민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아울루스 아프라니우스(아버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60년 |
전임 |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 |
동기 |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 |
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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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인.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이후로도 폼페이우스의 심복으로 활동했다.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히스파니아를 침공한 카이사르와 맞서 항전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항복했다. 이후에도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활약했고, 폼페이우스가 죽은 뒤 아프리카에서 카이사르에 맞섰으나 탑수스 전투에서 패한 뒤 카이사르 휘하 장병들에게 살해되었다.2. 생애
대대로 폼페이우스 씨족을 섬기는 평민 집안의 일원이었다고 전해진다. 키케로는 편지에서 그를 가리켜 "아울루스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에게 명망 높은 조상이 없다는 것을 조롱하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 아울루스 아프라니우스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를 섬겼으며, 그 역시 스트라보의 아들인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따랐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에서 발호하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토벌하고자 출정했을 때 부관으로서 따라갔다.수크로 전투에서 아군의 전열이 붕괴되고 폼페이우스가 적의 맹공에 견디지 못하고 패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침착하게 좌익 부대를 통솔하여 적의 우익을 격파하였고, 세르토리우스는 자기 진영에 적군이 침입하자 추격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폼페이우스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후 칼리구리스 시를 공격하여 오랜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으며, 기원전 72년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끝난 기원전 67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법무관을 맡아 히스파니아 또는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를 다스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를 물리치고자 출진할 때 역시 따라갔고, 기원전 65년 고르디에네를 점령하고 폼페이우스와 함께 사막을 가로질러 시리아까지 진군해 나바테아인을 물리쳤다. 기원전 61년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성대한 개선식에 참여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참전 용사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고 동방을 재편성한 조치를 승인받기 위해 집정관 선거에 그를 후보로 내세우고 막대한 지원을 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폼페이우스는 아프라니우스를 집정관으로 만들기 위해 그에게 많은 돈을 투자했고, 시민들은 돈을 받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정원에 줄을 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폼페이우스는 스스로 성공하여 가장 높은 직위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며 공격받기 시작했다.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반대했지만, 그는 폼페이우스의 처남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와 함께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상황은 폼페이우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켈레르는 곧 폼페이우스의 적 편으로 넘어갔고, 원로원은 토지 분배를 좀처럼 승인하지 않았으며, 동방 재편성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군으로선 상당한 활약을 했으나 정치에는 미숙했던 그는 원로원을 설득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민회에 회부하여 정책을 통과시키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결국 임기 내에 어떠한 일도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폼페이우스는 집에 칩거한 채 조용히 지내다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삼두정치를 맺고 나서야 목표를 달성했다.
기원전 57년 원로원에서 식량난에 시달리는 로마를 구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5년간 빵을 제공하는 특별 권한을 부여하자는 제안을 지지했다. 기원전 56년 1월에는 폼페이우스에게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이집트 파라오에 복위시키도록 군대를 통솔하는 것을 옹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55년 2월 선거법 위반에 대한 치안 판사들의 책임을 강화하자는 제안을 해 받아들여졌다. 그해에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루시타니아, 가까운 히스파니아,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공식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남기로 하고, 그가 대행자로서 가까운 히스파니아를 직접 통치했다. 먼 히스파니아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맡았고, 루시타니아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가 맡았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3개 군단을 통솔하고 있었다. 그해 2월 그가 피레네 산맥에서 카이사르 휘하 장군이며 당시 갈리아 속주를 다스리던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를 물리쳤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졌지만, 실제로는 일레르다 근처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을 뿐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기원전 49년 6월 카이사르가 이베리아에 침입하자, 그는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맞섰다. 당시 두 사람은 5개 군단, 약 80개 코호트의 보조군, 5,000명의 기병을 갖췄고, 카이사르는 6개 군단, 5,000명의 보조군과 6,000명의 기병을 갖췄다.
양측은 일레르다에서 격전을 벌였다.(일레르다 전투) 초기에는 카이사르가 설치한 다리가 끊기면서 보급로가 끊어지는 바람에 폼페이우스 측이 우세했지만, 카이사르가 특유의 임기응변을 발휘해 보급로를 재건하고 군대를 주도면밀하게 이끌었던 데다, 히스파니아 속주민들이 점차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서면서 전황이 점차 불리해졌다. 그는 민심이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서자 일단 켈티베리아인들의 땅으로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그들을 추격해 압박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고지대에 진영을 갖췄다. 카이사르는 모든 보급로와 수로를 차단했고, 폼페이우스군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이 떨어져서 몹시 곤궁해졌다. 결국 그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모든 군대를 해산하는 것 외에 특별한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카이사르로부터 사면받았으나, 그는 동쪽으로 달려가 이피로스의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와 합류했다. 많은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은 그가 일레르다에서 항복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묵살했다.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승리에 기여한 뒤, 폼페이우스에게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면서 강력한 해군으로 카이사르가 발칸 반도를 건너지 못하게 꽁꽁 묶어두자고 조언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를 강행했다. 그는 진영에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했지만, 아군이 참패하자 이번에도 붙잡히면 카이사르의 자비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소 카토와 함께 디라키움으로 피신했다. 이후 아프리카로 도피한 뒤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휘하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기원전 46년 4월 탑수스 전투에서 또다시 카이사르에게 참패한 뒤,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함께 모레타니아를 거쳐 히스파니아로 가기로 하고, 1,50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해안가로 향했다. 그러나 마우레타니아 왕 보구드의 용병대장 푸블리우스 시티우스의 기습을 받아 참패했고, 술라와 함께 체포되어 포로 신세로 전락한 뒤 며칠 후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