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45년 12월 31일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증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버지)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장남)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차남) 파비아 파울리나(삼녀)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5년 |
전임 | 율리우스 카이사르 |
동기 |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
후임 |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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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정치인, 군인.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기원전 45년 집정관에 선임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했다.2. 생애
고대 로마의 저명한 귀족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증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이밀리아누스는 기원전 145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또한 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는 기원전 121년 집정관을 맡아 알로브로기스 족과 아르베르니 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으며, 이후 개선식에서 은빛 갑옷을 입은 아르베르니 왕 비투이투스를 포함한 수많은 포로를 내세워 민중의 찬사를 받았고, 자신의 동상을 포로 로마노 인근 아치 위에 세웠다. 아버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91년 감찰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로부터 방탕한 생활을 이유로 유산 상속을 금지당했다는 것 외엔 알려진 바 없다.기원전 59년 마르쿠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와 함께 마케도니아 총독을 역임하면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를 고소했다. 키케로가 히브리다를 변호했지만, 배심원단은 유죄 판결을 내렸고 히브리다는 전 재산을 잃고 망명해야 했다. 키케로는 훗날 히브리다를 변호할 때 썼던 연설문을 출판했는데, 망명지에서 이걸 읽은 히브리다는 "그가 실제로 이렇게 했다면 여기서 물고기나 잡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기원전 57년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았다. 그는 조부 알로브로기쿠스의 동상과 개선문을 복원했지만,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식량난을 초래했고,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특별 권한을 줘서 식량을 수송하게 했다. 이 일로 명예가 실추되었기 때문인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기에 옵티마테스파에게 곱게 보이지 않았는지, 그는 정치 경력을 쌓는 귀족의 의무인 법무관 직을 맡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편에 섰고, 그 대가로 기원전 48년 이전에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46년 퀸투스 페디우스와 함께 히스파니아로 파견되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지휘하는 옵티마테스파 군대와 대적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가 심했기 때문에 오쿨보에 진을 치고 카이사르가 올 때까지 버텼다.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가하여 승리에 일조했고, 문다 마을을 점령하고 약탈을 벌인 뒤 우사오 마을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냈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등 적군 수뇌부가 궤멸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발레아레스 제도로 피신했다. 이후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로 귀환했다.
기원전 45년 9월, 카이사르는 단독 집정관에서 물러나 임기 제한이 없는 독재관을 맡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기원전 45년 10월 1일에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던 기원전 45년 12월 31일 돌연 사망했다. 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별다른 질병을 앓은 적도 없었고 쇠약해진 징후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세간에 큰 논란을 야기했다고 한다. 사후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 12월 31일 단 하루만 집정관을 맡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기원전 44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장남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11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의 이종사촌 마르키아와 결혼했다. 차남 아프리카누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10년 집정관을 맡았다. 딸 파비아 파울리나는 기원전 31년 집정관을 맡았고 안토니우스의 심복이었다가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전향한 마르쿠스 티티우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