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라틴어: Aulus Caecina Severus | |
생몰년도 | 미상 ~ 서기 21년 이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볼라테라(현재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볼테라)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부스 호모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 (형제)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년 |
전임 |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
동기 |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
후임 |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2. 생애
볼라테라 출신의 에퀴테스 신분이라고 전해지지만, 부모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젊었을 때 로마로 이주한 뒤 군대에 입대했고, 기원전 25년 트리부누스 밀리툼, 기원전 19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서기 6년 새로 편성된 모이시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얼마 후 일리리아 대반란이 발발하자,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로부터 트라키아 전선 방면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는 반란군이 시르미움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로메탈케스 1세로부터 트라키아 기병대를 받아낸 뒤 빠르게 진격하여 드라부스 강 인근에서 브레우키인 바토의 군대와 격돌했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다키아인과 사르마티아인이 도나우 강을 건너 트라키아로 침입하자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서기 7년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와 함께 모이시아와 아시아 속주에서 가져온 5개 군단과 보조병 부대, 트라키아 기병대를 이끌고 클라우디아 산맥으로 진군했다가 반란군의 매복 공격에 직면했다. 트라키아 기병대는 패퇴했고 보조병 부대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군단병 역시 많은 손실을 봤지만, 두 사람은 군단병들을 재집결시킨 뒤 반격을 가해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다만 파테르쿨루스는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적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수많은 트리부누스 밀리툼, 켄투리오 등을 잃어서 패배나 다름없는 손실을 입었다며, 두 장군이 티베리우스처럼 정찰병을 보내 적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은 까닭에 이토록 큰 손실을 입었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전투의 승리는 두 장군의 지휘가 아닌 군인들의 투지 덕분이었다고 기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이키나 세베루스[1]는 볼케아 습지 근처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반란군의 습격을 받았지만 많은 손실을 본 끝에 격퇴했다고 한다. 이후 8~9년다뉴브 강 건너편에서 침입해 오는 부족들로부터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속주를 지켰다. 일각에서는 그가 9~12년 아프리카 총독을 역임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가까운 히스파니아 총독을 그 시점에 역임했다고 주장한다. 12년부터 16년까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총독을 맡아 베테라에 본부를 두고 4개 군단으로 구성된 그룹을 지휘했다. 14년 라인강 전선 군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은 게르마니쿠스의 지시에 따라 베테라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단 숙련병들을 모아놓고 선동자들이 있는 천막을 공격해 모조리 참살했다.
14~16년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마니아 원정에서 4개 군단으로 구성된 선봉대를 이끌었다. 그는 먼저 마르시족을 물리쳤고, 아르미니우스가 대규모 연합군을 모았다는 소식을 접한 게르마니쿠스의 지시를 받들어 40개 대대와 함께 엠스 강으로 진군하면서 시골을 약탈해,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 본대가 엠스 강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유도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와 다시 합류한 뒤 토이토부르크 숲을 향해 진군했다. 이때 그는 미리 파견되어 경로를 정찰하고, 군대가 수많은 습지대를 건널 수 있도록 다리와 보도를 건설했다.
15년, 아르미니우스를 격파한 게르마니쿠스는 카이키나에게 제1군단, 제5군단, 제20군단, 제21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으로 귀환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폰테스 롱기, 즉 "긴 보도"라고 불리는 지점에 도착하여 그곳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즉시 수리한 후 라인 강으로의 진군을 지속했다. 얼마 후 아르미니우스가 파견한 게르만군의 급습을 받았지만 밤이 될 무렵에 가까스로 격퇴했다. 다음날 행군을 재개했다가 또다시 급습 당해 군대가 제1군단과 20군단, 그리고 제5군단과 제21군단의 2개 덩어리로 분리되면서 거의 패배할 뻔했다. 그는 최전선으로 달려가서 어떻게든 전투 대열을 지키려 했다가 말이 죽는 바람에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분리되었던 제1군단이 복귀한 덕분에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는 많은 게르만족이 전투에서 벗어나 짐 수레와 짐 나르는 노새를 약탈하는 것을 보고 짐을 버리라고 명령했고, 적군이 약탈에 전념하고 있을 때 어둠을 틈타 철수해 제5군단과 제21군단이 뭉친 지점에 도착했다.
그날 밤 적군이 숙영지에 침입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병들은 공포에 질러 숙영지를 도망치려 했다. 카이키나는 병사들에게 적군이 공격하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설득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관문 아래 땅에 몸을 던지고는 병사들이 멈추고 귀를 기울여달라고 호소함으로써 겨우 진정시켰다. 한편,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이 아침에 진영을 떠나 라인 강으로 행군을 재개하도록 허용한 뒤, 개방된 지형에서 급습해 쓸어버리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삼촌인 잉기오메루스는 로마인들에게 탈출할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며, 새벽에 그들의 진영을 공격하여 압도하라고 조언했다. 다른 족장들도 잉기오메루스의 주장에 동의하자, 아르미니우스는 별 수 없이 그들의 주장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게르만족이 숙영지에 쳐들어오자, 카이키나는 군대의 사기를 복돋워서 적군을 물리쳐서 도주하게 했다. 이후 퐁테스 롱기를 마저 수리한 뒤 라인 강 전선으로 귀환했고, 군대를 구해낸 공로로 개선 훈장을 받았다.
16년, 카이키나는 게르마니쿠스의 원정에 동행해 엠스 강을 통해 북해에서 게르마니아 내륙으로 로마군을 수송하기 위해 함대 1,000척을 건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그해 말에 티베리우스 황제의 복귀 명령을 접수받고 게르마니쿠스와 함꼐 로마로 귀환했다. 이후 원로원 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20년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다가 자살한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죽음에 대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감사하기 위해 제단을 설치하자고 제안했지만,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건 외적을 물리칠 때 해야 하며, 내부의 갈등을 과도하게 홍보해서는 안 된다"라며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21년, 카이키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직위에 대한 토론 중에 총독이 임기를 시작할 때 아내를 데리고 가는 걸 금지하자는 안건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이 40년간 군복무하면서 단 한번도 아내를 데려간 적이 없으며, 항상 그녀를 이탈리아에 남겨두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여러 원로원 의원이 그의 제안은 현재 토론의 요점이 아니며, 카이키나는 감찰관도 아니니 그런 제안을 할 자격이 없다고 반박했다. 이후 투표 결과, 그의 제안은 기각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는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뒀다고 한다. 그러나 아내와 자녀들의 신상명세는 전해지지 않는다. 형제 아울루스 카이키나 라르구스는 13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1]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는 언급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