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라틴어: Gaius Asinius Pollio | |
생몰년도 | 기원전 75년 ~ 서기 4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중부 티테 마루치노룸(현재 아브루초주 키에티)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라틴 귀족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헤리우스 아시니우스(조부)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아버지)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 마루치누스(형제) 퀸티아(아내)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아들) |
참전 | 카이사르의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0년 |
전임 | 루키우스 안토니우스 푸블리우스 세르빌리우스 이사우리쿠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
후임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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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문학가. 카이사르의 내전 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으며,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대립할 때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다. 악티움 해전 후 정계를 은퇴하고 문학 작품 집필에 전념했다.2. 생애
기원전 75년 로마 공화국 이탈리아 중부 티테 마루치노룸(현재 아브루초 주 키에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였고, 조부는 마루키 족장 헤리우스 아시니우스로, 동맹시 전쟁 때 로마와 맞서다 전사했다. 형제로는 그나이우스 아시니우스 마루치누스가 있었다. 그는 루키우스 퀸티우스의 딸 퀸티아와 결혼하여 아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를 낳았다. 갈루스는 기원전 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아그리파의 딸이자 티베리우스 황제의 아내였던 빕사니아의 재혼 상대였다. 갈루스는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드루수스의 친아버지임을 주장하다가 티베리우스의 진노를 샀고, 기원후 30년 티베리우스에 의해 체포되어 아사했다.그는 일찍부터 변호사로서 활동했다. 타키투스는 그를 "완벽한 삶과 흠잡을 데 없는 웅변으로 명예를 얻은 이"라고 기록했다. 이로 볼때 변호사로서 실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6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스핀테르의 정책을 옹호했으며, 기원전 54년 다른 재판에서 소 카토를 고발했으나 패소했다. 기원전 51년에 갈리아 전쟁에 참여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부관으로서 활동했고,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할 때 참여했다. 그는 이때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의 토론을 자신의 저서에 기술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인용했다.
폼페이우스와 옵티마테스파가 해외로 망명한 뒤, 카이사르의 지시에 따라 시칠리아에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쿠리오의 군대가 유바 1세의 누미디아군에게 섬멸되고 쿠리오가 전사한 뒤, 살아남은 장병들을 이끌고 우티카로 피신한 후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와 함께 함대에 몸을 싣고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이후 카이사르의 마케도니아 원정에 참여하여 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으며, 기원전 47년 이탈리아로 돌아가 호민관을 맡았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모든 부채 탕감을 내세우며 정국을 뒤흔들자 이에 반대하여 부채 폐지에 관한 법률 통과를 방해했으며, 카이사르를 대신해 로마를 다스리던 기병대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돌라벨라 일당을 토벌하고 채권자들의 권리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아프리카 원정에 참여하여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무찌른 탑수스 전투에 참가했고, 기원전 45년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했다. 로마로 돌아온 뒤 그해 말에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기원전 44년 먼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아 폼페이우스의 마지막으로 남은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대결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이었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부임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레피두스와 개인적으로 반목했기 때문에, 원로원의 명시적인 승인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영지를 양도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나 몇 달 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변장한 채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중재하여 로마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해군 및 해안 제독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시칠리아로 향했고, 그는 히스파니아 지방을 통제했다.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갈리아 키살피나 현직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고 원로원이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옥타비아누스를 내세우면서 무티나 내전이 발발했다. 그는 2개의 군단과 함께 베넨티아에 주둔한 채 어느 쪽을 택할 지 고심하다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하기로 했다.
기원전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을 때, 그의 장인 루키우스 퀸티우스가 숙청 대상에 올랐다. 퀸티우스는 배를 타고 도주했지만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장인을 구명하기 위해 선처를 호소했다는 걸 암시하는 기록은 없다. 이후 세 권력자는 로마를 분할했는데, 갈리아는 안토니우스에게 넘어갔다.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관리하게 했다. 무티나 일대가 퇴역 군인들에게 재분배될 때, 그는 안토니우스의 심복으로서 자기 영지가 경매에 넘어가는 걸 막았다.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의 중재 역할을 수행하여 삼두정치를 5년간 연장, 소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결혼 등을 합의한 브룬디시움 조약이 성사되게 했다. 이로써 두 권력자는 페루시아 내전 이후 재화합했다. 그는 이 공을 인정받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칼비누스와 함께 해임되었고,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남은 한 달을 집정관으로서 수행했다. 기원전 39년 일전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동맹을 맺고 삼두정치파에 대항했던 일리리아 종족을 상대로 원정을 떠나 승리를 거두고 로마에 귀환하여 그해 10월 25일에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후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흠뻑 빠져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난 자식들에게 동방 영토를 넘기겠다고 공개 선언하는 등 도를 넘은 행보를 보이자, 그는 안토니우스가 가망없다고 보고 연을 끊었다. 하지만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 토벌에 동참하라는 옥타비아누스의 권유에 "안토니우스는 내게 너무도 많은 혜택을 베풀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의 투쟁을 멀리하고 승자의 먹이가 될 것이다."라며 거절하고 중립을 고수했다.
안토니우스가 패망한 뒤 정계를 은퇴하고 로마 최초의 공공 도서관과 미술관을 건설하여 대중에게 공개했고, 문학 작품을 집필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젊은 로마 작가들을 위한 독서실을 별도로 운용하면서, 그들이 상호 교류하며 독자적인 작품을 집필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여러 작가가 그의 후원 덕분에 문학계에 이름을 날렸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베르길리우스였다. 서기 4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생전에 17권의 로마 내전사, 비극 작품 여러 편,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공화정은 부패가 극심해서 망할 운명이었다"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책, 문학 평론서 등을 집필했다고 알려졌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 등 후대 역사가들의 저서에 그가 집필한 저서에서 인용한 내용이 파편적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