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Publius Canidius Crass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30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알렉산드리아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미상 |
참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직업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4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 |
동기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 |
후임 |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켄소리누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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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과 로마 제국의 군인, 정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옥타비아누스에 대적했지만 악티움 해전 참패 후 안토니우스가 피신한 이집트로 따라갔다가 이집트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처형되었다.2. 생애
파트리키 출신으로 전해지지만, 부모와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기원전 5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소 카토를 로마에서 내보내기 위해 키프로스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접수하고 그곳을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소 카토는 이에 따라 여러 재무관들과 함께 키프로스로 가서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를 따라간 재무관 중에는 그도 있었다.기원전 43년, 그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총독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휘하의 부관을 맡았고, 레피두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동맹을 맺는 데 기여했다. 그 후 그는 안토니우스와 친분을 돈독히 다져서 주빈인들로부터 안토니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친구로 간주되었다. 기원전 40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가 집정관에서 사임한 뒤 아프리카 태생의 신참자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 기한이 만료된 후 안토니우스와 함께 동방으로 이동했고,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에서 이베리아 왕국으로 진군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로마로부터 독립을 꾀하던 이베리아 왕 파르나바즈 2세를 압박해 도로 로마의 봉신이 되어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지원하게 했다. 여기에 코카서스의 알바니아 왕 조베르에게도 압력을 가해 로마에 복종하도록 했다.
기원전 33년 2월에 작성된 파피루스 문서에는 "이집트에서 푸플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에게 세금을 면제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의 다른 면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서명과 함께 "이를 시행하라(γινέσθωι,)"라는 그리스식 문구가 적혀 있다.
기원전 32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했을 때, 그는 안토니우스의 명령을 받들어 동방에 주둔한 16개 군단을 그리스로 이동시켰다. 로마에서 그리스로 망명하여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한 두 집정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가이우스 소시우스는 로마의 상황을 안토니우스에게 전하면서, 로마 시민들이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매우 적대적이니 이집트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이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권력투쟁을 로마와 이집트 여왕의 전쟁으로 왜곡시킨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공세에 대한 대응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처음에는 두 집정관의 주장에 설득되어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로 돌아가 있으라고 권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저들이 내게 전쟁을 선포한 이상 끝까지 당신과 함께 싸우겠다"라고 밝혔다. 그 역시 클레오파트라가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여왕이 그에게 뇌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니디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며칠 전에 마음을 바꿨다. 안토니우스가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해군에 의해 해상 보급로가 막혀버려서 식량이 떨어지고 병사들의 탈영이 계속 벌어지는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지 묻자, 그는 이제라도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로 보내고 마케도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아군과 합세하고 트라키아의 동맹 부족인 게타이 족의 지원을 받아 옥타비아누스와 육지에서 승부를 보자고 주장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육군을 단단히 요새화된 도시들에 주둔시킨 뒤 해군을 이끌고 암브라키아 만을 봉쇄하고 있는 적을 물리친 뒤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토니우스는 고심 끝에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플루타르코스 등 고대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대체로 안토니우스가 최선의 선택을 내린 거라고 본다. 식량 공급이 끊겨버리고 병사들과 유력 인사들이 계속 이탈하는 상황에서 마케도니아로 이동한들 판을 뒤집기 힘드니 차라리 클레오파트라의 본거지인 이집트로 후퇴한 후 군대를 새로 일으키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1]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벌어졌을 때,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해전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상관하지 말고 해전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을 이끌고 그리스를 떠나 소아시아를 거쳐 이집트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장병들은 눈앞에서 아군 전함이 파괴되는 광경을 보고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고, 지휘관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홀로 이집트로 달아나 안토니우스에게 병사들의 배신을 전했다. 그 후 다들 안토니우스를 배신하고 옥타비아누스 편을 드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안토니우스와 함께 하던 그는 기원전 30년 이집트를 접수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1] 사실 안토니우스가 망한 건 어디까지나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도주한 것 때문이지 이 결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심지어 악티움 해전 당시에도 도망가기 전까지 상황은 팽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