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라틴어: : 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nus | |
생몰년도 | 기원전 48년 ~ 서기 32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제국 로마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로마 제국 |
가족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아버지) 루틸리아(어머니) 칼푸르니아(이복 누이) 칼푸르니아(딸) |
직업 | 로마 제국 집정관 |
로마 제국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15년 |
전임 |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
동기 |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
후임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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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집정관. 폰티펙스를 역임했기에 기원전 1년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우구르와 구별하기 위해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폰티펙스로도 일컬어진다.2. 행적
기원전 48년 로마에서 출생했다. 그가 속한 칼푸르니우스 씨족은 로마의 전설적인 두번째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아들 칼푸스를 시조로 둔 평민 귀족(노빌레스)이다. 이 가문에는 여러 분파가 속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저명한 분파가 기원전 2세기 초부터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엄청난 위세를 떨친 피소 가문이었다. 조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기원전 100년 재무관을 역임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는 딸 칼푸르니아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시집보낸 뒤 사위의 후광에 힘입어 기원전 56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탁월한 웅변가이자 철학자로서 명성을 구가했다. 어머니는 루틸리우스의 딸 루틸리아라는 것 외엔 알려지지 않았다. 이복 누이로 카이사르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아내 칼푸르니아가 있었다.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총독을 맡았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에 메디올라눔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을 주재했다. 이때 노바라 시민이며 저명한 웅변가인 가이우스 알부티우스 실루스가 피고인을 탁월한 언변으로 변호해, 법정 참관인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고, 그는 포럼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실패해 재판을 중단해야 했다고 한다.
기원전 15년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다뉴브 강, 인 강, 알프스산맥 사이의 라에티아 북부에 살던 켈트 계열의 빈델리키족을 대상으로 원정을 벌인 끝에 그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14년경 트라키아 계통의 베시족 지도자 볼로게스가 반란을 일으켜 오드뤼사이-사파이 왕국의 국왕 코티스 2세를 패사시키고 코티스 2세의 아들 로메탈케스 1세를 몰아낸 뒤 케르소네소스를 침략해 초토화시켰다. 당시 갈라티아의 총독이었던 그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들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고 즉각 트라키아로 진군했다.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이내 전력을 수습한 뒤 적의 거점을 하나씩 점령하고 그들의 영역과 반란에 가담한 이웃 부족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그렇게 3년간 성벽 밖과 들판에서 전투를 일일이 벌인 끝에, 기원전 11년에 트라키아의 모든 부족을 굴복시켰다. 그는 이 공적으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개선 훈장을 받았다.
티부르티누스 스톤에 따르면, 아시아 총독이자 레가투스인 인물이 큰 공을 세워서 아우구스투스가 시리아와 페니키아를 회복하게 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대해 신들께 2번의 감사 기도를 드리게 하고 승리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카리아 의 스트라토니키아 비문에 따르면, 당시 아시아 총독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라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15년 집정관일 거라고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1년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우구르일 거라 추정한다. 또한 킬리키아의 히에라폴리스와 카스타발라에서 발견된 2개의 비문에서도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를 도시의 후원자로 기리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다수 학자들은 이 인물을 기원전 15년 집정관과 동일인물일 거라 추정한다. 다만 로널드 사임은 또다른 루키우스 피소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기 17년, 피소는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선임되었다. 그는 티베리우스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이후 이틀간 그와 계속해서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세네카에 따르면, 피소는 처음 취한 순간부터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밤을 흥청거리며 보내고 거의 6시가 돼서야 잠을 잤다고 한다. 그렇지만 타키투스에 따르면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했으며,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굴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상황이 그를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을 때 그 말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의 드높은 명성은 트라키아에서 거둔 공적이 아니라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온화하게 수행한 데 있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에서 철학 교사로 활동하던 테살로니카의 안티파테르는 그의 클리엔테스였다. 안티파테르는 베시족에 대한 그의 승리를 찬양하는 시를 제공한 뒤 피소와 인맥을 맺은 인사들과 같은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서기 3세기에 활동안 라틴어 문법학자이자 호라티우스의 주석가였던 폼포니우스 포르피리우스에 따르면, 호라티우스가 <시적 내용에 대하여(De arte poetica)>라는 제목의 글에서 피소와 두 아들을 언급했으며, 피소 본인도 시인이자 문학의 수호자였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 인물이 기원전 15년 집정관 피소와 동일인물일 거라고 추정했지만, 최근에는 기원전 23년 집정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두 아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우구르일 거라 추정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피소가 기초부터 지붕까지 집을 조심스럽게 짓고 있을 때,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로마를 마치 영원한 것처럼 건설하는군. 그 모습이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오."
이 피소가 기원전 15년 집정관 피소인지, 아니면 다른 피소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서기 17년 이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15년간 수행했으며, 말년에는 폰티펙스를 수행했다. 그러다 32년에 자연사했는데, 1년 전인 31년 세야누스 일당이 몰락한 뒤 로마의 저명한 인사들이 대거 재판에 소환되어 처형되는 상황에서 그처럼 고위 관직에 오른 이가 자연사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의 장례식은 원로원 결의에 따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딸 칼푸르니아는 6년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