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00:36

루키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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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평가
가족 관계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부인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자식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전투
내전기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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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일리리아 대반란
기타
장소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기타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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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황족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LVCIVS IVLIVS CAESAR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Lucius Vipsanius Agrippa)[1]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Lucius Julius Caesar)[2]
출생 기원전 17년
로마 제국 로마
사망 기원후 2년 8월 20일 (항년 18세)
로마 제국 갈리아 마살리아(오늘날의 프랑스 마르세유)
통칭 루키우스 카이사르(Lucius Caesar)
루치오 체사레(Lucio Cesare)[3]
왕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공식 지위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매장지 아우구스투스 영묘(Mausoleum of Augustus)
배우자 없음
자녀 없음
아버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친부)
아우구스투스(양부, 외조부)
티베리우스(계부, 외삼촌, 입양형제)
어머니 대(大) 율리아
형제 가이우스 카이사르, 대 아그리피나,소(小)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티베리우스(입양형제, 외삼촌),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붓형제)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입양2.2. 성장과 후계수업2.3.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혼2.4. 후계자 등극2.5. 요절
3. 사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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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족, 제위 계승권자, 정치가이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양자로,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일찌감치 입양돼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상속자 중 1순위가 됐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내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이었던 그는 태어난 직후부터 차기 황제로 낙점된 만큼,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다양한 특권을 선사받았고, 어떤 로마인들보다 많은 공직과 훈장을 선사받았다. 하지만 2년 후 요절한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보다 대중적 인지도가 더 낮아, 혈통, 이름과 달리 죽을 때까지 로마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통 남자 황족인 만큼,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모든 황족들과 혈통적, 법적으로 친인척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로 이어진 다섯 명의 황제 뿐만 아니라 이 왕조의 아우구스타들과 제위계승자(황태자)들까지 모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이어진다.

여동생 대(大) 아그리피나(율리아 아그리피나), 누나 소(小) 율리아를 비롯해 남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으며, 입양형제로는 어머니 율리아의 남편이기도 했던 티베리우스가 있다. 따라서 3대 황제 칼리굴라네로의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외조카가 되며, 여동생 대 아그리피나의 남편 게르마니쿠스는 그의 매제이면서도 법적으로는 조카가 된다.

2. 생애

2.1. 출생과 입양

기원전 17년 로마에 위치한 아그리파 소유의 로마 시내 최고급 빌라에서 아그리파, 대 율리아 부부의 세번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이름은 외가에서 널리 사용한 개인이름이자, 백부의 이름인 루키우스로 정해졌다. 그래서 출생 당시 본명은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다.

친부모의 결혼 자체가 외할아버지의 후계자 문제 해결로 진행됐고 지극히 정치적 이유로 가족사가 시작된 만큼, 출생하기 전 외할아버지와 친아버지 간의 약속에 따라 일찌감치 외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에 친양자로 입적될 운명이었다고 한다. 이는 기원전 20년 태어난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도 비슷했는데, 형제의 정식 입양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태어난 직후 정식 이행됐고 여름에 입양식을 거쳐 율리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에 정식 편입됐다.

외조부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에게 관례에 따라 '자녀를 입양보내준 감사의 격려금'을 지불했다. 입양 이후, 로마인들의 전통에 따라 이름을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빕사니아누스로 개명하지 않고,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꿨다.

입양되기 전부터 일찌감치 차기 황제가 된 만큼 태어난 날부터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생일과 건강을 기념하는 희생제를 열고, 자신의 수호신인 아폴로를 모신 신전에 이를 알리고 두 외손자를 위한 대대적인 행사를 매년 거행했다고 한다.

2.2. 성장과 후계수업

부모의 결혼이 결정난 순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양되기로 한 만큼, 입양 이후 외할아버지가 사는 팔라티노 황궁 안에서 자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두 외손자를 끼고 살았다고 하는데, 평소 가부장적이고 냉정한 성격과 달리 이례적으로 두 혈육의 모든 교육을 직접 관장하고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이는 그의 외할아버지가 두 외손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기 위한 이유 때문에 진행된 후계수업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최고의 교육을 제국 각지의 석학들에게 받았다. 예절을 포함한 공무 분야 교육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진행했고, 군사 훈련은 아버지 아그리파, 외조부의 두 양자로 어머니의 의붓오빠 티베리우스, 의붓동생 드루수스 등이 담당했다. 이때 형제는 키르쿠스 축제를 비롯해 국가 제사 의식에선 최고제사장인 아우구스투스를 직접 보필하는 사제 역할까지 맡았다.

어릴때부터 귀족 자제들이 참가하는 서커스, 연극 등에서도 항상 주인공을 맡거나 행렬을 이끄는 리더를 담당하면서, 귀족사회와 귀족 청년들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후계 수업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두 손자에게 글쓰기, 식사예절, 걸음걸이 등등을 모두 자신과 똑같이 하는 훈련도 있었고 어린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식사 자리에서 외조부 역할을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연회를 진행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분신으로 자랐는데, 두 사람이 성인 이후 남겨진 로마시대 조각상들은 20대 시절 아우구스투스의 흉상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모습으로 조각됐다. 그러나 외탁을 많이 한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달리,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남겨진 조각, 복원상에서 보이듯 확실히 아버지 아그리파와 붕어빵 수준으로 닮아 이는 초상으로도 확인이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켈루스 사후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누나의 사위 대 드루수스와 함께, 두 외손자이자 법적 양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홍보와 클리엔테스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 그가 공을 들인 이는 자신의 가문원에 정식 편입된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생일이나 나라의 국경일마다 홍보비로 막대한 돈을 지출했다. 모든 행사에서 그들에게 각종 명예와 훈장들을 하사하고 두 혈육 홍보에 엄청난 돈을 로마와 이탈리아 각지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에도 정작 로마민중들과 원로원에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인기는 오르지 않았고, 이들의 평판은 상당히 나빴다. 이런 여론은 형제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됐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견제 때문은 전혀 아니었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성격적, 행동적 결함과 친모 율리아 탓이 컸다.

2.3. 아버지의 사망과 어머니의 재혼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외할아버지와 친아버지가 50이 다 되어 얻은 후계자인 만큼, 몸이 건강하지 않은 아우구스투스가 급사할 경우 바로 제위를 잇기에는 상당히 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부 아그리파를 징검다리식 후계자로 지명해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공동으로 그 뒤를 잇는 방식을 취하려고 했다. 그래서 마르켈루스 사후,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후계자로 내정됐고, 동방 문제를 총책임지는 중책까지 맡기도 했다.

기원전 13년, 리비아 황후의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전선을 총책임지고 있었는데 이중 드루수스는 라인강을 도하해 라인강 동쪽 일대까지 로마 국경을 확장시킨 뒤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종결시키기 직전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에게 두 외손자의 군무 교육을 담당케 하려고 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같은 해 마르켈루스 극장 완공을 기념한 트로이 게임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대중 앞에서 공개한 뒤 판노니아에 있던 티베리우스에게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보내 그의 군무교육을 담당케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예상과 달리, 형제의 아버지 아그리파는 기원전 12년 캄파니아의 시골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이때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나이는 고작 5살에 불과했다.

아그리파의 이른 죽음은 아우구스투스의 예상과 전혀 빗나간 사건이었기 때문에 후계구도는 요동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딸 율리아, 그리고 이들의 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얼굴이 담긴 데나리우스 발행을 급히 중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을 벌고, 혹시 모를 추가 돌발변수를 줄이고자 아내 리비아가 첫 결혼에서 얻어 데리고 온 두 양자(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중 한 명을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편입해 새로운 후계구도를 짤 생각을 했다.

이런 복잡한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의 사위이자 아내의 차남, 즉 자신의 둘째 의붓아들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에게 아그리파가 해야 할 역할을 맡길 계획을 짜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이는 드루수스가 매년 초겨울 갈리아에서 로마로 돌아온 시점에 맞춰 진행되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가 돌아오기 전 원로원과 자신의 측근들에게 그가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알리며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래서 아그리파 사후, 아우구스투스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리 드루수스를 집정관에 추천해 집정관에 당선시키고 약식 개선식까지 통과시켰다[4]. 이는 아그리파 생전부터 "두 아들[5] 못지 않게 진지하게 드루수스를 내 후계자로 고려 중이다."라고 측근들과 원로원에게 실토했던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을 안다면, 또 아그리파 사후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나이가 10살도 되지 않은데다 아우구스투스가 60이 다가온 상황인 것을 안다면 드루수스가 차기 황제로 낙점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정식 양자로 입적된다면,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선 두 외손자의 미래가 문제가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연구들에 따르면 일찌감치 해소된 듯 하고, 실제로도 여러 안전장치가 마련돼 돌발변수가 적었다. 그 첫 조치는 루키우스의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성인이 된 직후 드루수스의 장녀 리빌라와 약혼 후 결혼식이 결정된 일이었고, 두번째 조치는 루키우스의 여동생 대 아그리피나가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와 정혼 후 약혼을 한 뒤, 게르마니쿠스의 성년식 직후 결혼식을 한다는 결정이었다. 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는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를 위해 드루수스를 율리우스 가문에 정식 편입해, 카이사르 가문과 연대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결합을 완성하고자 다양한 조치를 내렸다.

어쨌든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사후부터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차남 드루수스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킬 생각을 한 뒤, 약식 개선식 진행을 통한 정치적 이벤트 후 드루수스를 황태자로 삼아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보호자로 묶어둘 생각을 했다. 즉, 그는 드루수스를 양자 삼아 율리우스 가를 통해 제위를 잇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의 장녀 리빌라를 결혼시켜 정치적 연합체로 완성된 새로운 귀족 가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은 첫 단추를 막 맨 상황에서 드루수스가 개선식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게르마니아 전선에서 승리 후 도하 직후 일어난 사고로 낙마 후 요절하면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이것은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미래를 위해 구상한 모든 시나리오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의미였고, 드루수스의 자녀들을 율리우스 가에 편입시켜 첫 번째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와 결합을 완전케 하려는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까지 미래가 의심될 상황이라는,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선 굉장히 골치 아픈 상황이 된 것을 말했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예정에도 없던 다른 패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요청,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유아기 때부터 친아들이자 장남으로 키운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맡았어야 할 역할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내린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결혼으로도 인척관계를 맺지 않은 양자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갑작스러운 사망 등으로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아내의 친아들(본인의 의붓아들)에게 중간다리, 혹은 대타 정도로 생각해 내린 조치였다.[6]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의 이혼을 지시한 뒤,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율리아와 명령으로 이혼하게 될 티베리우스의 결혼을 지시내린다. 이 결정은 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황제로서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배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었다.

원래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해 홀몸이 되자 가문에 상관없이 기사계급 출신 남성 중 한 명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결혼 직후부터 자신의 두 아들을 남편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황제로 만들고 싶어한 리비아는 이 결정에 반대하면서, 후계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율리아의 결혼상대자는 티베리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런 리비아의 판단과 결정은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배려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명령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일처리와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정치적일 정도로 냉정했는데, 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차갑지 못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먼저 가족들의 일이 아니라고 부담감을 덜어주자 본래 그의 방식처럼 티베리우스의 이혼,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결정은 티베리우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아내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소 드루수스[7]라는 아들까지 둔 상태였다. 심지어 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바로 아그리파가 율리아 이전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기 때문에, 즉 티베리우스는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장모인 율리아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거기다 티베리우스는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케이스가 아닌, 연애결혼으로 빕사니아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혼전순결을 지킬 만큼 상당한 애처가였다. 그래서 금슬이 좋던 빕사니아와 이혼하기 진짜 싫어서 계부에게 제발 안 된다고 사정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8]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기에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9]

그 결과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의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는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지게 되며,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재혼임에도 처음에는 본인이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교양도 부족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로 유명한 사람답게 결혼 생활 내내 세번째 남편 티베리우스와 끊임없이 부딪쳤다. 이런 상황에서 고부갈등이 벌어지고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아들 티베릴루스(Tiberillus)마저 유아기때 요절해, 부부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다. 설상가상 대 율리아가 여러 남성들과 불륜관계를 맺고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의 측근을 만들어주겠다면서, 사촌언니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의 남편으로 소 안토니아의 오빠인 율루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세를 꾸리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이는 아우구스투스 부부와 대 율리아 간의 알력 다툼, 대 율리아와 티베리우스 사이의 대결 구도로까지 확전된다.

따라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최전방 근무를 지원해 전장으로 향하거나 힘든 업무를 떠맡기도 했는데, 이 무렵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무 훈련을 받아야 될 나이에 접어든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계부이자 외삼촌 티베리우스에게 직접 군사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판노니아, 일리리아로 가서 로마군 작전을 참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귀국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티베리우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율리아가 불륜관계를 넘어 공개된 신전에서 여러 남성들과 성관계를 맺고 난교파티를 벌이면서 이는 사태를 최악으로 만들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36살의 나이로 말 그대로 모든 공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평범한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은퇴를 해버린다.

2.4. 후계자 등극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계부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은퇴한 이후, 거의 8년 가까이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살았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티베리우스를 수도로 데리고 오길 원했고, 티베리우스에게 끝내 황제 대리인 자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티베리우스를 견제하면서, 그가 로마로 돌아오지 못하게 은연 중 외조부 아우구스투스를 압박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의 계산과는 다른 행보였는데, 이런 형제의 태도는 조심성 많은 아우구스투스가 어쩔 수 없이 세습왕조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6년, 루키우스의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14살의 어린 나이에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그리고 죽은 마르켈루스만 받았던 온갖 특권들을 모두 선물 받았다[10]. 이 해에 루키우스 역시 특권을 하사받았고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받은 모든 영예가 공유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명령을 통해, 로마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미성년의 나이에 특권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대규모로 열렸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제정이라고 불려도 이때 로마는 엄연히 '공화국'이었으며 황제 개인의 제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일가 남자황족들[11]은 "공화국의 위대한 영광" 같은 공화정 로마 시대의 상투적 문구를 사용했는데,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의 지나치게 이른 정계 데뷔와 특권들은 예전 전례들을 생각해도 엄연히 세습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은 두 사람의 데뷔를 자연스레 권력 세습으로 확신했고, 여론 역시 의심하게 된다. 이는 겉으로 공화정을 내세우면서 야금야금 제정을 만든 아우구스투스를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정치적 타협을 하고, 정적들을 꼬투리 잡거나 죄를 뒤집어 씌워 하나 둘 제거한 다음,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들과 민회까지 원로원과 프린켑스의 협상장에 끌어들여 우격다짐으로 10대 소년들에게 각종 특권들과 집정관 등 공직을 하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엄청난 돈을 들여 국가 행사로 자신의 혈육들을 홍보하면서, 유벤투스라는 소년단을 만들어 두 손자에게 단장, 부단장 자리를 주고 각종 행사들까지 주최시키는 등 엄청난 지원을 했다. 하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노력은 성과가 있다고 해도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공이었고, 여론 역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해주지 않았다. 로마 여론을 주도한 원로원과 로마 민중들은 혈통만 타고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능력과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

이는 두 사람이 거만한 말투와 태도,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안하무인적 행동 등으로 원로원과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던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미움은 받아도 능력은 인정받은 티베리우스[12]와 달리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가 지나치게 능력이 평범한데다 어린 나이에 특권을 받은 값을 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살아생전 마르켈루스보다 못한 세간의 평판이었다.

그럼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두 외손자가 왜 인기가 없는지 모른 듯 행동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들에게 기회를 줬다. 이런 까닭에 기원전 2년, 아우구스투스는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포로 로마노로 데리고 간 다음, 이곳에서 정식 성인식을 진행시켰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루키우스에게 손수 성인용 토가를 주고,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princeps iuventutis )" 칭호를 수여했다. 이어 그가 만 19세 생일이 될 때 집정관에 오르도록 하는 결정을 법적으로 통과시켜 예비 집정관에 임명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만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달리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곧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대체자라는 것을 뜻했다.

이런 가운데,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리빌라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 건물 축성 권한 및 개보수권을 받고 이를 군신 마르스에게 봉헌하는 사제 역할을 맡았다. 이어 기원전 2년 8월 2일, 형제는 남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데리고 키르쿠스 막시무스 경기장에서 트로이 게임을 집행하고, 260마리의 사자 사냥 경기 축제를 집행했다. 이어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의 해전과 지상전을 하나의 스토리로 꾸민 검투사 혈전을 기획해 로마시민들에게 베풀고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36마리의 악어 사냥 경기를 개최했다.

2.5. 요절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결혼식 직후, 신부 리빌라를 로마에 남겨두고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을 위해 그리스로 향한 날,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 명령에 따라 히스파니아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히스파니아에서 그는 과거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처럼 군사훈련을 받기로 했는데, 서기 2년 8월 루키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느닷없이 중간지인 갈리아의 마살리아에 머물렀다. 이는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건강 문제 때문으로 추정되는데, 8월 20일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그곳에서 병으로 요절했다.

3. 사후 이야기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 중 둘째손자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과거 대 드루수스처럼 사랑해, 몹시 침통해했다. 그러나 정식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살아 있어, 후계구도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2년 뒤인 서기 4년 2월 21일 가이우스 카이사르마저 요절했다.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돌발 충돌로 얻은 자상이 악화돼 벌어진 상황이었는데, 이 소식에 아우구스투스는 절규했다. 그 결과, 18개월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문제 공백이 터지게 되는데, 대체자로 선정될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 1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모두 어렸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는 어쩔 수 없이 아내의 큰 아들로 자신의 양자 중 가장 후순위로 생각한 티베리우스를 게르마니쿠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보호자이자 징검다리 후계자로 낙점한다.이때 아우구스투스는 학습의욕이 없고 난폭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문제를 생각해, 티베리우스를 서기 4년 6월 26일 정식 입양 후 율리우스 가문에 편입하면서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떠난 이후, 아내와 함께 친손자처럼 키우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도 함께 입양해 게르마니쿠스-소 드루수스 체제의 새로운 후계구도를 짜게 된다.


[1] 출생 당시 이름[2]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에게 양자 입적 된 이후 개명한 이름[3] 현대 이탈리아 표기에서 부르는 이름[4] 동방 전선에서 비슷한 수준의 공을 세운 티베리우스의 경우, 끝내 개선식을 올리지 못했다.[5]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6] 같은 후견인 역할이라도 아그리파와 티베리우스의 입장은 전혀 다른데, 아그리파의 경우에는 가이우스나 루키우스 모두 자신의 친자식들이니 중간다리 역할 내지 후원자 역할을 맡는 것이 억울하거나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손에서 친아들 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인생 대부분을 자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말 그대로 자신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계부의 아이들을 섭정 자격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실제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을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지만, 그 다음 황제는 무조건 내 핏줄에게 물려줘야한다"라고 작성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7] 대부분 로마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돌려 쓴 것과 마찬가지의 예인데,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죽은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애초에 그 동생 드루수스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온 것이고, 동생 드루수스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형의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서 따온 것이다...[8]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결정을 바꿀 수 있던 사람은 그의 누나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10대 때부터 친구였던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리비아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사망한 터라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유일했다.[9]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티베리우스 본인은 물론이고 아내 빕사니아에게까지 해가 미치기 때문이다.[10]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드루수스의 경우에는 성년식을 올린 뒤, 남들보다 5년 이상 빠른 공직 경험을 인정받는 선의 특권이었다.[11] 티베리우스, 드루수스[12] 게다가 티베리우스는 로마인들에게는 베스타 여사제 같다, 후세 역사학자들에게는 청교도 같은 황제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고 청렴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그를 비난할 구실이 마땅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