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아르비나 라틴어: Aulus Cornelius Cossus Arvina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틸루스 코수스(아버지)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아들) |
참전 | 삼니움 전쟁 등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343년 |
전임 |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
후임 |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아할라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틸루스 |
임기 | 기원전 332년 |
전임 | 독재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피누스 |
동기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
후임 |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포티투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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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독재관.2. 생애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루틸루스 코수스는 기원전 408년 집정 무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353년 에트루리아 연맹에 소속된 카에레 시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타르퀴나 시와 동맹을 맺자, 원로원은 이들을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독재관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선임했다. 이때 그는 기병장관으로 선임되었다. 카에레 시민들이 독재관 선출 소식을 듣고 로마에 항복 의사를 밝히자, 원로원은 방향을 바꿔 로마를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를 받은 팔리스키족을 토벌하기로 했다. 팔레스키인들이 전투에 불응하자, 로마군은 그들의 영토를 황폐화했다.기원전 349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 인레길리우스가 임기 중에 급사하고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다른 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고위 행정관 선거를 집행할 인물이 없자, 원로원은 다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독재관에 선임했다. 이때 그는 또다시 기병장관으로 발탁되어 그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기원전 343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해 삼니움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로마군 2개 군단을 이끌고 삼니움으로 쳐들어갔다. 코르넬리우스는 아펜니노 산맥에 진입해 사티쿨라 계곡으로 내려가는 산길로 군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삼니움인들이 사티쿨라 계곡 주변 고지에 매복한 채 로마군이 계곡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윽고 사티쿨라 계곡에 내려온 로마군은 적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 때는 이미 퇴로가 막혀 있었다. 병사들이 이러다가 꼼짝없이 전멸하겠다는 공포에 질려 있을 때, 대대장(military tribune)인 푸블리우스 데키무스 무스는 삼니움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적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코르넬리우스에게 2,400명 가량의 분견대를 맡겨달라고 요청했다. 코르넬리우스가 허락하자, 그는 이들을 이끌고 언덕을 향해 진격했다. 삼니움인들은 무스의 분견대가 언덕 정상에 거의 도달할 때까지 그들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눈치채고 즉시 언덕을 포위했다. 삼니움인들이 언덕 포위에 신경을 쏟는 사이, 코르넬리우스는 방어에 좀더 유리한 지점으로 군대를 후퇴시켰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가 빠져나가자, 삼니움인들은 하룻밤을 푹 쉰 뒤 내일 언덕 꼭대기에 있는 로마군을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데키무스는 밤중에 켄투리오들과 함께 적진을 정찰한 뒤 병사들을 모아놓고 오늘 밤에 탈출할 생각이며, 가능하면 조용히, 발각되면 무력으로 뚫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데키무스의 지휘 아래 숨죽인 채 이동했지만, 적진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발각당했다. 이에 데키우스와 병사들이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자, 삼니움인들은 혼란에 빠져 달아났다.
다음날 아침 데키우스와 병사들이 무사히 귀환하자, 코르넬리우스는 몹시 기뻐하며 그들을 반겨줬다. 이후 병사들에게 삼니움인들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전투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던 삼니움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진영이 점령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숙영지로 도망친 30,000명의 삼니움인들이 전원 사망했다고 한다.(사티쿨라 전투)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로마군의 군공을 의도적으로 띄워주기 위해 부풀린 수치로 간주한다.
코르넬리우스는 전투가 끝난 뒤 데키우스에게 황금 목걸이, 황소 100마리, 금박 뿔이 달린 흰 황소 한 마리를 선물했고, 그의 부하들에게 각각 소 한 마리와 속옷 두 벌을 지급했다. 병사들은 데키우스에게 2개의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하나는 군대 전체를 구한 공로로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하들을 곤경에서 구한 공로로 수여한 것이었다. 데키우스는 마르스에게 경배를 올리는 희생제에 흰 황소를 바쳤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100마리의 황소를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코르넬리우스는 수에술라 전투에서 삼니움인들을 격파하여 캄파니아에서 몰아낸 발레리우스와 함께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는 발레리우스와 코르넬리우스가 각각 기원전 343년 9월 21일과 9월 22일에 삼니움족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332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함께 2번째로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그의 임기 동안에는 어떠한 전쟁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임기 말에 켈트족이 로마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이 원로원에 전해지자 마르쿠스 파피리우스 크라수스가 독재관에 선임되었고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포플리콜라가 기병장관에 발탁되었다.
기원전 322년, 그는 독재관에 선임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그가 독재관에 선임된 이유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는 로마에서 열린 경기에서 시민들에게 네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삼니움과의 전쟁에 투입되어 적 기병대가 수하물을 약탈하기 위해 전장을 떠난 틈을 타 승리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독일의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뮌처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개선장군 목록>에 그 대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의 개선식이 기록된 점을 근거로 그가 전쟁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320년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Fratres Arvales, 아르발 형제 사제단/들판 형제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아비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에 발탁되었으며, 또다른 아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르비나는 기원전 306년과 28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