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스 아티쿠스 라틴어: Herodes Atticus | |
전체이름 |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히파르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Lucius Vibullius Hipparchus Tiberius Claudius Atticus Herodes |
생몰년도 | 서기 101년 ~ 서기 177년(향년 76세) |
계급 | 로마 귀족, 아카이아 귀족, 프리기아 귀족 |
국가 | 로마 제국 |
출생 | 101년, 로마 제국 아카이아 속주 마라톤 |
사망 | 177년, 로마 제국 아카이아 속주 마라톤 |
직위 | 원로원 의원, 황실 가정교사, 웅변가, 수사학자, 자선사업가, 건축가 |
가족 | 안니아 레길리아(아내)[1] 아티쿠스 브라두아(아들)[2] 외 2남 3녀 |
기소(결과) | 존속 살인 및 살인교사에 따른 1급 범죄(일부 유죄) 불경 및 반란모의(유죄)[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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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원로원 의원, 웅변가, 수사학자, 건축가, 자선사업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지식인" 중 한명으로 추앙받은 사람이나, 인격적으로는 매우 폭력적이고 잔인한 면도 갖춘 인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두 번이나 로마 제국 안에서 1급 범죄로 규정한 혐의로 재판에 섰고, 정상적이라면 모두 유죄 선고를 받고 죽어야 했던 범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명성이 대단하고, 제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꼼짝 못할 정도로 지지자들이 많아 두 번 모두 무죄, 1년 추방형에 그쳤다.로마 시민권을 받게 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전부터, 아테네 귀족이자 프리기아 귀족 중 로마 중앙정계에 큰 입김을 행사한 명문가 출신으로, 키몬 일가의 후손이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두 아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가정교사를 맡았던 공로로 143년 집정관에 올랐다.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헤로데스)아티쿠스로 불리나, 로마시민으로서의 정식 이름은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히파르쿠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다.
폭발적인 웅변솜씨와 유창한 언변, 화려한 쇼맨쉽으로 아테네와 제국 동부를 중심으로 탄탄한 팬 층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인성적으로 훌륭한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와 달리, 매우 폭력적이고 잔혹한 인간말종으로도 유명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 대 파우스티나의 친딸이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인 소 파우스티나는 10살때부터 죽을 때까지 아티쿠스를 인간말종으로 생각해 혐오했고, 아티쿠스 역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순종적이지 않은 소 파우스티나 황후를 증오해, 175년 추방형 해제 이후 고향에서 살면서 직계제자들과 원로원 내 본인 파벌들을 선동해 오늘날 소 파우스티나를 악녀로 묘사한 온갖 뜬소문을 유포했다.
2. 생애
그리스 혈통으로 아테네 귀족의 직계후손이며, 오늘날 아나톨리아 중부의 프리기아 귀족 직위까지 가진 로마 제국 당시 최고의 그리스 귀족,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다.정치가 키몬의 이복여동생이며 밀티아데스의 딸 엘피니케의 직계 후손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부유하기로 자타가 인정한 로마 제국 동부 전체에서도 매우 부유하고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평한 그리스 귀족이었다. 일명 마라톤의 클라우디우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일가 출신인데, 그 일가가 로마 시민권을 받게 된 때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라우디우스 1세가 만든 특별법 때였다. 그렇지만 헤로데스 아티쿠스 일가는 직계 고조부의 4대조 에우클레스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게 정치자금을 후원하고, 그들을 도우면서 두각을 나타낼 만큼, 그 영향력이 대단했고, 그 가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부터 그리스 세계에서 대단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젊을 적부터 혈통 자부심이 대단했고, 그와 그 일가 전체는 스스로를 로마 귀족, 로마 시민보다는 오래되고 고귀한 그리스 귀족이자 프리기아 귀족 자리를 쟁취한 그리스 귀족이라고 평했다. 이런 까닭에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언급된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를 비롯해 아이이코스, 제우스 신과 케크롭스의 혈통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향은 그리스의 도시 마라톤으로 대부분 생애는 아테네와 이탈리아 로마에서 보냈다고 하며, 프리기아에서는 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로원 의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어머니는 부유한 상속녀로 저명하고 집정관까지 배출한 집안의 딸인 비불리아 알키아 아그리피나다. 그의 부모는 삼촌과 조카 사이로 근친혼이며, 외할머니와 아버지는 남매였다. 형제로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티쿠스 헤로디아누스가 있고, 여자형제로는 클라우디아 티사메니스가 있었다. 외조부모는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루푸스, 클라우디아 알키아이며 외할아버지는 이들 부부의 아들 히파르쿠스다.
집안 자체가 고대 아테네 귀족 집안이고, 외할아버지가 매우 부유한 이탈리아 로마귀족인 까닭에, 엄청 부유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의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라우디우스 1세때 오스티아 항구 공사로 피해를 입은 그리스 무역상이나, 그리스어 교육으로 시민권을 받게된 케이스였어도, 이렇게 받은 그리스 출신들과는 배경이 전혀 달랐다. 직계조 에우클레스와 그 아들들 때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인연을 맺고, 중앙정계와 연줄이 있는 가운데에서, 법이 통과되면서 시민권을 받았던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일가는 호의로 로마 시민권과 성씨를 받은 케이스였다. 즉, 여타 클라우디우스 성씨를 사용한 그리스, 아나톨리아, 시리아 출신들과는 혈통, 지위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리스의 아테네 귀족 직계손이었고, 아버지가 아테네 시민권자 중 최초로 로마 원로원에 입성해 집정관까지 지낸 당대 최고의 그리스 세계 유력자였다. 그래서 그리스와 이탈리아 모두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가문의 영지와 피호인이 즐비한 아카이아 지방과 프리기아 지방을 돌며 연설가로 일찍부터 명망이 대단했다.
아티쿠스는 젊을 적부터 본인 스스로를 타고난 그리스인으로 생각했고, 본인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 모두에게 매우 거만하고 잔인할 만큼 폭력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교양이 풍부하고, 영리했다. 수사학, 웅변술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하며, 어릴 적부터 언변이 대단해 일찍부터 폭발력 있는 웅변 솜씨, 논리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변호술, 뛰어난 연기력과 대중 호소능력을 갖춘 점은 성년식 직후부터 동부 최고의 연설가로 평가받은 이유가 됐다. 이중 가장 뛰어난 능력은 타인을 비평하는 재주였는데, 타고난 그리스 귀족이며 헬레니즘 세계의 전형적인 귀족이라서 그 명성은 더욱 높았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명성을 쌓았는데, 그리스 문화를 사랑하고 그리스, 아나톨리아, 푸닉 출신들을 유독 사랑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런 아티쿠스에게 큰 관심을 가졌고, 그를 매우 총애했다. 따라서 그는 24살의 매우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125년 아시아 속주의 한 도시국가 파견 지사로 임명했다. 이는 그렇지 않아도 매우 부유하고 혈통 자체가 아테네 귀족의 후예인 아티쿠스가 큰 명성을 쌓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이 공직을 마친 뒤, 아테네로 돌아왔을 때 아티쿠스는 로마 최고의 학부가 몰린 아테네에서도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명성에 기반해 최고의 교육자로 명성을 쌓게 됐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시아 총독 시절부터 아티쿠스와 친분을 맺었고 황제가 된 뒤에는 양자로 입양한 처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요절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의 수사학 전담 가정교사로 초빙했다.
이 시기, 아티쿠스는 안토니누스 황제와 대 파우스티나 황후와 교류하면서 훌륭한 교양으로 이들을 사로잡고, 더 큰 총애를 받아 대 파우스티나의 친정 식구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척인 안니우스 가문 출신의 안니아 레길리아와 약혼 후 139년 결혼했다. 이때 아티쿠스의 나이는 40세, 안니아 레길리아의 나이는 고작 14세였다. 이 결혼 당시, 아티쿠스는 처가로부터 값비싼 대별장을 선물받아 최고의 부자가 됐는데, 이 별장은 로마 외곽의 아피아 가도 근처에 있었고 가도 3마일 반경을 통제할 정도로 거대했다.
143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추천으로 집정관에 올랐다. 이때 황제는 "두 아들을 훌륭히 지도해 감사하다"고 했는데, 이런 일화가 알려지면서 더 큰 명성을 쌓게 됐다. 허나 그는 안토니누스 황제의 두 아들 가정교사 계약이 끝날 때인 143년 말 집정관 임기가 종료되자마자,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리스로 돌아간 뒤, 그곳에서 여러 제자들을 육성했고 자선사업을 벌여 수많은 건축물을 만들어 기부했다. 하지만 160년과 174년 로마 제국에서 '1급 범죄'로 불리는 존속살해, 반역죄로 기소됐고 174년 시르미움 재판에서는 1년 추방형에 처해져 아테네에 돌아가지 못했다. 1년 추방형이 끝난 뒤, 돌아왔다가 177년 76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죽었다. 사후 그를 기린 제자들과 그 웅변술에 매료된 아테네인들에게 국장 가까운 대접을 받으며 아테네에서 장례가 열렸다고 한다.
3. 최악의 인간성과 범죄들
아티쿠스는 그 능력과 별개로, 인성이 개차반이었고 인간말종 수준이라는 표현 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를 좋아하는 로마인들은 그를 무척 존경하고 그가 죽을 때 아테네인들은 국장 가까운 대접을 하면서 아티쿠스를 기렸지만, 그를 혐오한 이들은 그를 무척 싫어했다.그는 교사로 명성을 쌓던 무렵부터 여러 부분에서 당대 로마인들 기준으로 보더라도, 인간말종이었다고 한다. 먼저 그는 교양있는 로마인들이라면 하지 않을 짓을 당연하게 했고, 이 행동이 몸에 배어 있어 비열하고 잔혹하며 거만하다고 욕 먹었다. 자신의 노예, 해방노예들을 짐승 다루듯 대했으며, 그들에게 욕설과 폭행은 기본이었다. 딸 뻘의 나이 차이가 나는 아내에게도 손찌검은 기본이었으며, 가문의 후계자인 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가 약간의 정신지체 장애가 있다고 규정해, 학습 부진을 이유로 죽기 전까지 폭행했다. 또 툭하면 브라두아가 약간의 잘못이라도 했다며, 노예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서커스 조련사가 조련하듯이 두들겨 패고, 대중들 앞에서 이런 자신의 행동을 자랑하면서 어린 아들을 머저리로 희화화했다. 따라서 브라두아가 정신지체 장애가 진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집안 해방노예, 노예, 아테네 시민들은 이런 아티쿠스의 아들을 동정했다.
이런 모습은 제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의 두 아들 마르쿠스, 루키우스에게는 흉기로 위협하지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이 조금이라도 잘못하거나 본인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며 목에 면도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하거나 모욕을 주는 것은 예삿일도 아니었다. 그는 황궁 안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마르쿠스, 루키우스 형제에게도 무척 엄했다. 카이사르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별다른 잘못도 안 했는데, 그냥 오늘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마음에 들지 않다는 이유로 폭행한 것은 악명 높았다. 인격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교육의 일환으로 이해하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본인의 기분에 따라 수사학 교육 중 툭하면 사실상 공동황제나 다름없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 멱살을 잡거나, 그들을 교육이라는 이유로 발로 차고 빰을 때리고 주먹으로 두들겨 팼다. 이런 일은 어릴 때 할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의 엄명으로 해방노예에게 의존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고용된 가정교사들에게 회초리로 매를 맺은 클라우디우스 1세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엄하게 훈련시키는 로마 가정교사들이 보더라도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심했다고 주변에서 평가했다.[4]
그러다가 어느날 미래의 남편이 될 사촌오빠 마르쿠스를 방문한 소 파우스티나는, 큰 잘못도 안한 예비신랑이 본인이 보는 가운데 아티쿠스에게 이유없이 스승 기분에 따라 발로 차이고 빰을 마구 맞고 욕을 먹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10살 무렵, 아시아 속주 총독인 아버지를 따라 아티쿠스가 아랫사람들에게 폭력적인 것을 보고 경악했던 터라, 소 파우스티나는 이 사건 이후 아티쿠스를 평생토록 증오하고 그를 인간말종으로 여겨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아티쿠스의 이런 행동은 결국 두 번의 기소와 1번의 무죄, 1번의 유죄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는 160년경, 임신 8개월째인 아내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가정폭력을 행사하다가 말대꾸를 한다며 하인을 시켜 그녀를 때려 죽인 혐의로 고발돼 법정에 섰다. 아내가 안니우스 가문 출신이고 명문귀족의 딸인 까닭에 아티쿠스는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었는데, 그는 도처에 깔린 친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뒤로는 본인과 하인의 무죄를 위해 뇌물을 뿌렸다. 그래서 그는 유죄가 분명함에도 무죄로 방면됐다.
이후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고향이자 터전인 아테네로 건너가, 자신이 아내를 진짜 사랑했다며, 본인이 살인교사를 하는 식으로 결국 죽인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 추도행사를 열고, 거액을 쏟아 극장을 만들어 아테네에 무료로 개방했다. 그는 아내가 조산으로 죽었다고 사방에 떠들고, 연설하면서, 본인이 억울했다고 연설했다. 이어 평생 재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함께 그는 살아생전 아테네와 올림피아에 다양한 공공건축물과 분수 등을 만들어 기부한 아내가 했던 일을 마치 본인이 결정했다는 식으로 미화했다. 이런 행동은 그리스 땅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로마에 머물 때 살던, 처가에서 선물로 준 대저택 인근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진 두 개의 기둥을 재산 경계선에 세우면서, 본인이 애처가였고 피해자라고 크게 홍보했다.
“이 땅이 한때 소유하였던 집의 빛이자 영혼이었던, 헤로데스의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추모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계속 헤로데스의 행동을 의심했다. 특히, 처가 식구들은 여러가지 증거에도 발뺌하고 연기하는 헤로데스에게 큰 의심을 품고, 그가 벌이는 행동을 보며 원망했다.
이에 헤로데스는 처남 아피우스 안니우스 아틸리우스 브라두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고, 여전히 의혹을 해소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 무죄로 방면된 자신을 모욕한 일이라고 비방했다. 동시에 그는 처남을 로마에서 직접 고소한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자신이 죽인 아내의 유골항아리를 처남 고소 후 들리지 않을 로마에 납골당을 지어 매장하고, 단 한번도 찾지 않고, 언급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지적장애가 있는 아들을 짐승취급하고, 두 딸을 무시하면서, 가증스럽게 본인이 죽은 아내를 언급하면서 사촌의 아이인 오촌조카가 아내가 죽은 직후에 5살의 나이로 죽은 차남이 생각난다며, 재혼 대신 오촌조카를 양자로 입양한다. 이렇게 입양한 아들이 사촌의 아들로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친아들과 둘째 딸의 자녀들이 멀쩡히 살아 있어도, 전재산을 물려주고 가문의 후계자로 선포한 루키우스 비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헤로데스였다.
이렇게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뻔뻔했다. 그리고 14년이 지난 174년, 그는 끝내 시르미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본인은 1년 추방형에, 반역죄를 공모하는데 가담했다고 기소된 본인의 노예 3명은 처형됐다. 이때 그는 아테네에서 열릴 재판에서 꼼짝없이 유죄로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으로 시르미움에 와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고집을 피워 기어이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이때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억울함으로 호소하면서도, 노인인 본인 상태를 내세워 무죄로 방면될 꿈에 부풀었는데 법정에서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를 데리고 방청 중인 황후 소 파우스티나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이때 아티쿠스는 본색을 드러내면서, 황제에게 따졌는데 이를 본 어린 공주가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까지 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를 인간말종 취급하는 황후의 심기를 제대로 건들고 말았다. 그래서 마르쿠스 황제는 이를 적당히 무마하려고 하다가, 아내가 계속 따지고 여론도 나빠지자 그에게 자발적으로 1년 추방형에 동의하는 형태로 유죄를 때렸다.[5] 이런 사정으로 그는 1년 동안 아테네에 돌아가지 못했는데, 이를 이유로 앙심을 품고 숨이 붙어 있던 세월 내내 얼마 뒤 사망한 소 파우스티나가 난잡하고 남색을 밝힌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아내에게 잡혀산다고 소문을 냈다. 그리고 이는 후일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되면서 뜬소문에서 진실이 되면서, 소 파우스티나가 악녀로 소문이 난 이유가 됐다.
아티쿠스는 177년 죽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가 모두 죽고 콤모두스 재위 이후에도 그 제자들이 안토니누스 가문에 대한 비방성 뜬소문을 유포했다. 아티쿠스 본인과 직계제자 및 그 직계의 직계제자들이 로마 상류층 교육을 장악해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래서 그는 1년 추방형에서 풀려난 뒤 직계제자들과 함께 마르쿠스, 파우스티나 부부를 가루 빻듯 씹어대고 파우스티나가 음탕한 여인이며 주제 넘는 짓을 한다는 소문을 만들어 가르치는 상류층 제자들에게 "인격적으로 훌륭한 아티쿠스께서 핍박당했다"는 식으로 철저히 가르쳤다. 그래서 아티쿠스 직계제자의 직계제자에게 교육받은 카라칼라는 스승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 파우스티나를 증오하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게타라는 제어장치가 사라지자마자[6][7] 파우스티나 곁에서 울면서 아티쿠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딸아이가 유일하게 살아있는 이들 부부의 딸 코르니피키아라고 생각해(사실은 이 당시 죽고 없던 막내딸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 공주였다.), "게타가 죽자 우는 것이 걸렸다"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
4. 여담
- 161년, 아티쿠스는 지난해에 자기가 죽인 아내 안니아 레길리아를 기념한답시고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Odeon of Herodes Atticus)'을 아테네에 세웠다. 267년 헤룰리 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1950년 재건되어 현재까지 관광객들을 받고 있다.
- 2010년 고대 여성 연구 전문 역사가 사라 B. 포메로이가 안니아 레길리아 살인 사건을 다룬 저서 <레길리아 살인 - 고대 가정 폭력 사례>를 출간했다.아티쿠스의 가정 폭력으로 인한 살인 사건에서 출발하여,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고통받았던 이야기를 조명했다.
- 최악의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나, 한때나마 소년 시절에는 하드리아누스 시절의 소피스트로,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스승 중 한명인 파보리누스[8]처럼 철학자와 교육자들이 감정을 억누르고 활동적인 힘을 차단하면서 오로지 냉정하게 규율만 숭배하는 일을 "무기력하고 무기력한 삶"이라고 평할 정도로, 헤로데스 아티쿠스 본인의 성인 시절 같은 이들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그런 자들의 본질을 진심으로 혐오한 적이 있었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 시절의 로마인이자 그리스인으로, 같은 소피스트인 필로스트라토스[9]가 풍자를 곁들여 평한 바에 따르면, 딱 이랬다고 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후대 소피스트의 주목할 만한 지지자일거다."
이는 필로스트라토스의 최대 후원자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율리아 돔나 부부와 세베루스 왕조에서 여제로 불린 율리아 마이사였고, 율리아 돔나가 남편의 결정으로 두 아들을 헤로데스 아티쿠스 직계 제자들에게 교육을 맡겼음에도 그 방식에 의문이 가득한 나머지 필로스트라토스 등의 의견을 듣고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파피니아누스 등에게 아들들의 멘토가 되도록 힘쓴 예를 떠올려보면, 칭찬이 아니었다. 즉, 당대부터 헤로데스의 무자비한 교육 방법이나 인간성은 엄격한 로마인에게도 최악이었다는 이야기였다.
- 친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와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이유는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아들 브라두아를 학대하고 177년 죽을 때까지 친아들을 중상모략해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티쿠스의 학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브라두아가 지극히 정상이나, 또래들보다 글을 빨리 익히지 못한다며 대중들에게 정신지체 장애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조소하고, 폭행하다가 스파르타로 보내 학대를 장려하라고 명한 것은,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한 학대 중 그나마 약한 수준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이후에도 브라두아를 학대했는데, 160년 아내를 죽인 뒤 살인죄로 재판받는 동안에는 재판장과 가정 안에서 그 잘못까지 15살짜리 아들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밝혀 보이겠다며 이를 명분삼아 아들을 폭행하고 모욕을 줬다. 따라서 160년 아버지의 가정폭력 속에서 어머니, 두 동생을 잃고 아버지의 모략으로 불효자로 모함받은 아들 아티쿠스 브라두아는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자신을 가문에서 추방시키자마자, 용서를 구하지 않고, 곧바로 가출했다. 그는 이때 어머니 재산을 상속받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는데, 브라두아의 외삼촌과 죽은 두 누이의 시댁 식구들까지 브라두아를 도우며 그를 동정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브라두아는 이탈리아로 건너간 직후부터 이름을 개명했고,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주위 평판에서 "아버지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예의바르다"는 것을 본인 자랑으로 여겼다. 또 그는 아버지를 일절 언급하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했다. 이렇게 헤로데스 아티쿠스 부자는 절연했는데,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브라두아를 가문에서 추방한 이후에도 그를 중상모략하면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괴롭히고, 죽은 뒤에도 브라두아가 하는 기부 등에 훼방을 놓도록 하는 식으로 못살게 굴었다.
[1] 임신 8개월일 당시, 가정폭력으로 남편과 남편 하인에게 맞아 죽었다.[2] 어머니 사후, 아버지에게 학대를 계속 당하다가 가문에서 추방됐다. 이후, 어머니가 물려준 재산을 바탕으로 외가가 있는 이탈리아로 건너간 뒤, 개명 후 평생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절연했다.[3] 본래 혐의 그대로였다면 사형이었다. 그런데 고령과 황제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정작 1년 자진 추방형으로 처벌을 받았다.(집안 노예, 해방노예들 3명이 주인 대신 사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재판 과정 내내 이를 지켜본 소 파우스티나 황후가 크게 화를 내면서, 남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따지고 법대로 하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여러가지 사정 때문에 유죄를 선고하면서도 무척 곤란해 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제국 동부에서 많은 제자를 두며 로마 중앙정계까지 영향을 행사한 이유,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뒤에 동부 민심을 바로잡아야 하는 과정에서, 그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미쳤느냐?"고 서신으로 호통을 친 점 등의 공로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판결을 내린 뒤, 여러 현실 때문에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면서 화를 낸 헤로데스 아티쿠스에게 싹싹 빌면서, 1년 추방형이 끝나면 황궁으로 부르겠다며 화를 풀어달라고 간청까지 했다.[4] 로마 귀족 중 이런 방법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처럼 선호한 인물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주 엄격했던 로마 귀족 아버지조차 이런 식으로 자녀, 특히 가문 후계자를 대한 것을 알면 용서하지 않았다. 그 가정교사는 최소 해고를 각오해야 했다. 실제 비슷한 방법으로 걸음걸이, 말더듬 증세 치료를 이유로 혹독하게 교육받은 클라우디우스 1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누나의 외손자이자 본인의 양손자가 서커스 동물처럼 대우받는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편지로 화를 내고, 가정교사들을 불경죄로 모조리 해고한 다음 추방하면서 엄포까지 놓았다. 즉, 헤로데스 아티투스의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5] 물론, 뒤로는 스승에게 편지로 직접 미안하게 됐다고 용서를 구하면서, 1년 추방형이 끝나면 황궁에 초대해 융숭히 대접하겠다고 립서비스를 했다. 그러자 그는 더 화를 내면서, 마르쿠스 면전에 대고 "그 여자와 조그마한 여자아이 때문에 신세가 망쳤다"고 황제에게 따지고 호통을 쳤다.[6]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아티쿠스와 그 제자들이 만든 소문을 믿지 않았고, 이런 소문이 퍼지면 가만히 두지 않고 엄하게 처벌할 정도로 그 기준이 분명한 황제였다. 그래서 아티쿠스 제자들은 콤모두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까지 황제 면전에 대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소 파우스티나에 대한 악의적 소문을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사실 제위의 정통성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찾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입장에서, 이러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세베루스 자신의 정치적 권위 유지에 백해무익할 뿐이고, 정치력 또한 출중한 세베루스가 이러한 점을 모를 리도 없었다.[7] 카라칼라를 가르친 아티쿠스 제자들 역시 가혹할 정도로 혹독하고 손찌검을 서슴지 않은 이들이 가정교사로 초빙된 까닭에, 그 악영향이 상당했다. 어릴적 양처럼 순했던 카라칼라는 사춘기 이후 반항적이고 거칠고 폭력을 휘두르는 성격이 된 것 중 8할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냉혹한 통치술 수업 외에도 가정교사들의 잔혹한 폭력행사였다고 한다.[8] 회의론자로 신아카데미파였다. 그는 당시 소피스트들과 달리, 그리스인이 아니라 특이하게 갈리아 혈통의 로마인이었다. 하지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출신이고, 생애 대부분을 오늘날의 프랑스 남부 지방, 이탈리아 북부 지방, 로마에서만 살았음에도 그리스어가 매우 능통했다. 따라서 여러 사람과 잘 어울렸는데, 그럼에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궤변론자 플레몬이 거만하고 냉소적인 점을 조목조목 비판할 정도로 플레몬과 사이가 나빴다. 130년대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어떤 단어 해석을 놓고 대화를 하다가 고집 센 황제가 박박 우기자 "제가 졌습니다."며 논쟁이 커지는 것을 멈춘 것을 이유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시로 키오스 섬으로 추방됐다. 그러다가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즉위 후 로마로 돌아온 뒤 150년경 사망했다.[9] 로마시민으로 쓴 이름은,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필로스트라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