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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마크인 경기장과 시가지
시내 풍경
나일 강과 반하
아랍어: بنها
콥트어: ⲡⲁⲛⲁϩⲟ
영어: Banha
1. 개요
이집트 상형문자로 쓴 페른하
이집트 북부 칼루비야 주의 주도. 카이로에서 북쪽으로 35km, 탄타에서 동남쪽으로 30km, 자가지그에서 서쪽으로 25km 떨어진 평야에 위치한다. 바나, 벤하 등으로도 표기된다. 시가지는 나일 강 다미에타 지류의 위치하며, 인구는 약 20만명이다. (관할 인구는 250만) 카이로에서 나일 델타 각지로 뻗어나가는 철도의 분기점으로, 교통의 요지이다. 고대 하이집트의 주도들 중 하나였던 아트리비스 (아트리브 / أتريب )였고, 지금도 시내 북부 (반하 엘 게디드)에 유적이 일부 남아있다. 현대 도시는 1850년 경에 세워졌고, 이집트 전자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전통적으로는 향수의 원료인 장미수 생산이 활발하였고, 인근의 목화와 밀이 집산된다. 유명 출신 인물로 배우 아흐메드 헬미와 축구 선수 아흐메드 파티 등이 있다.
2. 역사
람세스 2세의 오벨리스크와 그 기단부. 전자는 독일 베를린 박물관 소장 |
반하 지명의 유래는 고대 이집트 시기의 명칭인 페른하로, '단풍나무의 집'이란 뜻이다. 다만 고대부터 그 북쪽 언덕에 위치한 후트 헤리브가 중심지였고, 이는 다시 그리스식 발음인 아트리비스 (Ἄθρριβις)로 알려졌다. 다만 본문에서는 가독성을 위해 현재의 발음인 아트리브로 표기한다. 기원전 2600년 무렵 3왕조 시절에 세워진 아트리브는 하이집트 제10 노메의 주도였고, 검은 소 숭배의 중심지였다. 중왕국과 신왕국 시절에는 하이집트의 주요 거점으로 중시되었다. 아트리브 출신의 아멘호테프 이븐 하푸는 18왕조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대신이 되어 권세를 누렸고, 후자로부터 고향의 최고제사장으로 임명되어 호루스 신전을 중건하기도 하였다. 한편 19왕조의 건설왕 람세스 2세는 아트리브에 2개의 오벨리스크를 남겼는데, 이들은 7세기 푸스타트 건축 자재로 활용되었다가 현재는 각각 베를린 박물관과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또한 람세스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르납타가 서쪽의 리비아인과 북쪽의 바다 민족을 격퇴했다는 석판도 출토되었다. 다만 그의 시대부터 이집트의 국력은 내우외환을 겪으며 점차 쇠퇴하였다. 20왕조의 람세스 3세는 점차 힘이 강해지는 신관들을 견제하고 이를 신전에 기록하는 등 이집트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신왕국은 분열되었고 제3 중간기로 접어든다.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트리브에도 호족 세력이 자립하였는데, 기원전 8세기 누비아의 파라오 피이(반키)가 북상해오자 당시의 호족 우지스는 하이집트 일대의 귀족들을 아트리브로 소환하여 함께 항복하였다. 도시에 입성한 피이는 호루스 신전을 참배한 후 왕공들의 복속을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아트리브 협정을 맺고 회군하였다. 그후 사이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하이집트는 다시 자립하려 했으나 피예의 후계자인 셰비쿠와 타하르카는 이를 진압한 후 아트리브 등지에 건축 활동을 벌이며 지배력을 과시하였다.
2.1. 고대 아트리비스
텔 아트리브에서 발굴된 청년 동상과 헤로도토스 석상 |
다만 반세기 후 누비아 파라오들은 아시리아와의 전쟁에 패해 남쪽으로 돌아갔고, 아시리아의 아슈르바니팔은 자신과 협조한 사이스의 호족 네카우 1세의 아들 프삼티크를 아트리브의 군주에 봉하였다. (기원전 663년) 이후 프삼티크 1세는 아시리아의 쇠퇴를 틈타 자립하며 26왕조를 세운다. 비록 수도는 사이스였지만 26왕조의 발상지인 아트리브의 중요성은 여전하였다. 1949년 프삼티크 2세의 왕비 타크누트의 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아흐모세 2세는 호루스 신전에 석관과 신상 등을 안치하였다. 3세기가 흐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스스로를 '구원자'인 제드하레라 자처하였고, 아트리브의 기존 호루스 신전 남쪽에 제드하레를 위한 새로운 신전을 세웠다. 그리스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신상 역시 활발히 주조되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아트리브는 하이집트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였고, 도기 생산과 각종 무역이 활성화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다만 당시의 유적은 후대의 건축 혹은 약탈에 의해 파괴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한편 기원전 2세기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점차 내분으로 쇠약해져 지방의 통제력을 잃었고, 기원전 95년 프톨레마이오스 10세는 아트리브의 신전에게 일대의 자치권을 주었다. 이때부터 아트리브의 신전은 일종의 소도가 되어 모든 망명자들에 대한 법 위의 보호를 제공하였다. 혼란 후 이어진 로마 제국기에 아트리브는 안정을 되찾았고, 식수 확보를 위해 나일 강으로 이어지는 수도가 놓였다. 이때 세워진 수도는 현대까지도 하수도로써 일부 기능한다고 한다. 아트리브에서는 일부에 국한된 발굴에도 불구하고 도자기와 빌라 건물, 개선문, 공방, 신전, 돔형 무덤 등 많은 로마 유적이 발굴되었다. 그외에 도시 주변에는 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는 호루스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성스러운 새를 기르는 사육장 (알 키마트)이 있었다. 한 학자는 당시 아트리비스가 동지중해권 4대 도시들 중 하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2. 중세 아트리브
시내 북부 주택가 사이에 위치한 아트리비스 유적
2세기 이후 기독교가 전래되며 아트리브의 강변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세워졌는데, 매년 축일 때마다 180개 마을의 주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또한 매년 콥트 달력에 따른 성모 축일 때마다 하얀 비둘기가 수도원 제단에 며칠간 머물다 가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로마 시기를 거치며 아트리브의 중심지는 점차 동부 쪽으로 이동하였고, 동로마 유적은 대부분 그곳에 남아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아트리브에서는 자기 산업에 더하여 4세기까지는 램프 제조 역시 활발하였다. 이슬람 정복 후 아랍인들이 정착하였고, 아트리비스의 아랍식 발음인 아트리브 지명이 정착하였다. 다만 12세기까지 주민의 주류는 기독교도였고,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아름다운 성모 마리아 성당으로 유명하였다. 성당은 4개의 건물이 합쳐진 구조로, 각각의 돔은 160개의 기둥들로 지탱되었는데 각 기둥 사이의 거리는 40 큐빗 (20m)였다고 한다. 기둥들은 다시 금/은 포도넝쿨로 장식되었다.[1]
한편 알렉산드리아 주교구에 의하면 십자군 전쟁기인 1118년, 이집트 침공에 나선 보두앵 2세의 십자군이 동북쪽의 알 파라마 (펠루시움)을 함락하자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 알 아미르는 카이로로 이어지는 노선 상의 청야 전술을 지시하였다. 작전을 위해 파견된 수/육군은 예상 침공로인 다미에타 지류를 따라 마주치는 마을마다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초토화시켰는데, 아트리브에 이르러 이렇게 멋진 도시를 파괴할 수 없다며 그대로 두고 나아갔다. 비슷한 시기 보두앵 2세가 급사하고 십자군이 돌아가버리며 아트리브는 화를 면하였다.[2] 다만 14세기 이후 북쪽의 탄타가 성장하며 인구가 유출되며 아트리브는 4세기에 걸친 쇠락을 겪었다. 본래 시가지는 지속된 퇴적 작용으로 2m 깊이의 토양에 매몰되었고, 1800년에 이르면 그 동쪽 끝부분만 아트리브 마을로 유지되었다. 아트리브가 샤르키야 주의 작은 마을에 국한되던 것과 달리, 그 남쪽 강변에 위치한 마을 반하는 주목을 받게 되었다.
2.3. 근대 반하
십자형 도로가 인상적인 옛 아트리브 유적과 반하 일대의 19세기 지도
1850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손자인 국왕 압바스 1세는 반하 북쪽, 아트리브 서쪽의 강변에 궁전을 세워 자주 왕래하였다. 동시에 그는 남쪽 10km 투크에 있던 군청을 반하로 이전시켰고, 이때부터 반하는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괴팍한 성격이던 그는 불순 분자들이 아트리브 유적지로 숨어든다는 소문을 듣고는 현지 주민들을 동쪽의 미트 세바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다만 1854년 압바스 1세가 반하의 궁전에서 하인에게 암살당한 후 주민들은 관리들에게 청원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압바스 1세의 어이없는 죽음 후에도 반하의 성장은 지속되었고, 결정적으로 카이로와의 철도가 지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군청에 이어 1913년에는 본래 남쪽으로 25km 떨어진 (현재는 카이로 광역권의 북쪽 끝인) 칼리유브에 있던 주도까지 이전되었다. 시빈엘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주도는 이전되었지만 주명은 바뀌지 않은 사례이다.
2.3.1. 발굴
파일:이집트 반하 발굴 1.jpg
20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발굴들
현지 농민들이 우연히 은제품을 발견한 소문이 퍼진 후 1789년과 1852년 등 아트리브 유적지는 비교적 일찍부터 부분적으로 발굴되었다. 2차 대전 후 바르샤바 대학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 고고학팀이 11년간 발굴을 진행한 것이 최대 규모였으나, 도시 확장으로 인해 전면적인 발굴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대 들어서는 알렉산드리아-카이로 농업도로의 건설로 아트리브 유적 북부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또한 반하 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시가지가 점차 북쪽으로 팽창, 옛 아트리브 일대가 신반하 (반하 엘 게디드)로 개발되며 유적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무슬림 묘지와 반하 대학교 미대 서쪽과 상대 동남쪽에 텔 시디 유수프, 텔 시디 나스르 정도만이 띄엄띄엄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고대 이집트 시기의 신전, 로마 시대의 주거지, 초기 교회 유구 정도가 확인되었다. 다만 이집트의 도시들 중 관광객이 전무한 편이다 보니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3. 기타
- 1976년에 자가지그 대학의 분캠으로 세워진 반하 대학은 2005년에 별개의 대학으로 개편된 후 매년 6만 5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 2021년 4월 18일, 반하 인근 철도에서 기차가 탈선하여 11명이 사망하고 98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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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한 거대한 성모 상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제작된 자주색 옷감을 둘렀고 진주로 장식되었다. 그 양옆에는 미카엘과 가브리엘 천사상이 있었고, 그 앞에는 금/은제 램프 혹은 향로가 메달려 있었는데 성당의 근무자들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관리하였다.[2] 사실 칼리파가 십자군에 대한 청야전술을 지시했다 정도인데, 십자군은 1118년 말고도 1163 & 68 & 69년에 알 파라마 방면으로 침공하였다. 다만 칼리파 권력이 제대로 작용하던 거는 1118년이 유일함으로 이때로 측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