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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무다르 모스크와 옛 시가지. |
알 카프 가문의 궁전들. 앞에 있는 것이 알 무나시라 궁전, 뒤에 있는 것이 알 이샤 궁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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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멘 동부의 도시. 무칼라에서 북쪽으로 120km, 세이윤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협곡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6만명이다. 시밤-세이윤-타림으로 이어지는 하드라마우트 협곡의 주요 도시로, 일대의 학문 중심지이다. 현지인들에 의하면 타림은 무함마드의 후손 (사이드 / 샤리프)들이 가장 밀집 거주하는 곳이라 한다. 이슬람 신학과 법학을 중심으로 각종 과학이 발달하였고, 지금도 다르 무스타파에서 전세계의 학생들을 가르친다. 와하비 세력의 침공 등 우여곡절을 겪었음에도 중세 시기 서적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알 아카프 도서관이 있다. 외진 위치 덕에 예멘 내전에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고, 정부군 수중 하에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해발 900m의 고지대에 위치했기에 1년 내내 기온이 10도 ~ 35도 사이로 적절하다.
이슬람 학문과 교육의 도시임과 동시에 타림은 중세부터 상업적으로 활발한 도시였다. 특히 근대 들어 남아시아에서 부를 이룬 알 카프 가문을 위시로 한 상인 계층이 출현하여 현존하는 여러 궁전들을 세웠다. 그중 알 이샤, 알 마니수라, 알 라나드 궁전 등이 유명하다. 아랍인들은 고대부터 상업에 종사했고, 이슬람 역시 교육과 교류를 장려했으니 두 요소 모두 두드러진 타림은 아랍에서 가장 이슬람적이고 아랍적인 도시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종교와 자본가 모두를 배척하는 공산 계열의 남예멘 정부가 들어선 70-80년대에 타림은 그로부터 여러가지 제약과 통제를 받아 이슬람 대학이 폐쇄되고 궁전들이 국유화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1990년 통일 이후 원상복구되어 현재는 예멘에서 가장 안정된 도시들 중 하나이다.
2. 역사
잠발 묘지의 사이드 영묘
타림 동쪽에는 6-7세기 사산 제국의 지배기에 후슨 알 우르 성채가 세워졌다. 타림의 주민들은 631년 하드라마우트 사절이 메디나에서 무함마드를 접견하고 돌아온 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에 아부 바크르 앗 시디크는 하나님께 타림의 학자와 물을 늘려달라고 기도하였고, 이로써 타림은 앗 시디키 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함마드 사후 배교자들이 반기를 들며 벌어진 릿다 전쟁 당시 주민들은 칼리파 아부 바크르의 편에 섰고, 인근 앗 누지르 성채에서 전투가 벌어진 후 부상당한 다수의 사하바들이 치료를 위해 타림으로 옮겨졌다. 그중 여러명이 사망하여 잠발 묘지에 묻혔다.
한편 897년 메디나 출신의 이맘 알 하디가 예멘 북부 사다에서 자이디 이맘국을 세웠는데, 반세기 후인 951년에는 이라크 출신의 이맘 아흐마드 빈 이사 알 무하지르가 다수의 추종자들과 예멘 남부에 당도하여 순니 샤피이파를 전파하였다. 그는 예멘 각지에 일종의 대학인 라바트를 세웠는데, 먼저 자비드에 세웠고 두번째로 세워진 곳이 바로 타림이었다. 이후 전란을 피해 사하바들이 정착하며 타림은 예멘의 샤피이파 중심지로 성장하였다.[1]1488년 예멘 고원에서 동진한 카티리 부족이 하드마우트로 진출하여 타림을 수도로 삼았다. 다만 13년만인 1501년, 카티리 술탄국은 서쪽의 세이윤으로 천도하였다. 한편 카티리 조는 알바이다 일대의 야파이 부족을 용병으로 고용했는데, 17세기 무렵 그들은 시밤 서쪽의 알 카튼에서 자립해버린다.
2.1. 근현대
1920년대의 타림.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성벽이 보인다
안정이 유지되던 타림은 1809년 1차 사우디 국가의 와하비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샤피이파 마저 이단이라 여긴 이크완 전사들에 의해 라바트에 소장되어 있던 저서들은 훼손되거나 우물에 던져졌다. 비록 3년 후 메흐메드 알리 파샤가 개입하며 해방되었지만 일대는 황폐해졌고, 많은 하드라미들은 인도의 하이데라바드로 이주하였다. 그중 현지 예멘계 용병대의 제마다르 직위에 올랐던 압둘라, 아와드 알 쿠아이티 형제가 1858년 귀국하여 쿠아이티 술탄국을 세웠다. 1881년까지 그들은 하드라마우트 대부분을 석권하였고, 카티리 술탄국은 세이윤과 타림 일대로 축소되었다. 한편 20세기 들어 타림 출신으로 싱가포르에 이주했다가 부를 쌓아 돌아온 알 카프 가문의 사이드 아부 바크르 빈 셰이크를 중심으로 근대화 요구가 일었다.
알 카프 가문은 타림과 쉬흐르를 잇는 도로를 개설하여 하드라마우트 내륙에 선진 문물을 들여오고자 하였다. 하지만 내륙과 해안 간 교통을 독점하던 낙타 대상들이 반발하여 근대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사이드 아부 바크르는 영국의 첫 정치장교 해럴드 잉그람스와 함께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먼저 일대의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37년 2월, 한세기 가량 대립하던 쿠아이티 & 카티리 술탄국이 휴전을 체결하였다. (잉그람스의 평화) 이로써 안정이 찾아오자 근대적인 행정 및 교육 체제가 도입되는 등 일정 수준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1967년 영국은 아덴에서 철수하였고, 그 숙적이던 공산 계열 국가 해방 전선이 남예멘을 세웠다. 그에 소속되어 통일과 예멘 내전을 겪으면서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 타림은 비록 외부 원조에 의지하는 취약한 경제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예멘 정부군 수중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3. 갤러리
시가지 전경
압델라흐만 궁전
알 무다르 모스크
대내외 교역으로 타림의 건축 양식은 다양한 편이다. 15세기 현지 무슬림 지도자 오마르 알 무다르를 기리는 알 무다르 모스크의 미나렛의 높이는 무려 53m로, 예멘에서 가장 높은 미나렛이다. 해당 미나렛은 20세기 초엽 현지 시인 아부 바크르 빈 시하브와 알라위 알 마쉬후르에 의해 디자인되어 1914년에 완공되었다. 시내에는 365개의 모스크가 있고, 그중 시르지스 모스크는 7세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17-19세기에 이러한 모스크들은 타림의 이슬람 학문 발전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사원의 부속 시설인 알 카프 도서관에는 하드라마우트 지역에서 수집된 신학, 선지자 행록, 이슬람법, 수피즘, 의학, 천문학, 생물학, 농학, 수학, 철학, 수사학, 역사학과 아부 무함마드 알 하산 알 하드라미의 알 이킬리 전집 등 5천권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학자 압델카데르 삽반에 의하면 그중 3-4백여 권이 이슬람권에서 희귀한 자료이고, 일부 서적들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서적들은 대부분 하드라마우트에 거주한 예멘인 작가들이 집필한 것이나, 일부는 마그렙이나 호라산 같은 이슬람권 동쪽과 서쪽 끝에서 온 것들도 있다. 연간 수천명이 알 카프 도서관을 방문한다.
타림의 전통 교육 기관인 루바트
라바트 타림은 이슬람학과 아랍 과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으로, 1886년 일단의 현지 유력자들[2]이 국내외 학생들을 위한 종교 학교 및 기숙사를 세우기로 결의하여 1887년 10월 2일에 완공되었다. 샤트리, 카팁 가문 등의 헌신으로 명성을 쌓던 루바트는 1979년 남예멘 정부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통일 후인 1991년 다르 알 무스타파라는 이름으로 재개교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7년 통계에 따르면 루바트 타림의 졸업생 수는 1만 3천에 이르렀고, 당시 기준으로 1천 5백의 예멘인 학생과 3백의 외국인 학생이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
졸업생들은 이슬람 선교와 쿠란 번역 등 종교 기관에서 근무하며, 그중 가장 유명한 학자는 압둘 라흐만 알 마쉬후르이다. 한편 1967년 세미나로 시작해 1997년 정식 대학으로 설립된 다르 알 무스타파 역시 이슬람학 교육 기관으로 유명해졌고, 전세계 각지의 학생들과 방문객이 찾아온 덕에 시가지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 자매 기관인 다르 앗 자흐라는 무슬림 여성들을 위한 샤리아와 이슬람법 교육을 전담한다.
알 무나시라 궁전
사힐 궁전
종교 시설 외에도 타림에는 1870년대 ~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지어진 수십개의 궁전들이 있다. 19세기 후반 교역과 해외 투자로 부를 축적한 알 카프 등의 하드라미 상인 가문들이 세운 것으로, 상당수의 문중이 종교 학자였지만 일부는 서구화된 지식인이었다. 따라서 영국령 인도나 동남아 건축 양식과 함께 로코코와 신고전주의 등의 양식이 더해진 해당 궁전들은 근대 하드라미 엘리트들의 복잡한 정체성과 사회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외국 양식과 더불어 진흙과 석회만을 이용해 짓는 천년이 넘은 하드라미 전통 건축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타림 시가지의 풍경이다.
파일:타림 이사 궁전 예멘.png
카프 가문의 주요 궁전으로는 카스르 알 이샤 (قَصْر ٱلْعِشَّة)가 있다. 이샤는 아랍어로 두지 혹은 설립이란 뜻이다. 19세기 후반 셰이크 오마르 알 카프가 남아시아 교역과 싱가포르의 그랜드 호텔 델 유럽에 대한 투자로 번 자산으로 40여년간 건설한 7개의 건물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처음으로 지어진 다르 다윌은 1890년대에 세워졌고, 가족이 커지며 확장한 끝에 1930년대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알 이샤 궁전은 타림의 대표적인 석회벽 장식을 지니고 있다. 특히 남쪽 외벽은 무굴 황실, 근동과 남아시아의 식민지 시기 양식으로 지어졌다.
내부의 석고 장식 역시 방마다 다르고 로코코, 신고전주의, 아르누보 등의 양식이 독자적으로 혹은 혼합되어 나타난다. 기둥주, 천장, 목재 서랍장, 벽감, 석유 등잔 받침 역시 화려한 색깔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1970년부터 1991년까지 알 이샤 궁전은 공산주의에 근거한 남예멘 정부에 의해 국유화되어 아파트로 개조되었다. 다만 통일 후 압둘라 살레 정권은 알 카프 가문의 후손들에게 궁전을 되돌려주었고, 1999년 타림 사적보존협회는 그중 절반을 빌려 고택 박물관으로 전환시켰다. 따라서 알 이샤 궁전은 하드라마우트 내륙에서 유일하게 박물관으로써 민간에게 개방된 귀족 저택이다.
3.1. 알 카프 궁전들
함투트 궁전 (1880년경)
알 이샤 궁전 (1890년대)
메흐자르 궁전 (1908년)
아흐마드 빈 압둘라흐만 궁전 (1930년)
알 무나시라 (마니수라) 궁전 (1932년)
알 쿱바 궁전 (1935년)
압둘라흐만 빈 셰이크 알 카프 궁전 (1937년)
살라마 궁전 (1944년)
리야드 궁전 (1952년)
라나드 궁전 (1954년)
앗살람 궁전 (1956년)
앗 타와히 궁전 (1965년)
사힐 궁전
미다르 궁
피즈르 궁전
알 이샤, 살라마, 메흐자르, 압둘라흐만 빈 셰이크, 알 라나드, 알 쿱바, 앗 타와히, 앗 살람 궁전 등은 카프 가문에 의해 세워졌다.
- [기타 사진들]
무나시라 궁전
알 라나드 궁전
아흐메드 빈 압둘라흐만 알 카프 궁전
이샤 궁
함투트 궁전
살라마 궁전
마니수라 궁전
잠발 묘원
파일:예멘 타림 모스크.jpg
수르수르 모스크
무다리 모스크
이드 때에 다같이 식사하는 주민들
쿱바 궁전의 야경
[1] 비록 이전부터 도시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 무렵이기에 이슬람 사서에서 타림은 히즈리 4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2] 모하메드 빈 살렘 아스리, 아흐메드 빈 오마르 앗 샤트리, 압두라데르 빈 아흐메드 알 핫다드, 아흐메드 빈 압둘라흐만 알 주나이드, 모하메드 빈 오마르 아르판 등이 결의, 하드라마우트의 무프티 압둘라흐만 빈 모하메드 알 메쉬후르가 감독함. 초기 선생들로는 알위 빈 압둘라흐만, 아비 바크르 알 메쉬후르, 후세인 빈 모하메드 알 카프, 아흐메드 빈 압둘라 알 베크리 알 카테브, 하산 빈 알위 빈 쉬하브, 아부 바크르 빈 아흐메드 빈 압둘라 알 베크리 알 카팁, 모하메드 빈 아흐메드 알 카팁 등이 있었다. 그들은 메카에서 4년간 공부하고 온 압둘라 빈 오마르 앗 샤트리가 당도하자 그에게서도 배우며 동시에 가르쳤다. 압둘라 앗 샤트리는 1942년 사망 시까지 자원하여 루바트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아들들 (모하메드, 아부 바크르, 하산, 살렘) 역시 그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