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관광지인 소하르 성채. 성탑 중 하나는 박물관으로 활용된다.
1. 개요
아랍어 صُحَار영어 Sohar
오만 북부의 항구도시. 무스카트에서 서북쪽으로 150km 떨어져 있고 인구는 24만명이다. 알 바티나 북부 주의 주도이고, 오만에서 무스카트 광역권과 살랄라 다음으로 큰 도시이다. 중세 시기에는 오만의 최대 도시이자 주요 항구였으며, 오만이라는 지명 역시 소하르의 고대 지명인 '우마나'에서 유래된 것이다. 천일야화의 신밧드 설화 역시 소하르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시가지는 해안과 그곳에서 1km 가량 안쪽의 국도를 따라 형성된 내륙으로 2원화 되어 있고, 남북으로 30km 가량 길게 뻗어 있다. 북쪽 리와에는 국제 항구, 서북쪽 외곽에는 소하르 국제공항이 있다. 남쪽에는 오만 최초의 종합 사립대학인 소하르 대학교가 있으며, 국제 항구 위쪽 와디 나브르를 따라 신도시가 조성되고 있다. 또한 소하르는 오만에서 가장 초목이 무성한 지대이다.
2. 역사
포르투갈 지배기의 그림
16세기 무스카트의 성장 전까지 오만의 중심은 소하르였다. 중세 와지흐 왕조의 수도였고, 인도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다만 971년 부와이 왕조의 습격을 받고 이란 해안의 키쉬 상인들의 공격을 당하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호르무즈 왕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1507년 소코트라 섬에서 발진한 포르투갈 함대가 다가왔다. 일전에 쿠라야트, 무스카트가 습격당한 소식을 접한 소하르 총독은 곧바로 복속하였고, 이후 1643년까지 포르투갈 제국에 소속되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13세기경 세워진 성채를 증축하였고, 현재까지도 소하르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2.1. 오만 제국령
1742년 아프샤르 왕조에 맞선 소하르 성채
17세기 오만을 통합한 이맘 나시르 빈 무르쉬드 알 야루비가 포르투갈을 축출한 후 소하르는 오만 제국 (야루바 왕조)의 북부 중심지가 되었다. 1720년대 야루바 왕조는 내전에 돌입하였고, 내륙과 해안으로 분열되었다. 그중 수세에 몰린 해안의 사이프는 이란의 나디르 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1742년 무함마드 타키 칸의 이란 군이 소하르와 무스카트를 공격하였다. 내륙의 술탄 빈 무르쉬드는 무스카트를 내어주고 소하르에서 저항하였으나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이후 이란 군은 소하르를 공격하였다. 총독 아흐마드 빈 사이드 알 부사이디는 용감히 저항하였으나, 그를 시기한 이맘 발아랍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9개월 간의 공성전 끝에 항복하였다. 1744년 아흐마드는 이맘으로 선출되었고, 본거지 바르카에서 세력을 길렀다.
1747년 아흐마드는 나디르 샤의 죽음을 틈타 이란 수비대를 학살하고 1749년 발아랍을 전사시키며 오만을 통일하였다. (부사이드 왕조) 소하르는 왕조의 발상지이자 대이란 저항지였으나 이미 무스카트의 중요성이 너무 컸기에 이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오만 제국의 번영 하에 안정을 누리던 소하르에서 1849년 6월 총독이 영국과의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조약을 체결하자 종교 계층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 결과 총독이 살해되고 총독의 부친 하마드가 총독으로 추대되었는데, 당시 잔지바르에 머물던 술탄 사이드는 하마드를 체포하고 새로운 총독을 선임하였다. 이후 소하르는 작은 도시로 유지되었다. 다만 술탄 카부스 빈 사이드의 국토 개발에 따라 2002년 국제 무역항이 완성된 후 오만의 주요 산업 도시로 변모, 인구가 빠르게 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