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20:43:23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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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알렉산드로스 3세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소크라테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리스토텔레스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플라톤 페리클레스
11위~100위
11위12위13위14위15위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멜리나 메르쿠리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니코스 카잔차키스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호메로스 마노스 하지타키스 레오니다스 1세 히포크라테스
21위22위23위24위25위
피타고라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마리아 칼라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26위27위28위29위30위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엘 그레코 콘스탄티노스 11세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리가스 페레오스
31위32위33위34위35위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요안니스 메탁사스 니코스 갈리스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데모크리토스
36위37위38위39위40위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야니스 리트오스
41위42위43위44위45위
테미스토클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투키디데스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파블로스 멜라스
46위47위48위49위50위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무명용사
51위52위53위54위55위
페이디아스 아리스토파네스 코스티스 팔라마스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소포클레스 니코스 벨로야니스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에피쿠로스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오톤
66위67위68위69위70위
반젤리스 솔론 클레이스테네스 아이스퀼로스 바실리오스 2세
71위72위73위74위75위
콘스탄티누스 1세 이온 드라구미스 코스타스 시미티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76위77위78위79위80위
테오 앙겔로풀로스 니코스 실루리스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에우리피데스
81위82위83위84위85위
카롤로스 코운 유스티니아누스 1세 라키스 라조폴로스 헤로도토스 다나시스 벤고스
86위87위88위89위90위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카티나 팍시누 알리키 부지욱라키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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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 2세 디미트리스 혼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탈레스 프락시텔레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Aristotle Onassis
파일:375px-Aristotle_Onassis_1967.jpg
본명 아리스토텔리스 소크라티스 오나시스
Αριστοτέλης Σωκράτης Ωνάσης
출생 1906년 1월 20일
오스만 제국 이즈미르 카라타스
사망 1975년 3월 15일 (향년 69세)
프랑스 일드프랑스 오드센 뇌이쉬르센
국적
[[그리스|]][[틀:국기|]][[틀:국기|]]
묘소 그리스 스코피오스 섬
학력 Evangelical School of Smyrna
배우자
/파트너
티나 니아코스(1946년 결혼~1960년 이혼)
마리아 칼라스(1959년~1968년)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68년 결혼)
자녀 아들 알렉산더 오나시스(1948년 출생~1973년 사망)
딸 크리스티나 오나시스(1950년 출생~1988년 사망)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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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사업가. 재클린 케네디의 남편,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와의 염문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2. 생애

1906년 오스만 제국의 스미르나(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미르)에서 중산계급의 그리스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스미르나는 그리스군과 폰투스 민병대가 장악하면서 인구의 반수를 차지한 튀르크인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했지만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리스군은 물러나 이곳은 튀르키예(오스만 제국)가 차지하게 되었고 복수심에 불타던 튀르키예군과 민병대에 의해 그리스계 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직후 원인 미상의 '스미르나 대화재'가 발생하여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완전히 알거지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집안도 이때 전 재산을 잃었고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인구 교환으로 그리스로 돌아갔다.

그는 1923년 그리스를 떠나 아르헨티나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무역업, 해운업을 시작해 큰 재산을 모았다. 그리스의 해운왕으로 불리던 스타브로스 리바노스의 딸이던 아시나 리바노스와 결혼[1]한 그는 장인의 도움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해 1957년엔 그리스의 항공회사인 올림픽 항공을 설립하는 등 해운업 이외에도 사업을 확장했다.[2]

1957년에 베네치아에서 열린 파티에서 오페라 가수이던 마리아 칼라스와 사귀게 된 후 첫 아내 아시나와 1960년에 이혼했다. 마리아 칼라스도 오나시스와 사귀게 된 후 남편인 메네기니와 이혼하려고 했다. 칼라스는 무명 시절부터 자신을 후원해 준 28세 연상의 사업가 메네기니와 결혼했고 메네기니 덕분에 가난한 삶을 청산할 수 있었지만 결혼 후 칼라스는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유명해졌고 세계적인 갑부 오나시스와 사귀게 되자 메네기니의 재산 따위는 하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메네기니가 그녀와 이혼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라스는 오랜 소송 및 국적을 바꾸면서 메네기니와 이혼할 수 있었다. 막상 오나시스는 마리아 칼라스와 동거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칼라스와 사귀던 와중에 그는 미국 대통령이었던 존 F. 케네디의 처제인 리 라지윌(Lee Radziwill)과 사귀게 되었다. 리 라지윌은 오나시스와 세번째 결혼을 하길 원했고 오나시스를 알기 직전에 재혼한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말했다. 라지윌은 친언니인 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에게 결혼하고 싶은 남자라고 말하며 오나시스를 처음 소개했다. 재클린을 소개받은 오나시스는 칼라스와 라지윌을 함께 사귀면서 동시에 재클린에게도 접근했다. 물론 그 외에도 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1968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 발표는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고 특히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케네디가 암살당했을 때 재클린이 'Oh, No.'를 외쳤고 재클린이 오나시스와 재혼하자 이번엔 미국인들이 'Oh, No.'를 외쳤다는 일화를 남겼다.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 발표 직전까지 오나시스와 함께 파티에 다니던 라지윌은 친언니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면서 분노했다.

하지만 결혼 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부부관계는 결코 좋지 못했다. 오나시스는 재클린의 사치 때문에 갈등이 심했고 재클린과의 불화 이후 보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한다고 여겼던 마리아 칼라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재클린은 오나시스에게 자신과의 결혼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겼고 전 남편인 케네디처럼 남편의 바람기로 고생했다.[3]

오나시스는 재클린과 이혼하려고 했으나 이전에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했다. 10억 달러가 넘는 재산을 남겼으나 이혼하려고 했던 재클린에게는 한 푼도 주지 말고 하나뿐인 딸 크리스티나(1950 ~ 1988)[4]에게 전 재산을 상속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오나시스 사망 후 재클린은 유산 분배에 대한 소송을 걸었고 결국 1억 2,500만 달러를 받아냈다. 그러나 오나시스와 전처 다음으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마리아 칼라스는 오나시스로부터 한푼도 상속받지 못했다. 그나마 오나시스의 여동생이 그녀를 배려하여 약간의 기념품을 선물로 준 것이 다였다.

3. 여담

  • 한국과도 약간의 인연이 있는데 아직 오나시스가 선박왕이 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접촉하여 미국이 2차 대전 중에 생산한 막대한 양의 무역선이 지금 포토맥강에 버려져서 고철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정부 명의의 위임장을 써준다면 그 배들을 공짜로 원조로 받아낼 수 있으며, 자신이 그 배를 가지고 10년간 사업을 할테니 그 대가로 매년 100만달러의 커미션을 한국 정부에 비공식적으로 지불하는 한편 10년 후에 배도 모두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고 제안하였다. 홍진기 해무청장의 보고에 이승만은 이런 뒤가 구린 장사치놈을 통해서 돈을 버는 것은 국가의 수치라고 단칼에 거절해버렸다. 신성모 꼴을 본다면 자기한테 갑질하는 것이 기분상해 거절한 것이다. 또다른 인연으로는 그의 처남이었던 조지 리바노스 회장[5]은 현대중공업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울산 조선소를 세울 때 정주영 창업자에게 유조선 2척을 발주해 줌으로써 세계 최대 조선소로 발돋움하는 기틀을 다질 수 있도록 도와줬다. 양아들인 존 케네디 주니어와 정몽준이 그렇게 친분을 멪어진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 그레이스 켈리모나코 공국의 공비로 앉힌 게 오나시스라는 추정이 있다. 당시 오나시스는 모나코 공실의 실세였는데 모나코 경제의 젖줄이나 다름없었던 관광산업을 살리기 위해 레니에 2세에게 할리우드 스타와의 결혼을 제의했고 직접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를 연결해 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모나코 공국을 다룬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에서도 오나시스가 등장한다. 영국 배우 로버트 린지가 분했다.


[1] 참고로 이 때 오나시스는 40세, 아시나는 17세였지만 이것이 성공한 남자의 트로피 와이프는 아닌데 당시 리바노스 가문이 오나시스보다 더 강력했으며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와의 결합은 당시 그리스 쪽에서는 흔한 형태였다.[2] 해당 항공사는 한때 그리스의 플래그 캐리어였지만 오나시스 사후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2009년 문을 닫았다.[3] 다만 그것과는 달리 오나시스는 케네디 대통령의 자식인 캐롤라인 케네디존 F. 케네디 주니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4] 본래 아들 알렉산더(1948 ~ 1973)가 있었지만 비행기 사고로 일찍 죽어 크리스티나만 살아남았다.[5] 첫부인인 아시나 리바노스의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