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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8년 2월 13일 | ||
그리스 왕국 칼렌치 | |||
사망 | 1968년 11월 1일 (향년 80세) | ||
그리스 왕국 아테네 | |||
재임기간 | 제132대 총리 | ||
1944년 4월 26일 ~ 1945년 1월 3일 | |||
제158대 총리 | |||
1963년 11월 8일 ~ 1963년 12월 31일 | |||
제160대 총리 | |||
1964년 2월 19일 ~ 1965년 7월 1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5eaf><colcolor=#fff> 배우자 | 소피아 미네이코 (이혼) 키벨리 안드리아누 | |
자녀 | 2명 | ||
학력 | 아테네 국립 카포디스트리아스 대학교 (법학 / 학사) | ||
종교 | 정교회 (그리스 교회) | ||
최종 당적 | 중도연합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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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제132, 158, 160대 총리.2. 생애
망명정부를 포함, 두 차례 그리스의 총리를 지내면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과 입헌군주제 정착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군부 쿠데타로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비운의 정치인.대학 졸업 후 입헌군주제와 급진적 서방식 개혁을 주장하는 중도진보 성향의 자유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 그리스 제2공화국 시기에 내무부, 교육부 장관 등을 지내다가 1935년 자유당을 탈당하고 그리스 민주사회당[1]을 창당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친 히틀러 괴뢰정부가 수립되자 카이로로 망명, 1944년 망명정부 총리를 역임했다.
이 후 그리스가 해방되자 귀국해 본인의 이름을 딴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당[2]과 자유당,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규합해 중도부터 좌파까지 결집한 포괄정당인 중도연합을 결성했고, 1963년 총선에서 승리해 개인 통산 두 번째, 총선을 통해서는 개인통산 첫 번째 총리에 취임했으나, 우파를 대표하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와 국정운영 방향을 놓고 불화를 일으켰고, 1967년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뒤 가택연금 중이던 1968년 11월 1일, 자신의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계기로 미국 UCLA 경제학 교수로 일하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귀국, 파판드레우 중도연합당을 계승하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 반군부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뒤 민주화가 되면서 1981년~1989년, 1993년~1996년에 걸쳐 두 차례의 총리를 지내다가 폐렴으로 급사했다. 아들 안드레아스는 그리스의 민주화 정착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치세때는 그리스의 경제가 오일쇼크때보다야 나아지기는 했지만 1950년대~70년대 초반의 고성장 기세와는 거리가 멀어서 청년실업률이 10%에 달한데다가[3] 또한 조강지처와 이혼하는 스캔들이나 크레타 은행 비리 덕택에 평가는 썩 높지는 않은 편이다. 그나마 민주화를 주도했다는 점이나 상대정당인 신민주당도 썩 수완이 좋은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을때까지 총리직에 재직할 수는 있었다.
[1] Democratic Socialist Party of Greece[2] 그리스 민주사회당의 후신[3] 뭐 비슷한 시기의 이탈리아나 스페인이라고 해서 상황이 썩 나은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가 경제적으로 3~4%대의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재편의 후유증이 지속된 탓에 청년실업률이 두자리수를 기록하는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