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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폴란드 출신 후손들을 의미한다. 전간기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상당수의 폴란드인들이 이주하였는데, 아르헨티나 통계에 따르면 1921-1930년도에 119,410명, 1931-1940년까지 31,500명의 폴란드 국민이 아르헨티나로 이주 귀화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폴란드계 후손 인구가 약 50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 이민사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최초의 폴란드인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사이에 벌어진 3국 동맹 전쟁에서 브라질 측의 용병으로 참전한 리투아니아인 장교의 폴란드인 부인이었다. 3국 동맹 전쟁의 종전 이후 이들 부부는 아르헨티나에 체류하였다.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폴란드는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삼분할되어 지배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폴란드인 상당수는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의 가톨릭 탄압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아르헨티나가 가톨릭 국가였던 점 덕분에 아르헨티나 역시 매력적인 이민 목적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폴란드인들 중 프랑스어나 영어가 가능한 사람은 꽤 있었어도,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원하는 폴란드인은 비교적 적었다. 19세기 말 폴란드인들이 남미에서 선호하는 이민 목적지는 브라질이었는데, 브라질 정부에서 이민 보조금을 지불해주는데다가 브라질 남부 빈 땅에 정착촌을 건설해서 살면 되니까 포르투갈어를 몰라도 큰 문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1]
아르헨티나에 폴란드인 정착촌이 건설된 것은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 출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이 이민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향했으나, 미국 출입국 측에서 이들의 서류 미비를 이유로 이민을 불허하자, 대신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지방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나뉘어 정착하였다.
아르헨티나 유대인 사회는 브라질 유대인 사회와 폴란드계 브라질인 관계와 마찬가지로 폴란드계 아르헨티나인 커뮤니티와 밀접한 관계였다. 유대인들의 아르헨티나 이민을 자극한 주요한 동기 중 하나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 빈발하던 포그롬(반유대주의 폭동)이었다. 러시아 제국 영내 아슈케나짐들이 포그롬을 피해 해외로 이주를 희망하는 가운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조직폭력배들이 이런 유대인들 중 미국으로 이민이 힘든 취약 계층 가정의 어린 소녀들을 골라서 사기 인신매매를 했던 흑역사도 있다.##스페인어 1906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매년 13,000여 명 상당의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인신매매 피해자들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등이 해체되고 폴란드가 독립한 이후에도 바르샤바 유대인 갱단들의 인신매매는 한동안 기승을 부렸었다. 이들 인신매매단은 "바르샤바 상호 원조 협회(la Sociedad de Socorros Mutuos Varsovi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1927년 폴란드 측에서 강력 항의하자 이후 조직 명칭을 즈비 미그달(Zwi Migdal)로 변경하였다.
2.1. 폴란드 제2공화국 시대
1차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을 쟁취하면서 폴란드인들의 해외 이주도 감소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소수민족 차별도 있어서, 당시 폴란드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폴란드인보다는 폴란드 내 소수민족이 더 많았다고 한다.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사람들 중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은 약 25%로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 25~30%는 아슈케나지 유대인, 45~50%는 정교회나 동방 가톨릭[2]을 믿던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및 루신인이었다. 2차 대전 이전 폴란드는 영토가 지금보다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이 때문에 당시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 동부에는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같은 소수민족 인구가 적지 않은 편이었다.
폴란드인 이민의 경우 아르헨티나 내 스페인계나 이탈리아계와 같은 로마 가톨릭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인 충돌이 적었지만 우크라이나계의 경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과 다른 가톨릭 사이에 알력이 심했기 때문에 1940년대에 들어서야 교회가 제대로 건설될 수 있었다고 한다. 벨라루스계의 경우 미국의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계 미국인 혹은 미국 아슈케나짐 사회로 그대로 흡수된 것과 다르게, 아르헨티나에는 상술한 것처럼 정교도 러시아인 이민자가 적었고, 폴란드에서 정교회 차별을 피해 건너온 벨라루스인 이민자가 더 많았기 때문에, 벨라루스계 고유 정체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
3. 유명 인사
4. 관련 항목
[1] 1924년 브라질 정부의 보고에 따르면 파라나주를 중심으로 퍼져 있던 폴란드인 정착촌 주민들 중 포르투갈어를 제대로 구사 가능한 사람들은 소수였다고 한다.[2]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되 정교회 전례를 유지하는 종파로 가톨릭과 정교회 양쪽으로부터 차별을 받았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