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36:32

아르헨티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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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독립 이전의 역사3. 독립과 통일4. 전성기(~1929년)
4.1. 사막 정벌
5. 대공황 및 2차 세계대전 시기 6. 페론 집권기: 논란의 시대7. 20세기 후반 군사독재8. 민주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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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역사를 다루는 문서.

2. 독립 이전의 역사

BC 1만년 경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르헨티나 일대에서 부족별로 나뉘어 살았다. 아르헨티나 동북부 지역은 투피-과라니 어를 쓰는 부족들이 살았고, 파타고니아라고 불리는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푸체족과 테우엘체족 등이 살았으며. 서북부 지역은 15세기에 잉카 제국에 복속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현재의 아르헨티나 국기에 인티가 그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중엽에 파타고니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스페인식민지가 되었다. 파타고니아티에라델푸에고 지역은 마푸체, 테우엘체, 야마나, 셀크남 족 등 원주민들이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기 중엽인 1776년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다.

3. 독립과 통일

19세기 초 영국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침공을 시민들의 힘으로 물리친 사건을 계기로 독립의지가 촉발되었고 이후 호세 데 산 마르틴의 5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1810년 5월 독립을 선포하고 임시정부를 수립, 1816년 7월 9일에 투쿠만 회의에서 중앙 집권적 공화국으로 성립되었음을 선언했다. 처음에는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자체가 그대로 리오데라플라타 합중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합중국의 내부 다툼이 격해져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볼리비아,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가 이탈하게 된다. 이후 하나의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앙집권주의자들과 자치권을 지키려는 지역들의 연방주의자들 사이에 마찰이 심해 독립 직후부터 투닥투닥거리게 된다.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Bernardino Rivadavia)가 중앙집권주의자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와 동시에 최초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해 아르헨티나의 무역을 독점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국유화하고 그 수입을 통합된 국가 전체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였으나, 지방의 연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중앙정부가 나타나는 것을 반대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주들 역시 자신들이 독점한 무역 특권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1827년 리바다비아는 대통령에서 쫒겨나게 된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제대로 된 지도자 없이 산발적 내전에 휩싸이게 되며, 각 주의 주지사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아르헨티나 연합국(Argentine Confederation)이라는 큰 틀의 국가는 존재하였으나 사실상 유명무실하였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상당히 큰 권력을 행사하는[1] 매우 느슨한 연방체제가 성립되었다.[2]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쿠데타와 반목으로 마구 교체되는 사이, 1829년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가 기존 중앙집권주의자 주지사를 제거하고 연방주의자의 리더로서 주지사에 오른다. 이후 그는 강력한 독재정책과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함으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 연합국의 확립과 안정을 가져오게 된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연방주의자가 중앙 집권을 합니다![3]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중앙집권주의자들에 대한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져 이들은 전부 지방으로 도망가고, 힘을 모아 로사스에게 대항하기도 했지만 철저하게 박살나버렸다. 이렇게 로사스는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안정적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며, 자신의 가문이 아예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를 독점하게 하려 했다.[4] 물론 그의 잔혹한 통치와 권력 독점 야욕은 그의 인기를 계속 떨어뜨려 말년에 그는 암살의 위험을 고려해 자신의 집무실과 관저에서 나가지 않았다.

로사스가 장기 집권하는 도중 우루과이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이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페드루 2세브라질 제국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결국 브라질과 전쟁을 하게 되고, 이에 남아있던 중앙집권주의자 잔당들이 합세하여 대 로사스 연합을 형성하게 된다. 로사스는 여기에서 대패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로부터 쫓겨나고,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5]

이에 1853년 아르헨티나의 각 주지사들이 모여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6]하고 아르헨티나를 연방국가로 만드는 데 동의하게 되어 엔트레리오스 주의 호세 우르키사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신헌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의 수입을 모든 주가 공유하도록 된 것에 반대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이를 거부하고 1852년 9월 11일 혼자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탈퇴, 부에노스아이레스국(Estado de Buenos Aires)을 선포한다. 아르헨티나 연합국은 수도를 파라나에 두었다.

그로부터 무려 7~8년 간 아웅다웅 계속해서 다투다가, 결국 여러 분쟁을 거쳐 1861년 파본 전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바르톨로메 미트레(Bartolomé Mitre)가 최종적으로 내륙의 아르헨티나 연합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후 모든 주가 참가한 의회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 세관을 국유화하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수도 지위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수입을 보장하는 방법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1862년 미트레가 통합된 아르헨티나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7]

이렇듯 1814년부터 1880년까지 66년간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묶어 '아르헨티나 내전'으로 분류한다.

4. 전성기(~1929년)

아르헨티나는 넓은 토지와 초원이 있었으며 기후적 특성상 목축업이 가장 크게 발달한 국가였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당시에는 냉동기술이 없어 소와 양을 수출하려면 살아 있는 채로 실어야 했기에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유럽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냉장 기술이 개발되어 소고기 등을 도축해도 적도를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아르헨티나 경제는 크게 부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랜 내전이 끝나게 되면서, 그동안 미루어 두어 통제하지 못하고 있던 원주민 영토를 향한 정복 및 식민에 착수한다. 180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대규모 정복사업은 아르헨티나의 영토를 2배 이상 뻥튀기 해놓았으며,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을 제외하고는 전부 농업과 목축업에 쓸만한 땅들이었기에 아르헨티나의 1차산업은 크게 부흥하였다. 이에 지주들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져 1880년 이후부터는 초기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고, 해외 자본, 특히나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이 유입되어 최초로 근대적 공장이 세워지는 등 아르헨티나는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1900년 이후부터는 그렇게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문화와 사회가 크게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남미의 프랑스'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의 여왕', '남미의 파리' 등 화려한 명칭을 갖게 되었다. 철도와 기간사업이 건설되었고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지하철[8]을 건설하였다. 급진주의당이 정권을 잡고 운영한 10여 년 동안은 사회정치적 문제에도 크게 관심이 대두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하였고[9] 사회안전망에 대한 기초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목축업과 농업은 물론 타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해 1910년 무렵부터 1970년대까지는 세계 15대 경제 대국으로 늘 빠지지 않았고,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프랑스, 이탈리아보다 높은 세계 8위권으로 벨기에와 비슷했다. 이때의 아르헨티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었으며,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구입하고 독립 초기 주변국인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에서 승전할 정도로 중남미에서는 강대국[10]이기도 했던 나라였다. '아르헨티나인처럼 부자이다(riche comme un argentin).'라는 관용구가 프랑스에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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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독립 100주년 기념행사. 1916년의 아르헨티나의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동화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이탈리아인 주인공 소년이 엄마 찾아 가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다. 즉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드림을 찾아 이민을 왔다.[11]

4.1. 사막 정벌

아르헨티나는 남미 지역 국가들 중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비율이 작은 편이다. 이것은 이웃 우루과이칠레처럼 원래 원주민 인구가 적었는데[12]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후 기존 원주민들마저 숫적으로 압도적인 백인 이주민과 혼혈되어 비슷한 외모와 문화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13] 백인 이주민이 정착하는 것도 전염병이 창궐하는 무더운 열대 기후이거나 지리적으로 고립된 산악지대였던 다른 지역과 달리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서늘한 기후대에 드넓은 평야지대여서[14] 상대적으로 훨씬 쉬웠고 따라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숫적으로 압도적인 백인 이주민(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660만 명)에 밀려서 동화되었다.

독립 이후 자유주의와 중앙주의를 막론한 모든 정파가 참여한 남진 정책은 원주민의 복속을 가속화했다. 원주민 부족의 정착민 마을 공격과 약탈, 그리고 이웃한 칠레가 마푸체 정벌에 성공하여 남아메리카 대륙 남단부에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아르헨티나의 남진 정책을 부채질했다. 1870년대에 시작하여 1884년까지 이어진 사막 정벌(Conquista del desierto) 결과 파타고니아의 광대한 영역이 아르헨티나에 편입되어 영토가 2배 넘게 늘어나 오늘날 아르헨티나의 강역이 완성되었다. 경제적으로 사막 정벌은 영국이 주도하는 산업혁명양모 수요를 충족시킬 거대한 목양지 획득으로 이어졌다. 사막 정벌 과정에서 원주민 1,300명이 사살되고 1만 3천명 가량이 포로로 잡혀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동시에 원주민 지도자들은 덜 진화한 생물의 표본으로 산 몸이든 시체로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박물관에 전시했다.[15] 이렇게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는 정서는 20세기 중반까지도 남아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정벌은 1884년 사막 정벌이 종료된 후에도 이어졌다. 국토의 남쪽 끝인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셀크남족(Selk'nam)은 영국인 목장주가 고용한 인간 사냥꾼들에게 20세기 초까지 조직적인 학살을 당했다.[16] 셀크남족, 테우엘체족, 마푸체족등 현지 원주민들이 살던 남부 파타고니아와 안데스 산악지대, 티에라델푸에고 섬 지역에 백인들을 전부 이주시키고 원주민의 토지를 모두 백인한테 몰수/분배하여 백인과 원주민의 인구 비율까지 바꿔버렸다.

그러다가 후안 페론이 집권한 이후에는 사정이 좀 나아진다. 후안 페론은 아버지가 백인이고 어머니가 원주민-백인 혼혈인 메스티소였는데, 후안 페론은 집권 이후 자국내 남미 원주민들과 혼혈인의 권리향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후안 페론이 아니었으면 원주민들이 멸족했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올 정도다.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 원주민은 전체 인구 4,500만 명 가운데서 0.5%~2.5%[17] 정도의 소수인데, 백인과 혼혈된 메스티소까지 합해도 여전히 소수인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원주민 문화에 대한 재조명과 격동의 현대사를 거치며 원주민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원주민들은 북서부와 남부 일대에서 극빈층으로 생활하고 있다.[18]

2017년에는 원주민 인권운동가가 실종된 후 익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 #2

5. 대공황 및 2차 세계대전 시기

그러나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을 시작으로 세계 경제가 큰 타격을 받으면서 목축업과 농업에 쇠고기, 곡물 수출에만 의존[19]하며 부를 쌓던 아르헨티나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때 국내 위기의 혼란을 틈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에 개입하게 되면서 정치적인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시기를 아르헨티나에서는 악명높은 10년이라고 한다. 다만 1930년대 전세계에서 멀쩡한 선진국이 몇 없다 보니, 아르헨티나는 1946년까지도 1인당 GDP가 10위에 해당하는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장기적으로 대공황 이전과 같은 위세를 회복하지는 못하였다.

아르헨티나에는 나치 독일의 전횡을 피해 도망친 유럽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일례로 볼펜을 발명한 신문기자 비로 라슬로(Bíró László) 역시 원래는 헝가리 사람이었으나 나치를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아르헨티나는 나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이 몰린 나라인 데다가 세계적인 농업 대국인 덕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국의 군량고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연합국을 명확히 지지한 브라질, 멕시코와 달리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으며 나치가 패망하자 나치의 주동자들도 종전 직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왔다. 대표적인 예가 아돌프 아이히만. 이 때문에 히틀러가 사실 도망가서 아르헨티나의 시골 구석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음모론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20]

6. 페론 집권기: 논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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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페론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6년 육군 대령 출신 노동부 장관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되면서 정세는 어느 정도 안정화되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된 페론은 노동자와 빈민층을 위한 사회 복지 정책을 펼쳤다. 흔히 말하는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페론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에비타'로 잘 알려진 영부인 에바 페론은 빈민의 어머니로 추앙받으며 어찌 보면 페론보다 국민들의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는 분명히 잘 사는 부국이었으나 사회문제는 심각했다. 산업화는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제대로 된 중산층이 형성되지 못했고, 극단적으로 부자여서 해외 진출을 통해 돈을 쓸어모으는 지주층과, 그 밑에 소속된 노동자들로 사회가 극단적으로 이원화 된 것이다. 중산층이라고 해 봐야 공무원, 사무직 정도였으나 농업 위주 아르헨티나 경제 및 사회상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수많은 빈민들이 거리를 맴돌며 일자리와 월급을 요구했고, 이는 단순노무직에 사람들이 집중되어 비참한 삶의 질을 낳게 되었다. 후안 페론의 정책들은 이런 빈민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빈민가 출신인 에바 페론의 사회 활동까지 합쳐저 엄청난 인기로 이어진 것이다.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고 당대의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서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에서도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이다.

페론이 포퓰리즘으로 나라 말아먹었다고 욕 먹는 것에 비해 의외로 80년대까지 페론주의 정당은 집권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21]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출마가 금지되어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출마 금지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페론을 몰아내고 집권한 군부 독재자들과 민간 정치인들도 페론의 경제노선을 수정하지 않았다.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현재의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22]에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하였으며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는 8,000달러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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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지표 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근본적으로 1차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탈피하는데 실패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직전인 1975년에도 아르헨티나의 최대 수출품은 옥수수, 밀가루, 쇠고기와 같은 농산물과 축산물이 수출의 3/4에 달했다. 또한 이 시기에 다른 나라들의 GDP는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페론이 집권한 1946년에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2차 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다. 그러나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19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정도까지 떨어졌다.

더욱이 아르헨티나는 농업 외에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 제조업 부문의 국영 기업들은 정부가 설정해준 높은 수입관세와 고정가격, 막대한 보조금 정책에 의지한 채 돈만 퍼먹는 하마가 되었고 국제적 경쟁력이라고는 전무한 상태였다. 페론의 경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경제가 버티면서 페론의 경제정책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일하게 경쟁력이 있는 부문인 농업과 축산업이 워낙 탄탄했기 때문이다. 농업과 축산업에서 올린 이익이 공업화 정책으로 약탈당한 결과 농축산 기술의 구식화로 농업과 축산업의 경쟁력이 서서히 뒤처졌고, 여기에 수입 대체 공업화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몰락은 가시화되었다. 페론이 먼저 빈부격차를 줄이고 경제성장을 하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페론의 수입 대체 산업화가 경제성장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사실상 페론 치하 아르헨티나는 성장은 고사하고 평등하게 뒤처지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다.

1973년 재집권한 페론은 죽기 직전 대규모 확대재정으로 마지막 발악을 했고 이 정책은 하이퍼 인플레이션이라는 원자폭탄으로 이어졌다. 1974년 후안 페론이 죽고 집권한 이사벨 페론(1974~1976)은 1975년 6월 버티다 못해 고정환율과 공공요금, 유류 가격 인상을 발표했다. 이사벨 페론이 썅년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후안 페론이 잘 묻어뒀던 지뢰가 그제서야 폭발했을 뿐이다. 이후 하이퍼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 급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아르헨티나는 지옥을 맛보게 된다. 결국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그때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이미 초토화된 상태였다.

7. 20세기 후반 군사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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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이사벨 페론은 1976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합참의장격인 전군총사령관에 임명했는데 군대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비델라는 쿠데타를 통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군부는 스스로의 정권을 국가재건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 칭하고 좌파와 페론주의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며(일명 "더러운 전쟁")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감을 사게되었다. 군사정권은 수천명의 반정부 인사들과 시위 참여자들을 쥐도새도 모르게 잡아들인 후 재판 없이 고문, 사형했고 일부는 대서양에 수장되었다. 페론으로부터 물려받은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처방을 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막대한 희생을 치렀으나 위기 해결에 실패하고 오히려 악화되기만 했다. 비델라는 1981년 퇴임하고 같은 군장성 출신인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Roberto Eduardo Viola)로 돌려막기를 했다. 로베르토 에두아르도 비올라 역시 몇 개월 못하고 결국 레오폴도 갈티에리로 돌려막기를 시전하고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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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도 갈티에리

그리고 레오폴도 갈티에리도 호르헤 비델라처럼 프로파간다를 위해 뭔가 일을 만들고자 했다. 영국과의 영토분쟁 지역인 포클랜드 제도를 무력 '수복'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와있던 외국자본은 무리한 환율정책의 결과 대거 이탈했으며 이자율 상승까지 겹쳐서 외채를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어 경제가 파탄위기에 직면하자 명분을 잃은 군부는 민주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다.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1년 정도 레이날도 비그노네가 이어 받았다가 결국 이듬해인 1983년에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켜 사퇴했다. 군부는 결국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급진시민연합 소속의 라울 알폰신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8. 민주화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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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알폰신

라울 알폰신은 민주화를 위해 정치개혁을 단행했고, 아우스트랄 프로젝트를 통해 화폐부터 개혁하고 여러가지 경제정책을 내세워서 집권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임기 말년에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막지 못한 채 임기를 6개월 남겨놓고 결국 사퇴하고 말았다. 이어서 선거를 통해 페론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카를로스 메넴은 기존의 페론주의와는 반대되는, 이전 군부정권이 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초기엔 이러한 약빨이 먹어서 물가가 안정화되었고, 외자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돈이 되는 기업들이 대거 민영화되었다. 그래서 당장은 돈이 들어왔다. 빈부격차는 커졌지만 저환율 정책으로 초인플레이션이 진정되었기 때문에 일단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덕분에 1995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2기 집권시에 1기 집권시 정책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저환율로 수출경쟁력이 떨어져 무역적자가 급속히 커지는 등의 부작용을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쐐기타를 맞고 부정부패마저 횡행하면서 3선까지 노렸던 카를로스 메넴은 지지율 추락으로 3선을 포기하고, 1999년에 임기를 마치며 퇴진했다. 그 이후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정권교체로 집권한 급진시민연합 정부도 영 신통치는 않아서 별수없이 기존정책을 계속 유지하다가 결국 2001년 지속되는 경제난[23]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로 퇴진을 하게 된다. 이후로는 다시 정의당이 집권하게 되나 대통령이 일주일만에 4명씩이나 바뀌는 등 급속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아르헨티나 상황은 빈곤율 54%에 실업률 20.8%를 기록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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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Néstor Carlos Kirchner Ostoić, 1950년 2월 25일 ~ 2010년 10월 27일)

그러다가 2003년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치적 안정을 회복했고, 경제도 IMF 외환위기의 후유증을 벗어나 연간 8.9%대의 급속한 성장을 거두게 되었다. 네스토르 키르츠네르가 집권한 이 시기의 경제성장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이었다. 그의 재선은 상당히 유력했으나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자신의 아내인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에게 차기 후보를 맡겼고, 이후 아내의 후견인으로서 상왕정치를 했다.

키르치네르의 아내인 페르난데스가 집권하면서 남편에 비해 부족한 수완과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경제성장의 호조와 임기 도중에 키르치네르가 사망하면서 과부가 된 페르난데스에 대한 동정으로 2기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2기 임기 들어서부터는 급속한 물가상승과 경제성장률 저하, 외화부족[24]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2014년 8월에 또 다시 디폴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디폴트 선언 자체는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의도한 바가 크다. 미국 헤지펀드 들이 채무조정에 합의를 하지 않고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실상 지급을 포기한 부실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여서 미국에서 소송을 걸어서 재판까지 갔는데 아르헨티나 정부가 재판에서 그만 패소해 버렸다. → 결국 미국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 근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게 되면 그 동안 채무조정을 해서 군말없이 지내던 여러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에게 압력이 들어와 그 동안 채무조정을 통해 탕감받은 몫까지 돈을 갚으라는 요구가 나오게 된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2000년대 초-2010년대 초반에 여러 차례 채무조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채무를 사실상 탕감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헤지펀드에게 돈을 갚는다면? → 근데 그 이전에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이걸 다 갚게 되면 아르헨티나 재정이 완전히 거덜나게 생긴다 → 어쩔수 없다 디폴트 하자! 대충 이런식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25] 그러니까 100% 망하기 VS 70% 망히기

다행히 아르헨티나 입장에선 그 동안 쌓아놓았던 경험도 있고 브라질이나 칠레,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의 인접 남미 국가와 정치성향이 일치했는데 그 인접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26] 1980년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보다는 좀 낫다. 하긴 물가 1000배 뛰는 것보다 10배정도 뛰는게 나은 것과 같다 2012년 이후에 경기침체와 상당한 물가상승으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어 현지에선 그냥 빚갚으라고 하는 여론이 다수. 경기침체가 지속되었던 차라 2013년 총선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패배한 이후로는 줄곳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의외로 2015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는데, 의외로 지지기반 자체는 꽤 탄탄했던데다가 아무리 아르헨티나 경기가 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다해도 사실 그 동안 여러차례 찾아왔던 경제난에 비하면 사실 경제난 축에 못들 정도로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수십%씩 물가상승하고 있다지만 80년대 초반, 1980년대 중후반이나 90년대말-2000년대 초반처럼 매년 수백배씩 물가가 올라가고 실업률도 수십%에 달하는 상황은 아니니까 또한 1차 투표 1위를 한 여당의 시올리 후보 말고도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 역시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래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페론주의자였기 때문에 잘만 회유하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던 것,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다니엘 시올리(Daniel Scioli)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3위 후보인 세르히오 마사(Sergio Massa)와도 이미 관계가 나빠 시올리 후보가 1차 투표에서 37%를 얻는데 그쳤다. 그리고 3위 마사 후보를 지지한 표의 대다수가 마크리 후보로 날아들어오면서 결국 결선투표에서 시올리 후보는 48.6%의 득표율을 얻어 야당 공화제안당 소속이자 최대 야당인 급진시민연합의 지지를 받은 마우리시오 마크리 후보에 패배하면서 허무하게 정권을 내주었다. 그나마 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전선이 선전을 거뒀는데 하원에서 의석 상당수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원내 1당 자리는 유지했고(107석/257석) 상원에서도 과반수 이상의 의석(40/72석)은 여전히 확보했다.

어쨌든 마크리가 집권한 뒤로 외국으로부터 자금이 대거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집권 2년이 지나면서 기대는 사그라들고 있는 중이다. 외국으로부터 자금이 들어오고있지만 그 자금들이 아르헨티나 산업부문으로 들어오는것이 아닌 자산시장으로 들어오기 대문에 부동산이나 주식값같은 자산시장이나 호황이지, 막상 실물경제는 침체에 빠져있고, 저환율로 국내산업은 침체에 빠지고있는데다가 공장가동률은 2004년 이래 최악, 실업률도 다시금 10%를 넘어설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1]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연합국의 대외 외교에 있어서 연합을 대표하였다. 즉, 대외적으로 국가의 원수였다는 뜻이다.[2]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도 다른 주의 대해서는 주권을 존중해야 했다. 사실상 국가 연합과 비슷한 구조.[3] 이렇게 된 이유는 로사스가 기회주의자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젊은 시절 제 버릇 개 못 준 전형적인 카우디요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애초에 연방주의든 중앙주의든 성향 불문하고 자기 영지에서는 왕처럼 살면서 지역 주민의 생사를 가르던게 라틴아메리카 카우디요들이다.[4] 실제로 로사스는 왕처럼 행동했다.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한다던지, 세습 독재 체제를 마련해 놓는다던지...[5] 로사스는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중앙집권을 통해 미래 아르헨티나의 틀을 다졌다는 의견과 잔혹한 독재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 살인광이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그의 공을 기려 아르헨티나의 20페소 지폐에는 그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다.[6] 현행 아르헨티나 헌법의 기초가 된 헌법. 이후 여러 번 개정이 이루어졌으나 틀은 그 때와 똑같다.[7] 이게 얼마나 골때리는 일이냐면, 한국과 비교하면 서울 vs 나머지가 내전을 벌여서 서울이 이겨버린 격이다.[8] 미국보다 빠르다. 라인 A로서 리바다비아 대로를 따라 운행하던 엄청난 골동품 지하철이며, 현재도 영업중이다.[9] 여성 포함.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가 굉장히 선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10] 경제 대국이기는 했지만 인구가 적었고, 군사력도 유럽 열강국에 비해 약했기때문에 세계적인 열강에는 미치지 못했다. 1915년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800만 정도였고, 1924년에 1천만, 1959년에야 2천만에 도달하게 된다. 1910년대 시점 열강이라고 할 만한 국가 가운데 가장 인구가 적었던 프랑스의 본토 인구가 1915년 기준 약 3340만이었고, 벨기에나 네덜란드의 인구가 아르헨티나의 인구와 비슷했음을 감안하면, 1910년대 아르헨티나의 국력은 세계적으로는 벨기에, 네덜란드 정도의 수준이었다.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아르헨티나가 중남미에서는 브라질, 멕시코를 넘어서는 경제 대국이었지만, 이때도 전체 GDP로 봤을 때 압도적인 격차가 나지는 않았다.[11] 물론 이 당시 아르헨티나 말고도 칠레나 브라질, 페루, 우루과이 등 다른 남미 국가들로 이민가는 유럽인 이민자들도 있었다.[12] 1778년 인구 조사에서 원주민은 41,517명, 인구의 22.33%로 원주민이 대부분인 다른 스페인령 아메리카 지역과 상황이 달랐다.[13] 우루과이와 칠레도 비슷했다. 그나마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영토 면적이라도 넓어 원주민들이 극소수나마 남아있는 편이지만, 면적이 작은 우루과이는 좁은 영내에서 백인들의 토벌에 원주민들이 버티지 못하고 멸족되었다.[14] 아르헨티나 전체가 평야인 것은 아니고 북쪽과 서쪽의 변경지대는 산악지대이다. 이곳은 원주민의 비율이 높다.[15] 이들 원주민 지도자들은 백인 정착민들의 마을을 공격하여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납치하고 가축들을 대거 약탈하는 것을 주도한 자들로 백인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다. 피차일반으로 야만적이긴 한데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16] 셀크남 족이 양떼가 재산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여 분쟁이 생기자 목장주들이 백인 총잡이들을 불러들였는데, 셀크남족 한 사람의 손이나 귀를 잘라오면 그에 따라 돈을 더 많이 주겠다고 했다. 이들은 보너스에 눈이 멀어 셀크남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면서 그들의 신체를 잘라 앞다투어 목장주들한테 가져갔다. 이 잔인무도한 인간 사냥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1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17] 혈통뿐만 아니라 정체성 등도 원주민 여부 판단에 고려되기 때문에 이 비율은 유동적이다.[18] 사실 이것은 아메리카 국가들 전반이 그렇다.[19] 아르헨티나 수출은 심지어 1960년대까지도 농산품이 90% 이상을 차지했다.[20] 이렇게 이중적 행태를 띈 이유는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자들이 파시즘에 대해서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감히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넘어 전쟁에 적국으로 참여하기는 거부했고, 2차대전 막바지에 연합국으로 참여했다.[21] 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22] 정확하게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망명중이었다.[2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고객들이 은행에 몰려들자 경비원이 고객들에게 총을 쏘기도 할 정도였다.[24] 여러 차례 경제위기를 겪은 여파로 아르헨티나에선 달러를 소유하고 있는 가정이 많았으나, 국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반복된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고, 거기에다가 페르난데스가 석유산업 국유화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삐그덕거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경제규모에 비해 적은 외환보유고가 줄어들었다.[25] 그래서 이런 아르헨티나의 디폴트를 기술적 디폴트라고 하기도 한다.[26] 브라질은 룰라 시절을 거치면서 세계 수 위권의 경제강국으로 부상했고 우루과이와 볼리비아도 2000년대 중반 이후에 4-5%대의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하고 있으며 칠레도 꾸준한 성장으로 남미에서 가장 높은(1인당으로 따지면) 경제수준을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