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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메리카로 도주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잔당들을 다루는 문서.2. 전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넘어간 이들을 뺀 수많은 나치들은 공소시효 없이 영원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당연히 이들도 순순히 잡혀 줄 마음은 없었고 연합군의 추적을 피해서 신분을 세탁하고 각국으로 도주했는데 남미가 주된 도피처가 되었다.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완전히 포위되어 바다를 통해 탈출한 독일인들 중 상당수가 독일 본토가 아닌 남미로 항로를 잡아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은 이들도 있었다.
바티칸 시국의 알로이스 후달, 로베르트 라이버(Robert Leiber)와 같은 나치 동정주의자들은 일명 '쥐 통로(Ratline)'를 마련해서 수많은 나치 인사들을 도피시켜 주었는데 프란츠 슈탕글, 에리히 프리프케, 구스타프 바그너, 알로이스 브루너, 딘코 사키치 등 수많은 전직 독일 나치들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들이 이 통로를 통해 해외로 도피했다.
한편 크루노슬라프 드라가노비치(Krunoslav Draganović)와 같은 일부 전직 우스타샤 출신 신부들이 먼저 도망친 안테 파벨리치와 직접 통하는 산 지롤라모 랫라인(San Girolamo Ratline)을 구축하여 수많은 파시스트들을 탈출시켜 주었다. 산 지롤라모 말고도 일부 가톨릭 고위직들의 도움에 힘입어 수많은 랫라인들이 생겨 나치 전범들의 도피를 도왔다. 이외에도 오토 슈코르체니의 오데사나 구드룬 부르비츠의 침묵의 손길(Stille Hilfe), 한스 울리히 루델의 전우협회(Kameradenwerk) 등 나치와 연관된 여러 단체나 전후 세대들에 의해 새로 세워진 네오나치 단체들, 샤를 레스카, 오스왈드 모슬리, 페르 엥달 같은 여러 파시즘 동조자들이 전범들의 도피 및 생활을 도왔다.
아예 전직 전범 출신들이 직접 세운 단체들이 앞장서서 전범들의 처우 개선 및 생활 지원에 나서기도 했는데 오토 에른스트 레머의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이나 로돌포 그라치아니 등의 이탈리아 사회운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로돌포 프로이데와 같이 전쟁 전부터 이미 현지에 자리잡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의 유력자들이 도피를 돕기도 했다.
프리드쇼프 난센이 무국적 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만든 난센 여권을 악용하는 사례도 많았다.
이렇게 남미로 도주한 나치 잔당들이 해당 국가에 정착해 현지인과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사례들도 왕왕 존재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칠레로 도주하여 정착한 독일군 장교 미하엘 카스트로, 이 사람의 아들인 호세 카스트는 칠레에서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7년 대선 후보로도 출마하기도 했다.[1]
나치 독일 전범들만 도주한 것은 아니고 많은 수의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파시스트들과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우스타샤, 독일 국방군 점령 시기 나치 독일군에게 협력하던 벨기에나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불가리아, 덴마크 등지의 유럽 점령지들의 매국노, 부역자들도 많이 따라갔다. 대규모 나치 전범의 탈출을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안테 파벨리치부터가 크로아티아 사람이고 시몬 비젠탈 센터의 도피 중인 나치 전범 목록을 보면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등지의 부역자들도 꽤 많다.
3. 남미로 간 이유
남미가 주 도피처가 된 이유는 남미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고[2] 유럽, 소련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미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미에서의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지만 미국 자신도 전범 처단에는 당사자인 유럽 국가들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일부 남미 국가들은 나치 인사들의 송환에 비협조적이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3]과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곤살레스, 볼리비아의 대통령 우고 반제르, 파라과이의 군부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4]는 나치 인사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받고 숨겨 주거나 나치 전범과 부역자의 자국 망명을 묵인하기도 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 후안 페론의 정치 고문으로써 당시 전범들의 남미행을 지휘했던 이가 다름아닌 전직 우스타샤 수장인 안테 파벨리치였다.[5] 덕분에 시몬 비젠탈 센터가 추적 중인 나치 목록에 독일인 다음으로 많이 등재돼 있는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우스타샤들이며 구드룬 부르비츠, 오토 스코르체니, 한스 울리히 루델, 알로이스 후달, 오스왈드 모슬리, 샤를 레스카, 페르 엥달 등 친나치 인사이지만 전범은 아닌 이들의 지원과 더불어 수많은 전범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인 이민이 많았으며[6]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고국의 사정에 절망한 독일인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군이 쳐들어온 동프로이센을 배를 이용해 탈출한 독일인들이 많이 이민을 간 데다 넓은 땅에 비해 인구수가 많지 않고 미개발지도 상당히 많은 편이어서 나치 인사들이 숨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도 유독 백인의 비율이 높아서 백인인 자신들이 숨어살 수 있었고 백인 우월주의에 찌든 인간들의 눈에 보기에는 당시로서는 미국과 유럽 다음 가는 문명세계이기도 했던 데다[7] 부유했기 때문에 주 도피처로 선택되어 수많은 나치 전범들이 도주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다가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가 매우 유명하다. 체 게바라가 의대생 시절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한 집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에 살던 사람이 도망친 나치 인사였다고 한다.
그렇게 아르헨티나는 나치 관련 음모론에 자주 엮이게 되었고 남극 은신설이나 히틀러 또는 히틀러 자식의 은신설 등의 수많은 도시전설이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칠레도 이웃나라 아르헨티나 못지 않아서 나치 전범인 파울 섀퍼와 발터 라우프 등이 칠레로 도주했고 파울 섀퍼와 피노체트 군부독재 정권이 유착해서 일어난 콜로니아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고 남미 국가들이 나치의 범죄를 무조건 묵인한 것은 아니다. 에리히 프리프케나 딘코 사키치처럼 너무 설치거나 전쟁범죄를 대놓고 부정하는 등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면 매장을 거부하거나 추방하기도 했다.
4. 남미 이외의 나치 도피처
남미 다음으로 나치 전범들이 애용한 곳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지배하던 파시즘 국가 스페인국이었는데 지리상으로도 가깝고 무엇보다 유럽에 남은 최후의 파시즘 국가였기 때문이다. 비록 대전 말기에 히틀러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프랑코였지만 온갖 전범들이 자기 나라에 대놓고 들락거리는 마당에도 프랑코는 이들을 딱히 막지 않고 남미로 가는 루트를 주선해 주는 등 오히려 도움을 줬다. 이 탓에 스페인에 아예 정착해서 사는 전범들이 많았고 남미로 가는 중간 기착지로도 많이 쓰였다. 나치 전범에게만 온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린 이탈리아 파시스트나 공산 혁명으로 나라를 잃고 쫓겨 온 동유럽 왕족들 등 온갖 인사들을 받아들여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행동했다.[8]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미국 등 연합국에게는 결코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페인은 전범을 숨겨주는 일과 정치범 처형 등 여러가지 밉보일 이유 때문에 연합국에 도움이 되었던 포르투갈과 달리 마셜 플랜에서 제안조차 받지 못한 채 철저하게 제외되어 이제 막 백인우월주의가 태동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다.[9] 전범 도피를 돕던 안테 파벨리치가 아르헨티나에서 도망치듯 나온 이후 최후로 선택한 곳도 스페인이었다.또 다른 도피처는 아랍 국가들이었는데 전직 게슈타포 인원들이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에 도주한 케이스가 있다. 아랍 국가들은 전후 벌어진 중동전쟁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가 팽배했고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국가 안정이 필요했던 하페즈 알 아사드, 가말 압델 나세르와 같은 독재자들도 남미와 비슷하게 나치의 여러 가지 정치적, 군사적 노하우, 특히 대이스라엘 첩보전을 수행하는 데 이들을 써먹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던 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도피한 인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할 가능성도 없었다. 유대인에 대한 범죄에 크게 관심이 없는 데다 고급 인재에 대한 수요까지 넘쳐나는 이들 지역은 갈 곳 없는 전직 나치 정보기관 인사들이 자리잡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국가로 도망간 나치 전범들은 신분도 숨길 겸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현지 인원들과 동화되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아민 알후세이니의 모병으로 이루어진 SS 사단인 한트샤르의 소속원들이 같은 종교를 믿는 이웃나라 튀르키예나 아랍 국가들로 도주하곤 했는데 알후세이니 본인도 레바논으로 도주했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와 같은 신대륙으로도 많이 도망간 편이다. 이들은 연합국이지만 애초에 이민자 위주의 국가들인지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들어오기 쉬웠고 특히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은 19세기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붐 때문에 신대륙에 차고 넘치는 데다 어중간한 동유럽 출신 부역자들은 피난민으로 위장하기도 쉬웠다. 심지어 발레리안 트리파처럼 전후 자신이 반나치 활동가라고 대놓고 구라를 치면서 들어온 전범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소련으로부터 인재 유출을 막고 대신 그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CIA와 같은 정부기관들이 앞장서서 과학자나 첩보 인원 위주로 전범들의 도피를 돕고 대공업무 및 신기술 개발에 이들을 써먹기도 했다. 베르너 폰 브라운이나 발터 도른베르거, 콘라트 섀퍼, 헤르만 베커 등이 이렇게 미국으로 건너왔다.
흔히 나치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고만 알려진 소련도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에 대응되는 오소아비아힘 작전을 통해 일부 나치 인사들을 가족들과 함께 자국으로 모셔가서 숨겨 줬다.[10] 심지어는 서독과 동독조차도 정보전을 위해 게슈타포 인원들을 스카웃해서 독일 연방정보국과 슈타지에 각각 박아 넣었고 모사드도 이런 나치 전범들을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들에 위장 투입시키는 등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 나치 전범들을 정보원으로 써먹기도 했다.
1945년과 1946년 사이에는 스웨덴으로 도망쳐서 정신질환자인 척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난민 캠프에 들어가는 등의 방법으로 소련의 추적을 피하려던 독일군 및 발트 3국 출신 부역자 무리도 존재했지만 소련이 스웨덴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었고 스웨덴 정부는 이들을 결국 소련으로 전부 송환했는데 이를 발트 추방(baltutlämningen)이라고 한다. 약 3,000명 가량이 추방되었고 이들 중 발트 3국 출신 부역자는 167명, 그 중 147명이 라트비아인이었다.
정반대로 외지, 특히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부역자들이 오히려 자신들에 대해 잘 모르는 서독이나 프랑스 등지로 도피하여 살기도 했는데 스테판 반데라나 쇠렌 캄, 빅토르스 아라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찬드라 보스는 영미권 연합국을 피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5. 유사 사례들
- 몇몇 일본군 잔당들도 나치 잔당들처럼 브라질로 도주했다. 이를 두고 브라질이 친추축국 성향 국가라는 의견도 나오지만 브라질은 약간 경우가 다른데 전술했듯이 아르헨티나처럼 연합국에 이름만 올려 놓은 게 아니라 잠수함에 지상군까지도 투입해서 추축군과 싸웠던 국가다. 당장 전후 브라질의 독재자였던 카스텔루 브랑쿠부터가 2차 대전 참전으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다.[11] 당연히 이들에 대한 시선은 별로 좋지 않았다. 일본군 잔당들이 굳이 브라질로 피신한 까닭은 브라질에 일본계 브라질인이 많이 살기 때문에 섞이기 쉽기 때문으로 지금도 일본 이외에 세계에서 일본계 주민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바로 브라질이다.[12] 브라질 외에는 그나마 일본 제국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었던 인도네시아나 부건빌 등지에 정착하여 살거나[13] 츠지 마사노부처럼 베트남, 라오스 등지의 내전에 참여하여 반공투사 노릇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양칠성이나 허영과 같이 전후에도 남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 잔당들도 있다. 베트남에서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이 무장해제된 일본군 포로들을 치안 유지에 동원하기도 했고 반대로 공산당 측에 가담하여 싸운 일본군 잔당도 있었다. 그마저도 안 된 단순 낙오병들은 오노다 히로오처럼 자신이 낙오한 곳에서 그대로 살면서 민가를 약탈하거나 민간인을 살해하며 살아가기도 했다.[14] 일본군 패잔병 문서 참고.
- 국공내전이 중국국민당의 패배로 끝나고 대만으로 국부천대가 이루어지자 남중국 지역에 낙오한 일부 국민당 잔당들은 국경을 넘어 동남아시아로 도피한 후 70~80년대에 골든 트라이앵글과 이어지는 그 지역 마약 공급 루트를 잡고 한동안 마약 카르텔 노릇을 했다. 이들의 세력은 2020년대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여전히 마약 장사와 인신매매를 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 치안에 큰 악영향을 주고 있다. 몽타이군의 마약왕으로 유명했던 쿤사도 이러한 국부군 잔당 장교로 반군 인생을 시작했다.
- 1990년대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면서 흑인들에게 온갖 백색테러를 저질렀던 군, 경찰 인사들이 흑인들을 피해 이주하는 화이트 플라이트 행렬에 섞여서 대거 해외의 백인 위주 국가로 도피하기도 했다.
-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민간인들을 상대로 온갖 패악질을 벌였던 혁명연합전선의 일부 잔당들은 뒤를 봐주던 라이베리아로 도피했다. 원래는 혁명연합전선에 쫓기던 난민들이 주로 라이베리아에 몰렸는데 전쟁이 끝나니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라이베리아는 내전이 너무 오래 이어졌고 이에 대한 처벌도 국가 상황 때문에 거의 전무했다 보니 정부에서든 민간에서든 이들에 대한 처벌 의지 자체가 없었고[15] 이 때문에 아직도 라이베리아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개중에는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당당히 자신의 전적을 밝히는 자도 있고 정계에 진출한 작자도 있다.
- 이라크 내전과 시리아 내전, 제2차 리비아 내전에서 갖은 전쟁범죄를 일삼던 해외 출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대원들도 아무 생각 없이 가입했다가 열악한 생활 환경 떄문에 도로 탈영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현지 정부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자신의 모국으로 다시금 은근슬쩍 도망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가담한 순간 국적이 말소되어 인정되지 않지만 이렇게 모국으로 돌아온 전쟁범죄자들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지가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로는 샤미마 베굼이 있다.
- 르완다 내전 당시 학살을 저지른 후투족 가해자들, 특히 학살을 주도했던 테러조직 인테라하므웨(Interahamwe)의 구성원들은 폴 카가메의 투치족 반군 르완다 애국전선이 우간다 요웨리 무세베니의 지원을 받아 르완다로 돌아와 파죽지세로 각지를 점령하자 투치족들이 복수를 위해 쳐들어왔다고 겁을 먹고 대거 이웃나라 자이르로 도망쳤다. 카가메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이르를 침공해서 인테라하므웨 잔당들을 대거 쓸어 버리고 내친 김에 그 곳의 철통같은 독재자 모부투 세세 세코까지 몰아내 버렸다. 문제는 당시 동맹을 맺은 군벌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카가메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아 놓고 카가메를 홀대하자 분노한 카가메가 콩고민주공화국을 또 침공하는 바람에 상호방위조약으로 묶인 남아프리카 개발공동체 소속국가들이 자동으로 참전하고 혼란을 틈탄 적극적 대외개입을 원하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와 오마르 알바시르의 수단 공화국까지 참전하면서 전쟁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콩고에 진입한 카가메의 르완다군, 그리고 이들의 최종 배후인 요웨리 무세베니의 우간다군은 콩고민주공화국 강역에서 수많은 전쟁범죄를 자행하고 패권주의적인 생각 아래 어용 반군들을 후원하면서 콩고의 자원들을 수탈하는 바람에 전쟁 중 540만의 콩고인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결국 해외로 도피한 전범을 쫓겠다고 벌인 전쟁이 또 다른 전쟁범죄를 낳았으며 보복학살도 막을 수 없었던지라 최소 6만명에서 20만명의 후투족 난민들이 '실종'되는 사건도 터졌는데 이들은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 카가메가 미쳐 잡지 못한 콩고민주공화국 내부의 르완다 후투 파워 전범들은 세력을 겨우 부지한 이들끼리 뭉쳐 르완다 해방군, 르완다 해방을 위한 민주군 등의 테러 집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르완다로 돌아가는 대신 콩고민주공화국 동부 지역에 눌러 앉은 채로 콩고민주공화국 내부의 각종 반란에 참여하는 등 정치 혼란에 계속 기여하고 있다.
- 한편 르완다 내전 당시 자이르로 도망치지 못한 르완다 후투 파워 전범들은 다른 해외 지역으로 도피했다. 배후에 있었던 지도자급 인원들은 주로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등으로 뒷돈을 먹여가며 도망쳤고 행동대장급 인원들은 케냐나 탄자니아 등으로 도망치거나 미국으로 도망쳐 숨죽이면서 살았다. 그러나 자이르 외에 다른 곳으로 도망친 후투 파워 전범들 및 국내 오지로 도망친 전범들은 사실상 처벌이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라이베리아처럼 가해자의 수가 너무 많았던 데다 대부분이 평범한 민중 신분으로 불규칙적, 비계획적으로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숫자는 르완다 인구 전체의 1/3 수준으로 이들을 전부 처벌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내전의 상처를 봉합한 지 얼마 안 된 르완다의 입장에서 이는 국가를 다시 분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투치족 폴 카가메 대통령은 국민 대통합을 명목으로 대부분의 학살 가담자에게 조용히 관용을 베풀고 넘어가는 대신 벨기에가 만든 의미 없는 민족 구분을 전부 철폐하고 하나의 '르완다인'이라는 정체성을 이식한 후, 학살의 원인을 제공한 벨기에와 학살을 뒤에서 조종한 프랑스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배제하고 새로운 공용어로 영어를 선택, 적극 도입하여 학살의 상처를 씻고 새로운 국가로써의 르완다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으레 겁먹고 먼저 해외로 도망친 대부분의 후투족 망명객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물론 펠리시앵 카부가나 테오네스트 바고사라, 베르나르 은투야하가 같은 거물 배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로, 이들은 진작 소관을 헤이그와 아루샤의 전범재판소로 넘겨서 끝까지 추적하도록 하고 있다. 카부가는 2022년 프랑스에서 잡혔고 바고사라는 카메룬에서 구금되었으며 은투야하가는 탄자니아에 있었다가 2004년 벨기에로 가서 자수했다.
-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라도반 카라지치나 라트코 믈라디치를 비롯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부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세르비아 괴뢰국 스릅스카 공화국의 전범들은 종전 후 본진인 세르비아로 도망갔고 크로아티아계 전범들도 크로아티아로 도망갔다.[16] 실제 국가 간 국가의 전쟁이라기보다는 보스니아 내부에 난립한 수많은 민족별 괴뢰국들을 이용해 대리전에 가까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대부분이 뒷배를 대주던 본진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6. 목록
6.1. 남미로 도주한 잔당
- 요제프 멩겔레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수감자들에게 엽기적인 생체실험을 자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로, 아이히만과 같이 모사드가 추적했지만 끝내 검거에 실패했고 결국 1978년에 브라질 상파울루 바닷가에서 수영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 에두아르트 로슈만 - 라트비아 리가 게토의 책임자로, 굶주린 개에게 사람을 던져주는 등의 짓거리로 유명했으며 거의 35,000명이 이 작자에게 죽었다고 추정된다.[17] 전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해서 이름과 신분을 바꾸고 재혼까지 하면서 잘 살았지만 하필 실수가 있었기 때문에 중혼죄로 기소돼 쫓기는 과정에서 전력이 드러나 체포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도주 실력이 워낙 좋았던 탓에 아르헨티나를 잽싸게 떠나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숨어서 살다가 끝까지 체포되지 않고 1977년 파라과이에서 사망했다.
- 클라우스 바르비 - 리옹 지역의 게슈타포 책임자로서 본인이 직접 수감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한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항복 후 미국 정보기관에 고용되었다가 1951년에 볼리비아로 도피하여 볼리비아의 군사독재자들에게 자신이 나치로 일했을 적의 고문 기법을 전수하기까지 했다. 1982년에 볼리비아에 민주 정부가 수립된 후 빚을 졌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 1983년에 프랑스로 이송되었고 1987년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후 1991년에 78세 생일로부터 정확히 1달 전에 옥사했다.
- 구스타프 바그너 -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브라질에 숨어 살다가 1978년 시몬 비젠탈 센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브라질 정부가 이스라엘, 폴란드, 오스트리아의 인도를 모두 거절함으로써 잔류할 수 있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1980년 자택에서 가슴에 칼이 꽂힌 채로 발견된다.
- 프란츠 슈탕글 -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 소장으로 바티칸의 알로이스 후달의 도움을 받아서 미군에 체포돼 있던 중 탈출했다. 이후 가족과 시리아에 머물다가 1951년 브라질로 가서 폭스바겐 공장에 취직했지만 로슈만과 달리 자기 본명을 그대로 떳떳하게 사용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1961년 서독 정부에 기소돼 본국으로 끌려와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1971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 발터 라우프 - 차에서 낮잠을 자다가 배기가스에 죽을 뻔한 경험을 되살려서 초기 유대인 학살 방식이었던 가스바겐을 고안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전후 시리아로 도피해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기 위해 현지 정보기관에서 일했는데 하필 그 해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레바논으로 도주한 후 이탈리아를 거쳐 에콰도르로 도피했다. 이후 다시 칠레로 도피해서 킹크랩 통조림 공장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돈을 모음과 동시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자문역을 했고 1984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거기 거주했다. 당연히 수많은 나치 추적자들이 그를 쫓았지만 칠레 정부는 그의 송환을 거부했다.[18]
- 파울 섀퍼 - 사이비 종교 단체인 콜로니아 사건의 주범. 히틀러유겐트와 의무병 출신이었으며 나치가 망한 후 독일에서 사이비 종교를 운영하다가 1961년 아동 성폭행 수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나치 전력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급하게 신도들을 데리고 칠레로 도주해서 거기서 계속 콜로니아를 이끌었다. 이윽고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자 적극적으로 군부에 협조했고 그의 종교시설은 피노체트의 아우슈비츠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그는 독일 대사관까지도 매수해 가면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콜로니아에서 40년 동안 탈출한 사람은 5명뿐이었고 수백명의 정치범이 그의 시설에서 죽어나갔다. 이후 어릴 적에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기소되어 1996년에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지만 2005년에 다시 잡혀와 2006년에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2010년에 옥중에서 8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요제프 멩겔레같은 다른 전범들과도 콜로니아 시설에서 회동했다는 설이 있다.
- 에리히 프리프케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로마 외곽 동굴에서 수백 명을 학살한 나치 전범.[19] 2013년 10월 15일 100세를 일기로 로마에서 죽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인의 묘 옆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아르헨티나 정부는 그의 매장을 거부했다.[20]
- 딘코 사키치, 나다 루부리치 사키치 부부 - 딘코 사키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 우스타샤 소속으로 악명 높은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와 처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여 그 잔혹성에 나치 관리들조차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내인 나다 사키치(결혼 전 이름 나다 루부리치)는 야세노바츠의 다른 책임자이자 역시 해외로 도주했다가 괴한에게 살해당한[21] 볘코슬라프 루부리치의 이복 누이였으며 야세노바츠에서 간수로 근무했고 남편 딘코에 뒤지지 않는 잔인한 자였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잡혀 죽은 같은 책임자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와 달리 아내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도피해서 섬유사업가로 변신해 지역사회의 명망을 얻어 크로아티아 교포들 사이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유지가 되었다. 파라과이의 독재자인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키치는 조용한 삶을 지향했지만 자신의 전적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1994년에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과도 만났고 크로아티아 현지 기관지와의 인터뷰에서 더 많은 세르비아인들을 못 죽인 게 한이라는 식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떵떵거리며 사는가 싶더니 1996년 아르헨티나 방송에서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범죄행위를 무시하는 인터뷰를 했다가 공분을 샀고 카를로스 메넴 정부에 의해 크로아티아로 추방되었다. 결국 학살 혐의로 징역 20년을 선고받긴 했지만 감옥에 TV와 컴퓨터를 설치해 주고 아내와 함께 노년을 보내게 해 주는 등 눈 감고 아웅인 수준의 수감생활을 보내다가 2008년 편안하게 사망했다. 장례식도 가관인데 우스타샤 정복 차림으로 화장을 했다고 한다. 나다 역시 아무런 사과 없이 2011년 남편을 따라갔다.
- 피에르 다이 - 벨기에 렉스당 출신 나치 부역자로, 친나치 기관지에 몸담아 선동 및 선전 활동을 했다. 해외 나치 협력자인 샤를 레스카(Charles Lescat)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도주해서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 카를 베르넷 - 덴마크인 의사로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호르몬 교정 및 강제 거세, 각종 비인간적 인체실험들을 실행했다. 전후 덴마크에서 체포되었으나 심장마비를 가장해 빠져나온 후 듀폰을 상대로 자신의 호르몬 연구결과를 팔아넘기려고까지 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로 도주해서 죽을 때까지 거주했다.
- 헤르베르츠 추쿠르스 - 라트비아인 부역자로, 악명 높은 라트비아 부역자 집단 아라이스 의용대(Arajs Kommando) 소속이었다. 본래 라트비아의 비행사로 리가에서 도쿄와 감비아까지 비행기록을 세우는 등 가히 라트비아의 찰스 린드버그라고 할 수 있는 라트비아의 국민영웅이었으며 직접 국산 급강하폭격기인 추쿠르스 C.6bis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빅토르스 아라이스를 만나고 아라이스 의용대에 가입한 후 급격하게 흑화해 온갖 범죄행위에 가담했는데 아라이스와 독일군의 수족 노릇을 자처해서 리가의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으며 럼불라 학살과 리가 시나고그 방화에 참여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의용대는 라트비아 거주 유대인의 절반을 죽였다. 전후에는 독일군 무리에 섞여서 브라질로 도주해 그 곳에서도 사업체를 만들고 직접 비행기를 몰면서 비행사 노릇을 했는데 정체를 숨기지 않고 활동했다.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모사드 위장요원에게 우루과이에서 사업을 시작해 보라는 제안을 받아 몬테비데오로 향했고 그 곳에서 모사드에 납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22]
- 안드리스 리파겐 - 별명인 '드리스' 리파겐으로도 유명하다. 네덜란드의 갱스터이자 정치깡패로 나치가 들어서자 부역자로 변신했다. SS 국가지도자 보안국(SD), 1939년 이후엔 게슈타포 및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과 협력해 비밀경찰 노릇을 했다. 적어도 3190명의 유대인이 그의 손에 의해서 독일에 넘겨졌고 많은 레지스탕스 조직이 와해되었다. 1943년부터는 지하에 있는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업무를 맡았고 유대인들을 속여 안심시킨 후 재산을 빼돌려서 유용했으며 다른 현지 부역자들(vertrouwensman)이 자신에게 유대인을 넘길 경우 그 수익을 일정량 분배해서 효율을 높이기도 했다. 전후 수배되었지만 독일의 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민간포로 신분이 되었고 1946년 벨기에 국경을 넘어 탈출했다. 이때 자기가 먼저 탈출한 후 가족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정작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고 레지스탕스 멤버와 재결합했다. 이후 난센 여권을 악용하여 스페인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는데 아르헨티나에서는 후안 페론과 긴밀한 사이가 되어 안테 파벨리치와 함께 조언자 자격으로 정보조직 창설을 권유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그를 추적했지만 이미 1973년 스위스의 한 사설병원에서 사망했다. 피터 쿠이퍼스 감독의 2016년작 영화인 리파겐이 그의 이야기를 담았다.
- 디노 그란디 - 검은 셔츠단 출신으로 로마 진군에도 참여한 이탈리아의 성골 파시스트이자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 법무장관, 외무장관 및 국가 파시스트당 최고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전황이 어두워지자 갈레아초 치아노, 에밀리오 데 보노, 체자레 마리아 데 베치와 함께 재빨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편에 서서 베니토 무솔리니 실각 결의안을 만들어 무솔리니의 몰락에 일조했고 파르티지아노와 협상에 나섰지만 무솔리니가 오토 스코르체니에 의해 구조되고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건설하자 무솔리니에게 배신자로 찍혀 살로 공화국 측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렇다고 그가 이탈리아 파르티지아노들과 연합국에게 딱히 환영받는 인물도 아니었던 데다 여전히 연합국 측은 죽일 놈 정도로만 보았기 때문에 끈이 떨어져 1943년 일찍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국으로 도주했다가 이후에는 포르투갈과 아르헨티나를 거쳐 브라질 상파울루에 정착해 오랫동안 거기서 거주했다. 덕분에 같이 무솔리니 실각에 가담했던 갈레아초 치아노와 에밀리오 데 보노 등이 처형당하던 와중에 같이 남미로 도망간 베치와 함께 혼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이탈리아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다가 몰래 이탈리아로 귀국하여 1988년 고향 볼로냐에서 죽었다.
- 체자레 마리아 데 베치 - 검은 셔츠단 출신으로 로마 진군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바로 옆에서 수행하던 인물이다.[23] 1922년 토리노에서 노조원들을 공격한 이른바 토리노 대학살의 주요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고 무솔리니 내각에서는 재무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을 맡았으며 소말릴란드 및 이탈리아령 도데카니사 제도의 총독을 역임했다. 디노 그란디의 베니토 무솔리니 해임안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이에 불복하여 이탈리아에 진입한 독일군에 대해서는 휘하 병력들에게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할 것을 명하고[24] 자기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추적을 피해 알베르트 케셀링과 살레시오회의 도움을 받아 피에몬테로 도망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전범 재판을 피해 파라과이 여권을 사용하여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 1949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자기를 쫓던 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의 주역이었던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함께 네오파시즘 운동인 이탈리아 사회운동(MSI)을 지원했으나 내부에서 어떠한 특별한 직책을 받는 것은 전부 거절했다. 1959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 알렉산더르 찬코프 - 불가리아 전 총리이자 독재자로 페트리치 사건 이후 사임하고 나서 파시스트 운동가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로써 활동했고 이후에는 친독 망명정부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독일이 임명한 친독 인사 치고는 반유대주의 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동참하기도 하는 등 영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지만 전후 권력을 잡은 불가리아 조국전선에게 여전히 체포 1순위 대상이었다. 결국 2차 대전이 종전되자마자 보그단 필로프와 페타르 가브로프스키 등 친독 인사들이 줄줄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할 때 성공적으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고 거기서 1959년에 사망했다.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그라프 쉬페호의 일부 크릭스마리네 수병들 - 몬테비데오에서의 자침건 이후 우루과이에 억류된 일부 승조원들이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레고리 로즈만 - 슬로베니아의 사제 출신 나치 부역자로 강제 개종 및 대량 학살에 가담한 책임이 있다. 이후 이른바 '랫라인(Ratline)'으로 통하는 루트를 이용하여 아르헨티나에 몇 번 오가면서 숨었다가 최종적으로는 클리블랜드에 정착하여 거기서 죽었다.
- 한스 울리히 루델 - 위조여권을 이용하여 전후 1948년에 나치들의 도피처였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서 잠깐 살았는데 후안 페론과 금세 친해져 현지에서 나치 전범들의 탈출, 정착을 돕는 "전우협회(Kameradenwerk)"를 설립하고 도피해 온 과거 슈츠슈타펠, 게슈타포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당시 남미 각국 군대의 자문역을 해주며 쌓아올린 나치 잔당, 그리고 당대만 해도 아직 세력이 살아 있던 군대 내부의 독빠들과의 인맥 덕에 나중에는 대전 중 군수기업이었던 서독 기업들의 해외영업을 도와주면서 짭짤한 수입을 챙기기도 했다. 그가 군사 자문으로 전해준 지식은 나중에 포클랜드 전쟁 발발 시 아르헨티나군이 어떻게든 잘 써먹었다.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참모총장이었던 바실로 라미 노소 장군도 그의 연수생 출신이었다. 1953년에는 서독으로 귀국하여 강성 신나치 운동을 벌였다.
- 요한 폰 레르스 - 나치당의 반유대 선전활동가로 유독 친이슬람적인 사상을 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페르 엥달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다가 그의 친이슬람 행보에 관심을 보인 아민 알후세이니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로 이동했다. 이후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 치하에서 반유대 선전을 담당했다. 예나 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재직할 때부터 반유대주의 사상을 거리낌없이 드러내었다. 이집트에 숨은 후에는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오마르 아민으로 바꾸었다. 일본어를 포함하여 5개 국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한다.
6.2. 기타 국가로 도주한 잔당
- 베르너 폰 브라운, 발터 도른베르거(미국) - 남미 외의 케이스에서는 가장 유명한 케이스일 것이다. 정확히는 로켓 기술을 위해 미국이 앞장서서 도피를 도왔다. 폰 브라운은 과학자들을 입막음하려 처형하던 친위대를 피해 동료들을 다 끌고 자발적으로 미군에 항복하러 와서 수월하게 데려갈 수 있었지만 도른베르거의 경우에는 V1, V2 때문에 이를 갈던 영국이 군인 신분인걸 핑계 삼아 전범 재판에 회부해다 웨일스 수용소에 가둬 놓은 것을 어떻게든 데려왔다.
- 헤르미네 브라운슈타이너(미국) - 라펜스브뤼크 강제수용소 및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의 간수 출신으로, 1000여명 이상의 살해 혐의가 있다. 신분을 숨기고 미국인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하여 살려다가 발각되어 서독으로 추방당했고 전후 역사상 첫 번째로 미국에서 추방당한 1호 나치 전범으로 기록되었다.[25]
- 호르스트 슈만(미국, 가나) - 아우슈비츠의 악명 높은 각종 인체실험들을 지도한 의사로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석방되었고 그대로 독일에 거주했으나 1951년 총을 구매하다가 전력이 드러나 영장이 발부되자 그대로 미국으로 도피했다. 한동안 소재가 파악되지 않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 가나에서 활동하던 그의 모습이 "제2의 슈바이처"랍시고 기재되었고 당시 그를 비호하던 콰메 은크루마 정권이 1966년에 무너지자 그대로 서독으로 압송되어 끌려왔다. 법원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지만 6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다. 정작 그는 11년을 더 살고 1983년에 사망했다.
- 야키프 팔리(미국) - 미국에서 추방된 95세의 전범. 우크라이나인 부역자였으며 수용소의 경비병이었다. 이미 2001년에 전력이 드러났지만 자신은 학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후 게슈타포 및 무장친위대 훈련을 받은 사실과 라인하르트 작전 가담이 확인되어 2004년 국적을 박탈당하고 이민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았으나 독일, 우크라이나, 폴란드 모두 그를 환영하지 않아 무국적 상태에 놓였고 추방 절차가 지연되었다. 2018년 퀸스에서 시민들의 야유와 함께 침대에 누운 채로 독일로 추방되었으며 2019년에 사망했다.
- 알지만타스 다일리데(미국) - 리투아니아인 부역자였으며 빌뉴스 게토의 경찰이었다. 1997년 전력이 드러나 국적이 박탈되었으며 이후 리투아니아에서 다시 기소되었지만 너무 늙었다는 이유로 수감되지는 않았다. 2015년에 사망했다.
- 헬무트 오버란더(캐나다) - 아인자츠그루펜 대원이었으며 전력이 드러난 1994년 이후 캐나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그의 국적을 박탈하려고 시도했으나 2021년 국적 박탈 소송 중 고령으로 사망했다.
- 블라디미르 카트류크(캐나다) - 우크라이나인 부역자였으며 156명이 사망한 벨라루스 카틴 학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인해 시몬 비젠탈 센터의 추적 대상이 되었고 캐나다 정부가 그를 기소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실제 처벌은 되지 않은 채 2015년에 사망했다. 본인은 생전에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 알로이스 브루너(시리아[26]) - 시몬 비젠탈의 생전 마지막 추적 대상으로 유명하며 전후 시리아 정보기관에서 일했다. 모사드에서 1961년, 1980년 두 번에 걸쳐 우편폭탄으로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경상만 입고 살아남아[27] 추적자들을 조롱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간 큰 행위까지 벌였다. 이후 프랑스, 독일 정부는 브루너의 송환을 요청했으나 시리아에서는 무시한 끝에 현재까지도 생사가 묘연하다. 시리아 정부는 아직까지도 브루너가 자국 내부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 아리베르트 하임(이집트) -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의사였으며 수많은 각종 인체실험들을 자행했다. 전후 미군에 잠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으나 1961년부터 서독 정부가 전범들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영장이 내려온 즉시 프랑스와 스페인, 모로코를 거쳐 이집트로 도주했다. 이후엔 가족 외에 모든 연락을 끊고 심지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아랍식인 '탈리크 후세인 파리드'로 개명하는 등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살았지만 대놓고 사람들을 도발한 알로이스 브루너나 꾸준한 네오나치 활동으로 어그로를 끌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와는 달리 절대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다. 평소에도 호텔에 박혀 살면서 가끔씩 동네 밖을 산책하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 탓인지 모사드가 2009년까지 정말 기를 쓰고 추적해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기사를 통해 그가 1992년에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 오토 스코르체니(스페인국) - 연합국에서 자신을 정보원으로 쓴다는 소식에 수용소를 탈출해서 잠시 스페인으로 도피했다가 아예 정착해 오데사를 설립해 전범들의 도피를 지원했다. 뉘른베르크 국제형사재판에서 떳떳하게 전쟁범죄 무죄 판결을 받았기에 훗날 모사드 요원들을 만났음에도 당당했고, 천수를 누리고 갔다. 나중에는 모사드와 협력하여 해외, 특히 이집트 등 아랍 국가로 도피하여 군사/과학 서비스를 제공하던 과거 동료들을 암살/납치하는 데에도 관여했다.
- 요아힘 파이퍼(프랑스) - 형기를 마치고 1956년에 SS 동료들의 도움으로 포르셰의 직원이 되었지만 어쨌든 전범이었기 때문에 기피 대상이었고 1960년대에 서독의 전범 추적이 거세지고 실제로 보베 학살 혐의로 재판에 고발까지 당하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형을 피한 후 겁도 없이 한때 침략했던 국가로 도피해 신분을 감추고 번역가로써 숨어 살았다.[28]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뤼마니테의 폭로로 정체가 발각되었다.[29] 1976년 살인 예고를 받았는데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화염병이 날아와 진짜로 자택에서 살해당했다.[30] 이 일로 기소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여론도 냉담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실상 책임을 묻지 않아 수사는 흐지부지 끝났다.
- 스테판 반데라(서독) -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의 지도자이자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지역의 폴란드인 및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다. 주 무대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등지였던지라 전후 자신의 범행과 접점이 없던 서독으로 망명한 케이스다. 전후에도 네오나치들과 잔존 세력이 남아 있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분파들의 지원으로 우크라이나 독립 운동을 계속 하다가 KGB에 추적당해서 죽었다.
- 쇠렌 캄(서독) - 덴마크인 무장친위대원으로, 나치 점령 시기 덴마크에서 언론인 탄압 및 카를 헨리크 클레멘센(Karl Henrik Clemmensen) 암살에 관여한 혐의가 있다. 전후 독일에서 독일인인 척하면서 살고 있었으나 1968년 살인 혐의로 기소되고 나서부터 오랜 법정공방에 돌입했다. 클레멘센의 후손들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까지 그의 살인 혐의를 입증하고자 노력했으나 여러 국제적 및 법적 문제가 얽히면서 덴마크 송환이 불발되어 결국 독일 땅에서 편히 눈을 감았다.
- 마리오 로아타(스페인국) - 이탈리아 왕국 육군 참모총장. 유고슬라비아 침공 당시 슬로베니아인 학살을 명령했다. 1943년 해임되었으며 1944년 학살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재판을 위해 수감 중이었을 때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1966년 조국으로 돌아왔고 1968년 사망했다.
- 체림 수브조코프(미국) - 체르케스인 경찰이자 무장친위대원으로, 무장친위대 북캅카스 군단 소속으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학살에 관여한 바가 있는데 CIA에 해당 사실을 시인하는 대신 숨어 살다가 SS 부역 사실이 대대적으로 알려졌고 1985년 9월 6일 집에 파이프 폭탄이 투척되어 그대로 즉사했다.
- 빅토르스 아라이스(서독) - 라트비아 부역자로, 악명높은 아라이스 의용대(Arajs Kommando)의 지도자였다. 아라이스와 그의 의용대는 전쟁 동안 26000명을 죽였는데 라트비아 리가 게토에서 럼불라 숲 학살에 가담했고 라트비아 유대인의 절반을 죽인 혐의가 있으며 유대인을 직접 강간하기도 했다. 전후에는 영국 포로수용소에 잠시 들어가 있었다가 독일인인 척하면서 함부르크 인쇄회사에서 일했다. 그러던 1979년 함부르크 법원에 기소당해 집단학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88년 옥사했다.
- 칼 린나스(미국) -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로, 타르투 수용소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혐의가 있다. 결국 해당 혐의가 발각되어 같은 부역자 표도르 페도렌코와 함께 1987년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사형 선고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추방된 지 3달도 안 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 표도르 페도렌코(미국) -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로,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에서 근무했다. 우크라이나인 소련군 패잔병(Trawniki) 출신으로 전향해서 트레블링카에 배치되었는데 트레블링카에서 처형인 임무를 맡았다가 전후 서독을 거쳐서 미국으로 탈출했다. 1987년 혐의가 발각되어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소련으로 송환되어 그대로 처형당했다.
- 알렉산데르 라크(캐나다) - 에스토니아인 부역자로, 에스토니아 예갈라 강제수용소(Jägala concentration camp)의 책임자였다. 예갈라 수용소에서 약 10000여 명을 죽인 혐의가 있으며 수용자들과 집단난교를 하기도 했다. 전후 캐나다 위니펙으로 도피했지만 예전 동료들이 속속들이 체포되던 것을 보고 1960년 차고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모사드에 의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 미콜라 레베드(미국) - 우크라이나의 반데라주의자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과 우크라이나 국가정부에 참여해서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을 주도했다. 이후에는 나치와도 갈등을 빚다가[3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반소 작전을 도왔다. 미국은 그를 중요 인물로 판단하여 우선 포섭 대상으로 삼았으며 미국으로 도피해서 1990년대에 죽을 때까지 뉴욕 퀸즈에 거주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 문서를 참조해도 좋다.
- 이반 코노노프(호주) - 적군 출신 카자크 군인으로, 볼셰비키들에게 탄압받은 과거를 숨기고 소련군에서 활동하다가 전향해서 제15SS카자크기병군단에서 활동했다. 전후 소련의 압송을 피해서 호주로 도주했고 1967년 사망했다.
- 차타리 라슬로(캐나다) - 헝가리 왕국의 경찰이었다. 현재는 슬로바키아에 위치한 코시체(Košice)에서 경찰로 근무했으며 15,700여명의 헝가리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추방하거나 강제수용소의 여성 수용자들을 채찍으로 내리치고 맨손으로 땅을 파게 하는 등의 가혹행위를 가하거나 도시 거주민들을 폭행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법정에 의해 기소되어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듬해인 1949년에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가장해 캐나다로 도피하였다. 1955년 캐나다 시민권을 발급받았고 몬트리올에서 미술품 거래상으로 살아갔으나 1997년 시민권에 대한 문제점이 발각되어 시민권이 취소되었다. 다만 전범으로 기소되진 않았고 헝가리로 다시 돌아가 부다페스트에서 조용히 사는 듯 했으나 그의 나치 부역 행각이 궐석재판으로부터 무려 63년 만인 2011년 9월에 시몬 비젠탈 센터에 의해 발각된 후 헝가리 법원에서 조사를 거치고 재판을 받았다. 재판은 1948년 그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기각되었고 2013년 8월 10일에 병원에서 폐렴으로 향년 9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 아르투르스 실가일리스(캐나다) - 라트비아 출신의 무장친위대 상급대령으로, 2차 대전 종전 후 체포되었다가 탈주한 후 1953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1997년에 토론토에서 향년 10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오토 에른스트 레머(이집트, 스페인국) -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을 이끌다가 정당이 불법 판정을 받고 해산당한 후 이집트로 도피하여 나세르 밑에서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1980년대에 다시 독일로 돌아와 또 네오 나치 활동을 했고 자신의 행동 및 유대인 탄압, 전쟁범죄를 정당화하는 잡지를 발간하다가 다시 법망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결국 또 스페인으로 도피했는데 1997년에 거기서 사망했다.
-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서독) - 라트비아 국방장관으로 라트비아의 유대인 학살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전후에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후 서독에서 살다가 195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 볘코슬라프 루브리치(스페인국) -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초대 소장으로, 스페인에서의 도피 생활 중 UDBA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살해를 당했다. 남미로 도주한 다른 전범인 나다 루브리치와는 이복남매 관계다.
- 클라스 카렐 파버(서독) - 네덜란드인 부역자로 같은 부역자인 헹크 펠드메이어르 아래의 펠드메이어르 존더코만도 처형대(Sonderkommando Feldmeijer execution squad)에서 일하면서 최소 22명의 반나치 인사 및 유대인을 직접 살해한 혐의가 있다. 전후 1947년 유죄 판결을 받아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자 독일로 도주하여 시민권을 얻고 잉골슈타트에 정착하여 아우디에서 일했다. 네덜란드는 꾸준히 그의 송환을 독일에 요청했지만 독일 정부는 계속 거부하였다. 2009년 시몬 비젠탈 센터의 가장 중요한 전범 추적 목록에 올랐다. 이후 이스라엘이 네덜란드를 지지하고 나섰고 네덜란드가 그에 대해 유럽 체포 영장을 발부하면서 독일에게 압력을 가하자 결국 2012년 독일 법무부는 잉골슈타트 사법부에 전범에 대한 종신형을 집행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는 2012년에 형이 집행되기도 전에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네덜란드 시민들은 당시 독일 대통령이었던 요아힘 가우크의 방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라는 마을은 가우크의 방란에 항의해 마을 이름을 잠시 '가우크 말고 파버(Gauck nicht, Faber wohl)'로 개칭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본국 송환을 막기 위해 구드룬 부르비츠가 그를 돕기도 했다.
- 발레리안 트리파(미국) - 전직 철위대 대원으로 당시 철위대장이던 호리아 시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권력투쟁에서 철위대를 전부 쫓아내려던 이온 안토네스쿠를 실각시키기 위해 시마의 편을 들어 대규모 반유대 폭동을 선동했다가 실패하고 독일로 도망쳤다. 하지만 안토네스쿠의 요청으로 독일에 의해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지만 독일은 안토네스쿠와 철위대가 서로 화해하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사실상 독일에게 보호받으며 편히 지냈다. 전후 이탈리아 신학교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이탈리아 고위 가톨릭 성직자들의 도움으로[32] 반나치 운동을 한 실향민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미국으로 도주해서 루마니아 정교회 미국 및 캐나다 지부에서 대주교까지 올랐지만 훗날 신분이 들통나고 스캔들의 중심이 되자 미국 국적을 자진 포기하고 포르투갈로 도피한 후 사망했다.
- 아민 알후세이니(레바논) - 한트샤르를 조직하여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후 프랑스군에게 잠시 잡혔지만 유고슬라비아와 영국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에서는 그를 그냥 풀어 줬다. 이후 레바논으로 도피하여 평생을 거주했다.
- 이반 데먀뉴크(미국) -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로 소련군 패잔병 출신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경비원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공포의 이반'으로도 유명하다. 이스라엘에 의해 수용소에서 온갖 가혹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고발된 후 이스라엘, 독일 등 해외를 돌며 재판을 받고 있었고 형이 확정되기 전인 2012년에 사망하여 공식적으로는 무죄다. 그가 정말로 피해자들의 기억 속 '공포의 이반'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지만 그가 수용소에서 근무한 것 자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마르셀 데아(이탈리아) - 사회당 소속이었지만 우경화되었다. 프랑스가 항복한 직후 비시 프랑스 정부에 있었다가 비시 정부마저 너무 온건하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정청으로 넘어가 계속 독일에 부역했다. 전후에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에 숨어 있었다.
- 쿠르트 블로메(미국) - 독일의 과학자로 수용자를 상대로 신경 가스와 살충제 및 실험을 하거나 일본 제국의 731 부대와 협력하여 세균전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인하여 1947년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석방되었으며 다시는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다가 슬그머니 귀국하여 1969년 도르트문트에서 사망했다.
- 헤르만 베커(미국) - 나치 독일 시대에 항공 의학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지만 그도 생체실험을 하였는데 소금물, 즉 바닷물을 실험자들에게 투입하여 사망하게 만들었다. 바다에서 긴급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바닷물을 마시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를 확인한다는 실험에 참가했다. 미국은 그의 항공 의학 능력을 인정하여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으로 빼돌렸고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61년에 생을 마감했다.
- 콘라트 섀퍼(미국) -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바닷물을 이용한 생체실험을 한 의사. 그러나 그의 항공 의학 능력을 높이 산 미국은 그를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도록 한 후 그를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빼돌렸고 미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엘프리데 린켈[33](미국) - 1944년 6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34]에서 근무한 여성 경비병으로, 개 조련사로써 군견을 이용해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학대했다고 한다.[35][36] 전후 미국으로 도피해 1959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후 1962년경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남성 프레드 린켈(Fred Rinkel)과 결혼했고[37] 남편이 죽은 직후인 2004년 그녀의 행각이 발각되어 2년 후 미국 법무부 특별수사국이 제기한 나치 후원의 박해 행위에 가담한 외국인을 추방하도록 요구하는 연방법에 의해 기소된 후 추방당한 후 소송에 휩싸였으나 초기 범죄 의혹이 누락되어 소송에 취하된 후 친척들과 함께 독일의 농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리아 빌리히의 요양원에서 2018년 7월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전후 무려 73년간 처벌을 받지 않은 셈이다. 참고로 그녀는 악행이 발각되기 전 유대인 기관에 돈을 기부한 적도 있으며 사망한 남편 옆에 묻힐 유대인 공동묘지에 이중 무덤을 만들 것을 지시한 적도 있다고 한다. 참고자료
- 예프 판 더 빌(서독) - 플랑드르 민족주의 단체 겸 나치 부역 단체인 더플라흐의 지도자였다. 전후 독일 군복을 입고 붙잡혀 안트베르펀 법원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변경되었고 감옥살이 17년째에 석방되었다. 서독에 정착해 사는 듯 하다가 1970년대에 다시 벨기에로 돌아와 1979년 브뤼허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도주한 수많은 나치 전범 및 부역자들이 시몬 비젠탈 센터에 쫓기고 있다.
7. 대중문화
- 라스트 바탈리온
김형배 화백의 1984년 연재 만화로, "히틀러와 UFO"라는 일본 3류 저널리스트 '오치아이 노부히코'의 음모론 서적을 기초로 작화했다.[38] 이 만화에서 히틀러의 UFO 기지는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 펑크 록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후기 곡 'No one is innocent'에는 "God save Martin Borrman, and Nazis on the run"이라는 가사가 존재한다. 이 곡 자체가 섹스 피스톨즈 해산 후 제작된 세미 다큐멘터리 그레이트 록앤롤 스윈들에 삽입된 곡인데 영화 상에서 보컬 쟈니 로튼이 탈퇴하고 시드 비셔스가 이탈한 뒤 나머지 멤버 두 명이서 브라질로 날아가서 리우데자네이루에 은거하고 있는 열차 강도 로널드 빅스를 보컬로, 마르틴 보르만[39]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해서 새로운 섹스 피스톨즈를 만든다는 엉터리 내용이다.
OMG영화클립
-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2차 세계대전 종전을 맞이한 매그니토가 복수를 위해 전 나치당 소속인 세바스찬 쇼를 찾아갔던 곳이 아르헨티나였다.
- 시트콤 오피스의 메인 빌런(?) 드와이트는 할아버지가 아르헨티나에 숨어 사신단다. 슈츠슈타펠이었다는 설정이 있는데 워낙 돌아이 캐릭터라 시트콤 치고는 의외의 설정인 듯하다. 거기에다 마이클은 대놓고 '너네 할매 나치였다며'라고 갈군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단편집에 수록된 '솔저 블루'에는 마르틴 보르만[40]이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후 네오나치를 이끌고 세계 분쟁의 흑막으로 알게 모르게 손 대고 있다는 설정이 있다.
- 만화 헬싱에서는 나치의 남미 도주에 바티칸이 협력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남미로 도피해서 세력을 키운 나치 잔당들이 바로 최후의 대대 라스트 바탈리온이다.
- 마블 코믹스의 캡틴 아메리카에서도 제모 남작이 전후 남미로 도주해서 한동안 조용히 은거하고 있었으나 캡틴 아메리카가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스터스 오브 이블'이라는 빌런 조직을 결성하여 캡틴 아메리카와 어벤저스랑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바위에 압사당했다.
- 헬보이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나치 과학자 중 하나인 헤르만 폰 클렘프트가 이곳으로 도망쳐서 새로운 제3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클렘프트가 나치 잔당에게도 미친 놈 취급 받은 것은 함정
- 영화 오명은 브라질 리우로 도망간 나치 잔당들을 추적하는 스파이 영화다. 이 영화에서 잔당들은 무려 우라늄을 몰래 빼돌린다고 나오지만... 이 사실이 밝혀진 후 빠르게 맥거핀화... 감독이 감독인 데다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로맨스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 심슨 가족에서는 히틀러가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바트가 남반구에 변기물이 어떤 방향으로 도는지 궁금해서 아무데나 전화를 걸다가 스쳐지나가는 장면으로 나온다.
- 심슨 가족 시즌 25 에피소드 16에서 독일과 브라질이 축구 결승전을 하는 장면에서는 한 브라질인이 독일인에게 “나치 놈들!” 이라고 야유하자 독일인은 그 브라질인에게 “나치 숨겨주는 놈들!” 이라고 야유한다. 둘 다 맞는 말 하고 있으니까 싸우지 말라고 중재해 주는 뒷 자리 관중은 덤.클립
-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주요 무대가 되는 코르토 말테제는 남미 지역의 외딴 섬 국가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망친 나치 잔당들이 세운 거대한 연구시설인 요툰하임이 세워져 있다.
8. 관련 문서
[1] 아버지가 나치 독일군 장교로 활동했던 만큼 반이민 정책을 주 골자로 정치공세를 펼쳐 극우 세력의 지지를 유도했다.[2] 정말 적극적으로 싸운 곳은 잠수함에 지상군까지 파견한 브라질밖에 없다. 나머지는 일부 국가가 참전을 선언하거나 파견하기는 했으나 생색내기 수준이었고 거의 다 1943년 이후에 참전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1945년 전황이 회복 불가능해지자 어쩔 수 없이 연합군에 줄서기한 수준이다.[3] 아이러니하게도 후안 페론 본인은 백인과 아르헨티나 원주민 테우엘체 족의 혼혈인(1/4 원주민, 3/4 백인)이었기 때문에 집권하는 동안 아르헨티나 원주민들의 권익 향상에 신경을 쓴 인물이었다. 사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지도자였던 제툴리우 바르가스나 후안 페론이나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똑같았기는 했지만 다른 사상도 같이 짬뽕되었던 덕택에 인종차별 색채가 옅어졌고 결과적으로 중도화되었다. 후안 페론 개인은 반유대주의 성향이 없어서 이스라엘과도 수교했고 장관들 중에도 유대계 이민자 출신이 있었다.[4] 이 사람은 아예 독일계다. 또한 이 사람 역시 대통령 권력을 휘두르며 아동 성범죄와 같은 중범죄를 여럿 저질렀다.[5] 물론 가명을 이용해 활동하던 탓에 가능한 일이었고, 유럽에서부터 그를 찾아 쫓아온 전직 체트니크 대원에게 암살 시도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본래 신분이 만천하에 들통나자 1955년 있었던 쿠데타로 이미 페론을 쫓아내버린 로나르디와 아람부루의 군부 정권은 끝발이 다 떨어진 그를 유고슬라비아에 도로 넘기려고 했다. 파벨리치는 이를 눈치채고 병원을 뛰쳐나와 칠레를 거쳐 스페인으로 도망가 두 번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지 못했다.[6] 체 게바라의 여행담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도 독일계 아르헨티나인들이 가끔씩 나온다. 가브리엘 에인세라는 아르헨티나 축구선수도 독일 이민자의 후손이다.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의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는 아버지가 독일계 스위스인 이민자의 후손이다. 안데스 산맥 건너편인 칠레의 상황도 비슷하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모두 스페인어의 발음이나 어휘 등에 과거부터 유입된 독일계 수도사 및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독일어 흔적이 알게 모르게 남아 있다. 박주호의 아내 안나도 스위스 사람이지만 출생지는 아르헨티나라서 독일어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를 쓴다.[7]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매우 오랫동안 백인 우월주의가 강한 나라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국토를 넓히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남부 지역의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고 그들의 시체를 박물관에 전시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에 정착하여 국적을 얻은 중국계 이민자가 아르헨티나 배구 대표팀에 들어가고 싶다고 신청을 했는데, 백인이 아닌 아르헨티나인은 아르헨티나 국적이 있어도 국가 대표팀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거절당한 일도 있었다.[8] 이는 이웃나라 포르투갈의 독재자인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도 마찬가지였지만 살라자르는 프랑코만큼 대놓고 많은 수의 나치 전범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9] 그래도 무기 금수와 국제 대회 출전 금지, 민항기 비행 거부를 당하면서도 핵무기를 개발하면서까지 세계를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어떻게든 유지하려 들었던 남아공과는 반대로 스페인은 냉전의 심화를 이용해 자국을 반공의 기수로 포장하여 어떻게든 서방 세계로 복귀하겠다는 프랑코의 몸부림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서방 한정으로 다시 관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코는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6.25 전쟁에 참전의사를 보내기도 했다.[10] 소련과 독일이 서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소련-일본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업 시설을 통째로 뜯어다가 소련으로 이송하기도 했다.[11] 물론 그와 별개로 브라질 군사정권이 통치 방식에 있어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건 사실이다.[12] 실제로 브라질과 일본을 오가는 수요가 상당히 많아서 일본항공은 2010년 파산 선언하기 직전까지 도쿄 출발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을 경유해서 상파울루까지 항공편을 띄웠을 정도였다. 다만 일본에서 브라질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도쿄가 아니라 시즈오카현의 하마마츠시다. 브라질 총영사관도 여기에 있으며 지역에서 포르투갈어는 한국어나 중국어보다도 높은 중요도를 갖고 있다.[13] 이런 지역들은 대부분 전범이 아니라 이마무라 히토시처럼 기본적으로 민생을 신경썼던 이들이 책임자였거나 일찍이 이 지역에 영향력이 있던 독일 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곳들이었다.[14] 오노다 히로오는 생환 후 일본의 정신이 썩었다면서 브라질에서 생활하다 말년에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죽기 전까지 자신의 범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으며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을 예방할 때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15] 라이베리아도 내전이 너무 오래 이어진 나머지 각 집마다 손목이 잘린 형과 강간당한 여동생, 그리고 마약 먹고 포로를 학살한 동생이 있는 등 전쟁범죄의 여파가 너무 만연해져서 누가 누구를 처벌할 처지가 되지 않는다. 찰스 테일러와 같이 너무 눈에 띈 이들이나 몇 명 헤이그 재판소로 끌려간 것 외에 프린스 존슨과 같은 다른 핵심 전범들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16] 카라지치는 베오그라드에서, 믈라디치는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체포되었다.[17]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영장을 발부했을 때 확정된 인원만 따져도 어린아이 800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다.[18] 나치 추적자들에게는 애석하게도 정작 라우프는 에콰도르에 있던 시절 수 차례 모사드와 접촉해서 협력했다는 기록이 CIA 문서에 남아 있다. 링크1, 링크2 처음에는 단순히 시리아 정보기관 시절 정보들을 팔아넘겨 생존을 보장받는 정도였다면 이후에는 아예 중동 국가들에 그를 은밀히 투입시켜 고정 스파이로 써먹으려는 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19] 성 비오 10세회 문서 참고.[20] 프리프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 남부 관광명소인 바릴로체로 도망쳐 40년 이상 호텔 지배인으로 살다가 1995년 이탈리아로 송환돼서 재판을 받았다.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인류의 존엄에 대한 모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21] UDBA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고 당시 루부리치와 갈등을 빚던 우스타샤 대부 안테 파벨리치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있다.[22] 탄흔이 몸 이곳 저곳에 남아 있었고 두개골이 으깨져 있었다.[23] 흔히 로마 진군 하면 나오는 이 사진에서 무솔리니 바로 옆에 서 있는 대머리에 콧수염 달린 사람이 바로 데 베치다.[24] 당시 데 베치 휘하의 이탈리아 왕국군 병력은 이에 불복하여 피옴비노에 상륙하던 독일 국방군 병력을 상대로 용맹하게 응전해서 100명 이상 사상자를 내고 200명 가량을 포로로 잡았다. 그럼에도 데 베치는 그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고 국방군 측에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할 것을 명했다.[25] 전쟁 전에는 프리츠 쿤이나 카와키타 토모야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나치 및 일제 관련 반역자들이 종종 추방당하기도 했다.[26] 쿠르트 발트하임이 사망했을 때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로 화환을 보냈던 국가 중 하나다.[27] 손가락 몇 개를 잃고 애꾸눈이 되었다.[28] 이는 프랑스에 파이퍼의 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29] 프랑스로 도망간 주제에 프랑스어 억양도 안 고치고 살고 있어 그 어눌한 발음 때문에 들통났다고 한다.[30] 화재 발생 전에 다수의 공격으로 신체가 훼손된 흔적이 있었는데 살해 후 화재로 위장하려고 한 것이다.[31] 게슈타포가 현상금을 걸었다.[32] 이때 다하우 수용소에 갇힌 경력을 이용하였다.[33] 본명은 엘프리데 후트(Elfriede Lina Huth, 1922~2018).[34] 나치 최대의 여성 강제 수용소로, 여성과 어린이 132,000명이 수감되었다.[35] 한 수감자는 여성 간수들이 남성 간수들보다 더 군견을 잔인하게 다뤘다고 언급했을 정도였다.[36] 물론 린켈은 본인은 나치 당원도 아니었고 단지 보수가 수용소의 다른 경비원보다 많아서 개 조련사로 일했을 뿐이며 자신이 개를 죄수들을 향한 무기로 쓰지도 않았고 항상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주장했다.[37] 그 남성은 죽을 때까지 아내의 실체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38] 오치아이의 음모론들은 알게 모르게 한국의 UFO/음모론자 빅텐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한국 출판업계 특성상 미스테리 서적도 일본 서적의 해적판 형식으로 나오는 책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나온 한국의 그쪽 계열 모 서적(내용 자체는 환뽕이 치사량에 달했다)에서조차 일본식 표현(유대 자본 배후를 유다야 신디케이트라고 표현했다. 일본어에서 유대인을 지칭할 때 ユダヤ라고 한다)이 간혹 보일 정도면....[39] 설정상 남미에 숨어 있는 것으로 나온다.[40] 당시(1981년)만 해도 마르틴 보르만은 전후 행적이 묘연했다.[41] 유대계 살인청부업자가 그를 죽이고 대신 폭약 운반에 동참한다.[42] 쌍제이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치 잔당들이 아르헨티나에서 재기에 성공했다면'을 가정한 것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