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18 19:43:10

독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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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분류
2.1. 밀덕, 역덕 독빠
2.1.1. 독일 제국 / 제1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2.1.1.1. 배후중상설 신봉2.1.1.2. 프랑스군 비하2.1.1.3. 독일 제국의 침략성 미화2.1.1.4. 벨기에 학살 옹호2.1.1.5. 동맹국 비하2.1.1.6. 독일 제국군 과대평가
2.1.2.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2.1.2.1. 편파성
2.1.2.1.1. 독일 기술 과대평가2.1.2.1.2. 전차에 대한 환상2.1.2.1.3. 군조직 과대평가2.1.2.1.4. 전투력 과대평가
2.1.2.2. 전쟁범죄 왜곡
2.1.2.2.1. 소련군과의 비교2.1.2.2.2. 다른 열강과의 비교2.1.2.2.3. 연합군의 전략 폭격 비난2.1.2.2.4. 일본 제국과의 비교2.1.2.2.5. 현 이스라엘과의 비교
2.1.2.3. 독일 내 집단의 무오설
2.1.2.3.1. 면죄부 및 미화2.1.2.3.2. 국방군 무오설2.1.2.3.3. 나치 부역기업 문제2.1.2.3.4. 오스트리아에 대한 책임 전가
2.1.2.4. 음역과 직역 고집2.1.2.5. 대체역사에 대한 가정2.1.2.6. 총론
2.1.3. 현대 밀리터리 독빠
2.2. 정치 독빠2.3. 기술 독빠2.4. 스포츠 독빠2.5. 문화 독빠
2.5.1. 판타지 독빠
2.6. 학문 독빠2.7. 역사 독빠
3. 특징4. 각국의 독빠
4.1. 일본의 독빠4.2. 미국의 독빠
5. 독빠인 캐릭터6. 여담

1. 개요

Germanophile. 독일+. 독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시아로 한정한다면 와패니즈의 동양 버전으로, 여러모로 상당히 대칭적이다. 특히 한때 벤치마킹의 대상이었고 2차 대전에서는 같은 추축국이었다는 걸 의식해서인지 일본 쪽 미디어에서 독빠적 기질을 보이는 경우가 꽤 많이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본 문화 덕후들이 독빠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와패니즈에도 순수하게 일본문화을 좋아하는 양성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병크나 군국주의까지 옹호하는 악성이 있는데, 독빠도 이런 양성과 악성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읽기 전에: 본 문서를 편집할 시 다른 문서나 다른 사이트에서의 서술에 대한 박제성 언급, 지나친 감정적 서술을 지양해 주기 바란다.

2. 분류

2.1. 밀덕, 역덕 독빠

영어로는 Wehraboo(베어부)라고 한다. Weeaboo(일빠)+Wehrmacht(독일 국방군). 밀리터리 덕후로서 독일을 좋아하는 부류. 이쪽이 다수인데 국내에서는 이쪽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이들이 다수인 이유는 국내의 자료 대부분이 일본을 거친 번역본(외서 → 일본어 → 한국어)이거나 일본발인 경우가 많아서 독빠 성향이 강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1]

미빠나 러빠(정확히는 소뽕)들과 의견 대립이 일어나기도 한다. 영빠와 프빠와도 대립하지만 일단 미빠나 러빠에 비하면 소수라(특히 프빠) 주목받지는 못하는 편.

물론 아래에 서술할 문제점들은 객관적인 눈으로 독일군과 기갑 장비를 바라보거나, 나치에 대한 찬양 없이 그저 군복과 장비의 외관을 보거나 그냥 악의 세력인 게 좋아서 등의 이유로 좋아하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넓게 본다면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의 팬들이나 강철의 왈츠에서의 독일계 전차소녀, 벽람항로의 독일계 함희, 소녀전선의 독일계 총기 전술인형 등을 좋아하는 사람도 해당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순수 밀덕(?)과는 구분되는 편이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밀덕을 겸임하는 경우도 있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월드 오브 탱크의 영향으로 국내 수많은 독뽕 유저들에게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독일 트리의 경우 독일 전차 특유의 수직장갑 때문에 고통받은 수많은 독뽕 한국인 유저들이 현실을 깨닫고 소련으로 갈아타거나 그나마 탈만한 미국이나 프랑스로 갈아타는 추세이다.

그런데 워 썬더의 상황은 정 반대이다. 거기는 아예 운영진부터가 독빠 의혹이 있을 정도로 대전기만큼은 순수 지상장비만큼은 독일이 매우 강력한 편이다. 게다가 독빠 유저들에게 완벽하게 장악되었던 포럼은 이미 독일이 최강인 상황에서도 독일에 새 장비를 달라거나 버프시켜달라는 말만 나왔었고, 오죽하면 유저들은 포럼을 "퓌럼(퓌러+포럼)" 이라고 부르면서 비웃고 조리돌림할 정도였으나, 현재는 현대전기는 독장연이라는 밈이 있을 정도로 상황이 많이 안 좋아졌다.

독빠들은 수많은 밀리터리 게임에서 취급이 좋지는 않은 편이다. 머릿수와 활동력을 앞세워 포럼을 장악하여 여론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저 피드백을 받는 제작사가 고증과 밸런스를 오판하여 잘못된 패치를 하게 하기도 한다.

2.1.1. 독일 제국 / 제1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2차 세계대전의 국방군 빠들에 비하면 수가 적긴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제2제국 빠도 엄연히 존재한다. 오히려 요즘은 국방군&무장친위대빠나 연방군빠들보다도 더 기승을 부린다. 다만 밀덕, 특히 한국의 밀덕들 대다수가 워낙 1차대전엔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것일 뿐.

요새는 배틀필드 1 등 1차 대전 시대 독일군과 독일 제국이 등장한 게임들이 나와서 이들의 머릿수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1차대전 독빠들은 2차대전의 독빠짓을 하다가 그 뿌리가 되는 독일 제국군까지도 숭상하게 된 부류가 대부분이고 오직 1차대전의 독일만 좋아하고 나치 정권 시절의 독일은 부끄럽다고 하거나 혹은 역겹다고 하는 부류는 극소수이다. 반면 독일 2차대전 고위직, 즉 히틀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치 독일 수뇌부나 독일 원수나 장성들은 1차대전에 참전했고, 독일 제국군의 법통은 독일 국방군으로 바로 이어지기에, 2차대전의 독일 국방군을 찬양하던 독빠들이 1차대전의 독일 제국군까지도 찬양하는 경우가 많다.

나치 독일을 찬양하는 것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금기시되는 데 비해, 독일 제국이나 독일 제국군에 대한 찬양이나 옹호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며 나치 독일 내에서도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에 대한 호평가는 어느 정도 용인된다. 어쨌든 노구교 사건폴란드 침공을 시작한 추축국이 직접적인 개전 당사자인 제2차 세계 대전에 비해 협상국동맹국의 관계는 선악을 나누기 애매한 측면[2]이 있고, 1차 대전 자체가 독일이 일으킨 전쟁도 아닐 뿐더러, 독일 제국 역시 다른 연합국인 러시아 제국보다는 삶의 질이나 인권 측면에서 훨씬 발전된 국가였으며, 유대인도 충성심만 있다면 독일 제국에서 받아들여졌을 정도로 인종 문제에서도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는 재학 중 귀국해 1차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독일 유학생들은 적어도 자국의 전몰 학생들과 비슷한 대우를 해준다.[3] 물론 1차대전의 독일 제국 역시 군국주의-전체주의적인 국가였으며 전쟁 범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4][5], 사상적인 관점에서 독일 제국을 옹호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사실 이 타 서유럽이나 미국[6], 러시아도 해당되는 바라 그렇게 문제시되진 않는다.
2.1.1.1. 배후중상설 신봉
2차대전 국방군빠들과 마찬가지로, 1차대전 제국군빠들도 협상국(연합국)의 승리는 기적이다!이라거나 배후중상설을 굳게 믿고 독일은 1차대전에서 패한 게 아니라 연합국들과 동등한 관계의 휴전을 맺은 것에 불과하다. 라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독일 제국은 군사적으로 패배한 적이 없고 오로지 내부의 적. 즉, 독일 혁명으로 인해 스스로 무너진 것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한다. 그럼 백일 공세는? 우습게도, 이런 독일은 지지 않았다는 착각(특히 배후중상설)은 2차 세계대전 직전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의 프로파간다를 단순히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일단 동부전선만 놓고 보면 독일 제국이 승리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제정 러시아는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브루실로프 공세를 제외하면 별다른 큰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고, 초반부터 텐넨베르크 전투로 크게 한 번 밀리고 이후로도 나로치 호수 공세케렌스키 공세 같은 삽질만 반복하다 결국 혁명으로 왕조가 붕괴되고 이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라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고 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하였다.

그러나 주 전장이었던 서부전선을 보자면 독일은 적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보다 열악한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를 공급받았던 데 비해, 독일은 영국 해군에 의하여 해상이 완전히 막혀버렸기에 외부에서 자원을 일체 들여오지 못해 순무의 겨울같은 끔찍한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이었던 독일군의 파리 점령은 루덴도르프 공세의 실패로 사실상 달성 불가능해지고 만다.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은 제2제국같이 외교에서 엄청난 병크를 일으킨다거나 무리한 해상 작전에 실패하여 해양을 봉쇄당하는 등의 잘못을 피하고 광활한 영토와 나름대로 쌓여 있던 외교관계, 식민지 등의 여러 자원들을 이용하여 독일과 비슷한 수준의 물자 및 식량난에까지 몰리지 않았다.

결국엔 영국 해군의 봉쇄를 뚫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서 대양함대는 수상병영 신세가 되어 버리고 본토에 프랑스, 영국, 러시아인들이 오는 것을 막았지만 영향력은 어찌할 수가 없었던 1918년의 상황을 승리로 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2.1.1.2. 프랑스군 비하
밀덕 독빠들의 특징이 항상 독일군의 라이벌인 프랑스군을 비하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프랑스군이 독일에게 호구 노릇을 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프랑스군이 독일 측에 참패한 전쟁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2차 대전 초기 뿐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과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협상국들과 동맹국들이 서로 대등하게 싸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폴레옹 시절 독일어권 지역은 틸지트 조약, 라인 동맹 등으로 프랑스에게 착취를 당했으며 러시아 원정으로 60만 대군을 잃기 전까지 독일어권은 프랑스를 상대로 갑을관계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더 이전인 30년 전쟁에서는 독일을 수백 개의 소국들로 갈가리 찢어 버려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주도하기 이전까지 동네북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프랑스였다.

1차대전에서 독일을 포함한 각국이 참호전에 휘말려들어서 갖은 삽질을 했는데, 밀덕 독빠들은 마치 프랑스만 참호전에서 삽질을 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있다. 애초에 프랑스군만 삽질을 했다면 진작에 독일이 1차대전의 승기를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참호속에서 사이좋게 죽어갔다. 전차가 도입돼서 참호를 돌파할 방법을 찾기 전까지 독일이건 프랑스건 영국이건 철조망과 기관총 사선에 보병들이 돌격해야 했다. 거기에 최초의 전차를 개발한 영국과 최초의 회전포탑을 개발한 프랑스하곤 다르게 성능은 그렇지 않지만 육상전함에 가까운 A7V의 성능을 1차대전의 티거라고 부르면서 장갑을 왜곡하기도 했다.[7]

또한 프랑스의 전략을 가지고 까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는 개전시 알자스-로렌 지방으로 진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역사적으로 독일계 공국들이 다스린 땅이었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프랑스가 뜯어낸 땅이었다. 이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가 다시 뜯어낸 것. 그러나 그 사이 이 땅은 상당 부분 프랑스화 되어 있었고(아일랜드 독립 시 영국으로 남은 북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치욕의 증거품이자 독일에게는 전리품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 당시 프랑스 국민이 느낀 치욕과 복수심을 일부 표현(더 자극하는 역할도 하였다)한 작품으로 마지막 수업이 있다. 그만큼 알자스 로렌 지방은 프랑스인에게 있어 잃어버린 땅이자, 회복해야만 하는 실지였다. 더군다나, 이 지방은 프랑스 석탄 및 철광석 생산량의 반 이상을 담당하는 요충지로서, 공업화의 원동력을 제공해 주는 전략적인 요충지이기도 했다. 프랑스의 이런 사정을 꿰뚫어본 슐리펜은 일부러 알자스-로렌 지방의 방어선을 깊고 느슨한 종심으로 짜고, 주공을 벨기에-네덜란드로 우회기동하여 프랑스군을 와해시킬 계획을 가졌다. 실제로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되었다면 프랑스군이 포위되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재현 또한 가능했기에, 전략적이고 승리지향적이기보다는 근시안적이고 감정적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이러한 프랑스의 행보를 빌미로 까는 것.

일단 “만약 슐리펜 계획이 원안대로 실행됐다면“ 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실제 1차대전의 역사에선 제1차 마른 전투에서 결국 전략적인 승리가 프랑스의 몫으로 돌아갔고 슐리펜 계획의 프랑스 전역 조기종결은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낫질 작전도 엄밀히 따지면 만약 원안대로 실행됐다면 명백히 실패할 확률이 극도록 높은 데다 실패하면 나라가 그대로 끝장나고 독일 수뇌부는 다 목이 날아가는 제정신 아닌 계획이었지만, 실제 역사에선 히틀러의 낫질작전 중단 명령을 무시한 장성들 + 아르덴쪽 주공을 기만작전이라 판단하고 안일히 대응한 연합군 지휘관들 + 서방 연합군이 정신차리고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하기 전 아르덴을 관통하기 위해 메스암페타민까지 들이키며 사흘 동안 잠 한숨 안 자고 진격한 주공 부대들의 시너지가 합쳐진 결과 실패는커녕 초대박을 터트렸고 낫질작전은 나라 말아먹은 한심한 도박중독자의 자폭이 아니라 천재적인 전격전의 전설로 화려하게 포장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군은 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알자스-로렌 지역으로 공세를 가할 계획을 세웠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제17계획은 프랑스군의 동원령이었지, 공세 계획이 아니었다. 1차대전 극초기에 프랑스군이 알자스-로렌으로 공세를 가한 건 순전히 조제프 조프르 개인의 명령 때문이었지, 프랑스군이 그런 계획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제17계획이 공세계획이었다는 이야기는 1920년대에 프랑스 내부의 정쟁 과정에서 일부 정치인들이 프랑스군의 지속적인 공세로 인해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다는 걸 근거삼아 군부에게 책임론을 씌우기 위해 만들어낸 낭설에 불과했다. 조제프 조프르는 언덕과 숲이 많은 지형의 알자스-로렌 지역에 공세를 펼치는 것을 회의적으로 봤고, 1913년 즘엔 이미 독일이 베네룩스로 넘어올 거라는 걸 예측한 상황이었다. 사실 1914년 프랑스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군이 알자스 로렌으로 닥돌하는 계획을 세웠네 뭐네가 아니라 내부에 통일된 교리라는 게 아예 없었다는데 있었다. 당시엔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등으로 민간정치와 정규군 사이에 신뢰가 바닥을 기던 상황이라 아예 정규군을 해체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던 시점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장군들이 개인적으로 정치인들과 연을 쌓고 장교들 가운데서도 본토 근무파와 식민지 근무파가 또 갈리는 등 개판 5분전이었던 상황에서 제대로 된 군사전략이라는 걸 세울 수가 없었다. 총사령관이라는 조제프 조프르라는 사람 자체가 당시 프랑스군의 실태를 잘 보여주는 인물인데, 원래 기술관료를 지망했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반강제로 장교로 임관당하고, 임관 뒤에도 식민지에서 공병장교로 근무하다 정치적인 이유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인물이라 전투 지휘관으로선 검증이 하나도 안 된 인물이었음에도 공화파 장군이라 쿠데타의 위험도 없고 커리어도 나름 훌륭했다는 이유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던 판이니 나머지 장교들은 어땠을지는 이하생략. 자세한 내용은 조제프 조프르/평가, 제17계획 항목 참고. 여담으로, 조제프 조프르는 본인이 알자스-로렌 지역 공세를 회의적으로 봤음에도 프랑스군에 알자스-로렌 지역에 공세를 지시한 이유를 본인이 죽을 때까지 해명하지 않아 영영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또한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을 정신론에만 입각하고 엘랑 비탈에 심취한 군대로, 2차대전 당시 일본군과 비교하며 깐다.

이는 과대한 논리 확장에서 나온 것으로, 정신론을 강조한 프랑스군을 따라 한 일본군의 졸전을 프랑스군에까지 적용시켜 버린 것이다. 실제 1차대전 원수이자 총사령관이었던 페르디낭 포슈의 명언인(어린왕자에도 인용되었다) "전투에 이기는 것은 결코 졌다고 믿지 않는 것이다."의 정신론은, 2차대전에서 일본군이 채용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공통점만으로 프랑스군 전체를 일본군과 같은 레벨로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

프랑스군의 정신론은 전쟁에서 지면 모두가 끝장이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싸워야 한다.의 의미였지, 화력과 무기의 성능이 부족해도 근성과 정신력으로 극복이 가능하다의 의미가 아니었다.

단순 무기체계만 비교해도 프랑스군은 1차대전 협상국 가운데서 가장 자동화기 보급률이 높은 군대였고, 세계 어디에다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장비들의 소유국이었다.

먼저 기본 보병들의 무장부터 보면 르벨 M1886, 베르티에 소총은 독일의 게베어 1898 계열과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는 수준이었다.[8] 괴상한 생김새와 미국 라이센스 버전이 야드파운드법 변환 과정에서 못 써먹을 물건으로 변해버려 필요 이상의 욕을 들어먹던 쇼샤는 26만정 가까이 생산에서 보급한 개인용 자동화기였고 독일의 MG08/15보다 최소 10만정 이상 더 많이 뽑혔다. 더군다나 기존 수랭식 기관총을 주먹구구식으로 개조한 MG08/15와는 달리 처음부터 ”보병이 이동 간 사격이 가능하게끔“ 만들어진 쇼사가 더 사수 친화적이었다. 반자동 소총인 RSC 소총도 1917년형/1918년형을 다 포함하면 8만6천정을 생산해서 보급했고, 당시 독일에 동급의 반자동 화기는 없었다. 물론 독일 역시 MP18을 개발해서 실전에 투입시키긴 했지만, MP18은 소위 말하는 돌격대라는 엘리트 부대에만 집중적으로 보급된 데다 생산량도 3만정 내외였던 걸 생각하면 평균적인 보병의 화력은 프랑스가 더 나은 상황이었다는 뜻이 된다. 또한 현실 참호 소탕전투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인 수류탄은 향후 미국과 소련이 정식으로 면허생산을 하거나 데드카피로 생산했을 정도로 기본 설계가 우수했던 F1 수류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포병쪽으로 가면 프랑스는 아예 포병의 역사를 다시 쓴 수준인데, 모든 현대식 포병 매커니즘의 조상이나 다름없는 1897년식 75mm 야포의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으며,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152mm 야포 표준규격은 러시아 제국이 프랑스에서 152mm M1910 곡사포를 도입하면서 러시아에 자리잡은 규격이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155mm 야포 표준규격 역시 미국이 프랑스에서 슈나이더 M1917C 155mm 곡사포, GPF 155mm 야포를 도입하면서 미국에 자리잡은 규격이었다. 즉 프랑스의 프렌치 75mm나 슈나이더제 야포들은 실제 전쟁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굴러간 포병 체계였기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예 전 세계 단위로 포병의 근본 운영체계를 갈아엎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6400밀 체계가 처음으로 나온 곳 또한 프랑스군의 1911년 포병 교범이었다. 모든 현대식 전차의 진정한 원형이자 전쟁 말기엔 보병 200명 당 한대씩 할당시켜 힌덴부르크 선을 뚫어버리는 데 기여한 르노 FT의 존재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오픈볼트와 공랭식을 채택해 가벼워 기동전에 유리하고 참호전에서 독보적으로 높은 신뢰성을 자랑한 호치키스 기관총 등지의 타 무기들도 얼마든지 전선에서 활약했다.

비록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펴다가 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무리한 공세를 펼친 건 기존 낭설처럼 무슨 똥별들이 무지성 공격정신에만 미쳐서도, 지휘관들이 사람 목숨을 껌값으로 봐서도 아니다. 프랑스가 무리해서라도 지속적인 공세를 펼친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공자는 방자보다 무조건 불리하고 손실이 클 거라는 생각은 게임이나 소설, 영화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지, 현실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적이 방어선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적이 오면 우리는 적을 편하게 갈아엎는다” 라는 말이 얼핏 들으면 달콤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 전쟁에선 적이 무지성으로 단단한 방어선에다 자기 병력들 꼴아박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았다. 방어선에 발이 묶인 채로 냅두고 기동전을 걸어 포위전으로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방어선에 병력을 직접 투입시키기 전에 포탄의 비를 뿌려 방어선에 충분한 데미지를 입힌 뒤 투입시키거나, 둘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군이 방어선 만능주의에 빠져서 공세와 기동에 극도록 소극적으로 나서고 방어선에만 짱박히다 독일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역으로 쌈싸먹힌 아주 교과서적인 사례가 독뽕들이 그토록 프랑스 놀려먹느라 우려먹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프랑스 침공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지휘관이 호루라기를 삑 불면 무지성으로 적 적의 참호로 우와아아아 정면돌격하고 방자는 기다렸다는 듯 편하게 기관총으로 보병을 쓸어담는“ 1차대전 전장의 편견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닌 걸 넘어 막말로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배틀필드 1 같은 역사물을 빙자한 엔터테인먼트 판타지물이 만들어낸 가짜서사에 불과하다.

기관총이라는 물건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었다. 당시 기관총들은 20kg는 우습게 넘어가 기동력도 최악이었고, 총열 가공기술도 지금보다 훨씬 낮아 연발사격은 어지간히 지근거리 사격이 아닌 이상 정확도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두꺼운 공랭식 총열을 채택한 호치키스 기관총 정도를 제외하면 수랭식 재킷에 손상이라도 나거나 냉각수가 떨어지면 곧바로 무력화되는 등 2차대전 이후 물건들보다도 전술적 유연성이 크게 낮고 내구성도 훨씬 연약했던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당시에도 7-8mm 구경대 기관총은 그저 중대/대대급 특정 거점방어용 전술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75mm니 81mm니 105mm니 155mm니 210mm니 400mm니 원래 사람 살던 마을들이나 숲이었던 지역들을 기존 성경에서나 나올 법한 지옥 같은 폐허로 갈아엎고 한방에 수영장급 구덩이를 만들던 중화기들이 판치던 판에 고작 7-8mm 탄 분무기가 전장 판도를 바꾸는 일은 그냥 없었다.

실제론 1914년 10월을 넘어가면 공자측도 보병을 투입시키기 전에 정찰기로 적의 위치를 파악한 뒤 공격준비사격[9], 이동탄막사격[10]등으로 방자에게 포탄화학무기를 잔뜩 뿌려주었고, 이미 1914년부터 공세를 위해 포탄을 너무 뿌려댄 나머지 도저히 포탄 소모량이 감당이 되지 않아 1915년 1월 조제프 조프르가 총사령관 명령으로 이동탄막사격을 일시적으로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1916년쯤 되면 진격 과정에서 보병뿐만 아니라 전투기전차까지 앞세우는 제병합동 전술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1차대전 내내 벌어진 거의 모든 전투에서 방자도 공자 못지않는 병력들이 갈려나갔고 심지어 공자가 작정하고 준비하면 말메종 전투처럼 방자가 일방적으로 3:1로 교환비로 밀리고 3중 방어선을 며칠 만에 뺏기는 일도 벌어졌다.

두 번째는 정치외교적인 이유였다.

먼저 프랑스 제3공화국은 인구가 4000만 남짓한 국가였고 독일 제국은 6800만에 가까운 국가였다. 즉 1:1로 붙기엔 체급이 딸려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하기 위해서라면 영국러시아 제국과의 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러나, 각자의 이해관계가 떨어져서 맺는 군사동맹에선 “나는 짱박혀서 방어만 할 테니까 너네들이 대신 고기방패 해줘~” 라는 외교적 시그널을 보내는 건 그냥 동맹을 깨달라는 소리나 다름없었고, 동맹국을 잃는 것이 곧 전선 부담의 급증을 의미하던 프랑스에게 있어서 “우린 절대 짱박혀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동맹국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프랑스에겐 지속적인 공세가 사실상 반강제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 제국은 이에 보답해 내부에서 혁명이 터져 전선에서 이탈하기 전까지는 동쪽에서 독일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가해줬다.

이게 결코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 후에 나치 독일의 팽창을 막고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를 모스크바로 초대한 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라는 자신의 최측근을 회담에 보내면서까지 과거처럼 다시 하나로 뭉치자는 집단안보 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안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군부 내 서열 40위 단위 대장을 파견했고, 영국은 더 나아가 소장을 파견하여 유사시 4개 사단 파병 운운하며 안보협력 의지 자체를 보여주질 않는 걸 넘어 대놓고 소련군에게 고기방패 해달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자 제대로 열받은 스탈린이 그냥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어버려 서방연합군은 나치독일의 침공에도 소련의 군사협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실제 1940년의 서부전선 전역 결과는 소련의 방관, 수도가 털린 프랑스, 무기까지 다 버린 채 덩케르크로 간신히 탈출한 영국 등 각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각개격파 당해버린 걸 생각하면 방어로만 일관한다는 게 얼마나 얄팍한 계획인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프랑스군을 과도하게 비하하는 경향은 독빠가 주류인 한국 밀덕계의 특징이었던 데다 영미식 세계관의 바탕에서 비롯된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 부족도 있었으며, 나무위키 내의 1차 세계대전 및 프랑스군 관련 몇몇 문서들에서조차 이런 경향이 많이 보였으나 최근에는 1차 대전에 대한 정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이 개선된 편이다. [11]

프랑스는 인구가 개전시 독일 인구의 반을 조금 넘는 60%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주력인 독일 서부군을 끝끝내 막아냈으며, 당연히 승전국의 최고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12] 물론 독빠들은 2차대전에서 랜드리스를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때문에 진 것이지 프랑스군 때문에 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육군이 유럽 전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것은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18년 봄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미국을 적으로 돌린 건 다름 아닌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 사건 등으로 미국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댄 독일 본인이었다. 위에 설명했듯 스스로 무너지기 직전까지의 러시아 제국을 아군으로서 끝까지 붙들어놓은 프랑스와 비교하면 독일은 군사적 역량을 따지기 이전에 외교전에서 명백히 참패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론, 1차대전의 미군은 흔히들 떠올리는 2차대전 미군과는 거리가 꽤 먼 집단이었고,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에게 골칫거리로 다가왔다. 당시 미군은 세계대전식 산업적 총력전에 전혀 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 당연히 미국 군수산업도 모신나강, 베르티에 소총 등 일부 소총류들 하청 생산이나 맡길 수준이었고 중기관총 이상의 중화기 제작 노하우는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1차대전 내내 중기관총, 화포, 전차, 항공기는 아예 프랑스에서 공여받아서 굴렸다. 문제는 프랑스는 이미 상실한 알자스-로렌은 물론, 슐리펜 계획 중에 프랑스는 2번째로 산업화된 북프랑스 지역과 또 하나의 산업국이었던 밸기에까지 잃으면서 전쟁 중에도 프랑스 내 여러 군수공장들이 문 닫을 정도로 극심한 석탄, 철강 부족에 시달렸고 그 상황에서도 협상국의 가장 강력한 방패랍시고 영국군, 이탈리아군, 벨기에군, 그리스군, 세르비아군, 루마니아군, 러시아군을 비롯한 외국 군대들에게까지 대량으로 공여해 줘야 했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미군까지 가세하니 프랑스 군수산업은 엄청나게 등골이 휘어졌다. 예를 들어 미군이 사용한 전차, 항공기, 화포의 80%는 프랑스가 제공한 것이었고, 그 운용 인원과 참모장교까지 지원했다. 이 때문에 미 육군이 춘계 공세가 있었던 1918년 상반기엔 프랑스군을 오히려 심하게 약화시켰을 정도였다. 즉, 1차대전의 미군은 엄밀히 따지면 프랑스의 구원자의 포지션이 아니라, 프랑스 아래서 배우는 학습자 포지션이었다.

동서의 양면전을 치러낸 독일군은 물론 막강했지만, 1차대전의 승자는 결국 러시아를 제외한 연합국 측이었으며 서부전선의 주력은 프랑스군이었다. 심지어 프랑스군은 1918년에도 서부전선에 배치한 병력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120만 명의 병력을 외국에 전개해 다중전선을 수행했다. 끝물에 참전한 미군, 과다출혈로 도중에 이탈한 러시아군, 1916년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출병한 영국군[13]과 달리, 독일의 주력군과 처음부터 끝까지 맞상대한 것이 프랑스군이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프랑스군이 독빠들이 말하는 대로 비정상적인 군대에 무능하고 약했더라면 에리히 루덴도르프, 파울 폰 힌덴부르크 같은 장군들이[14] 이끄는 독일군 상대로 최종적으로 교환비를 1:1 찍어가며 각종 굵직한 전투들에서 독일군을 패배시키고 결국 힌덴부르크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시킬 수도 없었다.
2.1.1.3. 독일 제국의 침략성 미화
그리고 1차대전 독빠들은 독일 제국은 "평범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혀 다를 바 없거나 덜한 평범한 나라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피장파장의 논리는 위험하다. 당장 1차 대전 직전에 조선을 합병한 일본의 경우만 해도, 평범한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버린다. 조선을 비롯한 수탈당한 수많은 나라들 입장에서, 그저 시대가 그랬다는 이유가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땐 다들 그랬다"라는 헛소리를 받아들이면 당시 조선이나 그 어떤 나라도 함께 침략과 강도질을 했어도 정당하다는 소리며, 또 당대 나머지 수백 개의 그러지 않은 나라들은 다 무의식적으로 없는 나라 취급하고 극소수의 열강들만 당대의 주체로 보는 탈아입구적인 발상이다. 마치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연합군이 일본군 병사를 교전 중 사살하고 품에서 가족 사진을 꺼내니 "불쌍하다"고 하지만, 왜 미얀마에 일본군이 있고 얼마나 많은 현지인들이 학살당하거나 수탈당했는지 의문점을 제기하지 않는 와패니즈적 태도와 다를 게 없다.

그리고 독일 제국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등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을 잔인하게 통치하기로 유명했는데, 타 제국주의 국가들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명백히 악질 중의 악질이었던 나치 독일과 달리 1차 대전 시기의 독일은 절대악 개념이 아니었다. 이는 같은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도 마찬가지다.[15] 만행의 규모나 기간을 놓고 본다면 더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이 독일을 욕할 처지가 못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문제는 독일만이 아닌 전 서유럽권이 반성해야 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 부분에 있어서는 영빠나 프빠 등도 독빠를 욕할 처지가 못된다.
2.1.1.4. 벨기에 학살 옹호
일부 독빠들은 1차대전 당시의 벨기에 학살을 옹호하기도 한다. 독일 제국군이 벨기에무력점령 하면서 1914~1918년까지 벨기에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수탈한 사건을 말하는데, 독일군의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로 인해 1914년 한 해에만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고, 디낭 시에서는 700명 가까이 되는 인명이 살해당했다. 벨기에의 적은 인구를 고려해 볼 때 절대 낮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독빠들은 "레오폴드 2세콩고인들 1,000만 명 죽였으니 벨기에는 독일한테 당해도 싸다"라며 제국군의 전쟁 범죄까지도 옹호한다. 덜하게는 "레오폴드 2세콩고 자유국 사람들을 백만 명 넘게 죽이더니 기어코 그 업보로 애꿎은 벨기에 국민들한테 화가 미치는군." 하는 식의 유감 표명도 있다.

독일은 더도 아니라, 콩고의 바로 남단의 나미비아에서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원주민 10만 명을 학살했으며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이는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기록될 만큼 잔혹한 것이었다.[16] 옆의 콩고에서 벨기에가 워낙 잔혹해서 묻혔을 따름이지만, 독일도 비슷한 짓을 한 건 사실이니 벨기에의 악행을 들어 독일을 옹호하는 행태는 전형적인 내로남불 논리다.[17]

무엇보다 1차 대전 당시 벨기에 국왕은 레오폴드 2세가 아닌 알베르 1세였으며 살해당한 민간인들이 콩고 학살에 가담했던 것도 아니다. 이런 논리라면 미국도 필리핀을 침공해서 민다나오 섬의 필리핀인들을 학살했으니 훗날 진주만 공습에서 애꿎은 하와이 민간인들이 제로와 케이트 떼의 기총 소사를 당한 일,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이 미군 포로를 대할 때 행한 각종 학대 행위가 정당하다는 말이 된다.
2.1.1.5. 동맹국 비하
나머지 동맹국, 즉 독일을 제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오스만 제국군 등을 비하하는 것 역시 이들의 주된 특징이다. 주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동맹국들이 벌여대는 졸전을 항상 독일이 개입하여 수습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인데, 이는 일방적인 독일 위주의 시각이다.

독일의 역할이 동맹국 내에서 큰 지분을 차지했던 것은 맞지만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역시 자신들이 담당한 역할은 충실히 수행했다. 이탈리아, 중동, 발칸 및 캅카스 전선에서 독일군은 항상 보조 전력이거나 아예 없었으며 주력은 항상 오스트리아와 오스만군이었다. 이들 역시 독일처럼 1918년까지 4년간 협상국에 교착 상황을 강요해냈다. 반대로 독일 역시 이들이 협상국의 군사력을 곳곳에서 분산해 준 덕에 그나마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에 주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2.1.1.6. 독일 제국군 과대평가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은 확실히 강대국이었다. 육군의 전투력은 세계 1위, 해군력은 세계 2위였다. 하지만 독일과 맞서 싸웠던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들도 독일이 그렇게 쉽게 어찌해 볼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세계 1위의 해군 강국이었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육군 군사력에 있어서 만만찮은 전력을 보유했다.

그러나 독빠들은 슐리펜 계획이 갑작스런 러시아 제국의 기습으로 틀어져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제 2제국이 프랑스는 물론 영국까지 손쉽게 정복하는 것이 일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동원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은 분명 독일이었으며, 그 와중에도 동맹인 오스트리아에 협조를 구하지 않고 동부전선을 비워버린 것 또한 독일이다. 결국 슐리펜 계획이 소위 '기습'에 대비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국 해군 역시 전체적인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독일 북부 연안에 그대로 고립되어 있었다.

독일 제국군의 체계 역시 과대평가되었다. 실상은 독일 제국군이야말로 오스트리아군과 더불어 전 세계 열강 중에서 가장 낙후된 군 체계와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혼재되었다는 쪽에 더 가까운데, 한쪽에서는 세계 군사사에 한 획을 긋는 참모본부의 엘리트 장교진들이 군대를 이끌었으나 막상 장교 충원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들의 전유물에 가까웠다. 군국주의화된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군부는 그 자체로 민간 정부와 동등한 또 하나의 권력집단이었다.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놓기 싫었던 귀족 엘리트들은 일반 평민들, 특히 라인란트 일대의 소위 '프랑스 물 먹은 자유주의자들과 마르크스 물 먹은 빨갱이들'을 제국 군대의 장교로 모집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육군과 해군 간의 협조 체계도 없었고, 황제의 개인 비서진이 군 인사문제에 개입했다. 마지막으로 육군은 제국정부가 아니라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 작센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네 개 영방국이 나눠 갖는 중세적 체계를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유지했다. 육군성만 네 개였다. 주로 비교되는 프랑스는 이와 반대로 이미 18세기 말 혁명정부 시절부터 정부의 일원적 통제를 받는 현대적인 국민군 조직을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1914년 프랑스가 독일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끝내 저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러한 효율적인 군 체계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외에도 다른 볼트액션 소총과 별 다를 바 없는 Gew98리-엔필드르벨 M1886, 스프링필드 M1903보다 훨씬 우월하며[18], 연합군은 꿈도 못 꿨던 기관단총이라는 물건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에 1차대전 당시 가장 시대를 앞서 내다본 국가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MAB 18를 오히려 MP18보다 더 먼저 전선에 배치했고 M1918 브라우닝같이 현대의 분대지원화기의 근간이 되는 것도 만들었다. 또는 독일의 중기관총인 MG08에 열광하기도 하는데, MG08은 영국 기관총인 맥심의 독일판이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의 전차군단 이미지를 그대로 독일 제국에 적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히 오류이다. 보수적인 독일 제국 장교단은 전차라는 신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매우 꺼렸다. 그리고 독일 제국이 그나마 실용화한 유일한 기갑 전력은 A7V 전차였는데, 실제로는 기술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전히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A7V는 장갑 재질 문제로 측면에서 기관총 사격을 당하면 전면장갑의 방호력과 다르게 승무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고작 100대만이 주문되었으며 실제 생산된 것은 고작 21대에 불과했다.

오히려 당대의 전차 선진국은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를 만든 나라인 영국과 현대 전차들의 직계조상인 르노 FT를 개발한 프랑스다. 괜찮은 기갑 전력이 없던 독일 제국군은 프랑스가 자그마치 3400대나 작정하고 찍어낸 르노 전차 군단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1918년 백일 공세에서 독일군이 협상국의 유기적인 제병협동작전에 추풍낙엽처럼 밀려버리는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던 미군생미이엘 공세에서 전차와 항공기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을 때에도 베테랑이라는 독일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훗날 2차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획득한 우월한 전차 운용 능력은 바로 이때 협상국의 전차군단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2.1.2.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독빠/문제점

무장친위대 역사재현동호인과 나치 물품 수집가가 무해한 취미 애호가인지, 아니면 사악한 행위인지는 시간만이 말해줄 것이다. 그러나 중대한 도덕의 문제에 관한 절반만의 진실과 더 나쁜 것을 밀거래하는 행태는 가벼이 여겨질 수 없다.
― 미국 툴레인 대학 교수 로렌스 N. 파월의《제2차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독소전쟁과 냉전, 그리고 역사의 기억》서평 中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독일을 좋아하는 사람들. 독일 국방군이 정복전쟁을 수행하며 나름 잘 싸운 군대이고, 무기와 군복이 간지난다는 이유로 빠가 된 경우가 많다.
2.1.2.1. 편파성
2.1.2.1.1. 독일 기술 과대평가
독빠들은 2차대전 독일의 무기체계를 절대 기준으로 삼으며 그것이 당시의 주류며 전술적으로 반드시 옳다고 보는 오류를 범하면서 독일과 다르면 이를 비주류며 틀린 선택으로 인식하는 문제를 가진다. 당연하지만 무기체계에서 주류, 비주류와 옳고, 그름은 없고 자신들의 전술 교리에 따라서 선택을 할 뿐이다. 거기다 성과나 결과는 제처두고 당시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독일의 교리는 절대로 세계적 주류가 될 수도 없었다.

대표적인 예시로 독일의 전차들이 차장, 포수, 탄약수, 조종수, 무전수 5인 승무원 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주류이며 다른 국가는 나중에 독일을 따라서 승무원 체계를 정립했으며 이를 따르지 않은 승무원 체계는 비주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대표적 주류 전차 생산국인 영국은 무전수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것이 현대 주력전차로 계승되었으며 2차 대전 당시에도 사실상 주류였다.

이런 스펙상으로 보이는 숫자에만 현혹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난 환상이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MG42. 특히나 히틀러의 전기톱이란 별명의 이유인 분당 1200발 이상의 연사력을 보고 추종하는 경우가 많은데, 스펙만 보면 연사력 높은 게 당연히 더 좋고 만들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지만, 소형화기에겐 연사력은 성능이 아니라 특징에 불과하며, 기술적으로도 어렵지 않다. 이는 세계 최초의 권총탄 연발 기관총인 이탈리아제 빌라르-페로사가 현대의 미니건 수준인 분당 3000발을 발사한다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다.

고연사력=고성능 논리도 소형화기의 과도한 연사력은 정상적인 군대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현실에서 논파되는데, 똑같이 두세 발만 맞아도 죽는 사람에게 잠시 방아쇠를 당기면 초당 8발을 쏘든 20발을 쏘든 일은 똑같이 끝나지만 연사력이 과하면 총알이 낭비된다. 다수 상대 측면에서도 분당 500~600발의 기관총으로도 1차대전 때 보병들을 마구 갈아버린 경험이 있고, 오히려 탄막 형성 면에서도 연사력이 너무 빠르면 반동에 총기가 흔들려 명중률이 떨어지므로 못 맞춘다.[19] 연사력이 빠르면 순간적인 화력은 뛰어나지만 지속력과 안전성은 바닥을 치게 된다. 실제로 MG42의 개량형 모델인 MG3의 주요 개선점은 탄종 변경과 더불어 지나치게 빠른 연사력을 오히려 늦추는 것이었다.

반동을 팍 낮춘 대다수의 FPS 게임에서조차 무작정 난사하면 안 맞는데, 현실에서야 말할 것도 없으며, 연사력이 늘면 반동도 같이 늘어서 목표를 명중시키는데 배나 되는 탄약을 써야 한다. 그리고 탄약은 공짜가 아니며,[20]"연사력이 높아? 아마 총알을 낭비해서 10분 만에 나라가 파산할 거야."(...)] 독일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기관총 총알을 세어 가면서 싸웠다는 말로 유명한 국방군에게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사력 높으면 최고라는 단순한 시각이 드러난 편집이 잦았는데, MG42 항목의 역사를 보면 "세계 최고의 명품 기관총", "부정할 수 없는 최강의 기관총" "처칠 전차도 단번에 뚫어버리는 기관총(...)"[21]등의 찬양 문구가 붙었던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탄종을 변경한 후계 기관총인 MG3와 비교해서 연사력이 낮아졌다는 이유로 개량품인데도 성능이 더 떨어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서술이 강조 표시되어 있었다. 상대적으로 소구경으로의 탄종 변경, 연사력 감소로 단순 화력은 줄었겠지만 그게 성능저하로 가지는 않는다.

이미 전 세계에서 1000발/분 이상의 연사력은 쓸데없다는 시각이 많아서 연사력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잦으며, 총기 설계기업과 군대 모두 과도한 연사력은 장점이 아니라 문제거리라는 생각이 팽배한 데다 그게 정석이다.[22] 이는 일부러 연사력을 떨어뜨려 사용하거나 아예 단발, 점사 기능을 넣는 현대 총기들을 보면 알 수 있으며, 끝까지 초월적인 연사력을 고집한 총기들은 민간이나 특수부대 등에만 관심을 끌다 제식 채용은 꿈도 못 꾸고 단종되는 경우가 잦다.

제식 기관총을 고를 때도 연사력이 낮은 것을 장점으로 보고 채용하는 선진국까지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직도 연사력 끝내주니 최강이고 최고라는 주장들은 나무위키는 물론이고 여러 사이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MG42와 그 후계기인 MG3이 종합적인 명품이라고 듣는 것은 성능 덕분이 아닌 새로운 기관총의 용도에 대한 선진적인 개념 덕분이다.

물론 MG42가 좋은 성능을 보유했던 기관총임은 사실이지만, 단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위에 서술했듯 지독한 독일의 군수생산 비효율성과 빠른 연사력의 조합은 오히려 단점에 가까웠으며, MG42는 맨손으로 총열을 교체하지 못하지만, 동시기 체코의 Vz.26이나 일본의 99식 경기관총은 총열에 손잡이가 달려있어 장갑 없이도 총열교환이 가능함은 물론 캐링핸들 역할까지 겸해 MG42보다도 기동성이 우수했다. 또한 1950년대 후반부터는 벨기에의 FN MAG, 구 소련의 칼라시니코프 기관총 같은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해 MG42 계열들과 동등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기 간 교환비가 크기 때문에 소련군 전투기의 성능을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기술도 있다.[23] 물론 2차대전을 통틀어서 소련군 조종사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독일이나 서방연합군, 심지어 대전 초기 일본에 비해 뒤처지는 편이긴 했다.

당장에 고공성능에 문제가 있는 항공기들이 대부분이라 에너지 파이팅 같은 공중전 전술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 거기다 그 소련에 비해서 좋았던 프로펠러전투기의 과급기 기술도 미국에 비해 안 좋아서 미국 폭격기 고도로 올라가는 요격기는 전쟁 말기에나 생산할 수 있었으며 연합군 폭격으로 100대도 안 되는 댓수만 생산되었다.(Fw 190 D-1X형 21대, Ta 152 69대))

그리고 IS-2 문서의 경우도 IS-2의 화력과 장갑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으면 장갑[24]을 지워 버리는 이들 독빠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연합군, 특히 소련군의 무기는 독일보다 무조건 열등해야 정상이다.

그리고 모든 육상장비 평가를 본 용도와 상관없이 독일 중전차에 맞서는 대전차전에 맞춰 평가하는 경향이 매우 심하다. 물론 전차의 주 목적 중 하나가 대전차 임무이긴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전차 특히 소련 전차들은 철갑탄보다 고폭탄을 많이 싣고 다니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보병이나 벙커, 장애물 제거 등 다른 임무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IS 시리즈의 원래 목적은 최일선에서 벙커나 대전차포 등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122mm 고폭탄의 강력한 화력으로 제거하며 돌진해 전선을 찢어 놓는 돌격전차에 가까웠다)

그리고 SU-152ISU-152 같은 대전차전도 수행 가능한 다목적 자주포를 구축전차 설명하듯 설명하며 독일전차에 비해 열등하다고 까기도 한다.[25] 더 재밌는 건 독일 국방군 전차 에이스로 유명한 오토 카리우스조차 IS-2의 성능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거기에 더해 독일군은 고질적인 분대 화력 부족으로 시가전에서 소련군에게 고전했는데 이 때문에 눈에 불을 키고 소련군 기관단총을 노획하려고 돌아다녔다.

이러한 서술은 소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서 영국의 전투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문서에는 Bf 109는 항상 스핏파이어를 상대로 2:1의 우월한 교환비를 보였으므로 영국을 구했다는 것은 영국인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라든가 스핏파이어는 항상 109보다 열등했다는 서술을 추가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형~중기형 스핏파이어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109보다 약간 열세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그 격차가 크지 않았으며 후반기에는 잘못된 전술 등으로 인하여 격차가 더 좁혀졌고, 기체도 개량에 따라서 우열이 뒤바뀌기도 한 데다 후기형은 전반적인 성능에서 스핏파이어의 우세가 유지되었다는 걸 무시했다는 것이다.[26]

또한 영국 순항전차의 얇은 장갑을 비난하는데, 이는 그 얇은 순항전차와 3, 4호 전차의 장갑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3, 4호 전차도 영국의 순항전차 개념에 큰 영향을 받아 순항전차와 비슷한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순항전차는 종이장갑이라고 비난하면서 3, 4호 전차는 비난하지 않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이들이 주로 믿는 미신은 독일의 과학기술이 연합군의 것보다 모든 분야에서 월등했다는 것. 독일이 2차대전 주요 참전국중 기술적으로 뛰어난 축에 든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타 강대국과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으며, 연합국이 우세한 다른 분야와 자원 및 물량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특히 VT신관과 레이더를 위시한 전자장비의 기술력은 영국이 독일에 비해서 월등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독일이 다른 연합국을 압도하고 있었던 기술 분야[27]V2를 앞세운 미사일 분야를 들 수 있는데, 그마저도 보병용 다연장 로켓은 추진체의 저열함 때문에 후기에는 소련의 항공로켓을 베껴서 사용했다. 그리고 V2의 개발이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가 개발한 로켓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28] 항공기 제작 분야는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큰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29] 전투기뿐만 아니라, 대형 항공기의 제작기술 중 폭격기와 수송기는 미국에, 지상 공격기는 일본과 미국에, 대형 비행정은 영국과 일본에 절대적으로 못 미쳤다. 또한 많은 부분에서 미국, 영국, 심지어 소련이나 일본보다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가볍게 넘어간다.

트윈차저를 만들 기술력과 재료수급의 부족으로 억지로 사용한 영국의 글로스터 미티어보다 몇 개월 정도[30] 빨리 나온 Me262를 2차대전 유일 제트전투기로 둔갑시키고[31] 수십 년 전 인력 부족 때문에 후일 전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사람 없이 움직이고 기관총만 쏘는 수준이 아니라 화염방사기들까지 쏠 수 있던 TT-26을 가지고 있던 소련이나 석유 엔진인 TT-26과 달리 친환경 에너지로 작동하는 나가야마 전차를 만든 일본 옆에서 프랑스 것 빼앗아 만든 무선자폭차량 가지고 전쟁에 사용된 최초의 로봇이라고 외치는 수준이다. 특히 Ki-84 하야테 항목은 레퍼런스까지 달아놓고 모든 포케볼프 모델보다 빠르다고 서술된 바로 밑에 독일기가 비웃는 속력이라고 써놓은 바도 있었다.

또한 그나마의 기술적 우위도 후진적인 생산공학(혹은 산업공학) 시스템으로 다 갉아먹은 게 독일이다.[32] 중세때부터 내려오는 장인-도제 시스템 때문에 여러 무기의 설계/시험 속도는 매우 느렸으며,[33] 이 때문에 애써 연합국보다 우수한 무기를 내놓는다고 해도 적당한 성능의 병기를 대량생산한 연합군의 공세에 압도당하기 일쑤였다. 이런 면에서 독일의 생산공학은 20세기 초반부터 포드주의로 대규모 생산체계를 확립한 미국은 물론 소련에도 뒤떨어졌다.

6호 전차 티거 1대가 T-34 10대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은 독일의 자원이 부족했다기보다는[34][35] 독일의 후진적인 생산시스템이 낳은 문제점이었고, 결국 2차대전의 승패를 결정했다. 그러므로 연합국에 비해 부분적으로 앞선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독일이 절대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기술개발 역시 통상적 생산에 밀려서 미친 듯이 발악한 결과 개발한 것이다.[36]

게다가 다른 국가에서 개발한 모든 기술은 무조건 독일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전후 개발된 모든 기술은 증거가 없지만 일단 독일에서 나온 것이며[37] 독일 기술의 복제품일 뿐이라는 것. 이런 식으로 따지면 독일이 이룩한 모든 기술은 산업혁명 이룩한 영국의 것을 훔친 것이다.

물론 V1 미사일을 미군이 카피해서 JB-1 룬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생산했던 등 일부 제대로 된 예시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빠들의 문제는 새로 개발되는 무기는 당대의 다른 무기를 참고하기 마련인데 단지 일부를 참고했다고 하나 같이 전부 직계후손이나 카피품 취급하기 때문이다[38] 반대로 독일이 타국의 장비를 그대로 카피하고 약간의 변형을 준 물건은 완전히 똑같지는 않으니 독일 자체개발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이중잣대를 보여준다.

슬라이드가 총열을 감싸지 않은 권총만 보면 하나같이 죄다 루거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는 데서 이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국가를 거치며 발전한 분야도 거슬러 올라가다 독일이 나오면 그냥 독일개발과 동일시 한다. 모든 화포가 화약을 처음 개발한 중국제라는 정도의 주장이다.

현대에도 독일이 유럽의 다른 국가와 공동개발을 하면 그냥 독일제로 취급해 버린다. 근데 유로파이터와 NH90은 현재진행형 흑역사라 뺀다 프랑스 기술이 상당히 들어간 밀란 미사일도 독빠들에 의해 수년간 독일제 미사일로 써져있었다.

거기다 이러한 독일 영향설이 상당히 오래되어 국내에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잘못된 인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판터를 보고 각 국가들이 주력전차를 만들어 판터가 주력전차의 시조라는 설과 3호 전차의 승무원 체계가 주력전차에 계승되어 확정되었다는 것들이다.

이 두 가지 모두 현재는 해당 전차들의 문서에서는 모순에 대한 반박이 되어 있지만, 국내에서 10년 이상 지속되어온 설들이라 인식이 고쳐지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릴 듯하다.

무기 성능 왜곡은 비단 서방 연합국과 소련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에서 끝나지 않고, 독일의 동맹군 일본군까지도 번져나간다. 물론 일본군이 미흡한 무기엄청난 삽질을 많이 한 건 사실이지만, 무기 성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일까 성향에 독빠 성향이 덧붙어서 끝내주는 왜곡성 서술이 완성된다.

오랜 기간 동안 아리사카 문서는 왜곡의 절정이었으며,[39] 마우저 소총의 마이너 카피판이라는, 기도 안 차는 서술이 오랫동안 서술되어 있었다. 정작 아리사카의 화약은 프랑스식 화약의 영향력 아래 있으며, 당시의 다양한 볼트액션 소총들 대다수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독일의 영향이 컸다면 모르겠지만 마이너 카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게다가 독일 무기는 독일 상태가 멀쩡해서 생산 라인이 잘 돌아갈 때 나온 최상품을 기준으로 평가하지만 일본 무기는 대전 말기 미군 폭격에 기반 시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 후 막 만들어낸 상태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모습도 많이 보인다.

똑같이 대전 말기 성능이 구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사카는 성능이 별로이고 Kar98k는 볼트액션 계의 명총이라는 식이다.[40] 치하천자총통에 뚫릴지도 모른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는 덤.[41] 최근에서야 감정적인 서술을 자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모자란 편이다.
2.1.2.1.2. 전차에 대한 환상
문단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이 문서로.

물론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나 독일과 관계가 약하거나 거의 없이 흑삼봉 팬인 사람,[42] 그저 포고 장갑이고 기동성이고 다 때려치우고 외양 때문에 독일 전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43]
2.1.2.1.3. 군조직 과대평가
또 하나의 미신은 독일군이라는 군조직이 매우 합리적이고 전략, 전술적 식견이 높은 군대였으나 히틀러의 군사적 무지와 오판 때문에 그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하고 패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로 이어지는 소수의 우수한 명장들의 사례로 인해 독일군의 전체 군조직 역시 필연적으로 그들과 동급이거나 모자라더라도 타국가의 군조직 보다 우수하다고 확대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분명 당대의 독일군은 헬무트 폰 몰트게의 군 개혁 덕분에, 주변국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적능력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참모본부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한스 폰 젝트의 전간기 군조직 개편 덕분에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된 뛰어난 엘리트 집단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국방군을, 국방군 장교단을 뛰어난 군 경영자들로 받아들이고 히틀러라는 존재의 간섭이 없었더라면 전쟁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는 식의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지적해야 할 문제점들이 많다.

독일군은 매우 합리적인 조직이었는가? 병력과 보급 그리고 자원의 운용 면에서 효율을 추구하고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부서 간에 긴밀한 협력을 유지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상은 웃기게도, 독일군은 일본군과 비견될 정도로 육해공 그리고 친위대 간에 부서 이기주의가 만연했으며, 나치 지지자들과 비 지지자들 사이에 신경전과 소장파 장교들과 보수파 장교들의 갈등이 산재하고 이러한 조직 내 파벌싸움이 전쟁수행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문제투성이 집단이었다.

우선 첫째로 독일군은 작전을 수립하는 하나의 통일된 부처가 없었다. 같은 전쟁을 수행하는데 OKH(육군 최고사령부)와 OKW(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서로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히틀러를 통한 간접적인 소통을 제외하면 서로 간의 의견 교환이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형적인 지휘체계는 육군 내부에서의 파벌 싸움에서 기인하는데, 1차 대전 패전후 병기국으로 축소 개편당한 OKL(구 독일제국 육군최고사령부)는 히틀러 집권후 OKH(육군최고사령부) 명명되며 다시 이전의 명칭과 위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OKL시절과는 다르게 루프트바페와 독일 해군이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루트비히 베크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1차대전 시기 막강한 권력과 비대했던 총참모부(Oberste Generalstab) 시절을 생각하며 히틀러에게 육해공 통합 사령부를 요청했다.

새 사령부의 실권자 자리는 독일제국군 시절에 그러했듯 자신들, 육군이 가지기를 바랬으나 해군과 공군이 반대했고 괴링은 거의 발작했다. 예상과 달리 히틀러는 빌헬름 카이텔이라는 허수아비를 자리에 앉혔고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육군의 것이 아닌 히틀러의 것이 되어버린다. 동시에 블롬베르크를 압박하여 퇴역시켜 버리고 충격을 받은 베크 역시 자리에서 물러난다. 후임으로 들어온 프란츠 할더 역시 OKW를 아니곱게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할더는 OKW의 작전과장인 알프레드 요들에게 OKH의 작전에 간섭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살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한 이유로 사실상 OKH는 OKW의 인사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육군의 작전에 있어서 OKW의 개입 없이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다. 육해공의 유연한 협력을 위해 설립된 OKW를 자신들에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철저하게 무시한 OKH는 육군중심의 타 부서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작전을 수립하면서 공군과 해군에 불만을 유발했다. OKW는 초기에는 육해공 의견조율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히틀러의 지시로 베저위붕 작전을 준비하면서 OKH를 엿먹이게 된다.

이렇듯 서로 살벌했던 OKH와 OKW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프란츠 할더가 물러나고 쿠르트 자이츨러가 임명되면서 사이좋게 히틀러의 허수아비가 된다.

비단 OKW를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나치 지지자와 OKH를 필두로 한 암묵적인 나치 지지자들 사이의 파벌 갈등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파벌간 갈등도 상당했다. 대표적인 예로 총참모장 베크가 물러나고 당시 제 1 참모차장이었던 만슈타인를 제치고 제 2 참모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가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는데, 취임 후 얼마 되지 않아 만슈타인을 야전사령부로 좌천시켜 버린 사례가 있다. 그 후 만슈타인은 히틀러와 접선하여 낫질 작전을 성공시키기 전까지 한직에 머물렀다. 군부 내부의 고위 장교 갈등도 상당한데 권력조차 없던 하급 장교들은 어떠했을지 의문이다.

둘째 이중적이고 비합리적인 명령체계의 문제도 있었다. 그들은 독일 군부와 장군들은 우수했다면서 히틀러의 무능함을 물고 들어지지만 히틀러 없이는 의견 조율도 되어지지 않는 집단이 독일 국방군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덩케르크 포위망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갈등인데 구데리안과 클라이스트 및 현장의 기갑지휘관들과 프란츠 할더 vs 후방에서 보병으로 포위섬멸을 하고 있던 클루게 및 룬트슈테트를 위시한 구 세대 장교들 끼리 '방어선을 짜기 전에 포위 섬멸해야 한다' vs '대규모 공세 전에 보병들의 포위 섬멸이 끝나고 보급방이 안정되어야 한다'를 두고 실랑이 하며 시간을 버렸고 히틀러가 보다 못해 정지명령을 내리면서 의견이 반 강제로 조율되어진다.

현대에 와서는 학자들의 분석으로 덩케르크에서 정지시킨 히틀러의 판단이 희대의 오판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엘리트 독일 군부 내에서도 구데리안 같은 소수의 급진적인 장교들 이외에는 전황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발언을 하지 못했다.

결국 괴링이 자신이 해결하겠다는 다크나이트(...)를 자처하여 적들의 탈출을 용인하고 모든 욕을 들어먹으면서 허무하게 끝났다.

물론 대전 후반기에 가서는 히틀러가 브라우히치를 해임하며 총사령관 자리를 맡고 군부를 쥐락펴락했지만 당시에는 히틀러의 간섭도 총통 명령이나 OKW를 통해서로 국한되었고 OKH 총사령관으로 브라우히치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독일군이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전격전, 그 중추를 맡은 집중운용 되어지는 기갑 전력 역시 초기에 독일 군부내에서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우선 전간기 전차는 느렸고, 보병의 매복에 취약했으며, 주행거리가 끔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변의 전차들과의 소통은커녕 전차 내부에서 승무원들끼리의 대화조차 불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대론자들이 내세웠던 표면적인 주장이었고 실상은 보병이 전쟁의 중심으로 부터 밀려나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졌다. 선배들이 보병이 주력이었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영광을 누리며 퇴역하고 자신들이 1차 세계대전을 겪은 구 세대 장교들은 고작 수송병과에서 파생된 기갑이라는 신생병과가 아니꼬워 보였다. 기병장교들은 더 했는데 자신들이 맡았던 역할을 전부 물려주고 퇴역해야 할 처지에 내몰려 구데리안식 기갑운용에 발작하며 반대했다.

웃기게도 구데리안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원에 소극적이던 군부를 대신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준 사람은 히틀러였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구데리안은 자신과 선임들이 주장해 왔던 기갑교리가 받아드려졌지만 군부 내에서 나치의 후광을 업고 출세한 장군이라는 딱지가 붙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군은 수뇌부부터 일선 장교까지 군사적 판단 이외의 사고가 굳어있었다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군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지만 이러한 사고가 독일을 1차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으로 몰고 갔다. 그들은 현상에 대한 모든 해결책을 전쟁에서 찾으려 했으며 전쟁이 외교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라 믿었고 심지어 외교가 전쟁을 위해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몰트케가 경고했던 무조건적인 전쟁확대를 그의 후임들은 독일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독재자와 함께 그것을 실현하려다 자멸했다.[출처]

독일의 비밀무기들이 양산만 되었다면 연합군을 이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비밀무기들 자체가 일반 병기 양산에서 연합군에 밀리기 때문에 기획된 물건들이었고, 여기에 안 그래도 부족한 자원을 지나치게 분배하여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와 비슷한 시도와 행동을 한 일본군은 뻘짓이라 까면서 독일군은 "참신한 시도를 했다"라고 하고 있다. 현대에서 비슷한 예를 하나 들자면, 오늘날 북한 조선인민군이 대칭전력으로는 한미연합군에게 상대가 안 되니 자꾸 핵무기라는 비대칭 전력에 집착하고, 그걸로 과도한 군비를 지출하고 경제제재를 받는 등 국력이 자꾸 감소하면서 그나마 있던 대칭전력조차 점점 더 약해지고 있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같이 독일 장교진에 대한 평가가 높은 것은 같은 추축국이었던 일본과 이탈리아의 무능함과 대비되며 독일 장교들이 초반 선진적인 전법으로 판세를 부풀렸기 때문이다.[45] 분명 대전 초기 독일군은 획기적인 전략으로 전 유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무리한 전쟁의 결과로서 독일은 패전에 따른 인명피해, 전국토의 황폐화, 연합군의 점령과 뒤이은 동서독 분단, 그리고 영구적인 동방 영토의 손실 등 참혹한 대가를 치렀으며 당연히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독일 장교진도 이에 대해 결코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2.1.2.1.4. 전투력 과대평가
이들은 독일군이 마치 천하무적의 군대였고, 연합국의 물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졌다고 착각한다. 특히 이들은 독소전에서 독일은 철저하게 소련군의 물량에 밀려서 결국 졌다고 말하면서, 소련군 전사자는 2,700만 명이나 된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특히 데이비드 글랜츠가 발굴한 "르제프 전투"를 강조하면서 소련군은 사실 독소전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을 막으러 서쪽으로 이동한 공백을 차지해 동유럽을 차지했을 뿐이라는 식으로 결론내는 경우가 많다. 정작 데이비드 글랜츠는 "노르망디나 렌드리스가 없었어도 소련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체로 주류 학계에서는 소련의 랜드리스 비율을 7%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며, 이는 대부분 1943년 즈음에 이뤄졌음에 주목한다. 즉 소련이 본격적인 독일에 대해 반격을 시작한 시점에서 급증하는 수요를 덜어주어 패배를 피하게 해준 것이 아닌, 승리를 촉진시켜준 역할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소련군 전사자는 최소 700만에서 최대 1,100만 정도로 추산되며, 동부전선에서의 소련인들의 사상자가 1,6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더욱이 소련군 전사자가 700만이라지만, 순수하게 전투, 그러니깐 서로 제대로 싸워서 생긴 전사자의 교환비는 1:1.3~1.5 가량으로 추산되는 편.[46][47] 예를 들어 독소전 초기인 1941년에만 해도 독일은 소련군 포로를 335만 명 가량 잡았는데 이는 초기 소련군 병력에서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병력들이었으나 기습과 스탈린 서기장과 당의 혼선으로 싹 날려먹은 것이다. 이런 피해는 병력 손실에만 그친 게 아니었기에 소련은 전쟁 초반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러면 전쟁 말기에는 독일이 이러한 전과를 보여주었을까? 물론 전술적 차원에서 독일군이 선전한 건 사실이고, 소련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전략적으로는 분명히 제대로 잡아내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전략적 거점들을 소련에게 내주고 그 결과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결국 전선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차 및 자주포를 예로 들면 대전 후기로 갈수록 소련군과 독일군의 교환비는 1:1로 수렴해가며, 이는 독빠들이 무적이라고 찬양하는 티거판터가 나섰을 때의 교환비로서, 독일군의 주력이 3호 전차4호 전차였을 때보다도(약 1:5) 오히려 교환비가 나빠지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독빠들이 소련군의 T-34IS-2를 판터나 티거에는 상대도 안 되는 야라레메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애초에 기본적으로 전술과 처한 상황 자체가 달랐기 때문에 무기 간의 성능을 쉽게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유튜브 댓글 같은 곳을 보면, 승패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독일군 우세에서 영미 연합군/소련 우세로 넘어가는 전쟁의 전환점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거나 반대로 승패는 동부전선에서 결정났고, 서부전선에서 밀고 온 서방 연합군은 오합지졸들의 독일군을 격파해 온 것이며, 서방 연합군은 이런 오합지졸들에게조차 고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주된 소스는 오토 카리우스가 소련군을 높이 평가한 반면, 서방 연합군은 소련군보다 한참 아래로 평가했다는 단 한 명의 주장을 맹신하는데, 서방 연합군도 만만치 않은 독일군과 싸웠다. 코끼리코뿔소가 득시글대던 이탈리아 전선은 물론이며 노르망디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삽질이긴 했지만 네덜란드에서 영국군이 어그로를 끄는 사이 아르덴에서 미군이 독일군을 완전히 꺾어버리고 쾰른에 신형 중전차까지 배치하며 선전한 게 서방 측이며, 서부전선에서도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판터 전차티거 전차, 티거 2, 야크트판터, 나스호른, 엘레판트는 물론 동부전선에는 배치된 적도 없는[48] 야크트티거같이 상당히 강한 무기들이 배치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말을 한 카리우스는 야크트티거를 타고 미군을 잠깐 상대하다 종전되어 항복한 게 전부 다. 그리고 크릭스마리네루프트바페[49] 등뼈를 꺾은 건 말할 것도 없이 영국 해군/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이다.

독일군의 패전은 "히틀러의 실책",[50] "날씨와 같은 행운(특히 독소전쟁)[51]에 힘입은 석패이고, 독일군의 승전은 "연합군이 범접할 수 없는 독일군의 압도적인 작전능력 및 우수한 지휘관 탓"이라는 왜곡도 있다. 후술하듯 독일군 장교진들은, 특히 소련군에 대해서 정찰과 적 분석에 대하여 게을리하였으며 때문에 독일군 출신자들이 그토록 애용하는 '압도적인 머리수의 소련군과 싸우다 패주'란 논리는 사실상 자신들이 소련군의 의도대로 놀아났다는 증명 밖에 되지 않는다.

정치장교의 삽질, 형벌부대 운용 같은 면에서 냉전 시절이나 독일군이 퍼트린 도시전설이 아직까지도 독빠들에게 진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나무위키의 어느 항목을 보면 소련군 정치장교들은 작전에 앞서 중무장을 한 독전대를 거느리고 돌격에서 낙오하거나 후퇴하는 병사들을 사살했다는 주장을 써놓고 있는데,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초기처럼 소련군에 패배주의가 흑사병처럼 번질 때의 특정한 일화를 일반화하는 주장이다. 애초에 후퇴하는 아군들 몇 죽이려고 중무장한 독전대를 끌고 다니는 것은 병력과 자원의 낭비며, 공산당은 이러한 낭비를 지켜만 볼 정도로 무능한 집단은 아니었다. 또한 현실의 정치장교들은 뻘짓도 많이 했고 지휘 체계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었지만 병사들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나갔고, 무엇보다 정치장교들은 공산당원이었고 독일군에겐 공산당원은 포로가 아닌 처형 대상이었다.

이런 독일 측의 흑색선전은 자신들의 패배 원인을 소련인의 노예 근성으로 돌리고 소련인들의 애국심을 폄하하려는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즉, 독일군은 애국심으로 싸우는데, 소련인들은 노예근성과 정치장교의 등떠밈으로 인해서 전선으로 밀려 보내진다는 주장이다. 이런 근거 없는 낭설은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 그대로 묘사되어 소련의 참전용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바가 있다. 이는 포로가 된 정치장교에 대한 처형을 합리화하기 위한 독일군의 흑색선전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형벌부대도 알려진 것보다 덜 잔인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다. 자세한 점은 형벌부대 문서 참고.

소련군의 정치장교가 상당히 문제가 있는 조직이긴 했지만 적어도 군대의 기강을 잡고 사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으며 창설 목적은 군사 반란등을 일으킬 수 있는 용의자들을 체포하는 등의 문민통제를 위한 조직이었고, 독일 국방군은 이와 비교하면 아예 정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말하자면 문민통제를 씹어먹는 조직이었던 데다 페르디난트 쇠르너의 사례로 알 수 있듯 국방군은 프로이센 전통으로 꾸며져온 광기의 절정이었다.

무장친위대는 본래 경호 조직으로 만들어졌을지 몰라도 결국 일선에서 학살과 전투를 병행하는 명목상 나치당 사실상 히틀러의 사병으로 변질되었으며 공군 야전사단이 괴링의 망상이 현실화된 존재들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소련 정치장교의 비효율을 탓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

게다가 이렇게 독빠들이 과장하는 정치장교형벌부대는 소련군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독일군은 그보다 한술 더 떴다. 독일군은 대전 초기부터 소련군 못지않게 형벌부대를 운용했으며, 특히 패전이 임박하자 히틀러와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낙오병 사살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이에 병사들의 탈주를 막고 전쟁범죄를 막아야 할 야전헌병대는 패잔병들을 사살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전쟁범죄의 주체가 되었다. 소련군 폄하는 자신들이 하면 위대한 승리를 방해하는 낙오자들을 사살하는 것이지만 소련군이 하는 낙오병 사살은 패닉에 빠진 정치 장교들과 학살일뿐이라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다.

무엇보다 2차대전기 독일은 결국 패배했다. 물론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저평가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어쨌거나 독일 정도의 강대국이 초기의 놀라운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패했다는 것은 독일군의 궁극적인 대전략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연합국은 전쟁 내내 막대한 희생을 치렀지만, 그 과정에서 소련은 넓은 영토를 통한 지연전과 막대한 인력을, 미국은 막대한 자본·산업력을, 영국은 정보 기술과 해상·공중에서의 우세 확보에 각각 집중하면서 자국이 가진 강점을 잘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치가 강대했다고는 하지만 온갖 반나치 세력을 감안하면 나치 독일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력은 오늘날 독일이 유럽 연합에 미치는 영향력보다도 낮았고, 각론에서는 유능했을지언정 미국과 소련, 영국 등 주요 강대국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린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전략적 실책을 저지른 것이었다. 군대의 목적은 질적·양적 팽창이 아니라 국가 전략에 맞게 최대한의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미/소 양국의 지원을 받아 3차대전이 터지면 양쪽 진영을 대표해 유럽전선 최전방 탱커 겸 딜러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동독군/서독군이 결국 궁극적으로 국가의 패망을 막지 못했던 독일 국방군보다 더 뛰어난 집단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2.1.2.2. 전쟁범죄 왜곡
연합국에 소속되었던 국가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을 핑계삼아 나치 독일의 범죄를 미화하거나 변명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밀덕이라도 전과 부풀리기 정도는 잘못된 지식 내지는 편향적인 빠심이 불러온 오류 정도로 이해해 줄 수 있지만, 추축국 전쟁범죄 미화는 엄연히 현대 사회에서 금기시된 일이며, 도의적인 비판에 더하여 지역에 따라서는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악질적인 죄이다. 물론 연합국의 죄과가 아예 없었다거나 필요악이었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것도 곤란[52]하겠으나, 2차대전 연합국과 추축국의 민간인 사망자 수만 비교해 보더라도 양측이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규모 차이가 명확히 드러난다. 무엇보다 나치 독일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특정 인종의 절멸을 시도했던 국가는 심지어 다른 추축국들을 포함하더라도 단 하나도 없었다.[53]
2.1.2.2.1. 소련군과의 비교
나치 독일히틀러의 전쟁범죄나 야만성을 논할 때 흔히 소련스탈린이 카운터파트로 언급되곤 한다. 이는 양국의 이념이 극우극좌로 명확히 나뉘는 극단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였으며, 전후 냉전 체제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나치의 뒤를 이은 자유세계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실제로 전시에도 교전 당사자들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증오범죄가 오갔던 곳이 바로 동부전선이었기 때문이다.[54] 실제 반인륜적인 범죄의 추이를 살펴보면 일부 독빠들은 주로 소련의 잔혹 행위를 부각하면서 정작 나치 독일의 문제점에 대해 물타기를 시전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전쟁범죄는 겉보기에 엇비슷해 보여도 자세히 보면 차이점이 제법 있다.

소련이 국가 주도하에 벌였던 전쟁범죄는 대전 초기 스탈린의 밀명 하에 폴란드인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카틴 학살[55]으로, 이후 독일과의 전쟁 과정에서는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민 범죄를 엄금하여 헌병 노릇을 하던 NKVD 부대, 부대 정치장교 등에게 적발되면 엄벌에 처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 지도부가 초중반부의 전쟁범죄를 암묵적으로 허용하다가 문제가 되니 그제야 통제했다"는 주장도 옳다고 보기 힘든 것이,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장교단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기습공격 여파로 초반의 지휘체계마저 거의 무너졌기 때문에 군에 대한 통제력이 다소 부족할 수밖에 없었고, 온갖 학살극을 저지르며 침공해 들어오는 "악마의 군대"[56]에 맞서는 데 남은 여력을 끌어모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엄격하게 처단할 수 없었을 뿐이다. 게다가 소련군은 침략을 당한 대상이었기 때문에 초중반부에는 주로 자국 영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당연히 독일 민간인을 마주칠 일 자체가 많이 없었다. 물론 자국민에 대한 범죄는 당연히 엄격하게 처벌했다.[57]

반면 독일군의 학살극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발생하였다. 당장 아돌프 히틀러부터가 '강조명령'이라는 이름 하에 슬라브인에 대한 철저한 말살을 촉구했고, 현지 독일 장군들은 대부분 이를 충실하게 따랐다. 국방군과 SS를 구별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국방군 장성인 발터 폰 라이헤나우였고, 이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58]를 포함하여 단 한 명[59]을 제외하면 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1,360만 장병(=즉 징집된 독일 민간인) 중 누구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2백만의 사망자를 낳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역시 대표적인 예시이며, 이외에도 독일군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셀 수 없이 많다. 소련군 포로 학살도 만만치 않아서, 기록에 따르면 많은 수의 소련군 포로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해당했다. 아우슈비츠 최초의 독가스 학살은 소련군 포로 600명과 유대인 250명에게 치클론B를 살포하여 살해한 것이었으며, 최종적으로 14만에서 50만 사이의 소련 포로들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갔다. 독일군 내 소련인 포로의 사망자는 독일 측 기록에 따르면 570만 중 330만(약 57.8%)에 달했고, 이는 NKVD 문서에 따른 소련군 내 독일인 포로의 사망자 추산인 273만 중 38만(약 13.9%)[60]에 비해 네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이다.

한편 독소전쟁 말기 소련군이 동유럽을 진격하는 과정에서 200만 건이 넘는 강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강간의 군대"라고 비난하기도 하나 정작 독일군에 의한 소련 여성 강간은 그 수십 배인 수천만 건에 달했으며 강간 후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61] 실제로 42년 한 해만 밝혀진 성범죄 건수가 1천만 건이 넘고, 75만 명의 신생아가 독일군의 강간에 의해 탄생했다.[62] 42년 만 해도 이 정도인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41년부터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서 거의 쫓겨나는 44년까지의 통계치를 다 합친다면 그 수치는 배로 늘어날 것이다.

반면 소련군은 1941년 이후 이런 식의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을뿐더러, 승전이 가까워지고 점령지의 통제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부터는 강간 등 중범죄자들을 즉결처분하는 식으로 군 기강을 다잡았다.[63][64] 소련군의 강간사례로 베를린의 여인이 흔히 인용되는데, 베를린의 여인의 주제가 그런 쪽이 아니라는 건 둘째 치고 "독일군이 소련에게 한 만큼 소련군이 우리를 대했으면 독일 민족은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 이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율배반적인 태도이다.

물론 적군 포로의 사망률·민간인 대상 전쟁범죄 추이 등 객관적인 수치를 감안했을 때 소련군이 연합군 내에서 가장 악질적인 군대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를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복수라는 식으로 정당화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다.[65] 하지만 국가 단위에서 대놓고 인종청소를 자행한 것과, 국가에서 민간인 범죄를 금지하는 상황에서 병사/지휘관 개개인이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 죄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독일 정부는 독일군이 먼저 동유럽 점령지에서 벌여놓은 짓이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만행들이나 전후 독일계 주민들에 대한 보복성 학살·추방에 대한 외교적인 항의를 가급적 피하고 있으며, 기껏해야 자국 내로 도망쳐온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약간의 보조를 제공할 뿐이다. 오늘날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논의가 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대전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끼여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전후에는 사실상 소련의 식민지배까지 받았던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같이 나치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이 있는 서방연합국 쪽에서 비판하는 편이다.

또한 소련군에 대한 군사적인 방향으로의 폄하도 흔하다. 냉전이 격화되며 미 육군청 역사과가 동부전선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상대해야 했던 독일 국방군을 중심으로 동부전선사를 펴냈으며 이 과정에서 프란츠 할더를 비롯해 소련 침공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여러 독일군 출신 장성들이 개입되었기 때문. 그 때문에 독소 불가침 조약을 멋대로 어기고 소련을 침공하며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하였던 독일군들의 잘못은 거의 서술되지 않고 침공에 실패하며 물러나는 과정에서 상대해야 했던 소련군의 수와 규모를 최대한 과장시켰고, 습득이 힘든 당시 소련군 측의 작전 정보들을 최대한 숨겨놓아 마치 의도 없이 인간과 기갑의 파도를 이루어 밀려드는, 일종의 하이브마인드적 존재로서 소련군을 서술한다. 독소전쟁 항목의 냉전 종식 이전의 서방 측 연구 문단 참고.

실상 소련군은, 오버로드 작전과 그 이후 미-영 연합군의 압도적인 공세와 비교되게 그 이전부터 정립된 종심작전을 중심으로, 작전의 목표를 단순히 적군을 군사적으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의 종심을 파괴하여 독일군을 재기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오버로드 작전 중 벌어진 블루코트 작전, 코브라 작전 당시 미-영 연합군은 인력만으로 3~4:1, 기갑은 거의 4~10:1의 비율로 배치하였으나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바그라티온 작전 중의 벨라루스 탈환 작전 등지에서는 거의 2:1, 기갑도 2.5:1 가량이 투입되었다.[66]

소련군 측은 작전 목적 달성 후 전과확대, 즉 종심이 파괴된 이후 후퇴하는 독일군들을 대규모로 무력화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나, 코브라 작전의 경우는 압도적인 육군 항공대의 항공력으로 독일군을 파괴하며 돌파구를 형성하였으나 전과확대에는 미적거리며 결국 패퇴한 독일군이 다시금 재기할 시간을 내주고 말았으며, 블루코트 작전 같은 경우는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독일군을 물러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해야 하였다.

전후 소련군이 압도적인 물량을 기반으로 독일군을 파도로 만들어 밀어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전후 독일군 출신자들의 전형적인 오류로, 소련군의 작전 의도와 목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하고 정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여 적들의 수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하고 전투에 막무가내로 투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들이 그토록 폄하하던 소련군의 장교진들에게 휘말렸단 것을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한 채 밀려나고 섬멸당하기만을 반복하였던 것이다.
2.1.2.2.2. 다른 열강과의 비교
소련과의 비교 다음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방법. 주로 대영제국 시기 영국의 행보나 콩고 자유국 시기 벨기에의 악행 등이 언급되지만, 이외에도 역시 제국주의 열강이었던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나치만 욕먹는 것이 억울하다"는 식이다.[67]

특히 윈스턴 처칠벵골 대기근이 주요 타깃. 심지어 이것과 히틀러와 손기정의 악수[68] 같은 사례를 버무려서 "식민 제국들은 비백인을 차별했지만 나치 독일은 비유럽권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벵골 대기근은 당시 벵골 지방의 인프라가 엉망이었던 점,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갈등으로 인한 지자체 간 비협조, 그리고 행정력의 미비, 태풍으로 인한 수확 감소, 전시 상황까지 복합적으로 겹쳐진 단순한 기근이기에 홀로도모르대약진 운동 당시의 기근과 같은 고의성이 없었다. 그리고 손기정과 히틀러가 악수한 것은 매우 지엽적인 사례이다. 인종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에도, 타국의 대표를 접견하거나 시상하는 공식 석상에서 인종의 차이를 이유로 악수를 하지 않을 정도의 인종차별적인 행태는 대부분의 경우 예의가 아니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가원수로서 이러한 당연한 외교적 관례를 지켰을 뿐이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국제연맹 회의장에서 이탈리아 대표단은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에게 '깜둥이'와 같은 인종적인 욕설을 섞어 가면서까지 모욕하였다. 그러나 이 행태에 대해 다른 유럽 국가 대표들은 동조하기는커녕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루마니아 왕국의 대표 니콜라에 티툴루스쿠는 아예 이탈리아 대표단을 가리켜 '야만인 놈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애당초 식민지는 점령국에게 이익을 제공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착취해도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할 정도만큼은 잘 경영해야 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점령국은 식민지를 착취할 땐 하더라도 어느 정도 개발하고 자국에 우호적인 엘리트들을 심어두려 했으며,[69] 오랜 식민지 경영 경험이 있는 대영제국은 이 분야의 대가였다. 반면 간디를 필두로 한 인도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히틀러는 영국 외무장관에게 조언이랍시고 이런 말을 한다. 간디를 사살하시오. 만약 그것으로도 복종시키기에 충분하지 않다면, 국민회의 지도부 열댓 명을 사살하시오. 그래도 충분하지 않다면, 200명 등 질서가 잡힐 때까지 사살하시오. 그리고 나치가 네덜란드와 폴란드를 점령하자 진짜로 이런 정책이 실행되어, 독일군 하나가 테러로 죽을 때마다 공포감 조성을 위해 수백 명의 무고한 인질들이 끌려와 처형당했다. 심지어 레벤스라움을 위해 자신이 점령한 지역의 '열등 인종'들을 국가 정책으로 철저히 말살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별다른 충돌이 없다면 억지로 명분을 만들어 내서라도 학살을 자행했다.

정반대로 서구권에서는 다인종·다민족화 된 오늘날의 미국·유럽에 반감을 표하며 나치 독일백인우월주의의 상징으로 추앙하는 경우도 있다. 소위 "조상의 뼈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들"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러시아네오나치들이 바로 이런 부류로, 이들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친 것이 실수였을 뿐 유대인과 기타 열등인종을 말살하고 '우월한 유럽 백인들만의 통합된 제국'을 건설하려는 방향성은 옳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이 같은 백인 국가, 심지어 같은 권위주의 우파 정부에 불가침조약도 맺었으며 추축동맹국인 일본 제국(!)마저 반대했던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폴란드의 저항운동을 무참히 진압하고, 네덜란드에서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동유럽 백인들은 아예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결코 백인 민족주의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애초에 나치의 이데올로기는 오로지 게르만 민족만을 앞에 놓았고, 그 외의 인종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명예 아리아인' 취급하면서 일시적인 우호를 맺기는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열등 인종으로 여겼다.[70] "히틀러가 다른 민족은 탄압했어도 우리 민족은 우대해 줬을 거야"라는 건 말 그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물론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은 분명 보편윤리에 어긋나는 부분이 있으며, 인권이 발달된 현대 사회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한 어두운 역사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악행은 경제적 착취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식민지 경영과 궤를 달리하는 인종 말살이라는 이념적 잔혹성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근대화된 공장식 학살과 같은 국가 주도의 범죄를 낳았다. 그렇기에 제국주의를 이유로 나치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럽 열강들 중 식민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운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며, 독일 역시 나치의 죄과와는 별개로 식민지 나미비아에서의 만행 역시 떠안고 가야 하는 처지이다.
2.1.2.2.3. 연합군의 전략 폭격 비난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점을 들어 "연합군도 민간인을 죽였다"고 물타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략 폭격은 적국의 군수산업 역량을 약화시켜 장기적인 보급 및 전쟁수행능력을 저해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는 공격자의 입장에서도 최대한 억제하려고 노력한다.[71] 물론 도쿄 대공습처럼 적국 국민들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거나[72] 히로시마 핵폭격처럼 수뇌부를 겁주려고 본보기로 국민을 날리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나마도 커티스 르메이아서 해리스가 지적했듯 "총력전 체제에서는 민간인들도 가내 수공업을 통해 군수물자 생산에 도움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당화될 여지는 있으며, 실제로도 군수공장이 밀집한 지역을 선정하여 폭격하였다. 게다가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군사 목표물과 민간인이 섞여있을 경우 민간인만 피해서 공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73] 당시 연합군 장성의 일부가 민간인의 피해가 발생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당시의 기술 수준상 민간 피해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군사 목표물만을 타격하기는 불가능한 데다 어쨌든 민간인들도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전쟁 수행에 한몫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종종 지적받는 드레스덴 폭격이나 함부르크 폭격 역시, 드레스덴과 함부르크는 둘 다 주요 공업도시였으며, 드레스덴은 동부전선으로 가는 보급, 교통의 요충지였고 함부르크에는 유보트 기지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은 추축국이 먼저였으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전략 폭격 과정에서의 민간인 사상자를 이유로 기소된 독일 지휘관은 없었다. 당장 최초의 전략 폭격은 영국의 소도시인 코번트리에 행해졌고 이 이후 나치 독일은 대 피해를 입혔다고 여기며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표현으로 코번트리하다(coventrieren)라는 말을 썼다. 심지어 런던 대공습이나 충칭 대공습 등 대놓고 민간인에 대한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공격 역시 추축국 진영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2.1.2.2.4. 일본 제국과의 비교
일제의 만행을 강조하면서 나치 독일은 그나마 양호했다고 주장하는 경우이다. 주로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체계적인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나치가 일제보다도 더 큰 비판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제가 주로 악행을 자행한 일선부대 수준에서의 비교가 많다.

그러나 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만행도 일본군 못지않았다. 비록 서부전선 놓고 보면 독일군이 덜 잔혹했던 것이 사실이나[74], 동부전선까지 포함시키면 절대로 그렇게 볼 수가 없다. 일본군이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이니 신멸작전이니 하며 학살극을 벌일 때, 독일군 역시 폴란드에서의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나[75] 소련 점령지의 홀로코스트 등 무차별 학살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이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들의 수는 인류 역사상 최대 수준이다. 게다가 독일군의 포로학대 역시 일본군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포로의 사망률만 비교해 봐도 독일군에 잡힌 소련군 포로의 사망률은 57%에 달한다. 일본군에 잡힌 미군 포로의 사망률도 27%로 매우 높은 편인데 독일군은 그것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76]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둬놓고 치클론B 독가스 실험을 하여 살해하기도 하였다. 가끔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전쟁범죄를 현장 사진을 몇 장 올려놓으면 "그래도 끝까지 고통스럽게 죽이는 일본군보다는 차라리 깔끔하게 죽이는 독일군이 낫네요."라는 식의 헛소리도 꾸준히 등장하는데, 독일군도 온갖 생체실험을 자행했음은 물론이고 수용소의 생리도 일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주장과 달리 나치 독일특정 민족의 절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광신적이고 집착스러운 학살 행위는 일본 제국보다도 더 큰 충격을 주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 서양 철학계의 조류 자체를 바꿔놓았다. 당대 독일의 동맹인 일제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조차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국가대전략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그런 짓에 낭비할 만큼 국가 역량이 넘치지도 않았다. 반면 나치 독일은 아인자츠그루펜이나 홀로코스트에서 알 수 있듯 이념적인 이유로 전례 없는 규모의 집단 학살을 벌였으며, 심지어 전세가 기울어가는데도 절멸수용소로 학살을 위한 물자를 끊임없이 배송했을 정도로 전쟁 수행보다도 유대인 대학살을 더욱 우선시했다. 오늘날 독일의 학살이 일본을 비롯한 기타 케이스보다 훨씬 주목받는 건 물론 나치즘의 피해자들이 서구 백인이라는 점도 있기는 하나, 기술적·구조적으로 선진화된 현대 관료제 국가가 특정 민족의 완전한 절멸을 위해 범국가적 규모의 학살 시스템을 마련한 유일무이한 사례이기 때문이다.[77]

독일은 주로 요제프 멩겔레, 일본의 731부대이시이 시로의 주도하에 포로 대상의 각종 생체실험 역시 양국 모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 국가 모두 인류에게 유례 없이 엄청난 재앙을 안겨 줄 물건을 만들고 있었다. 독일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책임자로 하는 '우라늄 클럽'을 조직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고, 일본 역시 니고연구 등을 통하여 핵개발을 시도하였다. 독일의 경우 영국의 훼방과 연구자들의 삽질로 핵개발에 실패했고[78] 일본 또한 기초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흥남 앞바다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식의 이야기[79]가 있으나 신빙성은 매우 낮은 편이다. 승전 이후 미국의 조사에 따르면 당연히 일본의 핵무기 개발 수준은 미국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니고연구의 경우 일본 측에서는 핵무기가 아니라 원자력의 군사적 이용에 대한 연구라는 변명과 함께 실현 가능성도 낮다고 하고 있다.[80] 게다가 링크된 기사에서 일본의 핵개발이 소련 핵개발의 모태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점에서 신빙성은 물건너갔다.[81]

국내에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비교가 자꾸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언론사나 교과서 책과 같은 매체에선 일본과 비교하기 위해 현대 독일의 전후 반성이 비교적 깔끔했다고 알려져 있는 데다[82] 한국은 나치와는 달리 위안부와 731 부대로 대표되는 일제의 전쟁범죄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일 정서가 팽배하고, 게다가 냉전의 영향으로 독소전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83], 국내 민간인 대다수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라고는 홀로코스트밖에 모른다.[84] 하지만 폴란드 침공과 독소전쟁 당시 그 못지않게 잔혹하고 규모가 큰 대학살이 수두룩했다.

물론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보다 나았다"는 주장이 반드시 독일의 전쟁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반일 성향의 단체 혹은 방송과 같은 언론사들이 일본 제국이나 현대 일본을 독일과 대조하여 비판하기 위한 반례로 독일의 사례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85] 하지만 ‘나치와 일제가 벌인 전쟁범죄의 잔학성’과 ‘전후 양국이 보인 다른 태도’는 서로 전혀 무관한 별개의 사안이다. 즉, 전후 독일의 태도가 일본보다 전향적인 것은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가 더 나았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전후 독일의 처사는 그것대로 칭찬할 문제이지 그것을 빌미로 전쟁 당시 나치의 전쟁범죄를 축소하려는 시도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쪽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반대쪽을 미화하는 태도 역시, 악의적인 왜곡의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무지의 소산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존재한다.[86]

물론 독일의 전후 움직임이 더 널리 인정받고 있지만[87] 이는 전쟁범죄의 잔혹성 여부와 논점 자체가 다르다. 현대 독일 정부의 전향성과 진정성은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자체가 별게 아닌 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전후 독일과 일본 모두 나름대로 과거사를 청산했고[88] 두 나라 모두 오늘날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보편 인권의 개념을 중시하는 서방 세계의 선진국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두 나라의 외교적 행보에 대한 평가는 역사보다는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전쟁범죄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청산은 각각의 사안에 얽힌 이해당사자들끼리 정부 간 혹은 시민외교를 통해 해결할 문제이지 굳이 누가 더 낫네를 비교하며 한쪽을 옹호하거나 깎아내릴 문제는 아니다.
2.1.2.2.5. 현 이스라엘과의 비교
세계대전 이후 유대인들이 세운 이스라엘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과정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바탕으로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핍박받은 역사를 망각했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나치와 이스라엘이 다를 바 없다는 물타기식 논리를 전개하거고 유대인들을 세계의 악 취급하며 나치 정권의 홀로코스트를 은근슬쩍 가볍게 치부한다.[89]

그러나 당대 유대인들이 죄다 부자에 독일이 망하기를 바라는 매국노가 아니었다. 당장 프리츠 하버 같은 사람은 유대인이었음에도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해 오명을 감수하고 독가스를 개발하는 등 충성을 다했지만, 바로 그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악화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등떠밀려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유대인들이 정말로 독일 경제를 쥐락펴락했다 한들, 독일이라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다해야 할 의무만 다했다면 마땅히 같은 독일인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설사 유대인들이 집단화된 이익을 추구하며 다른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하더라도, 불이익을 주어 간접적으로 추방하는 정도면 모를까[90] 일방적으로 수용소에 가두어 놓고 집단 학살을 벌인 것에 대한 면죄부는 될 수 없다. 애초에 유대인 음모론부터가 거짓이지만, 설사 참이라 하더라도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인되기 어려운 인류사 최악의 인종절멸작전이었다.

또한 현대 이스라엘이 비록 가자 지구 등에서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사실이나[91], 한편으로는 적성국가들로 둘러싸인 채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을 벌여온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예방공세를 취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진 1970~1980년대 이후로는 지나친 확전을 자제하고 있고, 국지적인 도발에 대해서 과할 정도로 보복하는 것이 문제일 뿐 무력충돌이 없을 때는 팔레스타인과도 나름 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은 공격성 면에서 일제의 충칭대공습이나 미국의 도쿄 대공습 정도라면 모를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이는 족족 잡아넣어서 학살을 저질렀던 나치의 유대인 정책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보다 설령 이스라엘과 나치가 동급이라 해도 그건 각기 별도로 비판할 부분이지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면죄부가 될 수 없으며, 1930~40년대 나치의 범죄에 희생당한 유대인들 입장에서 미래에 세워질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해 책임질 이유는 당연히 없다.

게다가 오늘날 모든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개중에는 이스라엘 밖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하는 유대인들도 많다. 나치에 반대했던 독일인들이나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독일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을 강요할 수 없듯, 유대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연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류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자각한 이래 특정 국가를 멸망시키려는 경우나 단순히 악에 받쳐 특정 민족을 전술적으로 전멸시키려고 한 경우는 많았어도 특정 민족을 전략적으로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범죄는 전무후무했으며, 오직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만이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민족 집단[92]을 겨냥하여 벌어졌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점에서의 나치 옹호는 반유대주의의 죄업을 부분적으로 공유하는 유럽/북미 사회에서 특히나 금기시되고 있으며, 이들 국가에서 넷 우익 수준 이상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이런 발언을 했다가는 나치 미화에 더해 인종차별적 증오 발언으로 간주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2.1.2.3. 독일 내 집단의 무오설
2.1.2.3.1. 면죄부 및 미화
일부 독빠들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나 헤르만 호트와 같은 동부전선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나, 미국의 소환거부로 소련의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은 독일군 지휘권들에 대해, "소련이 어거지를 부려 넘겨달라고 했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또한 소련의 형무소에서 사망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분개하곤 한다.[93][94]

하지만 당대에 밝혀진 것만으로도 이들이 직접 전범행위를 지시했는지가 불확실했을 뿐 예하부대가 동부전선에서 벌인 전쟁범죄는 이미 부지기수였으며, 오늘날에는 추가적인 사료들이 공개되면서 유대인·포로 학살에 관여하였음이 다시 밝혀지는 등 애초부터 별로 면죄의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오히려 태평양 전쟁에서 비슷한 짓을 저지른 일본군 장성(마쓰이 이와네, 야마시타 도모유키, 혼마 마사하루, 홍사익 등)들이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도 감독부실의 책임을 물어 미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을 보면, 소련의 전범재판은 장성급에서는 거의 사형이 없을 정도로 관대한 편이었다.[95]
2.1.2.3.2. 국방군 무오설
나치빠와는 좀 다르지만 역시 큰 문제가 되었던 사례로 90년대와 2000년대 초까지는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과 국방군에 징집된 병사 개개인은 그저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했기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깨끗한 국방군 개념을 신봉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인 적도 있었다. 독일인들이야 섣불리 비판했다간 패드립이 될까 봐+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걸 주워섬길 이유가 있었다지만[96], 아무 상관없는 이역만리 타국(그것도 추축국 정부, 군대, 민간인 모두의 발아래 고통받은 과거가 있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믿어버리면 어쩌자는 걸까?

이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덕질 분야가 분야이다 보니 독일 국방군나치의 관련성을 과도할 정도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악행으로는 무장친위대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고 당시 독일 국방군 개개인 중에서는 나치에 협력하지 않은 사람도 있고 비판적인 사람, 심지어 정치엔 관심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가 징집영장 받아 끌려온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전공 즉 명령을 받고는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그런 명령을 (자의가 있었든 강제적으로든) 수행한 병사 각각의 전공이 곧 명백하게 나치 정권의 이득이 되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방군을 징병된 병사 개개인은 잘못이 없네 어쩌네 하면서 철저하게 나치와 분리하여서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것은, 북한군(=즉 징집 대상/징집 예정인 모든 북한 민간인)을 북한 전체주의와 분리하는 시도만큼이나 파렴치한 짓이라 할 수 있다. 독소전쟁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만 단위이다. 당시 독일의 기술력이나 전술 등을 중립적인 차원에서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지만, 독일 국방군과 그곳에 징병, 군수 형태로 인력을 제공한 독일 민간인들에서 나치를 분리하고 미화를 하는 것은 정말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2.1.2.3.3. 나치 부역기업 문제
일본과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전후 경제부흥을 위해 군수물자 생산 등으로 침략전쟁 수행에 협력했던 기업들의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밀어주는 정책을 취하였다. 벤츠, 라인메탈, 마이바흐, 폭스바겐 등등이 대표적인 예.
2.1.2.3.4. 오스트리아에 대한 책임 전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사실과, 오스트리아가 현대에도 네오나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현실로 인해, 나치에 대한 책임에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네오나치 문제는 독일도 오스트리아와 대동소이하며,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다문화, 다민족적 분위기를 싫어했고, 열등감 때문에 독일로 갔으며, 실패한 미대생 아돌프 히틀러를 전쟁과 학살을 벌인 정치 괴물로 키운 것은 엄연히 독일 내의 우경화 분위기였다.

히틀러 출생지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당시에는 현지의 유력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던 발트 3국, 루마니아 트란실베니아, 아니 심지어 러시아령 볼가 독일인이나 독일계 미국인 출신이었다 한들, 히틀러와 나치가 패악질 친 국가적 기반이 독일이었다면 결국 독일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애초에 히틀러 같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다문화주의적 이념과 결코 융화될 수 없었던 인간을 싫어서 뱉어낸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단순히 히틀러의 출신지가 오스트리아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는 것이 억울할 일이다.[97] 따라서 당연히 모든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단, 안슐루스 이후 오스트리아가 대체로 나치 정권에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일방적인 피해자 행세를 하여 비난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이는 이것대로 나치 청산의 일부로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실제 현대인 대부분은 나치의 책임을 전적으로 독일에게 전가하지 오스트리아를 이와 잘 연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치빠들의 변명과 별개로 독일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인들이 행한 과거 악행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면은 있다.[98]
2.1.2.4. 음역과 직역 고집
2차 대전 독일군 및 친위대의 부서, 군종, 계급 및 장비 명칭은 유달리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는 일이 잦다. 이는 국적을 불문하고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 전반이 지닌 대표적인 특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단 영미권뿐만 아니라 한국의 밀리터리 동호인들 또한 그들의 영향을 받아 독일어 원어를 최대한 살려서 표기하거나, 독음을 병기하곤 한다. 가령 독일 공군을 '루프트바페'로 표기하거나, 친위대 상급대장을 '최상급집단지도자'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또는 나치 독일을 지칭하는 용어로 '대독일국'을 고집하기도 한다. 나무위키 또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며, 많은 문서에서 비슷한 표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국가 군대들에 대해서는 딱히 그렇지 않다. 가령 영국 해군의 '원수(Admiral of the Fleet)'를 '에드머럴오브더플릿'이라고 발음 그대로 음역하거나 이탈리아 육군 '대장(Generale di corpo d'armata con incarichi speciali)'을 '특수임무군단장군'이라고 일일이 풀어 번역하지는 않는다. 번역의 목적은 한 언어로 쓰인 의미를 다른 언어 사용자들도 알 수 있게끔 적절하게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번역하려는 단어와 대응되는 단어가 이미 자국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원어의 느낌과 합성된 어근을 일일이 살려서 번역하는 것은 낭비일뿐더러, 독자의 이해를 방해한다. 세계 각국의 군 조직은 각자의 언어와 역사에서 기반한 각각의 명칭들을 보유하고 있다. 가령 같은 영어권이라도 미 해군 원수는 영국과 달리 Fleet Admiral이라고 다르게 표기한다. 이런 마당에 영국 해군 원수의 계급명을 그대로 풀어 함대 제독이라고 서술하면 이게 어느 정도의 계급인지, 한국군의 해군 원수(元帥)와 대등한 계급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반면 대부분의 독일군 관련 명칭들은 소리나는 그대로 표기되거나 직역된다. 물론 비슷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영미권에서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그대로 이탈리아어로 읽어 '레지아 마리나(Regia Marina 왕립 해군)'라고 부른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역시 프랑스어를 그대로 읽어 '그랑다르메(Grande Armée 대육군)'라고 불리며, 미얀마군의 경우에도 버마어를 그대로 읽어 '땃머도(Tatmadaw 국군)'라고 칭한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본국의 표기를 최대한 존중하고자 하는 영미권의 번역 전통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서로 강하게 영향을 주고 받은 유럽 문화권 국가들의 언어적 전통 상, 서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 그다지 낯설지 않고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한자문화권에 속한 한중일 3국이 서로의 조직명이나 인명을 자국 발음으로 자연스럽게 읽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독일군 관련해서 직역과 음역이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해를 방해할 정도로 특히 과도하게 활성화된 것은 사실이다. 몇몇 조직명뿐만 아니라, 계급이나 장비의 명칭까지 그러하다.

이는 1970년대 당시 서구권에서 범람했던 친독적 밀리터리 창작물들의 영향으로, 매니아화된 소비자들이 독일어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굳어진 현상이다. 전쟁이 끝나고 감옥에 가거나 목이 달아나기 싫었던 독일군 장성들은 냉전의 시작과 함께 자신들의 전쟁 범죄를 부인했으며, 미군 역사과에 초빙되어 소련과의 전쟁에서 있었던 경험들을 회고록과 역사서로 만들어 출판했다. 이 책들은 당연하게도 실패한 범죄 전쟁의 가담자인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변호와 소련군의 능력에 대한 폄하로 구성되어 있다. 동시에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누락하며, 전쟁 속에서 겪었던 흥미진진한 다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들을 포함하여 흡입력을 높인다. 대표적인 서적이 바로 만슈타인의 '잃어버린 승리'다.

이 서적들에 담긴 의도적으로 왜곡된 독일군의 시선은 냉전기 소련을 상대해야 하는 미군의 필요에 의해 일종의 전훈 분석으로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군 내부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소련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스스로를 나치와 분리한 고귀한 전사로 포장한 그들의 회고록들은 냉전 체제 하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민간으로도 퍼져나갔다. 1950~70년대부터는 대중매체의 발달과 맞물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다수의 전쟁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어 인기를 끌면서 대중으로도 이러한 국방군/무장친위대 무오설에 입각한 시각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깊어지면서, 매니아층이 형성되고 보다 고증을 따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연하게도 이들이 접하게 된 '역사적 사료'는 위와 같은 독일군 스스로가 남긴 자료들이었다. 이 매니아층은 역사적 맥락과 진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없이 단순히 좋아하는 대상의 전공과 세세한 요소들만을 탐닉했다. 다만 이들을 위해 변명을 하자면 시대적 상황 때문에 객관적인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보는 편이 더 맞기는 하다. 보완이 되는 소련측 자료들은 철의 장막 너머에 있어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역된 독일어 단어들이 퍼져나간 것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 밀리터리 동호인 단체들의 문화에서 기인한다. 1975년에 미주리 주에서 시작하여 200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미국의 밀리터리 동호인/리인액트먼트 클럽인 '총통경호대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그들은 클럽 이름을 친위대 1사단에서 그대로 따왔으며 회원 명칭조차 전부 국방군이나 친위대에서 사용하던 독일어 명칭에서 가져왔다. 클럽 내의 회원 등급 심사 또한 친위대 진급제도를 그대로 따라 독일어로 표기했고, 가입 절차를 밟고 있는 예비회원까지도 독일어 단어인 '칸디다트(Kandidat)'로 호칭했다. 회원들은 친위대를 재현하는 데에 천착하면서 옷의 재질, 무늬, 시기별 장식까지 세세하게 '고증'했는데, 가령 모직 군복이 아니라 헤링본 무늬 능직 군복을 입고 온 회원 하나는 고증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르브(Farb)'라는[99] 멸칭으로 불리며 극렬한 성토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심지어는 독일군의 콧수염 형태에 관한 자료를 찾아내어 공지사항으로 배포하거나 전쟁 당시 독일군 병사들의 이발을 담당했던 핀란드인 이발사까지 찾아내어 두발을 정리하기도 했다. 회원들 간의 관계를 '동지애'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 '카마라트샤프트(Kamaradschaft)'라고 칭했음은 물론이다.

이 클럽은 2006년 당시 회원 수가 자그마치 35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이 유일한 '독일군 고증 덕후'는 아니었다. 이외에도 많은 밀리터리 동호인들이 비슷한 조직들을 우후죽순으로 설립했다. 이 클럽들을 중심으로 생산되는 각종 독일군 관련 정보들은 당연하게도 전부 독일어를 그대로 음역했다. 클럽들에서는 독일어 단어를 영어로의 번역 없이 그대로 쓸 것을 규칙에 명시했고, 회원들은 이 독일어 단어들을 그대로 이해하고 말하는 극단적인 '고증'을 지킴으로써 자신이 세계대전 당시의 국방군과 친위대원이 되었다는 느낌을 충족할 수 있었다. 독일어 단어들은 타국인들에게는 너무나 긴 합성어와 다수의 움라우트로 인해 독음이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동호인들의 고증 열정 때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정보들은 인터넷이 생겨나자 각 밀리터리 클럽들의 홈페이지와 위키백과에 독일어를 그대로 음역한 표제어를 달고 저장되었다.[100] 이 정보들이 다양한 루트를 거쳐 국내에 그대로 수입되면서 한국 밀리터리 커뮤니티와 나무위키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때문에 미국 유타 대학교 사학과의 근현대 유럽사 연구자인 로널드 스멜서 교수와 현대 미국사 연구자인 에드워드 J. 데이비스 교수는 독일군 관련한 지나친 음역과 과잉 교정들을 친독적 토테미즘 신앙이라며 비꼬는 어조로 비판하기도 했다. 해당 조직을 과도하게 좋아한 나머지, 자기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원어의 발음과 운율을 살리는데 지나치게 천착한다는 것이다. 소위 '독빠'들이 독일 공군을 루프트바페(Luftwaffe)라고, 그리고 해군을 크릭스마리네(Kriegsmarine)라고 꼬박꼬박 불러주면서도 육군은 헤어(Heer)라고 부르는 경우는 드문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뭔가 강인하고 특별한 느낌을 주는 루프트바페나 크릭스마리네와 달리, '헤어'는 발음이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영단어 '헤어(Hair)'와 유사한 데다 뭔가 맥빠지고 멋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일군의 명칭은 일종의 고유명사화되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스멜서 교수와 데이비스 교수의 시각처럼 배척할 이유는 없다. 다만 번역의 목적으로 다시 돌아가, 이러한 현상이 과연 과한 지적 허영이 아닌지,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지 아닌지 생각해 보고 과도한 경우에는 자제해야 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가령 친위대의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친위특무대)'이나 '게슈타포(Gestapo 비밀국가경찰)'의 경우 역사상 전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던 조직 특성상, 명확하게 이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 것이다. 또는 '일반참모(Generalstab)'과 같이 독특한 특징을 지닌 제도를 고유명사로 존치하는 것은 논란은 있으나 그 제도적 특수성을 강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군의 경우 시기별로 명칭이 다른 점도 고려해, 고유명사화하여 시기를 구분하기 쉽게 한 점도 고려할 수 있다.

반면 '독일 공군(Luftwaffe)'과 같은 단어의 경우 딱히 그럴 필요가 없다. Luftwaffe란 단어를 그냥 그대로 읽어서 '루프트바페'라 표기하는 경우, 처음 보는 이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따지고 보면 그냥 한국어의 공군과 대응하는 단어일 뿐인데도 말이다. Luftwaffe라는 조직이 공군이라는 일반적인 틀을 벗어난 특별한 역사적/문화적 고유성이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이 경우에는 그냥 간단하게 '독일 공군' 또는 '나치 독일 공군'이라고 표기하면 무방하다. 글의 서두에서만 원어를 '독일 공군(Luftwaffe)' 같은 식으로 괄호 안에 병기하면 되며, '루프트바페' 같은 독음은 굳이 일일이 추가할 필요가 없다. 이는 가독성을 해치는 과잉정보이자 사족일 뿐이다.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별도의 주석을 달아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단, 루프트바페는 독빠가 아니라도 이미 2차대전 때 연합국 장병들이 고유명사처럼 쓰다 보니 굳어진 것이라, 이거만 놓고 독빠질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이견이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등 2차대전 유럽 전선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이를 고증해, 대부분의 미군 및 영국군이 독일 공군을 저먼 에어 포스가 아닌 루프트바페로, 독일 공군의 공수부대를 저먼 파라트루퍼가 아닌 팔슈름예거로 원어 그대로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 이라는 명칭 역시 마찬가지다. 이 국호는 일부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과 역사 동호인들이 여전히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표면적으로는 당시 독일의 '공식 명칭'이라는 이유에서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원어의 강인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직역을 고집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전혀 적절하지 못한 태도이다. 대독일국이라는 표현 자체가 중립적이지 못하며, 레벤스라움 건설에 대한 의지와 나치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대독일국'이라는 단어는 독일에서조차 터부시되는 대표적인 나치 단어로 인식되며, '나치 독일(NS-Staat)'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따라서 1차 사료에의 직접 인용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

가장 심한 부분은 바로 친위대 관련 문서 및 언급들로, 유달리 이런 부분에선 나무위키 문서들이 독일어 발음 혹은 직역으로 제목이 작성되거나 문서 내 언급이 되어 있다. SS 대령이라는 언급을 하면 꼭 뒤에 누군가가 (SS연대지도자) 같은 식으로 쓸데없는 표기를 달아 놓는다. 해군 계급이 언급될 때마다 대령 뒤에 (함장), (1급함장) 같은 표기가 계속 뒤따르는 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이 직역되거나 음역된 독일어 명칭들은 오직 친독적인 밀리터리 동호인들만이 사용하며 대중성이 떨어진다.[101] 반면 학계에서 저술한 역사서들이나 논문들에서는 '친위대', SS와 같이 제대로 번역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SS의 경우는 서방권에서 밀덕이 아니더라도 매우 흔하게 쓰는 약칭으로, 수많은 친위대 중 나치 친위대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편한 데다 2차대전 때부터 연합국에서도 써왔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이 두루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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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5. 대체역사에 대한 가정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로 대체역사를 상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경우에 대해 가정한 다수의 창작물들을 생산하고 또 소비한다. 2차 대전과 독일군은 대체역사 장르에 있어 독보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이 역시 기원은 냉전이 한창이고 친독적 밀리터리 클럽들이 우후죽순으로 성장하던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국방군의 전술적 능력에 심취한 밀리터리 동호인들은 소련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었을까에 대하여 많은 논의를 이어갔는데, 여기에 전문성을 불어넣은 이들은 바로 생존한 국방군 장성들과 대소전 전략을 짜던 당대 미국의 일부 군사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간섭에 대한 배제, 주요 전장에서의 군사적 실수에 대한 반성, 여러 제반 조건의 조정 등을 통해 독일군이 이길 수 있었던 환경을 다시 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전쟁의 시나리오를 짬으로써 독일이 이기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 작업은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102]과 같은 실제 참전자이자 장성들의 조언과 증언에 기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부여된 전문성은 다시 친독적 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 이 책들이 널리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독일 관련 대체역사소설들은 냉전이라는 배경 속에서 성장한 국방군 무오설워 게임, 그리고 대중 매체의 융합체였다.

국방군의 '잃어버린 승리'를 논하는 이 소설들은 그 성격상 군사적 승리를 논할 뿐, 나치 독일의 범죄는 완전히 누락한다. 가령 미국 해군대학원의 근대 유럽사 교수인 러셀 H. S. 스톨피가 쓴 "히틀러의 동부 기갑부대"와 같은 대체역사 서적들에서 소련에서 벌어진 홀로코스트나 각종 학살들은 언급되지 않으며, 대신 대숙청과 같은 소련 정부의 잔악성이 조명된다. 정리하자면 당시의 대체역사소설들은 국방군 신화에 입각하여 나치의 범죄에 대해 조명하지 않았고,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던 승리를 여러 전문가 집단의 분석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독일 국방군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심리적인 만족감을 가져다 준다.[103]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의도를 담지만 않았을 뿐이지 전후 일본에서 유행한 극우 미디어물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미국에서 형성된 이 독일군 관련 대체역사물들은 자체적인 밀리터리 오타쿠 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으로도 전파되어 환생물과 같은 서브컬쳐 문화와 다시 접목되었고, 그것이 다시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지금에 이른다.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국방군 관련 대체역사 창작물들 또한 이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가령 대체역사의 속성을 지닌 판타지 소설인 2000년대의 "강철의 누이들"의 경우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나치의 대표적인 범죄를 작중의 소련에 해당하는 국가에 전가하면서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2020년대 이후 등장한 한국의 많은 인터넷 대체역사 소설 중 독일을 주제로 하는 몇몇 소설들 역시 이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이 소설들은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을 시작 시점으로 잡거나, 원 역사를 아는 주인공이 나치에 가담한 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함으로써 나치가 연관된 논란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수의 유명한 국방군 장성들은 반대로 주역으로 등장하며 환생자인 주인공이 개변한 역사 속에서 영광을 얻는다.

때문에 이 소설의 작가들이 나치당의 범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실제 2차 세계대전과는 다른 역사를 전개한다 한들,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작품 내에는 실제 역사에서 나치당의 전쟁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던 독일 장성들이 주인공의 세력으로 병존하는 모순이 드러난다. 아무리 가상이더라도 작위적으로 역사를 비틀면서까지 실제로 범죄 집단에 가담했던 이들의 책임을 누락하고 그들의 군사적 전공만을 부각시켜 소위 ""을 채울 필요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서술 방식에 과연 문제가 없는지 항상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독일 국방군과 관련된 대체역사물들은 그 탄생 배경이 국방군 무오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장르와 소재의 태생적인 문제는 4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하다. 대체역사소설의 창작자들이 아무리 나치 요소를 배제하고자 노력하더라도, 이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오히려 창작자들의 이런 시도는 전후 독일 사회에서 국방군 군인들을 단순가담자(Mitläufer)로 분류하여 면죄부를 제공했던 행위를 답습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나치와 관련된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를 비틀고자 하는 대역물 작가들의 시도야말로, 자신들의 범죄 책임을 면하고 위대한 군사 지도자로 역사에 남고자 했던 국방군 장성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이러한 양산형 대체역사 창작물들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예시는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이다. 이 소설이 다른 2차대전 관련 대체역사 창작물들과 달리 명작 반열에 올라 수십 개국에 번역되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해리스의 유려한 문체나 각종 역사적인 문서들까지 동원하는 치밀한 집념 때문이 아니다. 국방군 무오설이라는 불순한 의도와 덕질이라는 얄팍한 목적으로 역사를 개변한 동시대의 다른 대체역사 소설들과 달리, 해리스는 나치 독일의 승리라는 가정을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적 비극과 나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을 조망했기 때문이었다.
2.1.2.6. 총론
"이 저자들은 전투, 날짜, 제복, 훈장, 약장에 관한 세부사항과 박진성에 기울이는 세심한 주의를 영웅적 에토스에 아로새겨진 편향되거나 수정주의적인 역사적 맥락과 결합한다. 아니면 역사적 맥락이랄 것이 전혀 없다. 또한 그들은 일종의 도상학적 효과를 지니도록 자기 책의 본문에 –부대의, 전투 장면의, 여러 개인의– 사진을 많이 끼워넣는다. 용어, 즉 독일군 계급, 차량 명칭, 훈장도 마찬가지여서, 늘 독일어 원어로 표기되며 토템적 가치도 지닌다. 책 제목도 낭만성을 자주 띤다. 몇 개만 들면, ‘플랑드르의 사자’, ‘유럽 북방인 전사’, ‘강철의 기사’, ‘동방을 향한 질주’, 이런 식이다. 눈길을 끄는 책 표지 그림은 한결같이 영웅적 자세를 하고 있는 사나이들의 낭만화된 모습인데, 이 모습은 그 사나이들을 찬미하고 책의 논조를 처음부터 독자에게 확실히 드러내준다. 그 논조란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의 특징이었던 진정한 참상에 관한 논쟁을 일절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로널드 스멜서, 에드워드 데이비스 2세, 《제2차 세계대전의 신화와 진실》 中

이 독빠들의 주장이나 경향은 사실 한국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원류로 시작하면 서방권, 특히 미국과 영국이다.[104]

전쟁이 끝나고 냉전체제가 시작되던 1946년부터 서방 연합군에게 최대의 적으로 떠오르던 소련군에 대응하기 위해 소련군과 전쟁을 치른 적 있는 독일 국방군 장성포로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 국방성의 역사국의 주도하에 1948년에 무려 1,000건이 넘는 문건을 작성했다. 그 말인 즉슨 대부분의 영어로 된 서구의 자료들이 독일군, 그것도 독일 국방군의 시각에 따라 미화되거나 왜곡된 게 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프란츠 할더가 존재했다. 프란츠 할더는 최대한 자신을 반나치 인사로 포장하며 문건을 작성하는 전직 국방군 장성포로들에게 국방군의 작전과 나치 친위대의 범죄를 구분하게, 자신들의 전략전술적 실패를 자연환경과 히틀러의 무능 탓으로 포장하게끔 지시했다. 냉전 체제 때문에 소련과의 대대적인 교차검증도 불가능했다.[105] 그리고 영국의 군사학자인 리델하트는 만슈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고자 했으며 전범 재판 당시 만슈타인을 옹호하며[106] 국방군의 우수함을 칭찬하는 서술 등으로 인해 전격전 같은 개념의 미화와 왜곡이 가속되었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 그리고 서독조차 국방군의 그러한 소련군 폄하가 사실임을 알면서도 묵인했다.

즉, 여기서부터 독빠들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독빠들이 "근거자료"라고 내놓는 소련군 폄하적인 영어판 저서들도 사실 독일자료나 다름없다. 사실 소련-러시아의 군사문건들은 소련 붕괴후 그 일부가 해제되어 공개되었지만, 현재도 상당수가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언어적 어려움이나 자료 접근의 문제도 겹쳐서 현재까지 일부가 아닌 온전한 소련 측 시각이 포함된 영어권의 독소전쟁사는 발간되지 않고 있다.[107][108] 그렇기 때문에 현재 독소전쟁사의 대부분은 독일군 자료로 작성되었으며,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편파적인 서술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버블경제와 함께 일본에서도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위에서 설명한 왜곡된 자료들은 자연스레 정보를 원하는 일본 밀덕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한국으로 또다시 흘러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독빠 밀덕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실 한국의 여러 오류가 있는 군사 관련 정보들 상당 수가 왜곡된 유럽발 자료들을 받아들이거나 아예 자체 생산을 하던 일본 밀덕계에서 흘러왔다고 볼 수도 있고,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 관련 이야기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1.3. 현대 밀리터리 독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연방군(서독 시대 포함) 계통 밀리터리를 좋아하는 사람들.

과거에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밀리터리 장르를 국내에서 번역해 들여오기 시작하면서 탄생했으며, 지금도 지속되는 일본의 독빠 기질에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도 2차대전 독빠들의 위세에 힘입어 일단은 카테고리가 같은 현대전 분야에도 상당수의 밀덕들이, 심지어 대전기 전문가들도 이 분야를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주로 전차에 집중되어 있으며, 레오파르트2를 추종하는 '레오신교'가 대표적이었다.

문제는 양 차 대전기 독빠들에게서 나타나듯 현대전 독빠들 역시 남의 말을 들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2000년대 밀덕판은 독빠들이 당시에 소수였던 미빠와 수는 비슷했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키배에서 독빠를 이기기 어려웠던 러빠들을 소위 본좌님 말씀 앞세워 일방적으로 린치하는 양상이 흔했다.

00년대 미군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미군의 무기와 전략전술은 사실상 거품이었고 따라서 독일식이야말로 우수하다는 견해가 나타났는데 위의 나치 문제와 결별한 독일에 대한 호감과 겹쳐 독일이야말로 EU를 이끌 국가이며 독일군은 미국을 배제한 상태에서 유럽 최강의 군사력을 투사할 것이다라는 설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였는데 문제는 유럽이 전반적으로 군축 분위기에 힘입어 돈을 덜 쓰고 있었다는 점에 있었고 독일은 특히 안보무임승차에 적극적이었다. NATO의 방위분담금조차 미국과 유럽이 반반을 부담하던 것이 미국 혼자 75%를 부담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형적으로 당장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면 속은 다 곪았다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눈에 띄는 붕괴현상은 보이지 않았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까지 키배를 할 때 어떤 본좌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언급하면서 밀리터리 본좌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이나 퍼날랐지 다른 자료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2013년에 터질 것이 터지고 만다. 레오2A7+ 수출 불발과 푸마의 사망 선고를 시작으로 까들이 소식을 빠르게 풀어버렸고 이걸 쉴드칠 '본좌'들은 진작에 공개석상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독빠들은 이를 기점으로 빠르게 주류에서 퇴장당하고 지금은 형편없는 생산능력과 발전이 없는 외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참극의 동조자로 지적받으며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현재 독일 연방군의 문제점은 단순히 예산의 문제라고 보기도 힘들다. 독일이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낮아 비판받았지만 경제규모가 받쳐주다 보니 국방비로 퍼붓는 비용이 절대 작은 수준이 아니라서 2000년 이후 독일의 국방비 순위는 10위권 밖으로 밀려난적이 없다. 문제는 이 예산을 전력 개선에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데 있었다.

또한 독일은 과거사를 유럽 안보에서 열외타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으며 독빠들은 여기에 호응하고 있다. 메르켈 정권은 독일이 군비증강을 하면 주변국이 불안해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군 재건에 손을 넣고 러시아와 밀월 관계를 강화했으며 독빠들은 좋아라 이 주장을 퍼날랐는데 러시아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이 확인된 이후 그 어떤 나라, 독일에게 역사적으로 유감이 많은 폴란드조차 독일의 군비증강에 불안해한 적이 없다. 독일의 안보무임승차를 비난하면 했다.

공동개발은 거의 독일의 영향으로 만들어졌거나 그냥 독일제로 써버리는 경우도 많다. 특히 프까들이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이 어마어마한 걸 만들었는데 전후 혼란기라 없어지거나 남에게 뺏겼다, 나토 표준을 지키려고 안 쓴 장비가 있는데 엄청난 성능을 가졌다는 둥의 주장을 펼치는데 말하는 그 물건의 이름도 모르고 주장하는 바를 구글에 검색해도 문서 하나가 안 나온다. 제작회사가 판촉하려고 올린 스펙과 광고 동영상을 그대로 믿고 외계인 장비라고 생각하는 독빠들이 있는데 물론 타국의 장비는 실전 중에 발생한 문제나 개발 중에 나타나서 이미 고쳐진 문제들까지 파내서 비하한다.

2.2. 정치 독빠

독일의 정치 제도를 좋아하는 사람들. 은근히 민주계 진영, 진보 진영에서 독일 정치에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독일 정치계에서는 독일 사회민주당이나 녹색당 등의 좌파 정당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므로 "우리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호감을 느끼는 듯하다. 이 때문에 독일식 정당명부제의 도입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 정치의 중요한 특징인 대통령 중심제양당제가 상시적인 국론 분열, 양대 정당간의 대립노선 극단화등의 부작용을 불러온다고 보고, 필연적으로 다당 구도를 만들어내게 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및 내각제 도입을 통해 그런 부작용을 해소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게다가 (봉쇄조항만 뚫으면) 군소정당의 원내진출이 쉬운 점에서 양당으로의 쏠림이 나타나기 쉬운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에 비해 소수 세력의 정치적 목소리가 반영되기 쉬움을 주장하기도 한다.[109]

그 외에도 독일의 복지 정책에 호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이 쪽에서는 독일보다는 북유럽들에 관심을 가지는 이의 비율이 높다. 그 외에 대륙법계의 주요 국가인 독일법에 대한 호감이나 제조업 수출 중심 경제, 파독 광부 및 간호사 등으로 독일에 대한 호감을 느끼는 이들은 보수 진영에서도 많이 나오는 편이다.

한편 유럽 사회의 후발주자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고, 다시금 분단된 국가에서 또다시 재통일을 이뤄내며, 현재까지도 유럽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민주적으로 유럽을 좌우하는 독일의 정치적 역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적어도 강대국 사이에 끼인 신흥국가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대한민국이 추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앞서 보여준 것이 독일의 근현대사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예컨대 일본중국 사이에 끼인 한반도의 위치는 프랑스·영국러시아 사이에 끼인 독일의 위치와 유사하며,[110] 독일의 경우 18세기까지,[111] 한국의 경우 20세기까지 오랫동안 주변국에 시달려온 처지라는 것, 냉전 시대에 분단되었다는 점도 유사하다. 때문에 프로이센 왕국의 외교적 승리를 통한 제국 형성, 국력신장에 기여했지만 끝내 몰락의 단초도 제공했던 군국주의 이념, 소련의 괴뢰국으로 끝난 동독,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에 편입되어 번영한 서독, 평화 통일, 숙적에서 혈맹으로 변한 프랑스와의 관계, 유럽연합과 같은 역내 협력체를 통한 국가 체급 한계의 극복 등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여기서 유럽을 아시아로, 프랑스·영국을 일본으로, 러시아를 중국으로, 동서독이나 프로이센-오스트리아를 남북한으로 치환해 보면, 만주 등을 겨냥한 군사적 고토 회복주의의 가능성과 위험성, 경제발전의 방식, 통일의 방식, 아시아연합 같은 지역 내 정치 협력체를 통한 외교적 영토 확장 가능성,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 외교가 취해야 할 방향성 등 반면교사로서든 성공사례로서든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이쪽은 위의 극우 파시즘적 성향의 밀리터리 독빠랑 별 접점이 없다. 그래서 반박받을지언정 비난받지는 않는다.

다만 2020년대 들어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들이 드러났는데 그럼에도 이런 문제점들은 보려 하지 않고 독일을 빠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 이런 경우는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실제 독일이아니라 '자신들 상상 속의 이상국가 독일'을 빠는 케이스가 대부분.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