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2 08:38:23

치머만 전보

치머만 전보 사건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immermann_Telegram_as_Received_by_the_German_Ambassador_to_Mexico_-_NARA_-_302025.jpg

1. 개요2. 배경3. 진행
3.1. 멕시코의 반응3.2. 영국의 해독3.3. 미국의 반응3.4. 독일의 반응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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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Zimmermann Telegram
독일어: Zimmermann-Depesche
스페인어: Telegrama Zimmermann

1917년 1월 독일 제국의 외무장관인 아르투어 치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정부에 보낸 밀지.

미국이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개시할 경우를 대비해 멕시코의 참전을 부탁하면서 그 대가로 뉴멕시코, 텍사스, 애리조나미국-멕시코 전쟁의 패배로 상실한 지역들을 되찾아주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2. 배경

1914년 협상국동맹국의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고, 전쟁 당사국에 전쟁 물자를 팔았다. 그러나 제해권에서 우위에 있는 협상국은 동맹국, 특히 독일의 해안을 쉽게 봉쇄했고, 이 상황에서 미국이 전쟁 물자를 파는 건 결국 제해권을 가진 협상국, 특히 영국으로 물자가 유입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기에 독일은 미국의 중립을 믿지 않았고, 미국의 전쟁 물자 수출을 막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영국으로 가는 선박은 모두 침몰시키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고, 또 다른 하나가 멕시코에 대한 원조였다. 독일은 멕시코와 미국의 사이가 나쁜 걸 이용해 멕시코와 동맹을 맺어 미국과 멕시코 간 전쟁을 부추기고자 했다. 당시 멕시코 혁명에 대한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미국과 멕시코 간 갈등이 거의 전쟁 직전 수준까지 치달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1914년에 미국과 전쟁을 할 뻔했던[1] 멕시코의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부를 상대로 무기를 지원해준 바 있다.

1915년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와 그로 인한 물자 부족을 타개하고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RMS 루시타니아가 격침되면서 미국인 100여 명이 사망하자 중립을 지키고 있던 미국의 대독 여론이 격앙되면서 작전을 중단했었다.[2]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로 독일의 물자 부족이 갈수록 심화됐기 때문에 독일 군부는 정치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17년 2월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할 것을 결정했다.

문제는 이 작전을 재개할 경우 미국이 연합국의 편에 붙어 전쟁에 참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이었고 이에 독일 제국 외무장관 아르투어 치머만은 미국의 관심을 멕시코로 돌리기 위해 주멕시코 독일대사 하인리히 폰 에커르트(Heinrich von Eckardt)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암호화된 기밀 전보를 보냈다.
Streng Geheim

Wir beabsichtigen, am ersten Februar uneingeschränkten U-Boot-Kriegs zu beginnen. Es wird versucht werden, Amerika trotzdem neutral zu halten. Für den Fall, dass dies nicht gelingen sollte, schlagen wir Mexiko auf folgender Grundlage Bündnis vor. Gemeinsame Kriegführung. Gemeinsamer Friedensschluss. Reichlich finanzielle Unterstützung und Einverständnis unsererseits, dass Mexiko in Texas, Neu Mexiko, Arizona früher verlorenes Gebiet zurückerobert. Regelung im einzelnen Euer Hochwohlgeborenen überlassen. Euer Hochwohlgeborenen wollen Vorstehendes Präsidenten streng geheim eröffnen, sobald Kriegsausbruch mit Vereinigten Staaten feststeht, und Anregung hinzufügen, Japan von sich aus zu sofortigem Beitritt einzuladen und gleichzeitig zwischen uns und Japan zu vermitteln. Bitte Präsidenten darauf hinweisen, dass rücksichtslose Anwendung unserer U-Boote jetzt Aussicht bietet, England in wenigen Monaten zum Frieden zu zwingen. Empfang bestätigen.“
극비

2월 1일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개시할 예정. 그렇지만 본국은 미국이 중립을 유지하기를 바람. (미국의 중립 유지가) 실패할 경우 다음 조건을 바탕으로 멕시코에게 동맹을 제안할 계획. 공동전쟁수행, 공동평화조약, 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등 상실지역을 되찾는데 독일의 절대적인 재정 지원 및 동의 보장. 상세, 세부사항은 귀하에게 일임하며, 미국이 참전할 시 극비리에 멕시코 대통령에게 해당 조건들을 제시할 것. 일본이 자발적으로 개입할 것을 유도함과 동시에 본국과 일본 사이의 중재를 맡아줄 것을 요청할 것. 또한 우리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서 영국이 몇 달 안에 평화조약에 굴복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도 같이 언급해주길 바람. 수취주의.

3. 진행

3.1. 멕시코의 반응

독일의 제안을 받은 멕시코 대통령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4월 14일에 독일의 제안을 물리쳤다.

카란사는 독일의 공식 제안을 받고는 그의 군사 참모들을 불러 독일의 참전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길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고,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멕시코는 이미 70년 전에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에 압도적으로 패배해본 경험이 있었고, 그 때보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력 차는 더 크게 벌어져 있었다. 설령 기적이 벌어져서 멕시코가 미국과의 전쟁에 이겨 옛 영토를 되찾아도 그곳의 영어권 주민들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그 당시의 멕시코는 이미 멕시코 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터진 내전으로 인해서 남의 나라 분쟁에 개입하고 자시고 할 여건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멕시코 혁명 도중에 정부수반으로 오른 카란사는 1915년 셀라야 전투에서 판초 비야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연합군을 격파한 뒤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것은 성공은 했지만 비야, 사파타를 비롯한 혁명의 군벌 세력들은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멕시코는 국내에서 내전까지 터진 상황이라 우리집 불끄기에도 급한 상황인데, 외국과의 전쟁에 개입할 만한 상황도 안 되었다. 멕시코 혁명은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 반대하는 지주, 군벌, 좌파, 농민들이 딱히 구심점 없이 대대적으로 봉기를 일으킨 것이고 이들은 쉴 새 없이 서로 통수와 배신을 때리고 있었다. 당장 제헌파(Constitucionalista)라고 불린 카란사 정권의 군권을 잡고 있던 알바로 오브레곤 장군부터 언제든지 카란사 정권 상대로 칼을 돌릴 수 있던 상황이었고 치머만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오브레곤은 카란사 정권의 뒷통수를 때렸고, 결국 1920년 카란사가 암살당한 이후부터 정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독일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 충분히 지원해주겠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불가능했다. 이미 독일 해안이 영국에 봉쇄된 마당에, 독일이 대서양 저 멀리 떨어진 멕시코에 지원을 해줄 능력 따위는 없었다. 이미 1916년에 독일은 멕시코 카란사 정부의 금 지원 요청을 거절한 바 있으니, 영국의 봉쇄를 뚫고 그보다 더 민감한 전쟁 물자를 지원해줄 여력이 있을리 없었다.

물론 앞서 설명했듯 당시 미국-멕시코 관계는 이미 최악에 이르렀던 상태였고, 치머만 전보도 이런 멕시코의 반미감정을 어느 정도 고려한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 멕시코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탓에 외교전에서 최악의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3.2. 영국의 해독

멕시코가 이 제안을 한 큐에 거절한 것과 별개로 결정적인 문제가 터졌는데 영국이 이 문서를 중간에 가로채 버렸다는 것.

독일은 원래 정기선으로 전보를 보내려고 했는데 이 배의 운항이 취소되어 두 경로로 이 전보를 보냈다. 이들 중 하나가 아래에서 언급될 미국의 롱아일랜드 전신국이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미국의 롱아일랜드 전신국을 도청했고, 이를 통해 영국이 전보를 가로챌 수 있었다. 독일이 선택한 두 경로 모두 영국이 도청하던 곳이기에 독일 입장에서는 극비문서를 두 번이나 보내 자신들의 속셈을 영국에게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독일은 이 문서가 영국 손에 들어갈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문서를 암호로 전송하며 대비를 해뒀다. 당시 독일은 훗날의 에니그마와 달리 코드북으로 암호를 주고받았고 이 코드북들은 극비사항으로 보관 중이었다. 문제는 전쟁 초기였던 1915년 러시아 제국 해군이 항행 실수로 좌초한 독일 해군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을 나포하면서 독일 측의 코드북 13040을 입수해버렸다는 사실로 이 코드북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당시 러시아와 영러협상을 맺었던 영국에게도 전달되었다. 이 코드북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전설적인 암호해독부서 '40호실'로 넘어갔고 마침 이 코드북과 치머만 전보가 쓴 암호 체계인 코드북 13042가 비슷했던 덕에 해독에 성공했다.[3]

그러나 독일 문서는 어떻게든 탈취했다고 하더라도 영국에게는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었다.
  • 어떻게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전신을 도청하지 않고, 이 암호 전문을 입수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가?
  • 이 사실이 알려지면 코드북의 해독에 성공했다는 게 밝혀질 테니까, 어떻게 독일의 암호가 뚫린 것을 독일 측에 숨길 수 있을 것인가?
  • 해독한 내용이 너무나 황당무계한 나머지 미국인들이 조작으로 믿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보통 암호책이 상대방의 손에 떨어졌을 경우를 대비해서 이중삼중으로 암호를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치머만 문서의 경우 그냥 단번에 툭 해독돼서 암호해독원들도 황당해 했다. 게다가 전보의 내용 자체도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던지라 영국 정보국에서도 한동안 "이거 미국이랑 우리 영국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독일놈들이 역정보를 흘린게 아닐까?" 라고 의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영국 정보국은 독일과 미국을 모두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의 쇼맨십을 계획했다. 우선 이들은 멕시코의 전보국에 잠입해 암호화된 전문이 이 전보국을 거쳐갔고, 영국 정보원이 이 곳에서 전보를 빼돌린 것으로 처리했다. 당시 멕시코에 있었던 영국 정보원 "미스터 H[4]"가 이 역할을 맡았으며 어느 인쇄업자로부터 해독 문서를 입수한 것으로 위장했다.[5] 이로서 첫 번째 문제와 두 번째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당시 영국에서 미국 측에 비공식적으로 코드북 13040을 건네주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아무튼 영국 정보원들은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 앞에서 이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치머만 사건의 전보를 알게 되었고, 3월 1일에 전 신문의 헤드라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 도중 이 소식을 신문으로 알게 된 치머만은 너무나 당황하고 분개해서 '도대체 어디서 암호가 새었는가?' 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구식 암호로 여러 곳에 전보를 보냈고 대사 에커르트에게 '배신자'를 찾으라는 지시도 내렸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3.3. 미국의 반응

대중들이야 루시타니아 호 사건 이후 반독 감정이 커졌다지만 우드로 윌슨 당시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수뇌부들은 어떻게든 미국의 중립을 유지하고자 갖은 애를 써 왔다.[6]

그런데 정작 독일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당시 치머만이 전보를 보내는 데 사용한 통신선인 롱아일랜드 무선국은 바로 미국이 독일에게 제공해 준 것이었다. 원래는 영국을 거치는 통신선을 썼지만 전쟁 발발 후 당연히 영국은 이 통신선을 절단해 버렸고 윌슨은 독일에게 그만 싸우고 영국과 화해하라는 의미를 담아서 자국의 통신선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그 통신선을 제3국에게 자국을 침공할 것을 사주하는 데 이용해 버린 만큼 미국의 배신감은 더더욱 컸다.

3.4. 독일의 반응

당연히 독일은 잡아뗐다. 미국과 영국의 수뇌부들이야 당연히 그게 독일의 언론플레이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증거랍시고 코드북을 떡하니 들이밀면 자신들이 그들의 코드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꼴이기 때문에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끙끙 앓았고 대중들 사이에서 과연 전보가 진짜인지 조작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특히 모국인 독일과 전쟁하는 것을 꺼려 반전 여론을 주도하던 독일계 미국인들과 미국 주재 독일 외교관들, 멕시코에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미국 주재 멕시코 외교관들은 조작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면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치머만이 3월 29일에 스스로 독일 제국 의회에서 열린 기자회견 중에 ‘완전히 보안이 검증된 방법으로 주멕시코 독일대사관에 지시를 내린 적이 있다’고 밝혀 전보가 사실임을 사실상 인정해 버렸다. 사실 치머만 본인은 미국이 중립을 지키길 원했으며 멕시코에 한 제안은 어디까지나 미국이 참전할 경우에나 유효한 것이니 사실을 밝힌들 미국을 상대로는 떳떳하다고 여겼고 미국이 중립을 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행복회로와는 달리 미국은 타국이 알량한 조건 같은 것을 걸고 자국이 쟁취한 신성한 영토를 다시 빼앗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듣자 격분했다. 독일계 미국인들마저도 치머만이 전보의 내용이 사실이라고 인정하자 즉시 독일에 등을 돌렸다. 독일 제국 정부에서 부인할 정도였으면 이 사건의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는데도 정작 외교를 맡고 있던 사람이 이 따위로 생각했으니 문제였다.

독일이 이렇게 장렬히 자폭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 내 모든 진위 논란은 그대로 종결됐고 이후 전미가 단합해서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선전포고 결의안은 상원에서 82:6, 하원에서 373:50[7]이란 압도적인 표차로 가결되었고 가결 직후 미국은 선전포고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는 독일 제국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사실 미국제1차 세계 대전에 뒤늦게 참전한 이유는 흔히 교과서에는 루시타니아호 격침 사건과 치머만 전보 사건이라고 가르치지만 실상은 조금 더 복잡하다.[8] 먼저 독일이 루시타니아 호 사건 이후로 자제했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으며, 러시아가 혁명으로 동부전선에서 이탈할 기미가 보이면서 서부전선이 다시 위험해졌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그동안 영국프랑스에게 돈을 빌려주고 외상으로 물건을 제공했던 미국의 자본가들이 두 국가들이 패배함과 동시에 빌려준 돈을 떼먹힐까봐 우려했던 것이 미국이 참전한 현실적인 이유였다. 다만 이건 냉철했던 미국 정부의 입장이었고, 여론만 고려해보자면 루시타니아호 사건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반독 감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었고,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이는 전쟁을 개시하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4. 기타

  • 치머만 전보에서는 당시 협상국 편에 서서 독일과 적대했던 일본이 언급되어 있다. 독일은 치머만 전보에서 독일-일본 간 적대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멕시코에게 중재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절대 편을 바꿀 일은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 당시 멕시코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정부는 멕시코 혁명의 혼란 와중에 집권한 경위와 당시 최고조에 이른 미멕간 갈등으로 인해 미국 정부로부터 법적인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치머만 전보 사건 6개월 후인 1917년 8월 31일에 인정을 받았다. 미국의 이러한 행동은 멕시코가 치머만 전보를 통한 독일의 제안을 거절한 데 대한 답례라고 해석된다.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후반부의 중요한 사건으로 나온다. 목자의 지시로 에릭 얀 하누센빌헬름 2세를 사주해서 전보를 보냈으나 이를 옥스포드 공작이 해독하여 영국이 알아내 미국에게 전달한것으로 각색되었다. 이에 목자는 마타 하리를 이용해 우드로 윌슨을 협박했으나, 목자가 사망하고 도촬 필름을 옥스포드에게 강탈당해 미국이 참전하여 전쟁은 끝이 난다.

[1] 미국 군함인 돌핀함이 연료를 보충하러 탐피코에 정박을 시도했다가 무단으로 기항한다고 의심한 멕시코측에게 억류되자 항의한 미군이 베라크루스를 일시 점령했다. 양국은 전쟁 직전까지 갔으나 아르헨티나와 칠레, 브라질의 중재로 사태를 봉합했다.[2] 이 당시 독일은 이미 사방이 적이었던 상황이라 굳이 미국이라는 강대국을 적으로 추가할 이유가 없어서 급히 작전을 중단했다.[3] 당시 독일 측이 사용하던 암호체계는 6×6 폴리비오스 암호표를 이용한 'ADFGVX'라는 방법이었다. 이 체계는 알파벳 26개, 0에서 9까지의 숫자 10개를 표현할 수 있었으며 행렬에 들어가는 문자들을 그때그때 섞어주어 보안을 유지했다.[4] 훗날 당시 멕시코 주재 영국대사였던 토마스 홀러 경(Sir Thomas Hohler)은 바로 자신이 이 미스터 H라고 자서전에서 주장했다.[5] '전보국과 일하는 이 멕시코 인쇄업자는 어느 날 자신의 직원 중 하나가 자신의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내는 것을 눈치챘다. 멕시코의 당시 법에 따르면 위조지폐 제작은 무조건 사형이라 이를 신고하려고 했는데 이 직원이 한 발 앞서서 인쇄업자에게 누명을 씌웠다. 그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주말이 끼여 잠시 사형이 유예되었다. 이 인쇄업자는 평소 친분이 있던 '미스터 H'에게 도움을 요청해 누명을 벗었다. 이에 그 대가로 인쇄업자는 몇 가지 유용한 서류를 정보원에게 건넸는데 여기에 우연히 전보가 껴 있었다'는 것이 영국이 짠 시나리오였다.[6] 루시타니아 호 사건도 사실 미국 정부는 배상금 지불 정도로 끝내려고 했다. 다만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비롯한 야당 쪽이나 기업들 쪽에선 참전을 주장했으며, 여론 역시 반독 감정이 우세했다.[7] 하원의 반대 50표 중 하나는 몬태나 주 하원의원인 자넷 렌킨이었다. 그녀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의 선전포고 결의안에서 유일한 반대표를 던진 평화주의자 의원이다.[8] 역사적으로도 여론과 감정이 이성을 앞서서 시작된 전쟁 중에 잘 풀린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불전쟁도 나폴레옹 3세는 이길 수 없는 것을 알았지만 엠스 전보 사건 이후로 시민들의 전쟁 여론이 너무 강해서 발발했고, 결과는 프랑스의 참패,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제2 제정 붕괴였다. 이라크 전쟁 또한 9.11 테러 이후 후세인이 조롱 발언 했다는 것 때문에 미국 내 여론이 폭발, 정부 차원에서 존재하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만들어 가며 할 필요도 없던 침공을 개시했으나 돌아온 것은 전세계적인 반미 감정 증가와 막대한 전비 소모였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 보면 당시의 미국 정부는 매우 이성적으로 행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