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8 00:56:58

벵골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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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벵골 길거리에 쓰러진 아이의 시체

1. 개요2. 배경3. 대기근4. 원인에 대한 고찰
4.1. 정설4.2. 영국의 책임 논쟁
4.2.1. 영국의 정책적 실책4.2.2. 영국의 구호 노력4.2.3. 영국의 의도적 제노사이드설
5. 출처 및 참고 자료

1. 개요

1942년 말부터 1944년까지 인도 제국의 동부에서 진행된 대기근. 약 200~300만명의 인도인이 아사한 사건으로 원인과 경과, 그리고 대처 과정에 대한 논란이 있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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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인도의 인구 밀도[1] 당시 캘커타의 모습
사실 벵골 지방은 무굴 제국 시기까지만 해도 제국내 가장 부유한 지방이자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꿀땅이었다. 비단, 모슬린, 면화 등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은 서구와 교역하며 한때 무굴제국의 세금 절반이 여기서 걷혔고, 무굴제국 GDP의 12%가 여기서 나왔을 정도. 하지만 이러한 풍요는 필연적으로 서구 열강들의 주의를 끌었고, 벵골은 인도 아대륙 전체에서도 영국에게 가장 먼저 침략당해 수탈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나와브족(Nawabs)의 뱅골독립과 마라타 (Maratha)의 침략 그리고 최종적으로 영국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쇠퇴하던 벵골은 여전히 인구 밀집도는 세계에서 가장 빽빽한 지방이라서 인도 전체 쌀 생산량의 3분의 1을 생산했고 식량 생산의 최전선으로 손꼽혔다.

벵골 대기근의 원인을 하나로 딱 잘라말하기는 어렵다. 벵골은 1901년부터 40년 동안 인구가 4,210만 명에서 6,030만 명으로 무려 43% 폭증했다.[2] 벵골 경제는 농업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농업 생산성은 세계에서 가장 낮았고 한때 비옥했던 삼각주는 환경 파괴와 지나친 농경으로 빈사 상태에 빠졌다. 경작 가능한 토지의 88%에서 을 재배했지만 그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벵골인들은 인도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쌀을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따라서 한때 식량 순수출 지방이었던 벵골은 식량 순수입 지방이 되어버려 한해 흉년이라도 들면 곧바로 기근에 취약해지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영국 식민정부의 정책적인 실패도 분명히 영향을 끼쳤다. 인도 제국의 토지 제도는 쓸데없이 복잡했고, 사회의 최하층인 소규모 자영농은 법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했다. 영국령 기간동안 부를 축적한 신흥계층인 부농 '조테다르'들은 고리대금으로 재산 불리기에 열중했다. 20세기초 세계적으로 닥친 대공황 때문에 상당수의 공식 금융기관들이 사라졌기에 가난한 자영농들은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비공식 금융, 즉 사채에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다. 자영농들의 빚은 날로 불어났고 빚을 갚지 못하면 현물을, 그마저도 없으면 바로 땅을 빼앗겼다. 부익부빈익빈은 갈수록 심해졌고 1940년대에는 수 백만명에 달하는 자영농들이 죄다 땅을 지주와 부농들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바로 이들이 대기근의 주요 피해자였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끔찍한 대재앙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일본 제국영국령 버마를 침공하며 미얀마에서 들어오는 쌀 수입이 끊어졌고 50만 명의 난민들이 벵골로 쏟아져들어왔다. 전시 인플레이션 때문에 양모, 식량, 가죽 같은 생활 필수품의 가격이 폭증했다. 대일 전선의 최전선인 벵골의 타격은 더욱 심각했다. 그와중에 영국 식민당국은 청야전술을 펼쳐 일본군이 인접한 마을 3곳의 쌀을 태우는가 하면[3] 벵골 삼각주의 배를 강제징발해 식량 수송을 교란했다. 게다가 1942년에는 인도 국내에서도 자치권을 받은 각 주마다 무역 장벽을 세워서 벵골로의 쌀 수입을 막았다. 의도는 급격한 식량 가격 인상과 해외 유출을 막으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벵골인들이 서서히 목이 졸려 굶어죽어가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버마의 상실로 인해 캘커타가 전선 최전선이자 주요 군수기지로 떠올랐다. 영국령 인도 현지정부는 사회를 '우선 그룹'과 '비우선 그룹'으로 나누고 우선 그룹에게 물자와 식량을 먼저 배분했다. 우선 그룹은 주로 부르주아, 친영 인도인, 군인, 공무원 등이었고 매주 쌀과 식량을 배급받았다. 이들은 인플레와 상관없이 싼 가격에 물건을 공급받았고 물, 의료품, 말라리아 치료제를 충분히 받았다. 1942년 7월 기근의 조짐이 보일때에는 일반 근로자에도 이를 확대했는데 12월엔 약 100만명의 뱅골 근로자와 그의 가족들도 안정적인 물자를 공급받았다. 반면 빈민, 농부 등으로 구성된 '비우선 그룹'은 꼴이 비참해졌다. 인플레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았으며 치솟는 식량 가격을 버티지 못하고 굶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식민당국이 기근 전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42년 6월 벵골 정부는 쌀 가격 통제에 나섰고 가격을 시장가보다 상당히 낮게 고정시켜버렸다. 그러자 판매자들은 아예 쌀을 팔지않고 창고나 암시장으로 보내버렸는데, 이에 당황한 정부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쌀 가격통제를 하지 않을 것임을 공표했다. 이런 조치에 힘입어 약 4개월 간 쌀 가격은 나름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10월 중순에 사이클론과 3번의 홍수가 겹치는 바람에 쌀 가격이 다시 치솟았고, 이번에는 정부의 가격 통제 시도가 먹히지 않았다. 1943년 3월에는 정부의 가격 통제가 아예 철회됐고 곡물가는 급속도로 올라갔다. 정부는 쌀이 부족하지 않지만 투기와 사재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가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1943년 말 벵골의 곡물가는 1년 전에 비해 8~10배로 뛰었고 정부는 가격 통제에 완벽히 실패했다.

벵골의 대기근에 쐐기를 박은 건 1942년 10월 몰아친 거대한 사이클론과 3번의 연이은 홍수였다. 14,500명의 사람과 190,000마리의 소가 죽었고 엄청난 양의 논이 파괴됐다. 뒤따른 3번의 폭풍 해일은 미드나포르의 방파제를 파괴했으며, 파도는 450평방마일의 농경지를 휩쓸었고 400평방마일의 땅이 홍수에 잠겼다. 바람과 폭우 때문에 3,200평방마일의 토지가 피해를 입었다. 이 자연재해로 생계에 악영향을 입은 벵골인은 최소 250만 명에 달했다. 7,400개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고 527,000채의 가옥과 1,900개의 학교가 무너졌다. 최소 1,000평방 마일 이상의 주에서 가장 비옥한 논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추가로 3,000평방 마일이 넘는 밭이 큰 피해를 입었다.

3. 대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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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4] 굶주린 인도인의 뒷모습
결국 1942년 말부터 벵골 지방에는 인류 역사에 남을만한 대기근이 닥치고야 말았다. 최대 38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벵골 사회는 붕괴 직전 상황까지 내몰렸다. 1942년 12월 쌀 값이 2배로 껑충 뛰었고 1943년부터 본격적인 대기근이 몰아닥쳤다. 사람들은 하도 수척해서 살아있는 해골이나 다름없었고 1943년 11월에 기아로 인한 사망자 수가 그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전염병마저 창궐했다. 대기근으로 인해 위생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틈을 타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된 것인데, 1943년 10월부터 질병 사망자 수가 갑자기 증가하더니 12월에는 기아보다도 더 많은 사망자를 만들어냈다. 질병 중에 가장 심각한건 단연 말라리아였다. 1943년 12월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평균에 비해 203% 높았다.[5] 벵골인들에게서 무작위로 추출해낸 혈액 샘플의 52%에서 말라리아 유충이 발견됐고 벵골인들은 말라리아에 끊임없이 고통받았다. 게다가 사이클론으로 수원이 오염되며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가 대유행했고, 엎친데덮친격으로 천연두마저 튀어나오며 벵골은 전염병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말라리아 치료제의 보급은 지지부진하게 이뤄졌다. 퀴닌은 너무 부족해서 암시장에서나 볼 수 있었고 아타브린 같은 고급 항말라리아제는 군인들에게 나눠주기에도 모자랐다. 치료제 보급은 군대와 인도 거주 영국인들 위주로만 이뤄졌고 가장 피해가 컸던 벵골 빈민층들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DDT나 제충제는 오직 군사 시설 주변에만 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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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이 사건으로 벵골은 진짜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유기, 아동매매, 성착취, 매춘이 성행하며 전통적인 가족은 아예 붕괴했다. 구걸하는 아이들의 줄이 도시 밖으로 수 마일에 이르렀으며 밤에는 아이들이 울고 기침하는 소리가 도시 전체에 가득했다. 쏟아붓는 몬순 빗줄기 속에서 아이들은 벌거벗고 가족도 돈도 없는 채로 극한상황에 내몰렸다. 어찌나 상황이 최악이었던지, 아이들이 거지가 싼 설사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곡물 알갱이를 주워먹었을 정도라는 처참한 증언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들은 연달아 무너져내렸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구재산들을 내다팔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않자 결국 가족을 버렸다. 남편은 아내를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다. 늙은이들은 집에 버려졌다. 빈민들은 조금이라도 구호물품이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지만 결국 도시에서 굶어죽었다. 캘커타로 몰려든 빈민 가정들의 절반이 해체됐다. 대략 10만 ~ 15만 명에 달하는 빈민들이 식량에 대한 희망을 품고 캘커타로 몰려들었지만 대다수가 길거리에 쓰러져죽었다. 캘커타 거리에는 이렇게 죽은 빈민들의 시체가 한가득했다. 캘커타의 사망자 대다수는 농촌 빈곤층들이 도시로 들어와 거리에서 죽어가는 형태였다.

상황이 이모양이었으니 위생은 완벽하게 파국을 맞았다. 시체의 수가 너무 많아 화장장, 매장지, 병원은 극포화 상태였고, 대부분의 시체들은 그냥 길거리에서 썩어가거나 강이나 호수 등에 버려졌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마치 굴비 꿰듯이 시체의 목에 밧줄을 매달고 도랑으로 끌고 갔다고. 시체들은 독수리자칼이 뜯어먹었는데, 심지어 아직 살아있는 와중에도 뜯어먹히곤 했다. 한 언론인은 1943년 7월 미드나포어에서 11km 정도 배를 탔는데, 눈에 들어온 것만 최소 500여 구가 넘는 시체들이 둥둥 떠있었다고 한다. 1943년 여름의 벵골은 그냥 통째로 거대한 납골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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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벵골인들의 모습과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줄
식량 뿐만 아니라 옷감에서마저 기근이 일어났다. 영국군이 전시 상황을 이유로 인도 내의 거의 모든 직물들을 싼 가격에 강제로 매입해갔다. 인도는 8억 1,900만 야드에 달하는 면직물을 강제로 수출했고 영국은 이 직물들로 200만 개의 낙하산, 4억 1,500만 개의 군복, 담요, 부츠 등을 생산했다. 군대에게 팔고 남은 매우 작은 양의 직물들만이 인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투기꾼들이 죄다 사들이는 바람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1943년 5월 벵골의 직물 가격은 425% 폭등했다. 사람들은 밖에 입고나갈 옷이 없어 외출을 못했고 서로 옷을 약탈하거나 싸우는 일이 빈번했다. 특히 여자들은 옷이 없어 하루 종일 방 안에 머물렀고, 가족들과 천쪼가리를 돌려입으면서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만 겨우겨우 밖에 나가는 수준이었다.

기근이 몰아닥치니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착취는 극도로 심해졌다. 캘커타 등 대도시로 이주온 여자와 어린 소녀들은 남성 보호자에게 버려졌거나 죽어버린 경우가 많았고, 결국 그녀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돈벌이 수단은 매춘 밖에 없었다. 기근 기간 동안 도시로 유입된 15세 이하 농촌 소녀들 상당수가 매음굴로 사라졌고 벵골 항은 매춘하는 소녀들로 북적거렸다. 소녀는 군인들에게 몸을 팔았고 소년들은 포주 노릇을 했다. 가족들도 극히 조금의 식량을 위해 딸과 아내들을 헐값에 지주나 군인들에게 팔아치우는 경우가 흔했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았지만 여성의 순결이 중요시되던 인도 사회에서 이들은 영구적으로 소외됐고, 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남편과 친가족 모두에게서 버림받았다.

이 시기에 수 만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고아로 전락했다. 가족들은 껍질도 안 벗긴 쌀 1kg에 자식을 팔아치웠다. 이들은 노예보다 '약간 더 나은 처우'를 받으며 현대판 하인으로 성장했다. 게다가 성범죄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노리고 고아들을 사들이는 경우가 많아 아이들의 고통은 날로 가중됐다.

이후 영국 본국이 사태의 심각상을 알아차리고, 1944년 이후 전세가 반전되며 영국도 여유가 생기자 벵골에 대한 대대적인 구호가 들어왔다. 1만 5천 명에 달하는 영국 군인들이 벵골의 농촌까지 구석구석 다니며 구호 활동을 펼쳤다. 1943년 8월에 철도가 복구되며 그해 말부터 대규모 구호물품들이 유입됐는데, 펀자브에서 곡물이 대량 유입되는 한편 의료물품의 양도 크게 늘었다. 특히 당시 인도 총독이던 아치볼드 웨이벌이 벵골에 지속적인 식량 구호를 약속하고 최소 배급 제도를 제정하면서 쌀 값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웨이벌 총독이 본국에게 끈질기게 식량 지원을 요구, 결국 성공시킨 덕에 벵골의 기근은 차차 해소됐다. 이렇게 벵골의 대기근은 1944년 경 종결됐지만, 대기근이 남긴 경제적, 사회적 악영향은 엄청났고 영국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와 자치에 대한 요구는 한 층 더 거세졌다.

4. 원인에 대한 고찰

4.1. 정설

기근 문서에도 있는 전쟁, 자연재해, 정책 실패 등이 겹친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 전쟁 : 당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남방작전과 버마 공세로 인해서 버마의 난민들이 벵골 지방을 통해서 유입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 해군미드웨이 해전에서 패했어도 아직까진 동남아시아 지역의 영향력이 강한 시기였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벌어진 과달카날 전역에서 지난 전투의 피해를 나름 수습한 일본 해군이 미국 해군을 상대로 몇 번의 승전을 거두는 식으로 일본 해군의 영향력이 축소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또 일본의 버마 공세로 인해 영국령 아시아 식량의 15%를 공급하는 곡창이었던 버마산 곡물 수입이 중단된 것도 큰 문제였다. 또한 전시로 인해 교통수단이 징발되거나 국가 통제하에 놓였고 때문에 원활한 식량 공급이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일본이 캘커타에 폭격을 쏟아붓자 식량 시장 불안이 더욱 심해졌다.
  • 자연재해 : 벵골 일대는 1942년 후반에 심각한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겨울 벼농사는 심각한 갈색 반점병 때문에 역대급 흉작이었고, 10월 중순에는 사이클론과 3차례의 폭풍해일이 농경지를 황폐화시키고 수 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특히 이 사이클론의 경우, 14,500명의 사람과 190,000여 마리의 소들을 죽였다. 뒤따른 3번의 폭풍 해일은 미드나포르의 방파제를 파괴했으며, 파도는 450평방마일의 농경지를 휩쓸었고 400평방마일의 땅이 홍수에 잠겼다. 바람과 폭우 때문에 3,200평방마일의 토지가 피해를 입었다. 이 자연재해로 생계에 악영향을 입은 벵골인은 최소 250만 명에 달했다. 동시에 지역 전체에 곰팡이 포자가 확산됐고 식물 곰팡이 전염병이 돌아 수확량이 수직낙하했다.
  • 영국의 정책 실패 : 아래 '영국의 책임 논쟁'에도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 사안이지만, 분명 영국에게도 기근의 책임이 존재한다. 영국은 대기근을 앞두고 일본군이 인접한 마을에 청야전술을 펼쳐 멀쩡한 식량을 태워버리는가 하면 일본군이 유용할 수 있는 배를 강제로 징발해 식량 수송을 교란시켰다.[6] 게다가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더라도, 영국은 인도로 적절한 양의 구호 식량을 보내는 데 완벽히 실패했다. 런던 정부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벵골의 식량 보유량에 여유가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전쟁 중이라는 긴박한 상황, 자연재해를 모두 고려한다고 해도 당시 인도를 최종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이었고, 영국 역시 절대 기근에 대한 책임을 피해갈 수는 없다.
  • 사채업자의 토지 수탈 : 영국령 인도의 복잡한 토지소유권 제도하에서, 무굴시대때부터 전통적인 대지주인 자민다르 (Zamindar)와 부농인 조테다르 (Jotedar)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보호를 받았지만, 소유권이 적거나 전혀 없는 소작농들은 이들로부터 지속적인 토지권 수탈을 경험해야만 했다. 소작농들은 일반적으로 비수확기에 돈을 빌려 대비하고, 농번기 수확을 통해 번 돈으로 채무를 청산하거나 여유분을 취하는 구조였는데, 1920년대 후반에 몰아닥친 세계적 대공황의 여파로 공식 자본기관들이 사라지자 농민들은 비공식금융인 사채에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주로 뱅골의 저개발지역에서 곡물과 황마거래로 큰 권력을 얻은 부농인 조테다르에게 비공식적으로 돈을 빌렸는데, 고리대금업자 조테다르들은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땅을 뺏어갔다. 대기근이 닥치기 전부터 이미 상당수의 농민들은 이들 조테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채로 근근히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또한 토지를 여러 형제자매에게 나누는 무슬림 상속 관행으로 인해 더욱 악화된 이러한 착취는 토지 소유권의 불평등을 확대했고, 따라서 기근에서 피해의 상당수는 토지가 없던 무슬림 소작농 계층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
  • 현지 악덕 상인의 사재기 : 현지 악덕 상인들이 쌀을 유통하지 않고 가격을 올리기 위해 사재기했다. 대개 이런 악덕 상인들은 힌두교도 사회 기준으로 상층 카스트거나 무슬림 사회 기준으로는 벵골어를 사용하는 현지 벵골인이 아닌 우르두어를 사용하는 비하르계였다.[7] 이들 힌두교도 지주와 상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영국 식민통치 기간 동안 벵골에 안착했던 인구였고 영국이 벵골의 치안 확보와 통치를 위해 의도적으로 이주시킨 인구였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나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돈 좀 벌겠다는데 천한 것들이 좀 죽으면 어때"라는 마인드로 사태를 키웠다. 이는 원래 공교육을 통한 인권 개념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사회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8] 또 1935년 인도 정부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에 의거하여 인도에는 수많은 지자체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동벵골 인근 힌두교 지자체들은 무슬림들이 많은 벵골에 식량지원을 거부했다. 이후 벵골은 이슬람 국가인 동파키스탄과 인도의 힌두교 다수 주인 서벵골트리푸라로 분리되었다.[9] 여기에 결정적으로 영국 식민 당국은 인근 현지인 곡물 도매상들의 무자비한 이기주의나 힌두교와 이슬람 간의 극한 종교갈등 등 이 지역의 난제들을 바로잡고 무마해서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 부정확한 통계: 당시 벵골은 추정기반의 매우 후진적인 통계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데 평소에도 30~40%의 오차는 빈번했다. 당시 인도 대륙에서의 영국인의 비율은 민간인을 포함해도 매우 낮았고 결국 하급 공무원들은 인도 현지에서 조달했는데, 이들은 통계 작성을 위한 필요한 현지 정보를 제대로 제공받지 못할 때가 많았고 공무원의 동기부여나 교육 수준도 낮았다. 기근 당시에도 부정확한 통계로 피해를 가중시켰다.
  • 전염병 : 대기근의 인명피해를 극한으로 끌어올린 주범이다. 1943년 10월부터 전염병 사망자가 미친 듯이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12월에는 기아를 앞지르고 가장 흔한 사망원인으로 떠올랐다. 질병의 사망률은 1944년 중반까지도 계속 증가했다. 질병 중에 최악은 말라리아로 1943년 12월에는 평균보다 203% 높았다. 벵골인들에게서 무작위로 뽑아낸 혈액 샘플 중 52%에서 말라리아 유충이 발견됐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이클론과 홍수, 해일이 들이닥치며 식용수의 수원이 오염됐는데, 이때문에 수인성 질병인 콜레라가 대거 유행했다. 거기다가 천연두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날로 악화됐다. 치료제는 군인들에게 나눠주기도 모자랐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4.2. 영국의 책임 논쟁

4.2.1. 영국의 정책적 실책

It was ultimately special wartime factors that caused this difficult situation to become a disastrous famine. Fearing Japanese invasion, British authorities stockpiled food to feed defending troops, and they exported considerable quantities to British forces in the Middle East. They also confiscated boats, carts, and elephants in Chittagong, where the invasion was expected. This deprived fishermen and their customers of the ability to operate and generally inhibited the sort of low-level commerce upon which many Bengalis relied for survival.

이 어려운 상황이 비참한 기근이 된 것은 궁극적으로 특별한 전시 요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두려워한 영국 당국은 방어군을 먹이기 위해 식량을 비축했고 상당한 양을 중동 의 영국군에게 수출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침략이 예상되는 치타공에서 보트, 수레, 코끼리를 압수했습니다. 이로 인해 어부와 고객의 운영 능력이 박탈되었고 일반적으로 많은 벵골인이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일종의 저급 상업이 금지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Bengal famine of 1943
최대 약 380만 명의 인도인들이 사망하였고 영국 식민당국은 1944년부터 연합군의 우세로 전황이 바뀌고 나서야 대기근을 수습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인도와의 약속을 어긴 영국에 대한 불신이 대기근으로 더욱 심해졌고 이후 벵골 대기근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꾸준하게 처칠에 대한 비판거리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이 고의적으로 인도인들을 대량학살하기 위해 대기근을 방치했다거나, 제노사이드를 벌인 것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식민당국이 기근을 악화시키는 실책을 일부 범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영국은 영국령 버마에서 일본 제국과 싸우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이 벵골을 통해 인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해 크게 2가지의 선제적 청야전술을 펼쳤다. 첫째, 영국은 벵골 만 해안 지방에서 벼와 쌀 등 잉여 식량들을 즉시 폐기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압수 식량들의 양은 그렇게까지 큰 수치는 아니었으나, 당시 구매대행업체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강압적인 징발을 고려하면, 그리고 심지어 긴급 명령이 떨어지지도 않은 지방에서도 폐기가 이루어진 걸 감안하면 실제로는 그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식량들이 폐기되거나 압수됐을 가능성이 크다. 기근을 앞두고 식량을 폐기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 조치로 인해 식량 시장에 대한 신용이 치명타를 입었으며 이는 벵골의 식량 무역 흐름에 큰 타격을 입혔다.

둘째, 영국은 벵골의 배와 각종 운송수단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일본군이 벵골 현지의 배들을 이용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 조치가 당시 벵골의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는 것. 영국군은 10명 이상을 태울 수 있을만큼 큰 배들은 죄다 파괴하거나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고 이후 무려 45,000여 척에 달하는 배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이는 강을 통한 식량의 이동과 운송에 큰 피해를 입혔고 어업 계층의 경제활동에 큰 제약을 걸었다. 영국군은 징발한 배들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았고, 이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도 제대로 된 보상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인도주정부법"에 의해 생겨난 무역장벽도 기근을 가중시켰다. 자치권을 부여받은 인도의 각 주들은 1942년 중반부터 주 간 무역장벽을 세워서 쌀과 물자의 공급을 통제했는데, 이때문에 벵골에 식량의 유입이 크게 줄었다. 원래 목적은 평시 쌀 가격 통제와 불안 요소 차단이였지만 결과적으로 뱅골기근시 주 별 이기주의로 벵골의 숨통을 틀어막는 조치가 되어버렸다. 1942년 1월에는 펀자브에서 쌀 수출이 중단됐고 얼마 안가서 중부 지방, 마드라스에서도 쌀 수출이 끊겼다. 벵골은 대기근 동안에 국내로부터 쌀을 지원받을 수 없었고 벵골은 서서히 목이 졸렸다.

영국 책임설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것이 바로 영국 본국이 심각성을 깨닫기 전까지 초기 인도의 식량지원 요구를 묵살하거나 원래 금액의 일부로 축소되었다는것이다. 사실 이 면에서 영국에게 책임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린리스고 총독, 존 허버트 벵골 주지사, 인도 최고 사령관 루이 마운트배튼 등은 1942년 12월부터 이미 본토에 인도에 대한 식량 수입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칠의 전시 내각은 몇 개월 동안이나 이 요구를 씹었다. 처칠은 군대를 최우선순위로 두어 식민지가 자체적으로 식량 수입을 위해 자체 스털링 비축량을 사용하는 것을 막았고, 자체 선박을 이용해 식량을 수입하는 것 역시 막았다.

1942년을 넘어 1943년이 되면서 대기근이 극단적인 수준으로 치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처칠 내각은 여전히 요구량보다 적은 양의 구호품을 보냈다. 특히 처칠 총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초대형 작전 준비에 모든 관심이 쏠려있어서 벵골 구호를 위한 식량 수송선 분배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해 8월 인도는 필사적으로 영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호주산 밀가루들은 인도를 제외한 영국령 실론, 중동, 남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로 향했다. 1943년 후반 아치볼드 웨이벌이 새 인도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연달아 구호를 요청했으나 런던은 이를 거부했다. 분노한 웨이벌 총독이 "영국 통치 하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닥친 가장 큰 재난 중 하나이며 인도인과 인도 체류 외국인 모두 사이에서 우리의 명성에 대한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크다"라고 비난했을 정도.

그 외에도 영국이 식민지배를 하면서 인도의 쌀농사를 축소시키고 그것을 가치가 더 높은 목화 산업으로 대체함으로서 인도의 자체 식량생산량과 인구부양력이 파괴됐다. 이것이 다른 식량공급지인 버마와 제대로 운송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을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쟁이 터지고 버마가 점령된 상황에서 영국이 식량 통제를 하고 운수 시스템에 개입을 함으로서 원활한 식량공급이 불가능해졌고 한 것도 기근 문제를 악화시켰다.

(알자지라)Churchill’s policies to blame for 1943 Bengal famine: Study

기후를 연구하면서 이 기근 참사의 원인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완전한 정책 실패”의 결과, 즉 정책 실패의 결과라는 의견이 일부 학자들에게서 제시되기도 했다.

4.2.2. 영국의 구호 노력

저는 인도의 식량 상황이 심각하게 걱정됩니다... 작년에 우리는 벵골에서 최소한 70만 명이 사망한 극심한 기근을 겪었습니다. 올해는 쌀이 풍년이지만 전례없는 폭풍과 기타 원인들로 인해 군수품 수송이 중단되었고 극심한 밀 부족에 직면해 있습니다. 1944년 9월까지 35만 톤의 호주산 밀을 인도로 보내도록 조정해 놓았습니다. 이게 가장 단시간에 끌어모은 양입니다. 더이상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미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운송량에다가 더 큰 도움을 요청하기를 크게 꺼렸지만, 인도의 만족스러운 상황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공동 계획의 성공에 매우 중요하므로 당신이 호주에서 인도로 밀을 옮길 수 있도록 수송선을 특별 할당해줄 것을 고려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호주에 밀을 가지고 있지만 배가 부족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인도 총독의 요청을 한동안 거부했지만... 더이상 당신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벵골 구호를 도와줄 것을 간청하는 처칠 총리의 서한
물론 처칠 총리에게도 할 말은 있다. 그가 당시 계획중이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절대 실패하면 안되는 작전'이었다. 그런데 1942년 1월부터 1943년 5월까지 인도양에서만 추축국은 총 873,000톤에 달하는 영국 및 연합군 상선 230척을 침몰시켰다. 만약 인도로 식량 수송선을 보내다가, 그 아까운 수송선이 격침당해버리면 어쩐단 말인가? 전시 상황 속에서 수송선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처칠 입장에서는 이탈리아시칠리아에서의 군사작전을 지원하는 데에 수송선을 이용하는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처칠은 미국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도 인도에 대한 지원을 간청했으나 루스벨트 역시 군사적 이유를 핑계대며 지원을 미뤘다.

부정확한 통계 역시 영국의 판단에 영향을 끼쳤다. 벵골의 후진적인 행정체계와 부정부패로 식량 통계가 제대로 잡히지 못한 것이다. 런던은 조금씩 구호 물자를 보내줬지만 인도는 블랙홀처럼 쌀을 빨아들였고 아무리 곡물을 보내줘도 기근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런던의 전쟁수송부 장관 프레데릭 레더스는 '이 정도 보내줬으면 통계상으로 인도에서는 오히려 곡물이 남아돌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린리스고 총독의 식량 지원 요구가 형식적인 앓는 소리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 즉 잘못된 정보로 인한 판단 착오와 전시 상황의 열악함 때문에 구호가 늦춰졌던 것이지, 일부 주장처럼 고의적으로 구호를 막은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판단 착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든 구호를 미뤄 인명피해를 늘린 것은 비판을 피할 수 없기는 하다.

영국 역시 인도의 지옥같은 상황을 대강 파악하고 어느 정도 전쟁에서 여유가 생긴 이후부터는 벵골에 대한 대대적인 구호에 나섰다. 1943년 중후반부터 벵골 지방에 대규모 구호품들이 들어왔다. 심각성을 깨달은 처칠 내각은 15만 톤의 이라크산 보리와 호주산 밀을 벵골으로 보냈다. 처칠은 9월에는 '무언가 조치를 취해아만 할 것'이라고 언급하며 벵골의 기근에 대한 해결 의지를 드러냈고 향후 4개월에 걸쳐 25만 톤에 달하는 쌀을 추가적으로 더 보내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구호로 인해 인도는 1944년 1월까지 13만 톤의 이라크산 보리, 8만 톤의 호주산 밀, 1만 톤의 캐나다산 밀, 이어서 또 호주로부터 10만 톤의 보리를 추가적으로 더 공급받을 수 있었다.
총리는 여왕 폐하의 정부가 다른 방향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감수해야만 인도의 상황에 추가적인 구호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동시에 인도 국민들의 고통에 대한 동정심도 컸다.


- 1944년 2월 14일 내각 의사록
처칠 총리의 동정심은 공허한 체면치레가 아니었다. 며칠 후 처칠은 기근에 대하여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긴급 구호를 요청했다. 웨이벌 인도 총독의 추산에 따르면 인도에는 여전히 100만 톤의 추가 구호용 곡물이 필요했는데, 곡물 자체는 호주에서 들여오면 되지만 정작 그걸 운송할 배가 없었다. 당시 영국도 딱히 방법이 없었기에 미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루스벨트 역시 태평양 전역과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온 정신이 팔려있던 탓에 요청을 거부했다.

이러한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944년 말까지 웨이벌 총독이 요청한 100만 톤의 추가 곡물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1만 5천 명의 영국 군인들이 농촌 지방까지 구석구석 식량들을 구호하기 시작했고 주 간 무역장벽이 철폐되었기에 펀자브 지방에서 쌀이 대량수입됐다. 능력 있는 관리였던 웨이벌 총독은 영국 본국으로 끈질긴 요구 끝에 어느 정도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웨이벌은 벵골 교외 지방까지 식량이 지속적으로 공급될 것을 약속했고 최소배급제도를 마련했다. 치솟았던 쌀값은 서서히 떨어졌고, 결국 대기근은 점차 줄어들더니 1944년 즈음에 종결된다.

일설에는 행정적으로 당시 인도를 통치한 주체는 영국이므로 영국책임설을 주장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당시 인도는 영국령 호주, 캐나다와 같이 이미 10년전 인도정부법 (The Government of India Act)을 통해 국방, 외교 정도를 제외한 모든 권리가 인도 현지정부에 이양된 상태였다. 따라서 당시 벵골 주정부의 총리와 행정부도 전부 인도 현지인이었고 영국은 내치에 대한 권리가 없던 상태였다.

4.2.3. 영국의 의도적 제노사이드설

파일:churchil_bengal_famine.jpg
윈스턴 처칠 총리
흔히 나오는 소리가 '영국이 일부러 인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제노사이드를 벌였다'라는 식의 음모론이다.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윈스턴 처칠이,[10] 당시 인도에서 터져나오던 독립 요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일부러 인도를 벌주기 위해 식량 공급을 막고 악의적으로 피해를 키웠다는 주장. 실제로 처칠은 '인도인들은 토끼처럼 번식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고 인도의 독립을 강력히 반대하긴 했지만, 절대 악의적인 이유로 인도의 식량 공급을 틀어막은 건 아니었다.

이건 주로 네오 나치들이 양비론으로 이용하는 주장이다. '나치 뿐만 아니라 영국도 인도에서 수백만명을 죽였는데 왜 나치만 욕을 먹는가?'가 주장의 요지. 하지만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나치 독일은 전쟁 패망 직전까지 홀로코스트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와 달리 영국 정부는 대기근을 수습을 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처칠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11]

독일 정부의 의도적인 대량 학살과 재난에 대한 방조로 인한 대규모 아사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독일은 전쟁 말기 물자가 딸리는 와중에서도 가스를 이용해서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것에도 보듯 말 그대로 자신들이 적이라고 여기는 대상에 대한 살상을 위해 계획적, 조직적인 학살을 벌였지만 인도 제국은 기근 사태를 소극적으로 방관하는 데 그쳤다.

결정적으로 영국이 굳이 적을 만들 이유가 1도 없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대기근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다. 일본에 가담한 자유 인도 임시정부군뿐만 아니라 당시 인도를 방위하던 영국군에도 인도인 병사들이 다수 배치되어 있었는데 행정력에 부담을 주고, 적들에게 명분을 줄만한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12]

1944년 7월, 처칠은 인도의 전쟁내각 소속의 관리였던 라와스와미 무달리아 경과 저녁을 먹던 중 '인도인들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낡은 관념은 사라져야 한다'라고 언급했다. 처칠 총리는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되어야 한다', '나는 위대한 캐나다나 위대한 호주만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위대하고 빛나는 인도를 보고 싶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런던 주재 스페인 대사에게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는 동안 인구가 무려 2억 명이나 늘었소'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멸족 직전까지 몰린 것과 대조하며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다. 물론 무달리아 경에게 해준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립서비스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둘다 고의적으로 제노사이드를 벌여 인도인들을 죽여버리려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특히 마두스리 무케르지(Madhusree Mukherjee)[13]의 저서 '처칠의 비밀 전쟁'을 바탕으로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들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등 피해 규모가 부풀려지거나 처칠이 인도인을 학살하기 위해서 일부러 저질렀다는 주장이 정설인 양 퍼지기도 한다.

한국 인터넷상에서는 이 주장으로 인하여 영국을 적대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서 반박하는 에서는 인도인 다음으로 벵골 대기근의 피해를 입은 벵골인들도 사망자 수가 300만을 초과한 건 아니라고 언급하며 당시 처칠이 군사물자를 줄이며 인도로 식량을 보내도록 지시했고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겐 인도의 상황을 감안하여 인도로 가는 식량 수송선을 할당 해달라고 편지를 통해 간청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14] 미국의 유명 역사가 아서 허먼 (Arthur Herman) 역시 "처칠이 없었어도 기근은 악화 되었을 것"과 "처칠과 그의 내각이 기근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때, 전쟁에 대한 노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론했다. 링크 게다가 당시엔 무려 250만 명의 인도 청년들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해 영국군 소속으로 같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선 전쟁으로 본토마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굳이 인위적인 기근을 만들어 같은 편인 인도를 팀킬해 적을 만들 이유가 하등 없었다.

5. 출처 및 참고 자료

  • Hungry Bengal: War, Famine, Riots, and the End of Empire, 1939~1946. Janam Mukherjee
  •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 마이크 데이비스 저


[1] 델리와 중부 주를 중심으로 한 인도 북서부와 벵골 지방에 인구가 미친 듯이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2] 이는 인도 제국 시기의 의료 기술 향상 덕분도 약간 있었는데, 같은 기간 인도 전체의 인구는 약 38% 증가했다.[3] 주로 벵골만 해안의 지방들에서 쌀을 태웠다. 공식적으로 태웠다고 기록된 양은 그렇게까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일단 기근이 앞닥친 상황에서 식량을 태웠다는 점에서 욕을 먹을만하고 비공식적으로 태워버린 양까지 합하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4] 위 사진은 1943년 8월 22일자 '더 스테이츠맨'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사진으로, 세계에 당시 벵골의 참혹함을 알린 사진이기도 하다.[5] 이 통계마저도 낮게 잡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말라리아의 증상은 다른 열병의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말라리라 환자들이 다른 질병에 걸린 것으로 조사됐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는 말라리아 확진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6] 다만 전쟁이라는 초국가적 사태에서 군사적인 이유로 민간인의 물자를 강제로 거두는 징발(徵發)은 한국을 포함 대다수의 나라들이 시행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7] 당시 벵골인 무슬림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습합된 형태의 수피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고 비하르인들은 이들을 같은 무슬림이 아닌 이단 종파로 여겼다.[8] 유사 사례로 1970년대 에티오피아 대기근 당시에도 국제사회의 보급물자가 에티오피아에 도착하자 암하라인 관료들이 "기근은 원래 자주 발생하던 일인데 왜 외국인들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가?"라고 따지면서 구호물자가 이웃 피지배 부족들에게 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정 구호물자를 전달하고 싶으면 "관세"를 지불하고 가라고 으름장을 놔서 이윤을 챙긴 사례가 있다. 출처 : 독재자의 핸드북[9] 이후 동파키스탄에서도 과거의 악감정까지 쌓여서 비하르인들과 벵골인들 사이에 싸움이 더 커진 것은 물론이다.[10] 처칠은 '독일인 다음가는 야만인은 인도인이며 이들은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영국의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라고 말하거나, '나는 흑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혹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홍역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고 말하자 '흑인의 높은 출산율을 볼때 흑인의 인구 감소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분명 식민지적 인종차별주의자이기는 했다.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한계라고 할 수도 있겠다.[11]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이 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를 통해서 해당 지역의 원주민과 타민족, 타인종을 완전히 절멸시킨 후에 재정착하는 것이 목표였던 반면 영국의 식민지 운영은 최소한 해당 민족의 인종과 절멸을 골자로 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서는 오히려 처칠의 노력조차 없었으면 300만 명보다 더 많은 인구가 사망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12] 당장 의도적인 학살인 홀로코스트만 해도 '비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며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반제 회의를 열 정도였다. 그리고 이 부담을 줄인다고 한 결과물조차 어떤 방향으로든 당시 독일 행정력과 연관되어 있다.[13] 서프라이즈 방송에선 역사학자라고 소개됐으나 역사 경력과 무관한 과학자고 시카고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으며 미국 과학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했다.[14] 다만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군사적인 문제로 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