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예로부터 독일은 전차로 유명했고 그에 따라 밀리터리 동호인들은 꼭 독일 성향이 아니더라도 전차 하면 독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오죽하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국내 별명이 전차군단일까. 월드 오브 탱크 같은 전차 게임에서도 이런 인식 때문에 승전국이자 전차 강국인 소련이나 미국이 아니라 독일을 첫 타자로 잡는 경우도 많다.독일이 전차로 유명한 만큼 독일 전차에 대한 과장된 서술은 대전기와 냉전기를 넘어서 레오파르트 2까지도[1] 쉽게 찾을 수 있다.
2. 원인
사실상 국제 정세 때문이다. 대전 이후 현대의 독일군 기갑병기의 경우 실제로 카탈로그 스펙 및 실전 운용에 있어서도 가격같은 문제를 제외하면 과도한 찬양이 문제일 뿐 나름의 진보한 면도 있고 강점도 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기갑병기와 관련하여서는 유난히 독일군의 기갑 병기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팽배한 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형성된 가장 큰 이유는 종전 후 냉전으로 돌입하면서 소련에 대한 폄하와 프로파간다가 필요했던 미국이 나치 독일 출신 인사들의 회고록과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소련을 폄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덕분에 독일군 출신 전차장들이 자신들의 전차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부분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한편, 소련의 T-34의 경우 지나치게 폄훼되거나 문제점이 장점보다 더 크게 부각되는 식으로 알려졌다. 더불어 그들의 자발적 증언에 의한 격파수 등이 대대적으로 홍보되면서 나치 독일의 기갑장비들의 우수성에 대한 프로파간다가 더더욱 이루어졌다.
결국 21세기에 들어 소련의 붕괴로 기밀해제된 자료가 늘어나고 이러한 자료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기존의 인식과 비교하여 맞지 않는 정보 등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데이비드 스테힐# 같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3. 제1차 세계 대전
1차대전의 독일 제국군의 전차 A7V는 카탈로그 스펙상으로 보면 영국의 Mk 시리즈의 단점을 제대로 간파하고 개량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렇게 훌륭한 물건은 아니었고 자체제작 전차도 아니었는데, 차체를 만들 자체 기술력(혹은 시간)이 없어서 미국의 홀트 트랙터를 수입해와야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포수와 기관총 사수를 사방에 배치하기 위해 엔진이 중앙에 위치했는데, 이 탓에 Mk 시리즈도 안고 있던 고질적 문제인 엔진 소음과 열기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기관총이 측면과 후면에 장착돼서 사방의 적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론상일 뿐, 각 기관총의 각도가 제한돼 있어서 자연스레 사각지대가 생겨났다. 경쟁작인 Mk 시리즈의 암컷형 측면 기관총 공격 범위가 180도를 모두 커버했던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퇴화된 부분. 그리고 장갑의 경도가 너무 높아서, 소총탄 정도에도 맞으면 장갑이 깨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연합군의 보고서에 나타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덩치가 너무 크고 설계상 참호돌파가 힘들었으며 험지주행 속도도 느리기에 적군에게 쉬운 표적이었다. 최초의 전차전에서 패배한 이유도 허무한 것이 무게중심으로 인해 전복되는 바람에 패배했다. 실제로 A7V는 장갑 재질 문제로 측면에서 기관총 사격을 당하면 전면장갑의 방호력과 다르게 승무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또한 57mm주포는 독일제가 아니라 벨기에 등지에서 노획한 포를 사용했다.다 제쳐두고 생산량이 고작 21대 밖에 없으며 비전투 손실 차량만 10대가 넘어간다.
4. 제2차 세계 대전
유독 1차대전과 현대에 비해 과장된 서술이 엄청나게 많다. 독일 전차가 당대 최강의 전차였고 적용된 과학기술력도 다른 국가에 비해 선진적이었다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그러나 잘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독일은 전차기술이 뛰어나긴 했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오히려 2차대전기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시종일관 소련군 혹은 연합군 기갑전력에 비해 지속적인 열세였다.[2] 2차대전 독일군의 전차 개발사를 보자.4.1. 전쟁 초기
1939년 폴란드 침공과 그 이듬해 프랑스 침공 때 독일군이 가지고 있는 전차 전력은 정찰전차인 1호 전차, 2호 전차와 애매한 성능의 3호 전차, 그리고 단포신 4호 전차 초기형 정도였다. 그런데 1호/2호 전차에 대해선 압도적인, 비교적 최신이라고 주장하는 3호/4호 전차 초기형과 비등한 성능인 폴란드의 단포탑 7TP 전차는 1937년에, 프랑스의 각종 단단한 경전차들과 소뮤아 S35, 샤르 B1 전차는 이미 1934년 정도에 양산중이었다. B1은 정면 장갑은 40mm 수준이었지만 그 개수형인 B1 bis는 60mm가 넘어 어떤 전차포로도 격파가 불가능했던 반면, B1 bis의 차체에 달린 75mm 야포는 모든 독일 전차를 단발에 격파 가능했으며 47mm 주포도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초기 50mm 단포신,37mm 보다 관통력이 우수했다. 당시 어떤 독일 전차라도 관통가능한 무시무시한 전력이었다.[3] 2차대전 초창기 독일 전차는 기관총을 장비한 1, 2호 전차 수준이었으며 3, 4호 전차도 15mm 장갑을 가진 등 프랑스에 비해 5년 정도 뒤진 대전차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4]그러나 독일은 3호 전차가 자동 변속기 문제로 생산이 중단되기도 하는 등 문제가 많았고 그 땜빵으로 노획 병기들과 보병지원을 위해 개발된 4호 전차 A형, B형, C형, 그리고 D형이 장포신 F2/G형이 나올 때까지 그 자리를 어떻게든 대신해야 했다.
1940~1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 순항전차의 신뢰성과 방어력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순항전차의 신뢰성은 커버넌터와 크루세이더같은 중기형이 문제였지 초기의 순항전차는 괜찮음을 넘어 신뢰를 받았다. 또한 초기형 순항전차의 방어력은 독일의 3, 4호 전차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방어력은 상대에 비해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다 독일은 영국의 마틸다 Mk.II와 정면으로 만나게 되었다.[5] 보병전차 자체는 매우 구식 개념이었지만, 북아프리카의 독일군도 구식 전차밖에 보유한 게 없어서 어떤 전차로도 마틸다 Mk.II를 격파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마틸다 Mk.II는 중전차 KV-1 초기형과 맞먹는 75~78mm의 굉장히 튼튼한 장갑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독일은 정상적인 대전차포가 아닌 88mm 대공포를 끌고와서 격파해야 했다. 이를 두고 에르빈 롬멜의 지휘력이나 88mm의 명성을 찬양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사용하지 않으면 당시 독일의 어떤 PaK 36이나 PaK 38 따위의 대전차포나 전차로도 마틸다 Mk.II를 저지할 수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영국은 전차에 철갑탄만 지급해서 이런 성과를 낸 것이지 영국 전차에 대보병용 고폭탄이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면 대전차포만으로 영국 기갑전력을 박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6] 결론만 말하자면, 전차 자체는 독일이 훨씬 약했다.
한편 1941년, 독소전쟁의 개막과 함께 독일은 T-26, BT 전차, T-28, 보로실로프 전차와 T-34-76을 만나게 된다.
이 중 T-26, BT 전차, T-28은 구식 전력이었지만, 독일 전차를 상대하는데에는 전혀 부족한 성능이 아니었다. 비록 독소전 초기 혼란으로 인한 손실은 엄청났지만, 이를 적으로 만난 독일군 또한 큰 출혈을 입었다.
특히 T-28의 경우 세간에 알려진 악평과 달리 견고한 장갑과 높은 대보병 능력으로 전차가 부족한 독일군이 격파하기 가장 까다로운 상대 중 하나로 취급할 정도로 평가받았다.
여기에 추가로, 소련 기술진은 독일 전차의 뛰어난 성능에 놀랐지만, 그건 대전차전 성능보다는 적은 소음과 주행 성능 정도의 구동계와 통신 장비 정도의 소프트 스팩이 주류였다. 소련은 1930년대 초만 하더라도 중공업화가 막 되거나 아직 완료되지 않은 농업국가였으므로 독일보다 공업력이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속된 테스트와 신규 전차 사업화 끝에 3호 전차와 초기형 4호 전차(ABCD)를 명백히 압도하며 중기형 4호 전차(FG)와도 동등하게 맞짱을 뜰 수 있는 T-34-76이 1940년에 등장한다. 경사장갑, 뛰어난 생산성과 정비 편의성 등 설계이념도 혁신적이었다. 독일군의 주력 대전차포였던 3,7cm PaK 36은 결국 T-34를 정면에서 무력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2선급 무기로 떨어졌고 이는 독일군의 머릿속에 T-34 쇼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자리잡는다.[7] 중전차인 보로실로프 전차의 경우에는 1940년 생산된 KV-1 초기형에서도 무려 75mm에 달하는 장갑을 가졌기에 독일군에게 KV-1은 B1 전차보다 장갑이 훨씬 두꺼우면서 포는 T-34-76의 그것과 동일했기 때문에 정면대결로는 절대 격파할 수가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독소전 초기의 라세이니 전투에서는 독일 제 6 기갑사단 전체가 KV-1에 대두포탑과 152mm를 달아놓은 KV-2 하나에 발이 묶이는 사태가 하루에 2번이나 일어났으며 레닌그라드 코앞에서 KV-1 5대와 마주치고 그 중 지노비 콜로바노프 중위의 KV-1 한 대가 무쌍을 찍는 등 독일 제 6군의 진격 일정 중 도합 3일을 KV 시리즈 전차 고작 7대가 저지시킨 사건도 있었다.
물론 독일도 3 · 4호 전차가 타국의 전차에 비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투중에 강력한 적군 전차가 등장할 때마다 머리를 굴려가며 우회기동에 포병지원, 공군지원, 육탄돌격등 후기 연합군이 독일의 티거나 판터를 상대하듯이 전투를 하곤 했다. 다만 이는 일반적인 대전차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금만 잘못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렇듯, 티거와 판터가 나오기 전까지의 독일 전차개발사를 살펴보면 눈물이 나는 수준이다. 실제로 초기 독일 대전차전을 담당한 건 전차가 아니라 대전차포, 대공포, 야포 등 포병의 힘이 컸다. 괜히 4호 전차 F2형의 등장이 'HAPPY TIME'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언이 아닐 정도.[8]
독일은 부족한 전차전력을 메꾸기 위해 대전차 자주포(Panzerjäger)와 돌격포(Strumgeschutz), 대전 후기엔 구축전차(Jagdpanzer)같은 물건들을 잔뜩 만들어 배치했다. 이렇게 대전차전을 위한 고정전투실 기갑을 대량 양산한 나라는 소련의 SU-85/100을 빼면 독일의 경우밖에 없었다. 대전차 자주포 중 하나의 예시로, 마르더가 이러한 땜빵 설계의 정점이다. 노획한 차체나 자국산 구형 전차 차체를 기반으로 노획한 대전차포나 자국제 대전차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인데 이것저것 유용해서 만들다보니 문제가 컸는데, 일단 뚜껑이 없으니 날씨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데다 적 보병에도 취약했다. 거기다 차체나 포가 제각각인데도 일단 주워다 쓴 독일군의 성미 덕분에 보급과 유지보수가 수월한 독일 본국제 무기들의 생산에 상당한 약영향을 끼쳤다.[9]
4.2. 전쟁 중기
1942년 드디어 괴로움 끝에 6호 전차 티거가 첫 선을 보였다. 이후 티거는 T-34와 마틸다 II, 크롬웰 전차, M3 리, M4 셔먼 등을 상대로 압도적인 전과를 보였다. 물론 티거는 저 전차들과는 다른 체급을 가지고 있다. 티거는 중전차고, T-34나 셔먼 등은 중형전차이다. 티거는 56톤이었고 셔먼과 T-34는 30톤대였다. 당연히 무게가 무거우면 더 큰 주포를 장착하고 더 두꺼운 장갑을 단 셈이니 대전차전 능력에서는 더 강할 수 밖에 없다.[10] 뒤집어 생각해 보면 무게가 무거우면 연료를 더 많이 써야 하고 기술이 따라주지 못한 경우는 구동계 전반에 무리가 가서 정비성과 신뢰성이 나빠진다. 즉 단거리주자와 장거리주자의 차이처럼 애초에 서로 방향성이 다른 것이다. 독일이 오지의 후진국도 아니고 나름의 기술강국에서 만들어진 최악의 정비성과 비싼가격, 끔찍한 전략기동능력을 가진 덩치들이 다목적 양산형 중형전차에게 진다면 오히려 말도 안되는 것이다.이렇게 티거가 중형전차들을 상대로 활약을 했지만, 타국의 중전차들과 비교해 본다면 스펙이 마냥 압도적이지만은 않고 의외로 일장일단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았다.[11]
우선 A22 처칠은 초기형에서는 나쁘지 않은 기동력과 500m내에서 티거의 차체 정면을 뚫을 수 있는 장포신 6파운더를 가지고 있었지만, 티거의 주포를 1km 밖에서도 막아내지 못 하는 등 확실히 티거에게 밀리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좁은 투영면적을 가진 정면장갑의 순수 두께를 무려 152mm까지 증강시킨 후기형 MK.VII에서는 티거와 동등한 종합방어력(전술기동력 + 방호력)[12]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소수[13]이긴 하지만 6파운더를 장착한 MK.VII는 해당 시기에 이미 6파운더 APDS가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전차전 능력에서 동급으로 볼 수도 있었다.[14] 여전히 대보병화력에서 구경차이(8,8cm vs 75mm)로 티거보다 부족하였으나 15톤의 무게차이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성과이며, 전략기동성(운송 용이성, 장거리 기동성, 유지보수성)은 티거의 구동계통보다 훨씬 나았다. 거기다 230mm 박격포가 장착된 처칠 AVRE는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는 KV-2로 전차[15]고 벙커고 건물이고 죄다 부수고 다닐 정도로 훌륭히 역할을 수행했다.
소련의 KV-1은 주포나 기동성은 티거의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KV-1C형은 티거보다 가벼우면서 동급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초기형에서 방어력을 점점 증강 시키다가 KV-1C에 가서는 최대 130mm의 장갑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 KV-1을 원본으로 한 다목적 중자주포 SU-152의 경우는 152mm 야포로 눈앞에 있는 것을 고철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는데, 이론상으로는 야크트티거나 마우스, 심지어 현대의 3세대 전차도 완파까지는 어렵더라도 대충 고폭탄 한 발 포탑 전면에 냅다 직격시키면 포신이 걸레가 되기 때문에 확실하게 전투불능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처칠 AVRE와 SU-152는 슈투름티거와 비교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방어력과 기동성이 크게 발전된 중전차인 IS-2의 중량은 46톤에 지나지 않으며, 티거의 주포로는 정면에서 약점인 관측창을 정확하게 사격하지 않으면 IS-2의 경사장갑을 뚫기 힘들었다. 반면에 IS-2의 122mm D-25T는 야포의 개량형이라 분리형 포탄을 사용하며, 너무 좁은 포탑에서 사용하기에 심각하게 재장전이 느렸지만,[16] 대전차전은 부업 수준의 역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티거의 어디를 맞춰도 그냥 무식한 탄두의 운동에너지로 격파가 가능했다.[17] 그러나 티거의 주포는 대공포를 원본으로 두고 있어 연사력이 빨랐고 상대적으로 넓은 포탑 용적 덕분에 재장전이 용이하였으며, 높은 광학 기술로 만들어진 조준경 덕택에 IS-2보다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다.[18] 이처럼 IS-2와 티거를 비교하면 일장일단이 있는 대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후기형인 IS-2 Obr. 1944부터는 티거 2와 비교해야할 정도로 강력해졌으며, 전면 관측창도 뚫기 더 어려워지고, 생산성도 IS-2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비록 그놈의 선박 적재 크레인 무게 제한 때문에 본토에만 짱박혀 있었긴 했지만, 미국의 M6 전차는 3인치 포와 열악한 측면장갑이라는 약점이 있긴 해도 전면 방호력은 티거 이상으로 강하며, 다른 미국 전차들이 수많은 파생형을 낳은 것과 M6A2E1 같은 극단적인 예를 봐서는 개량의 여지는 충분했다. 전쟁 말기에 와서는 M26 퍼싱과 파생형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공,수 모두 티거를 능가하는 전차였다.[19] 비록 M26이 1945년에 등장해서 정작 티거를 만날 일이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20] 그리고 전쟁이 조금 더 끌었으면 M6이나 M26보다 강력한 중전차들이 유럽 전선에 투입될 여지도 있었다.
역으로 중형전차인 셔먼이나 T-34를 상대할 때 티거가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영국군의 셔먼 파이어플라이 앞에서 티거와 판터가 터져나가니까 독일이 포신 긴 셔먼은 위협적이라고 인식해서 영국군은 일부러 단포신 셔먼처럼 위장하려고 파이어플라이의 17파운더 포 끝에 위장도색을 칠하거나 반대로 셔먼 Mk. III/V를 일부러 파이어플라이처럼 보이게 하여 독일군을 위협하기 위해 포신에 가짜 장포신을 붙였다. 소련의 T-34도 85mm ZiS-S-53를 장착하면서 티거는 관통할 수 없는 존재에서 거리만 좁히면 격파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미국의 76mm M1은 철갑탄으로도 티거를 관통하기에 충분했고, 설상가상으로 T4 경심철갑탄(HVAP)이 지급되며 쐐기를 박았다.[21] 이는 모두 정면으로 상대할 때였으며 75mm[22] 셔먼도 우회기동을 통해 티거를 무력화한 사례도 꽤나 있었다.[23]
또한 티거 전차부터 설계과정에서의 완벽, 섬세함이 야전에서의 운용상 문제점과 심각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판터와 티거 2의 티거와의 부품 공유는 설계, 생산 과정에서는 이득이 많았지만 부품 공유 덕분에 티거보다 소형화시킬 수 없어 차체의 크기가 매우 크며, 그 탓에 무게 대비 방어력이 좋지 못했다. 또한 다중로드휠과 광폭궤도는 설계시 수치상으로만 보이는 무게분산과 방어력 증가의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만, 야전에서는 정비병은 그 문제의 오버랩식 전륜 때문에 하나만 고장나도 한참 상관없는 바퀴를 최대 9개까지 떼어내야 했고,[24] 열차를 이용한 운반시 궤도까지 교체해야 했다.[25] 조종수는 광폭궤도와 무수히 많은 바퀴 덕분에 조종성이 안 좋아진데다[26] 이물질이 끼는 경우까지 신경써야 했다. 거기다 전면장갑 구조강도의 증가를 위한 변속기 커버의 제거[27]는 수리를 고려하지 않은 설계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안 그래도 연약한 독일 전차들의 변속기가 고장나면 교체하기 위해서 운전석과 보조운전석을 들어낸 후, 앞쪽 해치가 달린 커버를 뜯어내고, 크레인을 이용하여 포탑을 들어올리고,[28] 변속기를 교체해야 했다. 이 변속기 교체의 문제로 독일 후반기 전차들은 전투 시작 때까지 정비를 마치지 못해 가동하지 못하는 전차가 많았고, 야전에서의 수리 불가로 방기 및 파기되는 전차가 격파되는 전차보다 많았다.[29]
이때 전선 돌파용 병기로 뢰베 전차 설계안이 입안되었으나 계속 화력과 장갑이 늘어나는 반면에 속도는 날이 갈수록 퇴보되고 설상가상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늦어졌고 결국은 마우스 전차 계획안에 흡수되어 버렸다.
한편 조금 늦게 선을 보인 판터 전차는 등장 때부터 문제가 아주 많았다. 다른 건 둘째치고 구동계가 쓰레기였던 것. 열차에서 내리다가 불이 붙거나,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불이 붙는 등. 쿠르스크 전투에서 첫 투입 때 200대를 투입했으나 160대가 고장으로 주저앉은 일화는 유명하다. 이 정도 수준이면 대전차전 능력을 논하기 이전의 근본적인 문제다. 이 문제는 정비불량이 아니라 설계 결함이어서 결국 배선을 개량하고 최대속력을 일정 수치 이상 올리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으로 타협을 볼 수 밖에 없었다.[30] 이후로도 복잡한 기어 설계 때문에 후진 속도가 고작 시속 4km밖에 되지 않는다거나,[31] 포탑회전이 느리다거나, 포가 너무 길고 무거워 일정 각도에서 선회를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경사가 20° 를 넘어가는 곳에서는 포탑이 제대로 작동도 하지 않는데다가 무게에 비해 측면이 지나치게 얇아 측면을 노출시키면 간단히 격파당하는 등 소소한 문제점들이 속출했다.
4.3. 전쟁 말기
노르망디 상륙 작전 전후로 미국, 영국은 지크프리트 선을 통과하려고, 독일은 대서양 방벽에서 이동하는 벙커로 사용하거나 동부전선에서 몰려오는 소련의 T-34 러쉬를 막아내는 이동식 대전차 진지로 사용하려고 초중전차 개발에 도전한 바가 있다. 이때 개발된 초중전차들인 T28, A39 토터스, 마우스 전차를 비교해 보아도 독일의 설계능력 부족은 명백했다. 우선 방어력에서 보면 미국의 T28과 영국의 A39 토터스는 독일의 마우스 전차에 비해 2배 이상 가벼웠는데도 장갑 두께는 비슷했다. 포방패를 제외하면 T28은 최대 300mm, 토터스는 178mm – 228mm이고, 마우스 전차는 190mm - 220mm였다. 물론 마우스는 정말 전방위에 떡장을 두르고 거대한 하이브리드 엔진으로 커진 차체, 거기에 맞는 큼직한 포탑 장착은 물론이고, 12.8cm 거포까지 달았으니 200톤 가까이 나갈 법도 했지만 그게 너무나 지나쳤다.실용성 면에서 보면 마우스 전차는 당시에도 포장도로조차 제대로 굴러가지도 못했는데다 지금은 쿠빈카에 조용히 박혀 있는 신세고,[32] 토터스는 아직도 박물관에서 꺼내서 좀 정비하고 연료만 넣으면 잘 굴러간다. T28은 엔진의 출력이 부족했지만, 당시 기록 영상을 보면 그럭저럭 무난히 굴러는 가는 수준.
비슷한 중량의 야크트티거와 토터스를 비교해도, 토터스가 야크트티거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성능임에도 불구하고 기계적 신뢰성은 토터스가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33] 그리고 히틀러는 어찌어찌해서 마우스 전차 2대를 쥐어짜고 그나마 전투가 가능한 건 하나였지만, T28은 완전 전투 가능 사양으로 2대가 생산되었으며, 토터스는 6대가 생산되었고 20대 정도를 더 생산할 계획이었다. 야크트티거가 이들과 달리 실전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건 어쨌든 영국 본토에서 수송해와야하는 토터스랑 다르게 자국영토 내에서 철도로 수송할 수 있었으니까(전쟁에 져서 방어하는 입장이었으니까)가 주된 이유이다.
전쟁이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독일은 악화되는 전황 때문에 개량안이 나와도 구형과 뒤섞이기도 했으며 신형 엔진의 개발이 늦어져 기존 엔진을 장착해 티거 2의 구동계를 더 끔찍하게 만들기도 했다. 체코제 부품만 사용하는 헤처를 비롯한 일부를 제외하고 기본형 외에도 파생형이 엄청나게 나와 생산 라인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난잡해졌다.[34] 거기에다가 전쟁 후기 독일군을 상징하는 중장갑 구축전차는 같은 차체를 사용한다고 해도 포 조준을 위해 차체를 선회할 일이 많아 구동계에 부담을 줘서 더욱 자주 정비를 해줘야 했다. 이러한 정비의 불편함 때문에 독일군은 최종적으로 E 시리즈라고 불리는 표준 차체 시리즈를 개발했으나 E 시리즈는 자기들만의 호환성을 신경쓴다고 기존 전차와는 연관성이 크게 사라졌다. 결국 E-5 구축전차 목업 시제품 한 대와 마우스를 대체할 표준형 초중전차인 E-100의 미완성 차체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전차 발전은 700마력 엔진을 탑재한 티거와 경사장갑을 채용한 판터에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이 시기는 무려 1942년 말에서 1943년 초의 전쟁 중반 시기였다.[35]
간단히 예를 들자면 1944년, 독일 최강의 중전차인 티거 2가 등장하지만 티거 2는 판터보다도 기계적 결함이 심각했다. 결국 티거 2와 야크트티거, 판터와 야크트판터는 주포와 장갑만 보고 전차를 개발하여 중량을 지나치게 늘린 전차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티거 2의 경우 구동계 문제가 극심했는데, HL234나 HL295 같은 차세대 고마력 엔진 개발이 늦어져 미국에서는 이미 1940년에 항공기용 엔진을 개량해 전차에 장착까지 끝낸 1000마력에 근접한 엔진도 나오는 판에 계속 700마력짜리 HL230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영국의 중전차들이 추중비에 상관없이 미, 독, 소, 영의 전차들 중에서 최고의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고 엔진이 완성되었다고 해도 독일 전차들의 서스펜션과 변속기 자체가 한계였기 때문에 개선되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장갑을 두껍게(=두꺼운 금속판을) 만드는 건 공업력이 충분히 된다면 할 수 있다. 주포를 강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비슷하다. 애초에 전함을 건조할 때도 이 정도로 철을 가공하고 포를 만드는 것은 연합군 소속 강국들에게 있어선 어렵지 않았다. 연합국은 할 수 없어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은 선박 적재 크레인의 40톤 무게제한에 걸려서 폭과 길이와 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소련은 슬랴카트로 유명한 열악한 도로망에 걸려서 중량을 제한한 것일 뿐이다. 결국 판터와 티거 2는 당시 독일 설계역량의 종착점이자 한계였다.
물론 당시 독일의 상황이 심각하게 암울해서 기존 설계를 기반으로 개량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변호는 가능하지만 여유가 있던 상황에서 설계된 판터를 본다면 정말 그것만이 문제였을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반대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겨우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소련군이 만든 전차가 T-44와 IS 시리즈인 것을 보면 비교될 수 밖에 없는데, T-44와 IS전차가 각각 T-34, KV-1과 같은 엔진을 사용하면서도 오로지 설계의 변경 만으로, 무게와 내부용적의 큰 변화 없이 엄청난 방어력 향상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만 전차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미국 역시 전쟁 초기에 전차 개발에서 크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경전차 분야에서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누어져서 M2 경전차와 M1 전투 차량이라는 병과별로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고 나름 장갑이 두껍다는 스튜어트 전차도 체급 문제 때문에 태평양에서나 제대로 써먹었지 유럽에서는 치안부대나 정찰장갑차 신세였다.
중전차 분야에서 M6 전차의 테스트 차량인 T1을 만들 때는 남들은 다 효율성 낮다고 대부분 때려친 지상전함 컨셉으로 기관총을 쓸데없이 주렁주렁 달았으며, T1의 문제점을 개선해서 제대로 된 전차가 된 M6은 정작 선박 적재 크레인의 무게 제한과 티거쯤은 셔먼과 울버린으로 아주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상층부의 오판으로 본토에서 퍼레이드나 실험용으로 놀고 있었어야 했다.[36]
중형전차의 개발도 순탄치는 않았는데, 일단 75mm를 장착한 M3 리는 꽤나 호평을 받았다.[37] 영국군이 M3를 운용하면서 리벳 조립의 단점과 쓸데없이 높은 포탑 등 다양한 문제점을 미국에 알려줬고 이를 기반으로 M4 셔먼이 탄생하게 된다. 이후 셔먼의 여러 사소한 단점과 중전차의 부재 때문에 셔먼을 보완할 다양한 계획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영미 합동 보병(중)전차 프로젝트였던 T14, 신형 현가와 구동계를 적용한 셔먼을 대체할 중형전차인 T20 계열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완성이 늦어져 좋든 싫든 셔먼을 사용해야 했다.
거기에다가 전술적 오판까지 있어서 독일 전차를 얕보고 몇대 없는 티거쯤은 물량만 놓고 본다면 주력이 된 M4 셔먼과 대전차 자주포인 M10 울버린으로 제압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가 판터와 티거 2에게 쓸려나갔다. 심지어 그 대전차 자주포인 M10 GMC의 3인치 포와 M18 헬캣의 76mm 포가 독일의 판터[38]의 차체 정면을 못 뚫는 바람에[39] 울버린이나 셔먼 차체에 90mm 대전차포가 장착된 M36 잭슨 포탑을 올리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40]
한편 영국 역시 전차개발에서 큰 난항을 거쳤는데, 전쟁 초기 전차들이 고폭탄이 없어 고통받았으며, 순항전차는 A13 커버넌터에서 급한 개발과 소형화가 개발사의 노하우 부족으로 큰 문제가 생겼고, 그나마 실력이 있던 개발사가 만들어 사정이 나앗던 크루세이더 전차도 급한 개발로 완벽하지 못 했다. 자국산 크롬웰를 기반으로 화력을 보조하려고 만들었다가 대형 포탑 때문에 기계적 신뢰성이 낮아진 챌린저도 있었다.
소련은 쿨리크의 T-34 생산 방해와 같은 정치적인 공세에[41] 생산성을 중시하는 바람에 인간의 편의를 무시한 외적 문제가 많았다. 특히 소련 전차는 카탈로그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단점이 승무원들의 고통을 늘렸다. 대표적으로 T-34의 장대한 항속거리는 외부연료탱크와 비좁은 전차 내부에 쑤셔넣은 연료탱크때문에 가능했는데, 이는 피탄시 화재의 위험을 높혔다. 한편 설계진에는 독일에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있다면 소련에는 조제프 코틴이 있어 전차설계에서 이상한 데 집착한 것은 덤.[42] 물론 소련에서도 전체적인 개발 방향이 잘못된 사례도 있었다. 예를 들어 독소전쟁이 터지기 전, 다포탑 전차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서 T-28 중형전차, T-35 중전차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기도 했다.[43] 독소전쟁이 터진 다음에는 전선이 급격하게 밀리면서 공장을 옮기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급하게 T-26, T-60 같은 경전차를 대량 생산했지만 설계적 한계와 신뢰성의 부족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못했다. 결국 시간을 끌기 위한 경전차들은 독일 전차에게 무참히 격파되었다.[44]
일찍 망해서 삽질을 오래 하진 못했지만 프랑스의 경우 근본적으로 개발 방향이 잘못되었다. 능률이 떨어지는 1인 포탑부터 시작해서 그나마 괜찮은 성능을 가진 소뮤아 S35와 르노 B1도 포탑에 큐폴라가 있지만 해치가 없어서 포탑 뒷문을 열고 외부 관측을 해야 했다.
그래도 전쟁 최후 말기에 연합군은 위에 서술된 전쟁 기간 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전차개발 이론을 발전, 정립 시키며 확실히 전쟁 초기보다 뛰어난 전차들을 설계하였는데, 미국의 경우 2차 세계대전 최고의 경전차로 뽑히기도 하는 M24 채피, 셔먼의 개량형인 M4A3E2와 M4A3E8, 공격력과 방어력이 대폭 향상된 M26 퍼싱, 초중전차 T28과[45] 티거 2 수준의 중량에 더 우수한 공방능력을 갖춘 T29, 155mm 주포를 장착한 T30, 퍼싱을 바탕으로 차체를 늘린 후 훨씬 강한 초장포신 90mm 포와 크로스드라이브 자동변속기를 장착하는 방식으로 강화한 T32, 120mm 주포를 장착한 T34 같은 시제 중전차를 시험해보고 있었다.[46]
소련의 경우 IS-2보다 1톤 무거우면서 방호력을 크게 증가시킨 IS-3[47]와 T-34, T-43의 단점이 완전히 사라진 T-44가 양산에 들어갔으며 T-44를 강화한 오비옉트 137 프로토타입도 시험 중이었다.
영국의 경우 처칠 전차의 고질병이었던 낮은 화력을 개선하기 위해 17파운더를 단 처칠인 A43 블랙 프린스와 크롬웰 전차의 화력과 장갑을 강화한 A34 코멧 순항전차로 출발했지만 블랙 프린스는 기존 차체형상을 유지했고 코멧은 여전히 공간상의 문제로 17파운더를 그대로 달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 최초의 MBT로 평가받는 A41 센추리온 Mk.I를 개발해서 1945년에 최종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48] 또한 지크프리트 선 돌파용 무포탑 돌격전차들인 브리티시 너필드 AT 시리즈 설계안을 연구한 후 최종적으로 A39 토터스를 양산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4.4. 총론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때 너무 넓은 전장에서 교전하게 되었지만 정작 기갑 장비의 수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 전차에 과도한 성능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독일의 전차는 정비의 난해함, 떨어지는 생산성, 부품의 부족한 수명, 좁은 포탑, 느린 포탑회전, 전차장에게만 치중된 관측장비 등 카탈로그만 보고 알 수 없는 다양한 문제가 있어서 전투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차종을 생산했으며 그중 특별히 선호한 무포탑 구축전차는 같은 차체를 사용하는 전차보다 자주 정비를 해줘야만 했다. 거기에다가 구동계가 견딜 수 있는 중량을 초과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각종 잔고장의 원인이 되었다.종합해서보면 독일 기갑은 전장에서는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그 뒤에는 독일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보급과 정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독일의 전차군단의 명성과 활약은 유명하고 대단했기에 그런 단점이 덜 부각되게 되었으며[49][50] 독일 축구 대표팀에도 전차군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전략전술 쪽에서도 오해가 꽤 있는데, 전격전 문서로. 사실 상술했던 시시한 것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이거야말로 독일 기갑 관련 루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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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 플랜 | 3/4호 전차, VK 16.02 레오파르트, 7호 전차 뢰베, 9 / 10호 전차, E 시리즈, 1인용 경전차 시안 "마우스", 슈투름판처 Bär, 슈투름판터, P.1000 라테, P.1500 몬스터, 마레샬 구축전차 | |
차량 | 독일 국방군/차량, 퀴벨바겐, 슈빔바겐, 슈타이어 1500A, Büssing-NAG T500, Büssing-NAG G31, Büssing-NAG L4500, 오펠 블리츠, 포드 B3000S, V3000S, V3000A, 보르크바르트 B3000, 메르세데스-벤츠 G5, 메르세데스-벤츠 L1500, 메르세데스-벤츠 L3000, 메르세데스-벤츠 LG3000, 메르세데스-벤츠 L4500, 메르세데스-벤츠 L6500, 크루프 프로체, 타트라 T111 | |
모터사이클 | DB / DBK, KS 750, 케텐크라프트라트, R-75 | |
그 외 | 동부용 궤도형 트랙터, 동부용 차륜형 트랙터, 수륙양용 트랙터, 골리아트 지뢰, 보르크바르트 4호, 스프링거 무인자폭차량, VsKfz 617, 쿠겔판처 | |
기타 | 독일 기갑 병기의 역사와 루머 | |
※ 당시 독일은 고질적인 무기부족, 점령국가의 치안을 이유로 기존의 노획 전차 및 차량(Beutepanzer)에 새로운 제식명을 붙여 사용했다. | ||
※둘러보기 : 나치독일군의 운용장비 | 대전기 기갑차량 | }}}}}}}}} |
5. 냉전/현대전
2차대전 직후,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남기고 간 판터 전차와 야크트판터를 운용했지만 얼마 안 가 자국산 전차인 ARL-44로 대체되었다. 무기대여법으로 받았던 셔먼을 주로 사용하던 프랑스군의 평가서류에 따르면 방어력이나 공격력, 광학장비 등은 우수했으나 기계적인 결함이 많고 구동부 마모가 심했기 때문에 철도 운송을 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활약하기 힘든 물건으로 보았고, 셔먼의 헌터 킬러와 많은수의 관측장비에 비해서 부족한 판터의 표적획득능력 부족을 지적하였다. 결국 그 중에 우수한 편이었던 75mm 주포만이 경전차[52]에 장착되면서 판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소련군 역시 소수의 판터를 1950년대 중반까지 비축하고 있었으나 자국의 전차에 밀려 퇴역시켰다.한국전쟁이나 인도차이나 분쟁처럼 2차대전 직후에 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들의 전차전을 보면, 대부분 셔먼이나 T-34 등 승전국 측의 전차이다. 남한과 일본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셔먼과 채피를, 북한과 중국, 북베트남 같은 사회주의 국가는 T-34와 IS-2/3을 운용하였다. 그런데 가끔 대전기 독일 전차들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것들도 전쟁 중반기부터의 간지나는 중전차들이 아닌 그나마 전쟁 초중반에 독일이 멀쩡했을 때 뽑아낸 4호 전차나 3호 돌격포들이었다.
1960년대에 벌어진 중동 분쟁 속에는 대전기 전차들도 소수 끼어 있었다. 여기서 마지막 4호 전차와 4호 구축전차가 이스라엘의 M4 셔먼에게 격파당하면서 한물 간 물건임을 드러내고 쓸쓸히 퇴장했다.
그 즈음, 슬슬 다시 몸을 일으키는 독일군은 인도군 신형 전차 사업에 영국과 함께 참여했으나, 기껏 만든 인디엔 판처가 영국의 빅커즈 MBT에게 장갑, 주포, 기동성 등 여러 가지 요소에서 밀렸다. 그럼에도 절치부심해 다시 만든 명품 2세대 MBT 레오파르트 1은 본국 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 팔아먹는 등 기술력 자체의 우수함은 여전히 입증할 수 있었다.
레오파르트 2의 경우 2A4 버전까지는 당대의 우수한 전차에 속했지만 예정에 없던 A5 개량으로 차량에 부담이 가기 시작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독일군의 군축까지 시행되면서 A6, A7 개량간에 간격이 벌어지고 문제점이 속출하는 등 현재로써는 최정상급 전차라 보기는 어렵다.
예전에야 독일은 전차 강국의 이미지가 있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군축 등으로 인해 이미지 값을 못하는 상황임에도 불구, 상당수의 독일 성향 밀리터리 동호인들은 여전히 레오파르트가 최고의 전차라고 주장하는 추태를 보인다. 특히 워 썬더가 대표적으로, 선택적 고증과 국가 편애, 믿을 수 없을 만큼 돌아버린 랭크 배치로 고증은 이미 박살나 그 파편도 주울 수 없는 게임을 통해 아직도 레오파르트가 최강 전차라고 믿고 선동하고 있다.
[1] 사실 대전 이후 전차인 레오파르트 1과 레오파르트 2는 배치 시점에서는 진짜 명전차기는 했다. 이후 개량이 지지부진해서 그 명성이 거품이 되어 버렸고 빠들이 다른 전차들을 비하하는걸로 어그로를 잔뜩 끌어준 덕분에 거품이 빠지면서 신나게 까이는 것.[2] 추축국 입장에서는 그래도 이 열세의 기갑전력이 사실상 대부분의 전력이었다. 이탈리아는 CV-33으로 대표되는 경장갑 경무장 이미지가 강했으며, 일본 제국은 일단 전차 수 자체는 이탈리아군보다는 많았지만 전차 성능도, 전차 운용 교리도 그리 좋지 못했으며 적 전차를 상대할 때는 대전차총검술을 할 정도로 대전차전에 미숙했다. 헝가리 왕국, 루마니아 왕국의 공업력은 미약했으며(의외로 개발했던 전차는 괜찮았다) 핀란드, 불가리아 왕국은 자체적으로 기갑장비를 생산할 능력조차 부족했다.[3] 실제 생산량도 B1보다 B1 bis가 더 많다.[4] 대신 독일의 설계개념과 운용개념은 프랑스보다 우수했다. 당시 프랑스 상층부가 생각하는 전차운용개념은 거의 제1차 세계 대전 수준이었다. 이런 점이 반영되어 프랑스 전차는 1인 운용 포탑과 같은 애로사항이 넘쳐나게 된다.[5] 프랑스 침공때 마틸다 Mk.II의 댓수는 적어서 전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아라스 전차전에서 독일 육군은 이 녀석들을 부수기 위해 루프트바페를 불러 300여 대의 슈투카까지 동원해야 했다.[6] 2파운더는 40mm 포인데 탄약은 오직 AP와 APC와 같은 철갑탄 계열이었으며 그마저도 내부에 장약이 하나도 없는 통쇠로 된 탄두였다. 심지어 고폭탄이 없는 이유는 상층부가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결과이다![7] 그래서 판터 이후의 독일 전차들의 설계는 명백히 T-34의 경사장갑에 영향을 받은 설계였다. 이 그림은 판터의 설계안들이다. 위 그림은 가끔 '만터' 로도 알려진 MAN사 설계안이고 아래 그림은 벤츠의 설계안인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실제로 벤츠의 설계안은 제식채용 직전까지 갔으나 엔진 문제로 탈락했다.[8] 실제로 독소전쟁때 독일이 T-34를 상대로 우세해지는 시기가 딱 4호가 장포신 75mm KwK40 43구경장을 장착할 때이다. 한편 4호가 다시 열세에 처하게 될 때는 T-34가 85mm D5-T,ZIS S-53을 장착할 때부터이다. 그마저도 먼저 보고 쏴 맞추면 이기는 수준이었긴 하지만...[9] 당장 주포는 소련제 76mm F-22 사단포 혹은 독일제 75mm PaK 40, 차체는 2호 전차, 38(t), 각종 프랑스 전차에 장갑차까지 있다.[10] 재밌는 점은, 독빠들은 티거와 연합군 중형전차를 비교할 때는 체급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오로지 전적과 성능만 가지고서 연합군 전차들을 신나게 까지만, 정작 셔먼이나 T-34와 같은 체급인 4호 전차의 열세에 대해서는 티거 때에는 그토록 무시하던 무게차이를 언급하거나 성능상에 큰 차이가 없다거나 하는 등, 온갖 핑계를 붙여가면서 커버를 치기에 바쁘다.[11] 물론 여기서 비교하는 전차들 중에 티거보다 먼저 나온 전차는 처칠 전차과 KV-1 뿐이다.[12] 속도는 느렸으나 제자리 선회 능력과 등반력이 티거보다 뛰어난 등 전술기동에서도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았고, 측면은 티거보다 더 두꺼웠다.[13] 얼마나 소수인지 6파운더를 장착한 처칠 Mk.VII 크로커다일이 박물관에서 목격되자 사람들이 박물관이 고증을 무시하고 복원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정도였다.[14] 티거는 450m 이내에서 처칠 MK.VII을 관통가능했지만, 6파운더 APDS는 명중률이 많이 부족하긴 해도 거리 상관 없이 맞추기만 하면 티거를 뚫을 수 있었다.[15] 직격도 아닌 판터 전차의 1미터 옆에 착탄하자 폭발 충격만으로 판터가 전투불능이 되었다고 한다.[16] 최대 분당 4발, 평균적으로 분당 2발.[17] 관통력 자체도 1000m에서 수직입사 시 145mm 수준이라 수직장갑인 티거는 차체 어디를 맞든 정직하게 들이밀었다간 바로 관통된다.[18] 일단 카탈로그상으로는 122mm D-25T의 명중률은 88mm 56구경장과 맞먹는 수준이지만(거의 90%이다) 실전에서는 복합적인 이유가 결합되어 그다지 잘 안 맞는 포로 기억되었다.[19] 스펙상으로는 그렇지만 퍼싱은 티거 2처럼 중량대비 엔진 출력이 약하고 구동계에 문제가 있어서 완벽한 전차는 아니다. 이점은 M26E2에 와서 해결된다.[20]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중 병사들의 고충을 늘린 원인 중 하나가 후속작이 제때 안 나온 탓이 크다. 후속작이 안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상층부가 필요성을 못 느낀 것과 설계진이 결함을 못 잡은 탓으로 전자에는 M36 잭슨과 76mm M4가 있고 후자에는 M26 퍼싱이 있다.[21] 퓨리에서는 티거를 상대로 약 500야드에서 발사된 76mm 포탄이 튕겨나가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현실이었다면 발사된 탄이 고속철갑탄이든 일반 철갑탄이든 간에 티거의 전면이 관통되며 격파되었을 것이다.[22] A22F 처칠 Mk VII도 같은 포를 썼다.[23] 다만 T-34-76은 티거를 격파한 사례가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주포의 관통력의 문제도 있지만(영거리 사격을 해도 관통이 안 될 수가 있다!) 서부전선과 다르게 동부전선의 독일 기갑의 수가 많아서 마냥 우회기동으로 티거의 측면을 잡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24] 그래서 이런 식으로 애초에 이물질이 별로 안 끼고 수리가 더 쉽게 로드휠이나 완충용 고무 패드 몇 개를 떼어 내는 임시변통 방법을 쓴 티거 전차장들도 있었다. 티거 후기형에 와서는 과감하게 외측 로드휠이 폐지되기도 했다.[25] 당연히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수송용 궤도는 궤도폭이 수송차보다 넓어서(= 터널 같은 장애물에 걸려서) 다는 것인데, 해당 열차의 운행 경로가 터널 등을 지나가지 않는다면 굳이 수송용 궤도로 바꿀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26] 전차의 조종성은 궤도가 좁을수록, 바퀴가 적을수록 좋아진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커브길이 많은 일본의 10식 전차부터가 바퀴가 5개로 타국의 전차들보다 적다. 즉 접지면적이 좁을수록 조종이 쉽다. 이를 설계자들도 고려했는지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지만 문제가 많았다. 똑같이 바퀴가 많으면서 구형 설계로 놀림받는 처칠은 단단한 지형에서는 바퀴 몇 개가 바닥에 닿지 않고 떠 있도록 하였고, 제자리 선회 능력은 영국 특유의 메리트-브라운 디퍼런셜 덕분에 문제가 없었다.[27] 셔먼은 리벳으로 고정된 차체 하부 장갑을, T-34는 후방의 상부장갑을 들어내면 변속기 교체가 가능하다.[28] 무포탑 구축전차들은 전투실 상면장갑 전체를 들어내야 했다.[29] 변속기 교체 문제는 독일 초창기 전차들부터 이어져오는 전통이었지만 티거와 판터부터는 전차들의 무게 덕분에 더욱 어려웠다.[30] 간단하게 원인을 정리하면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하기 위해 설계를 미처 다 끝마치지 못했고, 엔진이 티거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엔진룸의 용적이 적었으며, 생산성을 위해 구동계통의 성능을 낮춰버렸다. 마지막으로 장갑 두께가 설계 당시의 60mm 전면장갑에서 80mm 전면장갑으로 크게 증가했고, 원래 포신 자체도 길고 무거웠기 때문에 무게중심도 좋지 못했다.[31] 후진이 느린건 후진기어가 1단만 있는 탓이다. 당시 후진이 1단만 있는 대부분의 전차가 후진속력이 고작 2~4, 5km/h 수준이었다.[32] 워게이밍에서 (경쟁사인 가이진이 3호 돌격포를 복원한다고 할 때) 한번 마우스 전차 복원 프로젝트가 진행된 적은 있었는데 쿠빈카 박물관 측에서 그 소식을 듣고는 "여기 복원할 러시아 전차들과 유지보수가 필요한 전차들이 득실득실한데 무엇하러 굳이 독일놈들 전차를 복원하슈?" 하는 반응을 보여 마우스 전차 복원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33] 야크트티거는 70톤에 700마력, 토터스는 79톤에 600마력으로 추중비는 한참 딸렸지만 변속기나 현가장치의 성능 및 내구도는 토터스가 더욱 좋았다.[34] 4호 전차만 봐도 전차, 구축전차, 돌격포, 자주포, 대전차자주포, 대공전차, 돌격전차 등 다양하다.[35] 물론 하드웨어적인 장갑의 두께와 주포는 저 이후로도 강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런 건 어떤 나라든 일정 수준 이상의 공업력을 가지고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다.[36] 결국 1944년에 이르러서는 M6A2E1로 개수된 1대를 제외하고 모두 스크랩 처리된다.[37] 땜빵으로 개발된 만큼 M3 리는 차체에 75mm를 장착하고 포탑에 37mm가 달린 형태였다.[38] 정작 미군 전차들은 상층부가 티거 티거 해대는 것과 달리 티거 1을 별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39] 포탑 전면은 거리와 각도에 따라 관통 가능.[40] 실제 울버린과 잭슨의 정확한 생산 통계가 안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급한 상황에서 마구 개조를 한 탓도 있다. 게다가 아예 셔먼 위에 퍼싱의 포탑을 올리는 90mm 셔먼 공식 설계안도 나왔지만 차라리 퍼싱을 투입하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해서 생산이 무산되었다.[41] 전쟁이 터지면서 스탈린의 명령으로 T-34 올인을 해서 해소되었다. 다만 독소전 발발 전에는 대숙청의 여파로 설계자들이 눈치를 많이 봐서 좋은 설계가 나오기 힘든 환경이었다.[42] KV-1과 IS-2의 포탑 후방 볼마운트 기관총좌는 이 사람의 작품이다. 왜 그렇냐 하면 코틴 기사는 전차에 보병 제압을 할 수 있는 무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43] 이러한 다포탑 전차는 겨울전쟁 때 문제를 보인 것도 모자라 신형 중전차인 SMK와 T-100은 물론이고 보로실로프 전차 프로토타입까지 다포탑으로 나오자 스탈린이 바로 다포탑 전차 개발을 중단시킨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왜 전차에다 백화점을 차리려고 하나!"이다.[44] 결국 소련은 나름대로 문제가 개선된 T-70을 만들어냈지만, 경전차의 한계 탓에 일선 편제가 아닌 후방의 정찰부대와 같은 한정적인 용도로 편제하였으며, 기존의 T-70 생산라인은 SU-76M 생산라인으로 변경되었고, 필요한 경전차는 무기대여법으로 구하게 된다.[45] 다만 T28은 장갑과 포는 꽤 좋은 데 비하여 엔진출력이 과도하게 부족한 탓에 독일 중구축전차랑 다를 바 없는 하자품이었다.[46] 이 시제 중전차들은 양산되지 못했지만 훗날 미국 최후의 중전차인 M103 설계의 기반이 되었다.[47] 훗날 IS계열 전차들은 소련 최후의 중전차인 T-10의 기반이 되었다. IS-3에서 시작된 방어력을 증가시킨 둥글고 납작한 주조포탑은 거주성 악화와 부각 제한이라는 단점이 있긴 해도 높은 방어력 때문에 T-54부터 초기형 T-90에 이르는 장대한 계보 동안 소련 전차의 상징이라 할 정도로 대대적으로 쓰였다.[48] A43 블랙 프린스는 결국 영국 상층부가 더 선진적인 설계인 A41을 선호해서 양산되지 않고 후계작이라고 할 수 있는 FV201/A45와 FV221 카나번, FV214 컨커러의 기반이 되었다.[49] 어쨌든 설계적으로 나쁘다고 해도 미하엘 비트만, 오토 카리우스, 쿠르트 크니스펠 등 에이스들을 중심으로 실적을 올린 게 있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실전에서 활약한 적이 없으면 눈에 안 띄는 법이다. 나치 독일이 전차로 유명한 이유는 전차를 잘 만들어서보다는 전차를 어떻게 써먹는지 잘 알고 있어서였다.[50] 다만, 이러한 전차전 에이스들의 실적이 교차검증이 안 된 개인적 회고록발 사료가 많은지라 오토 카리우스 정도를 제외하면 실제 전적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는 편이다.[51] 독일에 맞서 싸운 국가들을 사실상 바보 취급하고 특히 폴란드와 소련에 대한 심각한 경시가 깔려 있다.[52] 정작 얼마 안가 AMX 13 90과 AMX 13 105가 나오면서 AMX 13 75 역시 한물간 물건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