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용어
- 프랑스어: élan vital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적 용어로 '삶의 약동', '생의 비약'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그는 생명이 가진 능동적이고 근원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2. 프랑스 육군에서 발생한 현상에 이름이 붙은 인터넷 밈
이 항목에선 그러한 현상이 어째서 발생했는지 교리를 중심으로 설명한다.우선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1914년 시점에 프랑스군은 전쟁을 두 종류로 분류했다. 첫번째는 야전이고, 두번째는 공성전이다. 프랑스군은 공성과 수성 둘다 공성전이라고 불렀다. 공성과 수성이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니 말이다. 1913년 시점에 공성전 교리는 1909년에 나온 교범 2개로 이루어졌다. 공성전은 공병대와 포병대가 특수한 장비로 수행하는 일로 간주했다. 공성하거나 수성할 요새는 대체로 영구적 축성물로 간주했고, 참호같은 임시적 축성물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요새를 공격, 방어하는 방법은 이를 고려하여 발상했다. 요새 공략과 방어에 중포가 필수였기에 자연스럽게 중포를 요새포, 공성포라고 불렀다. 75mm 야포는 공성에 필요없다고 간주했고, 동시에 중포는 야전에 필요없다고 간주했다. 문제는 프랑스군이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전쟁인 참호전이 야전과 공성전 중간쯤에 걸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에선 어느 누구도 야전축성에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설상가상 프랑스군이 전쟁을 두 종류로 간주한 것처럼 프랑스군도 (1915년까지) 두 종류가 있었다. 야전군과 요새군이다. 야전군은 총사령관이 지휘했고, 요새군은 전쟁장관이 통제했다.
조프르는 나쁜 교리를 만들었다고 비난당했다. 그 교리는 2개의 교범으로 이루어진 야전 교리로, 이름은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다. 엘리자베스 그린할은 전자를 교리, 후자를 전술교리로 간주하지만 미셸 고야는 둘다 교리로 간주하고 각 병과별 기동규정, 요무령을 전술교리로 정의한다.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가 사단 이하 단위에 적용되기 때문에 어느쪽도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후자의 정의가 더 정확하다 여기고 따르겠다.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를 승인한 장본인은 전쟁장관 밀르랑이고 최종 결재자는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인데, 어째 두사람은 교리 가지고 비난당하지 않는다. 이 교리는 페르디낭 포슈의 스승 앙리 보날의 영향으로 제작된 1895년 교리인 Décret du 28 mai 1895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를 갱신했다.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 초안을 작성한 장본인은 위원회다. 뭐가 더 붙는 거 없이 그냥 이름이 위원회다. 위원회 구성원 중 장군은 2명 뿐이었고, 2명은 중령, 1명은 무려 소령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조프르가 계급 보다는 능력을 보고 위원회를 구성했음이 분명하다. 조프르가 교리 갱신을 준비하며 취한 접근법은 매우 이례적이다. 가장 작은 단위부터 가장 큰 단위까지 지휘계통 전체에 걸친 표준화에 성공하겠다는 열망이 느껴진다. 위원장은 폴 포 장군인데, 그는 대놓고 반공화주의적 태도만 보이지 않았어도 조프르 대신 참모총장이 되었을 사람이다. 다른 구성원으로는 국경 전투에서 랑르자크의 참모장이 되는 엘리 두아셀 장군, 나중에 야전군 사령관까지 되는 앙투안 대령, 1914년 GQG참모차장이 되는 앙리 베르틀로, 대전쟁 중 벨기에군에 연락장교로 파견된 샤를 브레캬르, 3년 징병법 논의 동안 상임전쟁심의회 서기를 지낸 샤를 알루앵, 교리 제작 위원회 서기 브로세 소령이 있다. 브로세 소령은 전쟁이 끝나자 주저없이 자기가 회의록으로 작성한 내용을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선 후술하겠다.
조프르는 자기가 선택한 이 사람들을 믿었고, 프랑스군 개혁이 위원회의 결과물에 달려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나중에 자기가 위원회에 속했다는 사실을 슬쩍 감추었다. 괜히 마녀사냥 당하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1918년에 국경의 비밀을 출판하며 반공세주의 선동을 일으킨 페르낭 앙주랑이 1919년에 위원회 구성원 명단을 요구한 바가 있다.[1]
프랑스군이 교리의 필요성을 깨달은 건 1914년 기준으로 꽤 최근이다. 왜냐하면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로이센군-독일 제국군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교리를 제작할 필요를 알아차린 것이기 때문이다. Décret du 28 mai 1895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가 그 첫번째 결과물이다. 프랑스군 중에서도 독일군의 크릭스아카데미를 모방한 기관인 에콜 드 게르는 독일군이 군을 표준화하는 교리를 미리 만들어놓고 훈련을 통해 주입하는 모습을 보고는 제2제국 시절부터 프랑스군을 지배한 실전주의 사상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2] 페르디낭 포슈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나치게 수학적인 가르침[3]으로 인해 간과된 전쟁의 본질,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이 초래한 공백과 실수를 목격하면서 또 다른 학파가 탄생했습니다. 그 학파는 특히 프랑스군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그 학파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여러분을 적의 치명적인 공격 때문에 혼란에 빠진 상태로 만든 다음 결심하는 방법을 교육하거나 경험의 본질을 논하지는 않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그런 학파는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학파에선 원하는만큼 공부할 수도 없고 배움의 이점을 계속해서 얻을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다음 전쟁에서 가장 중요할 가능성이 높은 첫 전투를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교육의 시작과 동시에 전쟁이 끝나버릴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결과는 매우 값비쌀 것입니다. 더욱이 실전이 가져다주는 가르침의 의미와 범위를 착각해선 안 됩니다. 전쟁의 성질에 대한 명확한 사전 성찰 없이 전쟁을 수행하면 그저 전초선을 만들거나 강이나 국경을 방어하거나 전위대의 임무를 결정하는 문제에서마저 전쟁을 지배하는 원칙을 적용하는 법을 모르게 됨을 알기 위해 드 삭스 원수의 나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페르디낭 포슈, Des Principes de la Guerre 중
-페르디낭 포슈, Des Principes de la Guerre 중
그리하여 에콜 드 게르의 보날 장군이 프랑스군 역사상 처음으로 대부대에 관한 교리를 만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Décret du 28 mai 1895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는 프랑스군 역사에서 처음으로 작전술을 다루는 교리이기도 하다.[4] 당대엔 작전술이라는 개념이 없긴 했지만 말이다.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1세의 영향을 깨달았고, 그의 비범함을 재발견했다. 하지만 모두가 나폴레옹이 될 수는 없으니 천재를 모범으로 삼아 범부가 따라할 지침을 만들고자 했다. Z라는 익명의 대위가 1918년에 기고한 Vertus guerriéres라는 글에 나와있듯이, 교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붙잡을 난간이자 군의 전술적 개념을 표준화하여 전술이 작동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좀더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앙리 보날이 말하고 페르디낭 포슈가 스승의 말을 인용했듯이, 수많은 숙련자에게 열매를 나누어주어 보상하고 위대한 군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게 하고 군대의 정맥에 경험한 원칙을 불어넣는, 다시 말해 개개인의 주도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이 궁극의 결과물로 이어지는 집단적 사고 공동체를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위원회가 제작한 교리가 거의 모든 상황에서 비이성적인 방법론을 표준화하는 멍청이들의 작품이었는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을 지적하자면, 애초에 위원회가 제작한 교리를 읽어본 프랑스 장교가 10명은 넘는지가 의문이다.
후자부터 보자면, 당대 프랑스군이 대부대로 분류한 집단군, 야전군, 군단을 지휘하는 프랑스 장성은 62~65세였다. 그들은 자기가 알아야할 건 다 알았다고 생각하며 은퇴할 날짜만 기다렸고, 새로운 바람에 회의적이었다. 심지어 은퇴한 후에도 말이다. 당대에 저술가로도 유명했던 셰르피스 장군은 자기가 은퇴한 후 1913년에 새로운 교리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1914년 5월 L’Echo de Paris와 Le Gaulois에 기사를 기고했는데, 거기에 이런 문단이 있다.
이것은 야전군을 지휘하는 고급장교만을 위한 이론 소책자에 불과한 듯 하다. 야전군 사령관들이 정말로 지휘술에 관한 교리문답에서 무엇을 배워야 한다면, 그냥 그들을 해임하고 필요한 지식을 이미 갖추고 있는 다른 장교로 자리를 채워야 한다.
이는 프랑스군에 뿌리내렸던 실전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프랑스 공화국군에서 진급평가를 했던 군단장 자리를 제2제국 장성 출신 실전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차지했으니 당연한 현상이다.[5] 셰르피스는 동기들의 생각을 대변했을 뿐이다. 어떤 장성급 장교도 위원회가 내놓은 교리의 첫장을 넘겨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기술적 내용 전에 철학, 사상부터 설명하는 1장 말이다. 이들은 교리를 거부하고 자기 머릿속 지식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들이 실전주의 환경에서 진급했다는 것이며, 프랑스군의 마지막 실전경험이 식민지 전역을 빼면 1870년이었다는 것이고, 대전쟁 발발 당시 장성급 절대다수가 1870년에 아무리 높아도 소위였다는 것이다.
마침내 새로운 실전이 시작되자 수많은 장군이 조프르에게 리모자주 당했다. 이 숙청당한 장군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린 후 만장일치로 교리를 비난했다. 교리를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이들은 그저 명성을 지키기 위해 조프르를 물어뜯는 늑대떼에 합류했을 뿐이다.
그럼 에콜 드 게르와 CHEM은 어떨까? 새로운 교리는 에콜 드 게르가 가르쳐온 이론을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장교가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낀 건 아니다. 색다르다고 할만한 내용은, 현대엔 극단적인 표현을 쓰며 만연체를 구사하면 나쁜 글이라 보기 때문에 지금 보면 이상하고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힘들지만 당대 사람들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던 서술 방식 정도였다. 따라서 교리는 에콜 드 게르와 CHEM 출신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실전주의를 혐오하는 두 학교는 교리의 기반이 된 이론을 알고 있었고, 이론의 기반이 되는 사상을 알고 있었으며,[6] 무엇보다 공세주의자들이었다. 1차대전 프랑스군 명장에 에콜 드 게르 교수의 비율이 이상하게 높은 건 당연한 현상이다.
이제 교리를 읽어보자. 위원회가 1912년에 전쟁장관에게 제출한 보고서로 시작하자. 교리에 부록으로 첨부된 그 보고서의 분량은 26p로, 교리를 새로 갱신한 이유가 상세하게 나와있다. 훗날 많은 비평가가 지적한 내용도 몇가지 있는데, 예를 들어
La conduite de la guerre est dominée par la nécessité de donner aux opérations une impulsion vigoureusement offensive.
특히
Les enseignements du passé ont porté leurs fruits : l'armée française, revenue à ses traditions, n'admet plus dans la conduite des opérations d'autre loi que l'offensive.
교리 1장 3조는 전쟁이 짧게 끝나야 함을 상기시킬 목적으로 이렇게 권고한다.
Dans la forme actuelle de la guerre, l'importance des masses mises en œuvre, les difficultés de leur réapprovisionnement, l'interruption de la vie sociale et économique du pays, tout incite à rechercher une décision dans le plus bref délai possible, en vue de terminer promptement la lutte.
참고로 당대의 공세 미화와 공세주의는 전쟁이 짧게 끝나야 한다는 신념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아주 간단한 삼단논법이 팽배했다.
1.전쟁은 짧아야 한다.
2.공격만이 승리를 보장한다.
3.따라서 전쟁을 짧게 하고 승리하기 위해 공격해야 한다.
1장 5조는 이러한 논리를 기반으로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요약한다.
Pour vaincre, il faut rompre par la force le dispositif de combat de l'adversaire.
Cette rupture exige des attaques poussées jusqu'au bout, sans arrière-pensée; elle ne peut être obtenue qu'au prix de sacrifices sanglants. Toute autre conception doit être rejetée comme contraire à la nature même de la guerre.
Si habilement qu'elle soit conçue, une manœuvre prépare, mais n'assure pas la victoire.
Cette rupture exige des attaques poussées jusqu'au bout, sans arrière-pensée; elle ne peut être obtenue qu'au prix de sacrifices sanglants. Toute autre conception doit être rejetée comme contraire à la nature même de la guerre.
Si habilement qu'elle soit conçue, une manœuvre prépare, mais n'assure pas la victoire.
교리는 8조에서 정신력을 강조한다.
Les batailles sont surtout des luttes morales. La défaite est inévitable dès que cesse l'espoir de vaincre. Le succès revient donc, non pas à celui qui a subi le moins de pertes, mais à celui dont la volonté est la plus ferme et dont le moral est le plus fortement trempé.
En conservant, au moment suprême où la balance menace de pencher du côté de l'ennemi, des réserves destinées à organiser des replis, à garder les flancs ou à couvrir la retraite, on laisse échapper les dernières chances de victoire. Les réserves ne sont pas destinées à limiter l'insuccès, mais à agir offensivement pour gagner la bataille.
Un chef méconnaît son devoir qui, dans la bataille décisive, renonce à la lutte avant d'avoir épuisé tous les moyens dont il dispose.
En conservant, au moment suprême où la balance menace de pencher du côté de l'ennemi, des réserves destinées à organiser des replis, à garder les flancs ou à couvrir la retraite, on laisse échapper les dernières chances de victoire. Les réserves ne sont pas destinées à limiter l'insuccès, mais à agir offensivement pour gagner la bataille.
Un chef méconnaît son devoir qui, dans la bataille décisive, renonce à la lutte avant d'avoir épuisé tous les moyens dont il dispose.
당대 프랑스 장교들이 유일하게 읽어봤을 페이지인 교리 1장 전체가 도덕적 교훈, 권고와 훈계, 철학적 주장의 혼합임은 분명하다. 이런 어조로 범벅해놓은 이유는 아마 대다수가 실전주의자일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저술가가 프랑스군의 교리를 설명할 때 여기까지만 인용하기 때문에 잘려버린 뒷장의 내용을 기술 이상의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뒷장부터는 어조가 기술적으로 변한다. 교리가 후퇴해야만 하는 상황도 나오기 마련임을 예견하고 체계적으로 규정한다. 123조의 방어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이를 언제나 역공 가능성을 열어둔 채 행해야 한다고 서술하지만 말이다. 공격에 대한 강조엔 보병을 아끼기 위해 언제나 포병에 의존해야 한다는 강조가 뒤따른다. 교리가 미래전을 총명하게 수행하도록 만들어줄 정도는 아니지만, 불가능하게 만드는 내용도 없다. 프랑스군의 교리를 따르기만 하면 국경 전투 기준으로 전술적 수준에서 상황과 임무에 맞는 적절한 절차와 방법을 실행할 수 있다.
교리는 사단과 그 이하 수준에서도 공격을 찬송하지만 균형잡힌 시각 내에서 그리한다. 교리는 공격이 기본적인 행동수단임을 명확히 제시한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공격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다른 모든 절차를 상황에만 맞으면 긍정하고 추천한다. 솔직히 교리가 과장된 표현을 자주 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부적절한 수사는 무시하고 보면 화력이 전장에 등장한 이래 수백년 동안 살아남은 원칙을 분명히 제시한다.
La puissance de l'armement actuel rend impossible toute attaque en formation dense, effectuée, de jour, en terrain découvert. L'élan offensif ne peut être maintenu qu'à la condition d'employer des formations souples et aussi peu vulnérables que possible.
L'infanterie combat donc en tirailleurs.
L'artillerie appuie l'infanterie en détruisant tout ce qui empêche celle ci de progresser. La coopération étroite, constante, de l'infanterie et de l'artillerie s'impose donc au combat de la façon la plus absolue.
L'infanterie combat donc en tirailleurs.
L'artillerie appuie l'infanterie en détruisant tout ce qui empêche celle ci de progresser. La coopération étroite, constante, de l'infanterie et de l'artillerie s'impose donc au combat de la façon la plus absolue.
참고로 두번째 문장이 프랑스군의 교리에서 유일하게 élan이라는 단어가 쓰인 문장이다.
그리고 많은 저술가들이 교리의 이 문장을 집중적으로 비난한다.
L'artillerie ne prépare plus les attaques, elle les appuie.
심지어 최근에 출판한 책에서도 이 문장만 발췌하고 교리가 엄청난 피해를 낳았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페르낭 앙주랑이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100년 넘은 전통이라 봐도 무방하다. 문제는 이게 앞뒤 맥락을 잘라버려서 사실을 왜곡하는 비난이라는 것이다. 이게 공격준비사격을 폐기하겠다는 뜻이긴 하지만, 결국 지원엔 준비가 수반하는 법이다. 교리에서도 보병이 마주하는 첫 장애물은 적의 포병사격이라고 서술하고, 포병의 역할을 보병이 마주한 장애물 파괴로 정의하여 분명히 명시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포병사격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견해가 얼마나 정확했는지는 국경 전투 때 각 대부대가 독자적인 교리를 구사하다 발생한 비참한 꼴이 증명했다. 그리고 이게 야전 교리라는 사실을 떠올려야 한다. 공성전 교리에서는 공격준비사격을 여전히 긍정한다. 그리고 포병이 공격을 준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군대가 프랑스군 뿐인 것도 아니다. 같은 시기 독일군의 교리는 공준사를 '나무 밑둥만 파괴하고 마는 행위'로 정의한다. 이는 러일전쟁을 관찰한 후 두 군대가 동시에 내린 결론인데, 이런 결론을 안 내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대학살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교리는 방어도 다룬다. 한 장 전체를 방어에 할당했고, 거점으로 구성된 저항중심지를 옹호한다. 아마 프랑스 병사들이 이 장을 읽어봤다면 헛구역질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가 공격에 성공해 땅을 점령하고 나면 방어를 위해 진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서술하여 보병을 막노동꾼으로 바꾸는 걸 망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흔히 보이는 망상과는 달리 프랑스군은 참호와 대피호에 무지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기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프랑스군이 러일전쟁을 관찰하고 1906년에 참호를 다루는 교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야전축성에 관한 교범은 프랑스군에선 1892년에 나온 후 오랜만에 갱신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Instruction pratique du 24 octobre 1906 sur les travaux de campagne à l'usage des troupes d'infanterie는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를 보충한다. 이 교리는 1911년에 갱신되어 1912년에 발표된 판본도 존재한다. 조프르는 Instruction pratique du 24 octobre 1906 sur les travaux de campagne à l'usage des troupes d'infanterie가 프랑스군에서 야전축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최초의 교리였다고 회고했다. 프랑스군의 참호 교리는 참호전 시작 기준으로는 부족하지만 1914년 기동전 기준으로는 제법 괜찮게 참호를 파고 지형을 개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1906년과 1914년 사이 1m이상 참호를 파본 연대가 10개를 넘지 않는다는 데 돈을 걸 수도 있다.
프랑스군의 교리가 큰 피해를 야기했다는 주장은 프랑스 장교단이 교리를 읽어본 적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 간과한 주장이다. 교리가 프랑스군을 지배하던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 실패하고 아무도 훈련에 관심이 없어 교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기에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결론이 더 정확하다.
그랑메종이 이상한 교리를 만들어 프랑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대전쟁 중에 전사해서 반박 못하는 상태가 된 사람 시체 가지고 허수아비 패기에 불과하다. 프랑스군의 교리를 살피면서 그랑메종을 언급하지 않아도 별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랑메종이 교리 제작에 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랑메종이 조프르한테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조프르가 참모총장이 되었을 적엔 그랑메종이 이미 총참모부를 떠난 상태였고, 그 당시 그랑메종은 중령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교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대해 1913년 보다 더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설명할 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프르는 회고록에서 그랑메종을 언급한다. 어떻게 중령따리와 중령따리가 펼친 강의가 20년 후 출판된 참모총장의 회고록에 등장할 수 있었던 걸까? 뭔가 무시무시한 음모론이 떠오른다. 리델 하트가 조프르와 그랑메종의 관계에 대해 개소리를 늘어놨듯이 말이다. 물론 그랑메종이 리델 하트의 주장과는 달리 최면어플로 조프르를 세뇌한 적은 없고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이다.
1911년 2월, 그랑메종 중령은 총참모부 제3부장이었고 CHEM에서 활동하는 교수였다. 그랑메종은 에콜 드 게르에서 수학한 포슈의 제자임과 동시에, 교수진이 실전경험 없는 사람들로 세대교체된 에콜 드 게르를 책상물림이 현실과 괴리된 헛소리 늘어놓는 곳으로 취급하던 갈리에니 밑에서 경험을 쌓은 식민지 학파다. 그랑메종의 스승 중 하나인 외젠 드브네의 회고에 따르면 카리스마가 대단한 사람이었으며, 비범한 지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드브네는 그런 그랑메종의 상상력이 자기 성격에 종속당했다고 안타까워 했지만 말이다. 그랑메종은 CHEM에서 '전선의 위태로운 본질과 방호 개념'과 '대부대 교전 방식'이라는 제목의 강의를 열었다. 이 강연을 들은 사람은 겨우 50명 남짓으로, 거의 전부가 그랑메종과 같은 청년 튀르크였던 걸로 보인다.
그랑메종은 여기서 대부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여단 이하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즉 그랑메종은 자기가 한번도 지휘해본 적 없는 단위에 대한 이론을 펼친 것이다. 고야는 그랑메종의 이론이 경험 부재 때문에 대부대에 추상적으로 접근한다고 평가하는데, 그런 그랑메종의 이론에서 요점은 4가지다. 첫번째로, 빠른 공격이 경계 수단이다. 두번째로, 공격중인 부대 간 연락은 의미없다. 세번째로, 공격이 초공세적으로 광정면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네번째로, 후퇴는 불가능하다. 그랑메종은 1번 요점에 따라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을 비난했는데, 이는 포슈의 이론을 정면공격한 행위였다.
2.1. 프랑스군의 무모한 돌격?
프랑스군이 엘랑 비탈 전술로 무모한 인명 피해를 가속화 시킨 무모한 공격이라고만 폄하 하는데 이는 오해도 아니고 역사 왜곡에 가깝다. 한국에는 "엘랑 비탈"로 알려진 공격 정신(Attaque à outrance)이 위에서는 무모한 돌격으로 묘사 되지만 그렇게 사람을 갈아 넣었을 뿐이라면 프랑스군은 1918년까지 버티기도 전에 몰살 당하고 파리가 함락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극초반을 제외 하고는 독일의 전투력을 점점 따라잡다가 마지막에 가선 협상국 중 유일하게 독일군을 대등 이상의 교환비로[7]로 박살냈다. 정말로 프랑스군이 그런 닥돌 바보 집단이었다면 거기에 당한 독일군은 그 이상의 바보 집단이며 프랑스군보다 못 싸웠던 다른 협상국 군대는 생각 없이 닥돌하는 것도 못 해서 프랑스군보다 1.5~2배씩 죽어나간 희대의 머저리 집단이 된다. 군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는데 이런 이야기가 한국 넷상에서 정설처럼 수십년간 이어져 온 것은 "1차대전은 무의미한 소모전", "누가 이긴 게 아니라 그저 독일이 먼저 쓰러졌을 뿐"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탕으로 "그런 무의미한 소모전에서 협상국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무한한 지원 때문"이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8] 핑계를 곁들인 후 "참호전은 그저 돌대가리 지휘관들의 무의미한 닥돌의 반복"이라는 이미지를 프랑스군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게 실제와 맞지 않음은 물론이고 실제 전적을 따지면 다른 군대가 더 욕을 먹어야겠지만 서부전선의 참호전 상황에서 싸웠던 것은 주로 프랑스군이었기에 실제로는 프랑스군 비하로 작동했다.위의 "공격 정신"에 대한 서술도 이미 미국에서 보편적이었던 인식이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수입된 것이지만 사실 관계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은 수준에 가깝다. 보불전쟁 시기 프랑스군은 종래의 공격 대열인 '퓌리 드 프랑세즈'를 폐기 하고 무기의 카탈로그 스펙에 의존하여 다가오는 적에게 화력을 쏟아붓자는 '푸 드 바타용'이 주류가 되었지만 '고속으로 기동하여 전선을 분단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직접접근-섬멸론의 프로이센군에게 대패 하였다. 이후 화력론파가 틀렸다는 군부 자아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고속기동과 전선 돌파를 위한 보병의 정신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프로이센 육군의 정신론을 그대로 직수입. 능동 기동하여 전선을 돌파하고 각개격파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큰 틀에서 프로이센과 비슷해진다. 여기서 흔히 포슈를 돌격 바보로 왜곡하게 되는 부분이 나오는데 정작 포슈를 포함하여 조제프 조프르, 조제프 갈리에니, 에밀 파욜 등은 보불전쟁 당시 상대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며 방어에 급급하려 한 결과 몰트케의 기동에서 뻔히 약점을 드러낸 상황에서도 그것을 구경만 하다가 주도권을 넘기고 오히려 돌파 당해 버렸던 경험에 의거하여 공격 정신을 주장 했고 포슈의 유명한 말[9] 역시 적들의 움직임을 구경만 하며 짱박혀 있지 않고 아군 측에서도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서야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말이다. 그 말이 나온 시점을 감안하면 독일군에게 밀리는 상황이지만 겁먹지 않고 용감히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지만 국내에서는 이러한 맥락을 전부 잘라내고 포슈와 프랑스군을 비하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사실 1913년 교리를 창안안 그랑메종은 1915년 전사하기 전까지 실전에서 상당한 공훈을 올리고 대령에서 소장으로 급속 승진한걸 보면,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교리 자체의 실전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1913년 초 프랑스군의 실전 기동훈련을 본 독일군은 '결단력 부족, 겁에 질려있음, 안전해지려는 과도한 욕구, 병사와 부사관의 무기력함, 대담성이 없음, 극도의 조심성'이라는 혹평을 남겼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이런 맥락에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3년 교리는 분명히 여러 측면에서 극단적이고, 한계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에는 엄밀히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의 작전술적 영역에 관한 것이었는데, 작전술과 전술의 교리가 분화되기 전 시점의 프랑스 장교들 다수는 작전술적 초공세를 전술적 측면의 초공세로 인지하는 오류를 범했다. 정말로 이들은 적극성을 강조한 그랑메종의 교리를 전술적 닥돌로 착각해버리고, 정작 그랑메종조차도 평지에서의 보병 정면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했음에도 평지에서 보병들만 데리고 정면 닥돌을 감행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당시 프랑스군 교리의 주된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크게 식민지에서 실전을 거친 식민지 학파, 포슈, 페탱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기성 장교, 그리고 그랑메종으로 대표되는 에콜 드 게르 출신의 소장파(청년 투르크당)으로 구별할 수 있었는데, 그랑메종의 초공세 교리는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식민지 학파와 에콜 드 게르의 기성 장교들은 초공세 교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1차 대전 초기 프랑스의 졸전은 여러 분열상 때문에 현대전을 준비하기 위한 통합된 교리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 이러한 여러 문제를 '엘랑 비탈'이라는 교리 문제로 퉁쳐버리는 것은 지나치게 피상적인 이해라 할 수 있다.
돌아와서, 프로이센의 보병 기동 전술을 직수입 해와 발전 시킨 프랑스군은 17계획으로 독일 서부에 비해 프랑스 동부는 철도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차량을 동원해 독일군과 비슷한 속도로 전선에 병력을 전개 시키는 업적을 달성 했다. 이후 1914년 여름의 전투는 프랑스와 독일이 양측 모두 보병 돌격을 통한 고속 전선 돌파를 시도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초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반격해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섬멸 시켰다. 하지만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대표되는, 1871년에 비교해 진지구축능력과 화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해 양측 모두 상대방의 전선을 돌파하는 것에 실패 하여 고착 되었다. 이 와중에도 니벨 등의 장군들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다고 믿었지만 당시의 기술력 수준으로는 적군의 전선을 완전히 돌파하여 적을 분단 시키는 것은 불가능 했다.
프랑스군은 이 때문에 재앙으로 끝난 니벨 공세 이후 일련의 위기를 겪었다. 보병 사기 위기, 기술 병과의 전술 및 산업 위기, 기병 문화 위기다.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고 작전 교리를 재정립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 단계는 장병들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인상적인 승리로만 달성 가능한 법이다. 수적 우위를 가지고 가공할 공세 방법을 갖춘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선 프랑스군의 물자와 전술이 최대한 빠르게 갖추어져야만 했다.
새로운 총사령관 페탱은 1917년 5~7월 사이 4개의 팸플릿으로 자신의 작전 개념을 선포했다. 4개의 팸플릿에 담긴 페탱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1915년 봄 2차 아르투아 전투 때 프랑스군에서 태어났던 것에 불과하다. 먼저, 페탱은 물자의 양과 기동성을 특히 전차와 비행기에 초점을 맞춘 채 늘리고자 했다. 다음으로, 여러 전선에서 반복적으로 공격해 적 예비대가 소모되게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서 필요한 물자가 확보되면 대공세를 벌이고자 했다. 페탱은 가까운 미래엔 물질적, 정신적 제약 때문에 방어와 공격 양쪽에서 신중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최소한의 손실로 적이 소모되게 만들어야 했다. 공격은 보병을 절약하기 위해 물질적 수단을 최대한 많이 소모해야 했다. 1차 방어선으로 공격이 제한되어 작전 성공이 유지되고 대규모 포병을 전진 배치할 필요성을 없애야 했다. 그럼에도 기동이 부활했다. 공격의 규모가 아니라 공격의 횟수를 통해서 말이다. 프랑스군 총사령부는 현 상태에선 병법이 신속한 작전과 느린 교전으로 요약됨을 이해하고 있었다. GQG는 후방 인프라를 빠르게 개발하고 장비를 전선의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전선에 붙은 채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방법을 개발했다. 병력을 종으로 배치해야만 하게 되었고, GQG가 정교한 수송 조직을 편성했고, 수많은 건설계획을 진행했다는 뜻이다.
전략과 전술은 기술뿐만 아니라 전투원의 사기와도 연결되는 법이다. 프랑스군은 1915년 이래 점차 좌절감을 키워나가다 니벨 공세가 결정타가 되어 결정적 전투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5~6월 사이 일어난 항명은 이런 분위기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었다. 장군들 간의 의견이 분열되었다. 일부는 니벨의 방법론이 정치적 이유, 불운, 수단 부족 때문에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대규모 장비가 도착하고 있으니 니벨 공세가 실패한 주원인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군은 총사령관의 관점에 동의했고, 다시금 결정적 전투를 시도하기 위해선 부대의 사기를 재건하며 적을 소모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므로 제한적 공세를 극단적으로 상세하게 준비했다. 모든 돌격 대대에 공준사 동안 항공사진이 정신적 목적으로 끊임없이 배포되었다. 군단장 퐁클레르는 항공사진이 사기를 크게 증진한 2차 베르됭 전투에서 승리한 후 1917년 중반 이전까진 우리가 물질적 요소만을 계산에 넣고 인간의 정신력을 무시해 왔다고 지적했다. 보병의 행동이 과학에 기반해 계획되어 대대는 1km, 연대는 3~4km 종심까지만 돌파하도록 정해졌다. 포병은 준비와 포탄 축적에 여러 달을 쏟았다. 1915년 샹파뉴 공세에선 1미터마다 0.7톤의 포탄이 필요했으나 그 수치가 7톤으로 증가했다. 말메종 전투에선 각 돌격 사단이 5개 포병단의 지원을 받았다. 3개 포병단은 각 연대 앞에 이동탄막을 만들었고, 1개 포병단은 장거리에 고정탄막을 만들었고, 1개 포병단은 비행기가 보고한 적 집결지에 포탄을 퍼부었다. 각 병과가 밀접하게 협동했는데, 연결과 관측용으로 비행기를 사용한 덕분에 그리고 엄청난 전화통신망이 제병협동을 위해 설치된 덕분이었다. 전투의 가장 큰 불확실성은 포병을 전방으로 재배치해야만 하는 2차 방어선 공격에서 발생했다. 이 단계가 사라졌으므로 계획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사라졌다. 작전 중에 발생할 일을 계산할 필요가 없어졌고, 작전 시작부터 끝까지 전투원의 모든 움직임을 세세하게 정해놓을 필요도 없어졌다. 제한적 공세 중 많은 혁신과 실험이 진행되었다. 사단의 3개 연대를 나란히 배치하고, 각 연대의 3개 대대를 종으로 배치하는 사각형 대형이 사용되었다. 차단사격을 곡사로 퍼붓기 위해 최대 120개 기관총으로 편성되는 기관총집단을 활용했다. 박격포, 속사포, 전차 모두 대규모로 생산되고 있었다. 영국군은 이러한 원칙을 플랑드르에서 적용했고, 프랑스군은 플랑드르 공세, 2차 베르됭 전투, 말메종 전투에 적용했다. 독일군은 24개 사단을 베르됭에서 소모당했고 말메종에서 50000명의 사상자를 입었다. 반대로 프랑스군은 매우 우월한 교환비로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 전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성과는 모든 부대에서 관찰된 사기 회복이었다. 2차 베르됭 전투부터 말메종 전투 사이 사상자가 모든 기간 중에 가장 낮았다. 8월~12월 사이 프랑스군의 손실은 38000명 전사 혹은 실종, 128000명 부상 혹은 질병이었다. 장병들이 프랑스군의 부활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시 한번 승리를 믿었고, 자신감 회복이 변화에 대한 저항을 줄였다. 그럼에도 제한적 공세엔 결함이 있었다. 제한적 공세는 조건이 적절하던 소수의 구역에서만 가능했다. 기습은 여전히 완벽하지 않았다. 신속한 후속 작전은 대규모 포병을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 때문에 거부했다. 이러한 작전 유형의 성공이 지닌 가장 큰 결함은 어마어마한 물자 소모에 의존하기 때문에, 1918년에 예정된 대규모 기동전에선 물자를 같은 밀도로 배치하기가 불가능하므로 다음 해에도 적용할 수는 없으리란 것이었다. 1917년 10월 31일 팸플릿은 그동안의 교전에서 사용된 방법과 획득한 교훈을 종합했다. 그 내용은 주의와 체계성을 극도로 밀어붙여 전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공세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개활지 공격은 아예 논의되지도 않았다. 지침은 보병이 강력한 화력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철저하게 확신시켰다. 이것은 1915년에 등장한 체계적 전투 지지자들에 의해 1916년 1월에 확립된 전투수행 방식의 부활에 불과했다. 차이점은 1916년 때보다 제병협동의 정밀함이 증가했고, 기술 발전으로 인해 수단이 우수해졌고, 물자가 풍부해졌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장기간 훈련이라는 조건만 채우면 전술적 융통성이 이루어질 조건이 갖추어졌다. 이 지침은 '붉은 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거의 모든 부대에서 호평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충격을 선호하는 몇몇 장군은 회의감을 보였다. 그들은 보병의 역할이 포탄이 정복한 땅을 방어하는 것으로 제한되었음을 불평했고, 무엇보다도 빠른 승리의 포기를 비판했다. 그들이 보기에 니벨의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했다.
GQG는 독일이 주도권을 얻은 1918년엔 수년 동안 진보한 기술력과 정제된 교리에 미루어보아 서부전선이 기동전으로 회귀하리라 예언하고 1917년 12월 22일에 4번 지령을 내려 새로운 전쟁 방식에 적합한 방어선을 조직하고자 했다. 그 지령으로 수많은 의구심이 생겨났다. 최고사령부가 방어를 우선순위에 두고 제도화하려 한다고 여겼다. 어떤 이는 보불전쟁으로의 회귀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붕괴로 서부전선의 균형이 흔들렸고 미군의 배치가 끝나기 전에 독일군이 공세 주도권을 활용하리란 사실이 명백했다. GQG는 기동전에 적합한 종심방어 개념을 소개했다. 제36보병사단의 사례를 보자. 36보병사단은 1918년 6월 5일~7일에 쿠르셀메리 지역을 방어했다. 사단이 2개 제대로 배치되었다. 2개 연대가 1제대를 구성했다. 각 연대는 전력 일부를 2~3개의 참호선이 200m 간격으로 띄어져 있는 전방방어지대에 배치했다. 전방방어지대에 배치된 부대는 돌격부대가 포병지원과 이격되도록 적을 혼란에 빠트렸다. 이들이 군단에서 사단으로 증원군이 도착할 시간도 벌었다. 전방방어지대의 1km 후방은 전투지대로 규정되었다. 전방방어지대와 전투지대를 아울러 1차 진지라고 불렀다. 그루프 드 콩바가 상호지원이 가능하도록 주사위 눈 5와 비슷한 형태로 배치되었다. 주저항선에 가까울수록 그루프 드 콩바의 밀도가 높아졌다. 36사단은 60정의 기관총을 추가로 보급받았다. 이 추가 기관총은 공병중대, 기병중대, 사단훈련소에서 차출한 것이었다. 기관총이 방어망에 분산된 채 주의 깊게 은폐되었다. 대전차포와 몇몇 독립 포대도 주저항선을 이루었다. 참호박격포, 보병포, 박격포가 주저항선 뒤에 배치되었다. 2제대는 중간선과 본선이라는 2개 참호선으로 이루어진 2차 진지를 구성했다. 이 진지는 사단의 3번째 연대가 방어했다. 연대의 2/3는 본선에 배치되었다. 포병이 이 진지 뒤에 배치되기도 했고 1제대 연대들 사이에 할당되기도 했다. 36사단장은 독일군 공세의 대략적인 날짜를 알았기 때문에 방어적 기습을 달성하고자 했다. 필수적인 축성 작업은 밤에만 진행되었고 주의 깊게 은폐된 진지를 마지막 순간에 완성했다. 1차 참호선이 적의 돌격 직전에 버려지도록 계획되었다. 36사단을 지원하기로 된 제11보병사단은 6월 8일에 지휘소연습을 조직했다. 이 훈련엔 11사단의 각 부대가 지휘소를 36사단이 결정한 실제 장소에 이동시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각 지휘소는 완벽한 통신망을 구축해야만 했다. 11사단은 전투에 개입할 준비를 훌륭하게 끝마쳤다. 독일군의 공격은 예상대로 6월 9일 새벽에 진행되었다. 공격준비사격은 가스탄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포탄이 대부분 빈 땅에 떨어졌고, 돌격대가 방향을 잃었다. 전방방어지대의 병력은 격렬하게 싸우다 주저항선까지 후퇴했다. 독일 돌격대는 2차 진지에 닿지 못하고 주저항선 앞에서 무너졌다. 그러나 결함도 있었다 사단장과 연대장들이 종심방어 개념을 철저하게 학습시키고자 했음에도 2개 대대가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전방방어지대의 1차 참호선에 배치해 전투 초기에 포위되었다.
종심방어체계에 앞서, GQG는 높은 수준의 작전적 기동력을 얻기 위한 망을 설치했다 GQG는 그리하여 뚜렷한 차량 숫자의 우위를 활용하고자 했다 프랑스군이 1914년에 보유한 차량은 9000대에 불과했으나, 1918년엔 8800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 독일군은 40000대에 불과했다. 이 풍부한 자원을 최대한 유용하게 쓰고자 도로망이 철도망을 따라 작전전구에 촘촘하게 조직되었다. 차량통제위원회가 1916년에 설립되었는데, 목적은 교통 통제와 감독이었다. 프랑스군은 도로망을 고정 캉통이라 명명된 영구적 작전구역으로 분리하여 통제로를 만들었다. 각 고정 캉통이 전화로 연결되었고 이동 캉통에게 증원받았다. 이러한 체계의 첫번째 성취는 병참에서 나왔다. 가장 유명한 통제로는 부아 사크헤다. 1916년에 하루 마다 5000~6000대의 차량이 이 도로를 통해 바흐르뒤크와 베르됭 사이를 오갔다. 1918년 8월엔 456000명의 부상자와 1040000톤의 물자가 1달 동안 도로를 통해 이동했다. 이러한 자원과 조직의 존재는 도로를 통한 대규모 전략적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뜻이었다. 도로 수송은 철도 수송을 보완할 뿐만 아니라 더욱 융통성 있었다. 도로를 통한 전략적 이동을 처음으로 실행한 부대는 이를 최초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준비한 일반포병예비대다. 일반포병예비대는 전 총사령관 로베르 니벨이 에드몽 뷔아 장군의 조언에 따라 일반중포병예비대라는 명칭으로 안배했던 조직이며, 페탱이 일반포병예비대로 개칭하고 증편한 조직이다. 예비사단의 이동 또한 조직되었다. 20개의 차량수송단이 프랑스 대부대의 20%를 며칠 만에 전선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시켰다. 1918년 3월 독일의 공세는 프랑스군이 3일 만에 17개 사단을 도로로 수송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5월 27일~6월 2일 사이엔 33개 사단의 보병과 3개 사단의 포병이 차량 수송되어 독일군의 돌파를 막아냈다. 같은 시간 철도로 수송된 사단은 19개에 불과했다. 다른 부대도 전투에 개입했다. 현대화된 2개 기병군단, 비행사단, 차량화포병연대는 완전히 독창적인 부대였다. 비행사단은 프랑스군의 비행기지 건설 능력에 힘입어 전장을 체스판으로 삼았다. 5월부터는 경전차대대가 가용해졌는데, 이들도 차량으로 수송될 수 있었다. 프랑스군 내부에서 동력기관이 보편화되며. 공격에서든 방어에서든 적에게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1914년 9월과 1917년 3월의 느린 추격과 명백히 대조된다. 무한궤도 부대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전술적 기동은 평화협상까지도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바퀴 달린 전략적 기동은 현실화되었고, 독일군은 이 분야에서 매우 뒤처져 있었다. 이러한 기동은 프랑스군의 또 다른 우월함인 통신 능력 덕분에 용이했다. 1918년 프랑스군은 20만 대의 전화기, 200만km의 전화선, 28000개의 무선통신장비를 보유했다. 프랑스군의 무선통신 기술, 특히 지속파 기술은 독일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기병은 여전히 돌파 후 전과확대라는 임무를 유지하고 있었다 1916년 12월 8일에 GQG가 기병에 대한 지침을 발표했다. 니벨은 결정적 전투로 계획된 니벨 공세에 대비해 기병을 재조직하고 역할을 결정했다. '기병은 패배한 적의 후퇴를 궤멸로 전환하고 새로운 저항선 조직을 방지하여 다른 병과가 달성한 승리를 완성한다.' 제2 기병군단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까지 치른 전투에서 기병대는 자신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다른 병과와 달리 교훈을 얻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기병이 활약할 시간이 온다면 뛰어난 기량으로 다른 병과와 차별화를 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기병대의 명예가 위태로워진 때에 GQG 계획 성공의 책임이 우리의 어깨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1915~1917년엔 분투할 기회가 없었다. 기병 정신과 임무에 손댈 수는 없었기에 변화는 조직적 구조와 기술적 수단에서만 이루어졌다. 1917년 10월 24일, 새로운 2기병군단장 로빌로가 기병군단 재조직 계획을 GQG에 제출했다. 기병이 전투를 결정적 전투로 바꾸고 적의 후퇴를 궤멸로 바꾸어야 한다는 관점은 여전했다. 그는 이 임무를 위해선 더욱 풍부하고 현대적인 수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의 계획은 다음 해에 현실화되었고, 기병군단이 다음 자산을 얻게 되었다. 차량과 장갑차로 현대화되었다. 기병군단의 약점은 포병에 있었다. 1918년 10월에 2개 75mm 대대와 1개 105mm 대대를 받고 나서야 이 약점이 해결되었다 현대화된 기병군단의 가장 혁신적인 요소는 37mm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96대의 장갑차였다. 12대의 장갑차는 군단 직할이었고 나머지는 기병사단에 배속되었다. 기묘하게도 장갑차는 1917년 1월까지 포병부 관할이었다. 더 기묘하게도 승무원 대다수가 수병이었다. 이제 장갑차가 공식적으로 기병대가 되었는데, 이것은 기병이 전쟁 동안 인수한 유일한 장비였다.
페탱의 1917년 공세에선 포병이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 전투들은 포격전으로 요약되곤 하고 보병보다 포수가 많곤 했다. 그러나 포병 지상주의엔 명백한 한계가 있었기에 기동전에 대비하려면 변화가 필수적이었다. 2차 베르됭 전투와 말메종 전투에서의 포탄 소모량과 물자 밀도는 기동전에선 재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계획도 문제였다. 사격 계획이 10p에 달하고 포대를 배치하는 데만 1개월이 걸렸다. 포병 운용이 너무 번거로워진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3가지 혁신을 구현해 포병을 융통성 있게 만들어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그것은 모듈화, 차량화, 간소화다. 참호전이 시작된 이래 대규모 작전에 앞서 공격준비사격을 매우 길게 가져야 했기 때문에 모든 기습 가능성이 배제되었고, 이 때문에 작전이 위태로워지곤 했다. 프랑스군은 1915년 때부터 허리케인 포격을 공격 중에만 사용했다. 공준사가 길어진 이유 중 하나는 모든 포병사격을 직접 관측해 제원을 획득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건설할 수 있는 관측소는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 임무는 대부분 관측기에 맡겨졌다. 그러나 1917년부터 전투기 외 비행기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날씨와 적의 변덕, 무선 통신 확대로 인한 주파수 혼잡, 전투기의 우위 때문이었다. 지형학, 기상학, 탄도학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과학적 사격 준비라고 명명된 작업이 완벽히 이루어지며 사전 제원기록이 간소화되어 문제가 해결되었다. 정확한 사격이 곧바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관측기가 사격을 조정하기만 하면 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포대가 작전 실행의 마지막 순간에 도착해도 상관없어졌고, 밤과 악천후 중에도 효력사가 가능해졌다. 사전 제원기록에 필요해진 시간의 감소는 기습 요소의 증가를 의미했다. 이 실험은 말메종 전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준사 시간 감소는 사고의 변화 덕분에 용이했다. 프랑스군이 적진지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숫자의 포탄과 시간이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다. 파괴로 얻는 이점은 적의 시간적 여유로 상쇄되었다. 따라서 적의 수단을 오랫동안 파괴하는 대신 잠깐 무력화하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기습이 더 현실이 되었다. 이 모든 방법론은 1917년 11월 19일에 종합되었다. 이러한 혁신은 대규모 차량화포병이 야간에 한 지점으로 이동한 후 다음 날에 곧장 사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모듈화는 포병이 얻은 융통성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 이는 1916년 베르됭에서 사단 포병대대가 보병으로부터 분리되며 이미 시도되었다. 이런 조치는 많은 문제를 낳았는데, 서로 간의 오해와 즉흥적으로 편성한 집단의 비효율성 등이었다. 그러나 1917년 가을엔 훈련과 정보 공유를 통해 모듈화가 표준화되었다. 특히 군단포병이 모부대와의 유착을 잃기 시작했다. 조직 구조가 표준화되었고 포병이 어느 때든 일시적인 필요에 따라 대부대에서 분리되어 특정 전선으로 이동했다. 1918년 봄엔 차량화된 대대가 사단이나 군단에 예속되지 않고 집단화되어 일반포병예비대의 직접적이고 중앙집권적인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차량화포병의 탄생은 기본적으로 군마 부족에 대한 대응에서 기인했다. 그 과정은 1916년 말에 몇몇 야포대대가 실험적으로 차량화되며 시작되었다. 이 차량수송화된 포병의 탄생은 1918년 프랑스군의 40개 차량화포병연대로 이어졌다. 중포대와 자주대공포대가 이 연대에 더해져 차량화포병의 수가 총 584개 포대로 증가했다. 한편, 기마포병의 수는 1795개 포대였다 차량화포병은 춘계 공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새로운 종류의 포병은 군마의 부족으로 촉진되었다. 그러나 군마 부족이 너무 심해 1918년엔 포병대대의 구성을 3개 포대, 포대의 구성을 3문의 화포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모듈화, 간소화, 차량화는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혁신이 종합되고도 포병이 기동전의 조건에 완벽히 적응하기엔 불충분했다.
GQG는 1918년에 공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결론지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항공대는 1917년 말에 산업적 장애물과 전술적 불확실성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항공대가 크게 확장되어 있었으나. 폭격기는 1915년 초에 한계를 맞이했고 1916년엔 정찰기가 뒤따랐다. 전투기가 가장 중요했기에 투자가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일 전투기와 프랑스 폭격기의 심한 성능 차이로 작전적 폭격이 불가능해졌다. 항공대의 급속하고 불균형한 확장이 조직적 무정부 상태를 야기했기에 이를 극복해야만 했다. 항공대는 제공권, 전략적 정찰, 적 배치 파괴를 위해 집중되어 행동해야만 했다.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가 밀접하게 협동해야만 했고, 항공대가 다른 병과와 밀접하게 협동해야만 했으며, 주간 폭격이 재개되어야만 했다. 1917년 8월 3일에 모리스 뒤발이 GQG에 항공대를 책임지는 참모로 합류했다. 그는 페탱이 부여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완벽한 관리 체계를 소개했고, 그리함으로써 춘계 공세 전에 항공대 재조직을 성공시켰다. 첫 단계는 일관성 있는 산업과 군사작전의 결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GQG, 각 병과부, 정부 부처와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일이었다. 이는 전쟁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뒤발과 강력한 권한을 지닌 군사항공차장 다니엘 뱅상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생산량이 증가했으나 기술적 고착 상태로 인해 항공대의 확장이 제한되었다. 이 문제는 우려스러운 보고를 받은 페탱이 폴 데를 중앙항공생산부장으로 임명하고 알베르 카퀴오를 항공기술부장으로 임명하여 해결되었다. 이후 몇 달 만에 항공대의 규모가 2배로 늘어났다. 다음 단계는 비행중대의 작전 환경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뒤발은 비행부대를 균일화하고 전력을 최대로 끌어올렸으며 전선 전체를 비행기지라는 칸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으로 만들고 진입용 도로망을 조직했다. 병참과 정비를 포괄적으로 개편해 높은 항공기 가용성을 달성했다. 대전투가 시작된 1918년 3월 23일에 비행사단의 600대 비행기 중 17대를 제외한 모두가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야간 폭격기를 제외한 모든 기종이 통일되었다. 그 모든 비행기가 성능이 대단히 뛰어났다. 정찰기로는 상송이, 주간 폭격으로는 브레게 XIV가, 전투기로는 스파드 VII(추후엔 VIII)가 소개되었다. 세 비행기와 1914년 비행기의 성능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스파드 VIII의 최고속도는 시속 220km로 2배 이상이었다. 브레게 XIV의 상승한도는 6500m로 거의 3배였다. 폭탄 무장은 100kg에서 500kg으로 5배가 되었다. 1914년 비행기는 2000m에 도달하는데 25분이 걸렸지만 스파드 XIII는 4분 30초가 걸렸다. 물량 또한 대단히 증가했다. 1918년 1월 1일에 항공대 전투서열엔 3000대의 기계가 있었다. 조제프 조프르가 국경 전투 후 항공대 확장을 시작한 이래, 슐리펜 계획으로 인해 프랑스의 산업력이 붕괴하였음에도 해가 지날 때마다 항공대의 몸집이 2배로 커졌다. 항공기 숫자의 풍요로움은 전술 변화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 작전의 각 야전군이 한두개의 전투비행대대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고 이 비행대대들은 한 몸처럼 싸웠다. 전투비행대대의 전투 방식에 개인주의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1917년 9월 11일 기느메르의 죽음은 비극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효시였다. 정찰기가 고고도, 저고도 상시 정찰 체계와 대대의 집중 행동 덕분에 다시 한번 효과적인 방호를 획득했다. 풍요는 상위 제대의 탄생으로도 이어졌다 3개 대대로 구성된 비행연대가 탄생했고, 이어서 2개 연대(하나는 전투 하나는 폭격)로 구성된 비행여단이 탄생했다. 유일무이한 비행사단은 승리한 이유였다.
이 모든 혁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1918년에 방어를 위해 싸워야 했다. 3월 21일부터 7월 17일까지 4개월 동안 독일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해야 했다. 야전군 수준에서 4번 지령을 철저히 훈련한 앙리 구로만이 공격에 맞서 위치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총사령관의 명령과 직접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기동전 훈련이 불충분했다. 많은 사단이 기동전에 특화된 돌격대를 상대로 참호전을 잊고 기동해야 했다. 이 상황은 프랑스군의 현대성과 희생정신 덕분에 해결될 수 있었다. 전차대대, 기병군단, 차량화포병, 차량수송화 보병, 비행사단이라는 기계화부대는 독일군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계화부대들 덕분에 프랑스군은 불의 방어막을 빠르게 만들어내고 역공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 예시는 6월 11일 마츠 강과 7월 18일 빌레코트레다. 프랑스군은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다시 한번 즉흥적으로 수행해냈다. 하지만 기동전 훈련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1914년 9월부터 1918년 3월까지 베르됭 전투 중 6개월을 제외하고 프랑스 보병은 기동전에서의 전투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반면 독일 보병은 전쟁 내내 동부전선에서 기동전 경험을 쌓았다. 따라서 푸알뤼는 참호 보병이었고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만 갔으며 변화는 어려워져만 갔다. 이 때문에 1917년 말 모두가 1918년에 기동전이 재개되리라 예견했음에도 기동 재교육이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제한적 공세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는데, 다음 해에 바람직해질 전투 방식과 정반대인 방식이 쓰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말메종에서 철저한 계획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독일군은 카포레토에서 정신력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결과는 프랑스군은 융통성 있고 독일군은 그렇지 않다던 전쟁 전 문화주의 이론과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말메종 전투에서 1차 목표를 점령한 이후의 진격은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야전군 사령관의 명령으로만 이루어지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개활지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리고 이에 필요한 훈련을 지시하는 2b번 지령이 내려지긴 했으나, 저항감 때문에 지령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GQG 연락장교들은 참호전 전투 훈련만 하는 경향이 끈질기게 잔류하고 있음을 보고했다. 제13보병사단 기록을 보면 '기동전 훈련이 거부되었고, 이로 인해 사단의 전술적 결속력이 약화하였으며, 개활지에서의 작전 수행이 잊혀졌다. 이 심각한 결함 때문에 사단이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당연히 프랑스 보병들은 1918년 3월부터 시작된 기동전에서의 첫 전투를 당혹스러워했다. 13사단은 5월 27일 저녁에 베슬 강에 투입되자마자 개활지의 낯선 전투 관행을 따르게 되었다. 독일 돌격대의 우위가 명백했다. 중기관총의 엄호를 받는 소부대와 경기관총 분대가 지형을 활용하고 적진지를 침투하는 데 익숙했다. 그들은 짧고 강력한 포격을 받는 적의 측방과 후방에서 사격해 정신적 우위를 달성하는 데 능숙했다. 프랑스 보병은 기동전 기억이 없었기에 후방과 차단당했다고 느낄 때마다 겁에 질렸다. 그러나 1914년 기동전의 기억을 간직한 베테랑이 많은 포병과 공병은 매우 침착했다. 역설적으로 프랑스 보병은 자동화기의 높은 비율 때문에 불리했다. 기관총은 무거웠기 때문에 탄약이 전부 떨어지면 더 빠른 기동을 위해 버려졌다. 이는 심지어 자동소총, 총류탄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13사단이 공용화기 절반을 잃어버렸다. 13사단 보병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차량화 때문에 중화기를 들고 행군하는 일을 힘겨워했다. 보병은 대규모 포병지원을 포기할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고, 부사관과 장교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자 혼란스러워해 전화선이 끊기면 통신이 멈췄다. 기동전에서 하루마다 발생하는 사상자가 참호전에서보다 높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동전 전투 2주 만에 13사단 보병의 2/3가 전투력을 상실했다. 보병과 마찬가지로 포병도 1918년에 힘든 투쟁을 벌여야 했다. 프랑스 사단은 춘계 공세 동안 돌파당하고 있는 전선을 재형성하라는 긴급 명령으로 전투에 투입되곤 했다. 사단, 군단포병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을 따라잡기 어려워했기에 막 도착할 땐 적에게 노출된 상태가 되곤 했다. 포병은 정확한 사격을 자기 힘으로 해내야 했다. 이 문제를 심화시킨 건 설치된 전화선도, 적의 모든 배치가 표시된 거대한 지도도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이었다. 3가지가 이 상황을 해결했다. 첫 번째는 보병연대까지 내려가는 즉흥적인 수단의 분권화다. 두 번째는 일반포병예비대 차량화포병의 신속한 개입이다. 차량화포병은 기병의 방호 하에서 거대한 사선을 만들어냈고 사단 포병대대를 교체하기도 했다. 세 번째는 포병의 전술적 기억이다. 1914년 기동전의 기억을 간직한 포병이 많았기에 1918년 전투에 매우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뒤발 장군이 제시한 항공 대부대라는 개념이 기회를 얻었다. 3월 21~25일에 페퀴앙 비행여단과 메나르 비행여단이 피카르디 전장 위를 날았다. 폭격기가 지상을 유린했고, 전투기가 요격하러 온 독일 항공대를 으스러뜨렸다. 이 성공에 자극받은 뒤발은 5월 15일에 두 비행여단을 합쳐 비행사단을 창설했고, 직접 지휘했다. 1차대전 때는 이에 해당하는 편제가 어느 군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행사단은 융통성 있는 조직 구조 등 독창적인 특징을 여럿 보유했다. 비행사단을 위해 체스판이 조직된 덕분에 하룻밤 만에 150km 떨어진 기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비행사단은 600대의 비행기로 행동했고, 전투기와 폭격기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우선순위가 높은 임무는 제공권 장악과 전장 혹은 철도, 보급창 등 후방 목표 폭격이었다. 전략폭격은 프랑스 동부 산업단지로 제한되었다. 이 날아다니는 소방수가 모든 결정적인 순간, 피카르디, 슈망 데 담, 콩피에뉴, 마른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항공기가 돌파 후 신속한 전과확대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법인 혼란을 이용했다. 전과확대 중 하늘의 눈에 포착된 모든 독일 종대가 항공폭탄과 기관총탄을 뒤집어쓰고 기동력을 잃어버렸다. 비행사단의 역할은 역공에서도 결정적이었다.
프랑스 보병은 서둘러 적응해야 했다. GQG는 4월 19일에 개활지에서의 공세 기동을 학습할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이것은 1917년 12월 30일 2b번 지령을 반복한 것이었다. 보병이 기동을 위해 재활을 받아야 했다. 장교와 부사관이 단순한 지휘 방법, 짧은 명령, 정확한 목표 설정, 포병과 공군력과 전차 활용법을 습득 혹은 재습득해야 했다. 1918년 7월 12일에 5번 지령이 내려졌다. 프랑스 부대는 기동전에 다양한 수준으로 적응했다. 제4야전군은 완벽하게 적응했으나 대부분은 적과 싸우며 학습 과정을 거쳐야 했다. 투지를 지닌 몇몇 장군이 이 과정을 용이하게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도살자 샤를 망쟁이다. 전투교수 외젠 드브네는 결과와 상관없이 주도권을 얻기 위한 모든 행동을 사전 승인하겠다고 선언했다. 1914년 8월 때처럼 프랑스 보병은 빠른 적응력과 넓은 수용력을 보였다. 그러나 1918년 보병 전투는 1914년의 것과 정반대였다. 1918년 프랑스 대대 대부분이 편제상 전력의 50% 이상을 채우지 못했으나, 4년 전과 달리 잘 통합된 제병협동 체계 내에서 전투를 벌였다. 보병은 1914년 때처럼 독자적이지 않았고, 1915~1917년 때처럼 포병에 종속되지도 않았다. 전투 중 비행기의 개입이 1917년의 3배가 되었다. 중형전차는 공격 선봉대로 집중 운용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나, 경전차는 보병 직접지원을 위해 개발되었다. 이러한 경전차와 보병의 비율이 1:200이 되었다 융통성을 재발견한 프랑스 포병은 독일 포병보다 발사 횟수가 많았다. 기병은 빠르게 기동하며 후퇴하는 적의 후방 요충지를 신속하게 점령했다. 전술의 진화는 전쟁을 덜 살인적으로 만들지 않았다. 1914년 8월의 밀집대형으로 화력지원 없이 정면돌격하곤 했던 결함덩어리 기동전 전투에서보다 1918년 10월의 제병협동 기동전 전투에서 하루당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전투가 훨씬 짧아졌다. 사실 1918년 전투는 양면적인 특성이 있었다. 진지전 단계와 기동전 단계로 나누어진 것이다. 동방원정군을 제외하고, 연합군이 달성하고자 한 것은 돌파가 아니라 포병의 행동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을 때마다 멈추고 전선의 다른 지점에서 맹공격을 재개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방어선을 지속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각각의 천공은 말메종 전투가 엄청난 포병의 융통성이 줄어든 화포의 밀도를 보상한 것과 비슷했다. 천공 이후엔 차량화 덕분에 가능한 빠른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 새로운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그럼 기동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이 개발한 그루프 드 콩바는 현대 반으로 정착된 전술이며, 모든 보병을 돌격대로 만든 전술이다. 1917~1918년 프랑스 부사관은 1916년 부사관과 닮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이루어진 숙련도의 평준화로 인해 프랑스 보병은 정예인 독일 돌격대처럼 침투를 거대한 규모로 실행할 수 없었다. 더 느린 방식의 침투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자가 더 적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안전했다. 독일군은 대규모 침투에 필수적인 돌격대를 잃자 정신력이 심하게 약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 보병이 세련된 기동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앞장서는 소규모 분견대를 조직하고 침투시켜 독일군의 종심 방어 배치를 좌절시키곤 했다. 기병군단은 방어 단계에서 비범한 작전적 기동을 보였다. 반면에 공격 단계에선 돌파가 실현되지 못했다. 샤를 망쟁의 제10야전군이 빌레코트레에서 반격했을 때, 제2기병군단이 5개 차량화보병대대와 5개 야포대대로 증원되었음에도 저항 극복에 실패해 전과확대를 하지 못했다. 기병군단의 현대화가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다만 장갑차는 추격에서 매우 가치 있었다. 기병의 전통적인 임무인 교란, 정찰, 습격, 기습으로 중요지형 점령을 전부 해낼 수 있었다. 포병은 이전 연도와 비교해서 현대식 중포의 보유량이 늘어났고, 차량화 덕분에 기동력도 크게 늘어났고, 숙련도와 기술도 많이 늘어났고, 사용하는 독가스가 더욱 치명적이었다. 이런 포병을 지닌 프랑스군은 돌파를 추구하지 않았고, 실패로 끝난 독일군의 춘계 공세 방식을 모방하지도 않았다. 대신 제한적인 종심까지만 이어지는 치명적이고 반복적인 공격인 일련의 천공으로 적을 흔들었다. 이러한 전술은 포병의 전력이 완벽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했다. 갑작스럽고 강력하고 짧은 공격준비사격은 적이 제병협동 돌격에 무너지도록 무력화시켰다. 비록 화포의 수가 제한적 공세 때보다 줄어들긴 했으나 포병단이 전선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신속하고 은밀하게 이동했다. 대전쟁 포병 발전사는 막대한 수단을 지닌 거대한 조직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다. 학살을 겪은 보병과 달리 포병은 전술적 기억에 의존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차, 항공대 등 젊고 융통성 있는 병과와 달리 포병은 고집 있는 노인이었다. 이로 인해 포병이 복잡화와 합리화를 반복해 나가며 발전했다. 포병은 1916년 베르됭과 1918년 피카르디에서 발생한 급격한 전술적 변화를 예언하지 못했으나, 근본부터 급격하게 바꾸어 적응했다. 따라서 프랑스 포병은 프랑스군의 초상이었다. 항공대는 프랑스군의 화력 우위에 크게 공헌했다. 이건 비행사단 덕분에 가능했다. 작전마다 비행사단이 제공권을 장악했고, 적의 후방을 와해했다. 비행사단이 637대의 비행기와 125대의 열기구를 격추했다. 그러나 비행사단 개념은 많은 비판을 일으켰다. 야전군의 6개 전투비행대대로는 정찰기를 호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행사단이 전투비행대대 하나를 지원해 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폭격기가 전투기보다 느렸기 때문에 비행사단의 혼성 편제가 비효율적임이 증명되었다. 호위 문제로 폭격기의 작전 반경이 15km로 제한되었기에 폭격이 화력지원 거리를 늘렸다기보다는 위력을 강화했다. 프랑스군에게 필요했던 비행기는 장거리 폭격기 호위와 지상 공격이 가능한 2인승 전투기였다. 이러한 기계인 코드롱 R.XI는 종전이 이루어지기 몇 주 전에나 대량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뒤발이 직접 지휘하는 비행사단과 야전군의 협조 부족이 잦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항공대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10월 플랑드르에서 포탄구덩이 때문에 보급이 어려워진 몇몇 부대가 36시간 동안의 공중보급으로 25톤의 식량을 받았다. 아르덴에서 에브라르 소령이 지휘하는 8명의 분견대가 폭격기를 타고 낙하산으로 적의 후방에 공수되어 공작활동을 벌였다. 비행중대와 전차부대의 협동이 일반적이었다. 비행기가 폭격으로 대전차포를 무력화했고, 기습을 위해 배치 중인 전차의 엔진소리를 감출 요량으로 야간비행을 하는 기만 작전을 펼쳤다. 1918년 7월 12일에 5번 지령이 내려졌다. 목적은 새로운 공격작전 개념 주입이자 체계성을 극도로 밀어붙이는 1917년 10월 31일 지령 폐기였다. 목표가 더 이상 제한적이지 않았고, 예하부대에 강력한 주도권이 주어졌고, 짧고 정확한 명령이 선호되었다. 보병이 포병지원과 이격되더라도 신속하게 진격해야 했다. 현대 소화기의 화력은 보병 기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7월 18일이 되자 연합군의 주도권이 명백해졌다.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의 명령으로 세 번의 공세가 수행되었다. 첫 번째 공세는 잃은 땅을 해방하기 위해 8월 8일~9월 13일에 실행되었다. 두 번째 공세는 9월 말에 힌덴부르크 선을 지나가기 위해 실행되었다. 세 번째 공세는 10월 말에 헤르만 선을 목표로 실행되었다. 한편 동방원정군은 9월 15일에 마케도니아 전선을 돌파하기 위한 기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군이 전쟁 중 실현한 유일한 돌파였으며, 그 결과 불가리아와 헝가리가 항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서부전선 연합군 공세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독일군의 공세는 대규모 포병을 배치하기 위해 상당한 간격을 두고 실행되었다. 연합군, 특히 프랑스군의 공세는 천공을 이용했다. 이는 덜 화려했지만 필요한 시간과 공간도 덜 필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은 보통 한두 개의 야전군이 영국군이나 미군과 연계해 실행했다. 공격마다 수백 대의 전차와 600대의 비행기를 보유한 비행사단이 존재했다. 공격준비사격은 1916년 때보다 규모가 줄어들었으나 훨씬 효율적이었다. 공준사가 몇 시간 동안만 이어졌기에 기습이 가능했다. 각 공격이 제병협동 집단에 의해 체계적인 방식으로 관리되었고 1주일 동안의 전투가 평균 10km 종심 15km 너비의 돌출부를 만들었다. 이러한 돌출부가 방어선을 흔들어 독일군의 후퇴를 야기했다. 진지전이 다음 방어선까지 기동전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러한 방법의 진격 속도는 독일군의 것과 같았으면서, 효율과 합리성은 더 뛰어났다. 또한 독일군이 포병에 의존하느라 느렸던 반면, 프랑스군은 차량화부대를 며칠 만에 집중시켰다. 공격에서나 방어에서나 독일군은 프랑스군에 뒤처졌다.
연합군 공세의 성공은 루덴도르프가 1918년 8월 8일에 암흑의 날이라고 부른 결과를 냈다. 이 공격은 전략적 전환점이었다. 백일 공세는 프랑스군의 전술적 부활을 상징했고 병과의 새로운 기능을 설명했다. 전간기 군사 연구에서 모범으로 다루어졌다. 포슈가 지시한 이 다국적작전은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헤이그가 지휘했다. 목표는 파리-아미앵 철도선 해방이었고, 프랑스군의 목표는 상테르 고원의 적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이 고원은 농작물로 가득했고 숲과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드브네가 지휘하는 제1야전군이 북남 축선에서 아브르 강을 따라 조직되었다. 그 북쪽엔 영국 제4야전군이, 남쪽엔 제3야전군이 있었다. 주 공세는 8월 8일~10일 동안 이루어져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전이 독일군의 전선을 40km 너비 20km 종심 크기만큼 뜯어냈다. 성공을 인접하는 프랑스, 영국 야전군이 이어나가 독일군이 3월 21일에 획득한 땅을 버리고 빈터스텔룽 선으로 후퇴했다. 이 승리엔 주목할 점이 여럿 있다. 참모부가 복잡하고 거대한 공격작전을 매우 빠르게 완성했다. 다국적작전이 포슈가 7월 24일에 공격 명령을 내리고 2주일만에 수행되었다. 이러한 집중 속도는 대부대의 융통성에서 나왔는데, 예를 들어 이미 배치되어 있던 1군의 군단들은 공세에 그대로 투입되었다. 반면 독일군은 기동군과 방어군이 분리된 체계였다. 독일군은 공격작전을 수행할 때 우선 방어군 후방에 충격부대를 조직하느라 보안 누수와 시간 지연을 일으켰다. 양쪽의 속도 차이는 독일군이 프랑스군과 달리 예비군을 융통성 있게 사용했던 1914년과 정확히 반대되는 양상이었다. 8월 8일 공세를 증원하기 위해 GQG가 제3 야전군의 군단 하나를 1군으로 보내 남쪽 측방에 배치하도록 했다. 4개 보병사단이 7월 23일까지 트럭과 열차를 타고 도착했다. 제2 기병군단이 군마와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포병대대가 트럭으로, 혹은 트랙터로 견인되어, 일부는 철도로 증원되었다. 8월 6일엔 2개 경전차대대가 트럭에서 하차했다. 같은 날에 비행사단의 준비가 끝났다. 작전 실행 속도의 원인으로 포병 절차의 간소화도 있었다. 1600문의 포를 위한 모든 사전 절차가 며칠 만에 끝났고, 적에게 경고로 작용할 조정사격은 필요없었다. 부대가 배치되는 속도와 간소화는 기습을 보장했다. 엄격한 보안도 빼놓을 수 없다. 계획을 군단에서 특별히 선택된 장교들이 완성했다. 이 장교들은 명령을 직접 작성했다. 전화기가 금지되었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면 심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포병을 포함해 부대를 배치하기 위한 모든 이동이 돌격 이틀 전 야간에 실행되었다. 공격 전야에 1제대의 부대가 위치를 잡았다 정찰은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공격 전 야간에 비행기가 31군단 위를 날며 전차의 엔진소리를 감추었다. 계획된 기동이 매우 독창적이었다. 1군 북단의 31군단은 아브르 강 우안에 500m 너비 4km 길이의 작은 교두보를 두었다. 그 남쪽엔 좌안에 9, 10, 35군단이 있었다. 이 부대들의 행동은 2단계로 나누어졌다. 8월 8일에 31군단이 짧은 공준사가 시작되자마자 교두보를 넓히고 아브르 강을 몇 시간 후 건널 예정인 9군단과 연결했다. 다음날에 10군단과 35군단이 몽디디에 양익에서 협공했다. 10군단이 아브르 강을 건너기 위해 9군단의 교두보를 활용했다. 이러한 측방 기동에 주목할 만한 포병사격 기동이 동행했다. 작전에 제한적인 수의 포병만이 가용했는데, 말메종 전투 때 1km당 40개 포대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km당 14개 포대였다. 따라서 1군 참모부가 포격의 기동을 전체 기동 과정과 속도를 맞춰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배열했다. 8월 8일에 31군단 후방에 추가적인 포병이 집중되었다. 31군단의 성공이 확실시되자 포병자원 일부가 인접 군단으로 양도되었고, 군단의 임무가 끝나자 포병 자원을 다시 포기했다. 한편 포병자원의 다른 일부가 남익 35군단 후방으로 이동했다. 이곳에 8월 9일 공준사를 위해 통신망이 설치되어 있었고 각 포대를 위한 포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동시에 각 군단이 어떤 수단도 이동시키지 않으면서 인접 군단을 특정한 숫자의 포문으로 특정한 구역에서 지원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장사정포가 중앙에 배치되어 전투지대 전체에서 행동할 수 있었다. 각 군단 수준에서 자원이 합리적으로 분배되었다. 야포, 220mm 박격포를 포함한 단포신 중포가 사단에 분배되었다. 야포는 주로 이동탄막을 제공했고, 단포신 중포는 모든 저항을 무너뜨렸으며, 장사정포는 군단이 대포병사격과 더 먼 거리의 목표를 타격하는 데 이용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포병의 기동성과 모듈화가 최대로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제37 보병사단은 10개 포병대대로 전투를 시작했으나, 전투가 끝날 때쯤엔 3개 포병대대만이 있었다. 8월 11일에 제42 보병사단의 포병이 4개 보병사단을 오가며 작전을 수행했다. 3차원 통제는 측방기동이 종심에서의 행동과 결합되도록 만들었다. 포병이 연대와 가깝게, 군단 전투지대에, 그리고 야전군 구역에 3줄로 배치되었다. 군단 수준에서 22개 관측기 비행중대가 포병을 도왔고, 초중포를 위한 3개 비행중대도 있었고 3개 정찰비행중대도 있었으며, 13개 열기구중대도 있었다. 이러한 단거리 정보 수집 수단을 3개 전투비행대대, 즉 150대 전투기가 보호했다. 포병 활동을 비행사단 자산이 장거리 정찰집단, 3개 폭격비행중대가 보완했다. 300대의 2인승 폭격기가 적 증원군 도착지를, 특히 철도역을 타격해 중포 사격의 효과를 신장시켰다. 야간폭격비행대대 덕분에 시간과 상관없이 적을 교란할 수 있었다. 비행사단의 5개 전투비행대대가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이 적을 감시하기도 했고, 폭격기를 호위하기도 했고, 적 수송대와 집결지를 공격하거나 관측을 위해 띄운 연과 열기구를 격추하기도 했다. 1914년 프랑스 항공대의 약 7배인 이러한 공군 자산 전부가 40x30km 직사각형 내에서 작전을 실시했다. 선호되는 방법은 특별히 결정된 시간과 장소에서의 집중 타격이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정찰비행중대가 제공하는 정보 덕분에 가능했다. 정보가 무선으로, 사진의 경우 전령용 비행기로, 혹은 추를 달아 지면에 떨어트리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 모든 정보를 라디오 혹은 연락장교를 수단으로 하여 비행사단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항공사령관이 집중했다. 이 덕분에 8월 10일에 루아 마을을 막 떠난 수송대를 2개 전투비행대대가 공격한 것과 라시니-누아용 도로를 9대의 코드롱 R.XI의 호위를 받는 68대의 폭격기가 공격한 것과 같은 습격이 가능했다. 2번째 사례에서 17.5톤의 폭발물이 적 전투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30분 만에 투하되었다. 독일 전투기는 폭격기를 1대도 요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2대를 잃었다. 이날에만 비행사단이 50톤의 폭발물과 20000발의 기관총탄을 독일군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모든 공습이 사진 촬영되고 분석되었다. 항공사진으로 8월 10일에 독일군이 비행기지를 버리고 있음을 알아냈는데, 이것은 독일군이 후퇴를 준비 중이라는 명백한 신호였다. 이러한 하늘의 보호 아래서 여러 지상부대가 종심으로 전과확대를 하며 모든 기회를 잡았다. 제31군단에서 전과확대 부대는 북쪽에선 153보병사단, 기병연대, 2개 경전차대대였다. 중앙에선 기병사단이 전과확대를 했다. 몽디디에 남쪽에선 이러한 과업이 제2 기병군단에 주어졌다. 그러나 예전처럼 자기 역할을 충족하지 못했다. 기병은 전장의 교통 혼잡 때문에 기마 활동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병목 현상 때문에 1개 경전차대대가 시간표에 맞게 전선에 도착하지 못했고 연료 부족을 겪었다. 그중에 1개 경전차중대만이 재보급이 가능해 실제로 전투에 개입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제한적이었다. 다른 경전차대대는 각 돌격 연대에 중대 단위로 분배되었고, 경전차소대와 보병의 완벽한 협조가 이루어져 훨씬 많은 성취를 이루어냈다. 89대 전차 중 9대만이 격파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보병전투에선 대담함과 다른 병과와의 밀접한 통합이 보였다. 예시는 31군단의 제42 보병사단이다. 이 사단은 뤼스 강에 의해 양분당하고 있고 적 바이에른 사단의 전초기지와의 거리가 1km라는 문제를 겪고 있었다. 사단 보병이 뤼스 강을 밤중에 몰래 건너고 적 전초기지와 300m 떨어진 곳에 전선을 설정했다. 새벽 4시 20분에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다. 연막탄이 새벽안개에 농도를 더했고 1시간의 공준사 후 시작된 보병돌격을 은폐했다. 덕분에 적의 탄막은 보병돌격이 시작되리라 잘못 예측된 빈 땅만을 때렸다. 첫 목표는 1시간 후에 달성되었다. 그러자 사단포병 일부가 직접지원을 계속하기 위해 전방으로 이동했다. 정오 전에 2제대가 1제대를 넘어가서 두 번째 목표를 확보하기 위해 오후 내내 전투를 벌였다. 탈진한 사단이 그날 저녁에 교대했다. 하루 만에 사단이 10km 종심을 돌파하고 21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79문의 화포, 200정의 기관총을 노획했고 3개의 마을을 점령했다. 보병과 포병 간 협조가 지상부대 상공을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2인승 비행기를 보유한 사단 비행중대 덕분에 용이했다. 8일 오후에 30분 만에 제153 식민지 보병사단의 한 비행기가 총알을 쏟아부어 독일군을 진지에서 쫓아내고 공중에서 투하한 전갈로 포병에게, 무선통신으로 본부에 알렸다. 이후 그 비행기가 숲에 진지를 구축한 독일군을 쫓아갔다. 예광탄 기총 사격과 전갈 덕분에 제2식민지 보병연대 병사들이 자기 인접부대가 어디있는지, 적이 어디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2.1.1. 알자스-로렌을 향해 돌격한 프랑스군?
일반적으로 프랑스군의 제17계획을 군인을 강제로 돌격시켜서 기관총 앞에 갈아버린 무능의 극치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1919년 5월 프랑스 국민의회에서는 패배의 원인 분석과 지휘관 질책을 위해 주요 장군들을 소환해서 청문회를 열었다. 여기서 제17계획을 세운 중심인물이었던 노엘 에두아르드 드 카스텔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프랑스군 작전참모들이 17계획에 작전계획(Operation Plan)을 포함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는 동원계획(Concentration Plan)에 대해서만 의논했다."
여기에 대해 의원들이 동원계획과 작전계획의 차이점에 묻자 참모총장 조제프 조프르가 작전계획은 군사작전의 세부사항까지 정의한 것이며 동원계획은 병력을 제 위치에 배치함으로써 전투를 준비하는 성격의 계획이라며 둘의 차이점을 설명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17계획이 병력 동원계획이며 아르덴 공세를 포함한 작전은 17계획에 포함되어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세작전은 적군의 군사 배치에 관란 첩보를 입수한 후 참모총장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따라서 초기 프랑스군의 공세와 그에 따른 피해는 17작전 때문이 아니라 조제프 조프르 개인의 무능함 탓이며 엘랑 비탈과는 상관없다. 오히려 수백만의 육군을 전쟁 직전에 국경에 배치한 동원 계획으로 봤을 때 17작전에 한해서는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7작전이 군사작전으로 알려진 것은 전간기 프랑스의 좌파 세력이 정치적인 이유로 17계획 = 공세주의 무능작전이라고 선동하고 영국에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탓이다.
2.1.2. 프랑스군은 돌격만 했다?
1915년 중부에 출간된 "총공세를 위한 목표와 조건"(But et conditions d'une action offensive d'ensemble-Goals and Conditions for a General Offensive Action) 혹은 노트 5779이다. 1914년말과 1915년초에 프랑스군이 참호전과 화력전을 치르면서 쌓은 경험을 집대성한 결과물로 참호전을 휘어잡는 과정에서 출간된 첫번째 걸작이라 할 수 있다.이 문서는 후일 독일군의 발명물로 취급받는 침투 전술(혹은 '후티어' 전술)을 사실상 최초로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스군은 서부전선에서 공세를 담당하며 1916년의 베르됭 전투까지 방어에 일관한 독일군보다 더욱 공세 전술을 발전할 기회가 많았고 그로인해 궁극의 공세 전술인 침투 전술을 개발해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게 조나단 크라우스(Jonathan Krause) 교수의 설명이다.
- 보병돌격의 목표는 1차 참호선의 탈취로 멈추지 않고 더 후방의 목표를 노릴 수 있는 요충지를 탈취해야 한다.
- 보병 소대는 경보병과 같이 산개하여 움직이며, 적을 향해 근접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엄폐물을 향해 움직여서 총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 공세에 있어서 1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강습부대로써 적의 방위거점을 위해 최대한 깊숙히 돌파해야 한다. 2차로 파견되는 보병은 참호 청소병(nettoyeurs de tranchée)으로써 리볼버, 트랜치 나이프,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참호에 돌입해야 하며 이를 위해 특수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 참호 청소병들을 엄호하기 위해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추가적인 기관총, 가시철사, 폭파용 폭약, 모래주머니, 박격포 등으로 무장하고 엄호한다.
- 포병은 공세에 있어서 체계적인 공격으로 적을 압박하고 아군을 엄호한다.
이 전술교리는 보병 돌격의 목표가 적군의 1차 참호선의 탈취뿐만 아니라 후방의 목표를 공략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주목적-적방어선의 돌파-을 달성시킬 수 있는 요충지를 장악한다.” 따라서 이 문서의 본문은 ‘무한 전투’(continuous battle)를 강조하고, 포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체계적인 전투’(methodical)를 중시한다. 그리고 보병을 다루는 부록에서는 다시 돌파를 중심으로 한 무한 전투를 강조한다. 이 부록의 설명에 따르면, 보병은 마치 척후병처럼 산개형 대형(dispersed formation)을 유지하면서 여러 엄폐물에 몸을 숨기며 적군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이는 전전(戰前-pre-war)의 이론과 맥락이 닿는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nettoyeurs de tranchée, 혹은 ‘참호 청소병’(trench clearers)에 대한 언급이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정립된 교리 내에서 수 차례 반복되는 첨투전술에 대한 서술 중 최초로 등장하는 사례로서, 특별훈련과 장비를 지급받은 병사들이다. 부록에 의하면, 1차로 파견된 보병들은 적 방위거점을 피해 최대한 깊숙이 돌파해야 한다. 또한 2차로 파견된 참호 청소병들은 앞서 강습 부대(assault troop-앞서 언급된 1차로 파견된 보병)가 회피한 적 방위거점을 제거해야 한다. 이 참호 청소병들은 리볼버(revolver-회전식 연발 권총), 참호검(trench knives), 수류탄이 지급되어 근접전을 대비하고 이를 위한 특별훈련을 받는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공병들은 평소의 장비와 별개로 기관총, 폭발물(petard), 가시철사(barbed wires), 모래 주머니, 박격포(trench mortar)를 지급받는다. 침투 전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공세작전을 기획하면서 가장 필수적인 전술로 사용된다. 이는 ‘후티어’ 전술로도 불리며, 독일군의 발명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으나 실은 프랑스가 먼저 개발한 것이다.
하지만 후티어 전술 등 침투 전술을 개발할 당시에는 프랑스군은 여전히 "돌파"라는 구시대의 개념이 아직 가능한지 긴가민가한 상태였다. 페르디낭 포슈, 필리프 페탱, 에밀 파욜 등의 지휘관들은 "체계적인 공세", 즉 포격으로 확실히 짓밟고 보병은 잔해 처리 및 깃발 꽂이역으로 활용하는 그러한 방식의 공세로 기울었지만 빅토르 위르발같은 지휘관은 여전히 돌파가 가능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끝없는 인력을 목표를 향해 공격하는 "무한 전투"를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서 언급하는 노트 5779는 프랑스군의 참호전에 대한 해답이 아닌 과도기를 넘어가는 순간의 이정표라고 봐도 무방하다.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은 오인된 측면이 많고 포슈의 최대 비판자이자 프랑스군의 공세정신에 대해 여러 서술을 보인 리델 하트조차도 주장하지 않은 것들이 실려 있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군은 1915년의 과도기를 거쳐서 1916년에 이르면 상당한 전술능력을 갖춘 덕분에 영국군이 공세 첫날에 5만의 사상자를 낼 때 프랑스는 겨우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고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는 대성과를 얻었다. 이러한 점을 부각하지 않고 1차대전의 프랑스군에 대한 항목은 전초의 군복이나 초반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비웃기 바쁘고 1차대전을 승리했다는 점, 또한 2차대전의 패배나 입은 피해로 인해 무마하고 조롱으로 일관하기 바빴던 것이 사실이다.나폴레옹 이후 프랑스 최고의 명장이라 할 수 있는 페르디낭 포슈조차도 제대로 무슨 역할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의 츠지 마사노부인양 까인 것은 이러한 풍조의 일환이라 보인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프랑스군의 전술/전략의 발전은 상당히 복잡한 분야지만 로버트 다우티 교수의 "The Pyrrhic Victory"나 "The Seeds of Disaster"을 참고하는게 좋으리라 보인다. 조금 더 첨언하지면, 프랑스군이 1918년에 개발해낸 해답은 결국에는 돌파라는 개념을 버려서 이뤄낸 것이다. 포격으로 적진을 박살내고, 포병의 사거리까지 보병을 진격시키고, 포병 또한 앞으로 들이밀고, 다시 포격으로 적진을 격파한다는 것을 전술적인 국면에서 반복했다. 전략적인 국면의 경우에는 한 전장에 집중하는 개념을 버리고 여러 전선을 서로 다른 타이밍에 공격해서 적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내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해서 독일군이 방어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묻매를 맞도록 강요했다. 결국에는 2차 마른 전투에서부터 독일군은 거의 120일간 제대로된 반격을 못하고 완전히 완패하며 벨기에와 프랑스에 장악한 영토를 죄다 토해낸 다음에 11월 11일에 사실상 항복하는 결과를 낸다. 이는 "The Pyrrhic Victory"에서 다루는 1918년의 성과이다.
1918년의 교전은 4년만에 부활한 기동전이라는 측면이 부각되긴 허나 화력전 및 소모전으로 말 그대로 독일군의 마지막 전력을 빨아먹어서 군 자체의 붕괴를 이끄는데 주력했지 우월한 기동력으로 적군을 돌파하고 유린하는 방식(가령 1940년의 프랑스 침공이라던가)은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불가리아군을 상대로 실현했다. 사실상 그 시점에서 영불 모두 허덕이던 시점에 미군은 애송이에 불과한다는 점에서 1918년에 연합군이 보인 분투는 놀라운 수준이고 그만큼 독일군 또한 그간의 피해가 심각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즉 연합군은 4년동안 버틴 대가를 받아간 것이다.
2.1.3. 왜 이렇게 비하적인 이미지가 박혔는가?
세계 1차 대전 자체가 방어자들의 화력과 방어 수단들이 공격자들의 화력과 공격 수단들을 모두 월등히 뛰어넘고 있었고, 이런 방어선을 뚫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 방식은 대규모의 돌격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국가들은 프랑스식 돌격전 교리를 어느 정도 도입하고 있었고 화력기동전을 신봉하던 독일조차 돌격대라는 근접전 병과를 양성하고 있을 만큼, 엘랑 비탈은 시대에 뒤쳐진 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군이 솜 전투에서 자국 병사들을 사단 단위로 갈아버리고 있을 때 프랑스군은 1천명 내외의 손실로 목표를 제압하는데 성공한 바 있을 정도로, 지휘관에 따라서는 나쁘지 않은 교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미지가 실추된 가장 큰 이유론 이후 세계 2차 대전 시기에 프랑스가 6주 만에 스무스하게 털려나가서 파리까지 정복당해 정부가 그대로 항복했고, 그로 인해 프랑스의 군사적 업적 전체가 완전히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버렸던 점에 있다. 2차 세계 대전기의 프랑스군은 서유럽 육군 최강국이란 명성에 걸맞지 않게 군사적 교리의 구시대적인 부분들을 뜯어 고치는데에 실패했고, 정치적 혼란도 제대로 잠재우지 못 했으며, 그 상태에서 전격전을 통한 기습까지 당하면서 단번에 붕괴 수순으로 들어가 그나마 국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수행한 수도 파리가 함락당하자 완전히 패배했다면서 독일군에게 유럽을 향한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10] 때문에 프랑스군 =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조금만 질거같으면 바로 항복하는 이탈리아 군보다 조금 더 좋을 뿐인 병신 군대로 이미지가 제대로 박혀버렸다. 이는 단순히 1차 대전의 승전국 이미지가 망가진 수준이 아니다. 프랑스군이 수백년 동안 숱한 전쟁을 치르며 쌓아올린 강군의 이미지를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의 대참사였다.
또한 독일군 역시 자신들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군을 까내리기 바빴고, 대중들에게 가장 폭 넓은 주목을 받는 독일 국방군 장성들은 정치나 외교 면에선 상당히 협소한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2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실패는 1차 대전 이후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정치적 혼란, 대공황으로 인한 군사 개혁의 좌절, 1차 대전의 악몽을 떠올리며 분명 잡을 수 있던 기회와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한 군 상층부 등에 기인하는 바이나 독일군 장성들은 구시대적인 엘랑 비탈 교리에만 주목하여, 여러 장성들의 자서전에서 프랑스군의 엘랑 비탈 교리를 깎아내렸다.
이렇게 독일군 장성들이 엘랑 비탈을 깎아내리고 그들을 높이 평가한 미군 역시 프랑스군의 6주 참패를 대놓고 무가치한 졸전으로 깎아내리며 자신들의 적들과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때문에 엘랑 비탈의 이미지가 이렇게 박한 것은 진정 엘랑 비탈이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엘랑 비탈을 탄생시킨 프랑스 스스로가 진짜 병신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의 대규모 졸전을 벌여 히틀러 아가리에 자기 목숨을 갖다 바친 수준의 대참사를 일으키고 이를 경험한 독일군 장성들, 제 3자 입장에서 보던 미군의 악의적인 저술, 그리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중들의 문제이다.
게다가 엘랑 비탈을 더 이상하게 베낀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일본군이다. 프랑스군이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키는 모습을 본 일본군 수뇌부는 "아! 독일처럼 비싼 돈 들여서 기동전 펼쳐도 프랑스처럼 돌격하면 다 소용없구나!"라는 이상한 교훈을 얻었다.
그래서 엘랑 비탈 교리에서 백병전 교리만 따와서, 일본군사연구소 중 하나였던 토야마학교에서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라는 이름으로 백병전 교리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완성된 일본군의 백병전 교리는 장교가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돌격할 것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장교들에게는 군도가 기본적으로 지급되었다. 1916년에 이런 짓거리를 했으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건 없지만 1944년이 되어서도 "군도의 사용법 및 시참요령" "단기속성 일격필살 훈련요령" 같은 교본을 일선에 배포하며 반자이 돌격을 했다.[11] 일본군의 이 정신나간 행적은 엘랑 비탈 교리 자체마저 일본군식 정신력 우월주의, 의지 드립으로 오해하기 딱 좋게 만들었다.
2.2.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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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밈이 탄생된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갤러리 등에서는 프랑스를 '엘랑스'라고 부르고, '항복'이란 뜻으로 '엘랑했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12][13] 대표적인 표현이 2차대전에서 독일에 6주만에 항복한 걸 비꼬는 "6주 엘랑".
Hearts of Iron IV의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분열된 정부'라는 국민정신을 달고 시작하는데, 매일 정치력을 0.8 소모하고, 안정도가 10% 감소하며, 항복 한계치가 무려 50%나 감소한다. 이 수치는 협력정부로 깎이는 것(항복 한계치 -30%)보다도 높은 페널티로, 다시 말해 항복도가 2배로 올라 파리 같은 주요 승점 지역이 고작 몇 개 점령되는 것으로 항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14] 이는 게임 밸런스적으로 프랑스를 독일이 공략하지 못하면 독소전쟁 발발시 양면전선이 형성되어 순식간에 망하기 때문에 주어진 페널티로, 해당 페널티를 땐 프랑스는 국토 전역을 점령해야 항복할 수준으로 끈질기게 버티며 육군메타를 가는 순간 1차대전 당시의 불굴의 프랑스로 단숨에 체급이 떡상한다. 독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위시로 한 몇몇 국가들 역시 프랑스를 먼저 점령하고 시작할 수 있으며, 이 "선엘랑"은 아무리 약한 나라여도 파시로 정부를 바꿔주고 10공수만 준비해주면 열강 하나가 1937년에 사라지는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게임의 가장 쉬운 날빌 빌드로 통한다. 라이베리아로 공수해서 선엘랑한 사례[15] 그래서 멀티플레이에서는 분열된 정부를 빠르게 제거할 수 있는 공산주의나 국민 부흥(파시즘) 루트를 간다.
라스트오리진에서는 불굴의 마리의 패시브 스킬 이름 중 하나이다. 실제로 설정상 끝까지 물러나지 않고 공격을 밀어붙여 가장 피해가 심한 바이오로이드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의 파워 메탈 밴드 중에 동명의 밴드가 있다.
[1] 전쟁부는 당연히 앙주랑의 미친 요구를 무시했다.[2] 크릭스아카데미를 모방한 만큼 에콜 드 게르에 입학하고 싶으면 독일어로 논문을 써서 심사를 통과해야만 했다. 식민지 전역에서 실전 경험 많이 쌓으면 특별 입학이 가능했지만. 그 정도로 독일군을 열심히 배우자는 분위기였으므로 당대 프랑스 이론가들이 무언가 주장을 하고 싶으면 무조건 독일 이론가를 인용해야 했음이 별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제일 인기있는 사람은 클라우제비츠와 헬무트 폰 몰트케였다.[3] 실전주의와 더불어 프랑스군을 지배했던 과학적 군사학을 의미한다. 프랑스군은 보불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기네 군사학을 폐기처분한 다음 독일 군사학을 배우면서 전쟁을 예술 행위로 간주하게 되었다. 보통 이런 맥락에서 쓰인 art는 술이라고 번역하긴 하지만 당대 이론가들이 보불전쟁 전후 프랑스군의 사고방식 변천과정을 설명하며 전쟁을 시, 회화, 문학에 비유하는 등 명백하게 예술이라는 의미로 art를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정신력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도 이 때다. 프랑스군의 19세기 과학적 군사학에선 사기, 간부의 질적 수준, 병사 개개인의 역량 등 정신적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혹은 모든 군대가 똑같은 수준으로 가졌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4] 그래서 보날의 제자인 포슈는 작전술의 초기 선구자 중 한명으로 여겨진다.[5] 에콜 드 게르의 1세대 교수들은 보불전쟁 베테랑이니 이들이 주장한 공세주의와 정신력의 중요성에 대해선 다들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도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다.[6] 에콜 드 게르 교수들과 CHEM 청년 튀르크들의 사상과 이론은 차이가 꽤 크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청년 튀르크들은 정신력을 승리로 인도해주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로 여겼고, 아방가르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위원회는 청년 튀르크들의 사상은 대체로 받아들이되 아방가르드를 부정하는 이론은 무시하는 식으로 절충한 듯 하다.[7] 1:1~1.1:1, 러시아군 1:1.5 ~ 1:2.5 , 영국군 1:1.2 ~ 1:1.5[8] 그마저도 사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미국이 그러한 압도적인 국력의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1차대전의 미군은 프랑스군의 장비를 공여 받아 싸우는 2류 군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야드파운드법 나라에서도 미터법 규격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러한 사실은 무시되었다. 그리고 1차대전 막바지에 참전해 비중이 썩 크지도 않거니와 그나마 싸웠던 전투에서도 크게 선전하진 못했다.[9] "나의 중앙은 무너지고 있고 우익은 철수중이니 그야말로 최고의 상황이다. 나는 공격할 것이다." 포슈 본인의 항목에도 쓰여져 있듯 실제로 한 말은 아니고 당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는 포슈를 언론에서 부각시키면서 창작된 말이다.[10] 당시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이라는 인물부터가 이렇게 싸울 준비가 아예 안 된 상태였던 프랑스군을 압축, 요약한 수준의 인물이었다.[11] 이때 백병전 위주를 완성시켰던 토야마학교에서는 전후 일본검도 토야마 유파로 살아남아서 유명해졌다.[12] 다만 이렇게 밈으로서 조롱받는 것과는 별개로 유로파 내에선 엘랑은 10%만 올라도 감지덕지인 육군 사기를 20%나 늘려주는 덕에 그야말로 사기적인 종특으로 여겨지고 있다.[13] 사실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 1티어 급, 특히 육군 최강인 육각본능 왼쪽 파란 거에 비해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선 열강이긴 하나 별볼일 없고 어느 나라가 침공해도(심지어 베네룩스나 스위스에게도!) 독일이 정석대로 안슐루스, 뮌헨협정 루트 타주고 기갑 뽑으면 낫질할 필요없이 마지노선에 무지성 웨이브로 돌격해도 뚫린다.) 패배하기 바쁜 국가로 나오는 영향이 크다. 특히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나라에 상관없이, 협력정부 없이도 수도인 파리만 함락시키면 분열된 정부 페널티를 떼지 못한 민주 프랑스는 그대로 항복하고 사막에서 개싸움을 해야 되기 때문에 멀티에서 프랑스는 십중팔구 파시즘으로 독일에 붙거나 공산주의(프랑스 코뮌), 비동맹으로 갈아탄다. 연합국에 남는다면, 워낙 악명이 높으니 미국, 영국에서 병력을 개때같이 보내 프랑스에 몰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 해당 영상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협력정부를 박고 프랑스 남부에 공수 조금 한 것만으로 프랑스를 항복시켰다.[15] 그래서 이러한 점이 개선된 The Road to 56 모드 같은 경우 프랑스가 뻐기면서 1차 대전의 재림을 보여주기도 한다. 뭐 그래도 십중팔구는 망하지만 바닐라에선 그것도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