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20:14

독일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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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신성 로마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프랑스 대혁명이 터진 1789년 당시의 세속 선제후국과 그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라인 동맹 및 독일 연방, 북독일 연방 구성국들의 군대의 경우 왕국 이상급 국가만 기재.
※ 독일 제국 구성국들의 군대는 독립적인 전쟁성을 가진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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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게르만족은 원래가 호전적인 야만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역사는 고대 게르만족로마 제국군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개박살 내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현프랑스 일대의 갈리아인들이 그들의 잔인함과 군사적인 강력함에 두려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로마 제국의 힘을 빌리려다 로마에게 먹히는 단초를 제공했다.[1]

고대 유럽의 지배자였던 로마 공화국과 제국 모두 게르만족을 제국의 안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주적으로 간주하였으며 게르만족의 군대를 상당히 경계하였다.[2] 기원전 102년에는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 족이 알프스까지 밀고내려오며 로마 공화국을 위협하였으며[3]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반로마 갈리아인들의 강력한 지원세력이었던 게르만족을 소탕하기 위해 수차례 라인 강을 넘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울창한 숲을 활용한 게르만족의 공격에 적지 않은 손실을 보고 물러났다. 이때 카이사르의 기록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로마군 기준으로 이미 말을 잘타는 민족으로 정평이 나있던 갈리아인들보다 더 우수한 기병전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최정예 경호대로 가장 신뢰하였던 제 10군단이 아닌 게르만족 기병들을 등용하였다. 특히 갈리아 전쟁 7년차에 대부분의 갈리아 부족이 베르킨게토릭스 편에 붙으며 기병이 부족해지자 카이사르는 게르만족 중 로마에 우호적이던 우비족에게 기병 제공을 요청했고 이들이 제공한 기병대가 이후의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게르마니아 전쟁을 이르켜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를 중심으로 하여 엘베강 서안까지 게르만족을 평정하나 싶었지만 정복 이후 속주 안정화 작업을 맡은 후임 사령관 바루스가 게르마니아 실정에 맞지 않는 정책을 펼치며 민심을 잃었고 그 결과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체 로마군 전력의 10%에 달하는 3개의 군단을 말아먹으며 게르만족은 라인강 서안의 영토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이후 게르마니쿠스가 다시 한번 엘베강까지 밀고 올라가는데 성공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앞선 바루스의 전례와 자신의 게르마니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엘베강 서안의 게르만족을 로마화시켜 속주로 삼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하여 철수를 지시하게 된다. 이후 로마는 국경지대 게르만족을 동맹부족으로 삼고 보조부대로 적극 채용하였다.[4] 하지만 2세기부터 훈족이 서쪽으로 대량 이주하기 시작하며 로마군과 게르만족은 대규모 충돌을 거듭하는데 이때 로마군은 도나우강을 넘어 빈 일대까지 게르만족을 소탕하는데 성공했지만 로마군 역시 피해가 극심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게르만족과 강화를 맺었다. 이후 3세기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이 내전으로 혼란한 사이를 틈타 빠른 기동력을 활용하여 판노니아 속주를 농락하였으며 251년에는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데키우스 황제와 공동 황제였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전멸시켰고 410년 로마를 약탈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단, 고대의 게르만족은 근현대의 독일 민족을 뜻하는 좁은 의미가 아니라 훨씬 광범위하고 넓은 범위였음을 알아야 한다. 중국 사서에서 요하 너머의 종족을 싸그리 동이라고 불렀듯 로마 역시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의 부족들을 싸그리 게르만이라 불렀다. 우크라이나 초원지대에서 온 이란계 백인유목민인 알란족까지 게르만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광범위한 명칭이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또한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이미 무리에 아틸라가 죽은뒤 와해된 훈족과 여기에 슬라브족까지 다수 섞여있었다.

2. 중세

게르만족은 강력한 로마군에 패배하면서도 수에비족, 반달족, 서고트족 등은 라인강을 도하해 속속 로마 제국을 침범했고, 결국 3세기에 와서는 로마는 쇠퇴하고 게르만족으로 주도권이 넘어 갔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게르만족은 단일조직이 아니라 여러 부족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이며, 개별 부족의 패배는 곧 게르만족의 전체의 패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서 로마가 분리되고 410년에는 최초로 로마가 약탈당했다. 지금으로 치면 최강대국인 줄 알았던 미국이 수도가 약탈당했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 서고트족을 수차례 격퇴했던 스틸리코가 귀족들의 모함으로 처형되자 서로마는 결국 게르만족에게 멸망하고, 유럽은 게르만족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게르만족 중 반달족은 스페인을 거쳐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다른 곳의 게르만족은 대부분 현지인에 동화되었으나, 독일 지방에 남은 게르만족은 훗날 독일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영국과 북유럽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손에 넣은 프랑크 왕국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의 국가였으며, 카롤루스 대제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리되자, 동프랑크는 현재의 독일, 서프랑크는 프랑스가 된다. 그리고 동프랑크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로마를 자칭한다.[5]

중세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황권이 약해지기 전까지는 제국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중동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물론 상비군은 없었으나 이건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진 중앙 집권 전통을 가지고 있던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중세 대부분의 국가들이 전부 해당되는 이야기라 의미가 없다. 제국의회에서 외적에 대한 제국전쟁 또는 국내 반란 세력에 대한 제국집행을 선포하면 각 관구에서 소집된 기사들을 중심으로 '제국군(Exercitus Imperii)'이 편성되었다. 제국군은 신성 로마 제국이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으며 전력 역시 약하지 않았다. 가령 10세기 초반까지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상대로 무차별 습격과 약탈을 일삼던 무시무시한 마자르족레히펠트 전투에서 박살내어 서유럽을 지켜냈던 인물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오토 1세였다.

한편 십자군 전쟁 이후 독일인 기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튜튼 기사단이 동유럽을 석권하며, 현재의 칼리닌그라드 일대에서 전 발트 3국을 아우르는 거대한 기사단 국가를 건설하여 위세를 떨쳤다. 여기에 더 머무르지 않고, 계속 동진하다가 결국은 현재 에스토니아의 페이푸스 호에서 노브고로드 공화국알렉산드르 넵스키[6]에게 패하여 더 이상 동진할 수 없었다.

이후 1410년 리투아니아 대공국비타우타스 대공과 폴란드 왕국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가 이끄는 연합군과 벌인 그룬발트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 기사단국은 리투아니아 대공과 폴란드 국왕을 겸한 브와디스와프 2세의 차남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연달은 공격으로 몰락했고 1525년 37대 기사단장인 호엔촐레른 가문안스바흐 방계 출신 알브레히트마르틴 루터종교 개혁을 보고 루터교회로 개종하여 외숙부 지그문트 1세의 허락을 받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남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공국은 2대만에 절손되었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본가가 통치하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결성되었다.

3. 근세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영방국가들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하면서 군사적인 통일성 역시 약화되었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력의 핵심 전력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사병인 '황제군(Kaiserliche Truppen)'이었다. 황제를 보위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들은 17세기 이래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에 닥친 위기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며 제국의 위상을 지켜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가의 심장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이름에서 착안하여 오스트리아군으로도 불렸으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가 독일의 중심이었기에 이들은 독일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그 라이벌은 18세기 이래로 급성장한 프로이센 왕국의 '프로이센 왕국군'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7]호엔촐레른 가문 군주들은 수많은 월경지와 짧은 종심, 자연적 장애물이 없다는 문제점, 그리고 유럽의 중앙이라는 지정학적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자 했다. 특히 베를린 중심의 중앙집권제를 완성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는 상비군을 창설하는 한편 앞서 말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군국주의를 추구하였다. 8만의 대군은 인구 200만의 소국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규모였으나 그들은 군신이라고도 불리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지휘 하에 군사적 신화를 써 내려가며 당대 유럽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버금가는 독일 내부의 양대 맹주로 성장하고, 장차 통일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외 하노버 선제후국군, 작센 선제후국군, 바이에른 선제후국군 등의 군소 국가들의 군대 역시 성장했다. 이들은 18세기 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시켜 버린 뒤 독일 지역에 라인 연방을 설치하자 그 핵심적인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예외적으로 하노버군만은 영국과의 동군연합 때문에 영국군의 일원으로 나폴레옹에 맞섰는데 당시 하노버 선제후국은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가 왕으로 있던 괴뢰국베스트팔렌 왕국에 속해서 이름뿐인 군대였다. 프랑스 제1제국의 '대육군'에서 이 독일 동맹국들의 비중은 적지 않았으며 그들은 나폴레옹과 함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의 군대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3년경 대부분 총부리를 돌려 연합군으로 돌아선다.

4. 근대

실질적인 독일 강군의 신화는 18세기 프로이센 왕국의 왕 프리드리히 2세의 군사 개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군은 이후 근세 유럽국가의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지나치게 적을 많이 만들어버려 7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작센- 스웨덴 연합군을 상대로 초반에는 기가막힌 기동술로 각개격파하는가 싶었지만 다구리 앞에 장사없다고 나라가 사면초가도 모자라서 오면초가를 스스로 자초하는 전략적 악수를 두는데,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사망하고 독빠로 유명한 표트르 3세가 즉위해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기사회생하여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위기에서 탈출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시절 프로이센군은 병력의 규모에선 프랑스 러시아에 뒤졌지만 병력의 질은 최강이었다. 특히나 혹독한 훈련으로 사격 속도가 빨라서 타국의 군대는 숙련병이 1분에 2번 정도를 사격하는 동안 프로이센군은 1분에 3번씩 사격할 정도로 단련을 시켜놨기 때문에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수의 적군을 물리치는 것이 가능했다. 또한 종대-횡대 전환과 행군 능력도 타국 군대에 비해 뛰어났기에 비슷한 수 또는 그보다 많은 수의 적군을 빠른 기동으로 격파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이면서 장군을 겸했던 덕분에 명령체계가 간소했고, 군제면에서도 포병과 기병대의 운용은 타국에 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절 부터 프로이센 군대는 유럽에서 최정예로 꼽히게 된다. 재밌는건 이 당시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국이라고는 하나 프리드리히 대제 시절에 와서야 강국의 위치 오른 것이라 경제력이 딸렸다. 이때 프로이센의 군비 문제를 해결해 준 국가가 있으니 영국이었다. 영국은 숙적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무려 군비의 20%를 지원해주었다.

7년 전쟁에서 극적인 회생이후 프로이센은 또다시 거대한 전쟁의 휘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프랑스에게 혁명이 일어났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프랑스를 침공하지만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발미 전투에서 혁명군에게 완패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해 바타비인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자 기겁한 프로이센은 폴란드 분할에 집중할겸 바젤조약을 맺고 이탈한다.

혁명 전쟁과 이어 발발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은 처음에 하노버 왕국의 땅을 보장한 프랑스 편을 들지만 제 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당시 프랑스가 불리해보이자 뒤통수 각을 잡는다. 프로이센군은 프랑스 국경에 집결하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에게 최후 통첩까지 작성해서 대사가 이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에 반전이 생긴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전격 침공해 오스트리아군을 박살내고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해 달려온 러시아 제국군까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처참히 깨부섰다. 황급히 프로이센은 최후 통첩을 승전을 축하하는 전갈로 바꿔 나폴레옹에게 전달하지만 나폴레옹의 반응은 '느그 축전 주소만 바꿔서 가져온거 안다'였다. 이후 영국과 강화를 모색하던 나폴레옹이 기존에 약속했던 하노버 왕국의 영토를 영국에게 다시 넘겨주겠다고 하자 프로이센 주전파는 펄펄 뛰었고 결귀 나폴레옹과 전쟁을 개시하게 된다. 하지만 프로이센 주전파의 생각과 달리 프로이센군은 연전연패하며 라인강 유역의 영토를 깡그리 빼앗기는 등 완벽하게 패배한다. 1806년 10월 8일에 발발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완패하며 전쟁 발발 6일만에 정규군을 거의 몽땅 상실하고, 2주하고 하루가 지난 23일에는 베를린을 나폴레옹에게 내주는 굴욕을 겪으며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는 프랑스군에게 절대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했던 프로이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추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8]의 개혁으로 일반참모 신설, 장교단에 부르주아나 평민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를 모방하여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군을 재건한 끝에 1813년부터 해방전쟁에 돌입하여, 1815년에는 블뤼허 원수 등의 지휘하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과 힘을 합쳐 나폴레옹프랑스군에게 승리한다.[9] 물론 다른 나라도 폭도들 하는짓 우리도 따라해야 하냐라는논란 끝에 따라하면서 비교우위는 무너진다. 한편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로이센 등지에선 다시 상비군으로 돌아갔는데, 전통적인 국왕에 충성하는 군대와 달리 새로운 병력에 불순세력(?)들이 침투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개혁으로 먼저 18세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부터 장수한 똥별들을 대거 퇴역시키고 징병제를 실시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타국의 군대도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중요한 개혁 내용으로는 육군 일반 참모부, 후에 독일군의 핵심역량이라 불리는 참모체계가 이때부터 시작되며 독일군의 지휘방식으로 유명한 임무형 전술(Auftragstaktik)의 기반이 이 때에 닦였다.

이전 까지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으로 장교단에서 부르주아 출신들이 배제되었지만[10] 이러한 제한이 철폐되고[11] 이후 육군 일반 참모부는 프로이센의 장교 중에 핵심 두뇌 인력들이 소수정예로 교육받아 프로이센군이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군사강국으로 군림하는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군의 전반적인 작전이 정치나 외교상의 문제에서 '행동의 자유'를 보장 받기에 이르러 군국주의화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12]

이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프랑스군을 섬멸하며 황제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하는 등 대승을 거둠으로써 강군의 이미지를 굳히고, 전쟁에서의 승리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제국을 탄생시키게 된다. 헬무트 폰 몰트케로 대표되는 육군 참모부의 효율성과 능력이 또 다시 확인되고, 유럽 각국은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서까지 프로이센 육군을 연구하고 참모 체계를 모방하는 계기가 된다.

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빌헬름 2세는 아버지 빌헬름 1세비스마르크대 몰트케가 만들어둔 독일군으로 유럽 정복이 가능하다는 심각한 오판을 저지른다. 빌헬름 2세는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서 전통적으로 약하였던 해군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여 영국이 심각히 우려할 정도로 키워냈다. 이후 사라예보 사건을 빌미로 터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초기 서부전선에서 영불 연합군,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양쪽 전선 모두 선전하였고, 특히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보조가 맞지 않는 러시아군을 섬멸하는 등 대승을 거둔다. 특히 슐리펜 계획이라고 불리는 회전문 효과를 이용한 기동 전술은 전쟁 초기 프랑스군을 상대로 큰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의 제1차 마른 전투를 시작으로 영불 연합군의 반격에 의해 전황이 고착되어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선은 지나치게 분산되었으며, 해군은 유틀란트 해전에서 영국 본국함대(The Home Fleet)의 순양전함군을 상대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작 가장 큰 위협인 전함군에는 손해를 입히지 못하고 퇴각, 그 이후로는 손실을 두려워한 나머지 더 이상의 결전을 포기하고 항구에 틀어박혀 히키코모리짓을 하는 등 전황이 점점 나빠진다. 그래서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을 러시아로 돌려보내 혁명을 유도하여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또한 공군에도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루프트바페를 창설,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오스발트 뵐케등 여러 에이스를 배출해내며 전쟁 중반기 까지 포커 Dr.1, 알바트로스 전투기를 중심으로 협상국 공군을 상대로 뛰어난 근접 전투력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영불 연합군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무리한 대공세를 시도하다가 실패, 이후 서부전선의 붕괴가 시작되고 자살에 가까운 출동 지시에 분노한 수병의 반란과 이어진 혁명으로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6. 전간기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로 독일 제국은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다. 전간기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의 규모가 10만으로 제한되고, 각종 신무기, 예를 들어 잠수함, 전차, 전투기등의 보유가 금지되었다. 게다가 독일군의 두뇌 역할을 한 참모본부의 설치도 금지되었다.

당시 육군의 지휘자인 한스 폰 젝트는 베르사유 조약의 여러 조항들을 교묘히 피하며 군의 정예화와 첨단화를 이뤄냈다. 이를 위해서 여러가지 기만책을 실시하였는데, 참모본부와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이름이 다른 기관을 만들고, 장교의 선발이나 교육을 강화했으며, 당시 공산정부가 세워진 소련과 비밀 조약을 맺고 소련의 철의 장막안에서 여러 무기를 시험했다. 이 교류는 히틀러 집권 전까지 계속된다. 이때 전차 전술을 훈련하기 위해 자동차에 양철판이나 마분지를 씌운 모의전차로 연습한 것은 유명한 일화. 또한 공군 조종사들은 항공 스포츠 클럽으로 위장하여 훈련을 행했다.

이 시기 연합군이 개발한 전차(탱크 Tank)의 운용법을 연구하거나(당연히 보유 자체가 금지돼 있는 장비), 비밀리에 신무기 개발을 하는 등(포병 사거리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한 장거리 로켓병기의 개발을 위해 로켓 연구가들을 후원한다거나) 차후의 전쟁에 대한 전술 및 작전술 연구는 오히려 승전국 이상으로 충실해져 갔다. 그러나 독일에게 매우 불리한 조건의 베르사유 조약 하에서는 허용되는 안정적인 수준의 군사력을 확보한다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국가를 확실히 방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1920년대 후반에 이미 나와 있었다.[13]

이 때문에 결국 군은 문민통제 하에서 최소한의 자위 능력 확보를 우선시하고 모든 분쟁은 정치 및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의 군 상층부에서 나왔으나, 이는 소수 의견으로 그쳤다.[14] 즉 독일군, 특히 육군은 1차 세계대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의 질서 재편과 이를 주도할 독일 육군의 영광에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이런 망상에 가까운 발상은 결국 예전부터 정치적 센스가 형편없었던 독일군의 전통과 절묘하게 결합, 히틀러를 자기들이 제어할 수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결국 전 세계에 헬게이트를 여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히틀러가 등장한 후 독일군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으나, 1919년부터 1933년까지의 군사적 공백기간은 2차 세계대전 패전 때까지 독일군에게 상당한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전문적인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단은 단 4천 명만이 현직을 유지했고, 이 수치는 사실상 10만 명의 육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수치였다. 이 때문에 독일군은 고질적인 장교 부족에 시달렸다. 장교만이 아니라 훈련된 예비역 병사도 부족해서, 당시 독일이 전시 동원 가능하다고 판단되던 총 남성 인구의 3/4이 군사 훈련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 예비군을 재구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히틀러 집권 이후 창설된 독일 공군은 수장 괴링의 정치적 위치와 욕망 덕분에 빠르게 발전하였으나[15] 육군 출신 장성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컸던 탓에 전술공군으로서의 임무에 특화되어 훗날 2차 세계대전 패전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16] 이에는 육군 소속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를 보낸 육군 장교들이 독일 공군 창군 멤버가 되어 수뇌부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던 탓도 컸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육군에 의한 공군 운용개념 연구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 정립된 전술공군 개념에 얽매여 있었던 것도 함께 작용했다.

해군 역시 에리히 레더 제독의 지휘 아래 빌헬름 2세가 꿈꾸었던 대양 함대를 꿈꾸며 Z 계획을 실시하였다. 이를 위해 영국과 주력함 비율을 100:35로 제한하는 협정까지 맺었지만 베르사유 조약 무효화 이후 본격적인 발전의 가속도가 붙기도 전에 바로 전쟁에 돌입하는 바람에 대양함대(Hochseeflotte)의 꿈은 접어야 했다.[17]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간기의 독일군은 1919~1933년까지의 베르사유 조약의 규제로 인해 매우 약체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차 세계대전 이전의 특권 계급적인 위치와 당시 독일 특유의 민족주의적 사고방식, 아울러 형편없는 정치적 센스의 절묘한 화학작용으로 독일이 전 유럽의 패자로서 군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수준의 목적의식을 가진 채 히틀러의 집권을 맞았고, 자신들의 능력이라면 히틀러를 잘 제어해서 한 15~20년쯤 꾸준히 준비를 한 끝에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정복은 몰라도 유럽 정복은 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군사적 역량은 국력에 비해 충분치 않았고,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수립할 능력도 부재한 상태에서[19]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지도자에게 거꾸로 이리저리 휘둘린 끝에 결국은 자신들의 사형 판결문에 자기 피로 사인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다.

7.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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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아돌프 히틀러나치집권 후, 독일군의 군비를 제한하던 베르사유 조약이 철폐되고 재무장이 이루어지면서 독일 육군공군은 대대적인 팽창했고, 육군은 흔히 전격전이라고 알려진 기갑 전력을 활용한 기동 전술과 슈투카를 중심으로 한 막강한 전술공군의 힘으로 제2차 세계 대전초에는 폴란드를 점령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북구 약소 국가들을 차례차례 석권하였다. 그리고 5월 10일 시작된 황색 계획에 의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항복마저 받아내며 사실상 유럽의 절반을 장악했다. 이어서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 반도 침공에서 영국군과 그리스군을 상대로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도 롬멜은 기갑 전력을 활용한 과감한 기동으로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까지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독일 해군의 경우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에서 구축함들을 상실하는 대가로 영국 해군에게 타격을 입히며 독일의 북해 재해권을 보호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영국 침공이 물건너 가고,[20] 노르웨이에서는 안그래도 빈약한 수상함 전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히틀러가 프랑스 항복 이후 계획하였던 바다사자 작전을 취소하고, 독일 해군은 강제적으로 1차 세계 대전 때 활용했던 U보트를 주축으로한 통상파괴 작전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과 북아프리카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해군의 유보트 전단은 전쟁 초기에 영국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육군 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모스크바 코앞까지 도달했지만, 독일군 수뇌부는 최고사령부부터 참모사령부까지 지나치게 자만한 나머지 보급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만다. 바르바로사 작전 발동 초기 독일군 수뇌부는 10월이면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1941년 10월, 독일군은 앞선 우만 전투와 키예프 전투로 전력 재보강이 필요했으며 여기에 소련의 라스푸티차까지 찾아오며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크게 꺾여버린다. 결국 이 자만으로 독일군은 1941년 12월에 모스크바 부근에서 소련군의 역습을 받아 르제프 지역까지 밀려나게 된다. 한편 지중해에서 독일 공군은 크레타에서 폭격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실수를 범하는데 이 때문에 권총 외 개인화기 없이 강하한 공수부대원들은 영국군뿐만 아니라 분노한 크레타섬 주민들에게 학살당하게 된다. 그래도 독일군 최정예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이 모든 악수를 극복하고 크레타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공수부대의 핵심인 7항공사단 병력의 40%를 잃으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는 공수 작전을 일체 금지하는 악수를 두었다.[21] 게다가 히틀러는 멍청하게도 일본의 진주만 공습 후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를 날리면서 미국과 소련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버린다.[22] 그 덕에 소련이 미국의 군사적 원조를 받고, 영국이 본격적으로 대잠전력을 확충하면서 귀중한 전술적 승리를 공수표로 날려 먹었다. 이후 북아프리카에서부터 몰락이 시작되었다. 롬멜은 초기에 과감한 기동전술로 영국군을 농락했지만 지중해 통제권이 영국군에게 있는 이상 보급라인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은 미국으로 부터 받은 물자들을 아프리카에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잘 짜인 방어선에 롬멜이 들이박도록 강요하면서 병력을 소모시키고 대규모 반격을 가해 1943년 봄에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을 몰아낸다.[23] 이어 1942년 모스크바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군은 기세를 몰아 독일군을 쳤다가 막혀버렸고, 독일은 청색 작전으로 소련의 곡창지대인 캅카스까지 진군하여 크림 반도를 점령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남부 집단군의 핵심인 제 6군을 통째로 날려먹으면서 전세의 주도권은 소련이 쥐게 되었고, 북아프리카를 기점으로 한 연합군의 공세로 남부전선도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영국 본토항공전에서 살아남은 영국 공군 기지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은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의 전략폭격을 당하기 시작한다. 1943년 3월 북아프리카 전역의 패배가 확실시 되었을 때 만슈타인의 신들린 기동 방어 전술로 제 3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전세를 뒤집나 싶더니 그대로 그 전력을 쿠르스크 전투에서 말아먹고야 만다. 한편 영국을 말려죽이는가 싶었던 독일 해군의 U보트들도 영국의 해치 호그로 확충된 대잠 전력에 미 해군의 대잠 전력과 해상 전력이 가담하면서 차차 격침된다. 그 이후를 기점으로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을 허용하고 1944년이 되면 소련군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루마니아 일대로 진입하면서 동맹국들이 하나 둘 떨어져나갔으며 1944년 2월부터는 연합군이 머스탱에 추가 연료탱크를 부착하여 전략폭격기들을 호위하기 시작하자 그 이전까지 꼬박꼬박 8~9% 대의 손실을 안겨주던 독일 공군도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1944년 6월 동부 전선에서의 소련의 대반격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독일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아르덴 대공세봄의 새싹 작전까지 실패로 돌아가며 전선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붕괴, 소련군에게 수도인 베를린마저 함락되며 1945년 5월 8일 항복한다. 항복 후 독일은 사회주의 진영인 동독과 서방 진영인 서독으로 분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일군에는 개개의 전술적이거나 기술적인 능력에서는 거의 각 분야별 에이스들이 다 있다고 할 정도로 천재적인 인재들이 정말로 많았다. 이 시기 독일군의 활약상은 전쟁 당시 연합군에도, 종전 후 군사학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많이 미쳤다. 독일군의 업적을 가장 잘 표현하는 통계 자료 중 하나가 미군과의 1:1.4 교환비이다. 미국 전사상 미군이 적군에게 교환비가 밀렸던 것은 갓 독립 선언한 신생국이었던 미국 독립전쟁이 유일한데 독일군은 순수히 육군간의 전투에서는 평균 교환비를 1:0.8로 살짝 앞섰으며 공군까지 끼어도 1:1.4로 매우 선전했고[24] 이후 미국이 치른 수많은 전쟁에서 그 어느 적국도 독일군의 교환비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전차 격파수 1, 2위도 독일 국방군 출신의 쿠르트 크니스펠오토 카리우스가 각각 공인 168대와 150대로 차지하고 있으며 공군의 경우에도 비록 허접했던 소련 공군을 상대로 세운 기록이라지만 352기를 격추시킨 에리히 하르트만부터 세계 121위까지를 독점하고 있는 루프트바페의 에이스, 혼자서 소련군 기갑사단 2개를 전멸시킨 한스 울리히 루델 등 2차 세게대전기 육공군에서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전술적인 면에서도 독일 육군이 선보인 무전기가 설치되어 보병과 대등한 협동 작전이 가능한 기갑 전력을 활용한 기동 공세와 전선을 살짝 후퇴시켜 적의 공세 종말점을 유도한 이후 치고 나가는 기동 방어 전술은 전격전이라고도 불리며 현대 육군 전술에 큰 족적을 남겼고 공군 연략 장교를 배치하여 급강하 폭격기와 연계한 합동 작전 전개, 에반-에마엘 요새와 크레타섬을 굴복시킨 공수 작전, 3인 1편대를 이루던 당대 공군 편대 전술을 깨뜨리는 4인 1개 편대 전술인 로테-슈밤 대형 도입 등 전쟁 중기까지 연합군보다 앞서가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했다. 또한 대공포를 대전차포와 곡사포, 심지어 전차포로까지 사용하는 기행부터, Stg44라고 불리는 최초의 돌격 소총 개발, V1, V2 로켓과 같은 전략 미사일, 비록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연합군의 장난감 취급 받았지만 최초의 무선 자폭 드론 개발까지 나치가 외계인하고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하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무기 역시 뛰어났다. 다만 독일군의 무기 성능이나 기술에 대한 밈화,과장이 지나치다 보니 아예 이를 반박하는 독립된 문서가 장문으로 생성되었으니 https://namu.wiki/w/%EB%8F%85%EB%B9%A0를 같이 참조하여 균형적인 시각을 가지도록 노력하자.

전술적인 수준에서는 연합군을 통틀어도 비슷한 수준의 인재들이 많았음에도 태초에 국가적 한계[25]와 대전략적 차원에서의 오판이 상당했기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앞선 프리드리히 대왕의 양면 전쟁의 실패를 보고서도 또 양면 전쟁 반복하는 실수를 저질렀으며 독일군 장교단 역시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장교들이 그랬듯 전술적 식견은 뛰어났을지 몰라도 전략적 식견은 부족하다는 한계점을 보여주었고 티거를 비롯한 중장비들의 경우 독일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가가 비싸 위력은 강력했을지 몰라도 생산성은 미국의 셔먼이나 소련의 T-34 시리즈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또한 시가전 분대 전술이 기갑 전술과 달리 구식적이었는데 이 덕분에 볼트액션 소총인 Kar98K가 대부분이던 독일군 보병 분대들은 시가전에서 파파샤 소총으로 무장한 소련군이나 M1개런드 반자동 소총으로 떡칠을 한 미군에게 밀렸다. 하지만 전쟁 기간 내내 독일군이 보여주었던 전술과 기술력은 적국에서도 매우 높게 평가받았는데 오죽했으면 2차대전 직후 냉전 체제로 접어들자 에리히 폰 만슈타인 같은 전범을 소련과 자유진영 양측에서 포섭하려고 접선한 사례까지 있었을 정도.

물론 2차 세계대전기의 독일군은 히틀러의 침략전쟁의 주축으로 수많은 전쟁 범죄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슈츠슈타펠의 경우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호하고 열등 민족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나치 집권 이후 강제 수용소 운영과 유대인 권리 박탈에 앞장섰으며 이들로부터 뻗어나온 무장 친위대 역시 심각한 수준의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러한 전쟁 범죄는 친위대에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국방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 2차 세계대전기의 독일을 높게 평가하는 밀덕들 중에는 국방군 무오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폴란드 침공 시기부터 독소전쟁기까지 독일 국방군은 육해공군 모두 가리지 않고 포로 학살, 민간인 및 병원 폭격, 홀로코스트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사료적으로 밝혀지면서 현재는 정면 부인당하고 있다. 이러한 흑역사 때문에 프로이센으로부터 내려온 독일군의 전통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독, 동독 그리고 독일 연방군 모두 그 역사를 부정하면서 단절되며[26][27] 무장 친위대 복무자들은 전적을 인정받지 못하고[28] 강제 수용소에 복무했거나 포로 학살 행위에 참가한 정황이 잡히면 전범재판에 기소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8. 냉전

널리 퍼진 인식과는 달리 1949년 서독 대통령 테오도어 호이스가 절대로 독일군 재창설은 없을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전후 동서독의 전쟁 트라우마는 심한 편이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소련은 동서독의 재무장을 승인했다. 그리하여 1955년 서독이 NATO에 가입함과 동시에 서독의 정규군인 독일 연방군(서독군)이 창설되었다. 독일 언방군은 시작은 1개 대대 수준인 1500여 명이었눈데, 패전으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국내외 여론의 냉대를 받았고, 당시 영국 뉴스에서도 새로운 국방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ATO가 서독에 50만 명 이상의 병력을 갖출 것을 권고하는 등 국제적인 압박으로 독일 사회민주당 등의 야권의 우려와 반대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56년부터 전면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전직 국방군 장교들 역시 재건된 연방군에 복귀하였다. 미국 역시 서독에 M47 패튼 전차와 M48 전차, 군용 전투기 등을 공급하는 등 이를 지원했다. # 한편 동독에서는 독일 연방군이 창설된 것과 비슷한 시기인 1956년 사회주의통일당의 주도로 국가인민군(동독군)이 창설되었다.

서독군은 만약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나토의 전면적 재래식 전쟁이 발생할 경우 최전방 을 담당할 군대였다. 초기 조약군의 제파 전술을 중추로 한 조약군의 기갑 전력에 대응하기 위한 산물로 서독군은 기갑여단 중심의 강력한 육군을 보유했었다. 프랑스군의 경우는 애초부터 2선 전력으로 전선 유지에 투입될 예정이었고, 이탈리아군은 내부 정치적인 이유로 동원되지 않았다. 미군과 영국군은 유럽전선에 도착하는데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덴마크-서독 유틀란트 사령부의 병력만이 1파의 동독군, 유틀란트 반도를 목표로 한 폴란드군, 독일 남부를 담당하는 체코슬로바키아군, 그리고 소련군과 헝가리 등의 국가를 홀몸으로 상대해야만 했다. 이렇게 조약군의 1파 공세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나면 서독군은 재정비를 위해 예비대로 빠지고 영국, 미국, 네덜란드, 벨기에의 병력이 공군, 긴급대응군, 육상의 주전 병력의 순서로 투입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 그렇기에 서독군은 필연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의 산물이 PzH2000 자주포와 레오파르트 시리즈 전차, 게파트 자주대공포 등 현재도 명품으로 취급되는 장비들이다.

동독군도 서독군과 마찬가지로 바르샤바 조약군의 최선봉이라는 입장은 동일했으며, 나토의 진격을 제1선에서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군을 유지한 서독군과 달리 동독군은 공산권 답지않게 소수 정예에 초점을 맞춰 20만 명 선이었다. 물론 동독의 인구가 1700만명인걸 감안하면 20만 이라는 병력도 적다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서독군의 경우 소련에 비해서 종심이 짧은 서유럽을 방어해야 했기에 제파식 전술을 구사하는 바르샤바 조약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두꺼운 방어망을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독의 경우 바르샤바 조약군의 핵심인 소련 영토까지 종심이 매우 길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과 함께 나토군의 공세를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고, 후방에서 전열을 갖춘 주동독 소련군, 주체코슬로바키아 소련군, 주폴란드 소련군, 폴란드 인민군 등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주력 부대가 제파식 전술로 반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상정되었다. 종심이 길기 때문에 밀려도 치명적이지 않다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기갑 전력을 상회하는 나토군의 기계화 전력과 비교가 안되는 공군 전력을 상대로 막아내야 한다는 전술적 부담 때문에 동독군은 군대 자체가 불필요하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보다는 나토군의 강한 기동전력에 대응할 수 있는 소수정예 형태로 운용되어 기계화와 기동력에 중점을 두었다.

9. 탈냉전 이후

냉전 붕괴와 통일로 동독군은 해체되어 각종 물적, 인적 자원은 서독군에 편입되었다. 나토 규격과 안맞는 소련제 장비 등 구 동독군의 장비들은 폐기되거나 우호국으로 헐값에 매각되었다. 동독군 장교들은 정치적인 중요도에 따라 강제 전역하거나, 1계급 강등되어 연방군에 편입되었고, 이마저도 임시 포용책에 불과했다. 그리고 동독군에서 받은 서훈 경력은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29]

동독군 출신 5만명이 독일연방군에 편입되었으나 2년 기간복무자 2.5만명은 93년에 모두 군을 제대했으며 점차적으로 한시적 복무지원으로 그 규모를 감축하여 군사 통합시 동독군 출신들은 99년까지 약 1만 명만이 복무하고 있다.(물론 이는 동독지역에서 유입된 새로운 병력은 고려되지 않은 군사 통합 당시의 동독군 병력만을 의미한다.)

냉전 붕괴로 인한 안보 위협 저하와 미국발 경제위기로 인해 전력을 크게 감축하던 상황이었다. 징병제는 통일이후 사민당(SPD)에 의해서 처음 폐지 논쟁을 겪었으나 의무병역제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지속되었고 9개월을 복무하는 쪽으로 잡았다가 2010년 6개월 복무로 추가감축되었으며 2011년 1월 3일에 마지막 의무복무자원들이 입대하면서 공식적으로 2011년 7월 1일부터 실질적으로 모병제 16만 명선으로 전환하였다. 하지만 연방헌법에는 엄연하게 의무병역제를 명시하고 있으며 유사시 의무병역제로 전환할수 있는 형태로 미국과 유사한 병역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도 영국군에 비하면 아주 형편이 좋은 상태였지만 영국군이 SDSR 2015(Strategic Defence and Security Review 2015)로 한숨 돌리고 군비를 늘리고 있는 반면 독일 연방군은 여전히 상황이 좋지 못하다. 일단 전체적인 국방비가 늘어나기는 했는데 인건비등으로 나가는 비용도 같이 늘어나서 실질적인 도움은 안되고 있다고(...) 보병의 기본장비인 소총도 미래형 소총으로 찬사받던 H&K G36은 치명적 결함이 발견되어 도입 20년만에 퇴출이 결정되어 2018년 새 소총을 채택할 예정이고, 전차는 레오파르트 2A5/6 버전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중고로 수출했으며, 전투기의 경우도 영국이 최대 140여대의 F-35를, 네덜란드도 최대 37대를 주문할 계획인 반면 독일은 아직 계획이 없다. 그나마 노후화된 토네이도를 대체하려고 F-15 계열과 슈퍼호넷 중에서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30] 또한 오랜 평화와 군축으로 인해 군기도 많이 해이해진 상태로, 심지어 네오나치 세력이 군 내에서 암약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가능하면 해외 파병은 자제하였으나,[31] 93년 나토의 코소보 공습 때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동참하였다. 1994년에 연방 헌법재판소는 '기본법의 방위는 독일의 국경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위기에의 대응이나 분쟁 방지 및 전 세계에서 독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필요한 행동을 가리킨다.'라고 판결함에 따라 보스니아의 평화이행군(IFOR)에 3700여명, 97년 3000명의 전투병을 보스니아 평화안정군(SFOR)으로 파병하여 독일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소말리아 해역과 미국의 아프간 전쟁에 4400여명을 파병하여 전투 임무를 비롯한 다목적 임무를 수행했다.

해외파병이 잦아지자 신속대응군으로 규정된 해외파병 목적의 합동군 부대가 96년초기 4만명이었지만 현재는 10만명으로 증강된 상태이며 앞으로도 이 규모가 확대될 전망이다. 하지만 꾸준한 감소세 문제와 더불어서 2014년까지 독일연방군은 지상군만 해도 3개 사단은 넘지 않는 규모로 대폭 축소되어 있지만 러시아의 동유럽으로의 팽창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리비아 내전 당시의 유럽군의 현실을 겪으면서 독일군의 현재 규모의 한계 문제에 대한 논란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016년 5월 10일에 독일 정부는 2023년까지 7000명의 군 인력을 증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게다가 테러위협이 늘어나자 징병제를 부활시킬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독일내에서는 반발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독일 정부는 안보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는 2024년까지 병력을 19만8천명으로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9월 15일에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국방장관은 요르단의 독일주둔군 기지를 방문하면서 중동에 장기주둔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독일군이 징병제를 폐지한 지 7년이 되면서 군병력이 줄어들자 EU시민권자를 채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발 새로운 세계질서 재편에 맞춰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2019년 1월 17일에 독일 현지 언론은 독일의 무기 수출이 큰폭으로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2020년 7월 8일, 훼글 국방위원이 군 극우세력을 우려하며 징병제 부활을 제안했다.

2020년 7월에 탄약이 사라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2021년에 내부 보고서에서 드론전을 치를 경우 아제르바이잔에게도 질 수 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10.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하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스웨덴, 핀란드에 대한 협박에 이어 핵카드까지 꺼내들자 독일도 드디어 국방비 증액을 선언하고 국방력 강화에 나섰다.[32] 현지시간 기준으로 27일 숄츠 총리가 올해 국방 예산으로 135조 지출할 것이라고 밝혔다.[33]

실제로 숄츠 총리의 재무장을 선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군수 기업 중 하나인 라인메탈사가 독일 정부에 한화로 약 56조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제안했는데, 그 내용은 대략 10년 가량의 시간 동안 전차, 장갑차, 군용트럭, 헬기 등의 현대화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라인메탈사의 CEO인 아르민 파페르게르(Armin Papperger)가 직접 말하길,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철강이나 알루미늄 등의 자재를 비축시켜놨으며 생산라인 확장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 재무장관 역시도 자신의 이러한 의지를 밝혔다. #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는 미국의 F35기 35대를 독일이 구입할 것이라고 현지시간으로 14일에 밝혔다. #

상술한 F35기 외에도, 재무장을 위해서 무장 UAV와 대형 수송 헬기, 신형 드론, 토네이도를 대체할 전폭기, 새로운 공통 설계 잠수함 도입 등 여러 움직임을 보일 예정이다. #

애로우-3 미사일 도입을 결정했다. 2025년부터 독일에 배치될 예정이다.
"타우러스로 크림대교 공격 가능"…러, 독일군 녹취 공개해 파문 / 연합뉴스TV (YonhapnewsTV)
"크림대교 미사일 공격" 독일군 녹취록 공개 파문 / YTN
독일 공군 참모총장과 작전·훈련 참모, 장교 등 4명이 암호화되지 않은 화상회의 플랫폼에서의 대화를 했는데 이 녹취를 러시아가 공개했다.
[글로벌K] 독일군 녹취록 유출 파문에 총기난사까지…‘악재’ 잇따라 / KBS 2024.03.05.
사이버군으로 격상하고 통합작전사령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2024년에 6월 15일을 재향군인의 날로 정하고 현역·예비역 군인과 가족에게 각종 지원과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가결했다.# 전후 처음으로 참전 용사를 위한 기념일 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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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역대 편제



[1] 단, 이건 게르만 군대가 갈리아 군대보다 강군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게르만인들이 겨우 철제 검 들고 우왕ㅋ굳ㅋ하며 부러질 때까지 써먹는 동안 갈리아인들인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정예 귀족전사계층까지 완성해 놓았다. 이는 게르만족이 사는 게르마니아에 비해 상당히 농업생산이 좋은 갈리아 지역 자체의 풍족함등이 기인했다. 그리고 갈리아는 게르만보다 더 빨리 기병대를 양산했다. 그러나 갈리아의 유력부족인 아르베르니와 아이두이가 자기들끼리 치고 박느라 귀족전사 계급이 싸그리 몰락. 이 참에 아리오비스투스가 이끌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이 한 숟가락 걸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이 때 아이두이족의 요청을 받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개입하며 게르만족은 말그대로 개작살나게 되고 2번이나 로마군에게 역으로 침공당하는 수난을 겪었다.[2] 동쪽으로는 파르티아가 있었지만 파르티아의 경우 로마에게 있어서 게르만족 처럼 오직 전쟁으로만 해결이 가능한 적국이라기 보다는 외교로 어느정도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가상 적국으로 간주했다. 물론 그러나 이런 외교 전략은 적극적으로 서진을 추진한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바뀌게 된다.[3] 이때 아라우시오 전투에서 무려 8만 명의 로마군이 몰살당하고 이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들이 겁에 질려 패닉 상태에 빠졌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킴브리 전쟁 항목을 참조.[4] 덕분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유가 로마의 고귀한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 게르만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배운다면 로마의 쇠락은 단순히 게르만족 유입만이 원인이 아니라(오히려 로마군에 입대하는 게르만족도 상당히 많았던지라 게르만족의 유입이 마냥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복 전쟁으로 유지되던 국가 재정의 불안전성, 군인들의 정치 개입, 사산조 페르시아의 등장과 훈족의 남하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5] 정확히 말한다면 교황이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프랑크 왕국의 군주였던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로 대관식을 해주었던 것이 프랑크 왕국의 분열로 잠시 끊겼다가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 시기에 다시 부활하며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즉, 따지고 본다면 자칭이라 하긴 힘들다.[6]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아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바로 러시아 제국의 전신 루스 차르국모스크바 대공국의 시조이다.[7]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있는 브란덴부르크가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이자 실질적인 중심이었다. 프로이센 공국을 칭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독일 왕국에 속했는데 독일 왕국에서 왕을 칭할 수 있는 존재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뿐이었다. 그래서 제국 외부에 위치한 프로이센 공국의 이름을 빌려 왕을 칭한 것이다. 실제로 호엔촐레른 가문 군주들과 프로이센 왕국의 융커계층은 프로이센 공국-동프로이센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 문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나면 동프로이센은 내다 버리고 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슐레지엔이나 제대로 지키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8] 샤른호르스트는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습격하다가 전사하여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자신이 개혁한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 군대를 이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9] 프랑스군의 장점으로는 나폴레옹 같은 전투의 천재도 있었지만, 원래도 전통적인 육군 강국으로 많은 인구와 경제력으로 상비군 규모에선 최강이었고 한술 더떠 대규모 인력을 모을 수 있는 징병제의 역할도 컸다. 나폴레옹 등장 전에 1793년 라자르 카르노가 의용군을 기존 상비군(30만)과 합쳐 혁명군 75만 명을 징집했는데, 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는 상비군이 20만 정도였다.[10] 국왕보다는 돈에 충성하는 천박한 장사꾼들이란 고정관념과 토지귀족과 거주민이라는 프로이센 군제와 충돌되는 여러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 자제들만으로는 장교 수요를 채우기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한적으로는 받아들인다.[11] 샤른호르스트, 클라우제비츠도 평민 출신이다.[12]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은 프로이센 이후 독일 제국이 군국주의 사회였다는것을 부정하기도 한다. 오히려 군에서는 소수정예와 효율성을 내세워서 육군의 규모가 독일보다 인구 규모가 3분의 2에 불과했던 프랑스 60만보다도 더 적은 55만에 불과했다는점을 들기도 하는데 전반적으로 나라에서 군의 위치가 특별하고 국민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경쟁국인 프랑스에서는 군인의 사회적 지위도 낮고 장교라고 해도 사회적 보상이 적었다.[13]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한다는 전제 하에선 폴란드의 공격을 방어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며, 최우선 가상 적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에 대해서는 아예 답이 없었다.[14] 특히 이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실무를 맡았던 슐라이허는 1934년 돌격대 숙청과 동시에 다른 반나치 인사 상당수와 마찬가지로 자택에서 나치의 정치 테러를 당해 죽었고, 이에 대해 독일군 장교단은 자군의 유력한 장성이 백색 테러로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침묵함으로서 독일 국가에 대한 군부의 주도권을 부정하려 했던 내부의 배신자에게 간접적으로 복수했다. 단, 슐라이허는 일시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를 지낸 적도 있었으며 나치와 협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리어 당시 독일군 내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정치군인이기도 했으므로, 어떤 의미로는 나치를 지지한 얼간이들보다 더 악질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15] 나중의 삽질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괴링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다. 생존한 독일 에이스들도 이 당시의 괴링에 대해서는 나쁘지 않게 보는 경우가 많다. 괴링이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한 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한 이후이다. 당시 육군은 공군을 가리켜 "당(黨)의 공군"이라 부르며 비웃었다.[16] 실제로 전략폭격에 이용되는 4발 중폭격기를 보유하지 않았다. 전략공군 개념은 주로 해군국에서 발달했으며 독일 공군의 경우 1차 세계대전 때 이미 전략공군을 운용해 보았으나 그 성과가 미미하다는 것을 절감한 데 이어 스페인 내전 참전경험으로 전략공군이 무용지물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실제로도 전략공군의 가치는 압도적 물량 우위 하에서만 의미가 있으며 독일은 그런 산업능력이 없었지만,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아직 가능성이 있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근데 전쟁 초기 영국군의 전략폭격이 대부분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면 신뢰가 안 갈 만도 하다.[17] 당시 해군이 생각하고 있던 개전 시점은 45년 정도로 그때쯤은 돼야 프랑스나 영국등과 붙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1942년 시점에선 통상파괴를 중심으로 한 제한적인 함대결전도 시도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18]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 최고사령부:1933~1945(김홍래 역)"에서 매우 잘 정리하고 있다.[19] 원래부터 독일군 자체가 전략적 기획력이 부족한 체질이었던데다, 실무를 완성할 전문 참모장교단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개전을 했고, 종전 때까지 이 문제는 계속해서 악화되기만 했다.[20] 이는 영국측의 효과적인 대응과 독일 공군의 중전투기 성능 열세, 최고 사령부와 괴링의 전략적 식견 부족이 원인이었다. 독일은 초기에는 영국 공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이 기습적으로 베를린을 폭격하자 열받은 히틀러와 괴링은 기존의 공군 기지와 군수 공장을 대상으로 했던 폭격하던 것을 민간인 지역을 보복 공습하도록 지시했고 덕분에라고 하긴 이상하지만 가장 위험한 시기 영국 공군은 한숨을 돌리고 독일 공군에 반격을 가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21] 다만 그렇다고 공수부대가 아예 공수훈련과 공수작전을 일체 실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팔시름예거 참조[22] 물론 미국이 진주만에서 일본에게 선빵을 맞은 이상 독일에게도 선전포고 하는 것은 시간 문제이긴 했지만, 독일에게 선전포고할 구실을 찾고 국민들을 설득할 때까지 벌 수 있었던 시간을 히틀러가 친절히 먼저 선전포고를 날려주며 미국의 수고를 덜어준 것이다.[23] 바로 이 부분이 롬멜이 과연 원수급 지휘관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롬멜이 뛰어난 지휘관인 것은 맞지만 한 전역을 담당하는 야전군 사령관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발터 모델이나 에리히 만슈타인, 클루게, 클라이스트와 같은 뛰어난 야전군 지휘관들과 달리 롬멜은 보급을 간과하고 자신의 군단을 지나치게 몰아붙인 나머지 영국군의 소모전에 속절없이 당했기 때문이다.[24] 다만 미군은 대부분 공격전이었고 독일군은 대부분 방어전이었음을 감안하면 공격자 입장인데도 교환비가 살짝 밀리는 것에 그친 미군이 오히려 더 대단한걸수도 있다.[25] 사실 총력전은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산업능력, 경제력과 직결된다. 그런 면에서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양면 전쟁을 펼치게 된 시점에 독일의 패배는 예정된 것과 다름 없었다.[26] 이 때문에 크롬웰 시기부터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여러 영국군 부대들이나 프랑스군과는 달리 현재 독일군 부대들의 경우 역사의 시작을 전쟁 이후 시점으로 잡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베를린 근위 연대로 창설된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의 경우 아예 해산되었으며 구 제국군의 역사를 계승하던 국방군 육군 1사단과 3사단의 역사도 현재 그 어느 연방군 부대에서도 계승하고 있지 않다.[27] 다만 일부 전통이나 칭호는 계속 이어받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독일 국방군 공군 소속 공수부대들은 2차 대전 동안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한 것에 대해 연합군에서 녹색 악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를 현재까지 독일 연방군에서는 공수부대가들과 함께 사용하고 있다.[28] 대표적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미하엘 비트만의 경우 현재 독일 연방군은 그 전적을 일체 인정하지 않고 있다.[29]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으로부터 받은 서훈의 경우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서훈 내역만 인정할 뿐 전공으로 쳐주지 않는다. 그리고 히틀러의 사병조직이었던 무장친위대의 경우 서훈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30] #[31] 이는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한 탓이다.[32] 한편 이렇게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하자 역사적인 사건들과 연관되어 여러가지 밈이 만들어지고 있다. #[33] 참고로 한국이 2022년 기준 약 54조원이다.[34] 육군항공대 상세 편제, 부대 배치표, 해군 비행선부대[35] 공군 조직 구조, 해군항공대[36] 해군 조직 구조[37] 부대 목록[38] 역대 육군 부대 목록[39] 역대 해군 부대 목록, 1989년 편제[40] Lwstruktur 6 계통도, 역대 공군 부대 목록[41] 제40공수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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