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군벌 몽타이 군의 수장 장치푸 張奇夫 | Zhang Qifu | |
본명 | 장치푸(張奇夫, 장기부) |
출생 | 1934년 2월 17일 |
사망 | 2007년 10월 26일 (향년 73세) |
별명 | 쿤사(ခွန်ဆာ၊ ဦး / Khun Sa) |
지위 | 몽타이군 사령관 |
비고 | 샨족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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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의 군벌, 일명 '마약왕'으로 '쿤사'는 샨족 방언으로 '번영하는 왕자'라는 뜻의 별명이고 본명은 장치푸(張奇夫)다. 샨족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몽타이 군의 수장이었다.2. 생애
2.1. 초기
1934년 중국계 화교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엔 불교 수련생으로 잠깐 공부한 것 빼고는 별다른 교육도 받지 못하고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국부천대의 혼란기 속에 중국에서 패배한 중국국민당 잔당은 윈난성에서 미얀마로 패주했는데 이때 샨족의 영토로 들어온 국민당 장교에게서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고 중화민국군 잔당의 장교로 자라났다.1963년경 국민당 잔여군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군대를 꾸렸고 이때 태국군과 충돌한 국민당 쪽의 난민들과 군인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장수천이라는 중국인 참모를 얻었는데 그는 다방면에서 활약하며 쿤사를 보필했다. 한편 그는 아편 재배와 밀매로 돈을 번 뒤 라오스와 태국의 암시장에서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넘쳐나던 무기를 사들여 무장을 강화하여 독자적인 군벌로 떠올랐으며 세태에 맞게 잘 처신했는데 반군과 미얀마 정부군을 오가면서 자신의 세력을 길렀다.
1967년 국민당 잔당과 라오스 접경지대에서 마약 이권을 두고 한바탕 전투를 벌였는데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던 라오스 왕국군이 개입하여 그와 국민당 잔당군 둘 다 패퇴시켜 버렸다. 이 사건으로 그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감소하였고 결국 그는 다른 샨족 무장 투쟁 조직과의 동맹을 고려하게 되었다.
2.2. 샨족 독립운동의 시작
1969년 당시 미얀마의 소수민족 탄압에 저항하여 무장투쟁을 하던 샨족의 군대는 쿤사를 설득하여 샨족 편으로 오게 하였고 그는 이를 수락하였지만 회의 내용이 미얀마 정부군에 유출되어 체포되었다. 화가 난 그의 부하들이 러시아 의사를 납치하여 그를 석방하도록 요구했지만 이는 거절되었다. 그는 나중에 태국의 총리가 되는 태국 장군인 끄리앙삭 차마난의 중개를 받아 1974년에 석방되었다.[1]이후 본격적으로 샨족과 연합하여 샨족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인 태국 치앙라이주 반힌땍에 본부를 두고 미얀마-태국을 오가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 아편과 헤로인을 생산해 판매하였다. 여기서 생산된 4호 헤로인은 쌍사지구표(雙獅地球標)라는 이름으로 팔렸고 높은 순도 때문에 블랙마켓에서 유명세가 높았다.[2] 이때 베트남 전쟁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많이 들어왔는데 이들의 중개로 미국에 헤로인을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3]
이 돈으로 샨족 자치주의 사회 인프라 시설을 확충하고 교육과 의료, 복지에도 신경을 써 쿤사는 확고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부패한 태국과 미얀마 관리들을 매수하여 그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편의를 얻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헤로인 밀매가 계속되고 한때 미국 헤로인의 60%가 쿤사에게서 나온다는 말까지 나오자[4] 이는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게 하였고 결국 미국은 태국을 압박하여 그의 제거를 사주했다. 태국 정부는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군대를 동원해서 본격적으로 전투를 치렀고 쿤사는 태국에서 물러나 미얀마 호몽으로 후퇴했다.
2.3. 몽타이군의 설립
1982년경 미얀마로 밀려난 쿤사의 군대는 현지 공산 반군 및 지역 군벌을 격퇴하고 순식간에 미얀마-태국 국경지대 지역을 장악했다. 공산 반군들과 그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가 국민당 잔여 세력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미얀마나 태국 정부가 공산 반군들을 싫어하여 그에게 공격을 사주했기 때문이다.[5] 정부 입장에서 보기 좋은 행동을 했고 미얀마, 태국의 정부 인사들에게 뇌물도 많이 뿌렸기 때문에 쿤사의 마약 사업은 상당수 묵인받을 수 있었다.1985년 자신의 샨 연합군(SUA)과 또 다른 샨족 반군인 모헹의 타이 혁명회의(TRC)를 합병하여 정식으로 몽타이군(MTA)을 세웠다. 이후 마약 무역을 재개하고 미얀마-태국의 정부 인사들과 다시 우호를 다졌는데 특히 한때 싸웠던 태국 정보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다시 수립했다.
1987년에는 미국의 요구로 미얀마가 토벌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유야무야 넘어가기도 했다. 이미 그는 미얀마 정부군과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돈으로 매수도 잔뜩 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샨족 독립운동을 지휘했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독립은 어려운 상태였고 자치를 보장받는 선에서 미얀마 정부와 협조하기로 했다.
1988~89년경 호주 언론인이나 미국 언론과 인터뷰를 했는데 자신의 군대의 세력을 2개 사단급인 2만명이 넘는다고 자랑했다.[6] 마약 밀매로 얻은 쿤사의 재산은 50억 달러에 달했고 헤로인 밀매 이권은 연간 60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번 돈을 이용해 군대를 무장시켜서 장비도 좋았다. 공습을 막으려고 대공 미사일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 DEA는 쿤사의 목에 2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2.4. 몰락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쿤사는 1991년 모헹이 죽자 몽타이군에 대한 그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걸 느꼈다. 이에 샨족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어 1993년경 샨족의 독립국가를 세우고 샨족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나 몽타이군 내부에서 쿤사의 지도력에 의심을 가하고 그가 마약 이권을 위해 샨족 독립운동을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1993년 ~ 1995년경 결국 미국의 압력을 받고 겸사겸사 샨족 독립운동을 진압하려는 미얀마군과 싸우게 되었고 몽타이군과 미얀마군의 교전으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거기다가 내부 분열까지 일어났는데 쿤사가 먀악 수입을 제대로 배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몽타이군의 일파가 따로 떨어저 나가 독립하기도 했다.
와족의 와방연합군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군사력을 소진했고 헤로인 루트가 여러 군데 생기면서 쿤사의 수입도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내우외환이 계속 일어나고 수입도 감소하자 쿤사는 결국 전부터 우호를 다지고 있던 미얀마 군부의 고위급 장군들과 몰래 회담을 가졌다. 쿤사는 안전과 완전 사면을 보장받는 대가로 1996년 미얀마 정부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군대의 해산을 선언하고 완전 항복하였다. 미국은 그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했으나 미얀마 정부에 의해 단칼에 거절되었다. 특히 샨족을 회유하려는 미얀마 정부의 생각에 따라 쿤사는 명예 장로 칭호를 받고 재산도 보전받았다.
2.5. 항복 이후
쿤사의 항복으로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 재배가 일시적으로 감소했으나 이후 그의 항복을 수긍하지 못한 샨족 군벌의 잔여세력[7]과 와족의 와방연합군 등이 삼합회와 손을 잡고 다시 재배하여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은 완전히 뿌리뽑지 못했다.이후 쿤사는 여러 사업을 하고 미얀마 정부의 감시 하에 있었지만 막대한 재력을 이용해 미얀마에서 편한 여생을 보냈다.[8]
2007년에 사망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생전 당뇨, 심장질환과 고혈압 등 많은 지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화근이 된 것으로 당시 언론은 추정하였다. 사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물려받아 미얀마에서 저명한 사업가 가문이 되었다.
3. 여담
-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쿤사 역의 인물이 출연한다.
- 만화 블랙 라군에서도 언급된다.
- 직접적으로 타국에 마약을 수출하지는 않고 다른 나라의 마약 조직들에 도매하면 그들이 알아서 소매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홍콩 삼합회와 중국계 마약 조직, 미국인들이 그렇게 연결되었다.
- 한국 MBC가 쿤사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기사
- 북한이탈주민 출신으로 중국에서 지하종교 활동을 하다가 천안문 6.4 항쟁 이후 미얀마의 쿤사 영역으로 도피해 교회를 세우고 종교활동을 했던 문충일과의 인연도 있다. 문충일이 일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망명하려고 하면서 쿤사 조직의 정보를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타겟이 됐고 결국 급히 태국으로 도망쳐서 한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M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문충일을 안다며 단지 교회를 세우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말하고 해칠 이유가 없으며 건드리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써 주었다.[9] 문충일 일가족의 생환기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2년 2월 24일 방영분에서 다뤄졌다. 영상 다만 관련 내용에 관해 미흡했다는 시청자들의 지적이 많았던 건지 재방송 및 다시보기에선 마지막 부분에 관련 내용에 관한 보충 자막이 추가로 삽입되었다. 보충 자막에는 초반부에 언급하고 대충 넘어간 문충일의 아들에 관한 내용과 쿤사의 해체 및 사망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 그의 본부가 있던 태국의 반힌땍에는 그가 샨족에 베푼 각종 자선과 사회 인프라 확충, 복지로 인해 그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워낙 가난한 동네에서 그만큼 지역 사람들을 챙겨준 사람도 없다고 한다. 2007년 그가 사망했을 때 추모 의식도 가졌고 그의 일대기를 다룬 박물관도 있다. 한겨레 기사
-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편 재배에 세금만 매기지 직접 생산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아편에 대해 반대하며 샨족에 대한 처우 개선과 미얀마 민주화 등 여러 협상이 된다면 아편 농사를 전부 없애 버리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겉으로 하는 말을 다 믿을 순 없지만 실제로 샨족들이 아편을 피우는 것에 대해선 엄격히 금지했다고 한다.[10]
[1] 나중에 쿤사는 그 보답으로 차마난 장군의 선거에 정치자금을 두둑히 기부했다.[2] 원래 이 상표는 영연방에서 생산되던 Double Lion 안전성냥의 유사품이었던 성냥 상표를 라오스의 한 마약상이 모방한 것인데 쿤사가 꿰차서 중국어 문구를 붙여 팔았다. '유사품에 주의(提防假冒)'라는 문구와 밀수가 잘 되기를 바라면서 붙인 문구인 '일범풍순(一帆風順)', 헤로인 블럭에 양각된 '999'라는 순도 표시 등이 특징이었다. 북한도 이 상표를 (아마도 도용 혹은 이어받아) 붙인 헤로인을 생산 및 판매하다가 수 차례 세계 수사당국에 적발된 바 있다.[3] 베트남 전쟁 기간에는 심지어 미군 수송기로 마약을 미국에 옮긴 사례도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실화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 아메리칸 갱스터에 관련 일화가 나온다.[4] 미국의 헤로인 무역은 크게 쿤사의 골든 트라이앵글과 마피아의 프렌치 커넥션을 통해 이뤄졌다.[5] 미얀마 군사정부도 사회주의 독재 정부였지만 네 윈이 설립한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의 군사 독재에 맞서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도 백기 공산당과 적기 공산당의 저항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정부가 공산 반군을 탄압하는 기묘한 상황이 일어났다.[6] 18,000명의 병력, 5,000명의 예비군, 8,000 명의 지역 민병대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7] 대다수의 몽타이군이 쿤사를 따라서 정부에 항복하고 무기를 내려놓았지만 일부 샨족 군사 지도자들은 쿤사를 미얀마 정부에 항복한 배신자라고 비난까지 했다. 이들은 나중에 샨주군(Shan State Army)을 만들었다. 이들은 분열과 합병을 거쳐서 샨주군 남부(Shan State Army - South)라고 개칭한 뒤 현재도 샨족 반군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8] 중남미의 마약 카르텔 두목들이 대부분 비참한 말로를 맞은 것에 비해 그가 편한 인생을 보낸 건 그가 단순한 마약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군벌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미얀마 군부와 서로 싸우면서도 뒤로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9] 그러나 이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충일의 아들 문철이 변사체로 발견되었고 MBC에 앞서서 문충일을 취재했던 시사저널은 쿤사 측에서 저지른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다.[10] 사실 마약 사업을 하는 전문 카르텔들은 원료 재배지의 마약 사용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감시하는 경우가 많다. 장기적으로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고 본인들 내부에서 마약중독자가 나와봤자 좋을게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