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1:43:28

페이퍼클립 작전

1. 개요2. 상황
2.1. 전쟁의 끝2.2. 나치 독일 과학자2.3. 그 외
3. 문제점4. 앨런 덜레스5. 매체

1. 개요

Operation Paperclip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실시된 미국 전략사무국(OSS)의 나치 독일 주요 인사 포섭 작전. 페이퍼클립이라는 작전명은 나치 독일 과학자, 정보기관 출신의 인물들의 명단을 클립으로 표시해 놓은 것에서 유래했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OSS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OSS가 폐쇄되고 CIA가 미국의 정식 정보기관이 된 후 페이퍼클립 작전과 유사한 나치 독일 과학자 포섭작전을 1955년까지 수행하였는데[1] 전리품으로 나치 독일의 과학기술과 유능한 과학자들을 포섭하였다. 특히 항공역학, 로켓기술, 화학무기, 화학반응기술, 의약품에 대한 과학기술을 중점적으로 획득하였고 이에 관련된 과학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2. 상황

1945년 4월에 아돌프 히틀러자살하고 5월 7일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이후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베를린 분할통치가 시작되었는데 4개국은 독일의 행정권, 통치권을 수행하였고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숨어있던 나치 독일의 고위급 인사들은 전부 체포되었다.

나치 독일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쟁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이른바 신무기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하지만 당시 과학력의 한계 상 나치 독일 측에서 연구하던 무기의 대부분은 실용화되지 않았다. 종전 시점까지도 기술실증 단계를 겨우 거친 수준이 대부분이었으며 핵무기는 대전 중 완성하고 실전에 투입했던 미국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의 일부 기술은 추축국 출신 망명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독일의 과학기술 중에서는 제트 항공기, 대공 미사일, V2 같이 실전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실용화된 기술들도 상당히 존재했으며 이러한 기술들 중에는 독일이 미국보다 다소 앞선 부분도 존재하였고 미국 기준으로만 판단하기엔 전쟁 끝과 동시에 갈 곳 잃은 이들이 차후 미국의 적이 될 국가(소련)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곤란했다.[2] 따라서 전쟁이 끝나자마자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나치 독일이 남긴 여러 '쓸 만한' 기술적 자산들을 수습하고 아울러서 독일의 기술인력을 소련보다 먼저 포섭할 준비를 시작했다.

나치 독일의 비밀무기 저장소와 각종 도면은 곧바로 미국 백악관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사후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을 인계 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상황정리와 냉전의 시작으로 소련을 견제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재빠른 판단을 내렸고 당시 정보기관 임무를 수행했던 전략사무국(OSS, CIA의 전신)에 임무 명령서를 하달하였다. 그 명령서는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될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막고 최대한 많이 포섭할 것을 지시하는 작전 명령서였고 OSS는 즉시 임무를 수행할 요원들을 소집해 브리핑한 뒤 독일에 급파했다. 이 요원들은 독일 현지에서 활동하던 기존 OSS 요원들과 접촉하여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작전의 결과로 많은 주요 인사들이 소련의 손길을 피하여 미국에 무사히 입국하였으나 입국과 동시에 이들이 나치 독일의 과학자들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 미국 여론이 들꿇었다. 하지만 미국 당국은 빠르게 선전선동 작전을 펼쳤고 이들은 주요 언론에 옆집 아저씨의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각종 대 여론공작을 펼쳤다. 동시에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 외 132명의 과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나치 독일의 강압 때문에 협력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탈출하기 위한 과정을 영웅적으로 묘사해 미국의 여론이 이들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이 작전은 후일 오버캐스트 작전 또는 페이퍼클립 작전(Project Paperclip)로 불리게 되었다. 이 작전으로 미국으로 들어온 인사들 중 2/3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나 나치 친위대,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요원이었으나 미국 OSS 요원들이 이들의 전범기록을 삭제함으로써 무사히 미국 입국이 허가되었고 1955년 이후 총 760명 이상이 미국 시민권자로 입국하여 미국 과학계에서 일하게 되었다.

2.1. 전쟁의 끝

1945년 연합군이 독일로 진주하면서 독일 과학자들의 지식과 성취에 흥미를 가졌다. 독일이 항복한 후 2년 동안 미국은 독일에서 전리품으로 기술과 과학 지식에 대한 정보수집에 주력했는데 이러한 기술의 값어치는 현재 시가로 1,000억 달러 수준이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15조 6,000억 원에 이르는 가치의 정보를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포섭된 과학자들은 전후 미국을 위해 일하면서 여러 과학적 성과를 냈고 대표적으로 베르너 폰 브라운새턴 V를 개발하여 우주 경쟁의 하이라이트인 문 레이스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포섭된 일부는 나치 전범인 게 들켜서 추방당하는 등 토사구팽을 당하기도 했다.

2.2. 나치 독일 과학자

페이퍼클립 작전이 모집한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다. 폰 브라운은 미국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설계했는데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독일의 V-2로켓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폰 브라운은 1937~1945년까지 독일의 악명 높은 피네문데의 로켓 연구센터의 기술 감독으로 일했는데 이곳에서 대공 미사일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A-4로켓(V-2 로켓의 원형)을 개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NASA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페이퍼클립 작전이 진행되면서 ‘외국 기술자와 전문가’ 642명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폰 브라운이 데리고 온 로켓 기술자 132명은 단일 그룹으로 최대 규모였다.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이송된 과학자의 상당수는 친(親)나치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튀어 루돌프(Arthur Louis Hugo Rudolph)로 그는 새턴 로켓 팀의 또 다른 주축 멤버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노예 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수용소의 공장 감독을 맡았던 인물로 당시 공장 일꾼으로 동원된 노예들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렸고 지나친 노동으로 과로사하는 일이 허다했다.

미국은 초기 평가에서 루돌프를 ‘100퍼센트 나치주의자’라고 평가했고 그를 억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루돌프는 1984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서독으로 망명해 1996년 1월 1일 함부르크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페이퍼클립 작전에는 나치의 악명 높은 생체 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례로 쿠르트 블룸은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유행병 백신을 실험했으며 몸이 아픈 죄수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전후 미국으로 건너와 미 육군 화학전단에서 일했다.

이와 함께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실행된 인체 실험을 감독하고 지휘했던 발터 슈라이버 소장은 미 공군 의과대학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1952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미국을 빠져나가 나치에 비교적 우호적인 아르헨티나이주했다.

2.3. 그 외

Horten Ho229 전투기는 발견된 후 노스롭 그루먼 사로 보내져서 시험대상이 되었으며 소련군에게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시설은 파괴되었다. 물론 이를 살펴본 노스롭의 반응은 제트엔진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1940년에 전익기 N-1M을 비행시킨 기록이 있다.

미국은 독일 점령지에서 특히 항공역학(Aerodynamics), 로켓기술(Rocketry), 특히 V1V2 로켓 프로젝트[4], 화학무기(Chemical Weapons), 화학 반응기술(Chemical Reaction Technology)과 의약품(Medicine)에 관심이 많아 생포한 과학자들과 그들의 가족을 비밀리에 미국으로 이주시켰다.

여기에는 NSDAP와 나치 친위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전쟁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들이 소련군에 넘어가서 소련에게 협력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정식 허가나 비자 등이 없이 비밀리에 확보된 장비와 함께 이주시켰다.

이들이 미국 과학계로 진출한 뒤인 1958년에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설립되었고 초기 직원 8,000명 중 나치 독일 과학자에서 이주한 과학자들은 대략 500명 가량이었는데 이들은 텍사스의 Bliss 요새, 뉴 멕시코의 White Sands 등에 분산시켜 유도 미사일과 탄도 미사일 기술을 전수받았고 이것은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설립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원천 기술이 되었다.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페네뮌데(Peenemuende) 비밀기지에서 V2 로켓을 개발하던 자신의 로켓팀(The Von Braun Rocket Team)연구원들 중 132명을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미국으로 데려왔다.

본 작전과의 직접적 관련성은 없지만 페이퍼클립과 비슷하게 이시이 시로가 이끌던 일본 731 부대의 연구 자료를 거액으로 거래하여 관련 인물들이 사면받는 등의 사례도 있었다.[5]

페이퍼클립 작전과 관련된 사항을 소개한 책으로 애니 제이콥슨이 저술한 <오퍼레이션 페이퍼클립>이 있으며 2016년에 한국에서도 정식 번역하여 출간했다.

2차 세계대전의 독일 기술력은 어디로 갔는가?

3. 문제점

좋은 목적이 나쁜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요? 설사 결과가 좋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요"
사서함 1142: 미국의 비밀 나치 수용소 -中-
(가디언)‘It’s absolutely insane’: the US-based camp where Jews guarded Nazis
(뉴욕타임스 오피니언)Why Do Stanford, Harvard and NASA Still Honor a Nazi Past?

페이퍼클립 작전은 미국에게 막대한 실리를 가져다줬지만 윤리적으로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나치에 부역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 단지 능력이 있고 미국이 그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채용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수많은 나치 부역자들을 경력을 거짓으로 조작해 가면서 적극적으로 영입해갔다.[6] 물론 이는 영국, 프랑스, 소련도 마찬가지였지만 "페이퍼클립 작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국의 작전이기 때문에 미국의 오명이자 왜곡이다.

미국은 당시 닥치는 대로 나치 독일 출신 과학자들, 심지어 군인까지 영입했다. 결국 그 중 일부는 아무리 미국에 도움이 됐지만 전쟁범죄가 너무 심해서 미국조차도 결국 독일로 재추방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넷플릭스에서 출시된 단편 다큐 <사서함 1142: 미국의 비밀 나치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모순을 꼬집었다.

따지고보면 그 좋은 목적이라는 것도 미국의 국익이란 점에서 잘 쳐줘봐야 가치중립적인 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스케일이 국가 단위인 사익을 위해 나쁜 수단을 사용한것이다. 좋은 목적도 아닌데 나쁜 수단을 쓴 것으로 정당화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당연하지만 미국의 국익은 하느님의 뜻도 인간이 지켜야 할 정언명령도 아니다.

4. 앨런 덜레스

앨런 덜레스(Allen Dulles)는 1945년 페이퍼 클립 작전 당시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의 정보원이었고 OSS 베를린 지부장이었으며 페이퍼 클립을 비롯한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 정보원으로 크게 활약했다. 훗날 CIA의 국장이 되었고 CIA를 강한 정보기관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동시에 쿠바 침공 실패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해고되었으며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에 CIA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5. 매체

  • 아웃라스트에서 작중 만악의 근원인 모포제닉 엔진의 기술과 핵심 인사인 베르니케 박사를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얻었다고 언급된다.
  • 미국 드라마 엑스파일에도 등장하는데 시즌 3 에피소드 2에서 잘 차려 입은 남자가 페이퍼클립 작전을 통해 외계인 혼합종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 스나이퍼 엘리트 시리즈에서는 해당 작전이 직접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임무 내용들 중 일부는 영락없는 페이퍼클립 작전과 일치한다. 사실 상기한대로 해당 작전의 이름은 나중에나 붙여졌고 시행 당시엔 그냥 긴급작전 A였으니 의외로 고증에 맞는 셈이다.
  •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가 이 페이퍼클립 작전의 결과로 미국 과학기술 고문이 된 나치 전범이다. 원래 이름은 메르크뷔어디히리베[7] 아직도 나치 시절 버릇이 남아 있다. 오른손이 시도 때도 없이 나치식 경례를 해 댄다거나, 도살이란 단어에 강세를 준다거나, 대통령을 총통으로 지칭하다가 정정한다거나, 나중에 갑자기 휠체어에서 번쩍 일어나면서 "Mein Führer! 내가 걸을 수 있다니!"라고 외친다거나...
  • 레드 아이즈에 등장하는 최종 보스 율리안 크레이즈의 세력인 루미스 왕국이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독자적인 무기 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걸 본 레온 리다스는 도시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라며 레드 아이즈 세계관의 나치 제국인 GNR이 몰락하고 이들을 위해 일하던 과학자들이 처형되려고 할 때 어느 귀족이 이들을 몰래 빼돌렸고 이 귀족이 루미스 왕국의 일원이 될 때 이들도 같이 가문을 이루며 루미스 왕국을 섬기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 남북 전쟁에서 남부(아메리카 연합국)이 승리해 미국이 21세기까지 흑인을 노예로 부리는 극악한 인종차별 국가가 된 대체역사 모큐멘터리 C.S.A.: 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에서 나치에 우호적 중립을 표방한 아메리카 연합국이 나치가 패망하자 ‘아리안 엔젤’ 프로젝트를 발동하여 나치 전범들과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와 달 착륙에 성공한다고 묘사된다.
  • 더 뷰로: 기밀 해제된 엑스컴의 등장인물인 하인리히 드레스너 박사 역시 전직 나치라서 동료 과학자들에게 멸시받는다. 작중 선인을 대표하는 앨런 위어 박사와 연구윤리로 다투는 걸 보면 근거 없는 멸시는 아니다. 본인 주장으로는 땅 파먹고 살수도 없었고 공산당에게 조국을 뺏길 수도 없었다고. 나치의 만행을 알게 된 건 이후라고 한다. 본래는 얄타 회담에 따라 소련에 인도되어야 했지만 마이론 폴크에 의해 미국으로 이민오게 되었다.


[1] 페이퍼 클립은 흩어진 종이한 곳에 모아놓게 하기 위한 용도임을 의미한다.[2] 실제로 소련도 전후에 오소아비아힘 작전을 통해 2천명에 달하는 과학자를 포섭했는데 여기는 한술 더 떠서 지형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아예 가족들도 같이 데려가고 연구시설까지 뜯어서 기차에 싣고 갔다고 한다.[3] 실제 인원은 이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4] 미국은 로버트 고다드가 최초로 현대적인 의미의 로켓을 개발했는데 무시했다가 V2 로켓을 보고 로켓의 가치를 깨달았다. (V2 로켓을 조사한 고다드는 자기 기술을 훔쳤다고 결론을 내렸고 브라운도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점은 인정했다.)[5] 인체실험 데이터는 소련에 넘어가면 치명적이고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 미국의 구미를 당겼다.[6] 애초에 미국이 이들 과학자들의 경력을 거짓으로 조작해 세탁한 이유도 나치 출신 과학자들을 조작 없이 미국으로 바로 데려갔다간 거센 반발이 일어나기 때문이였다. 즉 미국도 이들을 데려가는 게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7] Merkwürdigliebe. '이상한 사랑'이란 뜻으로 영어인 스트레인지러브와 같은 의미.[8] 하필이면 스트러글이란 말은 나의 투쟁과도 연결되어 있고 약자를 따면 SS다.[9] 미래를 아는 한국인인 유진은 빨갱이 몰이에는 해명할 경우 오히려 변명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