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02:15:35

클라우스 바르비

<colbgcolor=#000><colcolor=#fff> 클라우스 바르비
Klaus Barbi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laus_Barbie_September_1930.png
이름 니콜라우스 "클라우스" 바르비
(Nikolaus „Klaus“ Barbie)
출생 1913년 10월 25일, 독일 제국 고데스베르크
사망 1991년 9월 25일, 프랑스 리옹
복무 친위대 (1935년 ~ 1945년)
최종계급 SS 대위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2차 대전 당시의 행적 - '리옹의 도살자'2.3. 남미로의 도피2.4. 볼리비아에서의 행적들2.5. 체포와 최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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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클라우스 바르비.jpg 파일:노년의 클라우스 바르비.jpg
나치 시기 말년의 재판에서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프랑스에서 SS 대위 계급의 게슈타포로 활동하면서 레지스탕스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볼리비아도피하여 갑부가 된 것도 모자라 군부 정권의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의 악행들이 어느 정도로 잔혹했냐면 별명이 '리옹의 도살자(Schlächter von Lyon, Butcher of Lyon)'였으며 사디스트라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나치 중에서도 유난히 가학적이었던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1913년 10월 25일 고데스베르크[1]에서 교사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훗날 광신적인 게르만 민족주의자가 되는 것과는 별개로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문은 프랑스계였다.[2]

본래는 신학을 전공할 것을 꿈꾸던 비교적 평범한 청년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당시 목에 총을 맞은 후 PTSD에 시달리던[3] 아버지가 1933년에 사망하면서[4]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1935년에 나치 친위대에 가입했는데 곧 능력을 인정받아 보안국(SD, Sicherheitsdienst)으로 발령받았고 1937년에는 공식적으로 나치당원이 되었으며 1940년에는 레기네 빌름스[5]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1남[6] 1녀[7]를 얻었다.

2.2. 2차 대전 당시의 행적 - '리옹의 도살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는 독일이 점령한 외국의 치안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로 파견되었다가 1942년에는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지역으로 파견되어서 리옹 지역을 총괄하는 게슈타포 지도자가 된 후 리옹의 테르미누스 호텔에 게슈타포 본부를 세웠다.

그는 온갖 잔혹한 고문 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실제로 호텔의 스위트룸을 고문실로 개조한 후 하술할 엽기적인 고문들을 자행했는데 내용들을 보면 그의 잔혹성은 어느 의미에서는 그 오스카 디를레방어와 비슷한 수준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는 부하들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취조하는 사람들을 고문했는데 실제로 수감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수감자들을 고문할 때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수감자들에게 하술할 끔찍한 고문들을 자행했는데 매우 잔혹한 내용들이 많으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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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감자들에게 뼈가 부러질 정도로 무자비한 구타와 채찍질을 가했다. 스파이크가 박힌 쇠사슬로 사람을 때리기도 했으며 알몸의 수감자를 찬물 욕조에 강제로 담그거나 끓는 물을 붓는 등의 물고문도 자행했으며 수감자에게 사냥개를 돌진시킨 후 무자비하게 물게 하거나 안에 못이 박힌 수갑을 손에 채운 뒤 이를 세게 조이기도 했다.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불에 달군 바늘로 손톱 밑을 찌르기도 했고 전기고문을 가하거나 아예 불로 지지기도 했는데 심지어 사냥개를 시켜 여죄수들을 수간하게 하는 등의 성고문도 자행하고 가톨릭 목사까지 전기봉으로 지진 것도 모자라 한 여성 레지스탕스는 아예 직접 강간하기까지 했다.

문 경첩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 수감자의 손가락을 밀어넣고 모든 손가락 마디가 부러질 때까지 문을 계속 두들겨대는 엽기적인 가혹행위도 저질렀으며 심지어 마르셀 오퓔스 감독의 1988년작 다큐멘터리 영화 <호텔 테르미누스>에 나온 마르셀 곰펠(Marcel Gompel, 1882~1944)이라는 유대인 레지스탕스의 딸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자신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곰펠이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자 곰펠을 거꾸로 매단 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후에 얼굴을 암모니아 양동이에 담갔다. 이 때문에 곰플은 3일 후에 사망했다.

게다가 그는 어린이들에게 유난히 극악무도한 악행들을 자행했다. 그 일례로 13살밖에 안 된 소녀를 1주일 동안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아이들을 '그들의 입과 코와 귀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때리거나 굶긴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성적으로 학대하기도 했다.

독일계 유대인 아이스크림 행상인 두 명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단순한 체포로는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재떨이로 한 명을 때려 죽이고 다른 한 명은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으며 1943년에는 동년 여름에 독일 경찰 2명을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22명의 인질을 게슈타포 건물 지하에서 총살한 것을 포함해 최소 40명을 총살했고 덤으로 프랑스의 게슈타포 직원 20명과 그의 프랑스인 여자친구였던 앙투아네트 "미미슈" 뮈로(Antoinette „Mimiche“ Murot)도 살해했다.

심지어 1944년 4월 6일에 명령을 내려 게슈타포를 보내 리옹 근처의 이지외(Izieu)라는 마을에 있는 산간 학교에 숨어 있던 중 아침 식사를 하던 4세~17세 가량의 유대인 아이 44명을 7명의 유대인 성인들과 함께 '자루마냥' 무자비하게 트럭으로 던진 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송시켰는데 이 '어린이 식민지'를 발견했다고 상관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보고했다. 이렇게 이송된 아이들 42명과 성인 5명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가스실에서 사망했고 가장 나이가 많은 미성년자 2명과 성인 1명도 에스토니아탈린으로 끌려가 총살됨으로서 최종 생존자는 성인 1명[8]밖에 없게 되었다. 40명이 넘는 무고한 어린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이 악행은 후에 나치로서 그를 언급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종전 시기까지 14,311명을 체포하여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뮬랭[9]을 위시한 4,342명을 살해하고 7,591명의 유태인을 추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추방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나치의 수뇌부는 그러한 그를 마음에 들어했는데 하인리히 힘러는 그의 행위에 편지까지 보내면서 감사를 표했고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했다.

2.3. 남미로의 도피

종전 후 그는 악행의 대가를 곧바로 치르지 않았는데 연합군에 의해 전범으로 수배받던 1945년 말에 전 친위대원들과 함께 나치 출신 레지스탕스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암시장 거래와 강도에도 가담했고 연합군에게 저항하고자 했으나 당연히 이에 참여하려고 하는 일반인들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1947년 초에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체포되었다. 참고로 이 무렵에 그는 클라우스 베커(Klaus Becker)라는 가명을 쓰면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이렇게 체포된 그는 게슈타포 시절 얻어낸 독일의 공산주의 세포조직들에 대한 첩보를 미국에 넘기는 것으로 사법거래를 시도했고 소련의 세력 확대를 걱정한 미군 측이 그의 첩보능력을 높이 사면서 1947년 4월경에 CIC에 고용했다.

물론 그의 악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프랑스는 1947년과 1954년에 2번의 궐석재판을 통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미국 측에게 그를 인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군 측은 이를 거부하고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n)이라는 가명을 주고 볼리비아로 피난시켰다.

2.4. 볼리비아에서의 행적들

1951년 4월 23일에 볼리비아에 도착한 그는 1957년 10월 7일에 볼리비아 국적을 얻었고 볼리비아 제3의 도시인 코차밤바에서 벌목 회사와 해운 회사를 운영하며 큰 부자가 되었다. 참고로 그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운영한 해운 회사는 볼리비아 최초의 해운 회사였다고 하며 남아메리카의 군사독재 정권에게 무기와 마약을 밀매하며 돈을 벌었다.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해운 회사가 파산하자 페루로 잠깐 이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돈을 번 그는 보안군 강사 겸 고문으로 일하면서 군부 독재자들과 친분을 가지며 군부 정권에 부역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무기 거래 회사도 운영하면서 볼리비아 군대에 오스트리아에서 대량으로 주문한 탱크나 무기를 거래해 육군 중령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물론이고 1964년부터 군부 독재자들에게 자신이 쓰던 고문과 심문 기법을 전수하기도 했고 마약 카르텔에게 무기를 밀거래하기도 했으며[10] 볼리비아의 반정부 인사들(군부정권의 악행에 대해 이야기한 언론인도 포함)을 납치하고 고문한 후 '실종'시키는 행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모자라 군사 쿠데타 지원을 위해 극우 성향의 준군사 조직까지 만들어줬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전수해 준 '기법'은 볼리비아 군사정권이 자행한 좌익 단체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더욱 강화시켜줬다.

사실 1971년에 전범 사냥꾼 클라스펠트 부부[11]에 의해서 그가 볼리비아에 은신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1972년 1월 19일에 프랑스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고 그도 TV에 모습을 드러내 '전쟁범죄로 여겨지는 어떠한 행위에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궤변을 남기면서도 나치의 친위대원이었단 것은 인정했지만 프랑스와 볼리비아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조약이 맺어지지 않은 데다 볼리비아는 그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고 생각되어 그는 볼리비아에 그대로 있을 수 있었다. 이후 프랑스 정부가 그에 대한 인도를 요구했지만 볼리비아 정부는 그가 '볼리비아인'이란 것을 근거로 들면서 이를 거부했다.

그는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서독의 외국 정보 기관인 BND에서 코드명 '아들러(Adler)'로 일하면서 남미에서 온 최소 35개의 보고서를 제공하기도 했고 1967년에는 체 게바라의 체포와 처형을 계획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심지어 1980년 7월 17일에 루이스 가르시아 메사(Luis García Meza, 1929–2018)가 '코카인 쿠데타'로 집권할 때도 그가 모집한 용병이 가담했다고 한다.[12]

여담으로 볼리비아에서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가 나치즘반유대주의의 '확고하고 광적인 신자'였다고 회고했는데 실제로 요제프 멩겔레아돌프 아이히만아르헨티나도주하는 것을 돕고 그들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전직 나치들과 함께 나치 부흥을 위한 조직까지 만들기도 했다.

2.5. 체포와 최후

사실 그를 사살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2번이나 있었다. 먼저 1972년에는 레지스 드브레[13]와 모니카 에르틀[14]이 세르주 클라스펠트 부부와 구스타보 산체스 살라사르[15]의 도움을 받아 그를 납치하여 프랑스로 데려오려고 했으나 납치를 위해 고용한 택시가 사고를 당해서 실패했으며 그로부터 3년 뒤인 1975년에는 그에게 아버지를 잃은 유대계 프랑스인인 미셸 코조골드베르(Michel Cojot-Goldberg)가 인터뷰를 가장해 그를 만난 후 총살하려고 했으나 총을 쏘려고 했던 순간에 총을 쏘지 못했고 1980년에는 이스라엘모사드가 암살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성사되지 못했다.[16]

그러나 살아 올 동안 오만 악행들을 다 저지르고도 떵떵거리면서 살아온 그에게도 드디어 몰락의 순간이 찾아왔는데 1982년 10월 10일에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Hernán Siles Zuazo, 1914~1996)가 이끄는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 그는 납품해야 했지만 납품하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 정부에 미화 1만 달러의 빚을 졌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1983년 1월 19일에 프랑스로 끌려간 후[17] 1984년에 기소되었고 1987년 5월 11일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 비견될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끈 재판이 시작되었다.[18]

이 재판에서 그의 변호사였던 자크 베르제[19]는 전후 알제리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과 1982년에 이스라엘이 저지른 학살을 근거로 그의 죄를 부인한 것도 모자라
"바르비의 행동은 전 세계 일반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동보다 나쁘지 않으며 그의 재판은 선택적 기소에 불과하다."
고 우겼다. 바르비 본인은 이지유 마을에서의 만행을 포함한 자신의 죄악들을 모두 부인한 것은 물론이고
"내 구금은 불법이기 때문에 프랑스법이 허용하는 대로 청문회에 다시는 출석하지 않겠다."
고 우겨 댄 것도 모자라 한술 더 떠 재판 과정에서 730명[20]이라는 수많은 증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하느님의 보좌 앞에 섰을 때 무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후회할 게 뭐가 있나. 나는 제3제국 최고의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것이 자랑스럽고 1,000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온 것의 1,000배는 되었을 것이다."
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을 남겼다. 당연히 이러한 주장들은 무시되었고 1987년 7월 4일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리옹의 감옥에 수감된 그는 백혈병, 척추염, 전립선암에 시달리다가 1991년 9월 25일 감옥에서 78번째 생일으로부터 정확히 1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실제로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고 딸의 방문에 '집착'한 것처럼 보였다고 하며 딸의 증언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다정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인 <노 브레인 레이스>에서도 언급되는데 참가자 가족이 바비 박물관이라고 알고 들어간 데가 바로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이었다.[21]


[1] 현 바트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오늘날에는 (Bonn)의 일부이다.[2] 비슷하게도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 당시 볼라 학살을 저지른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였다.[3] 이 때문에 바르비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으며 실제로 바르비는 유년기에는 학대도 상당하게 받았다고 전해진다.[4] 아버지가 사망하기 반 년 전에 그의 동생도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5] Regine Willms, 1916~1982. 남편의 송환 직전에 암으로 사망했다.[6] 클라우스게오르크 알트만, Klaus-Georg Altmann, ?~1981. 1968년에 프랑스인 여성과 결혼해 세 자녀를 두었지만 1981년에 행글라이딩 사고로 사망했다.[7] 우테 메스너, Ute Messner, 1942~[8] 레아 펠드블룸(Léa Feldblum, 1918–1989). 이 산간 학교의 관리관이었으며 아우슈비츠에서 요제프 멩겔레가 주도한 생체실험을 당했는데도 많은 상처를 입긴 했어도 살아남았다.[9] 참고로 바르비는 뮬랭의 사망이 자기의 고문이 아닌 1940년에 수감되었을 적에 자살을 위해 목을 찌른 상처가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했다.[10] 실제로 파블로 에스코바르도 바르비의 '반공 활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호의적이었다고 한다.[11] 아내 베아테 클라스펠트는 1966년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나치의 선전부에서 근무했던 경력을 지닌 서독의 총리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의 뺨을 때려서 체포된 경력이 있었다. 2012년에는 남편 세르주 클라스펠트가 좌파당 소속으로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2015년에 나치 전범 체포에 기여한 공로로 부부가 함께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12] 참고로 메자는 단 1년 만에 1천 명을 죽인 독재자였으며 '코카인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답게 집권 기간 동안 공식 정부 수출액의 2배에 달하던 8억 5천만 달러 가량의 코카인을 수출했다고 한다. 물론 이 마약 밀매 때문에 볼리비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결국 1981년 8월 4일에 사임하며 짧은 임기를 끝마치게 되었다.[13] Régis Debray, 1940~,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공무원, 혁명이론가. 볼리비아에 있을 때 체 게바라와 동료로 있으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사회주의 전술과 전략적 교리를 분석하며 정리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기에는 외무 분야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14] Monika Ertl, 1937~1973. 볼리비아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의 여성 게릴라. 체 게바라가 이끌었던 민족해방군(ELN)에서 활동하면서 1971년에 함부르크에서 체 게바라의 처형을 지시하고 그의 손을 자른 대령 출신으로 볼리비아 영사로 있었던 로베르토 킨타니야 페레이라(Roberto Quintanilla Pereira)를 암살하여 ''체 게바라의 복수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3년 5월 12일에 그녀는 볼리비아 보안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후 살해당한 후 암매장되었다. 참고로 그녀의 아버지는 나치 독일의 선전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며 수중 카메라와 스키에 장착할 수 있는 카메라를 발명한 한스 에르틀(Hans Ertl, 1908~2000)이었다. 에르틀 일가는 나치 협력 전적 때문에 독일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볼리비아로 이주한 것이었으며 볼리비아에서 한스 에르틀은 바르비와 친하게 지냈다.[15] Gustavo Sánchez Salazar, 1928~, 볼리비아의 언론인이자 정치가.[16] 정확히는 원래 모사드는 칠레로 도피하여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휘하 비밀경찰의 자문을 하던 전직 SS 중위 발터 라우프(Walter Rauff, 1916~1984, 유대인 처형을 위한 독가스 트럭의 설계에 참여한 인물이었다.)를 먼저 암살하려고 했지만 라우프의 집에 있던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짖자 라우프의 가정부가 낯선 사람이 왔다고 라우프에게 알렸고 이를 안 칠레가 볼리비아에 '안보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할 것을 염려한 이스라엘 당국은 바르비의 암살을 포기했다.[17] 참고로 1983년 3월 5일에 감옥으로 면회를 온 외동딸을 본 바르비는 딸에게 "피곤하고 지치고 아프다"고 말했다고 한다. 출처[18] 참고로 개요에 있는 바르비의 노년기 사진이 바로 바르비의 재판 첫 번째 날에 촬영된 사진이다.[19] Jacques Vergès, 1925~2013. 알제리 전쟁 당시 프랑스에 대한 테러 혐의로 기소된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을 변호한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샤를 드골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반나치 저항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1994년에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였던 카를로스 더 자칼을 변호했고 1998년에는 홀로코스트에서 600만 명이 죽은 것을 '신화'라고 폄하한 로제 가로디(Roger Garaudy, 1913~2012, 참고로 이 사람도 레지스탕스 출신이었다.)를 변호했으며 2008년에는 민주 캄푸치아의 주석이자 킬링필드 이론의 창시자였던 키우 삼판의 재판에서 삼판을 변호하면서 '악마의 대변자'라고 불리면서 지탄을 받았는데 이에 대해 "고발이 더 무거울수록, 의사가 모든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변호의 의무는 더 커진다.", "만약 조지 W. 부시아리엘 샤론과 같은 인물이 유죄를 인정한다면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나름의 해명을 했다.[20] 이들 중에는 레아 펠드블룸을 포함한 바르비로부터의 생존자들과 바르비의 희생자들의 친척들도 있었다.[21] 그도 그럴 것이, 바비 인형의 영어 철자도 바르비의 성과 똑같은 'Barbi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