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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제2SS기갑군단 군단장 빌헬름 비트리히 Wilhelm Bittric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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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2월 26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베르니게로데 (現 독일 작센안할트주 베르니게로데) | |
사망 | 1979년 4월 19일 (향년 85세) |
독일 바이에른주 볼프라츠하우젠 | |
국적 |
|
신장 | 180cm |
직업 | 군인 |
복무 | 독일 제국 육군 친위대 |
최종 계급 | 무장친위대 대장[1] |
경력 | 제2SS기갑사단 사단장 |
1941년 10월 15일 ~ 12월 31일 | |
제2SS기갑군단 군단장 | |
1944년 6월 29일 ~ 1945년 5월 8일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이다.2. 초기 행적
독일 중부 베르니게로데에서 영업 사원의 아들로 태어난 비트리히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제국군에 병사로 자원 입대하였고, 자질을 인정받았는지 1915년 현지임관하여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6년 항공대로 전속되어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해 제226 항공 분견대와 제37 전투비행대대에서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후 1920년까지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가,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했고,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에 입대하여 1925년부터 1930년까지 소련 영토의 독일군 비밀 군사 기지로 파견되어 전투기 조종사 교관으로 일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독일의 전투기 보유 및 전투기 조종사 육성이 금지되자 소련에 땅에서 비밀리에 공군 육성을 하게 된 것이다. 1930년부터 1932년에는 군무원으로 일했고, 1932년 7월 1일엔 친위대에 입대해 이어서 나치당에 입당했다.[2] 1932년 10월 31일 부터 친위대 비행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이후 여러 대대의 지휘관을 맡았다가 대령 계급으로 전쟁을 맞이하게 된다.3. 제2차 세계 대전
3.1. 대전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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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 중장 시절의 비트리히 |
3.2. 대전 후기
1944년 7월 10일, 비트리히는 7군 사령관으로 영전한 파울 하우서를 대신하여 제2 SS기갑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하인츠 회네의 저서 "SS의 검은 명령(The Black Order of the SS)"에 따르면, 1944년 7월 15일에서 16일 밤, 비트리히는 에르빈 롬멜과의 회동에서 영미 군 사령부와 협력하여 병력을 지크프리트 선으로 철수시키는 계획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비트리히는 1941년 동부 전선에서 자신을 지휘했던 에리히 회프너 장군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으로 인해 1944년 8월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독일군의 종말이다! 독일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 고위 장교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총살형을 받았어야 했다.
이런 말을 한 까닭은 교수형은 치욕스러운 처형 방식이고 군인으로써 명예로운 처형 방식은 총살형이었기 때문이다. [3] 이 말은 힘러에게 곧바로 고발되었고, 힘러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직위에서 해임시키려 했다. 그러나 비트리히의 상관들, 즉 제5기갑군 사령관 하인리히 에버바흐 장군과 발터 모델 원수가 거절하여 이는 불발된다.1944년 6월에 다시 제2 SS 기갑군단[4]의 군단장으로 부임한 비트리히는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했다. 8월 엔 캉에서 미군에게 포위당했었지만 돌파에 성공했다. 이 일은 히틀러의 호감을 사 그에겐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이 내려졌다.[5] 독일군이 네덜란드로 후퇴한 뒤 9월 17일에 영국군이 마켓 가든 작전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비트리히의 제2 SS기갑군단이 진을 치고 있는 아른험에 낙하했는데, 비트리히의 군단도 사실 기갑군단이라고 하기엔 기갑장비도 많이 부족했고 군단 외 독일군들도 모델 원수가 특유의 유능함을 발휘해 여기저기서 간신히 긁어모아 조직한 탓에 양질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몽고메리를 위시한 연합군 사령부가 작전을 워낙 개판으로 짜놓은데다가 독일군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실책을 범했고, 무엇보다 연합군 공수부대들에겐 불행하게도 직접 맞닦뜨린 비트리히가 하필 공군 교관 출신에 노련한 기갑지휘관이었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비트리히의 격퇴전에 밀리고 말았고, 이것은 서부전선의 독일군에겐 마지막 승리였다.
1944년 12월 16일부터 제2 SS기갑군단은 요제프 디트리히 휘하의 제6 기갑군의 일부로 벌지 전투에 참가했다. 이 작전에서 비트리히는 제9 SS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제2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및 국방군 소속의 총통 호위 대대를 지휘했다. 벌지 전투에서 그와 독일군은 초기에 나름 선전했지만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이후 제6 기갑군과 비트리히의 제2 SS기갑군단은 1945년 2월 헝가리로 이전했지만 발라톤 호수의 공세에서 소련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는 것에 실패한 이후 제2 SS기갑군단은 비엔나 방어 임무를 맡았다. 1945년 4월 2일 도시 공격이 시작된 후, 비트리히는 1945년 4월 9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로부터로부터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비엔나를 사수하라는 옥쇄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같은 날, 그는 명령을 무시하고 비엔나에서 부대를 철수시켜 다뉴브 강 운하 뒤로 재배치하여 비엔나 구시가지의 무의미한 파괴와 그의 사단들(제2 SS기갑사단, 제9 SS기갑사단, 제44 보병사단, 제6 기갑사단)의 피해를 막았다. 이후에도 OKW로부터 비엔나를 탈환하라는 추가 명령이 내려왔으나 불가능이나 다름없었고 비트리히는 이를 그냥 무시했다. 비트리히는 서쪽으로 철수하였고, 1945년 5월 8일 오버외스터라이히 근처에서 그의 군단 잔존 병력과 함께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
4. 전후 전범재판 및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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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비트리히 |
석방된 비트리히는 바이에른의 슈타른베르크 호숫가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 병으로 더 이상 일할 수 없었고 무장친위대 출신이었기에 연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므로 그와 그의 아내는 뮌싱 시에서 지급하는 복지 수당으로 생활해야 했다. 1957년부터 그는 전직 무장친위대 상조협회에 참여했다. 1966년, 그는 요제프 디트리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했다.[6] 1970년대에 상조협회 의장을 역임했던 비트리히는 1979년 4월 19일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몇 년 전에 사망한 그의 아내 옆에 있는 뮌싱의 묘지에 묻혔다.
5. 미디어
마켓 가든 작전을 다룬 영화인 <머나먼 다리>에선 오스트리아의 배우 막시밀리안 셸이 비트리히 역할로 나오기도 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연합군 수송기들을 보면서 "한번이라도 저런 힘을 가져볼 수 있다면.."이라고 한탄하거나 충분히 영국군을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항복 사절을 보내는 등[7] 망한 전쟁에 대해 회의를 품는 모습으로 등장.6. 둘러보기
[1] SS Obergruppenführer und General der Waffen-SS[2] 돌격대에서 잠시동안 회원이었다.[3] 실제로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독일군 장성들이 총살형을 요구한 바 있었고 이것이 기각되자 괴링이 반발하여 음독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4] 제9 SS기갑사단과 제10 SS 기갑사단 배속[5] 재밌는건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히틀러 암살에 성공했다면 그가 쿠데타 측에 동조했을 수도 있다는 설이 존재한다.[6] 다만 그는 복무 당시 무장친위대의 두 파벌인 하우서파와 디트리히파 중 전자에 속하긴 했었다.[7] 그런데 영국군이 포로 수용을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며 자기들이 포로가 되버렸다..